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대온실 수리 보고서도 못 읽었는데 김금희 소설가가 남극에서 지내다 왔다는 소리를 듣고 너무 궁금했다. 칼로리 없는 곤약밥 같은 디카페인 콜드브루도 사고. 우주점에서 눈독들였던 양안다 시인 산문집과 펄프헤드도 한 군데에서 겟.
팔찌도 또 많이 많이 만들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원치 않으면서 돌아가는 길은 또 험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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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5-02-05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왕 책장 이렇게 조금씩 보여주시면 좋더라고요. 에브리맨 제목만 봐도 어질하네요 펄프헤드 재밌었는데 다 못보고 반납(왜 재밌다고 하니?)ㅋㅋ 읽는 게 없다.. 비즈 주문제작 바쁘신 와중에 페이퍼 굿굿

반유행열반인 2025-02-06 00:18   좋아요 0 | URL
에브리맨 시계방 필립 로스 치곤 슴슴한 걸요 ㅎㅎ 유수님이 재밌다니 기대된다!!! 구슬 그만 할래요...시각 장애 거지 될 듯....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 채석장 시리즈
주디스 버틀러.프레데리크 보름스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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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3 주디스 버틀러, 프레데리크 보름스

 

 

 주디스 버틀러의 사상에 관해 빼놓지 않고 대략적으로 소개하는 젠더, 퀴어, 페미니즘 책들을 보면서 그의 사상을 맛이라도 보고 싶었던 적이 있다. 마침 전자도서관에권력의 정신적 삶’이 있어 빌렸지만, 번째로 빌렸지만 모두 서문에서 으아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되겠다 안녕...하고 보내줬다. 그러다가 책에 별로 미련 없어진( 이게 열반 아닌가) 친구가 가질 가져, 하고 구판 젠더트러블을 줘서 다시 주디스 버틀러 선생을 영접...하기는 겁이 나던 차에 태양계 실제 비율 마스킹 테이프를 준다고 해서, 다른 굿즈 최소 금액 채워야 되서, 그런데 보니까 책이 얇고 비싸서 어쩌다 보니 들이게 되었다. , 그래도 이건 다른 저작들보다는 대담이라 어렵다는 소리도 있어… 힘을 내…

 


 얇지만 괜히 내적 묵직함 때문에 서문 들어가면서 , 주요개념을 먼저 정리하고 숙지하고 가면 좋겠군! 하면서 그지 손글씨로 딴에는 또박또박 정리를 했다. 서문만도 일곱 바닥이 나와서 뭐여 이새끼야 이게 요약이냐 필사냐...했는데 2018 4월과 2022 4월의 대담 내용을 이어서 보니 이건 그냥 스포일러였다. 그러고서 이해 못했을 독자를 위해 역자 선생님이 해제로 뒤에다 요약해주신다. 선생님의 대화도 아주 차근차근 서로 가지고 있던 사상적 바탕과 개념부터, 이거가 너가 말하는게 맞지? 거기는 나도 동의해, 그런데 나는 이렇게 생각해, 나도 동의해, 이러면서 차이와 공통점을 섬세하게 짚어가고 예시도 자세히 들고 그래서 생각보다 읽기 아주 어렵진 않았다. 사실 사람이 하고 싶은 멍청이더러 후려치라면모두의 만한 삶을 보장하기 위한 연대, 구조, 조건 보장을 위해 투쟁!!!!!!’ 이렇게 수도 있지만 서로의 주장에 대한 동의를 바탕으로 결론에 도달하는 똑똑이 선생님들의 대화를 직접 읽는 것도 흥미로웠다. 원래 인터뷰집이나 희곡이나 대담집 누구누구의 같은 읽던 나새끼도 이제 주디스 버틀러 선생님이랑( 근데 처음이지만 말하는 보기만 해도 똑똑미 넘침) 프레데리크 보름스 선생님( 선생님은 엄청 꼼꼼 섬세 정확 차분하게 개념과 주장들을 확인하고 짚고 넘어가심. 돌봄 강조하는 보니 괜히 따뜻한 보름달 같은 느낌의 선생님ㅋㅋㅋㅋ) 어떤 개념들을 강조하는지 쥐톨만큼 맛은 보게 되었다.

 

 겨우 148 짜리 책인데 이거 옮겨 놓은 보면 1/10 베껴 같아서...원래 제가 필사란 하는데 자신 없을 왠지 멋있어 보이는 말은 놔요...나중에 다시 보면 그땐 알까 하고...그러고선 8할은 다시 안 보지만… 그래도 동굴에 처박힌 나놈한테 따콤한 꼴밤 연타로 때려주셨는데 그게 엄청 아프진 않고 시원한 같고 그런데도 당장 행동이고 연대고 하고 가까운 사람들이랑이나 지냈으면, 당장 복직할 직장에나 적응 잘했으면… 나아지게 하겠다고 싸우고 깝치고 다니지 말았으면...하는 비굴함에 서글퍼지기도 하는 독서였다.

 

+서문 요약(하기만 했지알아볼 수 있다곤 안 했다…)



+밑줄 긋기

-보름스: (…) 하지 않은 삶은 우리 몸이나 삶의 생명의 조건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종의 중단을 겪는 것입니다.솔직히 말해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자아의 파괴를 수반할 것입니다. 그리고 비유할 있다면 그것은 죽음보다덜한less"것이 아니라, 죽음보다 더한worse것인데, 왜냐하면 삶이 계속 되는 데도 삶을 삶으로 만들어주거나 누군가가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것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 그것은 분명 죽음과 유사한 것이기도 하고 죽음보다 나쁜 것이기도 한데, 삶을 사는누군가“가 없는 상태로삶“이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만하지 않다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생명의 중단과 같고, 우리의 생기적 조건의 중단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정도의 구분이 아니라 종류의 구분이어야 하며,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이고 비판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39)

 

-보름스: (…) 여기서 우리는 데리다가 아도르노와 리오타르에 따라 ”죽음보다 더한 것“이라고 부른 것으로 나아갑니다. 만하지 않을 아니라 죽음보다 나쁜, 죽음과 유사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만하지 않은 삶은 죽음보다 나쁜데, 이런 삶은 지속된다고 해도 사람이 삶을 자신의 삶으로 없고, 오직 생중사로만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극적인 임종 선택과 정치적인 문제들이 여기 있습니다. 바로 죽음과 죽음보다 더한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는 딜레마입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기술할 수가 없고,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이 경험을 기술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경험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만하지 않은 삶을 살아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이들의 만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지만 정의상 그런 삶에 대해 말할 없는 사람들의 삶을 기술할 의무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죽음보다 나쁜 것이 있다면, 삶보다 나은 것도 있고, 만한 삶보다 좋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만한 삶이 어떤 궁극적인 규범은 아닙니다. 우리는 단순히 만한 삶만 살고 싶어 하는 아니라 행복하고 즐겁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만한 이상의 무언가가 있습니다. 이동할 능력이나 죽지 않을 능력 이상의 , 누군가의 삶에서 창조적이고 사회적인 주체가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45-46)

