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안녕, 드뷔시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1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정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10215 나카야마 시치리.

이 소설을 읽다가 주인공 하루카와 잠시 경쟁 구도를 이룬 피아노 연주자가 등장하는데, 그 이름이 미스즈, 뜻은 아름다운 방울이었다. 어려서 내가 살던 도시의 피아노 대회가 열리면 늘 대상을 휩쓸던 아이와 이름이 같아서 재미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나간 피아노 시 대회에서 연주를 마친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무대를 내려왔다. 너무 긴장했고, 몇 달 간 치열했던 연습도, 성심성의껏 레슨해 준 선생님의 노고도 순식간에 무의미한 일이 되어 버린 것 같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다 망했어. 나는 역시 재능이 없어. 시상 발표 때 대상-금상-은상-동상-장려상이 거꾸로 불렸는데 4위인 동상에 내 이름이 들리자 어리둥절했다. 상품은 멜로디혼이었다ㅋㅋㅋ. 대상은 같은 반이지만 다른 학원을 다니던 아름다운 방울이가 탔다. 이후 5, 6학년 때도 계속 시 대회에 나갔지만 다음엔 장려, 그 다음엔 아무 상도 타지 못했고 방울이는 매 대회마다 대상을 휩쓸었다. 마지막 대회 이후 피아노 선생님이 결혼하면서 학원을 닫고 지방으로 이사가게 되어서 나도 피아노를 그만두게 되었다. 선생님은 혹시 학원을 옮길 생각이면 어디어디 학원으로 가라고, 거기 선생님이 이 도시에서 제일 잘 가르친다고 했고- 그 학원은 방울이가 다니던 곳이었다.
한 2년 쯤 놀다보니 다시 피아노가 배우고 싶어서 중학생인 나는 선생님이 소개한 그 학원에 갔다. 조금 늦게 받은 제자라 그런지, 지인 소개라 그런지, 이 동네에서 공부 제일 잘 하는 애라는 소문을 미리 들어서 그런지 새 선생님은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그런데 그 학원에 다니면서 나는 선생님이 가르친 아이들이 시 대회에서 상을 휩쓰는 비결을 알게 되었다.
학원에는 칸칸 마다 피아노가 한 대 있었는데 입구 쪽에 터돋은 곳에 계단 한 두 칸 올라가면 문이 있고 그 안에 피아노가 있는 넓은 방이 외따로 놓여 있어 조금 특이했다. 내 동생과 같은 반인 첫째 남자아이와 그 아이 여동생 둘 까지 그 학원을 다니는 삼남매가 있었는데, 모두 제법 피아노를 잘 쳐서 상도 곧잘 탔다. 남매 중 둘째인 여자아이가 어느 날인지 연습을 안 해 온 모양이었다. 레슨 중인 방안에서 갑자기 비명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렸다. 학원 아이들은 다들 갑자기 어두워진 얼굴로 못듣는 척, 모르는 척 했다. 방울이도 그랬다. 그날은 아주 애를 잡는지 자 같은 걸로 때리는 소리, 울음소리, 피아노소리가 섞여 난리도 아니었다. 나는 나중에라도 내가 저 꼴을 겪는 게 아닌가 겁이 났는데, 애초에 선생님은 내가 피아노를 취미로 배울 뿐이라고 생각해서인지 그리 엄하게 다루지 않았다. 선생님은 연주 한 부분 한 부분 꼼꼼하게 잘 보시는 분이긴 했지만 실력 향상의 비결은 매서운 지적과 매가 병행된 결과였다. 나는 그렇게해서까지 잘치고 싶지는 않았고...고등학교 들어가면서 학원을 그만두었다.
그 학원에 다니는 동안 방울이랑 친해져서 걔네 집 놀러가서 그 동안 방울이가 대상 탈 때마다 받은 전리품-바이올린은 줄이 끊어졌고, 팬플루트를 시범삼아 불어줬고, 플루트였나 크로마 하프였나는 배우는 중인데 어렵다고 했고, 오르간은 쓰잘데 없어서 팔았다고ㅋㅋㅋ- 구경도 했고, 같이 문방구에서 와플 파이도 사 먹었다. 친하지 않을 때는 피아노를 나보다 잘 치는 것이 샘도 나고 애가 피아노만 잘 치지 너무 쌀쌀 맞고 콧대 높다 생각했는데 친해지고 나니 말도 잘하고 재미있었다. 그애 집에 있는 팝송책을 마음에 들어하자 문방구 가서 악보를 복사하는 것도 허락해 주었다. 아름다운 방울이는 나중에 피아노를 그만두었다가 결국 다시 피아노로 돌아간 것 같은데 지금은 뭐하고 지내는지 잘 모르겠다 .
뭐 그래서 나는 피아노를 얼마나 치냐... 하면 체르니 40번 치다 관뒀고 슈베르트 좀 치다 말았습죠...지금은 하나도 못 침 ㅋㅋㅋㅋ그래서 소설 읽는 동안 피아노에 관한 부분이 나와도 음 잘 모르겠다 하고 봄 ㅋㅋㅋ

제목부터 드뷔시가 등장해서 음악 소설이구나, 지난 번에 읽어보니 시치리 아저씨는 추리물 작가던데 어떤 이야기를 풀어나갈까 궁금했다. 다행히 소설의 메인 테마 격인 드뷔시의 ‘달빛’은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감상 시험 때문에 지겹게 들어서 아는 곡이었다. 그때 시디 하나에 구워 반복해서 들은 노래들이 아직도 귓속에 남아 있다. 주입식 공교육이 장점도 있군요…
사고로 할아버지와 사촌을 잃고 본인은 심한 화상으로 몸이 망가지고도 삶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피아노 연주에 매진하는 하루카와 그녀를 가르치며 재활을 돕는 미사키가 주 인물이다. 보면 볼수록 미사키는 심각한 사기 캐릭터(이자 훈남)였다. 이후로도 미사키가 활약하는 음악 추리물 시리즈가 나온 모양인데 별로 궁금하진 않다ㅋㅋㅋ. 하루카가 사람들의 뒤틀린 시선과 신체적 어려움이라는 겹겹의 고통을 딛고 피아노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뻔함과 감동을 오락가락 하다가, 진짜 범인은 또 누구냐 하고 이놈저놈 다 의심해보다가, 마지막 얼마 안 남은 분량 동안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려고 하나, 하는 순간 터지는 반전에서 약간의 희열을 느꼈다. ㅋㅋㅋㅋ 너무 문학상 신인상 노리는 소설이라 처음에는 별로인 느낌도 있었지만 끝까지 읽고 나니 이 정도로 재주 부렸으면 상줬어야 겠네, 그런데 다른 경쟁작도 시치리가 쓴 개구리 살인마 소설이었다고 하니 님이 짱 먹으세요...ㅋㅋㅋㅋ
지난 소설 작가 형사 부스지마 읽을 때는 대사만 잘쓴다고 뭐라했는데, 이 소설 보니 같은 작가 소설이 맞냐 싶게 지문에도 힘을 빡 줬다. 식상함과 참신함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소설로 피아노 연주를 과연 어떻게 표현했을까 궁금했는데, 십여페이지 가까이 미사키의 협연 풀어 놓은 건 조금 지루했지만 뒤에 하루카의 콩쿨 장면은 최선을 다하셨구나 싶었다. 피아노는 잘 모르고 딱히 재미는 없지만 나름대로 리듬과 강약과 감정과 느낌을 글로 담으려고 애쓴 건 신기하기도 했다. 그치만 그닥 연주를 글로 읽는 효용은 모르겠음 ㅋㅋㅋ
읽다 말고 소설에 등장한 피아노곡을 유튜브로 찾아 들으니 좋았다. 소설에 등장하는 곡들의 링크를 정리해 놓았다.

