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시원한 글쓰기
오도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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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속에 길이 있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가끔은 책을 덮고 풍경 속으로 들어갈 때 그 길이 보인다.

 

  뜻 있는 사람끼리 모여 글공부를 한다. 잘 익은 밤처럼 토실토실한 남의 글을 읽기도 하고, 덜 말린 대추 같은 누글누글한 제 글을 다듬어도 본다. 남의 좋은 글을 읽을 땐 감탄하고 부러워할 입과 맘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자신의 글을 숙제로 내놓아야 할 날짜가 다가오면 안절부절못한다. 남보란 듯 합당한 이유가 생겨 떳떳이 결석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글 좀 잘 써보고자 모였는데 글이 제 발목을 잡아 버린다. 이런 부조리한 상황이 있을까?

 

  잘 쓰고 못쓰고를 떠나 훈련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글쓰기는 부담스럽기만 하다. 만만하고 쉽다면 애초에 모임을 만들어 공부할 필요조차 없을 테니까. 결실의 계절이자 독서의 계절인 가을이 왔는데도 우리들의 쓰기는 지리멸렬하기만 하다. 수고 없이 좋은 글이 내 곁에 남을 리 없다. 그럴수록 책상 앞에 앉으면 압박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즐거워야 할 글쓰기가 괴로움이 된다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무조건 쓰려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글이 되지 않을 때는 글 밖으로 눈을 돌리는 게 맞다.

 

  활자 빽빽한 종이 대신 아름드리 소나무 솟고 늦은 민들레가 피는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이름 붙여 야외수업. 오늘 만큼은 숯불 삼겹살과 소주 한 잔도 풍경의 일부가 되어도 좋다. 밋밋한 평화보다야 울퉁불퉁한 들끓음이 글 소재로는 제격이 아니던가. 연필을 버려야 할 적당한 타이밍이었을까. 출석률이 좋은데다 여유가 넘친다. 유머가 길을 트니, 배려가 뒤따른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건, 반만 맞는 말이다. 때론 책을 버리고 풍경 속에 흠뻑 젖을 때 길이 보인다. 푸성귀 뜯고 씻던 시린 손, 쉴 자리 마련하려 굽히던 무릎, 연기 마셔가며 모닥불 피우던 잔기침 소리, 바람막이로 서서 따뜻한 물 끓여내던 환한 미소 이 모든 것들이 자연 속에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만들고 내고 있었다. 글은 책 속에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풍경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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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자로 이룬 문자혁명 훈민정음 나의 고전 읽기 9
김슬옹 지음, 신준식 그림 / 미래엔아이세움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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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날을 다시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움직임이 보인다. 무엇보다 반갑다. 단순 국경일에 머물러 있는 한글날을 법정공휴일로 되돌려 놓자는데 의견을 같이 한 국회 문방위 소속 의원들이 법률안 발의를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 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경우 한글날은 다시 공휴일로 지정된다. 잘하면 내년엔 공휴일로 복원된 한글날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신세대들은 실감나지 않겠지만 내 기억 속 한글날은 언제나 공휴일이었다. 하지만 공휴일이 너무 많아 노동 생산력이 떨어진다는 기업들의 권유로 1991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되는 설움을 당했다. 경제 논리에 의해 몇몇 법정 공휴일이 추억 속으로 사라져갈 때 그 누구보다 한글날만은 살아남기를 바랐다. 청춘 시절부터 한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모임을 지속해온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한글날 같은 의미심장한 날이 경제 논리 뒷전으로 밀려야 한다는 게 분통터지고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글은 만든 날, 만든이, 만든 의도 등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문자이다. 이 중 창제 의도에 대해 나는 언제나 주목한다. 할 말이 있어도 글을 몰라 어찌할 줄 모르는 백성을 불쌍히 여겨 한글을 창제했다는 세종대왕의 말은 진실이다. 물론 거기에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온 백성에게 알려 통치권을 정당화하고 싶은데, 한문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기득권층은 자신들이 누릴 호사가 일반 민중에게 조금이라도 옮아가는 것은 꿈에도 원치 않았다. 일반 백성은 무지할수록 백성의 역할에 충실할 것이었다.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신하들이 훈민정음 반포를 그토록 반대하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피지배층과 효율적인 소통을 원했던 왕권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고 싶지 않은 신권의 견제 사이에서 태어난 부산물이 훈민정음이었다. 극소수만 누리던 혜택을 일반 민중에게로 옮겨 가, 왕권 강화와 안정된 정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던 세종대왕의 전략적 문자 혁명은 정작 당시에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 후세대인 우리가 오롯이 그 혜택을 누리는 건 아이러니이자 행운이다.

 

 

  한글날이 다시 공휴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훈민정음 창제의 의미와 역사적 의의를 살피는 것은 물론이고, 말글 하나된 민족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글 없는 한민족 백성은 생각하기조차 싫다.

