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립백 부룬디 뭉카제 - 10g, 1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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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출근 전이나 출근하고 내 자리에서 드립 커피를 내리는 여유를 부린 때가 있었던 것도 같은데, 먼 옛날이 되었다. 실속 없이 바빠져서 믹스커피도 겨우 먹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고도 퇴근 뒤에는 뭐라도 끄적여보겠다고 카페 가서 뭘 한 잔 씩 마시고 오니까... 엄마가 드리퍼와 드립포트를 찬장 안쪽 구석에 치워 놓으셨다. ㅋㅋㅋ 어제 백만년 만에 아직 남아있는 우에우에테낭고 디카페인을 내려먹었다. 안녕 티타늄 도금이 멋진 깔때기야. 스테인리스라면서 금세 녹이 난 주전자야. 잘 있었니. 조상님들 평안한 땅에서 안녕하시죠. 
 사실은 말입니다...캡슐 머신을 사 버렸다 말입니다...기계 한 대 값이면 원두 일 년치 사 먹는다 안 산다 해놓고선 결국 구름 같은 우유거품 몽글몽글 내주는 기계까지 원두 이 년 치 값 주고 사 버렸다. 거기다 신입 환영을 빙자한 대량 판매 찬스(구매 혜택? 아니죠...)로 캡슐까지 150개 샀다. 커피머신과 함께 닌텐도 스위치와 동물의 숲도 샀다. 추위는 사람 마음을 허하게 하고 옆 사람 통장은 심하게 마이너스 상태인데 그럴 수록 에이 이미 빚쟁이인데 조금 더 써도 티도 안 나 하면서 뭔가 마구 지르는 병약한 날들이다. 
 그러니 전자책 사고 났는데 왜 적립금 또 줘...이달은 뭐를 살까 누가 낙서 해 놓은 옛 중역판 종의기원을 새 번역판으로 갈아 봐? 하다가 더 먼 기원을 찾으며 이건 애들도 같이 볼 수 있어! 하고 세상을 이루는 모든 원소 118, 이라는 주기율표 도감?백과를 장바구니에 담고 스티커북도 담고 아니 300원 만 더 지르면 3만원 이상 천원 할인 쿠폰을 쓸 수 있잖아, 알라딘에 300원짜리가 어딨어...하다가 신작 커피 맛은 봐야지? 하는 데 생각이 닿아 드립백 한 봉지를 주문했다. 사고 보니 아니 5개 묶음팩 샀으면 커피 쿠폰 쓰는 건데...하면서 소비의 망령이 무한대로 확장....

  감귤, 호두까지는 모르겠는데 내려서 한모금 마시니 구운 밤은 끄덕여지는 맛이었다. 식은 뒤에 마시니 감귤도 따라왔다. 다들 늦가을에 만나는 열매들이다. 어려서는 귤이 그렇게 좋아서 제주 갔다 사온 귤을 나 혼자 한 박스 다 먹곤 했는데 요즘엔 그 나이 된 큰꼬맹이가 귤대장이다. 하루에도 몇 번 씩 귤 먹어도 되요? 하고는 제거랑 동생 거 까지 귤껍질 표면을 꼼꼼 씻어 까 먹는다. 세 살 꼬맹이도 귤 까는 재미에 잘 먹다가 요즘엔 터뜨리는 용도로 변경되어 시름... 저만할 때 나는 나름 시골 출신이라 (내가 어려서 살던 동네는 내가 열두 살 까지 군이었다...) 뒷산에 가서 친구들과 밤 한 봉지 씩 주워오곤 했다. 낙엽 사이에서 반짝이는 밤알을 발견하는 일은 보물찾기 마냥 신이 났다. 뾰족한 밤송이까지 신발 신은 발로 챡 벌려 밤알을 꺼내는 게 재미있었는데. 대도시에서 태어난 내 꼬맹이 둘 중 하나는 어려서 산 동네 살아서 도토리만 열심히 주워봤고 또 하나는 어린이집에 등록은 해 놓고 일 년 내내 한 번도 못 가보고 집콕이라 도토리도 못 주워봤다. 에미는 밤맛나는 커피나 홀짝이며 책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엄마는 나보다 책이 더 좋아? 하고 원망하던 큰꼬맹이가 곧 포기하고 스위치를 켜고 모여봐요 동물의 숲에 가서 도토리를 줍는다. 나는 여러모로 배신자다. 무난하고 향 좋고 목넘김 좋은 밤향 커피를 뒤로하고 이따가는 뭔 색깔 캡슐을 내려볼까 하고 벌써 궁리중이잖아... 돈을 벌러 나가면 드립 내릴 시간이 없다. 깔때기에서 떨어지는 커피 방울이나 보며 허송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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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1-17 02: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300원짜리가 어딨어?!!! ㅋㅋㅋ 빵터졌는데. 근데 밤맛 나는 커피라니......저 밤에 환장하는데 ㅠㅠ 도대체 밤맛 나는 커피는 무슨 맛일까? 먹고싶어지네요.

