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조지 밀러 감독, 샤를리즈 테론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5년 9월
평점 :
품절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 대한 시시콜콜한 잡담 : 미워도 다시 한 번

 

                                                                                    

                                                                                          막대한 할리우드 자본이 들어간 영화는 일단 제작 단계에서부터 최고의 스텝이 붙는다. 시나리오를 담당하는 글쟁이도 마찬가지다. 시나리오 작가를 " 스토리 입말 " 에만 정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들은 영화뿐만 아니라 당대에 대한 유행에 민감하고 텍스트를 풍부하게 만드는 문학과 상징 해석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직업군이며, 또한 갖추고 있어야 일류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영화만 가지고 승부를 하는 시대는 지났다. 여러 방면의 수용자에게 지적 만족을 주기 위해서는 다양한 요소를 첨부해야 한다. 기획 상품이란 그런 것이다. 영화 <<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 >> 는 다양한 층위에서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도록 꾸민 티가 역력한 영화다.

이 영화는 프로이트 이론으로도 설명이 가능하고,     페미니즘 이론으로도 설명이 가능한 영화. 감독은 두 가지 길을 열어놓았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두고 페미니즘 영화이냐, 아니냐며 싸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텍스트 수용자는 평소 자신의 입장에 유리한 쪽으로 선택하면 된다. 모르는 쪽보다 아는 쪽에 대해 말하는 게 유리하니 말이다. 이 영화를 << 거대한 남근 >> 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 원초적 자궁 >> 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일단 전투 트럭은 기니까 ! 프로이트 식 귀납법에 의하면 ㉠ 원숭이 똥구멍은 빨갛다 - ㉡ 사과도 빨갛다 - ㉢ 사과는 맛있다 - ㉣ 바나나도 맛있다 - ㉤ 바나나는 길다 - ㉥ 길면.......        남근 男根 이네요. 헤헤헤.  결론은 기승전- 근()인 셈이다

프로이트 범성론'이란  :  < ㉠ - 목록 > 에 아무리 쌈박한 오브제를 놓아도 < ㉥ - 목록 > 에 가서는 페니스가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여러분이 봐도 기가 찰 노릇이니, 시대의 거성 들뢰즈가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 앙띠 오이디푸스 >>에서 이렇게 말했다 " 꿈에 막대기가 나오면 무조건 페니스라고 말해. 안 그러면 따귀를 맞을 테니깐 ! ” 프로이트 식 해석에 의하면 8기통 엔진 두 개짜리 전투 트럭은 남근이다. 더군다나 긴 몸통 끝에 달린 둥근 유류 탱크는 불알이다. 하나 더 달렸다면 완벽한 남근이 될 터인데, 프로덕션 디자이너 입장에서 보면 너무 노골적은 디자인이라 망설였을 것이다. 지나치게 또렷한 상징'만큼 촌스러운 은유는 없으니까.

퓨리오사를 비롯한 일행은 거대한 남근을 탈취하여 약속의 땅으로 향한다는 이야기. 강유정 평론가는 우유를 싣고 달린다는 점을 들어 " 전투 트럭을 부푼 배(임신한) 와 거대 자궁에 대한 은유 " 라는 해석이 가능하다면, 같은 이유로 전투 트럭이 거대하고 딱딱한 페니스라는 점을 들어 우유가 아니라 정액이라고 우겨도 될 것 같다. 부푼 배라는 해석이나 우유가 아니라 정액이라는 해석이나 도 긴 개 긴'이지 않은가.  해석에 정답은 없다. 그저 그럴싸한 해석만 존재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전투 트럭은 싱싱한 정자가 가득 담긴 페니스-기계. 프로이트가 말하는 << 남근 >> 은 곧 << 권력 >> 을 뜻하니, 거대 남근을 장악한 쪽이 최후의 승자가 되는 셈이다. 그들은 거대 남근 기계를 이끌고 가스타운'에 무혈입성한다.

거대 남근은 곧 반지의 제왕이요, 왕관인 셈이다. 그런데 꿀과 젖이 흐르는 거스타운을 << 자궁 >> 으로 해석해서 그럴싸한 해석이 나온다. 프로이트 이론은 아버지가 중심이 된 오이디푸스 세계이다. 모든 것은 남근이 있는가, 없는가, 남근을 욕망하는가, 욕망하지 않는가에 달렸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여자는 페니스가 없는 존재. 그렇기에 프로이트는 여자를 당최 해석이 불가능한 < nothing > 으로 정의한 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 에라이, 몰것다. ! " 내가 이 영화에서 주목한 점은 등장인물들이 구호처럼 외친 '우리는 물건이 아니다 We are not things.'라는 대사였다. 영화 속 여성들은 프로이트가 여성을 정의하면서 내린 < nothing > < not thing > 으로 분류한 것이다.

이 태도는 여성은 < nothing > 이 아니라 < not  thing > 이라는 선언이다. 그것은 오이디푸스 아버지 세계를 향한 빅엿 이었다. 이성복 시인이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어 ! ” 오이디푸스적 남근과 대척점에 있는 개념이 바로 << 코라 >> . 코라는 원초적 어머니의 세계로 거대한 자궁을 뜻한다. 이 영화에서 자궁은 거스타운이라는 동굴이다. 이 동굴에서 (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이 영화 속 거스타운은 동굴이다 ) 워보이들이 양육된다. 그들 외형이 머리털이 자라지 않고 창백하다는 점에서 탯줄에 매달린 태아'이다. 이곳은 자궁이다.  가스타운을 원초적 자궁'이라고 본다면 퓨리오사가 탈출을 시도하면서 겪게 되는 관문,  모래 폭풍은 질 구멍과 자궁목 사이에 위치한 여성의 생식 통로이다.

