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평점 :
판매중지


-20200719 장류진.

지난 달에 소설을 하도 안 읽어서 이번 달에는 다섯 권 읽을 거야! 했는데 이 책과 함께 미션 완료. 전자책 중 짧은 소설 쟁여둔 게 많아서 그런 걸 동원하는 꼼수를 쓰긴 했지만. 다섯 권 넘게 더 볼 것 같기도 하다.

사둔 지는 꽤 되었는데 늦게 펼쳤다. 사진을 보고 예쁘네, 예뻐. 나의 나쁜 버릇인 외모 품평을 하고. 직장인 출신의 소설가, 등단 후 겨우 1년 만에 소설집을 낸 사람, 뭐 그런 이야기들을 열심히 찾지 않아도 들려오고, 젊은작가수상작품집에서 운전 연수 받는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어봤다.
유독 직장인이 많이 나오는 소설집인데, 약간 설익어서 작위적이다 싶은 것도 있고, 읽고 나면 글썽글썽하게 만들거나 여운이 남는 글도 많이 있었다. 그냥저냥 잘 읽었다. 계속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작가의 말 마지막이 좋았다. 나도 언젠가 다짐한 말인데 요즘은 그런 마음이 희미해지고 있어서 그런가 한 번 더 그 말을 보았다.

-잘 살겠습니다 …… 『현대문학』 2018년 12월호
청첩장, 친분과 자본의 손익계산, 겪고 나면 정확한 수치로 명확히 갈리지 않는 관계와 마음 같은 걸 늦게 알게 된다. 아무도 그런 걸 가르쳐주진 않더라.

- 일의 기쁨과 슬픔 …… 『창작과비평』 2018년 가을호
월급을 포인트로 주는 새끼 진짜...그런데 생각해보니 정말 포인트나 화폐나 뭐가 다른가 싶기도.,.이 소설도 그렇고 많은 소설이 약간 판타지 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나치게 훈훈한 직장인 판타지...위로와 공감...내 동료들 꽤나 다정한데 왜 나새끼 비관적임...

-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 『문장 웹진』 2019년 3월호
화자는 나쁜놈일까? 나쁜놈 까지는 아니더라도 속물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그리고 싶었던 것 같은데 조금 가혹한 느낌도 들었다.

- 다소 낮음 …… 『문학3』 문학웹 2019년 6월
이 책이랑 작년도 이상문학상 작품집도 같이 읽고 있는데 장은진의 냉장고 나오는 소설이랑 약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홍대에서 10년 전에 인디밴드한다고 깝치고 다니던 시절이 떠올랐다. 눈물 쥬르륵...

- 도움의 손길 …… 『악스트』 2019년 9 /10월호
묘한 위화감이 느껴지게 하는데 하고 싶은 말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책에 부자집앞 거지가 등장하는 장면과 가사도우미와의 미묘한 갈등은 병치하기 무리였던 것 같고. 집주인도 도우미도 둘다 얄밉고 치사하고 어느 하나도 애정이 안 가게 그려놔서 더 애매했던 것 같다.

-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 …… 『릿터』 2019년 2 /3월호
짧은데도 뭔가 짠한 느낌. 일 시작도 전에 돈부터 미리 쓰는 기분이란… 커피 값 몇 천원에 속은 기분 드는 것도 알 것 같고...사실 나는 며칠 전에 아이스 가격이 더 비싼 카페에서 그 더운 날 굳이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먹었거든...나는 택시를 타는 대신 젖은 겨드랑이로 버스를 기다릴 놈이거든...
나의 첫 출근길은...다른 건 기억 안나고 아주 이른 아침 나보다 한참 앞서 걸어가던 포니테일의 뒷모습. 늘씬하고 왠지 예쁠 것 같은. 실제로 예뻤고 내 첫 직장동료였다. 일도 잘하고 싹싹하고 다정하고 귀여웠던 내 동료는, 원래 그 자리였던 사람이 예정보다 일찍 복직하는 바람에 겨우 11개월 남짓 채우고 한달도 안 되는 기간 때문에 퇴직금 못 받고 떠났다. 엄청 화나는 일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슬펐다. 그래 놓고 나는 그 친구에게 제대로 연락도 하지 못하고 벌써 십 년이 넘게 흘러 버렸어...

- 새벽의 방문자들 …… 테마 소설집 『새벽의 방문자들』
음. 으음. 성인 스팸메일과 오피스텔 성매매와 잘못 찾아오는 사람과 성매수자로 마주한 전애인과… 정신 없는 이야기였다.

