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멸종 - 거꾸로 읽는 유쾌한 지구의 역사
이정모 지음 / 다산북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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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01 이정모.

생각보다 멸종과 고생물에 진심이었다. 독서목록도 제법 되고, 모아 놓은 생명-진화 시리즈 책들도 좀 있고, 수능 생명과학1+지구과학1 선택자였답니다…두 번 다 망했지만요...흑흑

이전의 독서 목록 일부.
-대멸종 연대기
https://m.blog.naver.com/natf/221810890702

-지구의 짧은 역사
https://m.blog.naver.com/natf/222619260759

-생명의 도약
https://m.blog.naver.com/natf/222630777184

-동글동글 귀여운 고생물 도감
https://m.blog.naver.com/natf/223206864921

-이유가 있어서 멸종했습니다
https://m.blog.naver.com/natf/221572824692

빅 히스토리, 인류의 기원, 이기적 유전자, 사피엔스 뭐 이런 옛날 이야기 과학책, 인류학책까지 가져다 대면 끝도 없고… 그런데도 한 번 더 비슷한 주제를 읽기로 했다. 미리보기를 보니 일인칭 멸종자 시점으로 서술된 게 어린이들 읽기 좋아 보여서, 일단 사다가 큰어린이를 읽혔다.(반응은 시큰둥) 그러고나서 나도 소설을 읽으려다가 소설 좋은데 무서워 병 재발로, 회피스킬, 또다시 교양과학책으로 손을 뻗다보니 제법 신간이 새치기를 했구만… (묵힌 과학책 꽤 많아요 아직도…수십 권 이상임 백 권 대일수도...)

멸종된 생물 관점에서 서술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인간이 쓴 거니까 이래저래 인간 중심적일 수 밖에 없다. 그걸 내가 뭐라고 할 걸 미리 예상한 것인지, 인간 중심도 필요해! 라고 서두에서 먼저 방어한다. 하긴, 말대로 인간 아니었으면 지구에 대한 지식을 연구하지 못했을 것이고, 이런 책들도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멸종과 고생물에 관한 이야기는 ‘대멸종 연대기’에서 엄청 자세하게 본 뒤라서 이 책은 그것 보다는 좀 가볍게 읽을 수 있었다. 거꾸로 읽는-이었지만 사실 연대기 순은 아니고 이 시대 갔다 저 시대 갔다, 한다. 대부분의 지구 역사 책들이 결론은 기후 위기로 향한다. 7월 첫날 되자마자 햇살이 칼 같이 지르고 많이 덥긴 했다. 직장도 집도 에어컨을 돌린다. 여기가 시원해진 만큼 어디는 또 더 더워지겠지…

닉 레인 아저씨 책 ‘생명의 도약’ 겨우 한 권 보고는 ‘미토콘드리아’, ‘산소’, ‘트랜스포머’ 다 쟁여만 놨는데 이 책 읽다보니 아...저자 선생님께서도 그 내용 미리 스포?소개해주시는 구나...하고 참고 목록 보니 역시나 먼저 읽고 맛보기로 전해주셨다. 나의 생명+진화 콜렉션도 이번 여름에는 조금이나마 읽어야 하는데… 어린이들 오세아니아 가르칠 때 보충 자료에 월리스 나와서 ‘저 사람, 다윈과 동시대에 진화론 발전시킨 사람인데, 나 저 사람이 쓴 말레이제도 사 놨어, 그런데 안 읽음…’ 하면서 조금 부끄러웠다.

이미 사라진 생물 관점에서 인간의 말로 인간이 알아낸 자연사, 지구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건 조금 귀여운 부분도 있지만, 반복되다 보니 후반부 가면 조금 지루해지는 느낌이 있었다. 그리스 비극처럼 달과 바다의 대화로 연극적으로 대미를 비장하게 장식하는데, 여긴 새로운 형식이군, (사실 앞부분 다른 파트에서 할아버지와 손자 등장시켜 이미 써 먹은 대화체) 하면서 기대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인도영화 마지막에 춤추고 노래하며 끝내는 것처럼 식상했다잉…
우리 종족의 멸종을 말하는데 이렇게 가볍게 말하면 좀 죄인 같지만 그래도 매번 멸종 선배들이 호통치고 교훈주고 니들 똑바로 살아라, 하는 걸 계속 듣는 게 마냥 재미있을 수는 없었다.

+밑줄 긋기
-인간 중심의 사고도 필요합니다. 본 것에 대해 생각하고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는 생명체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뿐이니까요. 우리가 없었다면 자연사도 없었을 겁니다.
물론 인간 없는 지구를 상상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이 지구에 미친 영향을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주니까요. (7)

-인간으로의 진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뇌의 변화라기보다는 노동이며, 노동은 직립보행의 결과 손이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똑바로 선 인간은 자유를 얻었고, 자유를 얻은 인간은 노동을 하기 시작했다. 노동은 다시 인간의 진화를 촉진해 마침내 ‘슬기 인간’으로 발전시켰다. (32, 노동으로부터 해방을 꿈꾸는 조잡한 인간에게 인간 진화의 핵심을 노동이라고 말해주는 건 좀 덜 반가운 일이었다.)

-여러분은 이때 “지구를 구하자!”라고 외쳤습니다. 저를 걱정해 주시는 마음 감사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외침에는 가슴 아픈 아이러니가 숨어 있습니다. 구원이 필요한 대상은 제가 아닙니다. (114, 궁서체로 쓴, 지구가 친애하는 인류에게 쓴 편지 중)

+과학책 콜렉션의 일부...저 중에 겨우 한 권 읽음ㅋㅋㅋ
+내가 좋아하는 아노말로카리스
+매년 이맘때쯤 다가오는 호구 인증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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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5-07-01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알라딘 찐 충성고객 👍👍

반유행열반인 2025-07-02 18:54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알라딘 찐호구 인사드립니다 ㅎㅎㅎ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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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8 프리모 레비.

막연하게 난 이 작가 작품을 좋아할 것이다, 하고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프리모 레비의 책 다섯 권을 모아뒀다. 제일 관심이 갔던 ‘주기율표’는 작년 봄에 읽었는데, 역시, 나는 그 책이 좋았다. 직장에서 책을 사 준다길래 나는 ‘부모와 다른 아이들 1’이 뭔가 두껍고 비싸니까 이거 사달래야지, 하다가 맞은 편 동료가 책 살 궁리를 하는데 대고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를 권했다. 동료는 일이 바빠 전에 내가 알려준 ’밀레니엄-여자를 증오한 남자들‘도 다 못 읽은 참인데…

책 추천은 삼가는 편인데 또 그러고 나니 정말 좋았던가, 이 작가 맞던가, 확인이 필요했나 보다(이렇게나 자기 확신 없는 책쟁이놈). ’이것이 인간인가‘를 펼쳤다. 담담하게 그가 만났던 사람들, 겪었던 일들을 적어낸 걸 읽다 보니 책을 못 덮고 하루가 한 권이 되었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는 참혹한 경험을, 만화 ’쥐‘나 필립로스의 ‘포트노이의 불평’같은 데서는 수용소 생존 유대인과 그 자녀들로 이어지는 지옥도를 통해 보여줬던 것 같다. 그런데 앞서 말한 작품들이 생존자 자녀들의 시각에서 수용소 세대 이후의 삶의 고통을 주로 그린 데 비해, 소수만 살아 돌아온 생존 당사자 레비의 글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하고 담담하면서도 또 세세해서 읽는 사람이 더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았다.

