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연출의 사회학 -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연기하는가
어빙 고프먼 지음, 진수미 옮김 / 현암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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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6 어빙 고프먼.

6년 전에 같은 저자 같은 역자의 ‘상호작용의례’를 읽었다. https://m.blog.naver.com/natf/221297909803
내용과 용어가 생소하고 어려운데도 사람끼리 대면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방식이 흥미로워서 열심히 정리하면서 읽었다.
‘자아 연출의 사회학’은 어빙 고프먼의 첫 저작이고, 상호작용의례는 이 책보다 8년 후에 나왔다. 사회학, 사회문화 공부할 때 미시사회학, 상징적 상호작용론이라고 언급되는 짤막한 부분이 바로 어빙 고프먼과 랜들 콜린스 같은 학자들의 연구와 이론에서 나온 것이다. 같은 역자가 번역한 랜들 콜린스의 ‘상식을 넘어선 사회학’도 쟁여놨는데 곧 (아마도 몇 년 안에…) 봐야겠다. ’사회적 삶의 에너지’도 궁금한데 비싸서 아직 안 사고 망설이고 있다…

책의 차례는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1. 공연
2. 팀
3. 영역과 영역 행동
4. 모순적 역할
5. 배역에서 벗어난 의사소통
6. 인상 관리의 기술
7. 결론

아 써 놓고 보니 왜 읽은게 하나도 기억 안 나...옮긴이의 말에 역자 선생님이 한 쪽으로 친절하게 요약해 놓으셨다. 그걸 그대로 옮겨 보자...ㅋㅋㅋ

“우리의 삶은 수많은 일상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되고, 상호작용은 어떤 종류든 남들 앞에서 개인이 자아를 연출하는 ‘인상 관리’공연의 성격이 있다. 공연(상호작용)은 여러 사람이 팀으로서 협력해야 가능한 협동 작업으로서, 유대 형성의 기제로 작용한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 공간에는 공연이 이루어지는 무대 위와 공연을 준비하고 공연을 마친 후 긴장을 푸는 무대 뒤가 있다. 무대 위와 무대 뒤는 물리적으로 분리되는 경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분리된 그 두 영역에서는 사람들의 겉모습, 몸가짐, 행동 방식도 상반되게 나타난다. 또한, 공연에는 공연자와 관객뿐만 아니라 공연을 돕거나 공연자들의 관계를 복잡하게 만드는 다양한 형태의 모순적 역할도 있다. 무대 위라고 해서 반드시 공연자들이 맡은 배역만 연기하지는 않는다. 배역에서 벗어난 은밀한 의사소통이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배역에서 벗어난 은밀한 의사소통도 공식 의사소통에 못지않게 공연자들의 유대를 강화하는 기능을 하며, 때로는 공연자와 관객, 공연 팀들의 지위 차이와 경계선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공연에 갖가지 장애가 생겨 인상 관리에 차질이 생기면, 사람들은 보통 공연을 중단하기보다는 수습하는 경향이 있다. 공연자가 방어 기법을 동원하거나 관객이 공연자를 보호하거나 관객이 공연자를 돕는 요령을 발휘하도록 공연자가 관객을 유도하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아를 획득하고 유지하며(일관되고 변함없는 자아가 아니라 복수의 상황적 자아), 사회는 더러 대립하고 분열하는 때가 있어도 대체로는 서로 협력하는 개인들의 유대로 형성되고 유지된다.”