음문을 통과해야지만 약속의 땅에 다다를 수 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약속의 땅은 이미 황무지가 된 지 오래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돌아왔던 코라로 되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곳이 바로 약속의 땅인 셈이다. 한때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 귀태 >> 라는 말은 이 영화 설정과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작명의 달인, 프로이트는 이 욕망을 자궁 환상 이라고 명명했다. 월한 프로이트 할아버지 !   이렇듯 이 영화는 남근적 상징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원초적 자궁으로 설명할 수도 있는 재미있는 영화. 또한 모래 폭풍 통과 장면을 관문(음문)을 통과해야지만 어른의 세계(약속의 땅)에 진입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퓨리오사의 성장 영화'로 읽을 수도 있다.

​교조주의자 정성일은 영화를 가지고 인문학적 소양을 뽐내지 말라며 사이비 영화평론가를 비판했는데, 그에게 되묻고 싶다. 당신이야말로 영화를 가지고 인문학적 소양을 뽐내는 대표적 평론가라고 말이다. 한국 영화를 말하면서 맥락과는 별 상관없이 프루동, 바쿠닌, 조르주 소렐을 호명하는 태도야말로 영화를 가지고 인문학적 소양을 뽐내는 대표적 평론가의 태도가 아닐까 ? 영화를 영화라는 장르 안에서만 소비되어야 한다는 발상은 독선이다. 정성일의 저 태도가 옳다면 고다르 감독도 비판받아야 한다. 그는 영화를 만들면서 온갖 문학적 재료'를 끌어왔으니깐 말이다. 롤랑 바르트를 인용하자면 저자는 죽었다. 텍스트는 온전히 수용자의 몫이다. 수용자가 북을 치든 장구를 치든 상관할 일이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성은 메르스의 메이트인가

                                           수전 손택의 탁월한 저서 << 타인의 고통 >> 에이즈 에 대한 대중 폭력을 비판한다. 미국 대중 기독교 우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기독교 우파는 에이즈'를 윤리적 타락의 결과로 선전했고, 주요 표적은 동성애자였다. 동성애자는 어느 순간 불가촉천민으로 낙인 찍혔고, 고립되었으며, 찍히면 죽을 수도 있는 과녁이 되었다. 그들은 < 敵 : 원수 적  > 이자   < 的 : 과녁 적  > 이었다. 이 광기 바이러스는 고스란히 태평양을 건너셔, 현해탄을 건너셔, 동해바다를 넘어셔, 사이다 병속에 숨어셔, 인천 앞바다를 거쳐셔, 대한민국에 상륙했다. 뿜빠라 뿜빠 뿜빠빠. 당시, 나는 동성애자이면서 에이즈 보균 판정을 받은 사람과 알음알음 알고 지냈는데 그 사람은 세찬 바람이 전하는 풍문과는 달리 일상생활을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은 연락이 끊겨서 소식을 알 수는 없으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졸라 건강한 모습으로 정상인처럼 활동한 것을 보면 에이즈는 호들갑을 떨만큼 무서운 제2의 페스트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D.O.A : 도착 즉시 사망을 뜻하는 의학 용어 는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질병에는 치사율 이 발생한다. 그 흔한 감기에도 죽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기록에 의하면 웃다가 죽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 웃느라 숨을 쉴 수가 없었다나 ?! 이 치사율이 소수점 이하로 떨어져서 인식을 못할 뿐이다. 사실 < 사스 > < 메르스 > 도 매년 유행하는 계절성 독감( 코로나 바이러스 )이다. 메르스로 인한 사망자가 16명으로 늘어났다는 사실 앞에서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우우, 하지 마시라. 내 말은 경계를 하고 조심을 하면 될 일이지 사회 전체가 공황에 빠질 필요는 없다는 소리.

 

국가는 공포를 은폐하려는 속성이 있고, 언론은 공포를 확산하려는 속성이 있다. 특히 한국 언론'은 1을 100으로 과장해서 치환하려는 버릇이 있다. 왜냐하면 << 공포 조성 >> 만큼 채널을 고정시키는 데 유리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독이 있는 뱀이나 지네를 보게 되면 순간 눈을 떼지 못한 채 예의주시하는 이유는 시선을 딴 데로 분산시킬 경우 갑작스러운 공격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종편 뉴스는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공포를 조성하고 판매한다. 언론은 하이에나의 습속을 가진 족속이다. 2009년, 유행성 독감인 신종 플루로 인해 사망한 사람은 260명이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매년 계절 독감으로 사망하는 사람은 평균 2,369명이다. 요즘 돌아가는 꼴을 보면 때려잡자, 메르스 환자 !!!! ” . 메르스 환자는 감기 한번 걸렸다고 불가촉천민이 되어 공공의 적이 되었다. 하지만 표적이 틀렸다. 메르스 환자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뿐이다. 우리가 활시위 팽팽하게 당겨서 겨냥해야 될 과녁은 메르스 환자가 아니라 국가와 삼성이다. 국가는 무능했고 삼성은 거만했다.

