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가능하다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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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1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미국을 가 본 적 없고 미국에 대해 1도 모르는 내가 일리노이를 들으면 먼저 떠오르는 건 영화 기생충 기우 기정 남매가 독도는 우리 땅 멜로디에 맞춰 ‘제시카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 과선배는 김진모 그는 니 사촌’ 하고 부르는 장면이다.
Anything is possible 오랜만에 직역한 제목을 보며 정말 그럴까? 하고 반문부터 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마치...일리노이 앰개시 판 전원일기 같은 느낌이었다. 연작소설이라 하기엔 조금 느슨한 연결점이긴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 입에 오르내리거나 회상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또다른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되어 다시 등장한다. 그렇게 이어지고 이어지는 사람들 사이의 연결망을 지켜보는 건 흥미로웠고, 종이 한 장 펴고 인물 관계도 같은 걸 그려 보고 싶은 마음을 자꾸만 불러일으켰다. (참고 안 하기로 했다.) 마을에서 안 좋은 취급을 받던 바턴씨 일가와 작가가 된 루시 바턴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마침내 바턴네 세 아이가 모인 소설을 읽었을 때는 정말 슬펐다. 자랐지만, 살아남았지만 그들의 아픔은 너무 커 보였다.
선택할 수 없는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이들이 하필이면 가난한 데다 병들고 엉망진창으로 아이를 키우는 사람일지라도, 역시 선택한 건 아니지만 그저 남일 뿐이지만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안타깝게 여기고 작은 따뜻함이나마 나누어주는 이웃이 있다면 아이들은 그 부모보다는 조금이나마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것을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을 무시하고, 배척하고, 쓰레기 취급하고, 호의를 배반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인간은 한없이 못 되고 답 없는 존재 같지만, 아닌 사람들이 있는 덕에 세상은 지탱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마냥 남을 위해 살 자신도 없지만 가끔은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건 아주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소설 자체는 어려운 말은 하나도 없는데도 상황 파악이 쉽게 되지 않고 술술 읽히지도 않았다. 무얼 말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는 장면과 이야기가 더 많았다. 온기를 주는 부분이 가끔 있어서 그나마 참고 읽을 수 있었다.