- 탐페레 공항 …… 『모티프』 2019 신인 특집호(발표 당시 제목 ‘Do or Do Not’)
마지막이 좀 억지 감동 같긴 해도 그런 억지 감동 같은 게 나한테는 좀 필요한 거 같다...그런 걸 못 만들어서 내내 퍽퍽하게 살고 퍽퍽한 것만 쓴다. 닭가슴살 퍽퍽해.
자일리톨, 핀란드, 경유지, 할아버지, 폴라로이드 사진(그냥 그 자리에서 주면 될 건데 그냥 필름카메라로 하지…), 오로라, 잃어버린 꿈, 부채감, 뒤늦지만 아예 늦지 않아 할 수 있는 안도.
완벽하진 않아도 이 소설이 이 책에서 제일 좋았다.

+밑줄 긋기(거의 안 침...밑줄 치고 싶은 문장 쓰고 싶다…하아…)
-감사합니다, 선생님.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

-이십평대 아파트에는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지 않는다. 그것이 현명한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아이를 그랜드 피아노에 비유하는 비정함, 그런데 그런 심정이 또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라...피아노가 들어오면 공간을 넓히게 되더라구요…이상하게도 피아노 두 대 들여놓으니 자꾸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공간보다는 시간과 자유도의 문제인 듯. 그것도 도우미 부르듯 돈으로 해결하는 집도 많더이다...저는 몸으로 때우지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이버 2020-07-19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도움의 손길‘에서 등장인물 ‘둘다 얄밉고 치사‘하게 느껴졌어요...그래서 ‘도움의 손길‘보다 ‘연수‘가 개인적으로 더 좋았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7-19 09:5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작가님이 애초부터 인간은 얄밉고 치사한 존재야! 하고 그걸 설파하려는 분이라면 성공한 글일텐데 다른 글 대부분은 또 되게 온정의 손길이 많이 느껴져서 그런 쪽을 더 잘 쓰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알고 보니 따뜻한 작가님...그런 따뜻한 글 좋아하시는 파이버님...

무식쟁이 2020-07-19 15: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한다면한다 반반님.
뭔가 되게 보기좋습니다. ^^
저는 올해 일주일에 한권 겨우겨우 읽어내고 있어요. 그래도 이게 어디냐 하며 자기만족 중^^

반유행열반인 2020-07-19 16:05   좋아요 0 | URL
저 한다면 다 한다, 내가 못할 건 뭐냐, 하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겸손해지네요. 제 뜻대로 안 되는 게 생각보다 아주아주아주 많더라구요. 하나라도 잘 하고 싶은데 알고 보니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게 없어요...그래서 책 권수 뿔리기 같은 쉬운 과제에만 집중중....
 
[전자책] 관능수업
리디 살베르 지음, 백선희 옮김 / 뮤진트리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0715 리디 살베르.

이 책을 펼치려는 분께.
-제목에 속지 말 것
-목차에 속지 말 것
-공쿠르상 수상작가란 홍보문구에 속지 말 것
-시대착오적인 제안. 여기 나온대로 여기서 배운대로 행동하다가는 수치심을 느끼며 자살할 확률을 높일 수 있음
-1980년대쯤 나왔나 했는데 2016년에 출판된 경이로움
-시간이 쳐남아돌고 심심하면 금세 읽으니 읽겠다고 고집하면 말리지는 않음
-하나도 안 관능적임
-내 시간 내놔...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07-16 0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16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17 0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17 1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다그리기 2020-07-19 1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누군가 내 글로 인해 혹시라도 책을 보고싶은 마음을 접을까 소심한 염려에 홍길동처럼 별로인 책을 별로라고 못한채 망설이는 저는, 이런 솔직한 평 너무 좋네요^^
마지막 내 시간 내놔.. 하나로 모든 것이 다 설명되니 완전 취저. ㅋㅋ
유쾌하면서 날카로운 님의 글 부러워요

반유행열반인 2020-07-19 11:55   좋아요 1 | URL
좋은 평 많이 남기셔서 너그러운 독자시구나...했는데...숨겨둔 속마음 한 번 펼쳐보기 시작하시져...
글쓰시는 솜씨를 보니 이렇게 열심히 다른 분과 댓글 교류하시면 반 년 안에 알라딘 인싸 정도는 담당하실 듯합니다....핵아싸인 제가 하는 말이라 공신력은 없지만요...ㅋㅋㅋㅋㅋ감사합니다.
 
