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고화질세트] 지.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 (총8권/완결)
우오토 / 문학동네/DCW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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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0 우오토.

전자책으로 만화책을 잔뜩 산 건 아마 귀여운 달로 간 스누피 타이머를 받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타이머를 맞추면 노란 새 우드스탁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개와 새. 개새. 그리고 대머리 찰리 브라운.

이 책 저 책 보다 말다 하다가, 잘 안 읽힐 땐 역시 만화책, 하고 ‘지. 지구의 운동에 관하여’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것을 수능 지구과학 풀 때는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이심률이니, 원일점이니, 근일점이니, 문제를 풀었다. 이 만화책에서는 니들이 그렇게 당연하게 여기는 걸 사람들이 믿게 만드느라 얼마나 진득한 피가 흘렀는지 알아? 하면서 끝없는 이단 심판이 이어진다.
서사를 꿰뚫는 주인공이 하나가 끝까지 주욱 가는게 아니라(요즘 주말마다 조금씩 보는 ‘진격의 거인’에서는 엘렌 예거가 계속 나오지…) 책 한 권 끝날 무렵 다 죽어서 어...그럼 다음은 누구 이야기야...약간 옴니버스 느낌인데 또 돌상자에 숨겨둔 책들 매개로, 나중에는 책도 다 태우고 빡빡머리랑 사람이랑 활자랑 이것저것 다 거쳐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과정이다. 결말은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을 감질나게 끊길 듯, 잇고, 또 잇고, 이어달리기처럼 그려놨다. 후반부 가면 좀 그림도 작붕이고 연출도 와 이제 작가 지쳤냐...싶게 날라가는 느낌도 있지만 뭐. 오랜만에 시간 잘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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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25-06-21 0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타이머 너무 예뻐요. 이제 끝났으려나요

반유행열반인 2025-06-21 10:07   좋아요 0 | URL
아코 올해 1월의 굿즈였답니다 ㅠㅠ
 
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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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5 김금희.

같은 달에 같은 작가 소설을 두 권 읽게 된 건, 동료에게“나 이 소설가 소설 다 봤어요.” 하고 말한게 뭔가 거짓말 같이 되어 버려서였다. 거의, 라는 부사 하나만 붙였으면 교묘하게 빠져나갈 것을. 두 권 사 둔 거 안 본 걸 뒤늦게 떠올리며 이런 걸로 죄책감에 빠지는 나… 그렇다면 책임을 지는 나… 나는 소설 읽는 일이 즐겁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소설 말고 다른 책들을 기웃거리며 소설 읽기를 피하는 것 같다. 한 번 잡으면 너무 빠져버리는 게 괜히 쑥스러운가 보다.

내가 읽은 김금희 소설가의 소설 중 아마도 취재를 제일 많이 했겠지, 싶었고 작가의 말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다. 창덕궁, 창경궁을 찾았던 8년 전을 떠올렸다. 그때의 기억은 가물가물하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또 너무 많이 다르다. 땅에 떨어진 철쭉꽃을 집어 머리에 꽂고 사진 찍던 큰어린이보다 이제 한 살 더 많은 작은어린이가 그 사이 생겨났고, 이 작은어린이는 궁궐이란 데를 가 본 적이 없다. 청와대도 궁궐 비슷한 거라고 하면 뭐 거기는 얼마 전에 가봤지만. 여긴 정말 업무보던 곳이네, 싶은 창덕궁을 넘어, 산길따라 건너간 창경궁은 어떻게든 창경원 시절 모습을 벗고 일제 시대 이전의 궁궐 느낌을 내려고 애를 써서 조경해 놓은 것 같다는 인상 정도만 남았다. 기와 지붕 위의 어처구니 같은 것을 사진에 담아놓고 오래 잊었던 그 공간을 따라, 작가는 시대와 공간을 넘나들며 촘촘하고 두터운 이야기를 잘 짜 놓았다. 두께가 납득이 가고, 간만에 책장을 손바닥으로 지긋이 누르며 아...오랜만에 책 읽고 감동이란 걸 느낀다, 했다. 나는 소설가의 소설들을 생각보다 사랑하니까, 괜히 다른 장르 글 보고 깝치고 투덜대지 말아야 겠다. 집 한켠의 김금희 소설 코너에 간만에 재미있고 흠잡을 것 별로 없는 좋은 소설 읽었다, 하면서 꽂아 두었다. 친구에게 선물한 ’복자에게‘랑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은 부재중이지만 계속 안 읽으면 도로 빼앗아 와야겠다.