-계시
토미의 헛간에 불이 났고, 토미는 그 날의 일을 오히려 하느님의 계시로 여기며 이후로도 나쁘지 않게 삶을 꾸려왔다. 혼자 지내는 바턴씨네 아들 피트에게 들렀다가 그의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어린 루시와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 아이 같은 피트에게 내민 토미의 손길은 다정해 보였다. 사람에 대한 연민을 가지는 일. 어려운 일을 누군가는 애써 해내고자 한다. 옆 사람 몸냄새를 참아가며,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을 견뎌가며 그렇게 한다. 뒤에 나올 소설에서 피트가 토미와 함께 무료급식 일을 돕는 이야기를 보며 그의 손길이 지속되고 있다는 걸 확인하니 좋았다.
-풍차
나이슬리 걸즈로 불리우며 마을의 손가락질을 받던 패티와 린다 자매. 패티는 자라서 마음을 다친 남편 세바스찬을 만났고, 다시 잃었다. 우울증약을 먹고 살이 쪘다. 학교에서 진로상담교사로 일한다. 루시 바턴의 조카이자 비키의 딸인 라일라에게 험한 말을 듣고 잠시 상처 받지만, 오히려 그 아이의 더 큰 상처를 깨닫고 아이의 잠재력을 일깨워주며 대학에 보내주겠다고 한다. 라일라의 눈물. 자기에게 누군가 잘 해주면 견딜 수 없다는 아이. 패티는 마음에 두고 있는 찰리의 곁에 다가 앉는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준다. 사랑스러운 패티, 조금 더 사랑 받아도 될 것 같은데 설정이 아직까지는 가혹하다. (나중에 뒤의 소설에서 그녀의 사랑이 다시 시작되는 듯한 소문을 듣긴 하지만…)
-금 간
린다는 부잣집 남자와 결혼했지만, 행복하지 않다. 유명 사진 작가 캐런의 호감을 사기 위해 캐런의 지인 이본이 행사 기간 동안 자신의 집에 머물도록 하지만 그녀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다. 뒤에 나온 민박집을 운영하는 도티와 많이 대조적이다. 린다의 남편 제이는 돈만 많은 대책 없는 미친놈이고 린다와의 사이도 소원하지만 린다는 그걸 직시하지 않으려고만 하는 것 같다. 부자들은 가난한 예술가의 예술을 수집하면서도 무시하고, 예술가들은 부자들의 소비에 의존하면서도 그들을 경멸한다. 유리로 된 투명한 집, 문 없이 개방된 공간, 그러나 그집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지 못하고 벽에 걸린 금간 접시처럼 갈라진 채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한다.
-엄지 치기 이론
베트남 참전 경험이 얼마나 찰리라는 남자의 마음을 부숴놓았는지 잘 와 닿지가 않았다. 사랑에 빠졌던 창녀 트레이시에게 만달러를 뜯기고 상처 받고, 도티의 민박에 머물며 고통과 결핍에 대해 생각한다. 남의 고통에 대한 소설을 가지고 이러면 안 되지만 그래도...읽기 힘들고 재미가 없었다. 남자 화자가 나오는 부분이 특히 그런지, 마지막 소설도 약간 비슷한 기분이었다.
-미시시피 메리
패티의 직장 동료인 앤젤리나는 패티와 비슷한 상처를 공유한다.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집을 떠난 일이다. 60이 넘어 얻은 새 사랑을 찾아 이탈리아로 떠난 엄마 메리는 이제 80대이다. 앤젤리나는 떠난 엄마에 대해서만 골몰해 있다가 남편이 그 사실을 지적하며 떠나버린다. 그런 엄마를 찾아간 앤젤리나가 메리와 보낸 날을 그렸다. 나이를 먹어도, 죽을 때까지도 사랑은 멈추지 않을 수 있겠지. 그래도 남겨진 사람들은 그걸 인정하기 힘든 일 같다.
-동생
바턴씨네가 살던 집에 홀로 남아 살고 있는 피트는 작가로 성공한 동생 루시가 자신을 보러 돌아온다는 말에 청소도 하고 이발도 한다. 또다른 여동생 비키도 오지만 루시가 자신들을 버리고 떠났다는 생각에 루시에게 모질게 대한다. 그들이 어린 날 입은 상처를 파헤치는 시간, 루시의 공황장애, 루시를 챙기는 언니 오빠, 그래도 남아 있는 형제애 같은 게 안타까운 소설이었다. 그 모진 부모들이 죽었어도 주위 사람들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지금 잘 살고 있어도 상처에서 벗어나는 일은 평생을 가도 힘든 일인지 모른다.
-도티의 민박집
루시가 사인회에서 만난 사촌 에이블과 그 동생 도티. 도티는 멀지 않은 곳에서 숙박업을 한다. 스몰씨와 그 부인 셸리가 손님으로 머물렀고, 셸리는 도티에게 자신이 상처 받는 경험을 말한다. 스몰씨의 친구 데이비드의 부인이었던 배우 애니가 자신이 신경써서 꾸민 자신의 집에 대해 모욕했다(는 소리를 데이비드로부터 전해 듣)고 창피했던 일이다. 도티가 그 이야기를 듣고 반응한 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스몰씨 부부는 자기들 방에서 도티를 모욕하는 험담을 했고 도티는 상처 받았다. 그래서 그들이 먹을 잼에 침을 뱉고 스몰씨에게는 대놓고 항의하는 말을 건넸다. 나름 작은 사이다 같은 장면이지만 그걸로 되었을까 싶었다. 도티는 조용한 위로를 건네고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인 찰리를 잊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도티가 기억하는 찰리와의 시간은 한결 따뜻했다. 앞의 소설에서 찰리가 그걸 제대로 알아챘는지는 모를 일이다. 아마 몰랐을 것 같다. 자기만의 슬픔에 너무 깊이 빠진 사람이라.
-눈의 빛에 눈멀다
바로 앞 소설 속 배우 애니의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엄함, 아버지의 치매 발병 후 뒤늦게 알게 된 비밀, 그런데도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는 듯한 애니의 마음. 눈 쌓인 숲을 함께 바라보던 기억.
-선물
도티의 오빠 에이블이 크리스마스 날 극장에서 겪는 이야기이다. 사실 깊이 공감이 가지도 이해가 가지도 않았다. 배우 링크와의 갑작스러운 조우로 에이블은 심장마비까지 겪는데, 그와중에도 링크와 마음이 통하고 좋은 시간을 보냈고 친구가 되었다고 여긴다.

