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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 ㅣ 채석장 시리즈
주디스 버틀러.프레데리크 보름스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12월
평점 :
-20250203 주디스 버틀러, 프레데리크 보름스
주디스 버틀러의 사상에 관해 빼놓지 않고 대략적으로 소개하는 젠더, 퀴어, 페미니즘 책들을 보면서 그의 사상을 맛이라도 보고 싶었던 적이 있다. 마침 전자도서관에 ‘권력의 정신적 삶’이 있어 빌렸지만, 두 번째로 또 빌렸지만 모두 다 서문에서 으아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난 안 되겠다 안녕...하고 보내줬다. 그러다가 책에 별로 미련 없어진(와 이게 열반 아닌가) 친구가 가질 템 가져, 하고 구판 젠더트러블을 줘서 다시 주디스 버틀러 선생을 영접...하기는 겁이 나던 차에 태양계 실제 비율 마스킹 테이프를 준다고 해서, 다른 굿즈 최소 금액 채워야 되서, 그런데 보니까 이 책이 얇고 안 비싸서 어쩌다 보니 들이게 되었다. 오, 그래도 이건 다른 저작들보다는 대담이라 덜 어렵다는 소리도 있어… 힘을 내…
얇지만 괜히 내적 묵직함 때문에 서문 들어가면서 아, 주요개념을 먼저 정리하고 숙지하고 가면 좋겠군! 하면서 그지 손글씨로 딴에는 또박또박 정리를 했다. 서문만도 일곱 바닥이 나와서 뭐여 이새끼야 이게 요약이냐 필사냐...했는데 2018년 4월과 2022년 4월의 대담 내용을 이어서 보니 이건 그냥 스포일러였다. 그러고서 또 이해 못했을 독자를 위해 역자 선생님이 해제로 뒤에다 한 번 더 요약해주신다. 두 선생님의 대화도 아주 차근차근 서로 가지고 있던 사상적 바탕과 개념부터, 이거가 너가 말하는게 맞지? 거기는 나도 동의해, 그런데 나는 이렇게 생각해, 오 나도 동의해, 뭐 이러면서 차이와 공통점을 섬세하게 짚어가고 예시도 자세히 들고 그래서 생각보다 읽기 아주 어렵진 않았다. 사실 두 사람이 하고 싶은 말 멍청이더러 후려치라면 ‘모두의 살 만한 삶을 보장하기 위한 연대, 구조, 조건 보장을 위해 투쟁!!!!!!’ 이렇게 쓸 수도 있지만 서로의 주장에 대한 동의를 바탕으로 그 결론에 도달하는 똑똑이 선생님들의 대화를 직접 읽는 것도 흥미로웠다. 원래 인터뷰집이나 희곡이나 대담집 누구누구의 말 같은 책 잘 안 읽던 나새끼도 이제 주디스 버틀러 선생님이랑(와 근데 처음이지만 말하는 거 보기만 해도 똑똑미 넘침) 프레데리크 보름스 선생님(이 선생님은 엄청 꼼꼼 섬세 정확 차분하게 개념과 주장들을 확인하고 짚고 넘어가심. 돌봄 강조하는 거 보니 괜히 따뜻한 보름달 같은 느낌의 선생님ㅋㅋㅋㅋ)이 어떤 개념들을 강조하는지 쥐톨만큼 맛은 보게 되었다.
겨우 148쪽 짜리 책인데 이거 옮겨 놓은 걸 보면 1/10은 다 베껴 쓴 거 같아서...원래 제가 필사란 걸 안 하는데 꼭 자신 없을 때 왠지 멋있어 보이는 말은 다 퍼 놔요...나중에 다시 보면 그땐 알까 하고...그러고선 8할은 다시 안 보지만… 그래도 동굴에 처박힌 나놈한테 따콤한 꼴밤 연타로 때려주셨는데 그게 엄청 아프진 않고 좀 시원한 것도 같고 그런데도 당장 행동이고 연대고 못 하고 가까운 사람들이랑이나 잘 지냈으면, 당장 복직할 직장에나 적응 잘했으면… 더 나아지게 하겠다고 싸우고 깝치고 다니지 말았으면...하는 비굴함에 서글퍼지기도 하는 독서였다.
