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목가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7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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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5 필립 로스.

초성의 운이 살아 있는 번역 제목 ‘미국의 목가’는 읽기 전부터 지독하게 역설의 제목이겠지, 기대하게 했다. 미군이 맛간 이야기 같은, 헤비 메탈이든 랩 메탈이든 분노의 사운드를 떠올렸다. 이쯤 때려 맞추면 이제 필립 로스 깨나 읽은 놈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아직 읽지 않고 모셔둔 필립 로스의 작품이 이거 말고도 다섯 종은 더 남아 있다. 아껴 읽겠다고 연간 한 가지만 읽자, 했는데 적당히 (자동으로) 잘 지키고 있다.

이민자 유대인 조상 세대를 넘어 미국의 가치, 생활 양식을 체화하고 심지어 그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미국인의 본보기가 된 듯한 스위드, 시모어 레보브는 어린 주커먼의 우상이었다. 우연히 마주친 스위드는 스킵(주커먼)에게 만남을 제안한다. 주커먼은 함께 식사를 나누며 가족 타령만하는, 겉으로는 너무 평범하게 보이는 과거 영웅 스위드에게 실망하고, 나중에 동창회에서 만난 스위드의 동생 제리로부터 스위드가 겪은 고통의 사건을 알게 된다.

번역기 대참사라고 에스엔에스 짤로 보게 된 음식, 베트남 샌드위치 반미는 대기업 구내 식당에 anti-american 샌드위치가 되어 있었다. 반미를 현지에서 먹어 봤는데, 자꾸 중국인들에게 새치기 당해서 울 뻔했지만 끈기있게 기다려서 주문했다. 저렴한 가격에 정말 맛있는 빵이었다. 한국 전쟁에 군대를 파견해준 미국이 우리에게 베트남전 파병을 요청했을 때, 외화 벌이도 해야하고 미국 눈치도 살펴야 하는 한국은 청년들을 말도 통하지 않는 동남아시아 더운 나라로 배를 태워 보냈다. 친족 중에 파월 해병이 있으니 우리 할아버지들이 적지 않게 갔다 왔겠다. 이라크 전쟁 파병을 앞뒀을 때, 과 선배들에게 이끌려 반전 반미 부시 아웃, 이런 구호를 외치며 가두 행진하던 때도 기억난다. 그보다 몇 년 후에는 쇠고기 수입 반대한다고 촛불 들고 가족들과 엠비 아웃, 하면서 거리에 나가기도 했지만...지금은 미국산 쇠고기 세일하면 잘 먹는다.

뉴어크의 학교 스포츠 스타였던 스위드는 2차 대전 종전 직전 해병대에 입대했다가 전쟁이 곧 끝나 무사히 살아왔고, 아버지의 장갑 사업을 물려 받아 회사를 경영을 하는 자본가가 되었다. 스위드가 리타 코언에게 공장의 제조 공정을 소개하며 여성용 장갑을 만들어주는 장면에서, 나는 못 참고 백화점의 재고 양가죽장갑 하나를 온라인 주문해 버렸다. 그만큼 가죽 장갑 땡기는 장면이 있었다. (이제 하다하다 소설 핑계를 대고 뭘 산다…그래도 이만원 안 되게 싸게 샀다구) 이후 리타가 스위드에게 하는 짓은 진짜 역겹고 치졸했다. 반전 반미 반자본 반제국주의 외치며 테러범이 되어 버린 딸 메리를 되찾으려,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이해라도 해보려 하는 스위드의 발버둥은 처절했다. 주커먼은 그걸 스위드가 죽도록 못 알아차리고는, 스위드에게 실망했던 걸 좀 만회해보려고 했는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아마도 책의 중후반부는 그렇게 주커먼이 픽션으로 그려낸 서사인 듯하다. 왜 짐작만 하냐면 아직 2권을 안 읽었기 때문에…

