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
김보라 쓰고 엮음, 김원영, 남다은, 정희진, 최은영, 앨리슨 벡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8월
평점 :
품절


-20200125 김보라

나의 1994년.

은희보다 4살 어린 나는 국민학교 4학년이었다. 경기도 도농복합지역 나 살던 동네는 아직 군이라 불리웠다.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은희가 사는 서울은 사는 친척 하나 없는 별세계였다.
이른 봄에 할머니댁에 머물던 큰아빠가 돌아가셨다. 치질 수술 받고 입원했던 아빠가 일찍 퇴원해서 집에 왔다. 아빠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다가 울었다. 형이 죽었어. 장례 후 큰아빠의 외아들인 사촌이 놀러왔다. 나랑 동갑이지만 오빠라고 불렀다. 명절마다 만나면 나를 때리고 놀려서 울리던 사촌이 그때는 기가 많이 죽어 있어서 가엾게 느껴졌다.
큰아빠 죽음 이후 아빠가 많이 아팠다. 입이 한 쪽으로 비뚤어졌다. 신경과에 가니 뇌졸중을 의심하다가 검사해 보니 뇌졸중은 아니라고 했다. 용하다는 침쟁이에게 갔더니 침을 놓아주면서 중풍도 아니라고 했다. 웅어라는 물고기를 누가 구해다 주면서 그걸 저며 한쪽에 붙이면 돌아간 입이 돌아온댔다. 붙이는 꼴은 못봤고 처음 보는 특이한 물고기가 살아 있을 때 한참 구경했다. 오리인지 거위인지 목 따고 피를 마시면 낫는다고 그걸 구해다 먹였다는 소리도 들었다.
여름이 아주 무더운 해였다. 아빠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동네 뒷산에 자주 올라갔다. 숲의 그늘은 짙푸르렀지만 그래도 무더웠다. 바위에 앉은 아빠는 불경을 꺼내 읽기도 하고 명상하는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낯선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매우 힘겨워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어디가 왜 저렇게 아픈 걸까. 얼른 나았으면 싶었다.
부모님이 가게를 열었다. 두 분 다 바빠졌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도 엄마가 없어 쓸쓸했다. 가게에 가면 시계가 아주 많았다. 탁상시계들 알람을 울려 다양한 멜로디를 감상했다. 시계 바늘을 손끝으로 빙빙 돌려 뻐꾸기를 열두 번 뻐꾹하고 울게 했다. 조명을 받은 진열품들이 눈이 부셨다. 다 파는 물건이었고 내 것은 하나도 없었다.
큰 빚을 내어 가게를 연 아빠는 잠을 못자고 엄마에게 가게를 접자고 매일밤 졸라댔다. 엄마는 가게 일보다 아빠한테 시달림 받는 걸 더 힘들어했다. 아빠는 가게를 지키는 대신 친구들과 술을 먹으러 나가거나 옆옆 양복점에 가서 아저씨들과 고스톱과 포커를 쳤다.
나는 일기를 열심히 쓰는 아이였다. 월간 학습지 뉴턴은 밀렸지만 일기는 매일 꼬박꼬박 썼다. 학교 담임 혜영 선생님은 일기를 읽고 아빠 아프신 데는 어떠냐고 상냥하게 물어주셨다. 일기장마다 상세하게 멘트를 달아주셔서 일기 쓰는 맛이 있었다. 일기장 맨 마지막에 내가 궁금한 것들-하고 여러 물음을 끄적여 놓은 게 있었는데 거기에 일일히 답을 해 주셔서 굉장히 부끄러웠다. 어느날 고칠 물건이 생겼다면서 방과후에 나를 티코 옆자리에 태우고 일부러 우리 가게를 찾아가셨다. 엄마에게 내 칭찬을 많이 하고 가게가 잘 되길 아빠가 쾌차하길 빌어 주셨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혜영 선생님은 나를 남겨서 다음 날 친구들이 아침자습 시간에 풀 문제를 칠판에 적는 일을 시켰다. 분필 글씨는 반듯반듯 쓰는 게 어려웠지만 재미있었다. 반 아이 하나가 왜 쟤한테만 자습 내는 걸 시키냐면서 샘을 내기도 했다.
학교 생활은 바빴다. 혜영 선생님 권유로 합창부에 들어가 대회 준비를 했다. 단발머리의 합창부 선생님은 자꾸 검은 뿔테 안경이 흘러내렸고 마음이 여렸다. 어떤 아이가 험한 말을 해서 선생님을 울리기도 했다. 걸스카우트 활동을 해서 학교에서 야영도 하고 자연농원(지금 에버랜드)에 가서 자고 온 적도 있었다. 한 주에 한 번 교육청에 가서 과학실험 수업에도 참가했다. 바빠도 재미있는 날들이었다.
같이 과학실험 수업을 다니던 옆 짝꿍을 좋아했다. 울프컷을 하고 눈이 쳐진, 손가락이 짧뚱하면서도 바이올린을 잘 켜는 남자애였다. 반 아이들은 그 애를 말대가리라고 불렀다. 3년 연속 같은 반이었는데 4학년이 되면서 좋아하게 되었다. 어느날 시장에서 엄마가 사준 핫도그를 먹으며 길을 가는데, 말대가리와 마주쳤다. 너는 길에서 그런 걸 사먹니? 하는 말에 너무 부끄러워서 이후로 길에서 음식을 사먹는 일이 (거의 평생) 없어졌다. 학년 말에 짝꿍이 전학간다고 해서 정말 슬펐다. 마지막 날 그 애 가방 속에 편지와 초콜릿을 몰래 넣었다.
두 학년 아래 동생 반에 성수라는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사고 이후 아이들에게 너 다리 무너졌대 하고 놀림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나도 얼굴을 아는 아이라 뉴스를 볼 때마다 자꾸 성수 얼굴이 생각이 났다.
학교를 마치면 피아노를 배우러 갔다. 란 선생님은 친절하게 피아노 뿐 아니라 청음, 시창, 온갖 음악이론을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다. 음악이론 쪽지시험을 봐서 100점 맞은 개수만큼 백원짜리 동전을 쥐어주셨다. 나는 동전 한움큼을 들고 아래층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을 사 먹었다. 아빠가 아프다고 울먹이는 내게 란 선생님이 같이 기도하자고 위로해 준 기억이 난다. 다음해에는 교회 성가대에 나를 데리고 가서 반주를 시켰다. 란 선생님은 피아노대회에 나가고 싶다는 내게 별도 레슨비도 받지 않고 추가로 레슨을 해주셨다. 피아노가 없는 내게 주말에도 언제든 연습하러 오라면서 다른 애들 없는 시간에도 학원을 열어주셨다. 수시로 진행 상황을 점검해주고 어느 주말에는 자장면도 사 주셨다. 처음 나가는 대회라 너무 긴장한 나는 무대를 내려오면서 펑펑 울었다. 상을 탔는데도 내가 너무 못쳤다고 생각했다.
여름방학 때 란 선생님은 아이들을 데리고 수안보 여름캠프에 갔다. 학원에 안 다니는 동생들까지 데려오라고 하셨다. 수영도 하고 놀이기구도 타고 재미있게 놀았다. 캠프 기간 중 김일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면 이제 통일이 되는 건가 싶었다. 캠프를 마치고 집에 돌아갔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군은 인구가 무럭무럭 늘어 다음해에 시가 되고, 국민학교는 다음다음해에 초등학교가 되었다. 4학년은 어린이라 부를 마지노선이었던 것 같다. 바로 한 해 뒤에는 2차 성징이 시작되고, 어른 흉내를 내고, 재미와 기쁨보다 우울함이 삶에서 더 비중을 늘리기 시작했거든.
큰아빠는 심한 두통에 시달려서 시골에 쉬러 내려왔는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병원에 보낼 생각은 안 하고 골방에 가둬놓고 쉬쉬하며 아픈 큰아빠를 구박만 했다고 한다. 큰아빠가 다 죽을 지경이 되서야 할아버지가 택시에 태워 병원에 가는 도중에 돌아가셨다.
아빠는 점점 미쳐가고 있던 건데 그 상황을 알아차릴 정신의학적 지식이 그때 우리에게 있었을 리가 없다. 거의 1년 간 수면장애에 시달리던 아빠가 조현병 발작으로 망상에 빠져 식구들을 죽이려고 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정신병원에 실려갔다. 그후 오랜동안 우울증, 자살시도, 알콜중독으로 주변을 힘들게 했다. 딱 지금 내 나이였던 아빠는 왜 아픈 사람이 되었을까. 유전적 소인에다 그 난리를 지켜보고 겪은 나는 내가 그렇게 아픈 사람이 될까 봐 늘 걱정하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에 골몰한다. 약과 병원을 싫어하고 술로 버티던 아빠와 달리 다행히도 나는 언제든 병원으로 달려갈 마음가짐이 되어있다.
일기 쓰는 습관은 오래 따라와서 지금도 클라우드노트앱에 가끔 쓴다. 돌아보면 행복할 때는 일기를 잘 안 쓰는데 가장 힘들고 우울한 시기의 기록만 잔뜩 남아있다.
전학 간 짝꿍의 소식은 한참 뒤 특이한 방식으로 전해듣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옆 도시로 멀리 통학하게 되었는데, 고1 짝과 초등학교 때 이야기를 하다가 말대가리가 이사간 곳이 고1 짝이 살던 곳인 것을 알게 되었다. 고1 짝과 말대가리는 사귀었었는데, 말대가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담배도 피우고 오토바이도 타면서 방황을 많이 했다고, 장난 아니었다는 말을 했다.
아, 그 애가 전학가고 얼마 안 되서 같은 반 여자 아이가 내게 말을 했다. 너 그 애 가방 속에 편지랑 초콜릿 넣어놨더라? 그걸 들키다니 너무 창피했다. 그런데 걔는 왜 남의 가방을 열어봤을까. 걔도 뭘 넣어 두려고 했나. 편지랑 초콜릿은 원래 수신인에게 무사히 돌아갔을지 여자 아이가 낼름 빼다 먹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김일성이 죽고 나서도 삼대 세습을 하며 북한은 아직 연명하고 있다. 통일은 언제 될까.
첫 직장이 광진구, 성동구 인근이어서 어느 날 동료의 차를 타고 성수대교를 지날 일이 있었다. 멀찍이 놓인 위령탑을 보았다. 이상하게도 어린 성수의 얼굴이 여태 생각이 났다. 학생들이 학교에 가다가 죽는 사회는 수학여행을 가다 죽는 사회로 그대로 남아 있어서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은 슬픈 세상이었다.