 

-버틀러: (...질문들) 만한 삶과 만하지 않은 삶을 구분하는 문제에 있어 가지 질문, 쉬운 질문은 이런 것이겠죠. ”어떻게 있는가? 만한 삶과 만하지 않은 삶의 차이를 어떻게 있는가“ 하지만 저는 문제를 다음과 같은 질문 더미로 재구성해보고 싶습니다. 이런 구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만한 삶과 만하지 않은 삶을 구분할 , 구분을 위해서 사용되는 판단은 어떤 것인가? 누가 구분을 하고, 누구와 관련하여 구분을 하는 것인가?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이런 판단을 계속하는, 다시 말해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는 상황이나 장면 어떤 것인가? (48)

 

-버틀러: (오시비엥침 수용소 생존 작가 샤를로트 델보)델보는 살아 있었고 글을 쓰고 있었어요. (…) 그가 망가지지 않았나요? 사람들이 망가질 만한 조건이 아니었나요? 설령 망가졌다고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 갑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만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 전혀 그렇지 않지요. 그러니 망가진 사람이 과거의 트라우마를 서술할 있고, 서술 자체가 이렇게 망가진 것을 복원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이라면, 망가진 사람이 그런 망가진 관점에서 서술한다면, 우리는 만하지 않은 역시 여러분과 함께, 동시에 살아가는 조건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런 식의 살아가기는 자아의 생존과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살아가고 있지만, 만하지 않은 삶은 그것이 언제 끝날지 없는 채로 여전히 여러분과 함께 살거나 동행합니다. 삶이 끝나야만 만하지 않은 삶도 끝이 납니다. 여러분에게 남은 삶이 무엇이든 그것은 만하지 않음과 함께 살게 됩니다. 삶의 동반자로서, 혹은 삶을 구성하는 잔해로서, 어쩌면 삶과 떼어낼 없는 견디기 힘든 동행으로서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그것이 반드시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하지 않은 삶과 더불어, 만하지 않은 속에, 만하지 않은 삶을 계속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52-53)

 

-버틀러: 회복탄력성이란 용어는 물론 특정한 종류의 인도주의 단체 인권 단체에서 고난을 극복할 자원을 찾고, 심지어 이런 끔찍한 상황을 겪은 뒤에도 예전의 삶을 재개할 가능성, 영어로는되돌아갈bouncing back"가능성을 말하고자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회복탄력성이라는 용어는 인간의 파괴와 궁핍에서 눈을 돌리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적 어휘에 속합니다. 용어는 사람들이 결코 완전히 망가지는 일은 없다고 전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삶이 망가지거나 파열되는 같은 것은 없다고, 그리고 누군가가 망가지거나 어떤 삶이 파열된다 해도 아마 사람에게 내재하는, 다시 일어나 삶을 긍정하고 재개할 능력에는 결코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전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회복탄력성 담론이 어떤 생명력의 해석에 근거를 두건, 그것은 일종의 형이상학적 보장으로, 낙관주의에 재빨리 의지하는 것으로, 어쩌면 일종의 부인denial 거짓말로 작동합니다. 우리는 회복탄력성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비정부기구에 주어지는 공공 정책의 지침에 등장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용어가 인간이라는 개념을 유연하고 구부러지며 끊임없이 부활 가능한 존재로 선동하는지 있습니다. 어떤 파손이나 상실은 돌이킬 없어서, 삶에 대한 감각을 파괴하면서 평생 그들과 함께 가는데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런 때일수록 말입니다. 그들이 삶을 계속 살아간다 해도, 만하지 않은 삶과 더불어 계속 산다는 것은 회복탄력성과 같다고 없습니다. 아니요, 전혀 다른 것이지요. 사실 제가 우려하는 것은회복탄력성“이라는 용어가 현실을 부정하고 트라우마를 억압하는 작용을 해서, 이상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분명한데도 너무 급히 회복의 가능성을 보고 회복의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요. 어쩌면 이것은 격론을 일으킬 만한 여담이겠죠. () 우리가 지금 살만하지 않은 경험을 주체, 그런 경험을 겪는 중에 혹은 겪은 후에 경험에 이름을 붙일 있는 주체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가정 말입니다. 주체가 경험에 이름을 붙일 언어를 박탈당했거나 경험을 명명할 언어를 찾느라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은, 경험이 살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징표일 있습니다. 그렇다고 반대의 경우가 사실인 것은 아니지요. 때로는 만하지 않은 삶을 표현할 언어가 있을 있는데, 그렇다고 경험이 만한 것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만하지 않은 경험을 각각의 사람에게 경험이 똑같은 방식으로 기록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만하지 않은 경험을 타인과 공유할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 만하지 않은 경험을 함께 공유한다면(각자 다르게 공유한다고 해도), 덕분에 조금이라도 만한 것이 될까요?

(...소통 네트워크와 상호 의존 양식 생산 ) 이런 조건들을 함께 평가하거나 이해할 있게 된다면 만하지 않은 경험을 겪는 중이거나 겪어온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변화가 만들어지거나 혹은 만들어지기 시작할까요? 제가 말하고 싶은 가지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체의 조건은, 프레데리크 선생님의 용어로 말하자면 주체성의 조건은, 또한 상호주체성 조건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현상학적으로 상호주체성을 말할 그것은 모든 차이가 지워진 집단적 주체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공동의 상황을 함께 겪으면서 공동의 상황을 평가하고 이해하게 차별화된 네트워크 혹은 차별화된 집단을 가리킵니다. () 제가 보기에는 누군가와 공유된 만하지 않음이 있다면, 인간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무엇이, 식량과 보호소와 이동성과 법률 상담에 대한 의존이, 그래서 인간의 사회성의 기능과 같은 만함에 관한 무엇이 전면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생각에 삶을 살만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삶의 측면들입니다. 만함을 보호하고 촉진하려는 규범에 따라 조직된다면 말이지요. (55-58)

 

-버틀러(주체 시작의 관점 대안): 우리는 사회성이라는, 경제와 정치라는 넓은 문제들을 다루는 모델로서 처음 유아기 자녀 양육의 심리적 장면에서부터 논의하기 시작하는 것일까요? 물론 유아는 형성됩니다. 선생님도 유아를 형성하는 생기적 관계들에 대해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유아의 형성을 도와주는 부모도 유아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언어와 사회 속에서 형성됩니다. 그러니 어디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할까요? 주체의 형성에 대해 생각할 방법은 수없이 많고 출생도 그중 하나지만, 출생에 앞선 역사가 완전히 다르듯, 출생을 이끌어낸 장면도 완전히 다른 별개의 문제입니다. () 말은 주체의 삶의 시작이라는 이야기를 시작할 다른 방법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에 누가 여러분을 상상했나요? 누가 상상하지 못했나요?(75-76)