맵고 아려도 자꾸 찾아 먹게 되는 먹거리 처럼, 필립 로스의 소설은 이렇게 혀에 휘감기게 잘 읽히고, 읽는 중간중간 뒤통수나 어깨도 툭툭 퍽퍽 쳐준다. 어쩔 수 없음 앞에 왜, 왜? 왜 날 뷁? 하는 가련한 인간을 잠자리 다리 날개 머리 분해하듯 보여주는 걸 함께 지켜보며 인간, 너무 환멸을 느끼지도 미워하지도 말아야 겠네, 싶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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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나는 계속 그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이런 뻔한 것 이상의 뭔가를 보여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하나의 거죽이 사라지면 또다른 거죽이 올라올 뿐이었다. 이 사람은 존재 대신 무개성을 갖고 있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무개성이 광채를 발하는구나. 그는 자신을 위해 익명성을 고안했는데, 그 익명성이 그 자신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식사 도중에 몇 번이나, 그가 계속 이렇게 가족을 찬양하고 또 찬양한다면 나는 끝까지 가지 못할 것 같다는, 디저트까지 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마침내 이 사람이 익명의 존재가 아니라 미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가 이 사람 위에 올라타 정지를 명령한 것이다. 뭔가가 이 사람을 진부함의 표본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뭔가가 이 사람에게 경고를 한 것이다-너는 어떤 것도 거스르면 안 돼. (43-44, 어린 천재를 노년 이후 만나서 야 너 왜 이리 후져졌어, 하면 조금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하지만 아빠는 나를 미-미-미-미치게 만든다고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이런 분별력 있는 부모 노릇 때문에요! 나는 이해받고 싶지 않아요. 자-자-자-자유롭고 싶다고요!” “그럼 내가 너를 이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분별력 없는 부모인 게 더 좋겠니?” “더 좋죠! 더 좋을 거 같아요! 젠장, 어디 한번 그-그-그렇게 해보는 게 어때요. 젠장, 어디 한번 어떻게 되나 보게!”(171)

-그 일을 벌인 승려는 칠십대로, 바싹 말랐으며 머리는 빡빡 밀고, 샛노란 가사를 입고 있었다. 승려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책상다리를 한 채 남베트남 어느 도시의 텅 빈 거리에 우아하게 앉아 있었고, 그의 앞에는 그 사건을 보려는 승려 한 무리가 마치 종교 제의를 치르러 나온 양 앉아 있었다. 늙은 승려는 커다란 플라스틱 통을 들어 가솔린인지 등유인지를 자기 몸 위에 쏟았다. 주위의 아스팔트도 흠뻑 젖었다. 그는 바로 성냥불을 켰다. 그와 동시에 거친 불길이 후광처럼 그에게서 넘실거렸다. (235, 이 이미지는 1992년 발매된 랩메탈 밴드 RATM의 앨범 아트에 사용된다.)
Rage Against The Machine-Killing In The Name
https://youtu.be/bWXazVhlyxQ

-“사-사-사람들이 저-정신을 차리게 하려면 불속에서 스스로 노-노-녹아야 하나요? 저러면 누가 관심을 가질까요? 양심이 있는 사람이 있나요? 이 세-세상 누구한테 양심이 남아 있을까요?” ‘양심‘이라는 말이 입에 오를 때마다 아이는 울기 시작했다. (237)

-건물이 있어도 외롭고, 건물이 없어도 외롭단다. 외로움에 대해서는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어. 역사상 어떤 폭파 운동도 거기에는 흠 하나 내지 못했지. 인간이 만든 폭약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도 그것을 건드리지는 못한단다. 내 멍청한 아이야, 공산주의에 경외감을 품지 말고, 보통의, 일상적인 외로움에 경외감을 품어라. 노동절이 오면 밖으로 나가 네 친구들과 함께 외로움의 더 큰 영광을 향해, 슈퍼파워 가운데서도 슈퍼파워를 향해,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을 향해 행진해라. 거기에 돈을 놓고, 내기를 하고, 그것을 숭배해라. 말을 더듬는 아이, 분노에 찬 아이, 멍청한 아이야, 카를 마르크스에게, 호찌민과 마오쩌둥에게 복종하여 고개를 숙이지 말고, 위대한 신 외로움에게 고개를 숙여라!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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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나무 도감 (양장) - 우리 땅에서 뿌리 박고 사는 나무 이야기 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4
이제호.손경희 그림, 임경빈 감수 / 보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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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4 보리 출판사.

나무노래-백창우 곡
https://youtu.be/NhJUyjz846I

공룡이나 자동차 이름 같은 건 괜찮지만, 나무와 꽃과 새의 이름은 잘 모르면 왠지 부끄럽다. 그냥 나무, 꽃, 새, 하고 퉁쳐버리기엔 다 다르고 다르게 예쁜 것들이다. 잘 알고 싶고 제대로 이름 부르고 싶다.

책꽂이는 그런 바람의 목록이다. 도감류를 제법 사 놨고, 특히 나무도감, 나무사전, 2천년 식물 탐구의 역사, 꽃도감 이런 걸 쟁여만 놓고 오래 안 봤다. 그런데 반려동물 키우기를 안 좋아하듯 반려식물 키우는 식집사 노릇은 싫다. 김금희의 책 중 유일하게 에세이 ‘식물적 낙관’을 읽다 중도하차했다. 프로개의 드루이드 어쩌구도 궁금해 하다가 키우는 이야기는 사진 구경만, 하고 책은 단념했다. 손이 가는 건 싫은데 알아서 크는 건 누리려는 게으른 욕심쟁이다.