혜영 선생님도, 란 선생님도, 정말 좋은 분들이셨다. 두분 다 나도 모르는 사이 선생 후계자 양성을 하고 계셨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 분들만큼 좋은 선생이 되지 못했다. 베토벤 선생님이 안 되려고 기를 쓰긴 했는데, 혜영, 란, 영지 선생님만큼 아이들에게 다정하진 못했다.
나는 자기가 싫어진 적이 있냐고 묻는 은희로 오래 남아 있었다. 나 자신도 자라지 못한 나머지 더 어린 친구들에게 영지 선생님처럼 맞지 말라고, 우울하고 힘들 땐 손가락을 보라고, 나쁜 일이 닥치면 기쁜 일이 함께 한다고, 세상은 신기하고 아름답다고도 말을 건네지 못했다.
다정하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선생님들이 없었다면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내내 알지 못하고 살았을텐데. 그걸 다른 사람에게 되돌려주는 일에 너무 인색하게 살았다. 마냥 낙관하기에는 확신이 없었고 비관이 더 많았다. 그런데 어린 내게 필요한 건 정답도 정확한 예언도 아니었다. 그냥 따뜻함이면 충분했잖아.
그러니 또다른 은희들이 제 삶도 언젠간 빛이 날까요? 하고 내게 묻는다면, 너는 지금도 눈부시고 앞으로는 더 그럴 거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말아야겠다.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가끔 돌아보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시나리오라는 글 자체를 처음 읽어 보았다. 이게 영상이 된다는 게 신기하다. 책을 읽기 전에 이상은의 음악이 깔린 티저만 봤었다. 나는 긴 영화를 잘 보니 영화도 곧 봐야겠다.