 

국내 1위가 아닌, 세계 1위를 목표로 삼겠다던 삼성이 메리스의 메이트(mate)였다는 사실은 영화 << 식스 센스 >> 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었다는 서사에 버금가는 반전이었다. 세스코 본사에 바퀴와 쥐가 가장 많이 번식하는 경우라고나 할까 ?  이런 것을 두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는 모양이다. 삼성은 기자 회견을 통해서 뚫린 입으로 삼성(의 방역 시스템)이 뚫린 것이 아니라 국가가 뚫린 것이라며 반격을 가했지만, 이 말은 반은 정답이고 반은 오답이었다. 삼성도 뚫리고 국가도 뚫린 것 !  이 사실 앞에서 너도 울고, 나도 울고, 국민 모두 울었다. 삼성 입장에서는 메리스라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작전 본부를 포격한 꼴이니 911 사태 때 비행기가 미 국방부 옥타곤을 포격한 것이나 같은 아,        수라장'이었을 것이다. 모두 중동발 패트리어트 미사일이었다.  

 

세계 1위를 꿈꾸는 엘리트 집단으로서는 자존심에 칼집이 난 상태다. 성은 오징어가 되어서 벌집 모양으로 끓는 물에 감겨 오그라들었다.      이 정도면 명예에 먹물을 뒤집어쓴 꼴이다. 메르스 사태가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공포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치사율이 아니라 거대 기업이 국가 권력과 맞짱을 뜨는 태도와 일개 기업 눈치나 보는 국가'다.  ( 삼성의 ) 메르스를 향한 신경질적인 태도는 삼성이라는 권력이 이미 국가 권력을 얕잡아본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삼성이 망하면 대한민국이 망한다는 말만큼 슬픈 말도 없다.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삼성 때문에 먹고사는 노동자가 몇 명인 줄 아느냐고 묻기 전에 먼저 대한민국 때문에 살아가는 노동자가 몇 명이나 되는 줄 아느냐고 물어야 한다. 삼성이 망한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설령, 삼성이 망한다고 해서 국가가 망하면 대한민국은 차라리 망하는 게 낫다. 국가가 한 개의 기업에 의해 흥망이 좌지우지될 처지라면 말이다. 일당 독재 사회'만큼 무서운 것은 일개 기업이 국가를 자지우지하는 것이다. 메르스 사태는 삼성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립간 2015-06-15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성이 망한다고 해서 국가가 망하면 대한민국은 차라리 망하는 게 낫다. ; 그럴 리가 없으니, 크게 실감되지 않는군요.

포털 기사에 대형 병원에서 메르스 의심 환자의 진료를 거부한다는 데 ; 메르스 확산 방지에 효과가 있을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5 16:41   좋아요 0 | URL
오, 그런가요 ? 전 의료계 세계는 잘모르겠어서 조심스럽긴 한데 이건 직무유기 아닌가요 ? 승차를 거부해도 제재를 받는데 사람 목숨을 가지고 거부를 하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에는 격리 병동이 없나요 ?
궁금한 게 격리 병동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마립간 2015-06-15 19:52   좋아요 0 | URL
대부분의 병원에 격리 병동은 없습니다. 메르스와 관련해서는 국가에서 지정한 몇 개의 병원에서 격리 병동을 운용하고 있죠.

진료 거부는 직무유기로 생각하는 의사가 메르스 의심 환자를 진료했다면, 그 순간 이후 환자의 확진이 날 때까지 추가 진료를 하는 것이 옳을까요? 아니면 진료를 하지 않는 것이 옳을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5 20:00   좋아요 0 | URL
아, 격리 병동은 원래 없는 것이로군요.

결국은 국립병원에 한해서 격리병동을 운영한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이윤 추구 때문이겠죠 ? 이런 전염병 창궐을 막기 위해 사립 병원이 투자할 리는 없으니 말이죠. 어디서 흘려 들은 이야기인데 한국은 국립병원 수가 굉장히 적다는 소리를 들은 적 있씁니다. 기형적이라고 하더군요.


이 글 읽고 문득 든 생각이 가장 좋은 건 가정 방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원이 많이 딸리겠죠 ?
도의상 진료를 거부하는 것은 왜 거 있잖습니까... 무슨무슨 선서하는 거... 그 정신에 위배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마립간 2015-06-15 21:06   좋아요 0 | URL
제가 생각했던 질문은
메르스와 메르스와 구분 안 되는 감기, 그리고 확진까지의 기간을 고려할 때, 우리 나라 상화에서 몇명 의 일반 내과, 호흡기 내과, 감염 내과 의사가 필요할까요? ; 라고 하려 했는데, 곰곰발 님이 주제를 돌렸네요.

민간 병원의 이윤 추구 맞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제네바 선언)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의사 집단이 인간 사회에 예외적으로 도덕적 인간 집단으로, 선언의 정신에 자신의 목숨과 가족의 생계를 건다고 생각지는 않으시겠죠.

이것이 이윤 추구의 시스템 탓으로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의사 개인의 도덕성으로 돌려야 할까요? (좌파라고 분류되는 사람들도 유독 의료에 관해서만은 시스템보다는 개인의 도덕성을 중요시하더라고요.)

마립간 2015-06-16 07:46   좋아요 0 | URL
시스템보다 개인의 도덕서에 의지하려는 것에 `여성주의`도 있겠군요. 문제의 해결보다 남성(주의)의 도덕성을 비난하는 것으로 감정의 소비에 더 치중했다고 저는 판단하지만.

