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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선의 궁궐을 애호하는 한사람으로서 한 마디 할련다.

몇 해 전이었던가 낙선재 뒤쪽 일대를 개방한다고 해서 특별관람을 신청하여 보았던 기억이 있다. 조선의 멸망을 옆에서 지켜보았으며 625사변 때에도 낙선재에 머물며 고궁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을 순종비이신 황후 윤씨와 고종의 아들인 영친왕의 부인으로 일본 왕족인 왕비 이방자씨가 삶을 마친 곳이 바로 낙선재이다. 그러한 곳을 숙박시설로 이용한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1. 그것도 외국인에게만 거금을 받고 한단다. 돈에 환장했나?

 

2. 왕궁에 외국인을 편히 재우기 위해 거금을 들여 내부시설을 고친다는데 문화재는 원형을 고수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무엇하러 비싼 돈 들여서 경복궁을 복원하는 등의 역사를 벌이는가. 그냥 지금대로 둘 것이지.....

 

3. 불과 얼마 전에 숭례문을 개방해 놓고서 관리 소홀로 불타는 참사를 겪었다. 만일 낙선재에 혹여 불이라도 난다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럴리 없다고??? 

 

4. 찬성하는 쪽의 목조로 지어진 전통가옥은 사람이 살아야 된다는 주장에는 한옥에 다년간 살아본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잘런지 모르겠으나 고작 몇 번 그런다고 변하는 건 거의 없을 터이다. 나무는 사람의 손때가 많이 가야 된다. 마루널은 내 생각에 하루에 최소한 세 번은 닦아줘야 된다고 본다. 다시 말해 상주하지 않는다면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5. 그리도 궁궐을 아끼신다면 관리인원을 늘리고 소제하는 자원봉사자를 더 자주 모아서 청소를 하고 그도 부족하다면 차라리 조선왕실의 후손을 윤번제로 우선 시험삼아 조선후기의 정궁인 동궐 말고 덕수궁에 살게 해 보라. 그리고서 부작용이 없다면 시행해도 늦지 않으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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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적지 않은 돈을 책 구입에 쓰는 나로서는 요즘 저으기 당황하고 있다. 왜냐하면 중고책값의

 

이상현상 때문이다. 도서 정가제가 실시되기 이전에는 책의 유무에 따라 2할에서 3할정도의 보통 싼

 

가격으로 책을 구입했었다. 그런데 정가제가 실시되고나서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 자주 목격된다.

 

중고가가 거의 정가와 비등한 것이다. 처음엔 몇몇만 그러려니 했는데 다시 보니 거의 다 그렇다.

 

중고책 판매자들이 약간 이상해져서 다들 담합을 한 것인지 도대체 이해가 안된다. ^^

 

아뭏든 나라에서 실시한 도서정가제가 나 같은 소시민 평국민에겐 좋지 않은 듯 하다. 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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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4-24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고 책이 재고 가 없을때는 정가보가 더비싸게 나오더군요.ㅎㅎㅎ

狂人 2015-04-24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히 그렇지요. 그런데 절판이 되지 않았는데도 정가대로 파는 건 왜일까요? ^^ 도장도 유래가=유레카인이네요. 멋집니다. ㅎㅎ
 

고궁에 즐겨 가기 시작힌 지가 어언 스무해 남짓 되었다. 처음에는 근정전 회랑에 무턱대고 앉아 근정전 지붕의 곡선 맵시와 인왕산 마루금의 아름다움에 취해 볼려고 마냥 쳐다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한동안 열심히 사진을 찍으면서 새로이 개방된 창덕궁 후원과 낙선재 특별관람, 경복궁 집옥재  등을 보는 재미로 자주 갔다. 일반관람도 비 오는 날이면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어 좋고 눈이 오거나 아주 추운 날엔 도심 한복판에서 적막을 느낄 수 있어 그 또한 아주 좋았다.  