책 뒤편에 영화에 대한 감상과 나름의 해석을 적은 글들도 흥미롭게 읽혔다. 같은 컨텐츠를 보고도 가진 관점과 경험과 배경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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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01-26 1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 같다..... 반님의 인생사 서술을 듣고 있으면, 어쩐지 울멍울멍한데 또 담담하기도 하고,
근데 또 그런 게 어쩐지 좋고 그러네요....

반유행열반인 2020-01-26 14:58   좋아요 0 | URL
울멍울멍 동그라미 아이콘 떠오르네요. ㅎㅎㅎ

무식쟁이 2020-01-26 2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채기투성이. 잉~ 아푸다.. ㅠㅠ
글쓰기가 업인 사람(특히 소설가)은. 아픈 뼈와 살을 드러내고 곱씹고 갈아내서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 같아서.. 아프지만 언젠가는 멋진 소설로 승화를...


반유행열반인 2020-01-27 00:25   좋아요 0 | URL
생채기랄 것도 없고 안 아프고 글쓰기 업도 아니고 뼈 살도 안 드러나고(순살치킨?!) 소설가도 아니고 댓글 온통 오류 투성이 아닌가요?! ㅋㅋㅋ그래도 다정해서 마냥 좋은 무님.

- 2020-02-02 0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 94년을 지나오셨군요. 언제나 좋은 선생님을 만난 이야기는 좋아요. 좋은 어른 되야겠어요 ㅜ
벌새 시나리오 참 좋죠. 저도 좋았는데 이런 독후감 읽으니까 더 좋으네요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0-02-02 09:13   좋아요 1 | URL
이 책은 순전히 쟝쟝님 덕에 읽은 거에요 ㅎㅎㅎ좋다고 하시면 믿고 읽습니다 ㅎㅎㅎ은희 이야기 보니 나의 94년 돌아보고 싶더라구요. 나의 미시사.

- 2020-02-03 19:14   좋아요 1 | URL
반님의 미시사~! 우리들의 미시사!
 
덧니가 보고 싶어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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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5 정세랑

달달한 소설은 취미에 없었는데, 누가 자꾸 그런 달달한 게 있다고 알려줘서 가끔 연애소설들을 주워 읽는다. 이 소설은 표지가 너무 안 예뻐서 안 보고 싶었는데 단 게 필요한 마음이라 빌려 읽었다. 지난 번에 지구에서 한아뿐 읽고는 숙원 과제 같은 연애단편 어설프게라도 하나 완성하긴 했었지. (중딩 화자 흉내내기는 30대 아줌마한테 무리수라고 읽어준 친구 한 명에게 까이고, 당연히 공모전에도 떨어졌지만. 좋다는 사람 한 명은 건졌다. 히히.)

연인이 헤어진 뒤에 이야기는 시작된다. 장르 소설 작가인 재화가 쓴 소설 속에서 구남친 용기는 매번 죽는다. 그런데 갑자기 용기의 몸에 재화의 문장들이 돋아난다. 설정 보소. 재화와 용기의 시점이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정세랑 소설은 항상 드라마 보는 것 같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으으 하고 닭살을 오소소 돋아가면서도 꾸역꾸역 읽게 된다. 용기의 새 애인과의 이별이 난 사실 더 슬펐다. 용기 몸을 무지하게 밝히는 어린 여친 정말 귀엽단 말이다. 나중에 소원을 이루니 좀 봐줘요 하는 전개는 역시나 한아뿐이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연애소설이다 스릴러다 판타지다 에스에프다 시대소설이다 왔다갔다 했다. 소설 속에 수많은 액자 소설을 담으니 가능한 일이다. 이야기를 조각조각 잘 쪼개서 큰 하나의 이야기로 엮는 게 정세랑의 특기다. 그게 반복되니까 식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단맛나는 해피엔딩은 수요가 풍부하니까 양질로 공급하면 뭐 그걸로도 존재 가치가 있겠지. 시니컬한 나한테도 조금은 설탕가루 묻혀 주겠지. ㅎㅎㅎ

+밑줄 긋기

-와, 이 부분 읽는데 되게 서글퍼졌다. 일자 막대 정말 다 끝난 거니.
’인생이 테트리스라면, 더이상 긴 일자 막대는 내려오지 않는다. 갑자기 모든 게 좋아질 리가 없다. 이렇게 쌓여서, 해소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안고 버티는 거다.’

-용기 몸에 전여친의 소설 문구가 새겨지는 걸 눈치챈 새여친이 이별을 고한다. 이 정도면 좋게 헤어지는 편 같은데 그래도 모든 이별 순간은 슬프다.
‘용기가 손을 뻗어, 여자친구의 손을 잠시 잡았다. 핑크와 옐로의 도트 무늬 손톱을 들여다보고 웃었다. 지지난주엔가, 이쑤시개로 애써 점을 찍으며 네일 따위 돈 주고 받을 여유 없다고 툴툴거렸었다. 그 정도는 시켜주고 싶었다. 또 뭐가 해주고 싶었었지? 아, 편한 신발을 사주고 싶었다. 발가락뼈를 튀어나오게 하지 않는, 균형이 잘 잡힌 신을. 샴페인 색깔의 화장품도 사주고 싶었다. 볼살이 빠지면 그런 골드가 어울릴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가볍게 손톱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었다. 여자친구도 입맞춤의 의미를 깨닫고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대단한 사랑, 세계가 기억할 사랑을 얻기를. 나는 줄 수 없었지만 꼭 그랬으면 좋겠어.
용기는 여자친구와 그렇게 헤어졌다.