...천잰데? 역시 전공자 교수님 클라스. 맞아맞아 내가 읽은 게 이런 내용이었어ㅋㅋㅋㅋ
공연으로 번역해 놓았지만 퍼포먼스, 라는 용어를 생각하면 오히려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어빙 고프먼은 연극적 관점, 이라고, 사회생활의 장을 연극에 비유해 개개인 또는 팀의 상호작용을 연출과 연기를 통해 사람들이 합의한 상황 정의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과정으로 설명했다. 이 얼마나 신통하고 재미난 표현인지. 살아오고 겪어온 상황들을 이 관점에 대입해보면 신기하게 들어맞고 해석하기 쉬워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모든 사회 관계와 상황을 다 포용할 수 있는 틀은 아니라고 저자도 말하긴 한다.
이런 비판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저자의 관점대로라면 사람들은 사회와 관계와 상황 정의를 유지하고 문제가 생겨도 그것을 수습하는 쪽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는 듯 그려지는데, 이런 관점은 극적인 변화나 극단적인 갈등, 혁명, 전쟁, 폭력 같은 상호작용에 대해서는 설명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그런건 기능론 갈등론 구조주의 같은 데서 열심히 하고 있으니 뭐… 그러니까 되게 잔잔하고 평온한 일상생활과 자잘하고 사소하면서 극복 가능한 문제 정도까지만 설명 가능...
또한 뭔가 문제 상황이 생기는 것은 각각의 역할을 맡은 공연자가 제대로 퍼포먼스 수행을 못하거나, 수행을 못할 만한 상황이 닥치거나 했을 때인데 이 말대로라면 지나치게 사회문제에 대해 개인에게 많은 책임을 돌리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어쨌거나 자아라는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고, ‘자아정체성’하고 땅땅 못 박아 놓을만한 것도 아니고, 유동적이고 공연 무대에 따라 달라지고 같이 공연하는 사람들, 어느 팀에 서느냐, 공연자냐 관객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 점은 흥미로웠다. 이를 테면 교사는 정말 잘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서 교사로 인정 받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교사라고 여길 만한 퍼포먼스를 잘 수행하고 주변에서도 그 퍼포먼스가 잘 시연되도록 받쳐주고 맞장구쳐주고 퍼포먼스가 위협받을 때 거들어주고 해서 교사 노릇을 계속하게 된다는 것이지...ㅋㅋ 어떤 속성이 주체에 딱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상황과 상호작용 중에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통찰은 끄덕끄덕 하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나이기 위해서는 고립되고 은둔해서는 안 된다는 거...수많은 관계 안에서 나름대로 요구받는 것이든 내가 보여지고 싶은 모습이든 열심히 보여주려고 분투해야 그런 내가 있을 수 있다는 거...오독 오해 오역한 건지 몰라도 그렇게 알아 들었다.

1월 30일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 세 권 드디어 다 봄 ㅋㅋㅋ그런데 도서관 언제 여냐 열어야 반납하지...회원증 만들고 겨우 두 번 대출함...코로나야 얼른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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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6 0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얼마전에 어빙고프먼 짧게 언급하는 책 읽었었는 데. 역시 흥미롭다..*

반유행열반인 2020-06-17 19:00   좋아요 0 | URL
역시 사회학책 하면 쟝쟝님 ㅎㅎㅎ
 
맨 얼라이브 - 남자를 살아내다
토머스 페이지 맥비 지음, 김승욱 옮김 / 북트리거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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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5 토마스 페이지 맥비.

사람, 인류를 가리키는 man, human, mankind 같은 말을 대체할 말이 있나 궁금하다. 문득 경애의 마음(맞나)에서 피조, 하고 부르던 말도 떠오른다. Creature. 그런데 피조물, 하고 옮겨두면 또 너무 수동적인 느낌이 든다. 우리는 누군가 만들어내고 영향 받아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스스로 만들어가는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런데도 자조, 주체, 하고 사람을 부르면 또 사람이 아닌 기분이라. 에라 모르겠다. 성중립적인 말들 또는 중심을 여성으로 전환하는 신조어들을 접하지만 늘 수긍이 가는 건 아니다.
성 정체성은 그렇게나 나를 살아가는데, 세상을 바라보는 데 큰 힘을 행사한다. 지정된 성별과 스스로 느끼는, 원하는, 파악하는 성별이 다를 때 그 사람의 삶은 쉽지 않다. 사는 거 자체가 쉽지 않은데 스스로를 인정하고 선택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주변을 설득하거나 설득할 필요가 없다고 다짐하고 편견과 폭력에 맞서고 지워지는 것을 견디며 숨어 살거나 지워지는 것을 거부하거나 하게 된다. 뭔가를 끊임 없이 선택하게 만드는 세상과 싸워야 한다.
트랜스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 다큐멘터리, 기획 기사 같은 데서 많이 접했다. 트랜스남성에 대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적게 드러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로 했다.