+밑줄 긋기
-까마귓과인 어치는 경계심이 많고 자기 영역에 대한 통제력도 강하다. 다른 새들을 자주 괴롭히는데 어미 소리를 내며 새끼를 유인해 잡아먹기도 하고 고양이 울음을 따라 해 작은 새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기도 한다. 혓바닥이 발달해서 앵무새처럼 다양한 소리를 흉내 낼 수 있었다. (127, 난 물까치가 더 예쁘지만 떼지어 다니는 그놈들보다 어치에 더 가까운 것 같긴 해...그보다는 대놓고 더 시끄러운 탐욕의 까마귀…사마귀...마귀...귀마개…1절만...)

-나는 제갈도희가 지켜봤다는 데 당황했다가 원래 곤줄박이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으니까 하고 이해했다. 그리고 제갈도희에게 곤줄박이 닮았다는 얘기를 해주자 그게 뭐든 새를 닮았다는 말 자체가 근사하다고 만족스러워했다. (146, 여기까지 사람 두 명을 새에 비유했는데 몇이나 더 그럴까 궁금해지는 지점이었다. 산에 다녀 본 적 있다면 새새끼한테 관심이 많아진다.)

-“뭐라고?”
나는 얘가 귓구멍이 막혔나 싶어서 어깨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고 “사랑한다고, 안 들려?”하고 외쳤다. 순신은 양쪽 다리로 자전거를 지탱하더니 핸들바를 놓고 뒤돌아 나를 꽉 안았다. 나는 좋은 부분을 오려내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들을 이해한다. 소중한 시절을 불행에게 다 내주고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리움과 죽도록 싸워야 하는 사람들을.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 무거운 무력감과 섀도복싱해야 하는 이들을. 마치 생명이 있는 어떤 것의 목을 조르듯 내 마음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을 천천히 죽이며 진행되는 상실을, 걔를 사랑하고 이별하는 과정이 가르쳐주었다. 물론 동대문시장까지 밤의 자전거를 타고 왔던 계절에는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156-157, 연애의 시작 한 문단 안에서 모든 것은 끝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훅 치고 들어오는 이 정도 솜씨쯤 되려면… 하여간에 많이 쓰고 많이 지우고 많이 고치고 식물도 키우다 죽이다 해야겠지.)