-나도 아무도 안 죽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아무도 안 죽는 이야기를 써서 내 몸에 글자가 안 나타났으면 좋겠어.”

-닭살 돋는 재화 첫 책 작가의 말.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써 제낄 수 있는 뻔뻔한 사람이 되고 싶다. (안 될 걸.)
‘언젠가 여기 쓴 걸 후회한다고 해도, Y, 내 덧니는 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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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1-25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전여친의 문장이 몸에 새겨진다니! 저도 이 소설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반유행열반인님!

반유행열반인 2020-01-25 18:46   좋아요 0 | URL
저는 보면서 자꾸 현여친에 이입해서 그놈의 문장들 사포로 갈아내고 레이저로 지져버렷! 하고 싶어졌어요....ㅋㅋㅋ
다락방님 늘 좋은 글 좋은 책 소개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무식쟁이 2020-01-27 0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관심없었는데 (표지보면 자꾸 입이 벌어져서 페이지 후딱 넘기느라 바빴음; ) 열반님 리뷰보니 보고싶어 졌음요. 열반인님의 사랑 김금희 책 읽고나니 명랑소설 읽고 싶어졌어요. ㅋ

반유행열반인 2020-01-27 00:23   좋아요 0 | URL
원조 김금희 사랑님은 따로 있어요. 저는 짭퉁 후계자... ㅋㅋㅋ...(적당한 전해질 농도 소금물) 김금희가 훨씬 더 좋지만 가끔 설탕물 한 사발 드링킹해 주셔도 ㅋㅋ

무식쟁이 2020-01-27 00:28   좋아요 1 | URL
사랑에 원조가 어딨어요. (캬. 트로트 제목같다.) 내사랑은 내가 원조지.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
문보영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20200123 문보영

나는 시를 읽지 않는다고 했더니 소설을 쓰는 친구가 시집도 좀 보고 그러라고 했다. 뭘 볼까 했더니 문보영 시집이 괜찮다고 했다. 그래서 문보영의 책기둥은 내 돈 주고 사 본 첫 시집이다. 아니 그전에 이상이랑 브레히트 시집을 중고로 사서 꽂아두긴 했다. 읽진 않았다. 문보영 시집도 처음부터 읽다가 너무 안 읽혀서 맨 뒤부터 봤더니 볼 만 했다. 그러고 읽다 말아서 도넛처럼 중간부분이 안 읽은 채 비어 있다. 사실 오래되서 읽은 시도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전자도서관 업데이트 되서 이야 신난다 하고 뒤지다가 문보영 산문집을 발견했다. 제목 봐 세상에. 빌려서 읽었다. 산문집이라기보다 일기 모음이다. 시인은 일기에 아무말잔치를 해도 책이 되고 내 일기는 그냥 나만 두고두고 본다. 둘의 차이를 못 알아보는 나니까 애초에 글러 먹은 거야.

이십 대의 문보영은 연애가 안 풀릴 때,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심해 정신과에 다니며 약을 타먹을 때 일기를 열심히 썼다. 도무지 식욕이 없고 피자를 좋아했다. 이거 난데. 나잖아. 다른 점도 있다. 문보영은 시를 쓴다. 춤을 춘다. 브이로그를 열심히 올린다. 내가 앞으로도 하지 않을 일들을 열심히 하고 있다.
엄청 금방 읽었는데, 읽고 나니까 기분이 급하강해서 괜히 읽었다 싶었다. 너무나 비슷하게 힘들었던 사람 이야기를 읽는다고 해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마지막 베트남 여행기조차 너무 우울했다. 베트남 도착하자마자 기대와 다르게 험한 꼴 본 것조차 비슷하잖아. 그래도 당신은 죽기 전에 등단이라도 했지. 시집이라도 냈지. 문학상도 탔지. 괜히 읽었어. 그래도 다음에 생각나면 시집 다 읽기 다시 한 번 시도해 볼게요.
시집 읽는 사람을 아주 많이 좋아하게 되었는데 나는 시는 하나도 모르고 무슨 시를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밑줄 긋기. 왜 이런데 밑줄을.

‘한때 누군가 나에게 사랑해, 라고 말했다. 사랑해, 라는 말은 어떤 구조로 생겨먹은 걸까?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어버버거린다. “나……, 나를……? 나는 쓰레기예요…….” 쓰레기라고 자랑하는 게 아니고, 쓰레기라고 겸손 떠는 것도 아니다. 쓰레기라는 건 그저, ‘내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면 어쩌죠?’ 하는 불안이다.’
-저도요.

‘왜 사람은 누군가를 안는 구조로 생겨서 타인을 갈망하게 되는 걸까?’
-그러게 말이야.

‘고구마는 아무것도 떠올리게 하지 않아서 좋다. 태어날 때부터 온몸이 멍색이다. 온몸이 멍이면 멍 위에 멍을 얹어도 티가 나지 않으니 좋다. 다치고 또 다쳐도 한 번만 맞은 것 같은 모습이 나와 닮았다.’
-그래서 책이랑 시 읽으면 자꾸 고구마 먹는 기분이...아, 아닙니다.

‘양 볼에 흘러내려 턱 끝에서 만나는 두 갈래의 빛.’
-두 음소로 쓸 말을 시인은 이쁘게도. 엉엉.

‘얼그레이 잼 덕분에 문득 행복했다. 너무 오랜만에 찾아오셔서 행복인지 못 알아뵀다. 그래서 악수를 하려고 했는데 웬일인지 내 악수를 받아주셨다. 그래서 악수를 한 김에 내 오른손과 행복의 왼손을 수갑으로 채웠다. 같이 걸었다. 그런데 어느덧 혼자 걷고 있었다. 행복은 손목이 너무 가늘어 수갑이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내 손목이 가늘어서 수갑이 자꾸 빠진다고 우겨본다.