개중 그나마 얇고 사 둔지 가장 오래된 ‘나무도감’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욱 훑기로 했다. 나무 이름만 봐도 정겹다. 세밀화로 그려둔 그림일 뿐인데 오히려 그림이라서 개별 나무의 특징을 골똘히 들여다볼 기회가 되었다.
도감 한 권 봐도 당장 공원에 심긴 나무 명찰로 만나는 이름 모두를 담지 못하고, 그림으로 배운 나무를 한길가나 숲길에서 모르는 체 지나칠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나중에 ‘나무사전’ 같은 책으로 복습하면 이름 댈 나무가 몇 종 더 늘기를 기대한다.

시고르자브종 출신이라 책에서 마주한 고욤, 으름, 칡, 산딸기 같은 걸 나 저거 먹어봤어, 할 수 있는 건 어디 쓸데 없는 메리트지만, 밤과 도토리를 주우며 도파민 반짝이던 날들은(누구는 삐라를 주우며 그랬다지만) 동전으로 뽑기 캡슐 뽑는 가챠 못지 않게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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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휴면하는 겨울눈은 어떻게 매서운 추위에 얼지 않고 봄에 새싹이 돋아날까. 그것은 날씨가 추워지면 겨울눈의 세포 속에 있는 물이 밖으로 빠져 나오기 때문이다. 만약 온도가 섭씨 0도 이하일 때 세포 속에 물이 들어 있으면 그것이 세포 속에서 얼게 된다. 그러면 물보다 얼음의 부피가 크기 때문에 세포가 눌려 죽게 된다. 이렇게 물이 빠져 나오는 현상은 겨울눈뿐만 아니라 줄기나 가지에서도 일어난다.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면 나무의 세포들은 물을 밖으로 내보내고 물에 녹는 당분도 많이 만들어 놓는다. 그러면 세포 속에서 물이 얼지 않는다. 봄이 되어 날씨가 따뜻해지면 물이 세포 속으로 다시 들어가서 새싹이 돋아난다. (28-30)

-보리수를 손에 가득 따서 한꺼번에 입 안에 털어 넣고 입이 터지도록 씹으면 더욱 맛이 좋다. 그러나 한꺼번에 너무 많이 따 먹으면 똥이 잘 안 나온다. 씨앗이 소화되지 않고 똥구멍을 막기 때문이다. (168, ‘보리수나무’ 설명 중. 나무도감의 설명이 적절한 듯 엉뚱한 게 많아서 가끔 재미있었다.)

-플라타너스는 길가에 많이 심는다. 나무 껍질이 살갗에 버즘이 핀 것처럼 얼룩덜룩 벗겨지기 때문에 버즘나무라고도 한다. 열매가 방울처럼 생겼다고 방울나무라고도 한다. 플라타너스는 열매가 하나만 달리는 것도 있고 서너 개가 달리는 것도 있다. (282, 공원의 나무를 보고 이건 플라타너스? 하고 명찰을 보니 양버즘나무라고 써 있어서 어, 했다. 한 나무 다른 이름)

-잎에는 생김새가 많이 변해서 잎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 장미의 줄기에 붙는 가시는 잎이 변한 것이다. 아까시나무 줄기에 붙는 가시는 턱잎이 변한 것이다. 담쟁이덩굴 잎은 빨판으로 변해서 벽이나 바위에 찰싹 붙는다. 머루는 잎이 덩굴손으로 변하여 다른 물체를 감는다. (308, 오, 트랜스포머 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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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홀릭 2026-01-24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ttps://youtu.be/OBaN4do78LM?si=CYepPCNtiQ-brQWG

전 아이들과 국악방송의 이 노래로 흥얼거렸더랬는데 백창우님의 간략버전이네요
엄청 많네요
제 문제는 막상 실제로 보면 구분이 안간다는거 ㅋ

반유행열반인 2026-01-24 16:05   좋아요 1 | URL
뱃속아기와 나누고 싶은 음악태담 이란 도서와 시디에서 알게 된 노래여요. 백창우 선생의 동요들이 흔하지 않고 독특해서 거의 15년 전에 아기랑 들었었네요 ㅎㅎ 나무 구분 정말 쉽지 않아요 ㅠㅠ막 다 바늘잎 같은데 뭔 두 개 뭔 다섯 개 뭔 한 개 이렇게 구별이 세세하게 되더라고요

Falstaff 2026-01-24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도 그렇더구먼요. 나무, 나물, 풀, 꽃, 새 이름 모르면 은근히 쪽팔리는 거. 쑥부쟁이하고 구절초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데 말입죠.

반유행열반인 2026-01-24 17:11   좋아요 1 | URL
아악 그거 제가 제일 어려워하는 구분이에요. 데이지 계란꽃 죄다 하얗고 노래서 ㅎㅎㅎ
 
햇빛의 과학 -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빚어내는 빛의 비밀
린다 게디스 지음, 이한음 옮김 / 해리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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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3 린다 게디스.