반유행열반인 2020-11-17 06:30   좋아요 0 | URL
구운 밤향(기분 안 나쁜 약한 탄향)에 조금 고소한 정도이구요 (말린 밤 우린 맛?! ㅋㅋㅋ) 식으면 산미도 강해져서 감귤 붙였나 봐요. 바밤바나 밤라떼 같이 기름지고 단 맛있는 밤맛은 아니에요ㅋㅋ맛과향은 너무 주관적 영역이라 대체로 좋다고들 하시는데 탄맛 싫다고 200그램 사서 한 번 먹고 버렸다는 분 보고 놀랐어요(나한테 버려....)

반유행열반인 2020-11-17 06:32   좋아요 1 | URL
아!!그리고 예전에 300원 주고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라는 책을 샀던 것 같아요 무려 알라딘에서!!! 중고 땡처리가 있었는데 굳이 1500원짜리 드립백 산 건 역시 새 커피가 먹고 싶었나 봅니다 ㅎㅎ

하나 2020-11-20 0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카하시 겐이치로 왜 그렇게까지 땡처리 되고 있어...ㅋㅋㅋ 아니 무슨 커피 후기 이렇게 재밌게 써여. 동숲 요즘은 구할 수 있나봐요. 여름에 되게 갖고 싶을 때 프리미엄 심하게 붙어서 참았는데, 지금 따라 사면 다시는 알라딘 마을에서 저를 보실 수 없겠죠? ㅋㅋㅋㅋㅋㅋㅋ 엄마한테 배신당하면 동숲켜서 도토리 줍는 어린이라니 열반인님 사랑받고 계시네요. *_*

반유행열반인 2020-11-20 06:59   좋아요 1 | URL
저도 게임 시작하면 식음전폐할까 싶어 다른 가족들에게 양보만 하고 있어요 ㅋㅋ게임기나 타이틀 여기저기 팔긴 팔더라구요. 땡처리라 사기만 하고 읽지는 않았습니다 ㅋㅋㅋ일본야구는 커녕 한국야구도 잘 몰라서...그러면서 머니볼이니 이런 거 잘도 주워 모아둠 ㅋㅋ

하나 2020-11-20 11:2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식음전폐 ㅋㅋㅋ 저는 전적이 있어요 예전에 동생 초딩 때 바람의 나라 중독 하도 심해서 그게 뭐길래 그러나 싶어서 접속해봤다가 (촙)지존찍고 끔... 난 초딩도 아니고 대딩이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 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박박 우겼지만 동숲 사면 뇌를 그 섬에 업로드 할 인간 ㅋㅋㅋ
 
[전자책] [고화질세트] 인간실격 (총3권/완결)
이토 준지 / 대원씨아이/DCW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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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3 이토준지. 다자이오사무 원작.

일본 작가 소설은 읽은 게 거의 없다. 제목과 작가 이름만 줄창 듣다 장강명 책에 이토준지가 만화로 그렸다고 하길래 꾀가 나서 소설보다 만화를 먼저 보기로 했다.
이십 대에 본 영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에서 마츠코가 아버지의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며 온갖 광대짓을 하고, 사랑받으려고 엉터리 남자들에게 매달리고 하는 모습이 마음 아프면서도 거울 보는 것만 같았다. 거기서 마츠코가 ‘우마레테 스미마센’ 하는데 그게 인간실격에 나온 말이라 했다. 가끔 자조할 순간에 농담처럼 잘 써 먹은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만화는 참...익히 봐온 이토준지의 아지랑이 같은 곡선의 반복과 조각난 토미에처럼 복사본 마냥 그려지는 여체에다 원작의 땅파고 내핵까지 들어가는 우울과 나 왜 살지 하는 분위기까지 찰떡이었다. 그런 자괴감과 자기혐오와 자기파괴 본능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게 또 슬펐다. 요즘 왜 자꾸 슬퍼. 단풍이 너무 빨갛고 노랗게 예뻐서 슬프지.
사람의 끝은 결국 죽음인 건 다 똑같은데 굳이 죽으려고 애를 쓰는 게 더 힘든 일인 것도 같았다. 죽는 게 귀찮아서 사는 사람도 제법 되지 않을까 싶었다. 참 열심히 자기와 주변인을 망치고 부수고 부지런한 인생...보다 보니 나는 좀 게으르게 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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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11-13 23: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토준지 그림체가 섬세해서 인간실격이랑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했는데, 스크롤 내려서 그림보고 깜놀랬어요 ㄷㄷ