‘왜 사람들이 웃을 때 나는 웃지 못할까? 생각해보면, 세상이 웃는 방식으로 내가 웃었다면, 애초에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미소 짓지 않는 방식으로 내가 미소 지었으므로 시를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슬픈 이야기다.’
-반대로 아무도 웃지 않을 때 웃는 나는 잡문을 쓰게 되었다.

‘도서관에 있는 휴대폰들이 동시에 울렸다. 누군가 인류에게 같은 문자를 보낸 것이다. 긴급재난 문자였다. 타인의 휴대폰이 울릴 때 내 휴대폰도 함께 울려서 소속감이 느껴졌다. 누군가 나를 빼먹지 않았다는 게 신났다. 나도 포함된 것이다. 나는 왕따가 아닌 것이다.’
-오래 전에 재난문자 수신을 꺼놔서 내 폰만 울리지 않는다. 나는 왕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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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01-24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님, 저는 일(비슷한 것)을 하기 시작하고 처음 맞는 연휴라서 각별한데, 반님은 어떠실지 모르겠어요.
모쪼록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이시길 바랍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1-24 13:44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휴일과 평일 구분이 잘 안 되는 상태에요. 일로 복귀하면 뼈져리게 느끼겠지요! 교육받느라 고생하신 syo님, 연휴 편하고 행복하게 푹 쉬시길 빌어요.

무식쟁이 2020-01-24 1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그 가장 다정하게 미워하는 방식이 뭐인가요.

-시는 뭐.. 그대가 시요.. (ㅍㅎㅎㅎㅎ)
-저는 주로 쓰레기를 사랑하나봐요. 취향의 문제. 우리 그냥 당당한 재활용 쓰레기가 됩시다.
-그냥 팔짱을 끼세요.
-으핫. 고구마가 멍색이라니 멍색..불쌍해서 껍질은 꼭 벗겨먹어야겠다는 다짐을.
-열반인님 마르셨군요.
-사람들 웃을 때 잘 웃는 저는 아무도 웃지 않을 때 웃는 님의 글도 좋아요.

반유행열반인 2020-01-24 13:45   좋아요 0 | URL
시인이 뭔가 미사여구 갖다 붙이는 건 뭐겠어요. 시죠 시ㅋㅋ 저도 다정하게 미워하고 싶어지는 날은 다 소설로 써 버릴겨.. ㅋㅋ 무님 너무 오랜만이라 반가워요. 사랑 넘치는 댓글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정한 무님.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 사회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위한 빈곤의 인류학
조문영 엮음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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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3 조문영 엮음

내가 겪은 가난을 생각해 본다. 내내 가난하지는 않았다. 부모는 빈약하나마 경제활동을 계속했고 근근히 먹고 살았다. 우리집이 부자가 아니라는 건 알았다. 아마도 가난한 것 같다는 생각은 했다. 경제적인 부분보다는 가정폭력과 아빠의 정신건강이 더 큰 문제였다.

이십 대 초반 자립을 꿈꾸면서 첫 곤궁함에 부딪혔다. 왕복 네 시간 가까이 걸리는 통학도 힘들었고 아빠의 주사도 벗어나고 싶었다. 엄마와 함께 한 가출 이후 나만 서울에 남게 되면서 갑작스럽게 독립하게 되었다. 국립대라 싼 편인 등록금을 대준 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월세와 생활비는 집에서 지원해주지 않았다. 다시 집으로 들어오길 바라고 그랬을 것이다. 월세랑 밥값이랑 교통비까지 60만원은 있어야 버틴다. 과외 알바를 두 개 하면 마련할 수 있는 돈이었다. 중개업소에 첫 달 과외비의 절반을 떼어주는데 한 달만에 짤리면 정말 큰일이 났다. 다음 과외 구할 때까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녔다. 같은 동아리에는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부모님에게 생활비와 집세는 물론 넉넉한 용돈까지 따로 챙겨 받는 동기와 선후배들이 있었다. 공부하며 돈을 벌며 동아리 활동까지 열심히 하는 건 꽤나 버거웠다. 슬프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빈정상하기도 하면서 마음이 자주 뒤틀렸다. 영화 기생충에서 충숙이 돈이 다리미라고 했다. 항상 너그럽고 친절하게 대해주고 여럿이 먹는 술값 밥값 깍두기 시켜주는 선배들을 볼 때면 고마우면서도 비참한 기분이 자꾸 스쳤다. 나는 누군가에게 베풀 수 없는 너그러움이었으니.

그나마도 스스로 벌 수 있을 때는 다행이었다. 갑자기 아토피성 피부염이 심해졌다. 가려워서 잠도 못자고 상처 때문에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한창 예쁠 나이에 흉해진 외모는 자존감까지 박살을 냈다. 크게 패배한 마음으로 집에 아쉬운 소리를 했다. 월세와 병원비를 보태주면서 아빠는 온갖 싫은 소리를 해댔다. 잘 걷지도 못하는 내게 다시 장거리 통학을 하라고 했다. 겨우 회복을 하고 졸업 한 학기 남기고 귀향할 때까지 버텼다. 복지 정책으로 지원금 주면서 간섭하는 국가라는 아빠의 느낌이 이런 것일까 짐작만 할 뿐이다.

집에 돌아가고 일 년 만에 다시 가정폭력을 피해 엄마와 집을 나왔다. 아르바이트와 장학금으로 모아둔 이전 임차 보증금은 아빠가 미리 빼앗은 상태여서 달랑 아르바이트로 모은 백삼십만원만 들고 있었다. 대학 졸업하고 수험생/취준생 신분이었다. 보증금 백에 월세 삼십 반지하를 구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고 공부를 했다. 이상하게 가난해지면 병이 도진다. 퐁퐁 날리는 곰팡이 포자 속에서 아토피성 피부염과 싸우며 시험에 합격하고 취업을 했다. 반지하를 벗어났고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되었다.