 

 

 

***위의 책을 읽다 김슬옹 저자의 대학 학부 논문이 어느 정도 '훈민정음 창제의 정치적 의미'를 주제로 삼았지 않았을까 싶어 구할 수 있다면 구해 읽고 싶다.

  학교 다닐 때 다른 누군가 쓴 미니 논문을 읽은 적 있는데, 그 때도 한글 창제가 단순히 백성을 어여삐 여긴 사실을 넘어, 왕조의 통치권 확보와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기득권 신하들을 거치지 않고)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능하였다는 논지에 신선한 충격을 먹은 적이 있다.

 삼십 년 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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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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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독이냐 정독이냐에 대한 답은 없다. 취향의 문제인데다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정보를 습득해야 하거나 이야기의 흐름에 관심이 많으면 자연히 속독 쪽으로 치중하게 된다. 반면 읽어내야 한다는 강박이 없으면서 문맥 하나하나에서도 소우주를 발견할 만큼 의미를 부여하는 치라면 정독이 어울린다. 물론 읽는 주체뿐만 아니라 책의 종류와 내용에 따라서도 그 방향이 달라진다. 자기개발서 앞에서 정독을 고집할 필요 없고, 장자를 펼치면서 속독을 외칠 자 없을 것이다.

 

속독하니 자연스레 다독이 되는 사람들은 많다. 그건 이상할 것도 부러울 것도 없다.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다. 하지만 다독자이면서 정독하는 사람들은 드문데,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책 읽기의 고수이다. 내가 진심으로 부러워하고 신기해하는 족속들이다. 책에 관한 온갖 정보와 리뷰를 공유할 수 있는 인터넷 서점에 가면 그런 사람들이 넘쳐난다. 밥벌이로서 할 일이 있으면서 짬을 내 읽는 것도 벅찰 터인데 많이 읽으면서 깊이까지 있으니 저들이 사람일까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많이 읽으면서 깊이까지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될 때는 차선책으로 적게 읽지만 깊이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많이 읽으면서 얕게 읽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않겠나 하는 위안을 삼아보는 것이다. 고수가 아닌 한, 한 달에 삼십 권 읽는 것보다 세 권을 제대로 읽는 게 더 나은 독서법일 테니까.

 

그리하여 제대로 읽는다는 명분하에 내게 눈도장 찍힌 책들은 대개 지저분해져 있다. 한 문장 한 문장에 매료된 상태에서는 밑줄 긋지 않을 수 없고, 접고 싶은 부분이 시시각각 나타나며 옮겨 적고 싶은 부분엔 별표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책이 더러워진 만큼 애정의 강도도 높아진다. 한 번 읽고 책장 안에 갇히는 것보다 자주 보듬어 닳은 것이 깊이 읽힌 것이니 사랑받아 마땅하다.

 

빨리 읽고 많이 읽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적게 읽더라도 깊이 다가와 내 의식을 한 방 때려줄 수 있는 서늘함, 그것이 제대로 된 읽기이다. 박웅현 저자가 소개한 것처럼 카프카가『변신』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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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10-07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까지도 속독에 주력하는 단계입니다. 제가 대부분 읽는 책들이 역사책인지라 같은 사건을 다룬 여러 사람들의 책을 읽고 어떻게 다른지, 어떤 것이 그 사건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물론 저도 인문학 책들을 읽을 때에는 내용을 곱씹으면서 읽습니다.

다크아이즈 2012-10-08 07:38   좋아요 0 | URL
속독, 다독, 정독 다 되는 알라디너 고수 중 한 분이 세인트님이시지요. 알라딘 올 때마다 '저것들은(죄송!!) 사람이 아닌 게야. 별종이야' 하는 생각이 드는 분들이 계신데 그 분 중에 님도 포함된다는 사실.

부러워하면 지는데, 마이 부럽습니다. 크~~
 
이솝우화로 읽는 경제 이야기
서명수 지음, 이동현 그림 / 이케이북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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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공짜는 없다.

  미국 격언에 <There is no free lunch>라는 말이 있다. ‘프리 런치’란 서부 개척시대에 술집에서 내놓던 미끼 점심을 말한다. 일견 공짜로 보이지만 실은 비싼 술값 안에 점심 값도 포함되어 있다. 데이비드 콜랜더 교수가 쓴 경제학 책에도 그런 예화가 나온다.

 

  경제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왕이 학자들에게 책을 쓰라는 지시를 내렸다. 몇 년에 걸쳐 수십 권의 책이 완성되었다. 방대한 양에 질린 왕이 한 권으로 줄이라고 명했다. 한 권의 완성본을 보자 그것도 길다고 왕은 트집을 잡았다. 한 줄로 줄이지 않으면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했다. 어차피 죽을 몸, 점심이라도 먹을 요량으로 학자들은 음식을 배달시켰다. 점심 값이 없었던 그들을 보고 배달원은 투덜대며 음식을 도로 가져가버렸다. 그 때 배달원이 한 말에서 힌트를 얻어 학자들은 한 줄 요약문을 써낼 수 있었다. ‘공짜 점심은 없다’였다.