반유행열반인 2020-11-13 23:45   좋아요 3 | URL
제일 약한 맛 위주로 퍼왔습니다ㄷㄷ 소설은 또 어떨까 궁금한데 너무 땅파고 들어가길래 천천히 읽으려고요. 기왕이면 더운 여름에ㅎㅎ가을 겨울에 읽기엔 너무 가혹해 보입니다...

Yeagene 2020-11-14 1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이토준지가 인간실격을 그렸군요..왠지 어울리네요 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0-11-14 12:45   좋아요 0 | URL
지나치게 어울려서 1권 본 날은 악몽 꿨어요..

하나 2020-11-14 15: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단풍이 너무 빨갛고 노랗게 예뻐서 슬프지.” 저도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에서 웃기고 싶은 마음 너무 공감해버려따... 그래도 가급적이면 게으릅시다! 남은주말도 잘 보내고 계시구요. 그래요 인간실격 같은 것은 여름에 읽읍시다! 에너지가 넘쳐날 때~ (촌음을 아껴 내 스타 관리하러 옴)

반유행열반인 2020-11-14 15:45   좋아요 1 | URL
아이참 촌각 하나 허투루 쓰지 마시고 불태우고 오세요 ㅋㅋㅋ 저 같은 비천한 거 자꾸 덕질하시면 남들이 하나님이 제 부캐인 줄 의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함 ㅋㅋㅋ(나 혼자 물고빨고 ㅋㅋㅋㅋ아 그것도 너무 웃겨요 실제로 그런 유저 봤다요...)

하나 2020-11-14 16:10   좋아요 2 | URL
아이유가 저 요즘 살 쪄가지고.. 이러니까 소리지르던 아이유 팬의 마음이 이해되네요(뭐가 살쪄!!!) (뭐가 비천해!!!) 헤헤 이만한 열정으로 부캐 굴리기 어려울텐데 이건 사랑인뎅 🧡 (그자 되게 외로웠나 보다...) 잘 다녀올게영 🔥
 
[전자책] 일단, 성교육을 합니다 - 소년부터 성년까지 남자가 꼭 알아야 할 성 A to Z
인티 차베즈 페레즈 지음, 이세진 옮김, 노하연 감수 / 문예출판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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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3 인티 차베즈 페레즈.

남자아이들을 위한 성교육책. 십대 후반부터 성인까지 아우를 수준이다. 그런데 왜 다 아는 내용이지…(하산해라 핫산! 이 책에 핫산 나온다….)
동성애에 관해 설명하는 비중이 높다. 퀴어 청소년에게는 도움이 될 것 같다. -하는 법 (예를 들면 키스하는 법) 같은 게 여럿 나와서 실용적이다. 이런 것까지 가르쳐줘야 하나 싶지만 모두가 처음이 있고 다 알 수는 없잖아….기본적인 예절과 안전과 동의와 자기긍정과 자기결정권에 관해 매우 자주 강조한다.
아들 둔 엄마라면 이 책을 권해 말아 하고 망설일 것도 같다. 굳이 몰랐을 걸 알려줘서 (어디까지 나오냐면 상세한 항문 자위, 항문 섹스 방법이랑 동성애 파트너 만날 수 있는 앱이랑 하여간에 무얼 상상하든 다 나온다...아 BDSM까지는 안 나옴…) 긁어 부스럼 아니냐 싶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차피 애들은 알아서 다 알고 할 거면 알아서 다 한다...기왕 할 거면 자신과 타인을 최대한 안전한 상황에서, 존중하면서, 올바른 방식으로, 책임감 가지고 하도록 가르치는 게 맞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엄마가 이 책 사주면 아들 새끼들은 절대 안 읽을 것 같기도… 자, 연애와 성생활을 시작한 청소년과 청년 남자들은 물론 여자들에게도 이 책을 권합니다. 정보의 불균형은 불평등을 낳으니까. 소녀들도 읽자. 으른들도 읽자. 젊은이들의 욕망을 이해하려고 애써 보자. 라떼는 어쨌는지 (입은 다물고) 뒤돌아 보자...
이제 성교육책은 그만 봐도 될 것 같아...성교육 강사로 나서도 될 것 같다…소설을 읽자. 왜 오늘은 다 권유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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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11-13 16: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인용하신 내용 보니까 저도 읽고 싶어지네요. 관계에 대한 조언도 되게 좋은 게 많은 거 같아요. 요즘 청소년들은 되게 좋겠다. 저도 소년소녀 시리즈는 구비하는 것으로!

