나쁜 생각‘를 지지하며
< 甲 > 이라고 해서 모두 진상을 부리는 사람은 아닐 터 ! 좋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쁜 사람도 있는 것이 세상살이. 마찬가지로 乙도 좋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乙이면서 甲행세를 하는 진상도 빨랫줄 위에 널린 빨래처럼 널렸다. 다시 말해서, 에둘러 가지 말고 서둘러 말하자면, < 乙 > 이라고 해서 법 없이도 살 만한, 힘없는 사람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중은 위대한가 ? 유권자는 항상 현명했던가 ? 진보는 어리석은 대중을 곤혹스러워 하고, 보수는 어리석은 대중을 간절히 원하는 경향이 있다( 새누리가 원하는 대중은 어리석은 대중‘이다 ).
흔히 < 사회적 약자 > 하면 “ 착하면서 힘없는 사람 ” 을 떠올리기 쉽다.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사회적 약자‘라고 해서 모두 착한 사람은 아닌 데 말이다. 내 세계관을 투영하자면 세상의 팔 할'은 나쁜 사람'이고 이 할은 좋은 사람‘이다. " 어 퓨 굿맨 " 은 항상 소수'다. 우리가 “ 사회적 약자 ” 라고 부를 때는 못 된 약자’를 배제한 착한 약자로 범위를 좁혀서 생각하려는 버릇이 있다. 그렇다면 < 착한 약자 > 와 < 못된 약자 >를 구분하는 잣대는 무엇일까, 과연 누가 “ 과육 품종 분류 기계 : 어느 사과가 上品 이고 어느 사과가 下品 으로 전락할 것인가 ” 를 조정하는 조정자’일까 ? < 과육 품종 분류 기계 - 스틱 > 은 “ 기득권 ” 이 차지한다. 상품과 하품은 이들 손에 달려 있다.
쉽게 말해서 체제‘에 순응하는 乙은 상품으로, 반항하는 乙은 하품으로 직행해서 떨이’로 팔린다. << 선별적 복지 >> 란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되는 부류에게 선심을 쓰겠다는 말.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 선심을 쓰겠다면 할 말은 없으나 국민 세금으로 생색을 내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정치가가 복지에 대해 말할 때마다 “ 공짜 ”를 들먹이는 데, 사실 공짜 혜택을 “ 천조국 ” 급으로 누리는 집단은 가난뱅이‘가 아니라 국회의원’이다. 이들은 판공비‘라는 명복으로 1억 법인 카드를 제공받고, 자동차 연료비에서부터 시시콜콜한, 온갖 잡비를 지원받는다.
이들이 뽐내며 뿌리는 카드 결제는 모두 당신이 낸 세금으로 낸 돈’이다. 누가 더 공짜를 좋아할까 ? 이처럼 공짜에 환장하는 정치가’가 공짜 좋아하는 乙을 지적하니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이다. 이럴 때마다 등장하는, 그 유명한 말. " 시바, 너나 잘하세요 ! " 주인(기득권)의 입장에서 보면 영화 <<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 >>에서 퓨리오사와 맥스‘는 배은망덕한 자이며 “ 나쁜 생각을 하는 못된 약자 ” 다. 내가 이 지점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나쁜 생각 ” 에 대한 나쁜 태도’다. 욕망(desire) 은 대부분 < 나쁜 생각 > 에 속한다.
금기‘가 있기에 욕망’은 발생하는 법이니, 욕망은 < do not > 를 < do it > 하고 싶어 하는 심리'다. 만약에 < do it > 을 < do not > 하게 되면 게으른 태도'가 된다. 이 세상에 과연 “ 금기‘가 없는 욕망 " 이 가능할까. 그렇기에 욕망은 월경(越境) 이다. 만약에 “ 어떤 욕망 ” 이 < 좋은 생각 > 에 해당된다고 하면 그것은 욕망이 아니라 정의, 박애, 인류애 따위’다. 욕망은 결코 공공의 이익을 우선하지 않는다. 그것은 은밀한 것, 졸라 사적인 욕심이 욕망이니까. 나쁜 생각‘은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남녀에 따라 차이’가 발생한다. 남자의 나쁜 생각과 여자의 나쁜 생각‘에 대한 비난 수위'가 다르다는 말이다.
한국 사회’는 여성들의 나쁜 생각‘에 대해서는 가차 없지만, 남성들의 나쁜 생각에 대해서는 꽤 관대한 편’이다. 같은 생각‘이라고 해도 회초리의 종류가 다르다. 남성에게는 싸리나무 회초리를, 여성에게는 박달나무를, 아...... 딱딱한 박달나무. 앙, 몰라 ! 특히, 성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차이가 분명하다. 한국 사회’는 성에 개방적인 남성은 능력을 나타내는 지표이지만, 반대로 여성은 “ 퍼블릭 우먼 ” 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남자들이 보기에 성 담론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여자‘는 “ 하고 싶어 안달이 난 女子 ” 로 찍힌다. 착각도 유분수지만 생각 또한 가분수’다.
남성은 자신들의 나쁜 생각은 별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정작 여성의 나쁜 생각에 대해서는 야단법석을 떤다. 젖가슴은 커야 좋다는 고백과 180이하는 루저‘라는 고백은 모두 “ 나쁜 생각 ” 에 해당되지만, 나쁜 생각에 대한 사회적 태도’는 정반대‘다. 좋은(착한, 순종적인, 체제 순응적인) 생각’에 대한 옹호와 나쁜(반항적인, 불복종) 태도‘에 대한 배제’는 사회적 약자를 돕는 kbs 리퀘스트 방송‘에서도 드러난다. 방송사가 시청자의 온정에 호소하면서 내세우는 논리가 바로 < 착한 가족(사람) > 이다.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이웃과 장애인은 반드시 착해야 한다.
그렇다면 동일 환경 속에서 평판이 좋지 못한 가족’은 도움을 받으면 안 되는 것일까 ? 착한 가족이든, 나쁜 가족이든 환경에 따른 굶주림과 절망은 동일한 것이 아닐까 ? < 선별적 복지 > 는 착한 가족에게는 10를 주고 나쁜 가족에게는 0를 주는 방식‘이다. 쉽게 말해서 사회에 불만을 가지지 말고 체제에 순응하는 가족에게만 돕겠다는 발상이다. 도움을 받으려면 일단 “ 순둥이 ” 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 내가 김애란의 << 두근두근내인생 >>을 형편없는 소설’로 규정하는 이유는 김애란이 주인의 기만적 전술을 그대로 답습한다는 데 있다.
이 소설은 불온하기는커녕 체제 앞에서 굽실거린다. 그녀 또한 착해야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소설을 두고 극찬이 쏟아지는 한국 문단을 볼 때마다 웃으면서 코 팔 수밖에 없다. 권력을 누리는 기득권이 보기에 대중은 착해야 자신에게 유리하다. 착하게 굴면 떡을 주는 방식. 이 얼마나 동화적 구조인가 ! 사회적 약자‘라고 해서 착한 어린이가 될 필요 없다.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외쳐야 착한 어린이가 되는 나라’라면 차라리 나쁜 어린이로 사는 게 낫다. 역사적 진보는 복종 사회가 아니라 불복종 사회’에서 비롯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 나쁜 생각 ”을 지지하련다. 여성이 자유롭게 자신의 욕망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지지하며, 장애인이 보행권을 문제 삼아 시민 사회를 향해 지랄‘을 떠는 태도를 지지하며, 도움이 필요한 주폭도 지지한다. 가진 것이 없으면 착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은 개나 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