여성주의 타령은 그만하고 이번 메르스와 관련하여
<링크>와 <과학콘서트>의 `케빈 베이컨 게임: 여섯 다리만 건너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이다`, 그리고 <구글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1부 구글 신은 뭐든지 알고 있다 복잡계 네트워크와 데이터 과학`
인문학으로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읽지 않으셨다면 한번 읽어보시죠.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6 08:17   좋아요 0 | URL
참고로 저는 의료계 구조를 거의 모르는 관계로 질문에 대한 제 생각은 유보하도록 하겠습니다.




링크는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책입니다. 매우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복잡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습니다.
일단 케빈베이커 게임을 보면 한마디로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라는 거 아닙니까.


+

여성주의는 개인보다는 구조적 문제에 집중된다고 생각됩니다. 남자들이 문제야, 라는 소리는
그냥 뒤따마 담화일 뿐,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것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지적과 시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립간 2015-06-16 10:22   좋아요 0 | URL
곰곰발 님의 `여성주의`에 대한 인식, 저에게 세뇌 당하신 것 아닙니까.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6 10:5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 그런 것 같습니다.
 
야생의 사고 한길그레이트북스 7
레비 스트로스 지음, 안정남 옮김 / 한길사 / 199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화양연화는 없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 라고 말했다. 그런데 오래된 원시 사회 신화 속 도덕률은 지옥은 우리 자신이다 라고 가르친다. 에둘러 말하지 말고 서둘러 말하자면 : < 그게 그거 > 같지만 곰곰 생각하면 < 그게 그거 > 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옥에는 < > 는 속하지 않은 반면, 레비-스트로스가 세계 오지를 찾아다니며 수집한 원시 사회 신화의 서사에는 지옥에 < > 가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사르트르는 내 탓은 하지 않고 남 탓만 하는 것이고, 오래된 신화는 네 탓보다는 내 탓에 방점을 찍는다.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 사르트르는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서구중심적) 사고를 가진 좌파 꼰대(내가 보기에는 사르트르는 좌파 꼰대라기보다는 마초 꼰대처럼 보인다. 그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부르주아).

레비-스트로스는 << 야생의 사고, 9장 >> 역사와 변증법 은 온통 사르트르를 씹는 데 할애한다. 그것도 아주 신랄한 어조로 말이다. 그의 말을 그대로 표현하자면 의식적으로 난폭한 표현을 ( 야생의사고, 355) ” 쓴다. 역시, 비난할 때는 체면 차리지 말고 제대로 씹어야 제 맛이다. 사르트르는 역사가 있는 인류를 문명인으로 설정한 후에 역사가 없는 인류는 야만인으로 분류했는데, 지구 저기, 저어어기, 저 어어어어...... 어두컴컴한 변방의 부족 사회를 주로 관찰한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는 역사가 없는 사회라고 해서 야만인이라는 단정은 얼토당토목금토. 그렇기에 역사 있는 인류가 역사 없는 인류에게 의미를 가져다주며 축복을 준다는 말은 기만이다. 이럴 때 흔히 하는 말, 너나 잘하세요.

레비-스트로스는 기억 를 믿지 않았다. 기억이란 본질적으로 왜곡 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각색한다. 불리한 것은 못 본 체하거나 지운다. 반면 입장에 유리한 사실은 취사선택 하여 과장한다. 기억이란 솎아 내거나, 지우거나, 확대한다. 그 결과, 자신이 잡은 생선은 피라미 인데 기억에 의해 재생된 물고기는 월척 : 한 자가 넘는 물고기 이다. 얼척없는 과장인 셈이다. 이 기억을 개인에서 국가로 확장하면 역사가 된다. 역사란 개인적 기억을 국가의 기억으로 확장한 것이다. 피라미를 잡았으나 월척을 잡았다고 기억하는 낚시꾼의 오류나, 역사 있는 인류가 역사 없는 인류에게 축복를 내렸다는 역사의 오류나 매한가지. < 보수 > 는 기본적으로 과거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옛것은 낡고 가난한 것이지만 가치 있고, 새것은 번드르르하고 삐까번쩍하지만 싸가지가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매사에 새것(젊은 것)은 못마땅한 존재다. 하지만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기억이란 왜곡을 동반한다. 그들은 < 21세기 새것 > 에 비해 < 20세기 옛것 > 은 투박하며 품질은 떨어지지만 낭만과 운치가 있었다는 생각은 완벽한 착각이다. 왜냐하면 옛것은 그 당시에는 번드르르하고 삐까번쩍한 신상이었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잊고 있는 것이다. 까마귀도 아니고 말이다. 보수가 옛것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그 시대의 문화가 아니라 자신의 젊음이다. 젊었기에 좋았던 것이지 그 시절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자신의 젊음이다. “ 왕년에 ~ ” 라는 흔한 말투는 그 사실을 증명한다.