-“구원에 대해 배워.” 나는 성당에서 늘 들었던 단어를 답했다.
“구원이 뭔데?”
어려운 질문이었다. 누가 그것에 답을 할 수 있을까.
“그건 수난이 그치는 거야.”
그러자 당연한 수순처럼 순신이 수난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순신에게 손바닥을 펼쳐보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얼음조각이 놓여 있다 상상해보라고. 그러면 어떻겠어? 하고 물었다. 순신은 아주 시원할 것 같다고 해서 내 김을 빼놓았다. 나는 지금이 겨울이라 생각해보라고 다시 조건을 달았다. 이제 더이상 매미도 울지 않고 나뭇잎도 일렁이지 않는다고, 길이 얼어 자전거를 탈 수도 없고 옷 밖으로 몸을 내놓으면 아플 정도로 바람이 차고. 그런 겨울에 손바닥에 얼음이 있으면 손이 얼겠지, 아프고 따갑고 시렵겠지, 그런데 얼음을 내던질 수는 없고 가만히 녹여야만 한다고 생각해봐. 그 시간이 너무 길고 험난하게 느껴지겠지, 그런 게 수난이고 그럴 때 하는 게 기도야.
“그 얼음 나중에 녹아 없어지기는 하는 거지?” 순신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하지.”
나는 녹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답을 들을 사람이 순신이라서 힘주어 말했다.
“다행이다.”
이후 원서동을 떠나오고 나서도 그 대화만은 잊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우리가 주고받은 당연하고 다행인 구원에 대해서만은. (157-159, 구원은 셀프, 하던 나도 이제 가끔은 구원도 외주, 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내가 만약에 네 앞에서 단무지를 먹으면 헤어지자는 신호인 줄 알어. 난 그만큼 그게 싫으니까.”
“괜찮네, 서로 예의도 지킬 수 있고.”
나는 일부러 단무지를 두개씩 집어 먹으면서 답했다.
“너는 어떻게 할 건데?”
헤어진다는 상상만으로도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나약함을 감추는 건 내 마음과 몸에 습관처럼 배어 있었다. 순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최종의 마음까지는 내보이지 않았다.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방법을 몰랐던 데 가까울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런 것이 너무 어려웠다. 슬프면 슬프다고, 상처가 있으면, 상처가 있다고, 떠날까봐 두려우면 두렵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고전적으로 머리를 자를게.“
”와, 정말 신선하다.“ 순신이 장난스럽게 놀렸다. (195, 너랑 헤어지는 것만큼이나 단무지가 싫어, 하는 풋풋 로맨스.)

-“그냥 내가 나인 게 미안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한점 남은 연어롤을 보다가 팔짱을 끼고 정작 마음과는 다른 말을 꺼냈다.
“대학은 안 가? 공부하면 되잖아.”
순신은 손을 풀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야.”
“노력하지 않는 거지. 노력하면 왜 안 돼, 변명이지.”
“운 좋은 사람들은 꼭 그렇게 말하더라.”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비꼈다. 계산을 하고 식당을 나왔고 안국역 출구로 나오자마자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우리가 만난 이래 가장 냉랭한 밤이었다. (201, 크, 드라마 같은데 또 뭔가 디테일한 연인들의 다툼과 멀어짐… 금희언니 언제부터 연애소설 장인이었더라…‘나의 사랑 매기’부터인가...)

-장과장 말처럼 그냥 지나가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사람들이 원하는 건 사면이 유리로 된 온실의 아름다움이지 그 아래 무엇이 있었는가가 아닐 테니까. 땅 밑은 수리와 복원의 대상도 아니니까. 하지만 질서에는 어긋날 것이다. 그렇게 묻은 상태로는 전체를 알기란 어려울 것이다. 공동과 침하가 계속되겠지. 개인적 상처들이 그렇듯이. 그렇게 한쪽을 묻어버린다면 허술한 수리를 한 것이 아닐까. (209-210)

-“머리는 무슨 의미야?”
밥을 거의 다 먹어갈 즈음 순신이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고 물었다. 최대한 무심한 체하고 싶은지 시선은 식당 안 작은 텔레비전에 두었다.
“아는 대로잖아.”
순신은 기가 막힌 것처럼 웃었다. 거기에는 내가 처음 보는 노여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럼 나도 이거 먹는다.”
순신이 단무지를 집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며 입에 넣고 씹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나는 순신이 단무지를 씹을 때면 이런 소리가 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구나, 단무지를 씹을 때면 얘가 이런 소리를 내는구나, 싶어서 나는 그냥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순신을 더는 견딜 수 없는 분노로 몰아넣은 듯했다. 어떻게 이러냐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자기는 서울용 남친이고 강화 가면 강화용이 따로 있느냐고, 자기도 믿지 않으면서 억지를 썼다. 만둣집을 나오고 나서도 그 상처는 멈출 리 없었고 나중에는 내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야, 너 성당 다니는 애가 어떻게 이럴 수 있니?”
도로 맞은편에는 그 여름 우리가 서 있었던 가회동성당이 눈에 덮여 있었다. 그 앞으로 수정테이프를 길게 그은 듯한 횡단보도의 흰 줄들이 보였다.
“성당 다닌다매, 구원이 있다매?”
순신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머리는 왜 자르고 나타났냐고 대체 왜 이러느냐고 자기가 뭘 잘못했느냐고. 그때 네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해주지 못한 일을 나는 오랫동안 후회했다. (220-222, 미스터리 소설, 역사 소설, 누가 뭐라해도 나는 이 소설을 연애소설로 읽었다. 이 부분의 떡밥 회수와 찢기는 마음에 내 마음도 찢어졌다… 다들 온실만 말하지 순신이와 영두의 풋사랑의 기승전결은 아 내가 귀 기울이지 않았구나 스포일러 할까 봐…. 스포일러라서 죄송합니다…그렇지만 이래야 보고 싶지 않겠나. 유 스틸 마이 넘버원, 하는 이어폰 건네던 다른 소설의 장면도 왠지 생각난다.)