Seong-Jin Cho – Polonaise in A flat major Op. 53 
https://youtu.be/d3IKMiv8AHw

Seong-Jin Cho – Etude in C major Op. 10 No. 1 
https://youtu.be/9E82wwNc7r8

부르크뮐러 2번 - 아라베스크 Burgmüller - Arabesque
https://youtu.be/PAuj1-DncI0

베레초프스키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4번 마제파(Mazeppa)
https://youtu.be/a-iaC044s_8

Seong-Jin Cho plays Chopin Etude op.10 no.2 in A minor
https://youtu.be/ayX919A1b1o

Dmitry Shishkin – F. Chopin ˝Etude in C sharp minor, Op. 10 No. 4˝ (Chopin and his Europe) (encore)
https://youtu.be/ZZ1KQAlj7LM

Dmitry Shishkin plays Liszt ˝La Campanella˝
https://youtu.be/kkq_3CrvFUM

조성진 Seong-Jin Cho] Debussy Claire de lune 드뷔시 달빛
https://youtu.be/97_VJve7UVc

Stanislav Bunin: Debussy - Arabesque No. 1 in E major
https://youtu.be/GStfo_f4L0g

+밑줄 긋기
-이야기와 음악에는 힘이 있다.
이는 재앙을 막는 초능력이 아닐뿐더러 죽은 자를 되살리는 마력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가능성을 믿게 하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는 힘이다.

-한데 말이다, 이 할아비 생각으로는 갖고 싶고 되고 싶다는 소망이나 희망은 과일 같은 거란다. 젊어서 먹으면 자양도 되고 미용에도 좋지. 그렇지만 과일이라는 게 때가 지나면 상하고 썩는 법이거든. 썩은 과일은 독소를 지녔지. 당연히 그걸 계속 먹는 사람은 배 속부터 좀먹히는 거다. 그리고 현실과 싸우는 힘을 잃어 간단다. 게다가 말이다, 아무리 맛있어도 배가 부른데도 계속 먹으면 배탈이 나게 되어 있어. 사람은 누구나 과일을 먹어도 되는 한도가 미리 정해져 있는데 그걸 분수라고 한다. 분수를 모르는 자의 말로는 대체로 자멸이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간신히 삼킨 말이 두 가지 있었다.
주위 기대를 배신하는 게 그렇게 죄스러운 일일까.
본인의 의사를 무시하면서까지 가능성을 끌어올리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일까.

-세상은 오래 전부터 비열하고 저열하며 뻔뻔스러웠던 것이다.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이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밑바닥에서 올려다본 세상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알고 보면 그 모습이야말로 진짜였던 것이다.

-세상은 악의로 가득 차 있다. 공격에 노출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하지만 자신이 비난하는 쪽에 있을 때는 전혀 알지 못한다. 아니,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잔학함을 정의감으로 둔갑시켜 자기 내면에 있는 악의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을 올바른 인간이라고 믿는 것, 자신과 입장이 다른 사람을 악으로 단정하는 것이야말로 악의가 아닌가.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아 2021-02-15 23: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링크 추가 센스 돋네요! 이 책 쇼팽,베토벤에 라흐마니노프도 있어서 궁금했는데 잘 읽었습니당ㅋ저두 꼭 볼래요!
오래 치셨네용 콩쿠르 나간거 부럽고요.^^저는 100에서 30인지 넘어가구 초반까지만 배웠어요.하..

반유행열반인 2021-02-16 07:14   좋아요 2 | URL
저도 지금 실력은 백에서 삼십 사이인 거 같아요 ㅋㅋㅋ쇼팽 베토벤 라흐마니노프 시리즈는 읽게 되시면 리뷰 남겨주세요 ㅋㅋ저는 그만 읽으려구요... ㅋㅋㅋㅋ

붕붕툐툐 2021-02-15 23: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셋 중에 두개만 좋으면?ㅎㅎㅎ
링크 진짜 짱짱!

반유행열반인 2021-02-16 07:14   좋아요 1 | URL
이제부터 피아노를 좋아하시면 즐기실 수 있겠습니다! ㅋㅋㅋ

하나 2021-02-16 00: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댁에 피아노 있다는 얘기 들은 거 같은데 열반인님도 피아노 오래치셨구나. 저도 오래 쳤고 방울이 같은 친구 옆에서 열심히 사네 쟤는.. 했던 사람 ㅋㅋㅋㅋ “이 정도로 재주 부렸으면 상줘야겠네” 그런 말 들으려면 미스터리 스릴러 반전 빵빵 때려넣어야 되나요? 🤣 링크까지 정성 가득 리뷰 🎶 요즘 알라딘 클래식 마을 🎵

반유행열반인 2021-02-16 07:17   좋아요 2 | URL
맞아요 아빠가 저 피아노 그만두고 나서 고등학생 때 디지털 피아노 사줌 ㅋㅋㅋ두 집 갈라설 때 제 침대 책상 기타 고등학교 졸업할 때 상패(금 붙어 있었음...)까지 다 가져가면서 희한하게 피아노는 두고 갔어요. 다 때려넣은 정성은 인정이고 취향은 탈 거 같은 소설 ㅋㅋㅋ소재 조합이 특이해서 그렇지 반전 스릴러는 약해서 원조 추리물 보던 사람은 부족하다고 욕하지 않을까요 ...

psyche 2021-02-16 06: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셋 중 두 개를 좋아합니다. ㅎㅎ 한번 읽어볼래요. 링크까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2-16 07:19   좋아요 1 | URL
엇 어떤 두 개를 좋아하시는지 갑자기 짐작이 안 가고 있어요 ㅋㅋㅋ링크 피아노곡들은 멋있길래 나아아중에 북플 꾹 누르고 들으려고 모았어요 ㅋㅋ피씨에서 html로 동영상들도 직접 잘 붙여넣으시던데 그 재주는 없어서 아쉽네요 ㅠㅠ

psyche 2021-02-16 07:45   좋아요 1 | URL
피아노와 추리 좋아하고 반전은 딱히 좋아하지 않아요 ㅎㅎ 다음에 책 읽을때 열반님 링크 따라 들으면 좋을 거 같아요.

Yeagene 2021-02-16 1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런 피아노 연주를 글로 쓴 노력이 대단한대요 ㅎㅎ 열반인님 덕분에 음악감상했네요..역시 조성진!:)

반유행열반인 2021-02-16 13:28   좋아요 0 | URL
그쵸 글로 쓰는 장인들 ㅋㅋㅋ조성진 저는 잘 몰랐는데 이번에 들으니 좋네요 ㅋㅋㅋ

- 2021-02-16 1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성진 ㅠㅠㅠ 핡 ㅠㅠㅠ (모닝콜 조성진 쇼팽인 사람이 웁니다) 그래도 제 인생의 드비쉬는 릴리슈슈 쿠노의 드비쉬 ㅋㅋㅋ (하지만 전 클래식은 아무리 들어도 모루겠어요)

- 2021-02-16 1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론 : 읽지도 않는 클래식 입문 책만 세권 집에 있음

반유행열반인 2021-02-16 20:56   좋아요 0 | URL
저보다는 훨씬 잘 아시는 거 같은데요 ㅋㅋㅋ조성진 이름만 들어보고 이번에 첨 찾아듣는 일인 ㅋㅋㅋㅋㅋㅋ
 
주거해부도감 - 집짓기의 철학을 담고 생각의 각도를 바꾸어주는 따뜻한 건축책 해부도감 시리즈
마스다 스스무 지음, 김준균 옮김 / 더숲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10212 마스다 스스무.