+서문 요약(하기만 했지알아볼 수 있다곤 안 했다…)
+밑줄 긋기
-보름스: (…) 살 만하지 않은 삶은 우리 몸이나 삶의 생명의 조건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종의 중단을 겪는 것입니다.솔직히 말해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자아의 파괴를 수반할 것입니다. 그리고 비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죽음보다 “덜한less"것이 아니라, 죽음보다 더한worse것인데, 왜냐하면 삶이 계속 되는 데도 삶을 삶으로 만들어주거나 누군가가 그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것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 그것은 분명 죽음과 유사한 것이기도 하고 죽음보다 더 나쁜 것이기도 한데, 그 삶을 사는 ”누군가“가 없는 상태로 ”삶“이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 만하지 않다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생명의 중단과 같고, 우리의 생기적 조건의 중단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정도의 구분이 아니라 종류의 구분이어야 하며,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이고 비판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39)
-보름스: (…) 여기서 우리는 데리다가 아도르노와 리오타르에 따라 ”죽음보다 더한 것“이라고 부른 것으로 나아갑니다. 살 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죽음보다 더 나쁜, 죽음과 유사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살 만하지 않은 삶은 죽음보다 더 나쁜데, 이런 삶은 지속된다고 해도 그 사람이 그 삶을 자신의 삶으로 살 수 없고, 오직 생중사로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극적인 임종 선택과 정치적인 문제들이 여기 있습니다. 바로 죽음과 죽음보다 더한 것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는 딜레마입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기술할 수가 없고,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이 그 경험을 기술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경험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 만하지 않은 삶을 살아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이들의 살 만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지만 정의상 그런 삶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의 삶을 기술할 의무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죽음보다 나쁜 것이 있다면, 삶보다 나은 것도 있고, 살 만한 삶보다 더 좋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살 만한 삶이 어떤 궁극적인 규범은 아닙니다. 우리는 단순히 살 만한 삶만 살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행복하고 즐겁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살 만한 삶 이상의 무언가가 있습니다. 즉 이동할 능력이나 죽지 않을 능력 이상의 것, 누군가의 삶에서 창조적이고 사회적인 주체가 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45-46)
-버틀러: (...질문들)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을 구분하는 문제에 있어 한 가지 질문, 더 쉬운 질문은 이런 것이겠죠.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의 차이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지만 저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은 질문 더미로 재구성해보고 싶습니다. 이런 구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을 구분할 때, 그 구분을 위해서 사용되는 판단은 어떤 것인가? 누가 구분을 하고, 누구와 관련하여 구분을 하는 것인가?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이런 판단을 계속하는, 다시 말해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는 상황이나 장면은 어떤 것인가? (48)
-버틀러: (오시비엥침 수용소 생존 작가 샤를로트 델보)델보는 살아 있었고 글을 쓰고 있었어요. (…) 그가 망가지지 않았나요? 사람들이 망가질 만한 조건이 아니었나요? 설령 망가졌다고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 갑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살 만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네, 전혀 그렇지 않지요. 그러니 망가진 사람이 과거의 트라우마를 서술할 수 있고, 그 서술 자체가 이렇게 망가진 것을 복원해내지 못한다는 게 사실이라면, 망가진 사람이 그런 망가진 관점에서 서술한다면, 우리는 살 만하지 않은 삶 역시 여러분과 함께, 동시에 살아가는 조건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런 식의 살아가기는 그 자아의 생존과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살아가고 있지만, 살 만하지 않은 삶은 그것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채로 여전히 여러분과 함께 살거나 동행합니다. 삶이 끝나야만 살 만하지 않은 삶도 끝이 납니다. 여러분에게 남은 삶이 무엇이든 그것은 살 만하지 않음과 함께 살게 됩니다. 그 삶의 동반자로서, 혹은 그 삶을 구성하는 잔해로서, 어쩌면 그 삶과 떼어낼 수 없는 견디기 힘든 동행으로서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그것이 반드시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살 만하지 않은 삶과 더불어, 살 만하지 않은 삶 속에, 살 만하지 않은 삶을 계속 살아간다는 것 말입니다. (52-53)