-왕주무관의 표정은 큰 결단을 내린 사람처럼 엄숙했고 어느 면에서는 거룩함까지 풍겼다. 텃새 중에 가장 작지만 벼랑을 오가며 용감하게 먹이를 찾는 굴뚝새의 오라가 풍겼다. (…)
“장과장은 어떻게 하고요?”
“기러기 아빠거든요. (…) (248, 세번째는 굴뚝새, 네번째는 기러기로세. 아니 참 장과장은 어치인 줄 알았는데 기러기이기도...수리 보고서라고 흰죽지수리 어쩌고도 나왔는데 우리 금희언니의 언어유희는 경애가 경애하고 사랑하는 매기도 부르고 갑자기 페퍼로니 출신도 되고 그렇다. 392쪽에서 산아 친구 스미는 벌새가 되었다.)

-부후(250):목재균이 분비한 효소로 목재성분이 분해되어 조직이 변하고, 변질, 파괴되는 것. (출처: 산림청 기관안내 색인 중. 한자어는 어려운데 영어로는 그냥 decay다. 궁금해서 구글링하니 부후가 뭔지 바로 ai가 알려주는데 불신의 아이콘은 산림청 홈페이지 기어들어갔다.)

-“산아야, 더 억울해지는 건 그 억울한 일에 내가 갇혀버리는 일 같아. 갇혀서 내가 나 자신을 해치는 것.”
산아는 고개를 들고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았다. 얼굴을 적신 눈물이 어둠 속에서도 눈길처럼 반짝였다.
“이모는 하루 마감하면서 가끔 이렇게 기도한다. 오늘 다행히 아무도 안 죽였습니다.”
산아가 어이가 없는지 약간 웃었다.
“그럼 하느님이 칭찬하셔?”
“침묵하시지, 기도는 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다리기 위해 하는 거니까.” (317-318, 김금희 소설가는 ‘나의 폴라일지’에서 뒤늦게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내비췄고, 소설 곳곳에서 그런 종교적 흔적이 성당 다니는 아이, 내걸리는 시편 구절 같은 것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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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5-06-15 2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봤어요.! 이 소설 애정합니다!
같은 감상이라 기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5-06-16 06:47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좋은 읽기였어요. 좋게 읽으셨다니 반갑네요!!

2025-06-16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6-16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6-16 1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5-06-16 12:55   좋아요 1 | URL
저는 다 완전 좋지는 않아도 결이 맞는 저자였어요 ㅎㅎㅎㅎ 사랑에 방법이 있나 점점 배우고 자라는 거지!!!
 
밑줄과 생각
정용준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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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5 정용준.


책을 읽다 마는 건 찜찜함을 넘어 지는 기분이라서, 아이 좀 더 미워지면 어때, 하고 4월까지 읽다 만 소설가의 산문집을 꺼낸 것이다. 그렇게나 뭘 할지 몰랐던 것도 같다. 김금희 장편소설 읽고 있는데 이상하게 잘 안 넘어가네...하면서도 125쪽까지 읽은 걸 보니 내가 안 넘어간게 아니라 서사 진행이 좀 더딘 거 아닐까, 이제는 작가 선생님들에 대한 내 사랑을 의심해 보는 것이다.