 

-보름스:(…) 오히려 반대로 어린 시절에는 부모의 사랑이 있고 사랑의 양극성이 있습니다. () 우리는 지뢰밭에서, 위험 지대에서 태어났어요! 그리고삶의 끝“ 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질병에 대해서나 난민에 대해서도 똑같은 것이 사실입니다. 확실히 저는 취약성을 이상화하지 않습니다. 사실 취약성은 제가 비판하는 개념이지요. 하지만 취약성의 장면들은 인생의 과정에 걸쳐 나타나면서, 삶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하는 위험한 장면입니다. 취약성의 장면은 가장 위험한 장면이며 우리가 다시 논의를 시작할 출발점이 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76, 버틀러의 동의와 함께 2018 4 파리의 대담이 끝남. 이제 시작하는 같은데서 끊겨서 어리둥절. 다음부터는 팬더믹 이후 2022년의 후기-두번째 대담?-이어짐)

 

-보름스:(누군가 유발한 위태성에 관한 버틀러의 동의에 이어)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고통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고통의 상태에 대해 생각 중인 ”우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당장 프로이트를 화제로 꺼내셨는데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기에는 우리가 이런 사람들, 예컨대 난민들이나 수용소에 관한 증언이 기술하는 바와 우리를 동일시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상황과 우리를 차별화하려는 충동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알기로는 타인이 만하지 않은 상황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강력한 충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누군가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버틀러 동의)(…위태성 상황에 대한 반응의 양가적인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질문)

 버틀러: , 하지만 선생님은 또한 만하지 않은 삶에 대한 무언가 때문에 우리가 상황을 외면하게 되고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보름스: 그리고 물론 이때 ”우리“나“는 누구인지도 심문해봐야 합니다.

 버틀러:(“우리” 범주에 포함되는 문제는 잠시 보류…) 만하지 않은 삶에 대한 무엇인가가 우리를 외면하게 만드는데, 그것은 우리도 그런 상황에 처할 있다고 상상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그런 상황에 처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요. 그리고 그것을 부정하는 일은 고통을 크게 만들고요. (보름스 동의…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 상황) 말은, 러시아 군의 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그런 일은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새끼 : 대한민국도 계엄령이랑 군인들이 국회 쳐들어가는 장면을 회상/상상만 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생각에는 이것이 우크라이나가 유럽을 이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이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죠. 잠깐만, 저게 우리잖아. 이게 우리라고? 이런 일이 우리한테도 일어날 있는 거라고?(보름스 동의...) 선생님은 또한 외면하는 것이 상황을 확대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 돌아서면, 그렇게 돌아선 자리에 그대로 있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죠? 외면하지 않으면서, 어느 정도 거부하지 않으면서는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양가성 또한 상황을 확대하는 부분입니다. (85-89)

 

-보름스:(…) 다시 한번 “우리“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펜데믹을 끝내고 싶어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의 무언가가 끝나기를 원해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충동이든 죽음 충동이든 간에 이것은 복잡한 문제입니다.

 버틀러: , 삶을 향한 빠른 움직임인데, 그것이 부인에 기반한 것이라면 많은 죽음을 초래합니다.

 보름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끝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아주 적절히 덧붙이셨는데요, 그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우리에게는 끝났다고 해도 몇몇 사람들에게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취약한 사람들, 아직 취약한 상태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선생님은 말하고 싶은 것이지요. () 기후 문제와 펜데믹 경우 모두, 우리는 이것을 겪었고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거나, 그게 아니라 일부 사람들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공통된 취약성common vulnerability이라는 생각입니다. 공통된 취약성이란 펜더믹이고 기후 문제이며 심지어 우크라이나 전쟁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지구상 어디에서도 취약성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참을 없음이지요.

 버틀러: , 맞아요. 취약성을 극복한다는 환상은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환상이 참을 없는 상황과의 대면을 막고 있기도 합니다만 여전히 그런 현실을 입증하는 것이죠.

 보름스: 동시에 정치적으로 있는 유일한 해답은 이러한 공통된 취약성이 ”우리“그들“을 생각할 새로운 방식을 만들 있다는 것을 시인하고, 생기적으로 말해서 팬데믹을 끝내고 싶은 욕망이 합당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끝내려는 욕망을 결국 죽음을 의미하는, 일종의 평온을 향한 수동적 충동에서 다른 것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보다도 펜데믹을 끝내고 싶은 욕망이 부정적 요건() 맞서 싸우려는 욕망이라면, 특정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취약하며, 우리는 보호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깨뜨리게 것입니다. (93-95, 외면하지 말고 불의와 맞서 싸워라! 라고 하는 선생들...)

 

-버틀러: (…)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이런 자기보호는 특정한 집단이 해주는 것인데요. 집단은 전반적 상황에 맞서서 혹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맞서서 자신들을 보존하고자 하는 특정한 집단입니다. 그리고 집단은 스스로를 일반화된 “우리” 분리함으로써 세계의 일부가 버려지고 거기서 유독성이 생겨날 있으며 펜데믹이 발생할 있는 상황을 실제로 확대하고 강화합니다. 자신의생존”을 위해 불평등의 심화에 의지하는 것이죠. 그러니 이것은 삶의 충동일까요, 아니면 죽음 충동일까요? 바로 선생님이 설명하신 양가성, -죽음의 충동성이 작동하는 순간입니다. ()“우리” 그런 장소(백신 미보급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눈을 돌리고, 자신을 보존하려는 집단적인 “우리”주변에, 문자 그대로의 장벽 혹은 은유적인 장벽을 쌓아서 우리 자신을 보존합니다. 우리는 파괴의 확대에 일조하거나 방조하지 않으면서 이런 파괴로부터 거리를 없습니다. 그것은 파괴와 상실을 수반하고,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불평등을 심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것은 독성화와 파괴가 여기에서 발생하지만 않는다면 다른 곳에서는 발생해도 괜찮다고 허용하는 죽음정치의 논리necropolitical logic(나새끼 : 내가 애들이 하는 싫어하는 - 바임? 알바노) 것입니다. “거기” “여기” 부인과 유기가 일어나는 가운데 안정적인 것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 누구라도 그러한 근본적 불평등이 확정 또는 편향되어 재생산되는 세계의 모습에 동의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보존하려 하고, 그렇게 보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한편 이들이 외면하는 타인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런 타인에게 의존하며, 이들 혹은 우리는 그런 타인과 관련을 맺는데, 타인들은 말하자면 파괴가 바로 눈앞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눈길을 돌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논리에 따르면 자기 보존은 파괴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겁니다. 해석하면 이렇게 되죠. “나는 나를 보존하기 위해 파괴할 것이다. 전쟁에 나가지 않을지라도, 나는 편파적이고 특권적이고 보호받는 집단을 보존하기 위해 파괴를 지속할 것이다.”