할아버지는 노가다 십장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중동 어딘가에 계셨고, 편지로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 엄마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첫 아이고 어른 말씀 따르는 일 외에는 다른 선택을 하지 못했다. 내가 조금 자랐을 때에도 할아버지는 수단, 이란, 이런 사막 나라의 건설 현장에 가 있었다. 건축을 배운 건 아니고 그냥 여기저기 집 짓고 건물 짓는 곳 일하러 다니면서 설계도 보는 법 익히고 눈대중으로 맞추고 좋은 기억력으로 외워서 뚝딱뚝딱 하게 되었다고 했다. 증조할아버지는 대목수였다. 오래 전에 큰 절을 짓고 돈도 많이 벌었는데 노름으로 다 날려서 할아버지가 아버지는 죽어야 돼, 하고 술주정을 해서 증조할아버지가 엉엉 울었다고 한다. 손재주 좋은 조상의 영향인지 아빠는 귀금속 세공일을 했고 삼촌들도 뭘 만들거나 고치는 일을 잘했다. 사촌들도 그림 그리고 만드는 걸 좋아해서 미술 쪽 전공을 한 아이들이 (나 빼고 ㅋㅋㅋ) 많았다.
할머니댁(할아버지가 같이 사는데도 우리는 늘 할먼네-하고 불렀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삼촌들이 지었다고 했다. 명절 전날쯤 그 집에서 자고 다음날 차례를 지냈다. 머물 때마다 그곳은 편안한 공간이 아니었다.
일단 진입로부터 길이 없는 곳, 도랑과 남의 밭을 지나 외따로 떨어진 산밑의 맹지에 집이 있었다. 삼촌들은 차를 집 앞 논 건너편 저 먼 마을회관 앞이나 남의 집 담벼락 옆에 대고 논두렁길을 질러 할머니댁에 왔다. 차가 없는 우리 가족은 버스정류장에서 삼십여분 쯤 시골길을 걸어 들어갔다. 저녁길을 밟을 때면 길 옆 도랑이며 논물에서 개구리들이 와글와글 우는 소리가 났다.
아래로 도랑이 흐르는 편편한 시멘트 판 같은 너른 공간이 담벼락 밖에 있었다. 담 안은 마당이라 하기엔 좁은 마당, 실내 출입문 마주보고 왼편으로 돌면 나무 쌓는 공간이랑 우물가, 우물 앞 별채 방 하나와 창고들, 그리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작은 계단을 밟으면 뒷산의 나무가 바람에 떨리는 소리와 모양이 으스스했고, 창고 위편 옥상의 장독대를 지나 우물 방 옥상으로 건너가면 집 옆 개울물과 남의 밤나무밭과 할아버지네 논밭으로 가는 산길이 멀리 보였다. 그나마 실외 공간은 볕이 들고 트인 맛이 있어서 거부감 없이 먼저 떠오른다.
다시 대문 앞 미닫이 유리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실내에 마루라 부르던 거실이 있었다. 원래 거실 위편으로 골방 같은 작은 방이 있었(고 그 작은 방에는 빨간 이불을 뒤집어쓴 다섯째 삼촌이 음침하게 누워있었)는데 어느 해 홍수 피해로 침수가 된 후 새로 공사를 하면서 방을 다 없애고 거실을 넓게 만들었다. 거실 오른편에는 장가 못 간 막내 삼촌이 쓰는 작은 방, 거실 왼편은 위쪽은 부엌으로 가는 문, 출입문 쪽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쓰는 방으로 가는 문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한 때는 우물 건너편 방에 처박혀 살았는데, 어느때부터 다시 안방을 차지했다. 이 집 구조 중 제일 이상한 게, 화장실은 안방 안에 출입문이 있었다. 또 그 화장실은 우물가로 나가는 허술한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시아버지 앞을 지나 화장실에 가는 게 싫었던 며느리들은 부엌에서 우물 가로 난 문을 나가서 집을 한 바퀴 빙 돌아 대문 앞을 지나 그 오른쪽 구석에, 농기구와 공구들이 쌓인 창고 사이로 아주 오래전 만들어 놓고 없애지 않은 푸세식 화장실을 사용하고는 우물가로 되돌아와 손을 씻었다.
그러니까 그 집은 오직 할아버지 중심의 아주 좆같은 구조였던 거지.
명절마다 할아버지와 큰아빠, 아빠, 작은아빠, 삼촌들이 싸우거나 할아버지에게 맞아서 울었다. 엄마와 작은엄마가 싸우고 엄마가 갑자기 마을 밖으로 나가버렸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맞은 상처를 감추며 끙끙 앓았다. 갈랍 부치고 만두 빚고 식혜 만들던 엄마들은 부엌 바닥이나 거실 바닥에 눕고 삼촌들은 작은 방에서 늦도록 고스톱 치고 티비 보다 아무 데나 눕고 아이들은 거실 바닥에 누운 엄마들 사이나 할머니 할아버지 방의 여기저기 틈새에 누워 얇고 배기는 요떼기 위에 지나치게 높은 베개를 베고 불편한 잠을 잤다. 아빠나 삼촌이 자기 본가에 들르면 떠오르는 기억은, 아주 추운 날 형제 한 명이 잘못하면 여섯 형제 모두 발가벗겨진 채 담벼락 아래 쫓겨나 울던 일이었다.
으악. 노가다 십장이 집이라고 좆같은 걸 지어놓고 자식과 부인을 학대하고 그 자식들은 또 자기 부인과 자식을 학대하고 아주 좆같은 걸 대물림했다.

명절이면 그런 기억들이 가끔 떠오른다. 이제 다시는 거기 안 가도 되고 엄마가 거기에서 수십명 밥 해 먹이겠다고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그렇게 밥 해 먹이고 집에 돌아와서 아빠한테 술주정 당하지 않아도 되서 지금은 행복한 명절이다. 남편은 홀로 어머니 뵈러(이미 그 집 식구가 5명이라 혼자만 슬쩍) 가고, 새해 아침 나랑 꼬맹이들은 시리얼 우유 말아먹고 스팸에 밥 비벼먹고 크로아상 구워 복분자무화과잼 찍어먹고 저녁에 엄마가 잠시 와서 같이 사골떡국 끓여 먹었다. 해피 뉴이얼스 데이.

이사를 준비하면서, 어차피 공동주택에서 다시 공동주택으로 가는 거라 평면 배치나 구조 같은 건 이미 다 정해진 것이지만 그래도 집에 대해 궁금함이 생겼다. 이 집에 올 때도 빚은 가능한한 다 끌어모아 겨우 구한 터라 도배랑 장판이랑 썩어가는 화장실과 주방만 홈쇼핑에 무이자12개월 긁어서 최소한의 비용으로 수리를 하고 왔었다. 요즘엔 그걸 (인테리어 업자 끼지 않고 자기가 하나하나 항목별로 알아보고 집 고치는 걸) 셀프 인테리어라고 부른다더라. 아마 새로 가는 집도 그 셀.인.이라는 걸 할 것 같다. 평당 100만원? 그 정도가 가장 저렴한 편이라는 인테리어를 그렇게 알아서 하나하나 하면 거의 절반 가까운 금액으로 끝낼 수 있다. 조명 가게에 엘이디조명 교체와 낡은 콘센트, 스위치 교체를 알아보니 거의 200만원을 부르는데, 인터넷에다 재료를 싹 주문하고 설치기사님을 연결해주는 앱을 이용하면 80-90만원이면 뒤집어쓰는 식이다.