소설가 산문 안 봐, 하고 김금희의 ‘식물적 낙관’은 영영 놓았었다. 정용준 산문집도 아….진짜 또 소설가 산문집 보면 개다, 하고 본 게 필립로스의 산문집 ‘사실들’이어서 나는 진짜 개가 되었다. 멍멍. 그런데 다시 읽기 시작한 정용준 산문집에 바로 그 필립로스의 ‘사실들’이 나오고, 이청준이랑, 아니 에르노랑, 밀란 쿤데라랑, 조지 오웰이랑, 나도 읽어본 작가들 나올 땐 조금 관심있게 읽기도 했다. 그렇지만 대체로는 아...분량 채우려고 문장 어거지로 늘려 놓은 걸 읽는 기분이야… 소설은 안 이랬잖아요...저한테 왜 이러세요...그러는 저는 너한테 왜 이럴까요…

서울 나들이 온 인천 이웃을 한 주에 두 번이나 만나 수다를 떨고 무교들 주제에 성경 이야기를 나누고 부모 욕을 하고 뭐 그랬다. 그런게 재미있는 나는 봉천동 마릴린 맨슨이다! 뭔 소리야… 예쁜 여자사람과 이야기하는 건 즐겁지만 또 힘든 일인가 집 오는데 엘레베이터 거울보니 막 눈이 퀭 하고 더 조그매지고 시들시들해진 것이다. 저녁밥 어떻게 할 거냐는 곁의 사람 문자랑 전화도 집 와서 저녁밥 다 먹고 나서 봐서 그 초조함을 느끼며 괜히 미안하기도 한데, 아니 주말에 외출도 안 하는 집순이 인생 그것이 사람이냐! 싶기도 하면서도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사슬 같은 걸 스스로 어디에 걸고 있나 보다.

그러고 멍때리다 아이참 이놈의 책 읽어 치워버려야지, 하고 마저 읽었다. 여기서 또 영업당해서 올가 토르추크? 하여간에 ‘다정한 서술자’란 책을 또 막 사 말아 이러다가 노벨상작가+그 작가의 산문집이면 너는 또 수렁을 스스로 파는 것이다...게다가 나 알라딘이랑 아직 담판도 못짓고 적립금은 소멸되고 예치금은 줬다 뺏어 가고 주문은 취소 되었고 난리란 말이다… 이건 정말 책 사지 말라는 계시 같은 것…

정용준 소설은 최소 네 권(한 편짜리 단편만 묶은 그래픽 노블?이랑 여럿이 앤솔로지로 낸 거도 합치면 몇 개 더) 봤고, 안 읽은 소설집, 장편소설도 아직 네 권이나 가지고 있다. 아마 소설은 언젠가 하나씩 읽어보긴 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산문집으론 다신 만나지 말아요.

+밑줄 긋기

-고유함은 새롭다. 다른 것들 사이에서 우뚝 솟아 있지 않고, 저 멀리 앞서 나가지도 않고, 티 나게 다른 옷을 입지 않아도, 고유한 것은 그 자체로 새롭다. 무엇과도 같지 않기에. 이전에 자신과 같은 것이 하나도 있지 않았기에.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고유함은 새롭고 그것은 언제나 새것이다. 그러니까 지문 같은 것. 목소리 같은 것. 대단히 고유해 보이지 않을지라도, 대충 보면 다 비슷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유일하다. 하나밖에 없다.

-예쁜 접시에 잘 구운 두부를 가지런히 올리고 식탁에 앉아 잠시 두부와 간장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걸 먹으면 나는 좋아질 거야. 이걸 먹는 동안 나는 괜찮아질 거야. 두부는 원래 그런 음식이니까. 열받은 사람의 열을 빼주고 죄 많은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고 슬픈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따뜻하게 해주니까.’

-좋은 일만 생기면 좋겠습니다. 아니, 좋은 일은 바라지도 않고 그저 나쁜 일만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삶은 이런 마음의 소원을 늘 배반한 채 우리를 어둠과 슬픔으로 가득한 이상한 밤으로 끌고 갑니다. 큰 사건도 힘들지만 작은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도 우리의 마음과 몸은 무너지거나 금이 갈 수가 있습니다.