간밤에는 잠을 설쳤다. 새벽 세시쯤 깼다 자고, 또 대여섯시 사이에 깨서 알람이 울리는 일곱시 반까지 잠들지 못했다. 출근하는 평소에는 열시반 께 잠들어서 여섯시 사십분 쯤 일어난다. 이십오분 정도 걸어서 출퇴근할 수 있는 거리이다. 출퇴근시간 지하철에 낑겨 다닐 일이 있으면 걸어서 직장에 간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느낀다.
수면의 질을 위해 암막커튼을 쳐서 꼼꼼히 빛을 막고, 혹시 몰라 수면안대도 사 놨고(여행을 가거나 집이 아닌 곳에서 잘 일이 드물어 사용은 못해봤다), 층간소음과 코골이 소리 같은 걸 막으려고 매일밤 귀마개를 하고 잔다. 그래도 수면 상태가 안 좋아졌던 게 일 년 전 쯤이다. 복직을 앞두고 불안하고 막막해서 잠도 잘 못 들고 자다가도 자꾸 깨서는 닥치지도 않은 일을 걱정했다. 의사 선생님은 불안을 가라앉히는 약, 우울을 다스리는 약, 잠드는 걸 돕는 약, 도파민과 세로토닌 균형을 맞춰주는 약을 처방해주셨다. 약물은 비교적 잘 맞았고, 매일 아침과 오후 해를 보며(출근은 동쪽, 퇴근은 서쪽 정방향으로 걷는다 여름엔 선글라스 필수) 걷고, 적당한 운동을 하고, 먹는 것도 적당히 먹고, 주중에는 카페인 안 마셨더니, 일 년을 그럭저럭 잘 보냈다. 그렇지만 뭐 지난밤처럼 가끔 수면이 틀어지는 날이 오기도 한다. 그 전날 너무 피곤하고 두통이 와서 좀 많이 일찍 잤는데 그게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겠다.

수면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하는 건, 이번에 읽은 책이 태양빛과 인체, 특히 하루 주기나 수면에 햇빛이 미치는 영향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제목이 ‘햇빛의 과학’이어서 태양에 관해 두루 다루는 교양서일 줄 알았는데, 굳이 내용에 맞추자면 ‘햇빛과 인체’, ‘햇빛과 건강’, ‘햇빛과 몸의 시간’ 뭐 이런 게 더 적합한 제목이지 싶었다. 큰아이를 처음 낳아 키울 때는 새벽까지 아이가 못 자고 자꾸 불을 다시 켜달라고 하면서 울면 하얀빛 스탠드를 켜고 책을 읽어주고 했는데, ‘느림보 수면교육’이라는 책을 읽고 조명이 수면에 미치는 영향을 뒤늦게 알았다. 그래서 작은어린이를 낳기 전후로는 저녁 8시가 되면 집안 모든 조명을 전구색 주황불로 바꿔 켜고, 책을 읽으며 밤시간을 보내는 안방은 주황색 스텝 디밍 전구로 시간마다 불빛을 한 단계씩 낮추다가 잘 시간이 되면 불을 끄고 암막 커튼을 친다. 그 덕분인지, 성향이 달라서 그런지, 작은어린이는 아기 때부터 비교적 잘 잠들었다. 어제도 자자, 하니까 읽던 책과 독서용 테이블을 착착 정리하고, 이불을 원하는 모양으로 꼭꼭 접어 잘 자리를 만들고, 불을 끈 뒤 누워서 (늘 하던 버릇으로) 껌껌해, 껌껌해, 중얼중얼하다가 하품을 후와아-하고는 곧 잠이 들었다. 먼저 누웠던 나도 곧 잠들었다.

정남쪽을 바라보는 15층 높이에 살게 된 지 이제 6년째다. 반지하에서 저층을 거쳐 발코니에서 볕을 쬐고 관악산 위로 비행기 날아가는 걸 건물 사이로나마 볼 수 있게 된 건 운이 좋았다. 햇빛은 기분에도, 수면에도, 비타민 디 합성과 뼈 건강에도 영향을 준다. 책의 내용은 아주 새롭진 않았지만 한 번 더 햇빛과 건강의 연관성을 되새겨볼 만은 했다. 모든 주거가 볕이 잘 들지는 않는다. 모든 이가 볕을 쬘 여유가 있는 일터나 삶터에 살지는 않는다. 요즈음처럼 체감 영하 십도 언저리인 날 잠시라도 산책을 나가라고 하기에는 코가 얼어 붙을 것 같다. (그렇지만 오늘도 난 9천 걸음 걸어서 얼어붙은 공원 연못을 보고 왔다.) 또 어떤 일들은 더운 여름에도 지나친 볕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부족한 것도 과한 것도 다 못 할 일인데,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만큼 원하는 만큼 빛을 쬐며 살면 좋겠다. 휴가인데도 어린이 덕에 방과후학교 데려다주고 데려오며 바깥 공기 쐬고, 바깥 볕 쬐는 걸 감사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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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거의 없는 조부모 가설이라고 부르죠.“ 과거에 연구자들은 사람이 생식 가능 연력이 지나고 나서도 꽤 오래 더 사는 이유가 조부모가 양육을 거들면서 집단의 생존에 이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여기에 이점을 하나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조부모는 망까지 봐 준다고. (60, 늙은 부모의 쓸모.)