소설 후기 격인 독자의 질문에 대해 레비가 답한 내용에서는, 이제 평범한 삶으로 돌아와 짧은 수용소 생활을 돌아보면 격렬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이후 십 년 뒤쯤 그가 자살로 생을 끝낸 것을 보면 그렇게 괜찮아, 앞으로가 중요하지, 또 이런 일이 없어야 해, 하면서 자신의 고통을 강조하기 보다 직접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려고 부단히 애쓴 작가의 저작들이 그저 묵직하다. 무겁게 가까이 꽂혀서 멍청한 소리만 자꾸 하지 말고 좀 읽어보라고, 내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하는 것 같다.

+밑줄 긋기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사고체계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그 암묵적인 도그마가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되면, 그 논리적 결말로 수용소가 도출된다. 수용소는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다. 이 인식이 존재하는 한 그 결과들은 우리를 위협한다. (작가의 말 중)

-이제, 사랑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집, 자신의 습관, 옷, 다시 말해 말 그대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빼앗겨버린 사람을 상상해보라. 그는 고통과 욕구만 남은, 존엄성이나 판단력을 잃어버린 텅 빈 인간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잃는 건 쉬운 일이니까. 그리하여 그의 삶과 죽음은 인간적인 친밀감 따위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아주 가볍게 결정될 것이다. 운이 아주 좋을 경우 그게 더 낫다는 순수한 유용성 판단 정도를 따를 수는 있으리라.
이제 ‘절멸의 수용소’라는 용어의 이중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지다‘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분명해질 것이다. (35)

-낯선 외국어가 모든 사람들의 정신의 밑바닥으로 돌덩이처럼 떨어진다. ‘기상’. 따뜻한 담요가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경계, 잠이라는 튼튼하지 못한 갑옷, 고통스럽기도 한 밤으로의 탈출, 이 모든 것이 산산조각난다. 우리는 다시 무자비하게 잠에서 깨어나 벌거벗고 연약한 상태에서 잔인하게 모욕에 노출된다. 이성적으로는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긴, 다른 날과 똑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너무나 춥고 너무나 배고프고 너무나 힘이 들어 그 끝은 우리와 더 멀어진다. 그러므로 회색빛 빵 한 덩이에 우리의 관심과 욕망을 집중시키는 것이 더 낫다. 빵은 작지만 한 시간 후면 틀림없이 우리 것이 된다. 그것을 집어삼키기 전까지 5분 동안 그것은 이곳에서 우리가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변할 수 있다. (94, 지금껏 들어 본 중에 가장 슬픈 “일어나기 싫어.”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수용소는 벌을 받는 곳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끝이 정해져 있지 않다. 수용소는 게르만식 사회구조 한가운데에서 시간 제한 없이 우리에게 부과된 존재방식일 뿐이다. (125)

-나이, 사회적 지위, 출신, 언어, 문화와 습관이 전혀 다른 수천 명의 개인이 철조망 안에 갇힌다. 그곳에서 그들은 규칙적으로 되풀이되고 통제당하는, 만인에게 동등한 삶, 그 어떤 욕구도 충족되지 않는 삶에 종속된다. 이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놓인 인간이라는 동물의 행동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실험장이다. (132)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인간성은 땅에 묻혔다. 혹은 그들 스스로, 모욕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줌으로써 그것을 땅에 묻어버렸다. 사악하고 어리석은 SS대원들, 카포들, 정치범들, 범죄자들, 크고 작은 일을 맡은 특권층들,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노예와도 같은 해프틀링까지, 독일인들이 만든 광적인 위계질서의 모든 단계들은 역설적이게도 균등한 내적 황폐감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그는 이 무화의 세상 밖에 있었다. 로렌초 덕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187,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자연스럽고 평범한 호의란 겪어보기 어려운 일이지만 또 불가능한 건 아닌 듯싶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야 할 사람의 고함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무기력과 복종의 두텁고 낡은 장막을 뚫고 들어와 우리들 내부에 살아남은 인간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다.
“Kamaraden, ich bin der Letzte!˝(동지들, 내가 마지막이오) (227)

-(…)내가 보기에 증오는 개인적인 것이고 한 사람에게, 어떤 이름에게, 어떤 얼굴에게 향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당시 우리를 박해했던 사람들은 이름도 얼굴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책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멀리 있었고, 눈으로 볼 수 없었으며, 접근할 수도 없었다. 나치스 체제는 용의주도하게도 노예와 주인이 최소한의 접촉만 하도록 마련되어 있었다. (…) 또 이 책이 쓰인 그 몇 달 동안, 즉 1946년에 나치스와 파시즘은 정말 얼굴이 없는 듯했다. 그것들은 무시무시한 악몽처럼, 정확하게 그리고 당연하게 다시 허공 속으로 흩어져버린 듯했다. 새벽닭이 울면 유령들이 사라져버리듯이 말이다. 그런 유령 집단을 향해 내가 어떻게 분노를 키우고 복수를 바랄 수 있겠는가? (269)

-책의 경우 (독재)국가의 마음에 드는 내용이어야만 출판과 번역이 될 수 있다. 다른 책을 보려면 외국에 나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자기 나라로 책을 가지고 들어와야 한다. 그런 책은 마약이나 폭발물보다 더 위험하다. 국경에서 책을 소지하고 있다가 들키면 책을 압수당하고 당신은 처벌을 받는다. 국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책, 마음에 들지 않게 된 책, 이전 시대의 책들은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워진다. 1924년과 1945년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일이다. 국가 사회주의가 지배한 독일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런 일은 지금도 수많은 나라에서 자행되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파시즘에 맞서 영웅적으로 싸웠던 소련도 이런 국가에 포함된다. 독재국가에서는 진실을 마음대로 바꾸고, 과거를 되돌려 역사를 다시 쓰고, 사실을 왜곡하고 삭제하고 거짓을 첨가하는 게 합법적이다. 프로파간다가 정보를 대체한다. 그런 국가에서 당신은 권리를 지닌 시민이라기보다는 신민이다. 또한 당신은 광적인 충성과 맹종을 강요하는 국가(그리고 국가를 대표하는 독재자)에 복종해야 한다. (272)

-고통을 덜 받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건 처음에는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다. 수용소 밖에서도 룸펜프롤레타리아가 투쟁을 선도하는 일은 드물다. ‘거지들’은 저항하지 않는다. (279)

-당시에는 굴뚝 위로 불꽃이 보였다고 했다. 그녀는 나이 많은 여자들에게 물었다. “저 불길은 뭐지요?” 그러자 여자들이 대답해주었다. “저기서 타고 있는 건 바로 우리야.”(284)