엘살바도르 엘 보르보욘 - 200g, 핸드드립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7월
평점 :
품절


안녕 커피. 커피 리뷰 안 쓴다고 하고는 적립금에 눈이 어두워 매달 줄창 쓰는 구나. 
어제는 19살 때 딱 한 번 본 친구를 18년 만에 만났다. 어떤 인연들은 대면 없이 말로만 오래 이어지기도 한다. 밀레니엄 때 청소년기 보낸 내 또래들은 그런 친구들이 꽤나 있을지도. 가족이나 직장 동료외의 사회적 소통은 알라딘 댓글이 거의 전부인 나새끼를 보면 뭐...끄덕끄덕. 히키고모리의 사회생활이란. 
아, 여튼 신촌의 커피숍에 갔는데 커피 원두를 고를 수 있다고 했어. 커피 산지 같은 걸 알려주나 했는데 블루 브라운 옐로우(?마지막 건 정확한 색도 기억 안나...)중에 고르래. 산미가 있다는 블루를 골라서 이층 흡연실 옆에서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는 친구를 보았다. 너는 무슨 색 골랐냐. 나 블루. 나돈데. 그런데 친구는 아이스 나는 뜨거운 걸 마셨으니 원두가 같아도 같은 맛은 아니었겠지. 

원두볶아서 갈아놓은 거 보면 다 비슷비슷한 똥색 가루로 보이는데. 우리는 신맛 단맛 쓴맛 따지고 온갖 알고 있는 꽃과 과일의 향을 동원하여 다른 커피와 내가 마시는 커피를 구분하려고 애를 쓰지. 특히나 커피 마케팅을 위해 그런 표현들이 동원되고. 블렌딩에는 예쁜 이름이 붙고 싱글 원두에는 미지의 나라 이름과 지역명과 농장 이름이 붙은 채 흥미를 끌지.

우리의 상상력은 재미있어서, 언어로 지시되는 맛과 향과 식감을 정말 느끼는 것처럼 여기게 돼. 반대로 우리가 느끼는 맛과 향과 식감을 언어로 자꾸 표현하고 싶어 하고.
그렇게 기록된 기억은 생각보다 불완전해서, 막상 예전에 써 둔 커피 리뷰 보면서 원두 주문하려고 보면 먹었던 커피인데도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ㅋㅋ 그래서 커피의 이름과 원산지와 포장지 디자인을 보며 어렴풋하게 다시 살지 말지 고민하지. 그냥 그렇다는 말이 써 있거나 한 번 먹었으니 됐다, 하는 걸 거르는 정도. 

그래서 결국에는 신제품을 산다. ㅋㅋㅋㅋ그러니까 커피콩아 매달 신제품을 내는 전략은 구매욕을 자극하는 데는 나름 효과적이지 싶다. 미지의 맛과 향을 기대하며. 보랏빛 하늘에 먼곳을 바라보는 (아마도 재규어 같은) 고양이과 동물의 실루엣, 멀리 놓인 산이 포장에 그려져 있어.
엘 살바도르를 검색해보았어. 우리나라 자치도 하나 만한 작은 나라래. 저위도의 더운 나라. 살인율이 무지하게 높은 암울한 나라. 
그곳의 커피를 아침에 드립해 먹고 왔는데, 몇 시간 지나지 않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ㅋㅋㅋㅋㅋㅋ
코코넛, 아몬드, 그런 설명을 읽으면 정말 견과류 같은 고소함? 구수함? 이 있었던 것 같아. 산미는 지난 주까지 먹던 수국보다는 조금 약한 것 같다. 그냥 저냥 무난했다.
알라딘 커피는 마트에서 사는 거보다는 비싸지만 신선한 원두 먹는 건 좋아서 한 달에 한 번 할인쿠폰 핑계로 사치를 부린다. 내가 소비하는 건 결국 이미지, 순간의 향과 맛, 카페인으로 얼마간 번뜩이는 정신. 달아난 잠. 

뭔 쓸데 없는 소리를 주절주절 길게도 써놨다. 이럴 거면 커피 한 잔 마시고 책 읽고 독후감이나 쓰라고 말해다오 커피야. 암튼 잘 먹을게. 빠이빠이.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0-07-15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전 중학교 졸업하고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언니는 재수를 했는데 꼴에 성인 됐다고 커피를 홀짝 홀짝 마시기 시작했는데
뭐 나라고 못 마셔? 그래서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게 또 중독성이 꽤 강하더군요.
마약 같아서 세상이 달라보이더라구요.
커피 마실 욕심에 아침에 눈도 잘 떠지고.
암튼 저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네요.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7-15 22:10   좋아요 0 | URL
저는 성인되고도 한참 자라서 (아마도 서른 넘어서 수유 끊고) 커피를 시작했는데
커피 마시는 일이 그저 습관 같다는 생각이 부쩍 듭니다.