-처음에는 겨울이라서 바깥이 춥고 괴로울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지만, 한 스웨덴 친구가 늘 하던 말이 떠올랐다. “나쁜 날씨 같은 건 없어. 옷을 제대로 안 입은 게 문제지.” 그리고 곧 나는 야외가 겉보기만큼 나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바깥으로 더 나갈수록, 겨울에 외출하는 것을 점점 더 귀찮은 일이 아니라 큰 기쁨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90, 그래도 저자가 영국인인 걸 잊지 말자. 마음은 햇볕 가득한 바깥을 거닐고 있지만, 이 부분 읽는 현재 오후 3시 기온 -4.3도, 체감 -8.3도라고 하니 나야 실내에서 꾸벅꾸벅 졸더라도 한파에는 참자. 언제부턴가 집순이에서 역마살로 제대로 바뀐 내 인생)

-때로는 점점 커지는 빛이 치명적일 수도 있다. 자살률이 혹독한 한겨울에, 특히 고위도 지역에서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날에 가장 높을 것이라고 가정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살 고민 상담을 요청하는 전화가 크리스마스 무렵에 가장 많아지긴 하지만, 자살, 특히 목을 매거나 총으로 쏘거나 뛰어내리는 식의 과격한 자살은 북반구에서는 5월과 6월, 남반구에서는 11월에 가장 많이 일어난다. 이 계절적 양상은 핀란드에서 일본, 호주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에서 많은 연구를 통해 드러났다. 일반적으로, 위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자살률이 높으며, 자살률의 계절별 차이도 더 크다.
(…) 항우울제도 투약을 시작할 때 처음 몇 주 동안은 자살 위험에 더 증가한다. 보통 투약 후 기분이 좋아지는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3-4주가 걸린다. 그사이에 일부 사람들은 신체적으로 더 활발해지고 흥분한 상태가 되고, 그 결과 자살이나 다른 어떤 공격적인 생각을 실행할 가능성이 더 커지는 듯하다.
또 쨍쨍한 긴 여름날은 심리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에게 흥분, 줄달음치는 생각, 황홀경이 특징인 조증을 촉발할 수 있으며, 짜증, 분노, 편집증, 망상도 자극할 수 있다. (202-203, 이부분 읽은 날은 체감 영하 16도의 정말 추운 날이어서, 이 겨울의 제일 강한 추위는 왠지 생의 의지를 더 불태우고 어우 얼어죽겠네, 얼른 따뜻한 곳으로- 하게 만드는 것 같다.)

-우리의 생물학은 태양에 연동되지만, 사회가 시간을 준수하기 위해 쓰는 시계는 정치적 및 역사적 요인들이 뒤얽혀서 만들어 낸 그물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261)

-크로노타입-매일 정상적으로 일어나고 잠자는 시간(261, 이 말 한참 쓰다가 여기에서야 부연 설명 붙는 게 이상했다. 미리 주를 달아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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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6-01-23 2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배꼽시계만큼이나 햇빛시계가 특히 나같은 노인에겐 정말 필요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6-01-24 09:53   좋아요 0 | URL
어르신들은 정말 일찍 일어나시더라구요. 나이에 따라 시계도 달라진다고 책에 나왔어요.
 
퀴어 펭귄클래식 59
윌리엄 S.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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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260122 윌리엄 버로스.


간밤에 꿈을 꾸었다. 연보라-연두 배색의 새 나이키 운동화 한 짝이 다리가 달린 듯 움직여 다가왔다. 신발을 등에 진 커다란 바퀴벌레였다. 징그러워서 신발로 바퀴를 때려 죽이니 주황색 진액 같은 게 나왔고, 이걸 행궈내면 이제 이 신은 내 거다, 한 짝 뿐이지만, 조금 기뻤다. 그런데 그렇게 커다란 바퀴가 하나둘 더 눈에 띄기 시작했다. 한 마리 정도 더 잡았는데 이걸 다 잡으려니 당황스러웠다.
이런 꿈을 AI에게 읊어주고 해몽해보랬다. 바퀴벌레들은 내 산재한 불안, 신발은 그걸 제거/해결하면 얻을 성취, 더 늘어나는 바퀴들은 그러나 끝나지 않을 다른 문제들, 어쩌구 풀이를 해 주었다. 그래, 나같은 걱정형 인간은 아마 평생 박멸하지 못할 바퀴들에 둘러싸여 덜덜 떨며, 내 눈 앞에 가능한 안 나타나길 바라며, 나타나면 또 한숨 쉬고 때려잡으며 계속 살 지 모르겠다.