그렇지만 가난은 언제나 쉽게 다시 돌아온다. 이제 막 새 전세집으로 이사를 마쳐 모은 돈 다 털어넣고 몸이 아파 병가 중인 상태에서 아기가 생겼다. 낳기로 결정하고 나니 역시 또 돈이 문제였다. 전세금에 부은 돈 일부를 엄마에게 받고 은행에서 사천만원 대출 받아 신혼집을 구했다. 혼인신고만 하고 가장 저렴한 세간들을 사모아서 살림을 차렸다. 6개월 후에 아기가 태어났다. 단열이 안 되는 전세집 벽에는 결로가 맺히고 곰팡이가 생겼다. 부모 양쪽다 피부염 앓는 유전자를 물려준데다 환경까지 엉망이니 어린 아기는 아토피성 피부염을 심하게 오래 앓았다. 한창 귀여울 시절 양볼에 진물과 피가 흐르는 커다란 상처를 긁어대며 못 자던 아기를 생각하면 여전히 슬프다. 다행히 지금은 멀쩡하다.

가난을 벗어난 방법은 단순하다. 학부 5년 대학원 10년 끝에 힘들게 학위를 얻은 남편이 월급 잘 주는 기업에 취직했다. 주택담보대출이랑 학자금대출 같은 빚이 억대로 남아 있어도 그냥저냥 갚으며 먹고 살 걱정은 안 한다.

개인의 운과 노력과 학벌로 빈곤을 벗어났지만 모두가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구조가 해결되지 않으면 오래 힘들게 일해도 많이 벌지 못 하는 사람들은 계속 힘들게 산다.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은 사는 일 마저 보장받기 어렵다.

이 책은 그렇게 벗어날 길 없는 가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연대하고 서로 도와가며 버티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빈곤의 인류학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과 대학생들이 반빈곤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고 알게된 점과 느낀 점들을 정리해 놓았다. 가난한 사람들, 이라는 말로 뭉뚱그릴 수 없을 만한 다양한 가난의 원인과 저마다의 살아남는 방식이 있었다. 용산참사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철거민의 삶, 마을과 지역단위의 연대, 노인, 쪽방촌, 홈리스, 장애인, 노점상, 영세상인. 이 책에 실리지 않은 가난은 또 얼마나 많을까. 실업, 질병, 사고, 이혼, 사업 실패, 유기, 탈학교, 가출, 폭력, 난민, 탈북민, 이주민 등등등. 누구에게든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난이 닥쳐올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에게는 오지 않을 일 겪고 싶지 않은 일 치부하며 가난한 사람들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다. 편견을 가지고 심지어 혐오한다. 온정적인 시선을 보내더라도 나보다 낮은 곳의 부족한 누군가에게 내가 뭔가를 베푸는, 그 때문에 권력을 가진 듯 굴면서 상처를 만들고 인권을 침해하기도 한다.

빈곤을 싸워야 할 것으로 삼고 힘들어하는 사람들 곁에서 함께 행동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참 대단해 보였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덕에 조금씩 더 나은 세상이 되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그런 활동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무엇이 잘못된 것이고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은 무엇일지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비웃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책이나 영화를 통해서라도 내가 놓일 수도 있었던 (있을) 위치의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를 계속 들어야겠다. 그 입장을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조금이나마 이해해보려는 노력을 계속해야겠다. 할 게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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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3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23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20-01-23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유행열반인님 글을 읽으니 우리는 우리가 당하고 싶지 않는 경험을 원치 않게 하는 이들을, 마치 그것인양 바라보는 것에 익숙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어쩌면 그들이 우리 대신 그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일지도, 우리가 조금 운이 좋았을 뿐임에도 그런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네요...

반유행열반인 2020-01-23 15:46   좋아요 1 | URL
운이 좋았고 대신 겪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만으로도 슬프고 죄스러워지네요.

북다이제스터 2020-01-23 1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글에 크게 공감합니다. 엉뚱하지만 반우행열반인 님께서 요즘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책 <팩트풀니스> 읽으시면 무엇이라 하실지 퍼뜩 궁금해집니다.
즐거운 설 명절 보내세요. ^^

반유행열반인 2020-01-23 18:17   좋아요 1 | URL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모르는 책이라 길게 드릴 말씀이 없는데 남들이 좋다 하면 슬쩍 엇나가는 못된 습벽이 있습니다...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0-01-23 18:48   좋아요 1 | URL
북플에선 짤리던 뒷부분 새해인사가 피씨버전에선 보이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북다이제스터 2020-01-23 18:53   좋아요 1 | URL
저도 북플로 보는 중이라 글
뒤에 무슨 말씀하셨는지 현재 모릅니다.
알라딘도 이 문제 알텐데... 바쁘거나 기술적 어려움이 크거나, 돈이 없거나, 셋 모두이거나 그럴 것 같습니다. ^^
감사합니다. ^^

무식쟁이 2020-01-24 1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에서 꺼내온 아픈 언어라 먹먹하게 다가오지만.
또 이렇게 스스로 치유해가시는 씩씩한 열반인님. 정말 멋지신 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

반유행열반인 2020-01-24 18:30   좋아요 0 | URL
제가 뭐가 멋져요. 좋은 말씀 건네주시는 무님이 더 멋지심ㅎㅎ 아프고 치유하고 할 거 없어요 이제 ㅎㅎ자본주의에 적응 잘 해서 소비의 노예하고 알라딘 플래티넘 몇 년 계속 하고 ㅋㅋㅋ나 맨날 낭만파괴해서 죄송해요...그래도 콩깍지는 일찍 벗겨드리는게 실망을 덜 하시는 길로 알고...