토마스가 남자로 살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표현은 내내 문학적이고, 주변, 신체상태, 내면 묘사가 치밀하고 섬세한 에세이였다. 인스타그램으로 저자의 페이지를 찾아보았다. 아내와 함께 있는 그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그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다니고 어릴 적 성학대를 가한 아버지를 직면하고 엄마에게 진짜 아버지를 묻고 강도에게 총살 당할 뻔 하다가 자신이 여자(로 태어났고 아직도 그렇게 보인다)라는 이유로 겨우 살아남는 동안 파커라는 연인, 배우자가 함께한다. 그런데 책 표지 날개에는 제시카 블룸과 살고 있다고 써 있었다. 같은 사람인가? 책의 가장 가까운 시점이 십 년 전이니 사랑은 흐르고 변하고 달라질 수 있는 거지. 그런데도 괜히 슬펐다. 책에서 파커가 남성호르몬을 맞으며 변화하는 토마스를 보고 동요하는 장면이 계속 나와서 더 그랬다.

괴물 같은 아버지처럼 살지 않기, 남을 해치지 않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기,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토마스는 그렇게 살기 위해 애썼다. 가슴을 제거하고, 역기를 들고 윗몸일으키기를 하며 근육을 키우고, 남성호르몬을 맞고, 책에 쓰인 시점부터 몇 년 뒤에는 아마추어 복서가 된다. 그렇게 폭력적이거나 타인에게 위협을 가하는 존재가 아닌, 남성성을 스스로 만들어간다.
이름을 고르고, 신체적 성별을 고쳐가고, 부모를 직면하며 받아들일 사실과 그러지 않을 것을 골라내고, 그렇게 자신을 자신이 원하는 존재로 만들어나가는 토마스의 모습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토마스가 10년 넘게 아버지를 안 본 것처럼 나도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지 13년이 되었다. 자라면서 20년 동안 아버지에게 맞은 적은 없었다. 20살에 술주정하며 엄마를 때리는 아빠를 노려봤다고 얼굴을 맞은 게 처음이었다. 그러고 4년 뒤 또 엄마를 때리려는 아빠를 먼저 때렸다가 얻어 맞은 날이 마지막이었다. 그날로 엄마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 원하지 않는데 술취한 아빠에게 입맞춤을 강요당한 적이 한 번 있었지만, 성 학대라 할 만한 일을 당한 기억도 없다.그렇지만 아빠는 손가락으로 동생의 엉덩이나 성기를 찌르는 짓을 장난이랍시고 수차례 저질렀다.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도망다니는 모습을 나는 그저 옆에서 지켜보았다. 공부 안 하고 책상 안 치운다는 이유로 훈육이랍시고 술 취한 채 동생을 밤늦도록 무릎 꿇려 놓고 잔소리하는 모습 또한 보아야 했다. 무서워서 숨죽이고 공부하는 척하며 외면했다. 비겁하게도 내가 직접 타겟이 안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을 것이다. 조금 크고 난 뒤에야 엄마에게 주정을 하거나 동생을 괴롭히면 그만 좀 하라고 화를 낼 수 있었다. 그제서야 삼가는 척 하는 아빠였지만 술에 취하면 내가 반항했던 걸 분해하며 ‘네가 00대 나왔으면 다냐’하고 맥락 없이 화내곤 했다. 동생은 지금도 제대로 말리지 못한 엄마와 나를 향해 원망이 많다. 가장 상처 입었고 편히 살지 못한다. 가족들과 사이도 무척 나쁘다.

토마스가 아빠 로이를 만나러 가서 그와 찻집에서 이야기 나누는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 토마스는 아빠의 장례식에 갈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빠를 다시 볼 생각도 없고 아빠가 죽어도 장례식에 상주가 될 생각도 찾아갈 생각도 없다. 이게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토마스처럼 뭔가 맺힌 걸 풀 기회도 함께 포기한 것을 안다. 사실 실질적인 위협도 있다. 이혼한 부인을 끝내 쫓아와 죽인 남자의 뉴스를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눈에 띄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지르던 게 엄마가 법정에서 아빠를 대할 때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게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몇 년 전까지 끈질기게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아직도 우리의 거처를 수소문하고 다닌다는 소식에 꿈자리가 사납다.
개같은 아버지가 세상에 너무도 많지만, 그런 사람이 되지 않고 잘 자라는 아이들도 많다. 나는 아직 모르겠다. 스스로를 미워하고 내가 나쁘다고 여기면서도 그 이유를 찾지 못했었다. 그런데 결국은 그렇게 여길만한 이유를 만들고 다닌다. 나는 이제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솔직하고 거짓말을 못하는 게 내 장점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는 이제 그런 사람이 못된다. 확실히 좋은 사람이 되긴 틀렸고 더 나쁜 사람, 누군가를 해치고 다치게 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만 바라는데 자신이 없다. 올바르게 살겠다는 다짐은 커녕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 자체를 포기한 것 같다.
뜬금없이 씩씩한 생존자를 보면서 괜히 자괴감 느낀 날이다. 오래 아파서 그런 것 같다. 이제 거의 다 나았고 긴 병가도 오늘로 마지막. 열심히 일하고 남에게 조금이라도 도움될 만한 일을 해야겠다. 그러면 나아질지도 몰라. 나쁜 놈이 될 가능성이 조금은 줄어들 지도.