(98-100)

 

-버틀러: 그런데 우리는 진보를 이루고 있는 중일까요? 그리고 진보는 여전히 목표일까요, 아니면 문제가 되는 부분일까요?

 보름스: 서양 철학에 나타난 역사 재현에서 있듯이 우리는 진보의 감각에 익숙합니다. 아직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며, 계속해서 취약한 사람들을 돕는 쪽으로 나아갈 테지요. 동시에 우리는 불의가 점점 커져가는 것을 보면서 그런 불의의 상황을 비판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기본적인 글로벌 투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저로서는 또한 어떤 면에서 여전히 진보의 형태입니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글로벌 상황-고통과 박탈이라는 상황- 여전히 우리의 상황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102)

 

-버틀러:(…) 국경은 사실 글로벌 수준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생산함으로써 문제를 악화시킵니다. 그래서 저는 글로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글로벌 운동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 운동의 기본 규정은 어떤 것인가? 지구상의 모든 인간 생명체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누구든지 그것을 얻게 있을까?’ (105)

 

-보름스:(…) 글로벌 의료 서비스는 인간의 삶의 모든 차원에 걸쳐 철저히 글로벌해야 합니다. 그리고 건강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음식과 등의 것들이 필요하지만 나아가 성생활, 지적인 생활, 도덕적 생활, 정치적 생활도 영위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차원에서 최소한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서요. (108-109)

 

-보름스:(…)우리는죽음보다 나쁜”상황이나 속의 죽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상황에 직면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요점은 이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시점에 이르러 죽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국가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지구적인 것의 지역적 실행이라고 기술한 것에다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는데-선생님의 수많은 연구 작업으로 돌아가는 듯하지만-국가의 국경선은 외부에만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것은 내부에 있습니다. (버틀러 동의)

 취약성으로부터 자신을 보존하고 싶을 , 인구 집단 안에 하나 혹은 여러 경계선을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쪽과 저쪽을 분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지구적으로 공유되는 조건은 지역적입니다. 취약성에 있어서의 여러 차이는 국가 안에, 도시 안에도 있고, 심지어는 우리 이웃이 사는 동네 안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

-버틀러: 돌보지 못한 것은 돌봄의 조건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서입니다. 누구도 돌봄의 조건을 마련하는 충분히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117-119)

 

-버틀러: (…) 그리고이건 나의 삶”이라는 말은 따라서 다른 사람의 삶과 분리된 삶이죠.

 보름스: “나의 삶”이라는 거죠. 그러니 “내가 원한다면 죽게 내버려둬.”

 버틀러:“내가 원한다면 죽게 내버려둬”라고요. 하지만 보통 그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 또한 죽게 내버려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생각에 개인의 자유라는 발상에는 일종의 죽음 충동이 작용하고 있었던 같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죽음 충동은 대개 도망자처럼 행동합니다. 죽음처럼 보이지 않는 어떤 다른 것에 붙어서, 심지어는 삶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122-123, 자유를 죽음 충동, 도망자, ‘삶의 이름으로 가하는 위해’ 연결 짓는 것에 놀람. 워우. 뒤에선 미국식 총기 소지 자유 비판하듯 부연함.)

 

-보름스: 상실과 슬픔도요...슬픔은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비판적 생기론의 경험입니다. 지금 슬퍼하고 있다면 당신은 죽은 아닙니다. 다른 누군가가 죽은 것이지요.

 버틀러: 맞아요. 슬픔은 살아 있는 자의 특권입니다.

 보름스: 그리고 사람의 죽음은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물론 애도의 슬픔은 탄생의 반대편에, 새로운 생명을 환대하는 것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탄생 또한 생명이 다른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탄생은 슬픔과 반대편에 있을 있고 반대편에 있어야 하며, 일종의 환대일 있고 환대여야 합니다. (129)

 

-보름스:“이건 나의 삶” 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삶이라는 필요할 사용할 수도 있고 처분할 있는 재화, 어떤 객관적인 재화인 여기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에 있죠? 당신의 삶을 내게 보여주세요! (버틀러 동의) () 나는 삶을 가지고 뭔가를 하고 싶습니다. 좋아요. 그런데 그건 어디에 있죠? 삶을 꾸미고, 삶을 만들라니, 그럴 수는 없어요! 삶은 이야기입니다… (…) 나는 삶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

 버틀러: (…) 그리고 어쩌면 선생님이 우리에게 함께 나아가자고 요청하고 있는 방향, 그리고 저도 동의하는 방향은 나의 , 너의 , 우리의 , 타인들의 삶에 대한 관계적인 이해이고, 나아가 파괴와 죽음의 가능성이 바로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것으로, 살아 있는 삶을 정의하는 투쟁으로 이해하지 않고는 삶은 결코 수도 없고, 수도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삶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나의 것이든, 우리의 것이든, 다른 누구의 것이든 죽음과 파괴를 한쪽으로 밀어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만함의 조건을 확립하기 위해 죽음의 힘에 반대해야 합니다. (보름스 동의)

(130-131, 여기에서 상호의존성, 상호주체성을 옹호,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동체주의를 우위에 두는 구나 싶었다. 자유주의자에 가까운 나새끼는 읽는 내내 똑똑이들 둘한테 둘러 싸여 뚜드려 맞는 기분이었다. 이새끼 혼자만 사는 세상 아니거든? 뚜쉬뚜쉬 아야야...)

 

-돌봄은 단순히 생명 유지의 조건을 넘어 사회적 인정과 주체성의 형성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둘다 인정하게 되고 이제 돌봄은 삶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그에 따라 생명의 내재적 규범성과 상호주체적 관계성이라는 차이가 서로 보완되면서, 생명의 물리적인 복합 조건이 충족되어야 생명이 보장되는 것은 맞지만 동시에 사회적 인정과 보호도 필수적이라는 새로운 이해가 열린다. (146-147, 선생님의 정반합을 깔끔하게 요약 정리해 버리는 번역자 선생님...친절하게도 서문에서 , 해제에서 내용 스포?ㅋㅋ요약? 해준다. 그래도 그거만 읽으면 재미없고 이해 되니까 분이 나누는 고품격의 논리적 대화 전개를 직접 보시라고 책이 나온 것인가…)


+책 읽기 지레 무서워 막 독서대 사진 찍고 딴짓하고… 주말 동안 천연석 팔찌만 몇 개를 만든 거야…이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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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끼 2025-02-05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필사까지 하며 읽느라 고생많으셨습니다 열반님 최고!!!!!!!!! 넘감사해요!! 저도 읽으려고요

반유행열반인 2025-02-06 00:05   좋아요 1 | URL
꺅 ㅋㅋㅋㅋㅋㅋㅋㅋ 엎드려 절받기 성공 ㅋㅋㅋㅋㅋㅋ감사합니다. 덕분에 훌륭한 대담을 읽었네요. 게을러서 몇 년 뒤에
보거나 못 볼 뻔 했는데 ㅎㅎ

2025-02-05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06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06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간 실격.사양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6
다자이 오사무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20250131 다자이 오사무.