2020-01-25 1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25 1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거짓말 읽는 법
베티나 슈탕네트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20200121 베티나 슈탕네트

모짜렐라슈나이저-너의 거짓말
http://naver.me/FfmLlBey
친밀함과 관심을 내보이며 다가와 단물만 쓱 빨고 사라진 아이 하나에 분개한 스물한 살 꼬꼬마는 미니홈피 일기장에다 동시 같은 걸 끄적여 놓았다. 동아리에서 베이스 치는 오빠가 그걸 보고 야 여기에 내가 곡 붙여도 되냐, 하고 노래를 지어왔고, 졸업 후 친한 사람 몇몇이 모여 얼마간 밴드를 할 때 그 노래도 대표 합주곡이 되었다. 홍대 앞 클럽 관객 없는 무대에서 몇 번의 공연을 하고, 노트북과 믹서와 마이크와 옷걸이를 휘어 스타킹으로 감싼 자체제작 팝스크린을 들고 남의 연습실을 전전하며 어설프게 녹음도 하고, 밴드 멤버 중 제일 재주좋은(잉여력 넘치는) 기타리스트(지금 같이 삼)가 엉망인 내 음정 음색을 이런저런 필터로 위장, 믹싱, 마스터링해서 디지털 음반까지 발매했다. 그 망령은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도 모르는 사이 대륙진출도 함… http://bar.qianqian.com/ipad#search/모짜렐라/
아무튼 네 곡 담긴 EP의 타이틀이 될 만큼 거짓말에 관심이 많은 젊음이었군요.

엄마 아빠가 가게를 하실 때 사기 당하는 무서운 상황을 목격한 적이 있다. 양복을 입은 멀끔하게 생긴 중년 남자가 가게에 들어와 물건을 고르고 수표를 내밀었다. 수표 금액에 비해 저렴한 물건을 구입한 남자는 거스름돈으로 받은 현금을 쥐고 사라졌다. 남자가 나가고 나서야 수표 조회를 해 본 부모는 뒤늦게 확인한 도난수표 문구를 보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가게 문 밖을 뛰쳐나가보았지만 남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때부터인 것 같다. 다른 사람과 그들의 말과 글과 행동을 대할 때의 기본값이 의심과 불신이 된 것이. 나는 속는 걸 싫어하고 처음에는 아무 것도 믿지 않아요, 하는 말에 엄마는 어째서 그러냐고, 자신은 왠만하면 앞에 마주한 사람의 말이 다 진짜라고 여긴다고 내가 이상하다고 했다. 내가 이상한가요. 이상하군요.

스스로 매우 솔직한 편이고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데 주저함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살면서 했던 거짓말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가장 큰 거짓말은 무엇이었나?
와, 생각났다. 진짜 왜 그러고 살았냐 싶은 사례가. 나는 내가 죽었다고 거짓말 한 적이 있다.
열여덟 살 때였다. 내가 자주 놀던 피씨통신동호회에 굳이 차명의 아이디를 새로 만들어 게시판에 글을 남겼다. 이곳 이용자인 누구누구가 학교 4층 창밖 내다보며 까불다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얘가 맨날 이 동호회에서 놀던 게 생각나서 소식 전하러 왔습니다.
추모글이 올라오고 난리가 났다. 며칠 후에야 뒤늦게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에 인터넷이 안 되어서 접속 못하는 사이 친구 새끼가 장난글을 올렸다는 해명글을 올렸다.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야이 관종새끼야 니가 지어낸 거지 하는 싸늘한 반응도 동시에 얻었던 것 같다.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정말 관심을 끌려고 했던 것도 같고, 죽었다 해놓고 동호회 활동을 접을 굳은 결심이었던 것도 같다. 그 굳은 결심이 별로 안 굳어서 다시 쪼르르 접속한 게 문제지.

사실 거짓말한 직후에는 내가 잘못인 줄도 몰랐다. 그냥 민망하고 창피하다는 기분이 잠시 들었고, 금세 잊었다. 그게 잘못인 것은 얼마 후 뼈져리게 느끼게 되었다. 같이 수다떨고 놀던 H라는 아이가 친구와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가다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게시판에 올라왔다. 모두 믿을 수 없어했다. 전에 누구누구처럼 장난일 거라고 했다. H와 가까운 사람 몇이 확인해주고 조문을 갔다온 뒤에야 H의 죽음이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슬픔과 함께 감당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제서야 거짓말의 무거움을 조금은 알아먹게 되었고 함부로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 아침 대양에 빠진 건포도향 커피를 진하게 내리고 허니버터비스킷을 구워 꼬맹이들과 함께 먹으며 이 책을 펼쳤다. 며칠 전 십대가 된 큰꼬맹이가 책 제목을 소리내어 읽으며 호기심을 보였다.
거짓말 읽는 법?
응. 거짓말이 옳다 그르다 하는 책 아니고, 거짓말이란 무엇인가 알아보는 책이야.
그렇군. 거짓말에는 상대방을 위한 거짓말이 있고, 세상을 좋게 하려는 거짓말도 있고, 자기 이익을 위한 거짓말도 있어.
야, 그런 건 어디서 봐서 아는 거야?
고릴라랑 고양이 나오는 책 있잖아. 고릴라가 텔레비전 부쉈는데 고양이가 자기가 그랬다고 감싸주잖아. 고양이는 고릴라를 정말 사랑해서 거짓말을 한 거야.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우리는 친구 이야기였다. 거짓말을 생각할 때 대부분은 남을 속이고, 그로 인해 상처를 주고, 그러니 거짓말은 나쁘다, 하는 담론에 매몰되고 만다. 그런데 꼬맹이가 대뜸 선의의 거짓말부터 이야기하는 게 놀라웠다. 언젠가 머리 큰 꼬맹이가 다 엄마를 위해서야, 알면 쓰러져, 하면서 나를 속이는 미래를 생각한다. 콜버그 도덕성 발달이론에 별로 맞지 않게 자유롭게 자라는 꼬맹이를 보면 나의 양육 태도와 내가 설파한 프로파간다가 얘 인성과 사회성에 과연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지 잠시 회의감도 든다. 네 인생이니까, 정신 단단히 차리고 잘 살려무나...내 말 너무 심각하게 듣지 말고…