이 책은 인테리어에 대한 책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집을 짓거나 남의 집을 짓거나 집을 설계하는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알려주는 기본 지침 같은 것이다. 제목에 도감이 붙은 것처럼 저자가 어려운 건축용어 거의 안 쓰고 직관적이고 이해가 쉬운 귀여운 그림으로 챡챡, 다 설명해준다. 정말 신기했다. 우리가 집 그림 그릴 때 경사 진 지붕으로 그리고 창문 그리는 집이 그런 모양으로 생긴게 다 이유가 있었다. 지나가다 본 건물 외벽에 왠 파이프 같은게 길다랗게 세로로 주렁주렁 달려 있어 아이참 저건 왜 저렇게 못나게 달아놨담 싶지만 비가 많이 오는 우리나라 기후에선 역시나 다 부분마다 존재 이유가 있다. 창 모양도 주방의 구조도 문이 열리는 방향도 그러니까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런 이유를 아니까 재미가 있었다. 사는 공간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달까. 뭐 그러나 저러나 이미 만들어진 집에 들어가는 입장에서는 영향을 끼칠 여지가 많이 없지만 ㅋㅋㅋ

내가 집을 지어본 건 예전에 취업 준비하던 해에 김성모 만화책 보다 지치면 심즈4를 신나게 할 때였다. 방 배치부터 외벽 마감, 벽지 마감, 바닥재 깔기, 지붕 얹기까지 온통 귀찮은 것 투성이였다. 그래서 그냥 멋대가리 없이 체육관처럼 넓다란 네모 대충 만들고 그 안에 또 대충 네모난 방 만들곤 했는데.
어려서 할아버지 집에서 느낀 불편함과 음울한 집안 분위기 생각하면 화장실을 어디에 놓는지, 몇 개 놓는지 조차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다. 그 집에 가지 않은지 15년쯤 흘렀다. 할머니를 때려 돌아가시게 한 할아버지는 아직 거기 살고 있다. 엄마를 때려 결국 혼자 남은 아빠가 가끔 할아버지를 챙기러 드나든다는 소문을 듣는다. 아빠와 살던 집은 서비스 면적을 많이 받아 넓직한 새 집이었지만 아빠가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가 공부하는 내 방을 그대로 뚫고 들어왔고 컴퓨터를 놓은 방은 유리문 미닫이로 되어 있어 바깥에서 감시가 가능한 형태였다. (그래서 나중에 문 위에 벽지를 붙이긴 했지만…) 나는 그 집에서 행복하지 않았다. 집의 구조도 중요하지만, 구조가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지만, 관계야 말로 같이 사는 사이에서 계속 같이 살기 위해 제대로 풀어내야 할 일이다. 당연한 소리나 하고 있네. 나는 같이 사는 사람들에게 불편한 존재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할아버지나 아빠 같은 사람이 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잠시라도 내가 불편한 존재가 된다면 곁의 사람들이 피할 수 있는 공간들이 충분하면 좋겠어. 역시 내가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게 우선이겠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02-12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12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21-02-13 01: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가족 모두가 행복한 집을 응원합니다. 새로운 집에서 더 많이 서로 사랑하고 행복해지시길요. 근데 셀프 인테리어 너무 힘들지 않나요? 아 그걸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무한한 존경의 눈길을 보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2-13 07:30   좋아요 2 | URL
응원의 말씀 감사합니다. 이사가기 전부터(?) 열심히 사랑하고 행복하게 살겠습니다ㅎㅎㅎ직접 철거하고 필름이며 목공이며 타일 바르고 뚝딱뚝딱 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게 셀인 인 줄 알았고 그거야 말로 대단하다 싶더라구요. 이 업체 저 업체 알아봐서 일정 맞추는 건 직장 다니며 하기 번거롭긴 해도 그에 비하면 일도 아니지 싶어요 ㅎㅎ

Yeagene 2021-02-14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은 더 나은 사람이 되실 거에요..열반인님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져라!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02-14 15:55   좋아요 1 | URL
더 나은 사람 될 수 있도록 내내 정진하겠습니다 ㅎㅎ감사합니다 예진님!!! 남은 휴일도 편안히 보내시길!!!!!

2021-02-16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16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16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16 2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20 2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20 2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자책] 작가 형사 부스지마 스토리콜렉터 64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북로드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10211 나카야마 시치리.

문단을 소재로 하는 다른 책 리뷰에 이 책이 언급된 걸 보고 찾아보았다. 원래 찾아본 책은 문학상 신인공모에서 심사위원인 작가와 평론가가 싸우는(?) 이야기라는데, 어떤 독자가 너무 평이하다고, 그 분야로 상상력을 발휘하려면 ‘작가 형사 부스지마’ 정도는 되야지, 하길래 제목만 들어도 궁금해졌다. ㅋㅋㅋ
제목 대로 작가인 동시에 형사인 부스지마가 사건 해결에 활약하는 모습을 신참 형사 아스카가 지켜보는 형식의 블랙코미디 추리물이다. 부스지마...독할 독 자에 섬 도 짜 쓰는데 이름 기분 나빠...독도는 우리땅. 여기서는 독설가에 독고다이 같은 모습이라 어울리는 이름이긴 하지만…
작가 지망생, 신인 작가, 인기작가, 노작가, 편집인, 문학상 심사위원, 악평 전문 리뷰어(뜨끔), 스토커 광팬, 작가의 가족, 소설을 원작으로 영상물 만드는 방송계 사람들까지- 문학, 특히 소설을 둘러싼 인간들은 죄다 어딘가 삐뚤어졌고 피하고 싶고 웃음소리도 이상하고 그러다 결국 살인 범죄의 희생양 또는 범인이 되는 상황을 약간 웃기게 그려놓았다. 이런 걸 쓰는 것도 결국 소설가니까 자조, 자학, 독설이 섞여 있다.
굳이 형사면서 작가인 인물을 독설 쏟는 화자로 설정해놔서 판을 잘 알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신랄하게 깔 수 있는 장치를 깔아놓고, 또 그 이상한 작가 형사를 관찰하는 아예 외부 인물인 형사가 있어서, 내가 보기엔 니가 더 이상해, 하고 한겹 더 까게 해놨다. 이중까기의 묘미 ㅋㅋㅋㅋ
시나리오 작가가 소설 썼더니 대화는 살아있는데 지문이 별로라고 까이는 부분이 있는데, 그게 사실 이 소설의 특징이기도 했다 ㅋㅋㅋ작가님 원래 시나리오 쓰셨어요? 밑줄 쳐 놓은 거 보니 순 대화 뿐이다. 대화체는 술술 잘 넘어가는데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섬세함은 없음 ㅋㅋㅋ 읽다보면 일본 코미디 영화 한 편 보는 느낌이 든다. 잘생겼지만 부스지마를 자꾸만 아스카에게 떠넘기는 과묵한 형사 이누카이, 왜 항상 이상한 놈들 옆에서 뒤치닥거리하는 건 여자냐, 심지어 캐릭터도 약하고 남자들의 세계에서 치이면서 하나하나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전형적인 인물이 관찰자냐, 여지 없는 의문을 던지게 하는 여형사 아스카, 그리고 공중그네의 또라이 의사 마냥 우후후후후 하는 웃음을 흘리는 괴짜이면서도 두 분야 모두에서 성공한 능력자인, 그나마 이건 최신 소설이라 여자한테 집적거리는 장면 없이 깔끔한 거 하나는 마음에 드는 부스지마까지, 캐릭터도 눈에 그려질 만큼 뚜렷하게 설정해 놓았다. 왠지 찾아보면 영화화(드라마화) 했거나 하고 있을 거 같다...그것이 돈벌고 싶은 작가의 최종 로망인 것이냐...그러면서도 그런 영상제작 판을 또 까 놓고 ㅋㅋㅋ
출판물을 소비하는 독자들은 문학계, 문단계의 뒷이야기, 작가의 기벽과 엉망진창인 삶 같은 것에도 흥미를 느끼기 마련이다. 그러니 자꾸만 소설집, 시집 같은 것 말고도 작가에 대한 책이나 산문집, 서한집 같은 게 나오겠지. 글은 훌륭해도 일상은 쓰레기야 할 때가 더 재미있고 스캔들 같은 것에 눈이 번뜩 뜨이는 게 (나같은) 하찮은 인간의 마음인가 보다. 그런 걸 잘 노리고 쓴 소설이었다. 킬링타임용으로 훌훌 잘 읽혔다. 추리물 장르를 즐겨읽지는 않는데 그런 독자한테도 문학, 출판계를 배경으로 해 놓으니까 흥미롭다. 일본 출판계 얘기니까 우리랑 다른 점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초판 이만부가지고 고만고만하게 취급...우리나라는 천부 팔면 히트 아니었어?! 그리고 사륙판-하드커버-문고판-이런 수순으로 같은 저작물을 인기와 판매량 같은 작품생애주기(?)따라 판형 바꿔가며 가격 올리고 내린다는 것도 신기했다. 그래도 작가 지망생이니, 독자서평이니, 출판도 영리사업이니 하는 이야기는 어느 나라 문학계나 공통된 부분이 있을 것 같다. 도서관 책 빌려읽는 주제에 악평만 줄창 달고 지가 뭐라도 된 줄 알아...하는 내용에서는 조금 찔렸다. ㅋㅋㅋㅋㅋㅋㅋ 사서 읽은 책은 열심히 까고 빌려 읽은 책은 살살 까야 되나 싶었다.