+밑줄긋기
‘그리고 자책한다는 것, 음, 자책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한 일에 대해 미안해할 수 있다는 것—그것이 우리를 계속 인간이게 해주지.’
-토미가 피트에게 건넨 위로.

‘그녀는 이해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주된, 그리고 가장 큰 관심사는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시비만은 예외여서 그는 그녀에게 관심을 두었고, 그녀 또한 그에게 엄청난 관심을 쏟았다. 그것이 사람들을 바깥세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피부였다—자신의 인생을 공유하는 또다른 누군가의 사랑이.
-그런 사랑을, 피부를 잃은 패티의 마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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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욜로욜로 시리즈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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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9 박지리

박지리를 너무 늦게 알았다. 스스로 세상을 떠난, 상자 가득 원고를 담아 출판사에 보낸 글쓰기를 배운 적 없는 작가라는 아우라를 먼저 접했다. 책을 몇 권 모아두었지만 여태 읽지 않았다.
제목은 좀 후진데 자꾸 궁금하기도 한 이 책을 살까 말까 한참 망설이다 전자 도서관에 올라온 걸 보고 빌려 읽었다.
너무 늦게 읽었고, 지금이라도 읽어 다행이었다. 아직 한 권 밖에 안 봐서 남은 책들이 다행이고 더 새로운 이야기는 그 이상 나올 수 없어 안타깝다. 글을 쓰는게 뭐라고, 그 무게가 뭐라고 견디지 못했을까. 그에게는 단순히 뭐라고 정도가 아니었겠지.

희곡 형식의 이야기 전개가 책 초반부와 종반부에 섞여 있다. 그 부분은 정말 배우의 독백과 방백과 연기를 보는 기분이다. 중간의 전개는 연수원에 들어간 M의 의식과 심리와 인식을 시간대를 명시하며 잘 보여주고 있다. 술술 읽힌다. 고대 비극이나 셰익스피어 희곡 같은 느낌, 그런 걸 이런 식으로 응용하는 게 신기하다.
사실 1인칭으로 내면까지 보여주는 방법은 과연 주인공이 제대로 된 인식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완전 미친 놈인 건지, 또다른 음모가 있는 건지 판단을 어렵게 만든다. 읽으면서도 오락가락한다. 이건 왠지 노렸을 것 같다. 요즘 같으면 얻어 쳐맞을 남자가, 여자가, 하는 성고정관념도 아예 노골적으로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이것도 일부러 그런 것 같다. 손가락 말고 달을 봐야 한다.
문장도 전개도 탄탄했고 전달하려는 상황을 읽는 이가 파악하는데 어려움 없게 서술하고 있다. 생전에 박지리의 소설은 청소년 권장 도서로 인기를 끌었었다. 읽기 쉬운 것이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읽기의 쉬움이 결코 생각이나 감상의 쉬움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 때 그 청소년 권장 목록의 책은 아직 읽지 않아 정확히 모르지만 이번 책은 그랬다. 48번인지 49번인지 50번인지 면접을 보며 면접형 인간이 되어 버린, 평가와 경쟁을 삶의 방식으로 선택해버리고 현실 인식이 왜곡되고 그러다 뒤늦게 진실을 알아채며 무너져버리는 M의 모습은 실존주의 소설 속 인물 부조리극의 주연 배우 그 자체였다. 거리감을 두고 보다가도 나는 안 저런가 하고 이입하고 슬퍼지기도 하는, 줌인아웃을 반복하게 했다.
그런 주인공의 입을 빌어 그의 관찰대로 주변 인물을 묘사하는데, 신기하게도 주인공의 편견 한 겹 씌워진 뒤로 그 인물들의 다른 모습도 같이 보였다.