최근에 우연히 경복궁 경회루를 개방한다는 사실을 알고 두어달 전에 신청해서 관람하였다. 그런데 안내하시는 해설사의 설명이 영 마땅치 않았다. 원래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여러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는 그 분의 영향력을 감안해서 살짝이 지적아닌 지적을 하였다.  

그 분 설명에 의거하자면 경회루는 주역의 원리에 의해 지어졌다고 하는데 딱 보기에도 세 개의 다리하며 세 개의 방 등 그런 요소가 많이 보였다. 하지만 그 분 왈 음양 곧 양의가 4괘가 되고 4괘가 8괘가 된다는 것이었다. 과문한 탓에 4괘를 들어보지 못해서 그분에게 4괘가 아닌 사상인 것 같다고 말씀드리고 경회루의 창이 48개인데 왜 48개인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 또한 궁금증에 빠졌다. 처음에 시초 수를 생각해 보기도 하고 여러 모로 궁리하였지만 알 길이 없었다.  

책을 미처 찾아보지 못하고 있던 차에 담양 소쇄원에 들렀다가 제월당의 현판 설명을 들은 것이 의문점이 풀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근자에 제월당에서 두번이나 뵈었던 어르신의 설명에 조선 선비들에게 시 48수가 많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상경하자마자 뒤져보니 안평대군에게도 48수가 있는데 이는 주역 6효에다 8괘를 곱해서 얻어진 수라는 것이었다.  

80년대에 김성호씨의 <비류백제와 일본의 기원>을 읽으면서 각 종족에 따라 좋아하는 수와 즐겨쓰는 지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 나는 늘 수에 관심이 많았다. 요사이 동양 고전을 다시금 제대로 공부하면서 내 나름대로 정리하며 새삼 크게 재미를 느낀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데 화두처럼 늘 머릿속에 그 궁금함을 담고 있으면 언제 어느 곳에서건 실마리가 풀리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인생 살면서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이라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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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4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랫만에 들렀다가 이 글을 읽고 저 또한 궁금하여 검색해 보았더니,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의 글이 눈에 띄네요..기둥이 48개인 이유가 상세하게 나와 있어 옮겨왔습니다...경회루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는데, 한번 가보고 싶네요..좋은 가을입니다. 안녕히...

고종 때의 대신인 정학순(丁學洵)이 지은 <경회루전도(慶會樓全圖)>에서는 경회루 축조의 의미를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이 아니라 유교적 우주질서를 체계화하여 설명하려 하였던 역(易)의 원리에 따라 설명코자 하였다. 이는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의 건물들이 유교적 이념에 근거하여 하늘과 땅의 이치를 담으려고 했다는 것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경회루는 48개의 기둥을 사용하여 세웠는데 만들어지는 칸이 모두 35칸으로, 주역의 64괘와 밀접한 36궁 즉 육육궁(六六宮)과 관련이 있다. 건물의 칸수가 35로 36 중 1이 모자란 것은 비어있는 허공이 태극의 하나라는 뜻이 있어서 이를 합쳐 36이 되기 때문이다. 육(六)은 주역의 팔괘 중 감괘(坎卦)로 큰물을 상징한다. 따라서 경회루 축조의 뜻이 원래 불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경복궁 전면의 관악산이 불타는 모습 즉 화형(火形)을 하고 있어 경복궁이 화재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풍수지리설과 실제로 빈번했던 화재에 대응하기 위하여 이런 상징성을 동원하여 경회루를 축조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동(銅)으로 만든 용을 연못에 집어넣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용은 8괘 중 건(乾)괘에 해당되는 것으로 금생수(金生水)의 오행(五行) 원리에 따라 불을 제어한다고 한다. 실제로 1997년 연못 준설 때 이 동용이 발견되어 <경회루전서>의 내용이 사실로 확인된 바 있다.