버로스의 책을 세 권쯤 모았는데 그 중 제일 짧은 ‘퀴어’를 먼저 읽었다. 조금 나이들고 외로운 남자 리가 나와서 마음을 사고 싶지만 몸만 잠시 기댈 수 있는 앨러턴에게 사랑 받지 못해 꺼이꺼이 거리는 이야기였다. 그런 사이에도 둘은 중남미 이곳저곳을 함께 헤매며 야헤라는 텔레파시 쓸 수 있는 이상한 약초를 찾으러 다닌다. 그 여행 자체가 그냥 이상한 꿈 같았다. 술 마시고 약 먹고 남자 꼬시고 헛소리를 중얼대고 그러다가 3인칭이던 소설이 1인칭으로 바뀌고 앨러턴은 가버렸네 영영, 이러고 끝난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를 아직 1권 밖에 읽지 못했는데 ‘퀴어’는 그 책이랑 묘하게 느낌이 비슷했다. 그리고 그 책보다 미덕인 건 분량이 짧다는 것이었다. 재미대가리 없이 지루한 여행길을 길게도 써 놓은 ‘길 위에서’에 열광하던 세대가 있다는 것, 그 세대는 이제 꼬부랑 할배 할매가 되었겠고, ‘퀴어’의 멕시코보다는 루시아 벌린의 멕시코가 조금 더 와 닿았다. 왜냐하면 여긴 술집이랑 식당만 나오고 지저분한 아저씨들끼리 안부나 플러팅만 오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툴고 뭔 화장실 변기 물탱크 위에 놓인 누가 읽다가 찢고 코딱지 묻혀 놓고 담배냄새도 밴 것 같은 잡지를 주워 읽는 거마냥 소설이 쿰쿰하고 심지어 재미도 없었다. 책 뒷표지에 펭퀸클래식 슬로건인지 The best books ever written이라고 써 있는데 동의할 수가 없었다. 더 모스트 보링 북 에버. 뿡뿡.

아직 퀴어가 정체성이나 정치적 색깔을 입기 전의 말인 건지 그냥 프릭이나 동급으로 대충 휘갈겨 써 놨네 싶었다. 사랑이 고픈 애늙은이 찌질이를 보는 건 안타깝기도 하지만 예쁘지도 공감가지도 밉지도 않고 그냥 구질구질해서 시간이 아까웠다. 그런데도 뭐 하나라도 건질까 기대하고 끝까지 읽은 나는 꿈 속 바퀴벌레가 가져온 새 운동화 한 짝, 쓸모도 없는 걸 기대하고 있었구나… AI가 그려준 터진 바퀴벌레의 주황 육즙은 마치 아기바퀴들이 잠들어 있는 알 같이 탱글하고 징그러웠다. 거기 비하면 책이 덜 징그러워서 조금 실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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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게 막는 어리석고 평범하며 불만투성이인 사람들에게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를 느꼈다. 리는 혼잣말을 했다. “언젠가 내가 바라는 대로 할 테야. 나에게 조금이라도 격하게 반대하는 도덕적인 개자식이 있으면, 그놈 시체를 강에서 건지게 될 거야.”(122, 애기 같은 놈이다)

-리는 옷을 벗었다. 앨러턴 옆에 누웠다. 그리고 아기 말투로 말했다. “우디 두디 가치 아주 엄청나게 마구 엉망으로 놀면 디게 쪼치 않을까?” 그리고 덧붙였다. “내가 너무 끔찍하게 굴고 있나?”
“정말 그래요.” (125, 방금 애기 같은 놈이랬더니 바로 반응해주는 애놈의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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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1-23 1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버로스 책 저도 3권 모았다가 저하고 맞지 않아 전부 처분했더랬습니다..ㅎㅎ

반유행열반인 2026-01-23 15:03   좋아요 0 | URL
앗 저도 왠지 그런 느낌적 느낌이라 이걸 매몰비용 처리할지 미련하게 꾸역꾸역 읽게 될지 판단이 안 서고 있습니다...ㅎㅎㅎ
 
인버스 - 욕망의 세계
단요 지음 / 마카롱 / 2022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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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0 단요.

책을 펴자 담배 냄새가 훅 풍겼다. 찝찝하고 더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아직 잘 몰라도 대충 돈과 투기에 대한 책같으니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고책을 사서 뭔 향수 뿌렸나? 한 적은 있어도 이런 독서간접흡연은 또 처음이다.