그래서 제목만 보고 망설이는 독자에게는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저 내 취향일수도 있지만, 새로운 경험이었고 나보다 어린 작가를 훨씬 오래 전에 잃어버린게 너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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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버리기 연습 - 한국어판 100만 부 돌파 기념 특별판 생각 버리기 연습 1
코이케 류노스케 지음, 유윤한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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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7 코이케 류노스케

책꽂이는 욕망의 목록같다. 앞뒤좌우 어디든 어느 방이든 빼곡한 책을 보면 내 욕심을 주렁주렁 달아 놓은 걸 보는 기분이다.
같은 저자의 화내지 않는 연습을 6년 전에 보았다. 이번 건강검진 결과 재미있던 게 나한테 화가 많다고 했다. 설문 몇 가지랑 자율 신경 반응 측정? 그런 검사가 그런 설명도 할 수 있나 보다.
이 책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궁금했지만 아주 나중에야중고로 천원 주고 샀다. 그리고 꽂아둔지 삼 년 만에 펼쳤다. 그런 제목이 끌리는 시점이었나보다. 내가 가진 책은 365쇄였다. 첫쇄 후 일 년도 안 되어 찍은 책. 그렇게나 생각을 버리고 싶은 사람이 많나보다. 저자는 생각병환자라고 일컫는다. 문득 궁금했다. 나보다 먼저 이 책에 밑줄 치고 책장을 접어가며 이 책을 보던 전 책주인은 생각을 제대로 버렸을까? 아님 그냥 이 책만 내게 버린 건가. ㅋㅋ
적절한 시점의 독서였다. 이 책에서 하지 말라는 온갖 짓은 내가 다 하며 살고 있었다. 이런 사람 가까이 하지 마라, 의 온갖 부정적 기운을 뿌리는 사람도 내가 아니라고 하기 어려웠다.
나는 내가 뭘 바라는 지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다. 그저 바라는 것을 바라기 위해, 그게 좋아서 그러고 있는지 모른다.
분노, 고통, 자책, 걱정, 이런 것 또한 중독성이 있고 뇌가 그런 부정적인 것을 쾌락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행복을 쥐는 것보다는 그런 게 더 쉽긴 하다. 자기 혼자 가학애와 피학애를 반복하고 있는 게 아닌가. 추하지 않은가.

근래 심각한 수면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어제도 네시가 안 되어 깨어나 여섯시까지 못 잤다. 한 시간 겨우 더 자고 다시 일어났다. 잠들지 못한 동안 생각은 메우다 못해 넘치고 터질 정도로 불어난다. 책에서 소개한 방법이 괜찮아 보였다. 떠오르는 생각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며 ‘-라고 생각하고 있구나’하고 결말 짓는 것. 감정의 객관적 관찰, 자아로부터 떼어 놓기. 내 전공에서는 메타인지나 반성적 사고라고 하는 것과 비슷했다. 나를 들여다보는 것은 무한루프 도는 생각의 폭동 상태를 멈추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결국 생각을 버린다는 건 무사고의 상태가 되는 게 아니라 생각을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비명상으로 소개된 방법도 시도해봐야겠다. ‘편안하길, 편안하길’ ‘내 괴로움, 고민, 고통이 사라지도록’ 결국 나를 달래기 위해 되풀이 되는 것도 말이다. 말에서 생기는 마음이 번뇌가 아닌, 가라앉히고 잠잠히 하는 힘이면 덜 불편할 것이다.