미국, 유럽 발매판은 우리나라 책 표지랑 다르다. 하나는 토막난 검은 남자의 신체, 또 하나는 종이인형 같은 사람 형상. 토마스는 열심히 그 토막들을 바로 맞추고 종이장 같이 날리는 존재를 탄탄히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적어도 이 책 안에서는 그랬다. 나도 그렇게 지금보다는 강해지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약한 몸과 약한 마음이 악한 존재가 되기란 순식간이지 싶다. 누구도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없다. 잘못된 마음가짐과 잘못된 선택 같은 게 차곡차곡 쌓이다 어느 순간 훅.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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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쟁이 2020-06-07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구.. 병가중이셨군요.
아프지마세요.. ㅠㅠ

반유행열반인 2020-06-07 11:3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오래 갔는데 이제 거의 다 나아서 다음주 출근해요 ㅎㅎㅎ
 
EQ 스티커북 만5.6세
삼성출판사 편집부 엮음 / 삼성출판사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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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13쇄 2003년에 나온 이 스티커는 대체 어디 숨어 있다가 중고시장에 나왔는지. 어쨌든 지금 열심히 옆에 꼬맹이가 붙이고 있다. 요즘 나온 왠만한 스티커북은 큰놈이 다 붙여봤는데 이 스티커북은 그 조상님 뻘되어 보여...꼬맹이들은 신상 안 따져서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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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사랑을 위한 되풀이 창비시선 437
황인찬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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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중지


-20200602 황인찬.

올초에 시 읽는 법이라는 책을 읽고 매달 한 권의 시집을 읽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웠지.
원대한 것은 그리고 목표는 늘 그러듯 실패로 향한다.
중간에 예쁜 시집 선물 받고도 아껴 읽는다고 너무 아껴서 아직 다 못 읽었다. 그건 이 다음에 다 읽을 시집!
그래서 이 시집은 올해 처음 그리고 아마 인생 처음 내 돈 주고 사서 다 읽은 시집일 것 같다.
시를 잘 모르지만 잘 읽히고 좋았다.
사실 전자책을 샀다. 그리고 사기 전에 유튜브로 시인이 낭독하는 사랑을 위한 되풀이를 들었다. 목소리가 무척 좋았다.
수다떨듯 말과 글의 군더더기와 쓰레기를 자꾸만 만드는 나는 한참 생각하고 누르고 자르고 줄여 담은 말이 글이 그저 신기하다.

밑줄긋기

“이런 삶은 나도 처음이야”

그렇게 말하니 새하얀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졌고
(사랑과 자비 중)

파도에는 끝이 있고, 해변의 모래에는 끝이 있고, 바다의 절벽에도, 바다 절벽 위의 소나무에도, 파도가 깎아놓은 몽돌에도 끝이 있는데

아직 우리는 끝을 보지 못했구나
그런 생각들 속에서

끝이 있는데도 끝이 나지 않는 날들 속에서

사랑을 하면서
계속 사랑을 하면서

우리는 어디를 둘러봐도 육지가 보이는 섬의 해변에 앉아 있었다

돌아가는 배 위에서는 멀미를 하는 너의 등을 두드리며

이렇게 계속되는 것이구나
생각을 했고
(소무의도 무의바다누리길 중)

우연히 얻은 것을 우연히 얻었다는 이유로 부끄럽게 여기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았다면

그 생각을 여기 적지 않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느끼는 참을 수 없는 기쁨과 배를 앓는 듯한 불안을 그리는 순간이 없으면 좋겠다

영원히 계속되는 미래가 오지 않는다면 좋겠다

아침도 오지 않는다면 더 좋겠다
(그것은 가벼운 절망이다 지루함의 하느님이다 중)