-역사적 현상의 책임을 한 개인에게 돌려(끔찍한 명령을 실행에 옮긴 자들도 결코 무죄일 수 없다!) 설명한다는 건 옳지 않은 듯하다. 게다가 한 개인의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행동의 동기들을 해석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까지 제기된 가정들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을 변명하며 죄의 양이 아니라 질을 설명한다. 나는 솔직히 히틀러와 그의 뒤에 있던 독일의 광적인 반유대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한 몇몇 진지한 역사학자들(블록, 슈람, 브라허)의 겸손함을 좋아한다.
이와 같은 일은 어쩌면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해되어서도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정당화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내 말은 이런 뜻이다. 인간의 의도나 행동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원학적으로도)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 그 행동의 주체를 수용하고, 그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01-302)

-그러므로 이성과 다른 도구로, 혹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을 앞세워 우리를 설득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진짜 선각자와 가짜 선각자를 구별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모든 선각자를 의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들의 주장을 일단 거부하는 것이 좋다. 그것의 단순성과 눈부심이 우리를 들뜨게 한다 해도, 무상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편리하다고 생각되더라도, 훨씬 더 소박하고 덜 흥분되는 진실, 차근차근,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부와 토론과 추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진실, 확인되고 입증될 수 있는 진실에 만족하는 게 훨씬 더 좋다. (304, 그리고 난 이렇게 실험 연구 해 본 사람의 신중함을 삶과 정치에까지 적용하는 레비의 말이 좋다.)

-사실 우리의 미래는 외적 요인들, 우리들의 자유로운 선택과는 전혀 무관한 요인들과 우리가 의식하고 있지 못하는 내적 요인들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다. 잘 알려진 이런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본인의 미래도 이웃의 미래도 알 수가 없다. 또 같은 이유로 과거의 일에 대해 “만약에”라고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내가 아우슈비츠의 시간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글을 쓰는 일을 없었을 것이다. (305, 겨우 두 권 읽었지만, 프리모 레비가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돌아 온 건 자신이 겪은 일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마음이 정말 강했던 덕도 있지 않을까 짐작했다. 나도 내 속엔 이야기가 너무 많아...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냥 다 어딘가 잠들어 있나 보다. 라고 쓴 뒤 한 장만 넘기니까 작가 스스로 비슷한 말을 한다.)

-아마도 그보다는 지칠 줄 몰랐던 인간에 대한 관심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뿐만 아니라 꼭 살아남아 우리가 목격하고 참아낸 일들을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지가 생존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암흑과 같은 시간에도 내 동료들과 나 자신에게서 사물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보겠다는 의지, 그럼으로써 수용소에 널리 퍼져 많은 수인들을 정신적 조난자로 만들었던 굴욕과 부도덕에서 나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고집스럽게 지켜낸 것이 도움이 되었다.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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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영혼, 발효의 모든 것 - 지구촌 발효음식의 역사, 개념, 제조법에 관한 기나긴 여행
샌더 엘릭스 카츠 지음, 한유선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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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8 샌더 엘릭스 카츠.

부록과 주석 빼고도 848쪽이 되는, 발효의 백과 사전 같은 이 책을 조금씩 오래 읽었다. 엄마는 직접 장을 담고 김치를 만들고 채소를 썰어 병에 담아 실온에 방치(?)하곤 했는데, 난 채소에서 오는 식중독이 더 무섭다는 소리를 어디서 주워듣고는, 채소 뿐 아니라 자주 식재료나 조리된 음식물을 내놓고는 깜빡하는 엄마를 보며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냉장고에 이거저것 치워버리길 반복했다.

발효책 읽기는 엄마가 정성을 다해 절이고 말리고 다듬고 하는 걸 이해하고 견뎌보기 위한 시도였던 것 같다. 개호로잡놈의 불효새끼라 엄마가 사 먹고 남은 고수 뿌리를 발코니 화분에 키워, 꽃이 피고 씨 맺힌 걸 다시 심어 또 키운 고수를 따다가 고춧가루에 무치거나 간장에 절인 걸 꺼내 놓고 먹어 보렴, 해도 싫어, 하던 나놈이다. 자잘한 매실을 만 얼마에 5킬로라고 사왔는데 그거 넘는 것 같다고, 사흘 밤낮 반으로 쪼개 씨앗 빼는 걸 지나치면서도 난 몰라, 뭐 그렇게 까지, 당덩어리 음료랑 청산 들어서 한참 분해될 때까지 놔둬야 하는 걸 왜 저 고생하면서 만들어, 마음 속으로 또 불효새끼 하면서 씨빼기도 안 도와주는 나놈이었다.

식품공학, 가공식품 분야의 발달, 해썹 인증 같은 과학과 위생으로 무장한, 얼핏 깔끔해 보이는 자본주의 플러스 과학 음식 세계에서 역시나 가공 단백질 음료를 간식으로 달고 다니는 나놈, 이 책 읽고 발효 분야에 공들이는 전통적 움직임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공경심을 갖게 되었다.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스스로에게 먹일, 먹을 만한 뭔가를 만드는 행위는 얼마나 주체적인지. 주체성 빼앗기면 뒤질 것 같이 굴던 나새끼 사실은 얼마나 거대 기업에게 노동의 대가를 바치며 편리함은 얻고 복잡한 미생물 만날 기회는 잃었던 건가. 약간 반성은 했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내가 양배추를 썰어 소금물에 담가 자우어크라프트를 만들거나 김장 때 김치 만드는 방법을 배워 거들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나마 어린이들 아기 시절 발효기에 우유랑 종균으로 마시는 요구르트 조금씩 섞어 직접 요거트 만들어 먹인 적도 있는데, 역시나 시간과 비용 따지면 그냥 당무첨가 플레인 요거트 대용량 한 병을 사다 먹는 게 속 편하겠다, 어린이들은 요거트에 과일 시럽이랑 과당이라도 섞여야 맛있다고 먹으니 그냥 좋다는 거 먹이자...뭐 그렇다.

뭘 배우고 얻어내겠다고 읽는 게 아니라 순전히 읽는 게 신기해서, 저렇게나 다양한 발효음식이 세계 곳곳에 있고, 우리나라 삭힌 홍어나 청국장이나 무슨무슨 식해나 게장 같은 건 나오지도 않으니까, 그렇다면 이 책이 제법 방대하게 두루두루 식품은 물론 발효식품의 사업화와 비식품 발효에 대해서 까지 다루지만, 이 세상엔 또 우리가 모르는 미생물 활용 음식이 얼마나 많을지 짐작도 못하겠다.