들끓는 마음은 독특한 음악과 기이한 그림, 신들린 연기, 생각이 많아지는 글을 만들어낸다. 그런 걸 아름답다고 느낀다. 잘못된 것들을 뒤집어 엎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종교는 정말이지 아편이고 마취제고 천천히 고여 썩어가게 만드는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내 마그마로 흐를 수는 없다. 결국 감정도 마음도 기화되어 날아가고 냉각되어 굳어지고 단단해지는 날이 온다. 그래야 산다. 개인에게는 그게 복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쉽게 미치고 죽어버린다. 그 사실이 슬프다. 그래서 아름다운 지도 모르겠다. 뱅뱅 돌고 돈다. 그런 고통이라도 수레 바퀴 위에서 안 내려올 거라고 단언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모르겠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내가 편해지길 바라는 내곁의 사람들을 보면 잠잠하고 행복한 내가 되는 게 맞는지도.

이 책에 나온대로 완벽하게 실행하며 살기란 어렵다. 모두가 구도자가 되고 열반에 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극단으로 치우쳐 있는 상황에서 균형을 되찾는데는 도움이 될 것 같다. 가만 보고 있자면 이 책에서 권하는 방법은 전부 지금의 나 자신을 오롯이 느끼며 나 자신을 살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자신 밖에 없다. 남이 나를 구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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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모험 - 인간과 나무가 걸어온 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정
맥스 애덤스 지음, 김희정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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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5 맥스 애덤스

나무에 관심이 있다. 정확히는 목재를 잘 알고 싶다. 나뭇결 무늬를 보고 슬쩍 만져만 봐도 이건 자작나무, 삼나무, 너도밤나무, 하고 말할 수 있다면. 다른 취미를 갖는다면 목공을 배워보고 싶다. 썰고 문지르고 끼워 맞추면서 죽은 나무의 섬유질을 느끼면 좋겠다. 죽은 나무가 더 좋다니, 네크로필리아냐.

저자는 고고학자이자 숲전문가이다. 거의 숲사람이다. 숲사랑, 나무 사랑, 목재 목공 사랑 성골 덕후. 숲에서 살다 나온 사연은 숲탓이 아니라 집 짓는 걸 허가 안 해주는 꽉 막힌 관료와 가진 것도 없는 그를 습격한 마약중독자 탓이라 안타깝다.
숲과 나무와 그 안에 사는 사람에 대한 아주 많은 것들을 다룬다. 저자는 단순히 감상하고 보호할 대상이 아닌 적절하게 이용하며 함께 사는 곳으로 만들어야 숲이 유지될 수 있다고 한다. 후진 책 보면 나무야 미안해, 하는데 오히려 책 한 권 더 사는게 숲 조성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흥미롭다.
소개된 나무 중 나를 닮은 나무가 뭘까 하다 산사나무가 마음에 들었다. 작고 흔해 무시 당하지만 빵과 치즈라 불릴 정도로 꽃과 잎은 나그네의 간식. 추위를 잘 견디는 강인함. 목재로는 쓸모 없고 땔감용인데 산울타리로 심어도 제격. 시든 꽃은 시체 냄새가 나서 죽음의 전조로 여겨짐. (근데 정액냄새랑도 비슷하다 함. 미친 취향이네.) ‘나이 든 스승처럼 퉁명스럽고 까칠한 성격 뒤에도 예상치 못한 장점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주는 나무라고 저자는 평가한다. 그래 난 산사나무 요정 콜. (이 책엔 안 나오지만 열매는 산사춘! 꺄울)