+밑줄 긋기
“정신적으로 힘들다고요! 마음이 무너져버렸어요! 인간의 썩어빠진 냄새를 억지로 참아냈다고요. 작가 지망생들은 모두 저렇게 성격이 삐뚤어졌어요?”
이누카이는 시선을 쓱 피했다.
“제대로 된 사람은 별로 없지. 평범한 사회생활에 불만이 있어서 소설을 쓰려는 치들이니까.”
“...아셨던 거네요, 작가 지망생들이 어떤 캐릭터인지.”
…”그 사건을 맡은 바람에 출판업계가 온갖 잡귀들이 모여 사는 동네라는 걸 알았어. 세상 상식이나 상도덕이 통용되지 않는 세계라는 걸 말이야.”
“알고 있었다면 왜 저한테?”
“솔직히 난 별로 엮이고 싶지 않아.”
중얼거리는 걸 보아하니 정말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어떤 조건에서도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일관하는 이누카이가 이 정도로 혐오감을 드러내다니, 아무래도 출판업계의 어둠은 예상보다 훨씬 깊은 게 틀림없다.

-“...단카이 세대라고 했지? 맞는 말이야. 단카이 세대는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들이니까. 무슨 말만 하면 내가, 내가, 시대가, 시대가, 하면서 말이지. 대부분 술만 취했다 하면 자기가 세상을 움직이는 것처럼 국가의 미래를 꺼내 들잖아. 누가 듣고 싶어 한다고. 그런 사람은 정년을 맞아 회사에서 내쫓기면 순간 의지할 곳을 잃고 불안해져 어쩔 줄 모르게 돼. 집에 있어도 대형 쓰레기 취급을 받고 그동안 자신을 지탱해주던 것이 회사 간판이었다는 걸 깨달아. 그래서 자신을 긍정하고 싶어 신통치 않은 시시한 문장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남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거지. 아무것도 아닌, 그저 백발의 중학생인 거지, 당신은.”
“다,다,다,닥쳐,닥쳐,닥쳐….이 엔터테인먼트 퇴물에 경박한 사이비 작가 놈아!”
“앗, 미안해라, 작가 본인의 성격을 왈가왈부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우후후후. 사이비 작가라는 것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고, 나도 내가 작가라는 자각이 없으니까. 그런데 당신은 그 사이비 작가도 못 되잖아. 소설 속의 오우미 히데오는 어떻든 간에, 현실의 당신은 정년 뒤 재취업도 못하고 자신을 철저히 미화한 자신만의 걸작을 혼자 계속해서 읽는 단순한 백수라고. 흔히들 한 사람의 일생은 한 편의 소설이 된다고 하지. 하지만 당신 인생은 별로 재미없어. 당신 세대는 어쨌든 명예나 칭찬을 원해. 작가가 되려는 것도 그게 목적이지?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 그만둬. 이왕지사니까 조언하지. 우후, 우후후후후. 그런 소설을 쓰려거든 공원에서 잡초라도 뽑는 편이 훨씬 더 칭찬받을 거고 세상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일이 될 거야.”

-“그것도 작가의 습성이라고 해야할지, 슬픈 습성이지. 작가는 행동 범위가 극단적으로 좁아. 자칫 은둔형 외톨이 수준이야. 바빠질수록 그 경향이 강해져. 이건 얄궂은 이야기인데 범인도 글 쓰느라 아주 바쁜 인기 작가였으면 이런 살인 계획은 세우지 않았을 거야. 현장 사전 답사, 흉기 조달, 알리바이, 공작, 귀찮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귀찮다니…”

-“이제 와서 작가한테 무슨 환멸을 느끼겠어요.”
“그래그래, 환멸은 뭐에 대해서든 빠른 게 좋아.”
“왜요?”
“꿈이나 동경은 그 사람의 성격과 인생을 꼬이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 아주 쉽거든. 동경을 오랫동안 품고 있을수록 꼬이는 정도도 심해지지. …”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아 2021-02-12 08: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읽어야겠어요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2-12 08:49   좋아요 4 | URL
필독은 아닌데 수용소군도나 육식의 성정치 마냥 어렵고 무거운 벽돌 이어질 때 한숨 쉬어가는 용으로 에피소드 하나씩 읽으면 좋겠어요 ㅋㅋ

청아 2021-02-12 08:51   좋아요 4 | URL
네ㅋㅋㅋ아 <연쇄살인마 개구리남자> 작가네요?! 이것도 궁금했는데 덕분에 둘다 챙김^^

반유행열반인 2021-02-12 08:53   좋아요 3 | URL
네 전 이거 하나 봤는데 되게 많이 쓴 작가더라구요? 깨구리는 잔인하다 소리도 있는 거 같던데 이건 사람 죽긴 해도 순한 맛이요 ㅋㅋㅋ안녕 드뷔시도 같은 작가길래 좀전에 빌렸어요 ㅋㅋ

청아 2021-02-12 08:57   좋아요 2 | URL
오오 그거 괜찮음 피드백 부탁드려요!