-멋있는 건 그런 것이다. 잘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것. 진창에 빠져도, 뒷모습이 엉망이 되어도, 신발이 진흙과 오물로 뒤범벅돼도 그래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 혹자들이 볼 땐 발악하는 것처럼 보여도, 안 되는 일을 못하는 일을 발버둥 치며 애쓰는 것처럼 보여도. 어쨌든 계속하는 것.

-아직도 난 읽고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 좋다. 이 세계가 좁아지고 얇아지고 마침내 투명해지더라도 기쁠 것 같다. 그 안에 사는 동식물들이 작고 작아져 색채도 부피도 무게도 개성까지 잃고 마침내 뼈만 남은 까만 막대기 같은 글자 하나로 남더라도 나는 그 행간에 놓여 있는 내 운명이 좋다. 누군가 읽어줄 문맥 속에 숨어 있는 내 운명이 좋다. 누군가는 소리 내 읽어줄 문장 속에 있다는 것이 좋다. 때론 그저 문장이 되었다는 것이 좋다.

-구원? 웃기는 소리. 모든 것은 끝이 있어. 괜히 기대했다간 비참해지기만 할 거야. 영원한 건 없어.
영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야. 한순간. 하루. 단 한 번이라도. 어떤 경험은, 어떤 감정은, 어떤 사랑은, 그 사람을 온전히 살게 해. 적어도 한 시절을, 적어도 하루를, 1분 1초를, 짧지만 그 순간을 영원처럼 느끼게 되는 거야. 그것은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해. 그것은 그렇게 단순하고 작은 것이 아니야. 나는 그 가능성을, 그 반짝이는 한순간을 외면할 수 없어…….

-“망했다고? 내가 간절히 원한 것이 당신들이 망했다고 말한 바로 그것인데?”

-지식의 앎이 아니라 감각의 앎이 필요하다. 아무리 경고해도 손으로 만져봐야만 뜨거운 것을 아는 생물. 겪기 전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생물. 우리에겐 예상과 예감을 현실과 실제로 느낄 생생함이 필요하다. 감지하는, 감지되는, 감각의 지식. 실제로 행동이 멈추고 새로운 행위를 만들어내는 진짜 앎이 필요한 것이다.

-얼음은 돌이 아니다. 얼음은 무의미가 아니다. 얼음은 죽어 있는 상태가 아니다. 얼음은 잠이고 꿈이고 영원이다. 언제나 미래면서 지금 당장 물이 될 수 있는 현실이다. 얼음은 다시 물이 되고 땅에 스며들고 공기가 되고 바람을 일으키는 자연의 씨앗이다. 얼음은 생물들의 몸속에 흡수되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생명의 시작점이다. 얼음이 녹아 사라진다는 것은 정말로 사라지는 것이다. 의미의 무한한 가능성이 무의미함으로 증발하는 것이다. 보석보다 귀하고 빛나는 물질이 어둠과 허무 속으로 스러지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아. 우리는 얼음을 헛되이 녹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고통의 문제는 누구에게나 개인적으로 발생하며 감각된다. 다시 말해 그런 깨달음과 인간에 대한 보편적 이해와 앎은 고통 앞에서 하나도 쓸모가 없다.

-정체불명의 거룩한 진리가 아닌 내 실존으로 살고 싶은 단순한 마음. 그게 그리 나쁜 걸까.

-어찌됐든 인간은 패배하게 되고 때론 실패하며 절망을 맛보는 날이 오게 된다. 그것은 내 힘과 노력으로 방어할 수도 있지만, 느닷없이 일어나는 사건처럼 반드시 어떤 날 어떤 순간에 각각의 개인에게 발생하고야 만다. 어쩌면 그것은 서사의 영원한 테마가 아닐까. 나아가 서사가 투사하고 있는 인간 삶의 테마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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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좋은 일이 생길지도
요시타케 신스케 지음, 고향옥 옮김 / 주니어김영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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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3 요스타케 신스케.