무뚝뚝한 아버지를 웃겨보겠다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던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을 먼저 봤고, ‘에구구구’하는 노래를 부르는 요조를 먼저 알았고, 이토준지가 만화화한 ‘인간 실격’을 먼저 보았다. 왜 이 소설을 여태 미뤘는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다자이 오사무보다는 더 나이 먹고 읽고 싶었나 보다. 난 한 달 전에 40년을 채웠으니, 이제 누나라고 부르도록 해. 사실 소설들 읽을 때마다 난 그냥 이미 쓰여진 소설들의 필사를 살고 있는 걸까, 싶을 때가 너무 많다. 늦게 태어난 자의 비애...가 아니고 이미 여러 오답이 마련되어 있어 참고할 수 있으니 완전 러키비키잖아?!!!(한 해 지나 식어버린 긍정의 떡밥 아직도 우물우물)

‘인간 실격’의 요우조우가 스물일곱의 이른(?) 나이에 평안하게 늙기 전까지의 삶이란 극도의 불안, 강박, 거기에 압도당해 다른 이들처럼 느끼거나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것이었다. 요즘은 우울증 약도 잘 나오고 조울증 약도 있고 마약까지 안 가더라도 온건하고 효과 좋은 향정신성 물질들이 많이 개발되었는데 말이야...요우조우가 백 년 쯤 늦게 태어났으면 그 은혜로움으로 약물 샤워를 하고 자살 사고를 줄일 수 있었을지, 오히려 더 쑝 보내는 펜타닐에 빠져서 좀비가 되었을지 난 모르겠다. 그리고 이토준지 이 녀석… 이거 원작 맞는 거였나… 전혀 기억도 안 나고 다른 책 새로 읽는 기분이라 오히려 그렇게 밍숭하게 그려준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사양’은 처음 듣는 소설이라 곁다리인가 했는데, 이쪽이 더 재미있었다. 남자 작가가 여자 화자의 입을 빌리는 건 때론 제법 연구했군, 할 때도 있고 이새끼, 이나중 탁구부의 마에노였나, 자꾸 다리 사이에 거시기 뒤로 감추고 여자 흉내내던 그런 장면이 떠오를 때도 있다. 이 소설은 가즈코 목소리인 부분도, 일기도, 편지도, 이거 삼십대후반까지 앓던 중이병이면 이정도까지 나오는구나...싶은 오글거림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은 문장도 많아서 여러 형식마다 다 읽을만 했다. 마침 뱀의 해인데 죽음과 뱀의 이미지가 반복 교차되는 것도 작위적이지만 분위기 조성 제법이고, ‘나는 귀족이다’ 하면서 밀란 쿤데라가 소설 속에서 언급한 똥 때문에 전기 철조망에 몸 던져 죽은 황태자 아들이었나 누구였나랑 비슷한 나오시도, 내가 인민의 품에 가까이 가려고 그렇게 허랑방탕 기를 쓴 거야 약도 하고 술도 하고...하는 걸 보며 아… 이런 새끼들을 이 작가 소설들 계속 읽다보면 수두룩 빽빽 만나겠구나 싶었다. 우에하라인가 하는 놈도 나중에 해설 보니 작가랑 비슷하게 엮어놨던데 좀 흐리멍텅하게 캐릭터 잘 안 드러나게 그려놨지만 찌질한 건 도쿄출신 귀족이든 시골출신 자수성가 예술가든 만만치 않고… 차라리 애라도 하나 가져서 투쟁!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 거야! 하는 가즈코가 제일 낫게 보였다. 미친놈들중에 그나마 생산적으로 미친년? ㅋㅋㅋ 그건 내가 저 비슷한 생애주기에 했던 선택과도 겹쳐서 더 호의적으로 보는 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애들이 우릴 살리지… 우리가 애들을 죽거나 다치게 하진 않았으면 하는 게 미친년들의 만성적 불안이고…