-버틀러: 회복탄력성이란 용어는 물론 특정한 종류의 인도주의 단체 및 인권 단체에서 고난을 극복할 자원을 찾고, 심지어 이런 끔찍한 상황을 겪은 뒤에도 예전의 삶을 재개할 가능성, 영어로는 “되돌아갈bouncing back"가능성을 말하고자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이 회복탄력성이라는 용어는 인간의 파괴와 궁핍에서 눈을 돌리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적 어휘에 속합니다. 이 용어는 사람들이 결코 완전히 망가지는 일은 없다고 전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삶이 망가지거나 파열되는 일 같은 것은 없다고, 그리고 누군가가 망가지거나 어떤 삶이 파열된다 해도 아마 그 사람에게 내재하는, 다시 일어나 삶을 긍정하고 재개할 능력에는 결코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전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회복탄력성 담론이 어떤 생명력의 해석에 근거를 두건, 그것은 일종의 형이상학적 보장으로, 낙관주의에 재빨리 의지하는 것으로, 어쩌면 일종의 부인denial과 거짓말로 작동합니다. 우리는 이 회복탄력성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비정부기구에 주어지는 공공 정책의 지침에 등장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용어가 인간이라는 개념을 유연하고 잘 구부러지며 끊임없이 부활 가능한 존재로 선동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파손이나 상실은 돌이킬 수 없어서, 삶에 대한 감각을 파괴하면서 평생 그들과 함께 가는데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런 때일수록 말입니다. 그들이 삶을 계속 살아간다 해도, 살 만하지 않은 삶과 더불어 계속 산다는 것은 회복탄력성과 같다고 볼 수 없습니다. 아니요, 전혀 다른 것이지요. 사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회복탄력성“이라는 용어가 현실을 부정하고 트라우마를 억압하는 작용을 해서, 더 이상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게 분명한데도 너무 급히 회복의 가능성을 보고 회복의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요. 어쩌면 이것은 격론을 일으킬 만한 여담이겠죠. (…) 즉 우리가 지금 살만하지 않은 경험을 한 주체, 그런 경험을 겪는 중에 혹은 겪은 후에 그 경험에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주체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가정 말입니다. 주체가 그 경험에 이름을 붙일 언어를 박탈당했거나 그 경험을 명명할 언어를 찾느라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은, 그 경험이 살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징표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반대의 경우가 사실인 것은 아니지요. 즉 때로는 살 만하지 않은 삶을 표현할 언어가 있을 수 있는데, 그렇다고 그 경험이 살 만한 것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살 만하지 않은 경험을 한 각각의 사람에게 그 경험이 똑같은 방식으로 기록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살 만하지 않은 경험을 타인과 공유할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 살 만하지 않은 경험을 함께 공유한다면(각자 다르게 공유한다고 해도), 그 덕분에 조금이라도 더 살 만한 것이 될까요?
(...소통 네트워크와 상호 의존 양식 생산 후) 이런 조건들을 함께 평가하거나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살 만하지 않은 경험을 겪는 중이거나 겪어온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변화가 만들어지거나 혹은 만들어지기 시작할까요? 제가 말하고 싶은 한 가지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체의 조건은, 프레데리크 선생님의 용어로 말하자면 주체성의 조건은, 또한 상호주체성의 조건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현상학적으로 상호주체성을 말할 때 그것은 모든 차이가 지워진 집단적 주체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공동의 상황을 함께 겪으면서 공동의 상황을 평가하고 이해하게 된 차별화된 네트워크 혹은 차별화된 집단을 가리킵니다. (…) 제가 보기에는 누군가와 공유된 살 만하지 않음이 있다면, 인간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그 무엇이, 식량과 보호소와 이동성과 법률 상담에 대한 의존이, 그래서 인간의 사회성의 기능과 같은 살 만함에 관한 그 무엇이 전면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 생각에 삶을 더 살만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삶의 측면들입니다. 즉 살 만함을 보호하고 촉진하려는 규범에 따라 조직된다면 말이지요. (55-58)
-버틀러(주체 시작의 관점 대안): 우리는 왜 사회성이라는, 또 경제와 정치라는 더 넓은 문제들을 다루는 모델로서 맨 처음 유아기 자녀 양육의 심리적 장면에서부터 논의하기 시작하는 것일까요? 물론 유아는 형성됩니다. 선생님도 유아를 형성하는 생기적 관계들에 대해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유아의 형성을 도와주는 부모도 유아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언어와 사회 속에서 형성됩니다. 그러니 어디서부터 이 논의를 시작해야 할까요? 주체의 형성에 대해 생각할 방법은 수없이 많고 출생도 그중 하나지만, 그 출생에 앞선 역사가 완전히 다르듯, 그 출생을 이끌어낸 장면도 완전히 다른 별개의 문제입니다. (…) 제 말은 주체의 삶의 시작이라는 이야기를 시작할 다른 방법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에 누가 여러분을 상상했나요? 누가 상상하지 못했나요?(75-76)
-보름스:(…) 오히려 반대로 어린 시절에는 부모의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의 양극성이 있습니다. (…) 우리는 지뢰밭에서, 위험 지대에서 태어났어요! 그리고 ”삶의 끝“ 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질병에 대해서나 난민에 대해서도 똑같은 것이 사실입니다. 확실히 저는 취약성을 이상화하지 않습니다. 사실 취약성은 제가 비판하는 개념이지요. 하지만 취약성의 장면들은 인생의 전 과정에 걸쳐 나타나면서, 살 만 한 삶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하는 위험한 장면입니다. 취약성의 장면은 가장 위험한 장면이며 우리가 다시 논의를 시작할 출발점이 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76, 버틀러의 동의와 함께 2018년 4월 파리의 대담이 끝남. 이제 시작하는 것 같은데서 뚝 끊겨서 어리둥절. 다음부터는 팬더믹 이후 2022년의 후기-두번째 대담?-이어짐)