바다그리기 2020-07-19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커피 맛을 온갖 과일향으로 표현하는 것이 재미있다고 느껴본 적은 있지만(그 과일향을 1도 못느껴본 초딩 입맛이라^^), 무엇보다 커피에서 시작해 엘 살바도르란 나라를 검색까지 해보는 님의 호기심에 저는 또 호기심이.. ㅎㅎ 반갑습니다. 가끔 들러서 좋은 글 즐기고 갈께요~

반유행열반인 2020-07-19 11:1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바다그리기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0-07-29 2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쓸데 없이 진지하고 고퀄인 반님의 ㅋㅋㅋ 커피콩리뷰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7-30 06:4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쓸진고 아직 이 커피 많이 남았어요...읽은 책 없는데 뭐 쓰고 싶으니 아무말잔치 ㅋㅋㅋ

얄라알라 2020-08-09 14: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커피 리뷰 쓰면 적립금 이벵이 있었네요^^ 커피향 음미하시길~~^^

반유행열반인 2020-08-09 15:16   좋아요 0 | URL
네 이번에 또 신제품이 나와서 마침 얘 다 떨어져서 살까 말까 하는 중입니다. 감사합니다.
 
[전자책]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마음산책 짧은 소설
백수린 지음, 주정아 그림 / 마음산책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0713 백수린.

4월 말부터 문화센터에 소설을 배우러 다닌다. 다음주가 종강이다. 처음에는 주어진 조건에 따라 세 쪽 짜리 짧은 소설을 써 가는 과제를 했다. 이미 원고지 80매 100매 군더더기 주렁주렁한 글을 써 본 뒤라 세 쪽 안에 완결된 이야기를 압축해 넣는 게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매번 분량은 넘치고, 그런데 주제 중심적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데 매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는 물음표들을 받아야 했다. 그러게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사실 하고 싶은 말도 별다른 생각도 없이 그냥 아무 말이나 주절거리고 싶은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불행히도 그런 걸로는 소설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냥 혼자 주절거리는 일기나 하염없이 수다 떨듯 늘어놓는 메일을 쓰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뭐 아무 거나 쓰면 어때. 시간만 잘 가면 되지. 어차피 삶을 채울 다른 유희 거리도 딱히 없어서, 쓰고 싶을 때 쓰고, 쓰기 싫을 땐 읽고, 둘다 싫으면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이러나 저러나 어떻게든 살아지고 언젠가는 사라지고 하지만 오늘은 아냐. 오늘은 어쨌거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몇 천자를 주절주절 끼적이다 집에 돌아왔다.

백수린은 박완서 작가 헌정 짧은 소설집이었나, 멜랑콜리 해피엔딩에서 제목을 맡은 듯한 언제나 해피엔딩, 이라는 짧은 소설로 알게 되었다. 그 글은 이 책에도 실렸는데, 처음에 훅 들어왔던 것에 비해 두 번째 읽을 때는 그저그랬다. 어쨌거나 그 소설 덕에 백수린의 단편집 폴링인폴을 읽었는데 꽤 괜찮았다. 내 취향 아닐 것 같은데 의외로 좋아, 막 이랬다.
이 책도 그랬다. 백수린은 짧은 소설 장인 같다. 짧은 안에도 온갖 장면과 감정과 상념을 밀도있게 접어 넣었다. 내가 소설 수업을 듣는 동안 했어야 할 일들이 이런 것이었을텐데. 아마 계속 못 할 것 같은 일이다. 나는 말에 붙은 실밥과 거스러미와 셀룰라이트 같은 걸 덜어내고 또 덜어내고 그래서 앙상해진 글에 진짜 붙일 게 무얼까 고민하다 그냥 세월을 보낼 것만 같다.

참담한 빛 이란 소설을 읽을 때는 부푼 배의 소녀와 소년만 보고도 울어버릴 것 같았는데, 사고와 오보와 그걸 감추는 소년과 희망이, 어쩌고 하는 걸 보고는 진짜 울어버렸다.
소설집과 같은 제목의 소설은 없지만 마지막 소설에 제목의 말이 나온다. 폭설 속에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리고 누군가의 죽음을 지키는 일. 다 괜찮았지만 마지막 소설이 이 책에서 가장 잘 쓴 소설로 읽혔다.

어쨌거나 잘 쓰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으니 나는 그냥 계속 그냥 못 쓰는 걸로. 못 써도 괜찮으니 아무 말이나 쓰기로 한다.