‘살 만한 삶’에 대해 엄청 좋은 머리들을 굴리며 대화하는 책을 서두만 약간 보는 중인데, ‘인간 실격’이란 구절을 읽다보니 생각했다. 저 말과는 전혀 다른 맥락이지만, 살 만한 삶과 안 살아도 그만인 삶이 나뉠 수 있는 것인지. 가치 없는 삶이니 죽어! 하고 스스로나 남에게 외치는 건 진짜 병이 아닌지… 나는 그 병을 천천히 고치는 중이지 싶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고 맛난 것,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짓이나 하다가, 시간 되면 어차피 다 죽으니까 최대한 천천히 제때 얼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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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나는 그 어둠침침한 방 끝자리에서 차가움에 부들부들 떨려옴을 느끼면서, 입으로 밥알을 조금씩 옮겨가며 혼자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어째서 하루에 꼭 세 번씩 밥을 먹는 걸까. 정말 모두들 엄숙한 얼굴로 밥을 먹고 있다. 이것도 일종의 의식 같은 것으로, 온 가족이 하루에 세 번씩 정해진 시간에 어둠침침한 방에 모여 앉아 나이 순서대로 밥그릇을 늘어놓고, 먹고 싶지 않아도 군말 없이 밥알을 씹으며, 고개를 숙이고 집안에 깃든 혼령에게 기도를 하기 위해 이러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15)
-무슨 짓이라도 좋으니 다른 사람을 웃길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면 인간들은 내가 그들의 이른바 ‘생활권’ 밖에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게 되지 않을까. 아무튼 그 인간들의 눈에 거슬리면 안 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바람이다. 허공이다. 이런 생각으로 겉을 둘러싸고, ‘우스운 행동’으로 가족들에게 웃음을 주며, 나아가 우리 식구보다 더 알 수 없고 무서운 존재인, 하인들과 하녀에게까지 필사적으로 같은 서비스를 제공했던 겁니다. (19)
-내겐 속이면서도, 결백하고, 명랑하게 살고 있는, 혹은 그렇게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들 자체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사람들은 끝내 내게 그 묘책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 방법만 알았더라면, 난 인간들을 이렇게 두려워하고 또 필사적인 ‘서비스’를 하는 일 없이도 살 수 있었겠죠. 인간 생활과 대립해서 밤마다 지옥 같은 고통을 느끼지 않고도, 지낼 수 있었겠죠. (26)
-내게는 남자보다 여자가 몇 배나 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였습니다. (…) 그땐 사실 살얼음을 밟는 기분으로 그 여자들과 어울렸던 겁니다. 나는 거의 그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는 존재들이라, 그 수모의 정도가, 또, 남자들에게서 받는 채찍질과는 달리, 예를 들면 내출혈같이 극도로 불쾌하게 내부로 파고들어, 좀처럼 치유가 되지 않는 상처였습니다. (34)
-아아, 내게 냉철한 의지를 주십시오. 내게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십시오. 인간이면서 인간을 밀어젖힌다 해도 죄를 묻지 마시고 내게 분노의 마스크를 주십시오. (…) 나는 신조차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신의 사랑은 믿지 못하고, 신이 내릴 벌만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신앙. 그것은 단지 신의 채찍을 받기 위해, 심판대를 향하여 무릎 꿇는 일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지옥은 믿을 수 있어도, 천국의 존재는 아무리 애써도 내겐 보이지 않았습니다. (89-90)
-세상이란 도대체 무얼 말하는 걸까요. 인간들의 집단을 말하는 걸까요. 어디에 그 세상이라는 것의 실체가 있는 걸까요. 그 실체가 뭐가 됐든, 강하고 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나였지만, 호리키에게 그런 소릴 듣고 나니 문득 “세상이란 건 널 두고 하는 말 아니야?”라는 말이 혀끝까지 튀어나왔습니다. 하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꾹 참았습니다. (…)
‘세상이 아니야. 날 매장하는 건 바로 너 아니냐?’
너는 네 안에 들어 있는 악마성, 괴기스러움, 악랄함, 능구렁이 같은 기만성, 요망함을 깨달아라! 갖가지 말들이 다 가슴속에서 솟아 나왔지만, 난 그저 얼굴에 배어나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식은땀이 다 나네”하고 웃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부터 난 ‘세상이란 개인을 말하는 게 아닌가’라는 철학적인 관념을 갖게 됐습니다. (92-93)
-개인과 개인 사이의 싸움에서, 나아가 바로 그 자리의 싸움에서, 거기서 이기면 되는 것이며, 인간은 결코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는 존재로 노예조차 노예 나름의 비굴한 앙갚음을 하는 법이니 인간에겐 ‘한판 승부’에서 승리하는 것 외에는 생존해 나갈 길이 없고, 대의명분 따위를 내걸고 이루고자 노력한 목표는 반드시 개인으로 귀결되고, 개인을 딛고 일어선 다음에도 다시 개인을 향하므로 세상의 불가사의는 개인의 불가사의고 대양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을 말하는 것이라는 관념을 갖고 나니, 난 세상이라는 큰 바다의 환영을 두려워하는 버릇에서 약간은 해방되어, 이전만큼 이것저것 오만 가지 일에 걱정하는 일 없이, 눈앞에 닥친 필요에 따라 어느 정도는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법을 익히게 됐던 겁니다.(97)
-나는 점차 세상에 대해 경계하지 않게 됐습니다. 세상이란 그렇게 두려운 곳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내가 가졌던 공포감은 봄바람이 불면 백일해균이 수십만, 대중탕에 가면 눈을 멀게 하는 세균이 수십만, 이발소에 가면 탈모를 일으키는 세균이 수십만, 기차 손잡이에는 옴을 일으키는 벌레가 우글우글, 또 생선회, 설 구운 돼지고기나 쇠고기에는 촌충의 유충이며 디스토마균을 비롯한 세균들의 알이 반드시 숨어 있고, 또 어떤 경우 맨발로 걸으면 발바닥에 유리조각이 박혀서 그 파편이 몸 속을 돌고 돌아 눈동자를 뚫고 실명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는, 이른바 ‘과학적 미신’에 늘 가슴 조렸던 거였습니다. 확실히 수십만이나 되는 세균이 공기 중에 떠돌고 날 음식 안에 잠복해 있는 건 ‘과학적’인 사실이겠죠. 허나 그와 동시에, 그 존재를 완전히 묵살하면, 그것은 나와는 일말의 연관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과학적 유령’에 불과하다는 점도 나는 알게 된 겁니다. (98, 그걸 알아도 쉽게 불안과 강박이 가시진 않잖아...요우조우놈이 하는 저런 걱정 다들 안고 사는 거 아니었나요? 나랑 쟤랑 병자들만 저런가?)
-순진한 신뢰는 죄입니까?(118)
-도쿄에 큰눈이 온 밤이었습니다. 나는 술에 취해 긴자의 뒷골목을, 여기는 내 고향에서 몇백 리, 여기는 내 고향에서 몇백 리, 하고 작은 목소리로 되풀이해서 되풀이해서 노래를 부르며, 앞으로도 계속 쌓여갈 것만 같은 눈을 구둣발로 걷어차면서 걷다가, 갑자기 구토를 했습니다. 그것이 나의 첫 각혈이었습니다. 눈 위에 커다란 일장기가 그려졌습니다. 나는 잠시 웅크렸다가는,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양손으로 퍼올려 얼굴을 닦으며, 울었습니다.
여긴 어느 골목이지?
여긴 어느 골목이지? (122-123)
-죽고 싶다. 당장에 죽고 싶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어떤 일을 해도,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난 구렁텅이로 빠져들기만 한다. 수치에 수치를 더할 뿐이다. 자전거를 타고 초록 잎들이 소용돌이치는 곳을 구경하는 일 따위, 난 이제 감히 바랄 자격도 없다. 그저 추잡한 죄에 야비한 죄를 더하고, 고뇌는 부풀고 더 강렬해질 뿐이다. 죽고 싶다. 죽어야 한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죄의 씨다. 이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아도, 역시나 아파트와 약국 사이를 반미치광이가 되어 왔다 갔다 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128, 자살 사고에, 약물 중독에, 불륜에, 난리가 났다...에휴…)
-이제 내겐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갑니다.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몸부림치며 살아왔던, 이른바 ‘인간’ 세상에서 단 하나 진리라고 생각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단지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간다.
나는 올해 스물일곱이 됩니다.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어 사람들은 40대 이상으로 봅니다. (133)