-보름스:(누군가 유발한 위태성에 관한 버틀러의 동의에 이어)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고통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고통의 상태에 대해 생각 중인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당장 프로이트를 화제로 꺼내셨는데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기에는 우리가 이런 사람들, 예컨대 난민들이나 수용소에 관한 증언이 기술하는 바와 우리를 동일시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상황과 우리를 차별화하려는 충동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알기로는 타인이 살 만하지 않은 상황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강력한 충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누군가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버틀러 동의)(…위태성 상황에 대한 반응의 양가적인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질문)
버틀러: 네, 하지만 선생님은 또한 살 만하지 않은 삶에 대한 무언가 때문에 우리가 상황을 외면하게 되고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보름스: 그리고 물론 이때 ”우리“와 ”나“는 누구인지도 심문해봐야 합니다.
버틀러:(“우리”의 범주에 포함되는 문제는 잠시 보류…) 살 만하지 않은 삶에 대한 무엇인가가 우리를 외면하게 만드는데, 그것은 우리도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상상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요. 그리고 그것을 부정하는 일은 고통을 더 크게 만들고요. (보름스 동의…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 상황) 제 말은, 러시아 군의 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그런 일은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새끼 주: 대한민국도 계엄령이랑 군인들이 국회 쳐들어가는 장면을 회상/상상만 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우크라이나가 유럽을 이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이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죠. 잠깐만, 저게 우리잖아. 이게 우리라고? 이런 일이 우리한테도 일어날 수 있는 거라고?(보름스 동의...) 선생님은 또한 외면하는 것이 상황을 더 확대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 돌아서면, 그렇게 돌아선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죠? 외면하지 않으면서, 어느 정도 거부하지 않으면서는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양가성 또한 상황을 확대하는 부분입니다. (85-89)
-보름스:(…) 다시 한번 “우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펜데믹을 끝내고 싶어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의 무언가가 끝나기를 원해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삶 충동이든 죽음 충동이든 간에 이것은 복잡한 문제입니다.
버틀러: 네, 삶을 향한 빠른 움직임인데, 그것이 부인에 기반한 것이라면 더 많은 죽음을 초래합니다.
보름스: 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끝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아주 적절히 덧붙이셨는데요, 그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우리에게는 끝났다고 해도 몇몇 사람들에게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더 취약한 사람들, 아직 취약한 상태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선생님은 말하고 싶은 것이지요. (…) 기후 문제와 펜데믹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이것을 다 겪었고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거나, 그게 아니라 일부 사람들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공통된 취약성common vulnerability이라는 생각입니다. 공통된 취약성이란 펜더믹이고 기후 문제이며 심지어 우크라이나 전쟁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지구상 어디에서도 취약성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참을 수 없음이지요.
버틀러: 네, 맞아요. 취약성을 극복한다는 환상은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 환상이 참을 수 없는 상황과의 대면을 막고 있기도 합니다만 여전히 그런 현실을 입증하는 것이죠.
보름스: 동시에 정치적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은 이러한 공통된 취약성이 ”우리“와 ”그들“을 생각할 새로운 방식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시인하고, 생기적으로 말해서 팬데믹을 끝내고 싶은 욕망이 합당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끝내려는 욕망을 결국 죽음을 의미하는, 일종의 평온을 향한 수동적 충동에서 다른 것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보다도 펜데믹을 끝내고 싶은 욕망이 부정적 요건(…)과 맞서 싸우려는 욕망이라면, 특정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취약하며, 우리는 보호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깨뜨리게 될 것입니다. (93-95, 외면하지 말고 불의와 맞서 싸워라! 라고 하는 선생들...)