+밑줄 긋기

-오늘 밤이 지나면 사라져버릴지라도 지금은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기미와 흔적을 언어로 붙잡아두는 일. 굳은살처럼 딱딱해진 마음의 외피 아래서 벌어지는 사세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들을 기록하는 일. (작가의 말)

-“아” 그녀는 나지막이 탄식했다. 아름답다니.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여전히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영화나 소설 같은 데서 본 것처럼 그녀의 발 앞에 남자가 무릎 꿇고 입을 맞추는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소중한 듯 두 손으로 붙잡고 정성껏 입을 맞추겠지. 그녀는 타올을 살짝 위로 끌어당겼다. (어느 멋진 날)

-칼칼한 바람이 부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상준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 대해 생각할 조금의 여유마저 우리에게서 박탈하는 것은 대체 무얼까 생각했다. 우리로 하여금 끝내 자신의 고통에만 골몰하게 만드는 그것은. 그러는 사이 보행자 신호등의 초록불이 들어오고, 상준의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길을 건넜다. 횡단보도로 진입하려던 상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발길을 돌려 포장마차로 다시 향했다. 밀떡볶이와 순대를 사기 위해서. 염통도 잊지 말아야지, 상준은 생각했다. 이 세계는 사람들을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이고 끊임없이 비참하게 만들며 타인에게 잔인해지도록 종용하지만, 이런 세계에 살더라도 그가 아내에게 주고 싶은 것은 오직 사랑뿐이니까.(누구에게나 필요한 비치타올)

-“그 시절에는 뭐가 그렇게 인생에 불안한 게 많던지, 영화만이라도 결말을 미리 알고 싶더라고요. 그러면 나는 해피엔딩인 영화만 골라 볼 수 있잖아요.”

“……괜찮아지나요?”

  박 선생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민주의 책상 위에 차가 담긴 종이컵을 다시 올려놓았다.

  “그 시기만 지나면 그런 불안한 마음은 괜찮아지나요?”

  민주의 질문에 박 선생은 아무런 말없이 웃더니, “엔딩이 어떻든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팝콘을 치우고 나면 언제나 영화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다음엔 다 괜찮아져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박 선생은 커다란 배낭을 다시 둘러메더니 과사무실의 문을 열고 아무도 다니지 않는 복도 쪽을 향해 유유히 걸어 나갔다.(언제나 해피엔딩)

-만약에, 그러니까 아주 만약에, 내가 아니었다면,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그렇다면 나는 더 사랑을 받았을까?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이 훨씬 더 마음에 든다고 나는 누구에게라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더 이상 나 아닌 무엇이 되기 위해 안달할 필요가 없으니까. 이제야 비로소 나는 내가 나인 것을 온전히 좋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나는 점점 더 그런 사람이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내가 잃어버린 것,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오직 눈 감을 때에만 내게로 잠시 돌아왔다 다시 멀어지는 모든 것들이 한없이 그리워졌다. 내 것인 줄 알아차리기도 전에 상실해버린 그 모든 것들이.(오직 눈 감을 때)

-“오늘 밤은 죽지 말아요.”

  그녀가 노인에게 말했다.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다른 계界로 건너오라 재촉하는 유령처럼 눈송이가 또다시 유리창을 두드렸다. 마음을 어수선하게 하는 것이 어둠인지 죽음인지, 아니면 삶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딘가의 지붕 아래서 노인들은 아기같이 울음을 터뜨리며 숨을 거두고, 노인 같은 얼굴의 아기들은 자궁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 일도 없는 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이 2020-07-13 2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엇 이 책은 읽지 못했어요 읽어봐야겠다!

반유행열반인 2020-07-13 22:00   좋아요 0 | URL
쉬이쉬이 읽히는데 마음과 머리가 띠이잉 하고 울려요. 요샌 자꾸 소설 읽다가 질질 짜요,,,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 - 2019년 제4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윤이형 지음 / 문학사상사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0712 윤이형, ‘대니’-
이상문학상 수상집에 자선소설로 실린 대니를 두 번째 읽었다. 나는 대니를 만난 민우 할머니 같은 처지였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집 러브 레플리카는 정말 잘 쓰는 윤이형의 책 중에서도 최고였다. 막 이렇게 과거형 갖다붙이는 나새끼 잔인해. 실망하지 않으려고 지레 포기하고 기대하지 않는 척. 기다리지 않는 척.

+밑줄 긋기
-말들은 장식이다. 혹은 허상이다. 기억은 사람을 살게 해주지만 대부분 홀로그램에 가깝다. 대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주어진 끝을 받아들였다. 나는 일흔두 살이고, 그를 사랑했고, 죽였다.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이 희미하게 사라져가지만 그 사실은 변하지 않고, 나는 여전히 살아 그것을 견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