그래서, 그냥 채소 좀 시들시들하게 뒀다 먹는다고 죽는 거 아니라고, 다시 적당히 씻어 먹든가 익혀 먹든가 하지, 미생물 너무 미워하지 말자(그렇지만 이엠 다루는 부분에선 예전에 누가 아토피에 좋다고 이엠 써 보라는 걸 따라했다가 포도상구균 감염되어 뒤질 뻔한 생각에 앞으로 그런 거 권하는 사람들은 다 쌩깔 거야) 하면서 아침에는 전날 요거트 부어놓은 압착귀리에 보리시리얼과 사백일향과 블루베리와 피칸을 섞어 늘 먹던 걸로 먹었다. 사실 대부분은 다른 과일 대신 포도를 먹는데 포도를 안 씻어둬서 귀찮음. 포도의 겉면에 이스트가 풍부한 걸 책 덕분에 알게 됨. 거의 일년 넘게 미리 씻어 통에 담아둔 포도를 매일 먹었는데 미생물 좀 먹는다고 안 죽는 구나, 했다. 발효책을 실용서 아닌 엔터테인먼트로 읽는 놈이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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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음식을 먹으면 어떤 병이 나을 것이라는 식의 기대는 버려야 한다. (348, 콤부차는 맛으로 먹는 거야.)

-(…)가루에 존재하는 미생물만으로도 얼마든지 발효를 시작하고도 남는다. (…) 젖산균과 이스트는 도처에 존재하므로, 꾸준히 주의를 기울이면서 조심스럽게 키우기만 하면 된다. (…) 사워도의 복합적인 미생물 집단 내에서 이스트의 활동을 촉진하는 방법은 신선한 곡물 가루를 높은 비율로 물에 섞어서 영양분으로 꾸준히 제공하는 것이다. (467, 미생물이 도처에 있어서, 굳이 시판 이스트 나 종균 같은 거 안 사고도 일상에서 적절한 방법만 취해주면 빵반죽 발효시킬 수 있다는 걸 강조한다. 다른 발효 미생물들도 종균을 호의로 기꺼이 얻을 수 있고 구매할 수도 있다는데, 우리 나라는 첨단 자본주의라 그런가 캐피어 구해보려고 하다가 진짜 소량에 몇 만원에 팔고 있길래 마음 접었다… 그냥 슈퍼에서 요거트 사먹을게…)

-어디서든 식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면, 부의 집중화, 문화적 차별성 소멸, 긴요한 문화적 지식과 기술의 폐기, 의존성 심화가 필연적이다. 대중이 사회문화적 맥락을 상실한 음식을 먹게 된다는 뜻이다. (543, 나는 오히려 과거와 단절되는 맥락 상실의 음식이 좋다. 어릴 적 명절날의 친가집 제삿상이나, 아빠에게 이런저런 구박 받으며 먹던 밥상 떠올리게 하는 한식은 냄새만으로도 거부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점점 괴식 내지 이그조틱 아티피셜한 음식들로 빠져...보그냐 ㅋㅋㅋ)

-아아, 나는 템페와 사랑에 빠진 나머지 두부를 향한 마음이 애매해지고 말았다. 이제는 모두 지난 일로 묻어두고 싶은, 학창 시절 가슴 아픈 첫사랑의 추억처럼. 나는 템페가 너무 좋아서 템페 없이는 못 산다. 그래서 템페를 어마어마하게 많이 만든다. 아침에도, 점심에도, 그리고 저녁에도 템페를 먹고 싶기 때문이다. 신선한 템페로 가득한 부엌이란 실로 축복받은 장소가 아닐 수 없다. (607, 스파이키 씨의 템페 예찬. 무언가 저만큼 사랑하는 음식이 있다는 건 부럽기도 하다. 나도 템페를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종균 구하기도 힘들고 그냥 바싹 튀겨 파는 템페칩이나 사다 먹었다. 양념 센 맛 덜 센 맛 다 먹어봤는데 오 나 이 맛 좋아한다. 된장 청국장은 안 좋아하면서 인도네시아 곰팡이콩은 좋아하냐…)

-미소-땅콩버터와 미소-요구르트 조합도 이에 못지 않게 맛있다. (668, 된장국-모짜렐라치즈 조합 유행시키고 싶었는데 진작 실패했다. 이거 보면 나만 괴식 아니라니까!!)

-상업적 생산은(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기쁨의 종말을 의미할 수 있고, 손익분기점은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상과 충돌할 수 있다. (…) “이 사회 안에서 지속 가능한 사업이려면 어느 정도 자본주의적 고려가 필요한데, 때로는 어떤 결정이 최선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말한다. (755, 온갖 발효 경험담, 레시피, 관여 미생물 소개, 발효 과정과 메커니즘, 문제 해결을 넘어 발효를 사업 삼아 할 때 고려 사항까지 세심하게 담은 책이었다. 저자는 정작 사업화 해 본 적이 없고, 소규모 발효음식 사업 하는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은 교훈과 이야기를 모아 놓았다.)

-쓰레기 발생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자연 생태계에는 쓰레기가 전혀 없다. 모든 생명체의 부산물이 다른 생명체의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지구가 배설물과 사체로 가득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열광적인 숭배자들을 거느린 고전 ‘인간 배설물 핸드북’의 저자 조지프 젱킨스는 “대변과 소변은 동물이 소화과정을 완료한 뒤에 배설한, 자연적이고도 이로운 유기물질”이라면서 “우리가 내버리면 ‘쓰레기’가 되지만, 재활용하면 자원이 되는 법”이라고 말한다. (811, ‘젱킨스’로 검색했으나, 안타깝게도(?) 번역서가 없었고, 제시카 커윈 젱킨스의 ‘세상의 모든 우아함에 대하여‘만 찾았다. 똥 대신 우아함을 안겨준 인용 서적이여…)

-시신의 매장이 가능한 곳이라면, 여러분의 시신을 되도록 간소한 상태로 땅에 묻도록 하자. 아무리 그래도 관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그러면 관 대신에 생분해가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천연섬유나 종의 수의로 시신을 감싸는 것이 어떨까? (…) 우리가 남긴 육신이 방부처리액에 잠겼다가 부패가 힘든 물질로 번들거리는 관 속에 담기는 것보다 나무의 거름으로 쓰이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816, 이 부분에 동의. 어려서는 매장이 계속되면 대한민국엔 무덤밖에 없겠다 싶었는데, 땅값 비싸지니 꺼려지던 화장이 알아서 보편화 되었다. 아파트형 납골묘 단지 안에 내내 갇혀 누굴 기다리기 보다는 잘 갈아서 나무 둥치 아래 구덩이 파고 적당히 묻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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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잡년 - 자유로운 사랑에 대한 실용지침서
재닛 하디.도씨 이스턴 지음, 금경숙.곽규환 옮김 / 해피북미디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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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2 재닛 하디, 도씨 이스턴. 재독.


5년 전에 읽은 책을 어쩌다보니 재독했다. 여름 더위가 슬몃 다가오는 날, 6시 반쯤 알람도 없이 잠에서 깨어, 아...출근하기 싫다...하며 거울을 보니 간밤에 머리도 안 감은 나를 보고 아… 오늘 일요일인가 봐, 아싸!