반유행열반인 2020-11-13 16:35   좋아요 1 | URL
고전 같은 거 원전 읽기 힘들면 청소년용 다이제스트 먼저 읽고 입문하는 꼼수...애들 책이 더 좋아요 요즘에는...그래도 문학 만은 소화제 필요 없다는 자존심 ㅋㅋㅋ해설 붙은 거 안 읽을 거라고오! ㅋㅋㅋ 남자애들이 진짜 제대로 배워야 할 내용만 밑줄 그어왔습니다. 사실 논란 될 내용도 좀 있어요. 불법촬영물은 안 돼!!!하면서도 섹스팅 방법이랑 플러팅 방법이랑 여자 꼬시는 법 같은 거 막 가르침... 사회 생활 이성에 접근하는 법 하나도 모르고 사는 거 힘든 친구들한테는 도움 될 것도 같지만 잘못 읽으면 역효과일 것 같은 것도 많아서 ㅋㅋㅋ여자아이들은 이거 읽고 애들이 이런 수법 써도 넘어가지 마라 하는 용도로 ㅋㅋㅋ

하나 2020-11-13 16:40   좋아요 1 | URL
저는 푸코도 만화로 읽었던 거 좋아하고요 그리스로마신화도 만화부터 읽었어요 ㅋㅋㅋㅋㅋㅋ 꼼수 동감 😆 저는 자존심 같은 거 없고요 ㅋㅋㅋㅋㅋ 팟캐스트든 드라마든 제발 날 읽고 싶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요즘은 뭐가 재밌을까 생각해보니 나의 열반인님 ㅋㅋㅋㅋㅋ이 그 역할 해주시고, 팟캐스트나 유튜브 해주시면 더 좋을 거 같고 그렇네염... 좋은 책이네요 ㅋㅋㅋ 왜 여자는 안 알려주냐...

반유행열반인 2020-11-13 16:42   좋아요 2 | URL
아이 이 기회에 확 그냥 직장 때려치고 유튜버거지 한 번 되어 봐? ㅋㅋㅋ지나고보니 저는 철저히 텍스트형 인간 같습니다. 제 목소리 듣는 사람들 왜 다 자죠...이상하게 남들이 푸코푸코 올리브올리브 하면 저는 딴청하다가 아주 나중에 보게 되어요. 푸코 하나도 안 봤다는 말씀입니다 ㅋㅋ 좋은 책으로 판단하셨군요!!!!! ㅋㅋㅋㅋㅋ

하나 2020-11-13 16:4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 직장은 천천히 때려치시고 언젠가는 독서 유튜브하실 거고 하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ㅋㅋㅋㅋㅋㅋ 편집자를 아예 따로 두고, 그대 마음 속에 억압을 풀어놓아요 ㅋㅋㅋㅋㅋ 저도 그 마음 이해해요 ㅋㅋㅋ 저는 푸코 겨수님이 너무 좋아해서 억지로 읽었어요 ㅋㅋㅋ 뭐라도 배우고 싶어서요 💚
 
소녀들을 위한 내 몸 안내서 - 가슴과 배꼽 아래의 변화에서부터, 요동치는 사춘기 내 마음과 친구 관계의 어려움까지 내 몸.마음 안내서
소냐 르네 테일러 지음, 김정은 옮김 / 휴머니스트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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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2 소냐 르네 테일러.