자신은 젊음 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면서 정작 요즘 젊은것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하지만 젊다고 해서 좋을 것 하나 없다. 그 시절에는 그 시절에 맞는 무게를 짊어져야 한다. 낭만은 없다. 낭만이란 과거를 회상할 때 발생하게 되는 감성일 뿐이다 ■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다맨 2015-06-14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사르트르는 얼마큼은 양심적 지식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의 높은 문학적/철학적 명성과 권위 덕에 그만한 권력이 생겼고, 그 권력을 충분히 이용해 사회운동(베트남전 반대, 프랑스 식민지들의 독립 운동 지지 등)도 활발하게 했죠. 물론, 저 역시 그에게서 (진은영 같은 이들에게 볼 법한) 캐비어 좌파의 냄새가 나긴 합니다만 그래도 사회적 지식인으로서의 소명을 저버리지 않고 살았다는 점은 인정해줄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확한 리딩은 아닌데, 고진의 책에서 본 적이 있었던 듯한데 실제로 레비 스트로스와 사르트르의 사이가 굉장히 나빴다고 들은 기억이 나네요. 그냥 사상적 차이에서 생긴 불화를 넘어서 인간적으로도 서로를 싫어했다고 한 듯하네요 ㅎㅎ 아마 그 때문에 레비 스트로스가 사르트르를 더욱더 혹독하게 비판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5 09:30   좋아요 0 | URL
엇, 수다맨 님. 안 그래도 한번 만나서 술이나 마시자, 메시지를 넣읅ㄱㄺ 넣으려고 했습니다. 시간 되시면 봅시다. 둘 다 서로 앙숙이었다네요. 야생의 사고를 보면 한 장을 통째로 사르트르 까는 데 할애하고 있씁니다.
그걸 읽은 사르트르가 좋아할 리 없고, 사실 사르트르 사상과 스트로스 사상은 대척점에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레비스트로스는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트로스는 보수주의자 같습니다.

수다맨 2015-06-16 13:48   좋아요 0 | URL
네. 이번 달에 한 번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 날짜 잡으시죠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6 16:08   좋아요 0 | URL
날 잡아보도록 하죠. 오붓하게 봅시다요..ㅎㅎ

마립간 2015-06-15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르트르의 주장처럼 역사는 진보하는 것인지, 아니면 레비 스트로스 주장처럼 역사의 진보가 없었는지, 이 주제는 저에게 판단 유보인 주제입니다.

곰곰발 님의 개인적 판단이 궁금하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5 11:55   좋아요 1 | URL
저는 개인적으로 레비스트스를 지지합니다. 사르트르는 역사적 진보가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역사는 우연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란 운명론적이 아니라 우연적 산물이라는 것이죠.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는 보다 문명화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히틀러 홀로코스트는 이후 역사에 많은 교훈을 주었지만, 그래서 다시는 발생하지 않을 것처럼 보여졌지만 보스니아 내전은 홀로코스트만큼 끔찍한 인종 청소의 장이었습니다.
 

 

 

 




봉달 씨는 숀 코넬리'다

                                 새집으로 이사를 왔으나 헌 집이었다. 아파트에서 살던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20년 넘게 마당 있는 단독 주택에서 살았던지라 빌라 주거 환경에 익숙하려면 시간이 걸려야 했다. 한국인은 아파트 주거 환경에 익숙하지만 나는 체질적으로 군집 형태의 주거 환경이 불편했다. 두고 온, 한때 새집이었으나 이제는 옛집이 되어버린 그 집도 낡고 오래된 라일락 나무가 있는 마당이 있고 작은 터앝이 있는 주택이었다. 그 마당에서 개를 키웠다. 목줄을 다는 것은 왠지 학대인 것 같아서 항상 풀어놓았다. 봄에 터앝에 배추와 도라지를 심었으니 하루가 다르게 자랐으리라. 터앝에 채소를 기르면서 깨달은 것은 볕에 따라 자르는 속도가 다르다는 점이다. 봄볕에 이파리는 자라고 여름 볕에서는 색이 짙어지고 단단해진다. ...... 자라고 있으려나 ?

전세 대란 " 을 넘어서 전세 전쟁 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항상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다가 막상 전셋집을 구하다 보니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헌 집이지만 새집이 된 집으로 이사를 왔지만 전에 살던 전세보다 2배 많은 금액을 지불했지만 공간은 절반으로 줄었다. 마당도 없고, 터앝도 없고, 라일락도 없다. 대신 복도라는 이상한 길이 생겼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잠을 놓쳤다. 오늘은 키우던 개와 함께 인왕산에 오르기로 약속한 날. 새벽부터 등산 가방을 챙겼다. 삼겹살은 살짝 익혀서 도시락에 담고, 빵과 우유, 그리고 냉동실에 둔 얼린 물통도 챙겼다. 아침 여섯 시 반에 집을 나왔다. 걸어서 인왕산 입구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얼추 한 시간이 걸렸다. 개는 지쳤는지 벌써부터 혀를 내밀고 헉헉거렸으나

오랜만에 나들이를 하는 날이라 흥분한 표정이 역력했다. “ 봉달이 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바로 산책이었다. 우유를 주자 목이 마른지 냅다 먹었다. 개를 이끌고 산에 올랐다. 정상에 도착해야 한다는 목표는 없었다. 좀더, 조금 더 오래 개와 함께 산책하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가다가 지치면 길이 아닌 풀숲으로 빠져서 쉬고는 했다. 목줄을 풀어주니 개는 사냥개 흉내를 내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틈틈이 고개를 돌려 내 위치를 확인하고는 했다. 어느덧...... 개는 시야에서 벗어났다. 잠이 오기 시작했다. 배낭을 베고 잠시 잠을 잤다. 바람과 볕이 좋았다. 우울증에는 볕이 가장 좋은 약입니다. 볕을 많이 쬐도록 하십시오. 의사는 처방전을 작성하면서 늘 그 이야기를 했다. 맞는 말이었다. 바람과 볕은 우울과 불면에 가장 좋은 약이었다.