만이천원에 십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머리카락을 잘라주던 미용실 대신, 엄마가 다니는 커트 이만오천원(직원)에서 삼만원(원장) 받는 미용실에 처음 갔다. 3대가 함께 왔다고 각각 이만오천원씩 잘라주면 감사한 일이겠지. 피아노소곡집의 표지 사진 장소인 프린세스스트리트가든즈가 적힌, 에든버러성이 그려진 엽서가 벽 한가운데 붙은 걸 보았다. 어머, 여기 가셨어요? 아니오, 지인이 갔다 왔다고… 무슨 책 표지요? 묻다가 손모가지 하나 남은 라벨이 만든 피아노 곡이 라디오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원장님, 오스트리아에 가서 만난 할아버지가 비트겐슈타인 한 권 읽으면 더 읽을 책이 없다고 해서 샀다가 못 읽은 사연, 나는 수능 국어 지문으로만 만난 양귀자 소설 속 인물을 자꾸 나랑 비슷하다고 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지적욕구를 짧은 시간 구경하는 건 흥미로울 수도 있지만 오… 뭐라 대꾸할지 모르겠다. 배드민턴 열심히 치는, 반려자에게 신장 하나 떼어주고, 엉터리로 가위질한 가발 쓰고 나타난 언니의 머리를 다듬어주던, 원래 가던 미용실의 말수 적은 쿨한 원장님이 조금 그리웠다. 그래도 뽀글뽀글 브로콜리 머리를 입체컷으로 좀 시원하게 짧게 샥 밀어주시고 트리트먼트도 선물로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숙련 장인들은 그 기술이 무엇이든 존경합니다…
지피티한테 야 나 머리잘랐다, 그림으로 그려 봐, 했더니 자꾸만 아저씨로 그려 놔서 됐다, 기대를 접었다, 하고 치워버렸다.

큰 방향도 목적도 없는 휴일, 느긋하게 다자연애, 열린 관계에 대한 책을 통독하며 시간을 죽였다. 나쁘지 않았다. 다시 읽어도 흥미로운 책이고, 연애 관계에 한정 짓지 않더라도 인간 관계를 맺는 기본적 예의나 윤리 감각을 일깨워주는 부분들이 좋았다. 난교 파티 부분은 처음 읽을 때 후덜덜했던 것만큼 공포스럽지는 않았지만, 오 내 경계는 여기까지로군… 사양합니다… 하면서 적당히 넘기고… 이제 흥밋거리 아니라면 나는 이런 주제의 책들이 더는 필요 없겠구나 싶었다. 그걸 알자고 400페이지 넘는 이 책을 한 번 더 봤구만. 하산해라! 어쨌거나 이걸 읽는 누구든 지평이 넓어지는 지점이 있긴 할 것이다. 무엇이든 배우고 또 익히면 즐겁지 않겠는가. 알고 연습하면 무엇이든 숙련 기술이 될 수 있다.
엄마가 싸 주시는 김밥이나 먹으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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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잡년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128, 웅장하게 선언.)

-연인의 감정은 당신의 책임이 아니다. 당신은 연인을 응원할 수 있지만-우리는 들어주기의 치유력을 믿는 신봉자들이다-, 문제를 고칠 수는 없다. 연인의 감정이 당신의 문제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부터 이해하기를. 그러면 문제의 책임을 따지거나 감정을 바꾸고 없애야 한다는 막중한 필요에 희생당하지 않는다. 연인의 이야기를 진정으로 귀담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연인의 고통이나 혼란에 저절로 반응해서 뭔가를 열심히 고치려 한다. ‘고쳐라’하는 메시지는 감정을 표현하려 애쓰는 사람이 타당성을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그냥 이렇게 해보면 어때….그렇게 시도해봐...잊어버려...마음 편히 가져!”라는 말은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 명백하고 단순한 해결책을 간과하고 우선 기분부터 상하는 멍청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143, 저 어떤 사람 나니까...T 하지 말라 이거야…)

-감정을 공유하고 싶을 때 청자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미리 밝혀 상대가 쓰레기통이 되지 않게 하자. (145,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달라는 게 아니라, 그냥 들어줄 수 있겠어? 하는 것. 감정 공유와 쓰레기 쏟아붓기의 구별.)

-다자 관계에서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다양한 자신이 되어보는 기회다. 두 사람이 만날 때는 교차하는 지점, 비슷한 대본 속의 상호 보완적 역할에서 엮인다. 따라서 다른 연인들과 다른 존재가 되면 우리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경계, 한계선, 관계 스타일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148, 상호작용의례의 역할 놀이처럼, 다양한 연인 관계가 다양한 자신을 만든다는데, 그럼 그런 건 성애 관계로 얽히지 않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가능한 게 아니냐는 반박에 직면할 것이고, 그럼 여기서의 다양성은 성적 가능성의 다양성이라고 또 반박할 것이고, 그럼 또 그게 꼭 발견되어야 하는 거냐고 이 섹스에 미친놈들아 할 것이고, 너희는 삶의 무한에 가까운 행복을 놓치고 있다고 할 것이고, 아이씨 싸우지 말고 섹스해 둘이든 셋이든 너거들 맘대로 해...)

-공정함은 잊어라. 윤리적인 잡년생활은 모든 것을 다 똑같이 대하는 게 아니다. 다른 관계에는 저마다의 다른 경계, 다른 한계선, 다른 잠재력이 자리한다. 그러니 당신의 연인이 특정 활동을 함께 할 수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서 당신과도 공유하기를 원할 때 나와야 하는 질문은, ‘왜 나랑은 그거 안 해?‘가 아니라, ’흥미롭게 들리는데. 우리가 함께 그걸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이다. (148, 실질적 평등과 친밀한 사이의 화법 익히는 자기계발서 느낌이 들 때도 많다...배움이란 좋은 거지...가까운 사이일수록 우리 모두 조금 더 친절하고 공손해지자…)

-우리는 얄팍한 가치 위계에서 높은 점수를 얻어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사랑이라고 믿지 않는다. 우리의 풍부한 경험은 외모와 부유함이 좋은 사랑을 만드는 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는 사랑의 우열을 가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속한 등급과 관계 맺으려는 사람들이 마뜩잖다.위계는 정상과 바닥에서 모두 희생자를 만든다. 아무도 접근하지 않을 때만큼 잘못된 이유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이 접근하는 것도 사람을 소외시키는 일이다. (152, 듀오나 가연은 사랑을 구해다 주지 않는다는 거야…)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당신은 좋은 사람 같지만 그렇게 깊이 연결된 기분이 들지 않아서요.‘ 또는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저는 지금 진짜로 연인을 찾고 있는 건 아니에요.‘ 또는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저는 먼저 사람을 잘 알고 나서 그런 걸 하는 게 좋아요.‘ 같이 말해보라. 중요한 지점은 ’고맙다‘라는 말은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요청은 당신에게 찬사이며 충분히 고마운 일이다. 혹시 누군가가 당신을 매력적으로 본다는 사실을 당신 스스로 어이없어한다면, 당신의 자존감이 우려스럽다. (158, 앞으로는 누가 예쁘다고 하면 미쳤냐, 하지 말고 고맙다, 라고 하자.)