-버틀러: (…)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이 “우리”에게 이런 자기보호는 특정한 집단이 해주는 것인데요. 이 집단은 전반적 상황에 맞서서 혹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맞서서 자신들을 보존하고자 하는 특정한 집단입니다. 그리고 이 집단은 스스로를 일반화된 “우리”와 분리함으로써 세계의 일부가 버려지고 거기서 유독성이 생겨날 수 있으며 펜데믹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실제로 확대하고 강화합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불평등의 심화에 의지하는 것이죠. 그러니 이것은 삶의 충동일까요, 아니면 죽음 충동일까요? 바로 선생님이 설명하신 양가성, 즉 삶-죽음의 충동성이 작동하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그런 장소(백신 미보급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눈을 돌리고, 자신을 보존하려는 이 집단적인 “우리”주변에, 문자 그대로의 장벽 혹은 은유적인 장벽을 쌓아서 우리 자신을 보존합니다. 우리는 파괴의 확대에 일조하거나 방조하지 않으면서 이런 파괴로부터 거리를 둘 수 없습니다. 그것은 더 큰 파괴와 상실을 수반하고,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불평등을 심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것은 독성화와 파괴가 여기에서 발생하지만 않는다면 다른 곳에서는 발생해도 괜찮다고 허용하는 죽음정치의 논리necropolitical logic(나새끼 주: 내가 애들이 하는 말 중 싫어하는 말-알 바임? 알바노)일 것입니다. “거기”와 “여기”는 부인과 유기가 일어나는 가운데 안정적인 것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 중 누구라도 그러한 근본적 불평등이 확정 또는 편향되어 재생산되는 이 세계의 모습에 동의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보존하려 하고, 그렇게 보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한편 이들이 외면하는 타인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런 타인에게 의존하며, 이들 혹은 우리는 그런 타인과 늘 관련을 맺는데, 이 타인들은 말하자면 파괴가 바로 눈앞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눈길을 돌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 논리에 따르면 자기 보존은 파괴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겁니다. 해석하면 이렇게 되죠. “나는 나를 보존하기 위해 파괴할 것이다. 전쟁에 나가지 않을지라도, 나는 이 편파적이고 특권적이고 보호받는 집단을 보존하기 위해 파괴를 지속할 것이다.”
(98-100)
-버틀러: 그런데 우리는 진보를 이루고 있는 중일까요? 그리고 진보는 여전히 목표일까요, 아니면 문제가 되는 부분일까요?
보름스: 서양 철학에 나타난 역사 재현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진보의 감각에 익숙합니다. 아직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며, 계속해서 더 취약한 사람들을 돕는 쪽으로 나아갈 테지요. 동시에 우리는 불의가 점점 더 커져가는 것을 보면서 그런 불의의 상황을 비판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기본적인 글로벌 투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저로서는 그 또한 어떤 면에서 여전히 진보의 한 형태입니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글로벌 상황-고통과 박탈이라는 상황-이 여전히 우리의 상황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102)
-버틀러:(…) 국경은 사실 글로벌 수준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생산함으로써 문제를 더 악화시킵니다. 그래서 저는 글로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글로벌 운동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 운동의 기본 규정은 어떤 것인가? 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 생명체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누구든지 그것을 얻게 할 수 있을까?’ (105)
-보름스:(…) 즉 글로벌 의료 서비스는 인간의 삶의 모든 차원에 걸쳐 철저히 글로벌해야 합니다. 그리고 건강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음식과 물 등의 것들이 필요하지만 더 나아가 성생활, 지적인 생활, 도덕적 생활, 정치적 생활도 영위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차원에서 최소한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서요. (108-109)
-보름스:(…)우리는 “죽음보다 나쁜”상황이나 “삶 속의 죽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또 다른 요점은 이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시점에 이르러 죽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국가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지구적인 것의 지역적 실행이라고 기술한 것에다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는데-선생님의 수많은 연구 작업으로 돌아가는 듯하지만-국가의 국경선은 외부에만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것은 내부에 있습니다. (버틀러 동의)
취약성으로부터 자신을 보존하고 싶을 때, 한 인구 집단 안에 하나 혹은 여러 경계선을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쪽과 저쪽을 분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전 지구적으로 공유되는 조건은 지역적입니다. 취약성에 있어서의 여러 차이는 한 국가 안에, 한 도시 안에도 있고, 심지어는 우리 이웃이 사는 한 동네 안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
-버틀러: 돌보지 못한 것은 돌봄의 조건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서입니다. 누구도 돌봄의 조건을 마련하는 데 충분히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117-119)
-버틀러: (…) 그리고 “이건 나의 삶”이라는 말은 따라서 다른 사람의 삶과 분리된 삶이죠.