눈을 뜨니 개는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 다시 일어나서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가는 길, 틈틈이 개에게 먹이를 주었다. 고기가 상할까봐 살짝 익힌 삼겹살부터 줬다. 김칫국에 밥 말아 먹던 놈이라 삼겹살로 배를 채우니 마냥 좋은 모양이다. 그래,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맛있는 거 배불리 먹을 수 있고 하루 종일 산책을 하니 오늘이 네 생일이다. 목이 마를 때 마시려고 준비한 물도 몽땅 개에게 주었다. 내가 물을 마시려고 하자 개가 낑낑거리며 물을 달라고 보챘기 때문이다. 산 정상에 오르고 산 밑으로 내려왔어도 나는 개를 끌고 이리저리 세상 구경을 시켰다. 어느덧 날이 어둑어둑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공원에 앉아 구멍가게에서 사온 비비빅 를 개에게 주니 잘도 먹는다. 내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봉달아, 미안하다. 오늘이 너와 함께 하는 마지막 산책이구나.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이었으나 슬퍼서 울컥했다. 이 집에서는 너를 키울 수 없단다. 전날 이리저리 뒤척이면서 곰곰 생각했다. 개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 무엇을 해야 할까 ? 생각하다가 떠오른 것이 개와 함께 세상 구경을 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산책이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다가 달거리하는 여자처럼 터졌다. 강원도 농장 주인이라고 하니 마음껏 뛰어놀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자위를 내내 하면서...... 집에 돌아와 다시 생각해도 몹쓸 짓이었다. 형편이 되는 대로 키우기로 했다. 전화를 걸어서 입양은 없던 일로 했다. 그날, 꿈을 꾸었다. 꿈에 영화배우 숀 코넬리를 닮은 금발 신사를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가 다가와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 아따, 성님 ! 나 모르것소. 봉달이오. 봉달이 !

- 봉달이 ??!

- 그려, 나 성님 동생 봉달이여. 꿈에서는 항상 사람으로 둔갑을 한당께. 이때 한번 사람 흉내 내지 언제 사람 행세 하것소.

- 사람으로 둔갑을 하니 꽤 잘생긴 놈이었구나.

- 말이라도 고맙소잉. 근데 아까..... 공원에서 왜 울었소 ? 사내새끼가 눈물이나 찔끔거리 고...... 말 안 해도 다 알지라. 사실, 알면서도 내색은 안했소. 내가 시무룩하면 성님 더 마음 아플 것 아니오. 기분도 꿀꿀하니 어디 가서 삼겹살이나 구워 먹읍시다.

 

나는 숀 코넬리를 데리고 허름한 삼겹살집으로 들어갔다.

 

- 성님, 고맙소잉. 이 은혜 잊지 않겠소. 같이 함 살아봅시다. 내 똥 오줌 잘 가릴 것이니 너무 걱정 마소. 잘 짖지도 않을 테니껜 걱정 붙들어 매쇼 !

 

그 사이, 삽겹살이 노릇노릇 구워졌다. 나는 숀 코넬리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인간보다 더 인간답구나. 내가 젓가락으로 삼겹살을 집자 숀 코넬리가 으르렁거리며 소이쳤다.

 

- 젓가락 놔라잉! 건들면 배때기를 확 째셔 줄넘기 해부려. 내 밥그릇에 손 대는 놈은 배, 배배배배신 배반형 투, 투투투부정사야.

 

숀 코넬리는 먹이를 보자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식욕 앞에서는 사람 흉내고 나발이고 없었다. 하지만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차피 꿈이니까, 고기 한 점 먹었다 한들 헛배 부를 리 없으니까. 많이 먹어라. 아프지 말고 오래 살아라.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amadhi(眞我) 2015-06-13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터앝. 예쁜 말이네요. 자신의 취향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군요. ˝비비빅˝ ㅋ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3 10:05   좋아요 0 | URL
텃밭과 터앝은 다르더군요. 텃밭은 집 밖에 있는 작은 밭이고 터앝은 집 울타리 안에 있는 땅이랍니다.

비비빅... ㅋㅋㅋㅋㅋ 오늘 새벽에도 비비빅 하나 줬습니다. 여름에는 비비빅이 최고에욧//

samadhi(眞我) 2015-06-13 10:07   좋아요 0 | URL
네 찾아보았죠. 국어사전 찾아보기가 취미거든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3 10:42   좋아요 0 | URL
좋은 취미로군요. 저도 사전 찾아보는 재미를 알고 있습니다. 사전이 의외로 재미있습니다. ㅋㅋ

samadhi(眞我) 2015-06-13 10:44   좋아요 0 | URL
˝새록새록˝ 알아가는 맛이 있죠.

cyrus 2015-06-13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 준비 때문에 며칠동안 글 포스팅이 뜸했군요. 더운 날에 이삿짐 옮기고 새집 정리하느라 고생했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4 09:33   좋아요 0 | URL
이사야 포장 이사`에서 다 하는 것이니 이사 때문에 글이 뜸했던 것은 아니고 그냥 책을 안 읽다 보니 딱히 글 소재가 없어씁니다.
 