-질투는 불안감, 거절에 대한 두려움,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공포 또는 소외감, 스스로 연인에게 부족하거나 적당하지 않거나 혐오스럽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감정의 표현일 수 있다. 당신이 느끼는 질투는 영역성이나 경쟁심 때문일 수도 있고, 머릿속에서 질투가 벌이는 야단법석 속에서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대상을 바라는 다른 어떤 감정에 바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맹목적인 분노의 비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눈이 멀면 제대로 보기가 매우 어렵다. (206)

-타인을 악인으로 만드는 식으로는 질투에 제대로 대처하기 힘들다. 자신의 감정을 연인에게 부당하게 떠넘기는 것은 막다른 전략이다. 그 전략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질투는 당신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다. 어떤 사람과 어떤 행동도 당신이 질투를 느끼게 ‘만들지’ 못한다. 좋든 싫든, 질투에 덜 상처받거나 질투를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다. (214)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안도감, 사랑, 포옹, 위안 같은 것들을 자유롭게 요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성장한 대부분의 가정은 원하는 것을 요구하지 말라고 가르쳤고, 요구를 단지 관심을 바라는 행동으로 업신여겼다.
관심을 바라는 게 도대체 무슨 잘못일까? 거기 관심이 많지 않은가? 굶주림의 경제를 기억하고 자신을 속이지 마라. 찔끔찔끔 받는 위안, 관심, 지지, 안도감, 사랑에 만족할 필요는 없다. 당신은 원하는 만큼 다 가지게 된다. 당신은 친밀한 사람들과 많은 걸 공유하기로 결정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러니 풍성함에 초점을 맞추라. 삶의 좋은 것들-따뜻함과 애정과 섹스와 사랑-속에서 관계 생태학을 풍요롭게 창조하라. (252)

-함께 살아야만 하는가? 왜? 반대로 당신이 좋아하는 점을 지닌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다른 것들을 공유할 다른 누군가를 찾으면 안 되는가? 잡년생활은 그 무엇보다도 당신의 모든 욕구를 특정 1인에게만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310)

-최소한, 이 관계는 경쟁이 아니다. 당신 삶의 어떤 영역도 다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의 감정을 돌볼 수 있다. 이런 확신을 스스로에게 주려고 노력하라. 다시 말해, 당신의 것을 자신에게 귀속시켜 제3자를 비난하지 않겠다는 다짐 말이다. 어쨌든 그러한 사람들이 당신의 삶에 들어오는 이유는, 당신과 그들이 매우 중요한 어떤 것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바로 당신의 파트너가 가장 멋지다는 믿음. 그들은 당신의 행복을 어떻게 파괴할지 구상하며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아마 자신의 다른 일들에 시간과 에너지를 쓸 것이다. (320)

-당신은 경계를 견고하게 만들어 유지할 책임이 있다. 경계는 당신이 끝나고 옆사람이 시작하는 지점을 알려준다. 좋은 경계란 튼튼하고 명확하며 유연하다. 나쁜 경계는 약하고 흐리며 부서지기 쉽다. (329-330, 독신 잡년의 윤리 중 책임 부분의 일부인데, 이건 누구에게든 적용되는 원리 아닌가 싶어 옮겨 적었다.)

-끝내, 친애하는 옛 사랑이여,
이제 내 마음을 받지 못하네,
사랑이 아니었다고 우리가 말해야 하나,
그것이 사라졌다고 해서? (350, 빈센트 밀레이의 시 ‘참새는 죽었다’ 중)

-그냥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더 쉽지 않을까? “손가락을 내 클리 위아래로 움직이지 말고, 그 둘레로 원을 그려주면 정말 좋을 거 같아.” (361, 뭔가 씩씩해보이는 발화 예시였다. 모두가 단어 없는 소통에서 벗어난 세상을 응원합니다.)

-다음과 같은 말을 거울에 써둔다: 성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자위를 한다. 당신이 패자라서, 파트너를 찾지 못해서, 오르가슴이 절실해서 혼자 자위하며 끙끙대는 게 아니다. 당신은 즐거움을 누릴 자격이 있기 때문에 자신과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자신과 놀면 기분이 좋아진다. (371,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잔인한 필립 로스는 젊을 때 어린 포트노이를 그렇게나 불행하게 그려놨다. 그치만 대체로 저자들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성적인 자족은, 너무 꼴린 나머지 잘못된 사람과 놀 가능성을 한결 적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잡년 기술이다. 당신 자신의 최고 연인이 되라. (373, 나야 나랑 사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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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
모드 방튀라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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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1 모드 방튀라.

낮잠을 자는 일은 몇 달에 한 번은 될까 싶게 드물다. 토요일 정오를 지나, 잠시잠깐 엎드린 자세로, 벗은 안경을 손에 쥔 채 머리 위로 팔을 뻗고, 잤다. 깼다. 귀마개를 끼면 밤이고 낮이고 평온하다. 간밤엔 귀마개를 잊고 잤다. 작은어린이가 텔레비전으로 틀어놓은 2배속 게임방송이 거슬리는 낮에는 귀마개를 하면 마음이 다시 편안하다.

어려서 학급 장기자랑 시간에 아홉 살 짜리 한 아이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어나니, 눈 앞에 흰 물체가 어른거렸다고. 어딜 가도 어딜 보아도 계속 어른거리는 그 유령에 겁에 질려 있었는데, 흰 물체의 정체는 눈꺼풀에 붙은 밥풀이었다고. 공포에서 개그로 끝나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가 왜 생각나냐면 과제 채점을 할 때도, 읽던 책을 타자 쳐서 옮겨 적을 때도 오른 눈동자 위로 와이퍼 지나가듯 흰 무언가가 슥슥, 지나가기 때문이다. 내 엄마가 예전에 이걸 앓으면서(아마 지금도 앓을 듯) 비문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모기가 눈앞 나는 듯한 그 증상에 이름 붙일 말이 없었다면 나는 정말 겁에 질렸을지도 모르지만(내가 미쳤나? 진짜 귀신이 있는 건가?) 눈 건강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도 겁날 일이긴 하구나. (하고 적는 순간 눈 앞에서 똑딱, 진자운동처럼 뭐가 스치고 지나간다.)

그렇게 귀마개를 하고, 모기 같은 모기 아닌 게 눈앞에 어른거리는 채로 소설을 읽었다. 결말부에서 남편이 할 말을 미리 예상해버려서 뭐여 이게...했다. 에필로그는 사족 같았다. 사랑은 징벌이 아닌데. 어떤 혼인생활은 회복적 정의가 아닌 응보적 정의로 가동될 수도 있겠군...그런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거기 하나 더 붙었구만, 그래도 그냥저냥 시간 죽이기 좋았다. 번역가는 내가 칠조어론 볼 때 한자 사전 뒤진 이후 가장 많이 사전을 뒤져보게 만들었다. 국어 낱말 공부라도 한 게 어디야. 그런데 왜 번역 이력에 카트린엠은 빼먹으셨나요 선생님…. 엠언니가 부끄럽나요… 띠지나 표지의 이런저런 찬사는 좀 오버 같다. 징글징글하게 쓰긴 했는데 뭐 징글징글 대회도 아니고 다른 독자들이 별로여, 하는 심정도 이해는 간다. 나는 별로까진 아니고 그냥 왜인지 거울치료 받는 기분이었다. 수첩도 징벌도 없는데도 그냥 그랬다고.