<<사양>>
-정말로 손으로 먹으면 더 맛이 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지만, 나 같은 고급 거지가 어설프게 그걸 흉내내면 그야말로 진짜 거지꼴이 되어버릴 것 같아 그만두었다. (144)
-지난해엔 아무 일이 없었다.
지지난해엔 아무 일이 없었다.
그전 해에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 (178)
-데카당?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 있을 수 없지. 그런 말들로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보다, 죽어! 하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고맙다. 그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인간은 좀처럼 죽어! 라는 말은 하지 않는 존재들이다. 쩨쩨해. 꿍꿍이로 배불린 위선자들아! 정의? 이른바 말하는 계급 투쟁의 본질은 그런 데 있는 게 아니야. 인도? 헛소리 마. 나는 알고 있다고. 그건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상대를 쓰러뜨리는 일이야. 죽여버리는 일이야. 죽어! 하고 내리는 선고가 아니라면, 그게 뭐냔 말이야. 사람을 기만하면 안 되지.
하지만 우리 계급에도, 제대로 된 노예가 없다. 백치, 유령, 수전노, 미친 개, 떠벌이. 그렇습네다, 구름 위에서 뿌리는 오줌.
죽어! 하고 말하기조차 아까워. (201)
-불량하다는 건 다정다감한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212)
-세간에서, 좋은 평을 듣고 존경받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고, 위선자란 걸 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세상을 믿지 않습니다. 불량하다는 꼬리표 달린 것만이 제 편입니다. 꼬리표 달린 불량자. 저는 그 십자가에 만큼은, 매달려 죽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만인에게 비난받더라도 전 목청껏 응수해줄 수 있습니다. 너희들은 꼬리표가 붙지 않은 정말로 위험한 불량자들 아니냐고. (230)
-지금까지 이 세상 어른들은 이 혁명과 사랑, 두 가지를 가장 어리석고 흉측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주입시켜, 전쟁 전이나 전시에나 우리는 배운 대로만 알고 있었는데, 패전 후, 우리는 이 세상 어른들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뭐든 그 사람들이 말하던 것과는 반대로 하는 것이 진정 살 길이라 여기게 되어서, 혁명도 사랑도, 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고 맛난 것이고, 그러니까 좋은 일이기 때문에 어른들은 못된 심보로 우리에게 설익은 포도라 이르며 거짓말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는 확신하고 싶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살아온 것이다.(245-246)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굳건히 살아남아야 하고, 그건 아주 대단한 일이라, 인간으로서의 영예라고 하는 것도 꼭 그런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겠지만, 하지만 죽는 게 죄가 된다고는 생각지 않아. (282)
-인간은, 모두, 똑같다.
이 얼마나 비굴한 말인가. 인간을 혐오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경멸하고, 일말의 자존도 없이 모든 노력을 포기해버린 말. (285)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이 내 도덕 혁명의 완성입니다.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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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정리 한다고 책상 책 화장대에 다 빼고 바닥에도 쌓고 원래 책장들은 책상 밑으로....
그러고나서 올려버린 회전 책장...설연휴에도 당일 오후 시켜 당일 저녁 도착하는 놀라운 한국의 배송 시스템...
가로세로 36센티미터이나 회전을 위해서는 대각선 길이만큼 자리를 차지하고 책상은 손바닥 만해졌다...왜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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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5-01-29 1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한 층 더 쌓았어야죠.

반유행열반인 2025-01-29 14:04   좋아요 1 | URL
진실:5단 삼. 3단 쌓은 이유: 책상 위라 더 위에 벽걸이 에어컨에 닿음. 바보: 남은 걸로 2단 쌓을까 했는데 단이 하나 부족해서 1단 밖에 안 됨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5-01-29 14:11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5단짜리를 하나 더 사요 ㅋㅋㅋ 7단 도전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5-01-30 13:10   좋아요 1 | URL
천장까진 아마도 최대 6단 가능할 듯한데(복층 거주 분들은 8단 도전??) 이건 책상에 올려만 놔도 그야말로 책탑이라 두고두고 내가 무슨짓을 한 건가...후회되면서도 압도적이네요. 회한에 차 빙글빙글 돌림 ㅋㅋㅋ
 
말할 수 없는 애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391
김이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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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25 김이듬.


‘히스테리아’를 사 놓고 읽지 않았다. 시집을 산 건, 친구가 문학촌 있던 시절, 도서관에 글을 쓰러 내려가면 대부분 작가들 도망간 자리에 앉은 시인이 자주 떡을 주었다고 해서였다. 떡을 주다니 착하군. 그런데 무서운 누나일지도 몰라.
사 둔 시집보다 앞앞에 나온 시집을 읽은 건, 나는 평생 대부분 경기도 사람이었지만 벌써 서울 사람이 된 지 이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몰래 경기도 전자도서관에 가입이 되어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쫓겨난 게 아닐까, 하고 책이 빌려지는지 아닌지 슬그머니 대출을 실행했는데 그게 ‘말할 수 없는 애인’이었다.
오늘 이 시집 절반 남은 걸 통으로 다 읽고 자는 것은 반납까지 1일이 남아서였다. 그런데 12시가 지나고 보니 23시간이 남았다고 했다. 난 12시 땡 치면 내놔 이러고 가져가는 줄 알았지…
이 시인과 비슷하게 글쓰는 사람을 봤는데, 사실 글은 전혀 다른데 내가 느낌만 비슷하게 느낀 걸 텐데, 친엄마 같지도 않고 새엄마 같은데 사실 친엄마인 아줌마가 막 때리고 교육인 척 학대를 하다가 다 자라서까지 자녀를 괴롭히는 걸 보면서 화가 났었다. 우리 엄마는 그저 내가 말하는 걸 잘 들어주지도 않고 뚱 하다가 이제와서 그땐 우울증이어서 어쩌고 하면서 나한테 자기가 들은 정치 뉴스 거리를 종알대고 싶어하는 정도는 그냥 양반이었던 건가, 그럼 듣기 싫은 거기다 대고 맨날 개소리 삽소리 좀 그만하란 식으로 쏘아 붙이던 나는 진짜 개샹불효자인 건가 싶었다. SCT검사란 걸 했는데, 문두를 주고 뒷부분 빈칸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40. 대게(이 말을 두 번이나 보고는 빡쳐서 게에다가 엑스치고 개로 고쳐 놓았다. 의사는 이 검사를 700명 쯤 함께 했는데 고친 사람이 딱 두 사람 있었어요. 라고 했다. 그게 너예요.) 어머니들이란 - 아이를 잘 키우고 헌신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려 자책을 많이 한다. 라고 완성했는데, 나는 그 대개에 속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그랬다. 그런데 사실 나같은 에미도, 더한 에미도 많겠구나, 아니지 애초에 어머니가 되지 않은 여자들도 생각보다 많지, 어머니가 없는 사람도 많지 싶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대개, 라는 말로 두루뭉술하게 물어도 대답하기가 쉬웠을까, 어려웠을까, 잘 모르겠다. 나는 냉동피자랑 냉동 핫도그랑 냉동 치킨만 잔뜩 덥혀 먹여도 전혀 죄책감 느끼지 않고, 아이들은 이야 신난다 우리 엄마 최고 하는 분위기로 먹으니까. 할머니가 한참 만든 미역국과 반찬을 놔두고 (없는) 카레는요? 하는 불효새끼 2세를 낳아버린 나니까 대개를 빙자해서 일반적인 무엇을 물으면 참 나한테는 어렵구나 싶었다. 사실 이 시집도 어려웠고, 시에 묻어나는 지랄 맞은 삶을 마주하는 것도 어려웠고, 나는 다 어렵다. 문과도 이과도 아니여. 에효. ㅋㅋ