[블루레이]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조지 밀러 감독, 샤를리즈 테론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5년 9월
평점 :
품절


 


 



 

 

프로이트와 매드 맥스

 

                                  프로이트는 여성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마디로 “ nothing ! " 이었다. 그는 여성 오르가슴은 질 섹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으나, 현대 의학에 의하면 여성 오르가슴은 대부분 클리토리스 오르가슴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는 게 없으니 엉뚱한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그뿐이 아니다. 현대 뇌 과학은 상당 부분 프로이트 이론이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을 깎아내릴 수는 없다. < 무의식 > 을 발견했으니까. 그것은 뉴턴의 사과와 비슷한 것이었다. 뉴턴이 낙과落果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중력을 발견했듯이, 프로이트는 의식 너머에 있는 무의식을 발견했다. 무의식이란 의식이 없다(非 : 아니 비)는 개념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秘 : 숨길 비)을 뜻한다.

 

사실, 프로이트 이론은 정신분석학보다는 상징 해석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어쩌면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기꾼인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프로이트 이후, 많은 문학 작품은 프로이트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했다. 사실, 해석이라는 게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피어싱이 아니었던가 ! 기다란 것은 다 페니스라고 퉁치면 그만. 페니스는 아버지의 억압이라고 말하며 가부장 사회 구조의 모순을 지적하면, ...... 프로이트 이론은 만능 믹서기인 도깨비방망이'인 셈이다. 이러다가는 현대 여성의 불안은 남성의 불알 때문이라고 우겨도 할 말은 없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프로이트를 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프로이트 이론으로 작품을 해석하면 고리타분한 작품도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처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현장에서 발견된(보이는) 증거가 아니다. 격투 끝에 땅에 떨어져 망가진 피해자의 시계는 가해자에 의하여 조작된 증거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한 살인자의 트릭. 지나치게 선명한 증거는 가짜. 추리소설은 그 사실을 말해준다. 명탐정은 오히려 사건 현장에서 눈에 보이는 증거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지나치게 사소해서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증거를 찾는다. 사소한 증거가 가장 결정적 단서가 된다. 프로이트 이론도 이와 비슷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그는 환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사소한 말에서 결정적 단서를 포착한다. 그가 주목한 것은 농담이나 말실수, 동음이음어 따위. 그래서 나는 프로이트 논문을 학술서가 아닌 추리소설로 읽는다. 그가 추리소설광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결국 “ 위험한 독서 인 셈이다. 영화 <<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 >> 를  프로이트의 범성론적 시각으로 해석해 볼까 ? 우우, 하지 마시라. 심심풀이 땅콩으로 푼 위험한 해석이라고 해두자. 퓨리오사가 운전하는 8기통 두 개짜리 전투 차량은 도상학적 시각으로 보면 < 페니스 > ,  페니스냐고 묻지 마시시시라. 프로이트 해석학에서 기다란 것은 다 페니스로 통한다. 당신 꿈에 당신이 싸리나무 회초리를 들고 있다면, 프로이트는 똑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다. “ 그러니까, 그게 뭐냐면, 당신이 손에 쥔 회초리는..... 페니스입니다 ! ” 사실, 영화 << 매드 맥스 >> 는 서사가 탄탄한 영화는 아니다. 이야기를 최소화하는 대신 이미지를 최대치까지 끌어올린 영화이니 탄탄하지 못한 서사를 굳이 비판할 일은 아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가는 집토끼마저 놓치는 경우는 허다하니깐 말이다.

 

 

 

 

남성 혈맹으로 맺어진 호전적 사회에서 여성이 독재자인 임모탄의 오른팔 전투 사령관이라는 설정은 의아하다. 임모탄은 여성을 철저하게 착취 수단으로 이용하는 남성 우두머리'인데 가장 중요한 전투 사령관 자리에 여성인 퓨리오사를 배치한다는 것은 모순된 태도처럼 보인다. 내가 보기에 퓨리오사는 남성화된 여성이거나 거세되어 여성화된 캐릭터. " 그러니까, 그게 뭐냐면, 그녀의 잘린 팔...... 페니스‘입니. "  그녀는 남근이 거세되어 여성화된 것이다. 애애, 하지 마시라. 이 모든 비난은 프로이트 할아버지에게 주시라 ! 퓨리오사를 거세된 남성으로 설정하면 8기통 두 개짜리 전투 트럭이 선명하게 보인다. 불알 하나에 남근이 달린 형상을 한 전투 차량은 오직 남성만이 운전할 수 있다( 실제로 제작진은 8기통 엔진 차량에 부설된 둥근 탱크를 두 개'로 설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노골적인 은유여서 철회했다고 !).

 

 

 

많은 사람들은 이 전투 차량에서 우유가 나온다는 점을 들어 여성성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 우유는, 그러니까, 그게 뭐냐면.......  정액입니다 ! 정액을 하고 다시 말하자면, 아니 정색을 하고 다시 말하자면 : 프로이트 이론에서 페니스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펠루스는, 결핍(결여)를 대체할 수 있는 대체자. 전투 차량을 운전하는 퓨리오사, 맥스, 룩스는 모두 결핍의 존재이다. 퓨리오사는 팔을 잃은 전사이고 ( 전사가 팔을 잃었다는 것은 얼마나 남근적 상징인가 ! 프로이트의 << 늑대 인간 >> 에서 늑대 인간은 거세 공포증으로 인해 잘린 손가락 환상에 시달린다. 라캉은 늑대 인간의 잘린 손가락 환상을 실재의 귀환'이라고 말했다), 맥스는 아내와 딸을 잃은 무능한 아버지이고,

워보이 룩스는 피-주머니에 의지해야만 가까스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 그들에게 있어서 전투 차량은 거대한, 딱딱한, 펄펄 끓는, 싱싱한 정자가 가득 찬 오브제. 그들은 모두 남근 선망에 시달린다. 임모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씨받이를 되찾기 위해 퓨리오사 뒤를 쫓는 게 아니라 싱싱한 정액이 가득 찬 팔루스-기계'를 되찾기 분노의 도로를 질주한다.  그것은 << 반지의 제왕 >> 에 나오는 반지와 같다. 그것을 가진 자'만이 영토를 지배할 수 있다. 그는 남근-기계를 되찾는 데 실패하자 죽는다. 그 죽음은 거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얼마든지 여성적 시각으로 읽을 수도 있다. 임모탄이 거주하는 시티텔은 거대한 자궁에 대한 은유다. 팔루스 세계와 반대되는 개념이 코라인데, 코라는 오이디푸스라는 아버지 세계'와 반대 개념인 원초적 자궁을 뜻한다.