+밑줄 긋기
-나는 더 많은 것을 바랄 수 없고, 더 나은 것을 바랄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느끼는 결핍감은 어마어마하고, 나는 그가 그 결핍을 메워 주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그가 과연 어떤 집으로, 어떤 아이로, 어떤 보석으로, 어떤 사랑 고백으로, 어떤 여행으로, 어떤 몸짓으로, 이미 가득 차 있는 것을 채울 수 있겠는가?(11-12)

-이렇게 해석자로 일하는 것이 나에게 더없이 잘 어울린다. 나는 무언가를 창안하지 않아도 된다. 그게 딱 맞는다. 나는 상상력이 별로 없으니까 말이다. 나는 살펴보고 분석하고 추론하기를 더 좋아한다. 나무나 열매의 껍질을 벗겨 그 속을 살피듯이 원문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원문의 함의를 밝혀내고, 그 무언의 울림을 드러내는 일을 좋아한다. 마치 감춰진 증거를 찾아 나가는 수사관처럼 치밀하게 조사하는 일이 마음에 든다. (45, 나는 내 마음대로 오독하고 다시 쓰는 게 좋아서 책을 읽는데 말이다. 어차피 난 쓴 이의 참뜻에 가닿지 못할 걸 아니까 뜻은 내가 만든다.)

-나의 첫 번역인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관한 책을 옮길 때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 과학적 발견(우리가 세계의 중심에 있지 않으며, 지구가 무한한 우주의 외딴 구석에서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고 주장하는 파천황의 사태)을 끊임없이 나의 애정 생활과 비교했다. 나는 마음이 어수선해진 채로 스스로 되뇌었다. 만약 내 남편 없이 살아야 한다면, 내가 겪어야 할 것이 바로 그런 사태이리라고. 사고의 모든 지표를 무너뜨리고, 사람들이 언제나 확실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을 화해시키는 그런 사태를 내가 겪게 되리라고. (49,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 라는 부재 붙은 만화책 읽고 이 책 펴자마자 코페르니쿠스 나와서 -정작 만화책엔 그 이름 한 번 나옴- 모든 책들은 알아서 이어진다는 생각을 또 했다.)

-루이즈가 덜룽스럽고 생급스럽다면 니콜라는 주의 깊고 자상하다. 루이즈는 햇살과 같고, 니콜라는 그 따가움을 완화한다. 그들은 함께 서로를 보완한다. 서로 잘 맞물린 두 개의 기계 부품과 비슷하고, 기름칠이 맞춤하게 되어 있는 톱니바퀴 장치와도 비슷하다. (73, *덜룽스럽다:성미가 찬찬하고 차분하지 않은 데가 있다.
*생급스럽다: 하는 일이나 행동 따위가 뜻밖이고 갑작스럽다.
전에 다른 책에서는 감창소리 라는 말로 사전을 찾게 만든 번역가님…이 부분 이후로도 나는 사전을 계속 펴게 되고...)

-옥생각(76:공연히 자기에게 해롭게만 받아들이는 그른 생각.)

-나는 그를 따라 침실로 가기 전에, 잠시 혼자 남아 내 수첩에 저녁 모임 동안 벌어진 일들을 기록한다. 우리 아들의 생후 몇 개월 동안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이야기, 자기 생일잔치 얘기를 하면서 그가 나를 언급하지 않은 일,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귤에 비유한 일을 적고, 만년필로 밑줄을 긋는다. 마트형 과일의 쌉쌀한 맛으로 그의 배신을 기록하자는 뜻이다. (87, 데스노트냐. 사실 조금 더 섬뜩한 무언가.)

-투명한 두 줄기 눈물이 마르고 나니까 내 남편의 숨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숨소리가 느려지고 있다. 이 사람은 저녁 모임에서 나한테 그런 짓을 하고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지? 나는 이 사람이 우리 부부의 삶에 에너지와 열의를 쏟아부으리라 기대했는데, 잠을 잘 자는 이 사람은 수면 활동에 그런 것들을 쏟아부은 모양이다.(91, 라고, 이 문단을 베껴적는 책상 옆 이부자리, 아침 아홉시 사십 구분 현재, 곁의 사람은 내 베개 위에 팔을 얹고 모로 누워 아기처럼 자고 있다. 쿨쿨.)

-그가 나를 옆에 두고 전화기를 꺼냈다는 사실. 그가 내 손에 자기 손을 얹지 않았고, 우리 몸이 서로 닿지 않는다는 사실. 그가 내 번역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묻지 않는다는 사실. 오늘 오후에 서류를 가져다준 것에 대해서 그가 다시 감사를 표하지 않는다는 사실. 귤과 관련해서 그가 여전히 사과하지 않는다는 사실. 밤에 덧창을 열어 놓고 자고 싶지만, 그가 그런 예외적인 제안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 우리 아이들이 경이롭게 우리가 함께 사는 삶이 하나의 축복이지만, 그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모든 것에 생각이 미친다. (158, 쪽까지의 읽은 내용이 이 한 문단으로 다야, 하는 나는 미친다. 이쯤되면 그냥 아니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나 집착의 오마주 같은 건가… 프랑스 소설은 다 왜 이래… 뭐하다가 할 말 없으면 자꾸 뒤라스의 ‘연인’ 꺼내서 방패처럼 써 먹는데 니네 프랑스는 그 둘 빼면 뭐 없냐.)

-가리사니(191): 사물을 분간하여 판단할 수 있는 실마리.

-그런 만남의 목적은 단 하나, 사랑의 압박감을 덜어 줄 수단을 찾아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 남편을 상대로 느끼는 엄청난 압박감을 여러 사람 사이로 분산시키는 길을 찾는 것이다. (208, 아 그래?시종일관 정신 없네...)

-내 살갗에서 막심의 냄새를 맡고 일종의 남성적 본능이 되살아난 것은 아닐까?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지만, 내 남편은 내가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갖고 온 날이면 언제나 나랑 성행위를 했다. (…) 그러나 내 안에 깊이 박혀 있다 해도, 내 남편은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존재다.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있어도, 나는 그가 무척이나 그립다. 그가 내 몸에서 물러가면, 나에게 깊숙한 자상이, 무시무시한 허허로움이, 곪아 터질 상처가 남는다. (218, *허허롭다:텅 빈 느낌이 있다. 매우 허전한 느낌이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금요일이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 색깔인 초록색 덕분이다. 이건 한낱 미신이 아니다. 미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실들이 있다. 나는 정말로 필요하다 싶을 때면, 주위에서, 즉 가까이에 있는 물건이나 풍경에서 초록색을 찾았다. 그렇게 초록색을 찾아내면, 나에게 좋은 결과가 온다고 믿었다. (228, 요즘 나는 초록 옷이나 가방 착장하고 나가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크초록 새초록 온갖 초록을 입고 연속으로 나를 스쳐지나가서 아...이 색 노인들 사이에 유행이구나… 그래서 자꾸만 누군가 내 바글거리는 머리를 보고 어머님, 하다가 어머 아가씨잖아-둘다 아니야-하는 경험을 하는 건가 싶다. 색깔 강박 아웃, 초록은 새마을 컬러다. 아웃. 스타벅스 아웃.)