읽다보면 내가 그 맘 때 읽었으면 참 좋았겠다, 싶은 책이 요즘엔 참 많다.
내가 열 살 때, 스무 살 때, 서른 살 때. 물론 지금이라도 읽어서 다행이야 싶기도 하다.
이 책은 여자 아이들을 독자로 삼아 몸이 자라고 변하는 과정과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는 내내 모든 몸은 특별하고 사랑할 만하다고 한다. 아름다운 몸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그 점이 좋았다. 다이어트도, 술도, 담배도, 약물도, 돈 벌려는 놈들이 네 몸을 휘두르는 거야, 거기에 휘둘리지 마, 하고 대놓고 말해주니 좋았다.
성교육은 모든 연령대에 필요하고,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자기 몸에 대해 아직은 알 필요 없다고 미룰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연령대의 눈높이에 맞춘 설명이 더 잘 받아들여지고 도움이 된다는 점도 인정한다. 이 책은 이제 막 가슴이 자라고 일 이 년 안에 월경과 체모와 온갖 신체, 정신 변화를 겪게 될 열 살 무렵의 아이부터 읽을 만해 보였다. 설명이 친절하고 쉽게 되어 있었다. 생식계와 호르몬 변화에 국한하지 않고, 건강한 삶을 위한 음식, 운동, 관계에 이르기까지 일상과 인생에 영향을 줄 중요한 부분을 함께 다뤄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책을 읽은 목적은 옆의 열 살 짜리에게 주기 전에 수위 확인을 위한 거였는데 무난하고 좋은 책이었다. 나도 그 나이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그랬다면 아홉 살 때 소설 영심이(그래 그 만화의 소설 버전. 하나면 하나지 둘이 아니야)를 도서관에서 빌려보다 ‘엄마 멘스가 뭐야?’하고 물었을 때 우물쭈물 답하지 못하는 엄마 앞에서 호기심을 접어버리며 괜한 수치심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아주 최근에야 읽은 책들이지만 이후 연령대 여성들과 여성에 관해 알아야 할 남성들에게 권할 만한 목록을 꼽아 보자면.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까지는 ‘질의응답’, 이십대 부터는 ‘마이 시크릿 닥터’도 괜찮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섹스라이프에 관해 고민하는 시기라면 ‘섹스하는 삶’도 읽을만 해 보인다. 거기에 더 나아가 며칠 전에 ‘윤리적 잡년’이라는 책을 사 버렸는데 이건 너무 나간 듯...서문 밖에 안 봤는데 다 봐야지 내가 잡년인지, 잡년이 나인지, 아니면 아직 택도 없는지, 잡년이 되고 싶은 건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두꺼워서 올해 안에 읽을지는 의문…

남자 청소년부터 이십대 초반까지도 커버할 만한 ‘일단, 성교육을 합니다’도 읽고 있다. 여자와 남자의 성교육이 다르다는 게 유감일수도 있지만 효과 측면에서는 맞춤형 책이 그닥 나쁘지 않은 것도 같다. 더 효과적이려면 여자, 남자용으로 나온 성교육 도서를 여자 남자 모두 두 종류 다 읽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읽고 있다…
두 책 다 좋은 부분이 자기 긍정, 자기 결정권, 다양성과 차이의 인정, 동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맥심 안의 가슴 크고 허리 가는 여자들이 아름다움과 섹시함의 기준이 되어 버리고, 포르노 속 몽둥이 만한 성기를 오래 거칠게 휘두르는 남자들이 평균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세상은, 많은 사람이 비정상이고 부족하고 못나다고 자신을 미워하게 만든다. 그건 너무 슬프다. 슬프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 괜찮다고, 매끈한 모습은 극소수에다 보정 기술의 결정체일 뿐 허상이라고, 다양한 모습 만큼 다양한 취향과 삶의 방식이 있다고 말해주는 책을 많이많이 읽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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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3 16: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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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3 16: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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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3 16: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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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3 16: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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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3 16: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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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3 16: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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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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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1 김연수.

Jaurim - #1
https://m.youtube.com/watch?v=SpVV6HvtX8c

아기에게 먹이지 못하고 흐르는 젖. 사랑하는 이에게 가닿지 못하고 허공에 뿌려진 씨앗물. (야이 원초적인 새끼야…)
시를 빼앗긴 시인. 소설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
읽는 내내 슬픈 것들을 생각했다.
전기나 전기소설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을 영웅 만드는 게 싫다. 칭송 받는 아동 운동가가 사실은 소아성애자였고 고통 받는 아이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것 같은 불온한 상상을 한다. 그 시절 살아보지 않은 후대 사람이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옆에서 지켜보았다는 사람의 증언도 추억 필터가 씌인 것이라 믿지 않는다. 애를 어떻게 키우면 이런 뼛속까지 불신자로 자라는 걸까 나도 궁금하다.
이 소설은 시인이 정상에 선 순간을 그리지 않는다. 그나마 가장 큰 기쁨의 순간이라면 시집 사슴을 출판해 벗의 손에 든 걸 때 탈까 집어 넣어라 할 때일까. 작가의 말대로 시인은 자신이 죽은 뒤에 그리던 남쪽 동네 사람들이 자기 시를 읽게 될 걸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어리고 젊은 애들이 수능 대비를 위해 밑줄 쳐가며 자기 시를 ‘분석’할 줄은...심지어 진짜로 수능에 나올 줄은…