붕붕툐툐 2021-02-12 09:4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지가 뭐라도 된줄 알아..‘에서 함께 찔리는 1인입니당!! 추리소설 중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섬세함을 가진 작품이 있을까요? 혹시 아시는 거 있음 추천 부탁드려요! 헤헷~🙆

반유행열반인 2021-02-12 09:50   좋아요 4 | URL
저는 추리물을 거의 읽은 게 없어서 ㅋㅋㅋ그나마 약간 그런 비슷한(범죄-사건의 전말 밝히는 수순) 구성 중에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문장이 유려한 편이었습니다. 저는 생태묘사가 좋아서 재밌게 봤는데 평 보면 호불호 갈리더라구요 ㅋㅋㅋ

청아 2021-02-12 09:55   좋아요 4 | URL
제가 껴도 된다면 안 읽어보셨다면 존 르카레를 추천드려요ㅋㅋ섬세함의 미시,거시적 성향이 다 있음요🙆‍♀️

반유행열반인 2021-02-12 09:53   좋아요 3 | URL
존 르카레도 첩보물 하나 봤지만 맞네요 ㅋㅋ섬세한 대가네요 할아버지 편히 쉬세요 ㅠㅠ우리가 재밌게 읽을게요ㅋㅋㅋ

붕붕툐툐 2021-02-12 10:01   좋아요 2 | URL
꺄오~ 두 분 다 넘나 감사합니당~ 소개해 주신 거 얼른 검색해서 담아놓을게욤!!

하나 2021-02-12 09: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일본 약간 성질 지랄맞은 례술가로 인해 벌어지는 에피소드로 서사를 끌고 가는 관습 같은 게 있는 거 같아요. 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도 라디오 극 녹음하면서 성질 있는 스타성우가 극본 고치라고 고집부려서 극이 산으로 가는 얘기...

그치만 저도 찔리네요 22 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2-12 09:56   좋아요 3 | URL
미스터 맥도날드의 그 웅성웅성 일본영화 특유의 호들갑 안 좋아하면서도 또 보다보면 일관성 있는 민족이네 싶은 경외감도 있네요 ㅋㅋㅋㅋ 하나님 정도면 순한맛 예의바른 리뷰어인데요 뭘 ㅋㅋㅋ 설마 또라이 작가지망생에 이입? ㅋㅋㅋ저는 스토커도 그렇고 배배꼬인 서평 작성자, 지망생 안 걸리는데가 없어서 여러번 찔림 ㅋㅋㅋㅋ

syo 2021-02-12 10: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명절에도 꾸준하게 이어지는 서재이웃님들의 독서... 아름다운 세상....
떡국 푸지게 드시고 또 읽으소서^-^

반유행열반인 2021-02-12 10:29   좋아요 1 | URL
독서가 아름다운 세상 만드나요? syo님도 떡국 책 전부 많이많이 드세요 ㅎㅎ

Yeagene 2021-02-12 13: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공중그네의 그 또라이 의사가 연상되는 주인공이군요ㅎㅎ
일본 작품은 그런 인물들이 종종 나오는 것 같아요..벽돌책들 읽다가 골치 아파지면 한번 읽어볼까봐요ㅎㅎ
참,열반인님 행복한 설연휴 되세요!:)

반유행열반인 2021-02-12 13:43   좋아요 2 | URL
그래도 이라부는 변태에 요즘에는 나오지 못할 소설각인데 ㅋㅋㅋ 부스지마는 좀 음침하고 다른 작가 견제해서 그렇지 남한테 피해는 안 주면서 꺼려지는 인물이라 비교 대상이 아닌데 제가 읽은 게 일천하여 그만 ㅋㅋㅋ
예진님도 새해복 많이 받으시고 연휴 푹 쉬세요!!!
 
[전자책] 테이크아웃 22
최은영 지음, 손은경 그림 / 미메시스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10207 최은영.

끄억...언니가 오늘 좀 달렸다. 단편 분량 세 편이지만 온도도 속도도 모양도 다른 작가들 세계를 요래저래 옮겨다니며 불태운 하루였다. (라고 썼지만 어차피 달리 할 일 없는 빈둥대는 주말...)
최은영의 단편집 두 권을 본 게 벌써 3년 전이라니!!! 지금 와서 다시 읽으면 나는 왠지 그 소설들을 더 좋다고 말할 것 같다.
이 소설 처음 읽는데, 이상하게 첫 머리부터 이미 읽어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인칭이면 조금 수월하게 읽혔을 글을 일부러 당신은, 하고 해진을 지칭하며 일부러, 일부러 불편하게 읽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말을 어디서 읽었던 것 같았다. 혹시 비슷한 이야기 어디서 들으신 분 있나요...아니면 나 예전에 이 소설 읽는 꿈을 꾼 건가요…
그 사이 읽은 책에서 접한 고대 남학생들이 이대생들에게 저지른 집단 폭력, 교수의 조교 성폭력 사건, 기지촌 여성 살해 사건, 그리고 작가와 비슷한 시절 대학 다니면서 멀찍이서 접한 반미 집회, 대학 노래패에서 세미나하던 기억, 그런 게 가득한 소설이라 남일 같지 않게 읽었다. 거기에다 그때는 서로 사랑했지만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표현하지 못했던, 그래서 뒤늦게 돌아보면서 아파하는 해진과 희영과 정윤의 마음을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그려놔서 마음이 쿡쿡 쑤셨다.
최은영의 소설을 모두 다 좋아하진 않았는데(대부분은 좋았지만 가끔은 기복이 있나...했는데), 이 소설은 정말 좋게 읽혔다. 또다시 드는 생각이지만 예전 소설집 한 번 더 읽으면 그때 못 봤던 걸 볼 것 같고, 다음 소설집이든 장편소설이든 작가의 새 작품을 기대하게 되었다.

요즘에는 자꾸만 내가 바뀐 것인지, 내가 이상한 지 되묻곤 한다. 아무렴 어때. 내 바깥이 바뀌고 안이 바뀌는 건 당연한 일일 거야. 그게 더 나쁜 쪽만 아니라면 괜찮을 것이다.

+밑줄 긋기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 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 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서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정윤은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말을 끊지 않았고, 충분히 들은 뒤에 자기 의견을 이야기했다. (키야악 두 문장으로 인물을 이렇게 간명하게 그려버려…)

-그녀는 타인의 상처에 대한 깊은 수준의 공감을 했고, 상처의 조건과 가능성에 대한 직관을 지니고 있었다. 글쓰기에서는 빛날 수 있으나 삶에서는 쓸모없고 도리어 해가 되는 재능이었다.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나서, 정말로 글을 써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쓸 줄 모르는 당신만 남아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던 날들이 있었다. 그 나날이 길었다.

-그때 당신과 희영의 뒤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범죄는 모국에서! 그러자 누군가 조금 작은 소리로 따라 외쳤다. 강간은 미국에서!
당신과 희영은 서로의 얼굴을 봤다. 몇몇이 그 구호를 산발적으로 외치는 동안 당신은 몸을 돌려 누군지 모를 사람들에게 말했다. 구호 중단하세요. 구호 중단하세요. 그러나 당신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한국어로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당신은 인파 속에서 허우적대면서 말했다. 구호 중단하세요.(아...진짜 읽으면서 참담한 기분이 들었던 집회 현장…)