한 달 전에 보기 시작하다 초반에 포기하고 다시 빌렸다. 의무감으로 꾸역대며 읽기엔 사실 그보다 나은 대접 받을 좋은 책인데 안 읽히긴 했다. 빨리 읽고 다른 거 보려고 힘겹게 책장을 넘기는 이런 나라서 미안해. 고고학, 생물학, 역학, 재료공학 등등의 다양한 학문적 관점에서 나무를 다루는데, 그런 방대한 지식도 통찰도 놀랍다. 다만 도구 만들고 작동 원리 묘사하는 건 읽어도 하나도 모르겠다(그러면서 목공을 하겠다고 ㅉㅉ). 영국책이다보니 예시로 든 숲이나 나무의 주류도 영국에 맞춰져 있다. 우리나라 숲에 대한 책도 있나 찾아봤는데 썩 재미있어 보이진 않았다.
재미없는데 저자 혼자 신나서 상세히 설명, 묘사하는 걸 참다보면 아니 이런 표현을, 하고 예쁘게 쓴 부분이 제법 나왔다. 그런 걸 기대하며 계속 읽게 된 듯. 밑줄 치면서.
실용적인 내용이 많아서 숲이나 나무 활용에 대해 좀 아는 사람들은 맞아맞아, 하고 볼 것 같다. 그니까 좀 전문적이야.
나무 사진이나 목재에 대해 수시로 검색하며 읽었다. 그러다가 어떤 목공소 블로그를 들어가게 됐는데, 목재와 가구에 대한 정보가 아주 많았다. 게다가 필력이, 입담이...세상엔 글쓰기의 숨은 고수가 정말 많다. 감동 받아서 그 목공소에서 만든 우드슬랩 테이블을 사고 싶어졌지만...딱 봐도 내 월급보다 비싸보여. 못 사. 구경만 할게요. 또르르.
소로우의 월든이 몇 차례 언급, 인용되었다. 지금 내 뒷통수 가장 가까운 곳에 꽂혀 있지만 안 읽어보았다. 추천도 있었으니 멀지 않은 때 읽어봐야겠다.

+ 밑줄긋기
-원제 THE WISDOM OF TREES가 더 어울리게, 나무들로부터 어떤 지혜와 교훈을 아래 예시처럼풀어놓는다. 철학의 모험에 업혀가는 듯한 번역 제목 마음에 안 든다. 
‘수수하기 그지없는 자작나무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단순명료하다. 영광의 순간을 누리기 위해서는 다소 힘이 들지라도 기초를 다져야 하며, 작고 사소한 임무를 잘해내는 게 큰 무대에서 주목받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생활의 지혜. 낙엽 예쁘게 말리는 법
‘낙엽의 아름다운 색을 보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르기 전에 보습 크림을 발라주는 것이다. 아니면 글리세린에 담갔다 꺼내는 방법도 있다.’

-아래 같은 경제적 비유가 많다. 그편이 오히려 이해 잘 되는 차가운 도시 여자...
‘대부분의 침엽수는 비록 아주 느린 속도지만 겨울에도 이파리를 유지하면서 광합성을 계속한다. 각 바늘잎마다 적으나마 투자금이 들어가 있고, 나무는 이를 긴 세월에 걸쳐 환수한다. 이렇게 느린 속도로 햇빛을 수확하고 처리하는 것이 침엽수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경악스럽고 처절한 무화과말벌의 생식.(내 부인은 아직 안 태어났어...)이제부턴 무화과에서 애벌레 나와도 너무 미워하지 말아야겠다. 
‘무화과나무는 과실 안에 꽃을 피울 뿐 아니라, 600여 개에 이르는 종마다 각각 특별히 정해진 무화과말벌 종의 도움을 받아 수분 작용을 한다. 무화과말벌의 암컷은 총신처럼 생긴 터널을 통해 열매 안으로 들어가 알을 낳는데, 그 과정에서 무화과나무의 수분이 이뤄지지만 벌은 날개를 잃고 다시 살아서 나오지 못한다. 알에서는 수컷 벌이 먼저 태어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암컷 벌들과 짝짓기를 한다. 이제 수컷 벌들에게 남은 유일한 임무는 나중에 태어날 암컷 벌들이 과일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구멍을 내는 일뿐이다. 그렇게 바깥으로 탈출한 암컷 벌들은 다시 한 번 가학과 피학이 뒤섞인 이 괴상한 과정을 반복한다.’