수능 출제 시 한 편 감상하고 갑시다.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 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씨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고향(故鄕)’<사슴> (1936).

우리 아빠(혹은 아빠 같은 으르신) 친구는 관우 같고 여래 같은 삼수 갑산 화타….ㅋㅋㅋㅋㅋㅋ

시인이 나오는 소설이지만 내내 시를 쓰지 않는다. 다만 그가 썼던 시가 남의 입에 오르내리고 남몰래 추운 방에서 몰래 연필로 썼다가 남볼새라 불태워진다. 아름답게 울리는 말을 쓰면 혼나는 세계에서 멍텅구리가 되어 가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일은 왜 그걸 보는 나만 미치고 팔짝 뛰겠는 거지...정작 시인은 너무 담담해서 더 슬퍼… 1984도 생각나고 감옥에 갇힌 소설가나 자살한 시인들도 생각난다.

글로 남기지 못하는 순간에도 시인은 시를 보고 시를 만진다. 잃어버린 시들을 잊지 않았지만 잊으려고 애쓴다. 나는 언젠가 읽기도 쓰기도 집어치우고 무덤덤하게 사는 나의 미래를 가끔 상상한다. 생각보다 불행하지는 않을 것도 같다. 그러니까 괜히 미치고 팔짝 뛰었네. 어쩄거나 시가 남았으니 남은 나는 조만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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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1-11 22: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반유행열반인 2020-11-12 06:05   좋아요 2 | URL
시 한 편으로 소설 많은 장면이 샥샥 스쳐가네요. 저는 수능문학 공부할 때 읽은 시들 말고는
따로 백석 시집을 안 챙겨봐서 소설 읽을 때도 막연히 이런 부분은 시겠구나 했어요. 좋은 시 건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 2020-11-11 23: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의 리뷰 기다렸어요 ^^ 주소 남겨주신 자우림 노래랑 같이 들으니 더 좋네요. 저도 같은 곳에 밑줄을 많이 그었고요. 같은 곳에서 답답해하고 안타깝고 그랬어요. 진짜 백석이 어떻게 알아 ㅋㅋㅋㅋ 자기 시 이렇게 사랑 받고 수능에 나오고 그럴지 꿈에도 몰랐을 거예요. 아무도 봐주지 않는 달빛이라고 생각했을텐데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0-11-12 06:09   좋아요 2 | URL
모르고 써야 남는 것 같아요. 장강명 책 읽는데 고전이라 하는 소설도 작가 죽기 전엔 잘 팔리지도 않던 게 남았다고ㅋㅋ시도 그림도 그런 듯...음악만 왠지 예외 같음 되게 현세적 장르야ㅋㅋㅋ그러고 또 죽은 뒤에도 남아ㅋㅋㅋ 너무 그을 데가 많아 자제하며 잘 읽었어요. 저 겨우 김연수 소설 두 번째 장편은 처음인데 두 번째부터 좋아하게 될 예감ㅋㅋㅋ(이러다 예전 소설들 보규 웩 재미없어 할 거 같기도요ㅋㅋㅋ)

syo 2020-11-12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서깊은 김연수빠인 syo보다 훨씬 더 많은 문장에 밑줄을 그으셨네요!! 그으신 밑줄을 보면서, 조만간 다시 한 번 더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반유행열반인 2020-11-12 13:26   좋아요 0 | URL
제가 몇 년 전에 syo님의
문장에서 김연수 냄새 맡은 게 허투루가 아니었군요 ㅋㅋㅋ

syo 2020-11-12 12:40   좋아요 1 | URL
syo가 김연수를 그렇게 흠모했으니 당연히 냄새가 나긴 났겠으나,
그건 마치 망한 짬뽕 속에서 함께 망해버린 지나치게 신선했던 홍합의 냄새를 맡으신 것과 흡사하여,
반님의 미친 후각을 칭송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