-인터넷을 조금 검색해 보니, 초록색은 색채 스펙트럼에서 525나노미터의 파장에 해당한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빅토르 바슈로 52번지에서 자랐고, 25번 도인 두에서 태어났다. 설명은 합리적일수록 더 나은 설명이 된다. (229, 숫자가지고 자꾸 의미 부여하면 안 되겠다 싶은 거울 치료...되게 모지리처럼 보이는 구나…)

-사랑에서 나는 그 무엇도 배우지 못했다. 사춘기 시절 이래로 똑같은 도식을 되풀이한다. 나는 너무 강렬하게 사랑하는 나머지 사랑 속에서(분석 속에서, 질투 속에서, 의심 속에서) 나 자신을 소진해 버린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나는 언제나 좀 사그라진 듯한 슬픈 상태를 맞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나는 엄하고 슬픈 사람으로 변하고 마음 쓰는 폭이 좁아진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만큼 진지하게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 사랑은 고단한 일로(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빠르게 변해간다. 요컨대, 나는 불행한 사랑을 한다. (…) 그 남자들 중 어느 하나에 의존했다기보다는 사랑에 중독되어 있었던 셈이다. 남자들은 변수였고, 그 중독만이 상수였다. (237, 내가 애기 때 내내 겪던 증상을 여기서는 사십대 가까운 중년 여성이 아직도 앓고 있다. 이제 좀 낫자...)

-당시의 내 심리 상태를 서술하기에 적합한 표현이 하나 있다. 즉, 나는 내 삶이 틀을 잡기를 바라고 있었다. 내 삶이 무언가 지속성 있고 견고한 것으로 변화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꼭 찰흙이 굳어 덜 만만한 것으로 변해 가듯이, 나 역시 물기를 버리고 단단해지고 싶었다. (242)

-언죽번죽(24):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고 비위가 좋아 뻔뻔한 모양.

-내 남편은 치즈값으로 75유로 23상팀을 냈다. 액수가 크다. 지난주보다 많다.(그가 장을 보면서 돈을 많이 쓰면 쓸수록, 나는 그가 나를 더 사랑한다는 기분을 느낀다). 생크림과 우유, 오믈렛용 달걀, 나를 위한 콩테치즈, 아이들을 위한 양젖치즈, 샐러드용 염소젖치즈, 그가 목요일에 소스를 만들면서 사용한 로크포르치즈. 한 주간 이상 먹을 만한 양이다. 적어도 열흘 동안은 더 사지 않아도 된다. 훌륭한 전리품을 얻은 것처럼 든든하다. 이건 한 가정의 아버지에게 걸맞은 영수증이다(여기에는 가족의 각 구성원이 좋아하는 치즈가 들어 있다). (250, 치즈 타령에 이렇게 많은 글자를 사용하는 것 보니 프랑스 놈들 치즈에 진심인 거 알았으니 이제 그만하면 됐다)

-하지만 내 남편은 내가 자기에게 무언가를 숨길 수 있다는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다른 남자들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받은 메시지를 삭제하지도 않고, 내 몸에 닿은 그들 몸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샤워를 하지도 않는다. 내 남편이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오늘 오후에 다른 남자랑 함께 있었어?>라고 물으면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증거를 흩뿌려 놓아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월요일부터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을 낮은 탁자에 올려놓고 있지만, 확신컨대 그는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이렇게 자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아내가 왜 갑자기 <연인>이라 불리는 책을 읽기 시작한 거지? 나는 그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어리기를, 그의 차분한 평정이 깨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어떤 불안이, 어떤 의심이 끼어들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행히도 그의 눈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자신감뿐이다. (257-258, 이 부분에서 왜인지 이 여자가 가엾었다.)

-우리의 사적인 대화를 녹음하는 것이 나에게는 합리적인 일로 보인다. 그 말들은 나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그걸 다시 들을 권리가 나에게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그건 내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습관이고, 대개는 그 결과도 별로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종종 그만두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그 일을 하지 않고 살기에는 아직 어려움이 있다. (…)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은 내 남편과 드물게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는데, 그중 하나를 녹음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나를 며칠 동안 안정을 잃고 헤매게 만든 말싸움을 다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컴퓨터에 그것을 전사한 다음 영어로 옮겼다. 다만 그게 우리 두 사람의 말다툼이라는 것을 알게 할 수 있는 정보들은 신경 써서 잘라 냈다. 나는 그 번역 텍스트를 인쇄한 다음, 내 학생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 설명하기를, 그것이 예전 영어 교재의 한 장을 복사한 것인데, 어느 부부의 말다툼이 명령법을 복습하기 위한 완벽한 틀을 제공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말했다. ‘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아요’. 크나큰 아픔이 밀려왔다. 나는 잠시 앉아서 숨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261-262, 녹음은 몰라도, 엠에스엔 시절에는 친구나 연인과 대화한 내용을 메모장에 저장해 놓기도 했다. 심지어 음악 시디에 함께 구워서 20년 넘게 박제된 것도 있을 걸? 지금도 문자메시지 같은 걸 주고 받고 나면 복기하듯 다시 돌아가 한 번 읽어보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고 미친년 이야기처럼 읽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럴 법 하지, 하고 읽게 되는 슬픈 사람도 있는 것이다.)

-찰필(265): 압지나 얇은 가죽을 말아서 붓 모양으로 만든 화구. 문질러서 빛깔을 흐리게 하거나 짙고 옅음을 나타내는 데에 쓰인다.

-그렇게 평영의 몸짓을 하면서 그는 스스로 이렇게 깨닫고 있지 않을까? 나라는 여자와 결혼한 것은 하나의 실수이자 하나의 실패라고, 자기는 우리 집의 포로라고, 자식을 둔 것은 하나의 책무라고, 자기는 자유를 잃었고 꿈을 포기했다고, 아내는 자기가 사랑했던 거무스레한 피부의 스페인 여자만큼 흥미롭지도 않으며 교양도 풍부하지 않다고, 자기는 이제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내를 만질 때면 다른 여자를 욕망한다고, 자기는 아내 곁을 떠나야 하고 곧 떠날 거라고. (266, 이 여자가 대체 어떤 삶의 롤러질을 당했길래 이 지경인지 겨우 일주일 남짓 시간의 심리와 행동 묘사를 한 것 가지고는 이 부분에서 파악하기 힘들다. 그냥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구나...그런데 나도 그런 날들이 있었던 것 같아 지금은 남의 일 같지만 그래도 기시감이 드는 구나…)

-만약 우리가 마지막으로 하는 일들을 처음으로 하는 일들만큼 분명하게 판별할 수 있다면, 분명코 우리는 무수한 순간들을 더 강렬하게 살게 되리라. (334)

+이것이 찰필이다. 찾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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