 

  미끼라는 걸 알면서도 인정에 얽매이거나 순간의 판단 실수로 공짜에 혹할 때가 있다. 추석 앞둔 대목에 그런 경우를 겪었다. 유명 대학 음료 사업부라며 콜 센터 직원이 몇 차례나 전화를 걸어온다. 내가 속한 모임에 판촉 행사 차 홍보 직원이 잠깐 들르겠단다. 십여 분 시간만 내주면 되고 부담 느낄 필요가 없는데다 점심 도시락까지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공짜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차피 먹어야 할 점심, 그렇게라도 해결하자는 생각도 없지 않아 약속을 잡아 버렸다.

 

  홍보 직원이 준비해온 고급 일식 도시락을 돌리고 판촉 멘트를 한다. 그 어떤 강매도 강압도 없이 정중한 톤으로 설명을 한다. 난공불락인 아줌마 고객을 상대로 한 가계의 책임을 지고 있을 판촉 직원은 최선을 다한다. 듣고 있는 고객 입장에서 맘이 짠하다. 눈치껏 주변을 살피니 다른 사람들 맘도 같아 보였다. 그렇다고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 블루베리 음료를 무턱대고 사겠다고 계약서에 사인할 수도 없다.

 

  다만 어릴 적 제 아비를, 지금의 제 남편을 보는 것 같은 가장의 무거운 어깨를 목도한 우리들은 도시락에다 코를 박은 채 별 말이 없다. 이런 먹먹한 분위기였으면 차라리 만날 약속을 하지 않는 게 나을 것이었다. 반도 먹지 못한 도시락을 밀어낼 때, 단내 나는 판촉남, 아니 한 집안 가장의 말끝이 흐려지고 손끝 또한 떨리는 걸 보았다.

 

  결코 공짜 점심은 없었다. 평생 내가 먹은 음식 중 가장 값나가는 점심이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준 한 끼의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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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만들어진 신화
송호정 지음 / 산처럼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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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고 지내는 필리핀 친구가 있다. 귀화한 지 몇 년 되었는데 타국에서 온 사람들 대개가 그렇듯 우리말이 서툴 수밖에 없다. 당연히 우리 역사와 문화에도 낯설다. 그런 그녀와 추석 연휴를 이야기하다가 개천절까지 넘어오게 되었다. 그녀가 묻는다. 개천절이 뭐냐고? 모국어를 맘대로 구사하는 사람들끼리도 개천절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난감한데, 이방인 출신이 진지하게 물어오니 당황스럽기만 하다.

 

  단군이 우리나라 조선을 세우신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이라고 뻔한 설명을 하는데 뒤통수가 당긴다. 아무래도 평소에 그런 순수한 의미보다는 합법적 공휴일이 하루 주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의 경우 추석 뒤에 개천절이 이어지는 바람에 고마운 휴일이네, 하는 정도의 생각만을 했던 게 사실이다.

 

  필리핀에도 독립기념일이 있는데 그것과 비슷한 것이냐고 묻는다. 그건 아니라고 말했다. 애매모호하기만 한 이름의 광복절이 그들의 독립기념일과 비슷할지 몰라도 개천절은 오롯이 제가 나고 자란 뿌리의 정체성을 살피는 것과 연관이 깊다. 유수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지 않으면 갖기 힘든 뼈대 있는 기념일이란 말이다. 하지만 그 진중한 의미를 정작 우리는 잊고 산다.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최초의 국가 조선을 건국했음을 기리는 뜻으로 제정한 날이 개천절이다. 하지만 ‘하늘이 열린다’는 개천의 본뜻은 이에 앞선 기원전 2457년 환웅 시대로 소급된다. 하늘신인 환인의 뜻으로 환웅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백두산 신단수 아래 신시를 열어 홍익인간의 정치를 펼치기 시작한 날이 음력 시월상달 초사흗날이었다. 상달은 으뜸달을 말하는데, 풍요와 수확의 계절인 시월이 상달이 되는 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개천절은 이처럼 건국 신화의 경축일이자, 민족국가로서의 정체성 확립을 근거하는 자긍의 의미가 담겨 있다. 당시 시월상달은 당연히 음력이었겠지만 그것을 따지는 건 단군 이야기가 신화냐, 역사냐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일반 시민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우리가 물이라면 샘이 있을 것이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는 것을 일 년에 한 번쯤 되새기는 날이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 자긍의 뿌리가 올해로 4345년째이다. 그야말로 반만 년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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