-정윤 언닌 정말 그렇게 믿어요?
희영이 입을 열었다.
주한 미군이 철수하면 그런 일이 없어질 거라는 거, 통일 조국이 되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거, 여자들이 맞고, 강간당하고, 죽임당하는 일이 없어지리라는 걸 믿어요, 언니?
논리에 모순이 있네. 정윤이 말했다. 민족 주권과 빈곤의 문제를 여성 문제로 축소해서 보려는 겁니까?
당신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로 그런 희영과 정윤을 번갈아 바라보기만 했다.
언니는 여성 문제가 그렇게 작은 문제라고 생각해요? 전 그분이 살아 있을 때나 돌아가셨을 때나 사람들에게 이용당했다고 생각했어요. 민족의 누이 운운하면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 하려고 그렇게 처참한 시체 사진을 사용했고……
정윤이 희영의 말을 끊었다.
여성 문제요? 본인이 돌아가신 분과 같은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거 오만한 생각 아닌가. 너무 다른 입장 아닌가. 희영은 그런 삶을 경험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런 삶에 대해 모르면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희영이 그렇게 가난해 본 적 있어요? 몸을 팔아야 할 만큼? 대학 교육까지 받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신발 신으면서 희영이 같은 여자랍시고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의 장면인데 많은 담론이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나는 그나마 불과 일년 여 차이에 구성원이 다른 조직이라 선배들이 오히려 희영과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운동에 접근했던 게 다행이었을까. 국가와 민족을 외치는 대신 파시즘과 군사문화 타도와 여성주의를 이야기했던 게 그나마 다행인가. 당사자성에 대한 논의, 곡해도 생각하게 되고. 어쨌거나 이 부분도 조금 참담한 기분. 가장 좋아하던 선배 입에서 오히려 적대적인 말을 듣는다면 진짜 멘탈 부스러질 것 같긴 함…)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 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는 생각만으로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내가 그랬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달랐겠지만.
희영은 거기까지 말하고 당신을 부드럽게 바라봤다.
정윤 언니가 그랬지. 나는 이 문제로 글을 쓸 수 없다고. 어쩌면 그 말이 맞았는지도 몰라. 가끔씩 언니들의 마음이 너무 가깝게 다가와서 내가 언니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정윤 언니의 말을 생각이 들면 정윤 언니의 말을 생각해.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모른다고. 착각하지 말자고.
(아야야...희영아 살살 때려...얼마 전 친구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다가 조금 과열되기도 했었는데...어떤 말들은 한 사람의 인생 방향을 영영 틀어 버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또 어떤 말하여지지 않은 말 또한 그런 일을 한다. 그런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ㅠㅠ)

-Q.소설을 쓸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본인만의 원칙이 있나?
A.솔직할 것. 나의 가장 더러운 부분도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가까운 사람들의 상처를 함부로 재현하지 않는 것. 사람들의 고통을 이용하지 않는 것. 아는 척, 잘난 척, 내가 뭐라도 되는 척하지 않는 것. (ㅠㅠ명심하겠습니다요… 그리고 최은영님 가장 더러운 부분도 정말 쓸 수 있었다면 그 마음이 순백에 가깝지 않나 싶음….이건 착하게 쓰겠다고 맘먹는다고 써지는 게 아니여...)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 2021-02-07 21: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에는 자꾸만 내가 바뀐 것인지, 내가 이상한지 되묻곤 한다. 저도요! 그리고 열반인님 혹시 겨울 싫어맨이신가요? 저 오늘부터 좀 컨디션 올라오는 거 같은데 언니도 달리시길래 ㅋㅋㅋ 저도 최은영 작가 다음 작품 기다려봅니다. 저도 모두 다 좋아하지는 않구, 첫번째 단편집을 잘 읽었어요! (근데 다른 것보다 동년배인데 굉장히 성숙하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글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바로는 어느 정도 자기 자신과 화해를 시작한 느낌)

반유행열반인 2021-02-07 22:22   좋아요 2 | URL
동년배인데 빠른 84아닌가요 ㅋㅋㅋ(저차원적 동문서답) 저는 첫번째까지는
뭐가 좋다고 난리람... 하다가 두번째 책 읽고는 감화되었지 뭐에요 아 착하네 착하게 쓰네 독보적으로 착하게 쓰는데 착하게 써도 좋을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 기다려 봅니다 ㅋㅋ케

- 2021-02-07 21:3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ㅠㅠ 좋아해줘 ㅠㅠ 최은영 좋아해줘 ㅜㅜㅜㅜㅠㅠㅠㅠㅠ 왜냐면 전 최은영님의 소설에 너무 깊이 감응해버리는 1인 이거덩요 ㅠㅠ 여리고 약한 내면을 막 후벼파고 또 파서 자기가 부서지진 않을까 하는 소설들이라서.. ㅠㅠ 난 최은영이 아파 ㅠㅠ 너무 연약한 사람인데 연약함을 파헤치는 것에서 만큼은 너무 용감하다 생각해요.

반유행열반인 2021-02-07 22:23   좋아요 2 | URL
아 좋아해 누가 싫대ㅋㅋㅋㅋ좋아해도 좋은데 너무 이입하진 말아요 공감하되 나랑 타인을 분리할 줄 알아야 덜 아프다? 최은영은 최은영 몫만큼 쟝쟝은 쟝쟝 몫만큼 아프고 읽고 쓰고 연약하고 용감하고 파헤치고 생각하기루 하죠 ㅋㅋㅋ

- 2021-02-07 22:49   좋아요 2 | URL
분리 ... 아 고것의 까다로움...!!!! 실재하는 인간에겐 분리 가능! 하지만 독서에서의 이입은 독자의 특권이라규!!! 좀 허우적 거리다가 현실세계에서는 눈 부릅뜰게요! 잘자요 반님~
 
[전자책] 팬텀 이미지 테이크아웃 13
정지돈 지음, 최지수 그림 / 미메시스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10207 정지돈 글. 최지수 그림.

아침에 정지돈에서 오한기로, 다시 오후에는 정지돈으로 돌아왔다. 처음 읽는 작가에다 여러 번 읽어도 읽기 힘들다는 소리에 겁을 조금 먹었다. 초반부터 몇 쪽 넘기다 말고 어? 하고 앞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농담처럼 붙은 조금은 상스러운 후장 사실주의래...하는 말이 떠올라서 그래 뭘 심각해, 그냥 힘 빼고 살살 슬슬 읽자, 하고 읽었다. 그랬더니 그냥저냥 재미있게 읽혔다.
경주에 여러 번 가 봤다. 초4 때 걸스카우트, 초6 때 수학여행(밤에 안 자고 깝치고 돌아다니다 선생님이다! 하는 소리에 마구 뛰어 도망가다 모퉁이에서 다른 아이와 부딪혔고, 눈가가 찢어진 흉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중2 때 또 수학여행(전교 1등은 에쵸티를 깐 대역죄인에다 이런저런 미움을 샀는지 친구가 하나도 없었고, 전교 꼴등에 친구가 하나도 없는 또다른 아이와 함께 다녔다. 말이 하나도 통하지 않아 그냥 같이 다니기만 했다), 24살에 남자친구와 여행(이때 남산에 처음 올라가 봤다)…그래도 아직까지 경주를 잘 모르겠다. ‘경주’라는 영화를 나중에 봤는데, 영화 속 고분이 여전히 낯설었다. 소설 속 호텔이 있는 보문관광단지도 버스 타다가 지나친 거 같은데 다른 도시의 다른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화자가 헷갈리고 한 사람의 인생이 소설 뒤 작가 연보처럼 막 덩어리로 몇 명 던져졌는데, 그게 연보처럼 정리된 건 아니고 대화 속에서 구전되는 식인데, 적응 되니까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싶었다.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대개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이고, 소설도 사람에 관한 이야기니 저렇게 쓸 수도 있지 뭐.