2021년 6월, 금융 투자라는 걸 처음 시작하면서 분산투자랍시고 이거저거 푼푼이 다 사 모았다. 그때 석유에도 투자하고 싶은데, 진짜 선물은 어렵고 무서우니까 삼성WTI원유파생1(Ce)이라는 펀드에 가입했다. 고위험 상품이라서 이걸 사려면 주식을 몇 년 한 것처럼 거짓말 쳐서 투자 성향을 맞춰야 했다. 한 달 동안 총 400만원을 사 모았다. 그러고나서 무슨 전쟁이 터지고 수익률이 저게 맞냐 싶게(+80퍼센트) 올라가는 걸 관망했다. 그때 난 수험생활 중이라 막 적극적으로 뭘 어쩌지 못했...다고는 해도 사실 다른 종목들 뒤지게 사고팔고 많이 했다. 주식해서 공부 못했네. 하여간에 석유 펀드는 네 번에 걸쳐 100만원 언저리씩 분할 매도를 했고, 2024년에 마지막 판매까지 총83만원 정도 수익이 났다. AI에게 연수익률로 따져보라니 7.7퍼센트라고, 은행보다는 나았겠다. 아무리 중간에 얼마까지 올라도 제대로 팔 줄 모르면(늘 매도 시점이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다) 팔자 고치긴 틀린 것이다… 욕심 안 낸 건 잘했지만 사실상 투자라기 보단 방치하다 정리한 수준이다.

투자랍시고 4년 정도 주식이니 ETF니 채권이니 사고 팔고 하다보니 깨달은 점이 있다. 나처럼 수익 못 내는 사람은 그냥 노동력 팔아 임금 받는 게 제일 수익률 높은 벌이란 것이다. 그러느라 몸이랑 마음 갉아 먹는 게 돈으로 못 따져서 그렇지. 그렇다고 투자는 안 갉아 먹냐. 하여간에 돈 자체가 못된 건 아니지만 못됐다. 자본주의 못됐어. 그만 갉아 먹어. 난 부자가 못 됐어.

소설 속 화자는 00인버스 2X WTI원유 선물 ETN이라는 데 투자했다. ‘즉, 기초 자산인 <WTI원유 선물>의 시세가 1퍼센트 내려가면 이 종목은 2퍼센트가 올랐다.’(66) 그렇다고 한다. 나랑 정반대 방향에 투자를 한 셈이다. 나보고 망해라 망해라 했겠군. 시기는 좀 다르다만.

제목만 보고 인생 막장 나락가는 서사를 지레짐작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투자에 대해서 뭐라고뭐라고 막 하는 데 저런 거 하나도 모르는 내가 금융 계좌를 갖고 있는게 애초에 맞나 싶지만, 뭐 안 날려먹으면 그냥 잘한 거래잖아… 소설 속 세계는 악인이랄 것도 없고(정운채가 악인이길 내심 바랐건만 흥) 다들 적당히 평범한데 또 우연과 운은 평범하지 않았다(누가 뭘 믿고 일억을 빌려주니). 화자가 그나마 섬세하고 민감하면서도 자포자기와 절박함이 막 뒤섞여 있어서 입체적이었다. 숫자가 오르락내리락 할 때의 심리 묘사나 토론방 반응을 대조하는 게 읽는 재미가 있었고, 이야기든 문장이든 주인공의 결말을 계속 궁금하게 만드는 힘도 있었다.

5억 남짓 되는 돈을 만든 게 별 거 아닌 듯 보여도, 그걸 몇 달, 몇 주 만에 만들어 낸 건 마술 같은 일이다. 반대로 그렇게 5억 남짓 되는 돈을 잃는 것도 몇 분 몇 초만에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5억 가지고는 딱히 인생을 극적으로 바꾸지 못한다. 그러니까 욕심부리지 말아야지. 내가 5억 남짓의 현금을 모으려면 앞으로도 몇 년이 더 걸릴 것이다. 소설 속 화자가 부모 집에 얹혀 살면서 학교도 때려치우고 다른 걸릴 것 없이 인생 모 아니면 도에 건 것처럼 나는 살 수가 없다. 나 자신을 비롯해 부양하고 돌봐야 할 것들이 많으니까. 그래도 꿈은 꾼다. 수단이 무엇이든 10억이 모이면 나는 더 이상 내가 하고 싶지 않은 방식의 노동은 안 할 것이다. 가끔 일용직 노동이나 규칙적이고 안정적이지 않은 적은 수입을 주는 노동을 하다 말다 할 것이라고… 웃기는 소리다. 퍽이나 그러겠다.