 

 

​그리고 모래 폭풍 지역은 관 모양의 여성 생식기'에 해당된다. 그것은 세상 밖으로 나가는 음도 陰道 요, 음문 陰門 이다. 퓨리오사'가 음도와 음문을 지나(모래 폭풍을 지나) 세상 밖으로 나가는 장면은 << 출산 이미지 >> 를 떠올린다. 하지만 세상 밖 유토피아'는 없다. " 유토피아 " 라는 말 자체가 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이니 말이다. 퓨리오사가 맥스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다시 시타텔로 돌아가는 상황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 자궁-환상 >> 에 속한다. 그것은 어머니의 생식기 안에 있는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인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자궁 환상은 아버지에 대한 애착에서 오는 것이 보통이란다. 믿거나 말거나. 결국 퓨리오사가 상징적 아버지인 임모탄에게 보이는 적의는 애착이 변한 증오'라고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퓨리오사의 성장 영화로 서부 영화 << 쉐인 >> 과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퓨리오사는 소년/소녀'이고 맥스는 떠돌이 총잡이 쉐인'이다. 그들은 22세기 총잡이답게 말 대신 차 위에서 싸운다. 이처럼 해석이란 어느 쪽에 어깨를 기대느냐에 따라 다르다. 그것은 < 틀린 것 > 아니라 < 다른 것 > 이고, 좋게 말하자면 열린 텍스트요, 다양성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영화'는 지나치게 획일적이어서 뚜렷한 서사'보다 창의적이다. 영화 <<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 >> 는 팔루스와 코라를 모두 품을 수 있는 텍스트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뛰어난 영화다 ■

 

 

 


※  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crescendo_14/220361738426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립간 2015-06-12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의 지은이), 우에노 치즈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의 지은이),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의 지은이)가 이 영화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의 배경으로 `여성 주의` 입장에서 줄거리를 전개한다면 어떤 줄거리가 가능할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2 10:04   좋아요 0 | URL
제가 이 영화 보면서 느낀 점은 감독이 흥행뿐만 아니라 비평적 면에서도 쓸거리를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었씁니다. 아마도 다양한 여성 글쓰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긴 이 영화에서 여성은 기존 영화와는 달리 적극적입니다.체제순응적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쁜 여자`입니다. 그 쾌락이 여성 관객을 속 시원하게 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마립간 2015-06-12 10:21   좋아요 0 | URL
저는 체제 순응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나쁜 사람이지, 나쁜 여자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영화 줄거리에서 여성주의적 관점이 적용된 스토리가 나온다면, 저의 인식 한계는 확장될 것이고, 통찰의 높이는 좀 더 높아지겠죠. 제 상상력의 한계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2 11:2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조지 밀러 감독이 여러 측면을 고려한 게 있습니다. 일단 여성 전사`라는 측면에서 캐릭터가 새롭잖습니까. 지아이제인 같은 어설픈 마초 여성은 아니라는 점이죠. 하튼. 마립간 님, 요 영화 함 보십시오. 꽤 재미있습닏.

samadhi(眞我) 2015-06-13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이 영화를 보고 논문을 쓰셨네요. 프로이트가 까딱 놀라겠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3 05:49   좋아요 0 | URL
프로이트 할아버지 함 만나고 싶네요....

samadhi(眞我) 2015-06-13 05:50   좋아요 0 | URL
맞짱 뜨시려구요? 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5-06-13 05:57   좋아요 0 | URL
아니요.. ㅋㅋㅋ 제가 프로이트를 얼마나 흥미롭게 읽었는데요... 상담 함 받아보려고요.
프로이트가 어떤 논문을 쓸지 기대가 됩니다.

반딧불,, 2015-06-20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립간님 서재 링크 탔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제 생각과 상당히 유사해서 댓글답니다.
그.러.나. 어설픈 페미니스트입니다만 이 영화는 페미니즘 영화가 전혀 아닙니다. 젠더적인 남성성을 가진 퓨리오사에 대한 제 느낌은 기가 막히다는 것. 그리고, 영화에 대한 느낌은 불유쾌하다는 것입니다. 전혀 해방감도 없었고, 상징하는 것들에서 혐오를 느꼈습니다. 특히 교묘한. 교묘한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의도적인 섹슈얼리티에는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저는 그 기타맨에게서도 해방감보다는 암울함이 더 강했습니다.
초면에 실례가 아니었으면 합니다.꾸벅.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0 15:17   좋아요 0 | URL
어설픈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어설픈 페미니즘이라는 말씀이시죠 ?
반딧불 님이 어설픈 페미니스트이다, 라고 걸로 이해해서 다시 보니 이 영화에 대한 정의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