이외에도 <경회루전서>에서는 유교적 질서가 건축계획에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을 하고 있다. 즉 경회루 평면은 3중(重)으로 되어 있는데 제일 안쪽 3칸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의미하고 기둥 8개는 8괘를 의미한다고 한다. 내진(內陣) 칸은 12칸으로 1년 12달을, 기둥 16개에는 각각 4개씩의 문짝을 달았는데 이는 주역의 64괘를 의미한다. 외진(外陣) 기둥 24개는 24절기(節氣)를 의미한다고 한다. 즉 당대인들의 관점에서는 경회루가 유교적 철리(哲理)를 가득 담고 있는 상징이기를 염원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狂人 2011-10-04 17:16   좋아요 0 | URL
네, 이런 정보도 있었군요.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다만 36궁을 위해 48이란 수를 썼다기 보다 6곱하기 8로 보는 것이 조금 나을 듯 싶네요. ^^
 

언제인가 구한말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가 쓴 글을 읽었다. 그가 우리나라에 대한 느낌을 쓴 부분 중 이런 구절이 있었다.

 '조선은 너무나도 조용하여 간혹 개 짓는 소리가  들릴 뿐 평온하고 한가롭다고'

대총 이런 구절이였던 거 같은데 지금도 시골에 가면  간혹 느낄 수 있는 그런 풍경이리라. 물론 그렇게 드러난 모습이 다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요즈음 우리 사회를 보면 조용함이 무척 그립다.

어젯밤 몇 년만에 다른 분들의 서재를 둘러 보았다. 가끔 인터넷에서 댓글 단 것을 읽어보지만 대부분이 어린 학생들이 쓴 글이라 그러려니 하고 이해하는데 어제 본 서재들의 글들도 나를 심란하게 했다...............

때로는 시시비비를 떠나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면서........ 그런 힘들이 모여서 이 사회를 이끌어 간다고 생각한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간에 난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 골목이나 쓸련다.

글 못 쓰는 내가 감히 남의 글을 비방하려는 뜻은 결코 없다.

그저 조용히 나를 觀하며 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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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자주 옛 서울 사대문 안을 배회한다. 종묘와 창경궁을 거쳐 명륜동과 혜화동을 거닐기도 하고 북촌 일대인 안국동, 가회동, 화동 일대를 거닐면서 인왕산을 바라보며 겸재는 어디 즈음에서 인왕제색도를 그렸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고 경복궁 근처  통의동, 육조거리도 교보문고 가는 김에 가끔 들러본다. 때로는 서울 역사박물관 특별 전시회를 보러 가면서 경희궁과 정동의 덕수궁 돌담 길을 걷는다.

허나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즐겨가는 곳은 볼 일도 있고 해서 자주 들르는 사직단이다. 주례에 동종묘서사직이라고 했다던가 하여 정궁인 경복궁 서쪽에 지어진 사직단.  조선조 때에는 이 곳 사직단에 노송들이 울창하여 인왕팔경 중의 하나였다지만  지금은 그 흔한 우리 소나무 한 그루 없다. 몇 해 전에 우연히 사직단을 찍은 구한말 사진 몇 장을 보았는데 우거진 송림은 가히 한 폭의 그림같았다. 이제라도 소나무를 좀 심으면 어떨런지.

요사이 사직단에서 길건너 남쪽으로  내자동에 공사가 한창이다. 이 공사가 끝나면 이제 인왕산에서 목멱산을 보기가 힘들 거 같다. 꼭 사대문 안에 이런 고층건물들을 계속 지어야 하는건지. 저 공사 현장에서 터파기할 때 유물이 꽤 나오지 않았을까 하고 아는 분과 잠시 이야기도 나누어 보았다.

비 온 뒤 인왕산에 올라 필운대에서 북악산, 낙산, 목멱산을 쳐다보며 그 아래 옛 서울 사대문 안을 쳐다보며 또 다시 지난날의 서울 한성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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