-이런 숲에 대한 사랑 넘치면서 아름다움 보여주는 표현이 꽤 많아서 포기 못했다. 일일이 밑줄도 다 못 침. 
‘바람 많은 언덕 등성이에 홀로 서 있는 유럽소나무는 그 규모가 웅장하지는 않지만, 썰물과 밀물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세월의 덧없음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대대손손 여러 주인의 손을 거치면서 증축과 개축을 거듭한 수백 년 묵은 집처럼 말이다. 그런 나무를 만나면 존경심이 절로 솟구치고, 건축사적 연구 대상으로도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스코틀랜드 남부 황무지 한가운데에 에드윈 랜드시어(Edwin Landseer)의 작품 속 수사슴처럼 우뚝 서 있거나, 호수 위에 검푸른 그림자를 드리우며 줄에 묶인 사냥개처럼 웅크리고 있는 유럽소나무를 만나기라도 하면, 걸음을 멈추고 이 위엄 넘치는 소나무 족장과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급격한 장르 전환. 과학으로 시작해서 애정물로 마무리. 이런 거 왜 이리 좋지. 
‘흙 속 균근균과 공생 관계를 유지한다. 균근균은 초미세 섬유질 형태로 나무뿌리에 달라붙어 영양분이 적은 흙에서도 나무가 질소를 채집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균근균이 뿌리의 표면적을 늘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보답으로 나무뿌리는 균근균에 당분을 제공해서 양측이 모두 혜택을 입는다.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균근균의 초미세 섬유질이 군집한 나무들의 뿌리 체계를 서로 연결해준다는 사실이다. 나무들이 손을 맞잡을 수는 없지만 테이블 아래에서 발을 부비면서 애정 표현을 하고 있는 셈이다.’

-숯 굽기의 즐거움을 온갖 감각을 동원해 설명. 당장 깡통이랑 나무 챙겨서 숯 구우러 안 가면 안 될 거 같게 만듦...(현실은 켈록켈록케케켁 앗 뜨거 언제 끝나 이거)
‘뭔가를 생산하는 일 중에서도 숯을 굽는 일은 만족감과 미적 쾌감, 철학적 사색 면에서 으뜸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나뭇더미에 불이 제대로 붙기를 기다릴 때는 묘한 흥분감이 차오르고, 증기가 나뭇더미를 감쌀 때 풍기는 멋진 초콜릿 향은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베어놓은 나무를 쌓아 올리고 가마를 만들 때는 육체노동이 필요하다. 검푸른 연기가 너무 심하진 않은지, 뭔가가 타는 냄새가 나진 않은지 살피는 일은 무의식적으로 사색과 명상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가마를 열고 숯 굽기를 해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크리스마스 아침에 선물을 여는 기쁨마저 든다. 제대로 구워진 숯은 처음 무게의 5분의 1 정도이고, 손으로 꺾으면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를 내면서 쉽게 부러진다.’

-궁금한 책. 
‘러셀 호반(Russell Hoban)의 기발한 컬트 소설 『리들리 워커(Riddley Walker)』는 미래에 지구가 멸망한 후 다시 철기시대로 돌아간 켄트 지방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

-토지 같은 우리 소설에도 숯 굽는 이들은 수탈을 피하거나 사연 있어 산으로 도망친 듯 그려진다. 동네의 쑥고개란 지명이 숯가마 있던 곳이라던데 어떤 사연의 사람들이 살다갔을까 궁금하다. 
‘요즘 우리가 유랑민들에 대해 불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당시에도 숯 굽는 사람들에 대한 불신은 깊었다. 그들이 하는 일이 고대로부터 내려온 방식을 그대로 고수한다는 점에 더해,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어두운 숲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도 작용한 듯하다. 가마에서 나오는 연기가 공기를 오염시킨다는 이유로 도시로부터 일정 거리 이내에서는 가마에 불을 때지 못하게 하는 조례가 통과되기도 했다. 심지어 13세기에는 런던 시내에 숯 굽는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규칙도 생겼다.’