+밑줄 긋기
-어머니는 그가 열두 살 때 오렌지카운티 교외의 바에서 실종됐고 두 달 뒤 시체로 발견됐어. 경찰은 바텐더, 손님, 직장 동료, 잠시 만났던 남자, 이웃들 모두 조사했지만 술에 절은 몇몇 용의자의 살인과 관계없는 사소한 범죄만 감지했을 뿐 끝내 범인을 찾지 못했어. 매일 전국의 술집에서 여자들이 구타당하고 실종되는 일이 일어나던 때였어. 미국은 종전 이후 황금기를 맞이했고 매카시즘 광풍에 휩싸였으며 꽃의 시대가 찾아왔지. 그러니 교외의 어두컴텀한 바 뒤에서 무슨 일이 있건,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어. 그건 그 여자들의 문제 아니야? 수영장 청소부는 그렇게 생각했고 1965년, 약에 절어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모로에게 가끔 편지가 왔는데 비와 강물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으로 그게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주제라고, 엄청난 양의 폭풍과 비로 불어난 강물이 북아메리카의 앵글로색슨을 모두 태평양으로 휩쓸어 버릴 거야, 그게 바로 앵포르멜이야. 1975년 한 편지에서 모로는 말했고 수영장 청소부는 재활원에서 편지를 읽으며 미치길 원했던 친구가 미쳐 가는 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어. 다나카는 김신에게 편지를 읽듯 말했고 이것은 자신이 미국의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들은 남자의 일생을 소설을 쓸 요량으로 극화한 것인데 이미 너에게 말해 버렸으니 나는 소설을 쓸 수 없다, 어떻게 할 것이냐, 라고 했다. 왜 쓸 수 없냐고 김신이 묻자 다나카는 소설은 일종의 마법과 같아서 발설하면 기운이 빠진다, 내면의 두께가 소진되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소설은 일종의 점조직이야, 동료 조직원의 주소도 직업도 알 수 없고 오직 그가 전달해 준 정보만 다시 전달할 뿐, 조직원의 상태나 내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 허점이 드러나 조직 전체가 무너지는 거야. 다나카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지만 김신은 다나카가 즉흥적으로 떠오른 이야기를 영업 비밀이라도 되는 양 심각하게 말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럼 다른 걸 쓰면 되겠네. 수영장 청소부의 이야기도 좋지만 좀 더 대중적인 걸 쓰는 게 어때? ...다나카는 내 소설은 번역될 리 없어, 출간될 리도 없는데 번역이 되겠니, 그는 난간에서 훌쩍 뛰어 수영장 바닥으로 내려갔다. 바닥엔 젖은 낙엽들이 가득했고 다나카는 낙엽들을 짓이기거나 발로 차며 걸었다. 출간되지도 않을 소설을 왜 쓰는 거야. 김신이 물었고 다나카는 그 말 당장 취소하라며 그건 소설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다. 소설가라면 모름지기 출간되지 않을 거라는 각오로, 거절당할 거라는 각오를 글을 써야 해, 더 좋은 건 원고를 보내지 않는 것이지. 김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 보내지도 않을 소설을 왜 쓰지?

-김신은 딱 한번 지하철을 타봤다. 이제 서울에 가면 매일 타는 거? 동대문에서 시청으로, 시청에서 종로 5가로. 그렇지만 조금 무섭다. 땅이 무너지면 어떡해? 김신은 불안에 떨었고 다나카는 땅 위로 다녀도 땅이 무너지면 다쳐, 아…...김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이젠 땅 위로 다닐 때도 불안하겠네. 그래, 그러니까 무서워할 필요 없어. 다나카가 말했다. 불안은 현상이 아니라 심리야, 그러니 더 이상 아무것도 불안해할 필요 없고 아무것도 불안하지 않을 거야. 다나카는 중얼거렸다.

-콜라를 마시는 미셸 푸코 같아요. 아서 존슨의 사진을 본 상우가 말했다. 상우는 경주에 가고 싶었지만 경주 맛집을 검색한 뒤 싫어졌다고 했다. 한기는 경주까지 뒤로 걸어서 가고 싶다고 말했다. 왜요? 길티 플레져예요. 한기가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묻자 한기는 제 길티 플레져는 뒤로 걷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나는 무슨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설명을 요구하자 한기는 죄송합니다, 제가 이상한 거 같아요. 은진이도 저보고 아무 말이나 하지 말래요, 라고 말했다. 은진은 한기의 아내다. 나는 한기에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에 가끔 놀란다. (ㅋㅋㅋㅋㅋㅋ이 부분부터 상우와 한기가 등장하더니 여행 끝까지 내내 같이 가는데 그게 왜때문에 깨알 같이 웃기다…)

-나는 일이 겹치는 걸 좋아하고 일을 생각하고 바라보면 어느 순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서서히 일의 중력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게 보인다. 그러니 어디로든 가야 한다. 무엇이든 읽어야 하고 어떤 이야기라도 해야 한다.

-우리는 아주 잠깐 신라 시대의 사람들에 대해서, 과거에 대해서 얘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흔적을 이해할 수 없고 기억을 이해할 수 없어요. 그건 모두 존재하지 않았거나 지금도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존재했었다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게 무슨 말이죠?

-Q.정지돈에게 <소설>은 무엇인가?
A.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ㅋㅋㅋㅋㅋ오 수키...그게 여기서 왜 나와….그런데 왜 맞는 말 같냐…)
Q.<소설>은 어떤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A.가끔 개인의 인생을 바꾸고 사회 제도를 바꾸기도 하지만 대부분 아무런 힘도 없는 거 같다.(너무 솔직한데 공감해버림….)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막시무스 2021-02-07 16:4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정지돈 작가님은 문학상 수상집에서 모두 읽다가 포기한 작품이라 이름이 잊혀지지 않네요!ㅠ 이해할 날이 오겠죠.ㅎ 즐건 휴일되십시요!

반유행열반인 2021-02-07 16:57   좋아요 5 | URL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아야겠더라구요 ㅋㅋㅋㅋ휴일 즐겁게 보내시길!!!

하나 2021-02-07 16:5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쓸 수도 있지 뭐, 하면 되는데. 너무 내용을 이해하려고 고집을 부렸나 싶기도 하네요. 오 수키... 본인도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체념 같은 게 있는 거 같아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2-07 16:58   좋아요 5 | URL
읽히지 않는데 하나님이 정지돈 아끼는 기분이지 왜...(여기서 갑자기 왜 질투를 하는 거지 왜...ㅋㅋㅋㅋㅋㅋ)

하나 2021-02-07 17:02   좋아요 4 | URL
저 막 시험 끝난 날처럼 씨네21 이런 거만 보고 있고욬ㅋㅋ 잘 읽히지 않지만 그냥 둘 수는 없을 거 같은 느낌이랄까.. 정지돈은 정말 읽어줄 사람을 만나야 되는 작가고 본인도 잘 아는 것 같고 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2-07 17:16   좋아요 3 | URL
알라딘에도 팬덤? 있어 보이더라구요(아니면 지인일 듯 ㅋㅋㅋㅋ) 스타 걱정을 왜 하고 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Yeagene 2021-02-07 18: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지돈...읽을까 말까 늘 고민하는 작가에요.다들 어렵다고 하셔서..^^;;;

반유행열반인 2021-02-07 18:33   좋아요 2 | URL
이 책 처럼 단편 하나 묶은 거나 수상작품집 같은데 단편 실린 거 하나로 실실 도전해보세요 할 수 이써!!! ㅋㅋㅋㅋ

파이버 2021-02-07 1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대소설 넘 어려워요ㅜㅜ 밑줄긋기만봐도 눈이 빙글뱅글@@

반유행열반인 2021-02-07 19:33   좋아요 1 | URL
아닐 거에요 어렵다는 말에 우리 모두 속고 있을 거야!!!!(그러면서 나도 뱅글뱅글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