공원에 떨어져 있던 사랑의 시체를
나뭇가지로 밀었는데 너무 가벼웠다

어쩌자고 사랑은 여기서 죽나
땅에 묻을 수는 없다 개나 고양이가 파헤쳐버릴 테니까

그냥 날아가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 꿈에는
내가 두고 온 죽은 사랑이
우리 집 앞에 찾아왔다

죽은 사랑은
집 앞을 서성이다 떠나갔다

사랑해, 그런 말을 들으면 책임을 내게 미루는 것 같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그저 무책임한데

이런 시에선 시체가
간데온데없이 사라져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음 날 공원에 다시 가보면
사랑의 시체가 두 눈을 뜨고 움직이고 있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전문)

“우리 이야기 좀 하자”

맞은편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어떨까 목소리가 들려오면 이야기라는 것이 시작되겠지

어떤 목소리는 이야기와 무관하게 아름답고, 어떤 현실은 이야기와 무관하게 참혹하고, 그런데도 이야기를 하자는 사람이 있구나

이야기라는 것은 또 대체 무엇일까
(부서져버린 중)

(시인의 말 중에서)
이 시집은 1959년 11월 30일에 발간된 전봉건의 첫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에서 제목을 빌렸다. 꼬박 60년의 시차를 두고 있는 셈이지만, 특별히 의식하고 정한 것은 아니다. 전봉건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인데 어째서 그를 사랑하느냐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이유 같은 것은 언제나 나중에 붙는 것이다.

사랑 같은 것은 그냥 아무에게나 줘버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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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의 반딧불이 (경쾌한 에디션) 마음산책 짧은 소설
손보미 지음, 이보라 그림 / 마음산책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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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1 손보미.

중편 빼고 단편집 두 권과 장편까지 책으로 묶인 손보미 소설책은 거의 다 봤다.
이번 책은 양장본 말고 경쾌한 에디션이라고, 얇은 표지에 군더더기 없이 반 값으로 나온 건 딱 좋았다. 외국에서는 페이퍼백이라고 하나? 난 쓸데없이 띠지 두르고 겉지 감고 무겁게 양장해서 들고다니기 힘든 것 말고 이런 판형도 자주 나오면 좋겠다.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 동안 잡을 수 있었던 단 하나.’
짧은 서문 쯤 될까, 이 문장 읽는데 되게 슬펐다. 나는 손보미의 단편과 장편 모두 흡족하게 읽었었는데 아주 짧은 소설들을 모은 이 책은 재미없다...하면서 참고 꾸역꾸역 읽다 쉬다 하다 읽어 치우자! 하고 하루만에 몇 주 간 방치하던 걸 절반 남은 걸 후다닥 겨우 읽었다.

그래도 허리케인 처럼 이전에 읽은 소설의 결말을 다시 쓴 걸 읽는 게 흥미로웠고, 제임스 설터의 플라자호텔을 노린의 관점에서 다시 쓴 것이나 소나기에 제3의 관찰자를 등장시켜 이어 쓴 것도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손보미 글을 처음 읽은 게 약간 느와르? 추리물? 같은 짧은 글이었는데 탐정이나 살해 당한 남자 같은 게 나오는 글들은 그런 소설들의 씨앗 같은 걸 읽는 느낌도 들었다.

큰 제목 아래 작은 소설들이 모듬으로 되어 있는데, 역시 맨해튼의 반딧불이 밑으로 묶인 글 여섯 편이 제일 좋았다.
쓰지 못하는 날들을 보내는 건 참 힘들던데, 울지 말고 예전처럼 반짝이는 것들 다시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봄이 힘내라. 나도 예전에는 쓰지 못했던 반짝이는 것들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왜 묻어가냐. ㅎㅎㅎ

-차례-

불행 수집가와 교환하는 방식 
고양이 도둑 
계시 
불행 수집가 
시간 여행 
아보카도의 진실

잃어버린 것은 그저 잃어버린 것으로 
분실물 찾기의 대가 1_그날 밤 당신이 잃어버린 것 
분실물 찾기의 대가 2_웨딩 앨범의 행방 
분실물 찾기의 대가 3_바늘귀에 실 꿰기 
분실물 찾기의 대가 4_잃어버린 것은 그저 잃어버린 것으로 
최후의 조니워커

맨해튼의 반딧불이 
하이힐 
빵과 코트 
반딧불이 
허리케인 
축복 
크리스마스의 추억 

돌려줘
마지막 밤 
그녀의 눈동자 
돌려줘 
죽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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