수박주스를 시켰는데, 직원 분이 많이 드렸어요, 했다. 정말 너무 많이 줘서 얼음이 넘쳐서 쟁반 위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읽다가 버리고 싶어, 하던 정용준 산문집을 구매목록에서(전자책이라 못 팖) 다시 찾아 읽었다. 역시나 별로였지만 다 읽고 욕을 쓸 의욕에 이번엔 완독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바깥에 나가보니 비가 내렸다. 우산이 없지만 맞을 만한 정도였다. 이 정도면 괜찮게 보낸 한 주야, 생각했다.

알라딘이 배송 지연이라고 두번째로 책 주문을 자동 취소하고 환불을 이상하게 하기 전 까지는...

알라딘에서는 책 광고를 보면 적립금을 주는데, 그건 국내도서 만원 이상 아니면 중고나 전자책 살 때는 쓰지 못한다. 적립금을 차곡차곡 모아서, 어린이 문제집 몇 권을 사고, 우주점 중고(‘향모를 땋으며’, ‘하나의 세포로부터’)도 사고, 개인판매자의 책(‘씨앗의 자연사’, ‘슈퍼팬덤’)도 주문했다. 결제는 귀찮으니 한 방에 한다. 이렇게 자주 판매처 여러 개를 섞는데, 개인판매자 책 구매가 펑크 날 때마다 사달이 난다.

개인판매자의 책 두 권은 각 4900원*2+배송비 3500원=13300원 카드 결제를 했고, 적립금 할인은 신간 알라딘 직배송 도서에 적용해서 남은 부분은 역시 카드 결제했고, 우주점 배송은 할인 적용 자체가 안 되니 역시나 카드 결제했다.

그런데 개인판매자가 한 주 정도 동안 책을 안 보내면서...알라딘은 자동으로 주문 취소를 시켜버렸다. 판매자에게 개인 연락하니 이번 주말에 보내준대서 알라딘에 전달하니 주문 취소를 취소시켜 줬다. 그런데 하루 만에 또 자동 주문 취소가 되었다.

책을 사정 있으면 못 보낼 수 있지...정책상 취소시킨다면 뭐 취소할 수도 있지...(제휴 카드 할인 받는 거 날라가지만 까짓 15퍼센트 괜찮다 괜찮아)

문제는 13300원 결제한 것에 왜인지 신간에만 적용되는 적립금으로 산 것으로 해 놓고 환불은 예치금으로 8천 몇원만 해주는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이다...

전에도 비슷한 경우를 당해봐서, 판매자 귀책 사유인데 왜 회원간 중고에는 적용도 안 되었던, 당일 소멸인 적립금으로 환불을 해 주냐고, 항의해서 겨우 취소 도서 주문액과 배송료를 신용카드 취소 처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놈의 결제 정책이 어떻게 된 건지 또 그런 짓을 하고 있어...

나 나름 괜찮은 한 주 보냈다 히히 했는데 겨우 책 취소와 환불로 긁히고 만다...하필이면 바로 주말이라 해결이든 뭐든 나중에 될 것이고....

‘기분이 순식간에 좋아지는 신통방통한 비법들’ 이라는 띠지가 붙은 어린이 그림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기로 했다. 사실 사은품으로 5100원 적립금 뜯기고 (이건 이후 다른 주문 건이 벌써 온...알라딘의 노예 그만해라 이렇게 당하고도...) 예쁘지만 와장창 위험 높다는 거 알면서도 하여간에 요거트 그릇인지 견과류 그릇인지 스낵 그릇인지 유리로 된 예쁜 사은품을 하나 모셔 놨다. 그러려고 책을 샀다.


일단 이미 양장본의 책 표지 위에 내가 싫어하는 겉지에다 위에 또 띠지까지 둘러서 성질 뻗쳤다. 아니 그 전에 비닐랩핑까지 해 놨다... 구매 촉진한다고 띠지 씌워 종이 낭비 쓰레기 뻥튀기하는 출판업계 때문에 나무는 더 죽고 지구는 덥지만 알아서 할 테고 우리는 다 죽고 망할 것이다.