-사진 보니 예쁘긴 함. 
‘세계에서 가장 높고, 아마도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100퍼센트 목조 건물은 러시아 오네가(Onega)호 안에 있는 키시 포고스트(Kizhi Pogost)섬의 예수의 변모 교회당일 것이다. ‘

-우리도 사리탑, 부도 같은 비슷한 게 있...만지진 않잖아;
아일랜드의 초기 기독교 성인들은 집처럼 생긴 나무 사당에 매장되었다. 그곳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어, 신앙심 깊은 신도들은 구멍을 통해 성인들의 뼈를 만지며 치유받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아우 따뜻해. 고마워 나무야. 눈에서도 땀난다. 
‘나무는 우리를 세 번 따뜻하게 해준다. 나무를 벨 때, 나무를 쌓아 올릴 때, 그리고 나무를 태울 때. 이 사실에 숲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숲을 소비하고, 생산하고, 그걸 반복하는 게 숲을 구한다는 주장. 
‘나는 종이를 더 많이 소비하라고 권하고 싶다. 거기서 그치지 말고, 성냥을 사고, 참나무와 물푸레나무, 단풍나무로 만든 가구도 들이고, 유리가 이중으로 들어간 나무 창호를 달자. 나무를 때는 난로도 설치하자. 숲은 유용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종이와 성냥을 만들기 위해 조성된 숲에는 베어지는 나무보다 더 많은 나무가 새로 심어진다(그런 점에서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나무를 잘 돌본다). 숲이 돈이 되면 숲의 생존이 보장된다. 나무가 가진 경제적 가치를 보지 못하고 나무의 경제학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감상적으로만 나무를 대하고 숲을 갈아엎어 특용 작물을 기르거나 초원으로 바꾸려고 하는 순간, 숲의 운명은 끝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보며 펄프가 된 나무를 위해 눈물 흘리지 말자. 책 한 권을 더 사는 것이 숲을 구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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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10-15 2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되게 재미없으면서 재미있는 척 하려 용쓰는 식의 전형적인 제목인데 뜻밖에 진짜로 재미있어 보이는군요.....

그나저나 글쓰기 장인 목공 장인 좋겠다..... 제곱으로 부럽네요.

반유행열반인 2019-10-16 07:33   좋아요 0 | URL
그 중에 제일은 귀여움 장인이래요...세제곱으로 부러움

syo 2019-10-16 10:12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유전자 차원의 문제입니다.
부러워하시지 말고 얼른 DNA를 한번 뒤적거려 보세요. 나올 수도 있잖아요.

반유행열반인 2019-10-16 10:38   좋아요 0 | URL
얼른 합치고 합쳐 세대를 거듭해 이 유전자를 희석시키자, 하는 특성만 확인하였습니다. 귀여움은 다음 세대에게 맡길게요. 난 틀렸단다 후손들아...
 
역사의 쓸모 - 자유롭고 떳떳한 삶을 위한 22가지 통찰
최태성 지음 / 다산초당 / 201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20191012 최태성
큰별쌤은 나에게도 스승이시다. 몇 년 전 최태성 선생님 온라인 강의를 듣고 한국사시험 1급에 붙었다. 처음에는 별 목적 없이 시험공부를 시작했는데 선생님 수업은 어떤 긍지, 바른 삶을 일깨우고 감동을 주며 역사를 공부할 당위성을 내내 느끼게 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가르침 같다. 나는 자신 없고 확신 없는 부분이지만 배움과 가르침을 믿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지금 나는 완전 신을 부정하는 사제 꼴이다.
책 자체는 구어체 강의록 같은 서술이라 처음에는 오히려 잘 안 읽혔다. 새로울 게 없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역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라기 보다는 왜 역사를 알아야 할까?에 대한 긴 설득이다. 그 과정이 치열하고 다정하다. 큰 재미는 없지만 뒤로 갈수록 저자의 역사를 향한 애정과 열정이 느껴졌다.

역사와는 큰 관계가 없지만 종일 많은 생각을 했다. 내 선입견과 욕망이 만든 오해 오독 오류들이 많다. 바람을 인식인 양 착각해 많은 일들을 잘못 느끼고 잘못 받아들여 온 것 같다. 다 틀린 건 아니지만 많이 틀렸다. 개인의 역사를 돌아보고 그때 내가 틀렸어, 하고 이불킥할 일을 점차 줄이는 게 조금 더 나아질 방법 같다. 지금이라도 이런 생각을 하니 가망이 없진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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