+밑줄긋기
-아닌 척하지만 그들은 복수의 욕구로 시를 쓴다 그들의 순정한 어투와 연약한 심성과 동화적 상상력이 대중에 게 먹히길 빈다 그들과 나는 패밀리이다 우릴 내동댕이친 세상에 이름을 날려야 한다 사람들은 기분 나쁜 시선으로 쳐다볼 뿐 아무도 우리의 천성과 재능을 몰라본다 (‘사생아들’ 중)

-올해는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으리
올해는 술을 줄이고 운동을 하리
계획을 세운 지 사흘째
신년 모임 뒤풀이에서 나는 쓰러졌다
열세 살 어린 여자애에게 매혹되기 전 폭탄주 마셨다
천장과 바닥이 무지 가까운 방에서 잤다
별로 울지 않았고 별로 움직이지 않았다

날마다 새로 세우고 날마다 새로 부수고
내 속에 무슨 마귀가 들어 일신우일신 주문을 외는지
나는 망토를 펼쳐 까마귀들을 날려 보낸다
밤에 발톱을 깎고 낮에 털을 밀며
나한테서 끝난 연결이 끊어진 문장
혹은 사랑이라는 말의 정의를 상실한다

설날의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서럽고 원통하고 낯선 날들로 들어가는 즈음
뜻한 바는 뺨에서 흘러내리고
뜻 없이 목 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일은
백 사람을 사랑하는 일보다 어려운 이성의 횡포
수첩을 찢고 나는 백 사람을 사랑하리
무모하게 몸을 움직이지 않으며
마실 수 있는 데까지 마셔보자고 다시 쓴다
(‘날마다 설날’ 전문)


-목련이 행주처럼 너더분해질 때 도마는 깨끗해진다
혼자 퍼먹는 밥은 이토록 맛난 것이
(‘모계’ 중)

-나는 배 속의 거지 질 속에서 성년을 맞은 사람 녹슨 짐 문제는 끝없이 좁고 캄캄한 통로에서 몸뚱이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어느 날 끈이 풀리고 내가 쏟아지면, 그게 어때서
(‘질&짐’ 중)

-줄을 서서 버스를 타고 반기지 않는 그리운 사람을 찾아 세 시간을 달려
10분 만나고 돌아와 운다
(…)
휴전 지대에서의 생존은 몇 편의 어이없는 영화를 더 보는 것
자살을 지연하는 용기와 인내심을 가지고
자본의 포로들이 살포하는 포르노 필름에 무한 반복 빠져드는 것이다

얼마나 황홀한가
그날 밤, 관료들은 차량을 통제하고 시민들에게 새로 만든 광장을 열어주었다
심야에 한꺼번에 민간인들은 거리로 쏟아져 수용되었다
설사 우리 편이 패배하더라도 환호하고 사이사이 구령에 맞춰 대한민국을 외치자고 누군가 선동했다
(‘자살’ 중)

-나는 투표소에 가는 사람
주민등록증 가지러 도로 와서는 안 나가는 사람 내가 믿는 바를 스스로 믿지 못하는 사람 나는 검은 코트를 입고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사람 거침없이 말하고 후회하는 사람
(‘도플갱어’중. 여기까지만 겹쳐서 다행이네)

-당신은 키스로 봉한 편지처럼 오래된 노래
나를 봉하는 데 실패한 사람
보석처럼 빛나는 유골
없는 발로 꾹꾹 눌러쓴 책
단지 나는 당신을 여과하고 퇴고하고
나와 상관없이 흐르는 당신을 옮겨 적습니다

그러니 이 시는 내가 쓴 게 아닙니다
내 안에 침묵한 당신은 내 말의 시작
이 시의 끝이고 한계
(‘제가 쓴 시가 아닙니다’ 중. 한용운 오마주 같은데 ‘시’가 아니라는 줄 알았더니 ‘이 시’ 라고 했네...나 바보야. 오독오도독)

-그렇지 이제 내가 네 몸에 뭐라 쓰는지 숨을 몰아쉬고 받아 적어
(‘지방의 대필작가’ 중)

-어두운 골목에서 빠져나온 강도가
어쩌면 기다리던 애인일지도
살인은 멈추지 않고 강간은 끝나지 않고 전쟁은 더더욱 치밀해질 것이다
우리는 충분치 않은 과오를 나누고
끝내 나아지지 않은 채 사라질 것을 믿는다
(‘나는 세상을 믿는다’ 중

-나는 글쓰기를 멈추고 싶다.
(‘아케이드’ 중)

-인간도 아닌 것이거나 인간 이상이거나 다 인간이고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많은 소리를 지껄였고
검은 코트는 다섯 벌이나 되고
(‘오늘도’ 중. 검은 코트 검은 원피스는 최소 5벌이 국룰이지)

-내가 그 친구에게 내 속눈썹 과 고름을 주지 않았다면
그 친구는 그런 눈동자로 세상을 보지 않았을지 모른다.
사람을 너무 깊숙이 보고 이해하려 들면 자기 의 울음소리로 심신이 곪는다.
(‘여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중)

-나는 이 진흙 구덩이 안이 좋아요 똥을 싸도 괜찮아요 만날 따 돌림받았는데 어쩌다 동반 자살도 시도했었는데 셀 수도 없이 한 꺼번에 산 채로 토막 나고 뒤죽박죽 피투성이로 처음 마주친 우 린 서로 똥과 피를 흙을 퍼부으며 장난쳐요 최초로 심장이 불타 오릅니다 아버지 울지 마세요 눈에서 폐수 좀 흘리지 말라고요 미리 팔아먹지 못해 안타까우세요 내가 춤추며 불타오르지 않아 찜찜하고 수도관 타고 흘러들어갈까 봐 불안하세요
그래서 뭐요
세상은 거대한 봉분 고랑 너머 위생적인 사육장 삼월이 가고 꽃 피는 사월이 가고 나에게 오월을 묻지 마세요 폭우가 쏟아지 지 않아도 삼월이 붉은 구렁에 흘러넘치지 않아도 난 지금 사라 지는 내가 지독한 악취가 처음처럼 맘에 들어요
(‘삼월은 붉은 구렁을’ 중)

-다만 나는 밤을 치던 칼로 신문지를 찍는다 담배 가게 아저씨가 죽은 딸을 쉬쉬하듯 나는 고양이를 안고 동산에 오른다 다리를 푹 꺾고 머리를 홱 젖혀 팔을 벌린다 소리 지른다 다 죽여버릴 거야
(‘고향의 난민’ 중)

+마블의 헬라가 쓴 시들 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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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5-01-25 0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독오도독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5-01-25 14:2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그래도 케이트 블란쳇 비슷하다고(?)했으니 시인이 덜 빡치겠쥬?? 로키 오딘 동생 있는 거 처음 알았네...아닌가 북유럽신화를 똥꼬로 읽은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