그래도 좋은 일 까진 아니어도 소소하게 기분 좋길 바라며 (애초에 글러 먹었다 책으로 그게 되겠냐) 그림책을 펼쳤는데, 장면은 많이 모아 놨지만, 이거 이해 안 되는 장면도 제법 되고, 어거지야, 싶은 페이지도 많았다. 좋은 장면도 있었지만, 진정해, 지금 네가 기분 나빠서 뭘 봐도 다 곱게 안 보이는 거 감안해, 했는데도 아...어린이는 즐겁게 보길...잘 보고 독후감 숙제 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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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홀릭 2025-06-14 2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부분취소된 적 있는데 공짜로 준돈은 그냥 뺐어가더라구요
치사뿡
어린이님...넘 귀엽네요^^
요시타케 신스케 신간 궁금했는데 최근작 느낌과 다르지 않군요

반유행열반인 2025-06-14 21:32   좋아요 1 | URL
네 이전 책들은 그림이나 구성 퀄리티 좋던데 이 책은 좀 약간 아쉬운 비컷 모음 느낌이었어요. 몰랐는데 펀딩을 했었더라구요.
 

책태기란 말, 알라딘에서만 쓰이나? 누가 만든 말일까? 궁금해서 검색을 해 보니 여기저기 범용어가 되어 있었다. 권태기든 책태기든, 불가항력의 무언가가 나를 어디로 빠뜨린 것처럼 이름을 붙여서 나 사실 책 안 읽고 핸드폰 하고 놀았지롱- 노력 같은 거 하기 싫었지롱- 스스로 게으름 부리게 되는 시기를 마치 어쩔 수 없어, 으쓱, 머쓱하지 않게 비벼버리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제가 책을 잘 안 읽고 딴청만 한다는 뜻입니다... 책이랑 옷이랑 신나게 사기만 하고 잘 읽진 않아...

언제 읽을지도 모르면서 책을 샀고, 벽돌 세트 중 하나는 선물도 받았고(사실 강탈에 가까움 안 볼 거면 나 줘 하고 뺏음), 중고로 모신 믿고 보는 000번역가 책 시리즈 두 권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아서 기분이 좋았다.

사실 함께 시켜서 도착해야 할 판매자 중고는 배송 지연으로 삐끗하고, 왜 알라딘은 여기저기 구매처를 혼합하면 직배송 중고에만 쓸 수 있는 적립금을 자꾸만 취소된 판매자 중고로 밀어줘서 환불액을 줄여버리고 유효기간 하루 남은 적립금 돌려받고 식식대게 하는지 모르겠다. 신간 판매, 우주점 중고판매, 회원간 직거래 중개 등등 복합 거래상을 하면서도 결제 체계가 되게 이상하게 꼬여있다. 나처럼 자꾸 헌 책 사면서 새 책 섞어 사는 애가 잘 없어서 그런가 몰라도 안 고친다. 중고서점 우연히 들렀는데, 한강 신간을 잔뜩 팔고 있어서 어 뭐야 신간 판매 되나? 하고 보니 결제는 모바일 큐알코드로 온라인 알라딘에서 구매하고 픽업하는 식의 꼼수(?) 판매도 하고...하여간에 애쓴다. 흥해라 만권당. 난 안 할 거 같지만... 너무 늦은 레드오션 풍덩이지만 이거마저 망하면 내 사업도 아닌데 너무 슬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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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3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6-13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깨비 2025-06-19 0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향모를 땋으며 저도 친구한테 추천받았는데 아직 안 읽었어요. 혹시 다 읽으셨나요?

반유행열반인 2025-06-19 14:42   좋아요 1 | URL
쌓아만 놓고 시작도 안 했네요 ㅎㅎ좋아하는 번역가 책이라 언젠가는 보겠지만 그 분 책도 너무 많이 쌓여 있어서 북깨비님이 먼저 보실 수도 있겠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