담배 냄새는 내 코가 익숙해진 건지, 이전 독자가 책 앞부분을 읽을 때만 뻑뻑대다가 읽다 만 건지, 재미있어서 불붙이는 것도 잊고 산뜻하게 다 읽어내려간 건지, 중고책의 히스토리는 궁금해도 알 수가 없다. 그건 몰라도, 모를 뻔했던 어떤 마음, 자신의 욕망을 어린 나이에 밑바닥까지, 하늘 뚫을 때까지 들여다 본 사람을 간접적으로 또 들여다 보는 기회는 나쁘지 않았다. 난 저 나이에 뭐했더라… 과외 아르바이트하고 교생 나가고 임용고사 준비하고 있었다. 초수는 떨어졌지만… 만원 짜리 아이라이너 하나 사면서도 물욕 물욕! 하면서 자책하고 살았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욕망은 내 선택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런 건지도 잘 모르겠다. 상황과 맥락과 관계 자체가 그냥 여기에 머무르라고, 거기까지만 바라라고, 혹은 더 바라라고 붙들어 놓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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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언젠가 미국이 그런 것처럼 한국도 코로나19에 뒤덮일 거라고, 이들을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확진자 신세가 될 거라고 상상해 보았다. 그때가 되면 비난 여론은 존재하지도 않았떤 것처럼 사라질 것이다. 관람석의 무대로 자리를 옮긴 순간, 사람은 좋든 싫든 간에 남의 복잡성이 자신의 것과 동등함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확진자들은 칠칠맞게 돌아다닌 모든 사람의 죄를 미리 대속하는 셈이었다. 일찍 운이 나빴다는 이유만으로.
하지만 때가 오기 전까지는 비난이 이어질 테고, 분위기가 바뀌더라도 선뜻 사과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였다.(82, 내가 괴롭던 지점이었다. 내가 속한 자치구는 동선 공개를 열심히 하다가 지자체 공무원이 감염자가 되자 동선 공개를 일찌감치 중단했었다.)

-유가 폭락은 단순한 숫자놀음이 아니었고, 정말로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었다. 거대한 시소의 끄트머리에 선 느낌이었다. 한쪽에는 세계의 모든 고통이 모였고 반대편에는 그 고통을 발판 삼아 더 높이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101)

-단타 계약부터 청산하는 순간 세계를 뒤덮은 휘광의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려서 그 부스러기가 내 품으로 날아드는 심상이 번뜩였다. 나는 헐떡이듯 웃기 시작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속삭임도 섞여 들렸다.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면 안 돼. 안 되는 거야? 왜? 어차피 그 사람들이 벌어 가면 내가 잃을 텐데?(180)

-“일단 인버스는 절대 사지 마. 인버스든 레버리지든 간에, 원자재 ETN은 절대 건드리지 말고 테마주랑 급등주도 하지 말고 안 망할 회사 주식만 사서 모아. 적금 들듯이 조금씩. 반도체 장비 쪽도 좋고, 2차전지도 모멘텀이 크게 올 거고…” (222, 완전 자기가 한 거 반대로 말해주는 거 착한 건가)

-공장에서 사고가 나면 노동자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주가를 먼저 살피는 나쁨. 사람의 총체적인 가치가 소유한 아파트의 가격으로 환산될 수 있다고 믿는 나쁨. 모든 시장은 어떤 이유로든 다르게 나빴고 어떤 이유로든 똑같이 나빴다. (233, 선물쟁이 그것도 인버스만 줄창 타던 새끼가 갑자기 금융 시장의 윤리 쪽으로 눈을 돌리고 ‘뒤늦은 죄책감과 가닿을 곳 없는 후회’(232) 운운하는 게 좀 뜬금 없었다. 작품 시작부터 그런 조짐도 없었고 그냥 마비된 놈처럼 돈 따는 재미에만 반짝이던 애가 다 심드렁해지더니 훅 뭔 깨달음처럼 뻔한 소리를 했다.)

-나는 혹시 엄마를 내 욕망을 추동할 연료로, 최소한의 명분으로 삼아 왔던 건 아닌가. 아버지를 배신한 것처럼 언젠가는 엄마도 버려 버리는 것이 아닌가. 부정적으로 보고 싶지 않았지만, 과학 걱정이라고도 생각했지만 위기감이 엄습했다. (…)
“나는 지금까지 누군가가 인형 뽑기에서 경품을 뽑듯이 나를 주워 들어서 출구로 보내 줄 거라고 믿었어. 하지만 그 누군가가 너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네가 나한테 그 화면을 보여 준 다음에도 그럴 리가 없다고, 지금까지의 기대와 약속이 모두 그랬던 것처럼 금방 배신당할 거라고 중얼거렸지.” (250-251)

-돈은 사실 그 자체로 하나의 주제가 될 수 있지요. 프랑스 철학자인 자크 엘륄의 말을 빌리자면 돈은 객체이기 이전에 인격적인 힘이자 권세의 존재양식이며, 돈으로 말미암은 현상들은 외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 권세란 아마도 욕망과 매매의 힘일 것입니다. (254, 작가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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