이 책은 윤리, 도덕적 판단에서 벗어나 인식론의 관점에서 거짓말이 무엇인지 이해하고자 한다. 거짓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저해하는 것들을 하나씩 짚어간다. 예를 들면 거짓, 거짓말, 거짓말 하는 사람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잊는다. 누군가 나에게 거짓말을 한 번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이해를 방해한다. 거짓말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소통을 원하고, 대화가 이루어지고, 그 매체가 언어이기 때문이고, 또한 거짓말에 속는 사람이 바라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것은 거짓말이란 도덕적이지 못한 누군가가 자기 이익을 얻기 위해 누군가를 속이려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통념을 벗어나야 진정 거짓말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한나 아렌트의 생각 일기 중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할 수 없다면 나는 자유롭지 않다.”는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거짓말을 할 능력도 있어야 하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자유도 전제되어야 한다. 단순하지가 않다.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앎이란 무엇인가, 지식과 믿음과 의견의 차이는 무엇인가도 물어야 한다. 앎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니 자연스레 칸트의 철학도 이 책에 자주 등장한다. 저자는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은 하이데거의 세계, 끝없이 의심한 끝에 도달한 데카르트의 (그걸로 뭘 더 할 수 있겠어 싶은) 결론, 그리고 야스퍼스의 진실에 대하여에서 성토하는 거짓의 문제도 언급된다. 아 다 어려워...그래도 야스퍼스의 글을 인용한 부분은 왠지 적어 놓고 싶었다. 우리가 동등하고 평등한 존재로 만날 떄에야 가능한 함께 하는 생각에 대한 부분이다.
“우리는 상대가 진정성을 가질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나부터 먼저 속을 열어 보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나의 개방성이 진정성을 가지며, 그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줄 책임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있다. 나는 솔직함 그 자체이며, 내 목적을 위한 어떤 수단으로 개방성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또 내가 어떤 인간을 믿고, 이 믿음이 어떻게 자라나며, 그리고 이 믿음이 진실이라는 보상을 얻을지 아니면 환멸을 안길지 하는 책임 역시 나의 몫이다.”
거짓이 아닌 진실을 택해야 할 이유를 멋지고 용감하게 선언한 말로 들렸다. 누군가와 만나고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 고립되지 않고 ‘너’를 만나고 ‘우리’를 이루기 위한 전제 조건.

철학 담론은 확실히 어려워서 제대로 이해한 부분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드문드문 안다는 것, 믿는다는 것, 내가 거짓, 거짓말, 속이고 속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온 관점과 그와는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들에 관해 먼저 산 철학자들의 생각과 저자의 관점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뭔말인지 잘 모르는데 흥미롭게 읽히는 신기한 책이었다. ㅋㅋㅋ 반납 전에 다시 한 번 읽어볼까 생각 중이다.

거짓말에 대해 이야기 하자니 믿음에 대한 것도 궁금해졌다. 지금 내가 쓴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어떻게 진실과 거짓을 받아들일 것인가. 글을 쓴 내가 사실은 50대 미혼 남성에, 아이는 낳은 적도 키운 적도 없고, 아침엔 순대국밥으로 해장을 했고, 이 책을 읽지도 않고서 남이 써 놓은 글들을 여기저기에서 긁어모아 짜 맞췄을 수도 있지 않은가. 이 책에는 칸트도 한나 아렌트도 데카르트도 하이데거도 야스퍼스도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을 수도. 철학책이 아니고 거짓말을 잘 파악하는 요령을 담아둔 처세술 내지 자기 개발서일 수도 있잖아. 누구도 이런 의심을 하면서 남의 글이나 말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렇게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 정보를 수집하다가는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할테니까. 다른 사람과 아무런 연결고리를 만들지 못할테니까. 그러니 인간이 가진 기본값은 의심과 불신보다는 믿거나 ‘적당히 속아주는’ 능력인지도 모르겠다. 의심과 불신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은 전지전능과 통제에 대한 욕심이다. 그러니 내려놓고, ‘나부터 속을 열어보이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삶을 살아야겠네, (이미 그러고 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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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01-21 1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점점 물이 오르다 못해 넘쳐흐르는 반님의 리뷰.... 신년에는 독서신이 내리셨군요!!

반유행열반인 2020-01-21 18:09   좋아요 0 | URL
syo님 재치의 발끝만큼이라도 따라가고 싶은데요...그냥 마구잡이로 읽고 쓰는 요즘이어요 ㅎㅎ

무식쟁이 2020-01-24 18: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구잡이로 읽고 쓰는게 이정도라는 거죠?
(요즘 1일1페이퍼 하시는군요. )

반유행열반인 2020-01-24 22:00   좋아요 0 | URL
하루 하나는 아니고 이틀에 한 번 정도 올려요 ㅋㅋ복직 전 발악...

무식쟁이 2020-01-24 1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열반인님 목소리가 일케 이쁘시다구요?? 😲
전투적으로 걸걸허숙희 보이스일 것만 같은건 저만의 편견. 이게 바로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군요.

반유행열반인 2020-01-24 22:00   좋아요 0 | URL
저거 다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이펙팅...ㅋㅋㅋㅋ속고 계십니다. 제목부터 거짓말이잖아요.

2020-01-24 1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1-24 21:58   좋아요 0 | URL
우와아아아아!!! 진짜 이렇게나 비스무레한...왜 이럴까요 우리 ㅋㅋㅋ

초딩 2020-01-27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음사전의 오해가 떠오르네요~
오해: 실수로 알게된 상대방의 진실
ㅎㅎ
이 책 읽고 싶어요에 추가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1-27 13:16   좋아요 1 | URL
책 자체는 어엄청 나게 재밌진 않아요 ㅋㅋ철학책 좋아하시는 분들은 좋아할 듯해요. 네임드들이 막 한 번씩 번갈아가며 말 보태거든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