보름스: “나의 삶”이라는 거죠. 그러니 “내가 원한다면 죽게 내버려둬.”
버틀러:“내가 원한다면 죽게 내버려둬”라고요. 하지만 보통 그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 또한 죽게 내버려둘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 생각에 개인의 자유라는 발상에는 일종의 죽음 충동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죽음 충동은 대개 도망자처럼 행동합니다. 죽음처럼 보이지 않는 어떤 다른 것에 붙어서, 심지어는 삶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122-123, 자유를 죽음 충동, 도망자, ‘삶의 이름으로 가하는 위해’로 연결 짓는 것에 좀 놀람. 워우. 뒤에선 미국식 총기 소지 자유 비판하듯 부연함.)
-보름스: 상실과 슬픔도요...슬픔은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비판적 생기론의 경험입니다. 지금 슬퍼하고 있다면 당신은 죽은 게 아닙니다. 다른 누군가가 죽은 것이지요.
버틀러: 맞아요. 슬픔은 살아 있는 자의 특권입니다.
보름스: 그리고 한 사람의 죽음은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물론 애도의 슬픔은 탄생의 반대편에, 새로운 생명을 환대하는 것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탄생 또한 생명이 또 다른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탄생은 슬픔과 반대편에 있을 수 있고 반대편에 있어야 하며, 일종의 환대일 수 있고 환대여야 합니다. (129)
-보름스:“이건 나의 삶” 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삶이라는 게 필요할 때 사용할 수도 있고 또 처분할 수 있는 재화, 어떤 객관적인 재화인 양 여기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에 있죠? 당신의 삶을 내게 보여주세요! (버틀러 동의) (…) 나는 내 삶을 가지고 뭔가를 하고 싶습니다. 좋아요. 그런데 그건 어디에 있죠? 삶을 꾸미고, 삶을 만들라니, 그럴 수는 없어요! 삶은 이야기입니다… (…) 나는 내 삶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
버틀러: (…) 그리고 어쩌면 선생님이 우리에게 함께 나아가자고 요청하고 있는 방향, 그리고 저도 동의하는 방향은 나의 삶, 너의 삶, 우리의 삶, 타인들의 삶에 대한 더 관계적인 이해이고, 나아가 파괴와 죽음의 가능성이 바로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것으로, 살아 있는 삶을 정의하는 투쟁으로 이해하지 않고는 삶은 결코 살 수도 없고, 잘 살 수도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삶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나의 것이든, 우리의 것이든, 다른 누구의 것이든 죽음과 파괴를 한쪽으로 밀어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살 만함의 조건을 확립하기 위해 죽음의 힘에 반대해야 합니다. (보름스 동의)
(130-131, 난 여기에서 상호의존성, 상호주체성을 옹호,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동체주의를 우위에 두는 구나 싶었다. 자유주의자에 가까운 나새끼는 책 읽는 내내 똑똑이들 둘한테 둘러 싸여 뚜드려 맞는 기분이었다. 이새끼 너 혼자만 사는 세상 아니거든? 뚜쉬뚜쉬 아야야...)
-돌봄은 단순히 생명 유지의 조건을 넘어 사회적 인정과 주체성의 형성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둘다 인정하게 되고 이제 돌봄은 삶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그에 따라 생명의 내재적 규범성과 상호주체적 관계성이라는 차이가 서로 보완되면서, 생명의 물리적인 복합 조건이 충족되어야 생명이 보장되는 것은 맞지만 동시에 사회적 인정과 보호도 필수적이라는 새로운 이해가 열린다. (146-147, 두 선생님의 정반합을 깔끔하게 요약 정리해 버리는 번역자 선생님...친절하게도 서문에서 한 번, 해제에서 한 번 더 책 내용 스포?ㅋㅋ요약? 해준다. 그래도 그거만 슥 읽으면 재미없고 이해 잘 안 되니까 두 분이 나누는 고품격의 논리적 대화 전개를 직접 보시라고 이 책이 나온 것인가…)
+책 읽기 지레 무서워 막 독서대 사진 찍고 딴짓하고… 주말 동안 천연석 팔찌만 몇 개를 만든 거야…이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