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의 모든 것
백수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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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8 백수린.

좋아하는 소설가도 아닌데, 왜 이걸 사서 먼저 읽고 있지? 했다. 그러다 찾아보니 떡 하니 ‘백수린 소설을 좋아한다’고 써 놓은 예전 독후감을 발견했다. ‘여름의 빌라’ 소설집은 5년 전 읽을 때 꽤 괜찮다 생각했다. 이번 소설에는 눈이 아주 자주 나오는데 ‘봄밤’이로구나, 작가의 말에서도 결국 그 이야기를 하던데, ‘겨울밤의 모든 것’했으면 말느낌도 촉감도 다 별로긴 했겠다.
폴링인폴, 오늘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여름의 빌라, 봄밤의 모든 것, 이렇게 네 권 소설집을 읽고, 작가가 번역한 아니에르노의 여자아이기억도 읽고, 산문집 다정한 매일매일도 봤다. 아 이제 별로 안 좋네...했던 게 마지막 읽은 그 산문집이었던 것 같다. 백수린 소설에는 할머니가 많이 나오고 새도 자주 나오는데 이제 중년배가 되어버린 나는 이번에도 젊은 작가, 라 여기던 언니들이 노화와 죽음에 천착하는 걸 볼라치면, 그걸로 내 노화를 감각하게 되는 게 참 싫다. 그리고 작가의 말에 소설집을 소절집으로 오타냈어 문지여…
가만 보면 봄날은 새로운 관계나 연애의 시작, 가볍고 한껏 멋낸 옷차림, 날리는 꽃, 꽃구경, 그런 일이 많았던 것 같다.(물론 2년 전 이 봄쯤엔 혈전 및 항응고제와의 첫만남 같은 것도 있었다만…) 그러니 계절감으로 소설 뽑는 것도 제법 있을 수 있겠지. 그런데 진짜 봄을 체감하는 거랑 봄을 적은 글을 봄에 읽는 거는, 밸런스 붕괴로구나, 이런 소설은 차라리 진짜 봄을 잊었거나 아직 기다리는 겨울에 읽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냥 그랬다는 소리야...
날 좋은 오후, 근처 알라딘 중고서점까지 걸어가서 다 읽은 이 책을 팔고, 난 이제 정말 소설을 좋아하긴 하는 건가, 이거 다 그짓말 아닌가, 갸우뚱하면서 방금 판 책 값으로 와퍼주니어 네 개 값(책 판 걸로 부족. 보탬) 치르고 돌아왔다.

+밑줄 긋기(오...정말 이게 다였니)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었든 한때 존재했던 생이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없다니. 그건 대체 무슨 말이지?
(172, ‘호우’ 중)

-카페 안에만 커다란 밀짚모자를 쓰거나 오프숄더 블라우스로 한껏 피서 분위기를 낸 여성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잡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가한 중년 여성들이네, 하고 생각하다가 나는 불에 데인 듯 놀랐다. 나이가 아주 많은 여성들이라 생각했는데 사실 그들과 우리가 거의 비슷한 연배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라고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했던 것이다. (219,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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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들 - 한 소설가의 자서전
필립 로스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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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5 필립 로스.

생존 작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소설가의 산문집 안 본다던 놈이(또 보면 개라며) 연휴 때 펼친 게 필립 로스가 겨우 55살에 자서전이랍시고 싸질러 놓은 이 책이었으니, 멍멍. 월월.

내가 읽은 필립 로스 소설들을 순서대로 짚어보기로 했다.

2019 포트노이의 불평(1969)
2020 전락(2009)
202109 죽어가는 짐승(2001)
202112 새버스의 극장(1995)
2022 에브리맨(2006)
2024 울분(2008)
2025 네메시스(2010)

아니 뭐...연례행사처럼 연간 1권 이내(2021년엔 반칙) 제한한 듯 읽었다. 2023년은 혈전 생겨서(칠조어론이랑 사드 같이 더 매운 거 본다고) 쉬었습니다…

오우...딱히 의도 한 건 아니지만 처음 읽은 데서 40년을 훅 뛰어갔다가 이후로는 대략 작가 연보 비슷하게 따라갔다… 사실들이 1988년에 나왔다니 포트노이와 새버스의 극장, 전락 사이에 이 산문집이 대충 낑겨 있을 것이고…


자서전이라고 했지만 사실 대부분을 조시와의 망한 결혼 생활에 할애하고 있다. 나는 진짜로 임신했고, 아직 차 사고로 뒤지지도 않았으니 차이는 있다만 조시에 대해 시시콜콜 내가 미쳤지, 왜 이런 여자랑, 이러는 화자를 보고 아...내가 소설가랑 안 사귀어서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사실 나도 내가 미쳤지, 왜 이런 남자랑, 하는 소설들을 여러번 끄적였지만 말이다...그거만한 소재가 잘 없죠…

로스의 편지-자서전 줄줄줄-주커먼의 답장, 이런 형식인데, 이걸 픽션으로 읽던 팩트로 읽든 여태 읽은 로스 소설들에 비해 되게 후진 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는 소설로 말하라고!!! 하면서 셀프로 싸다구 갈기고 있는 걸 지켜 보는 느낌… 그리고 책장을 보며 아직 남은 로스옹 재고 중에 주커먼 시리즈 없지? 이 책은 주커먼 읽지 말라고 고사를 지내는 느낌이었다.

예술가나 연예인들 사생활과 과거사 궁금하다고 캐느라 정작 그들이 거르고 걸러 갈고 닦아 보여주는 예쁘장한 것들(나는 마릴린 맨슨도 예쁘다) 제대로 못 보는 너희는 얼마나 멍청하냐… 이러고 훈계하는 겨우 반백 넘게 살고 치기어린 로스 보면서… 칠십 대 쯤에 아 저 책...지우지도 못하고 어쩔… 에이 그것도 다 내 작품 세계의 일부야! 아니 그래도 쪽팔린 걸 어쩔… 마지막 장광설까지 꾹 참고 읽어낸 나라서 할배로 빙의하는 놀이라도 해 본다. 왈왈.

+밑줄 긋기
-쉰 살이 넘으면 자신을 자신에게 보이도록 하는 방법들이 필요하지. 내가 수개월 전에 겪었던 것처럼. 갑자기 속수무책의 혼란에 빠져 그전에는 자명했던 것들, 이를테면 내가 하는 일을 왜 하는 건지,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왜 사는 건지, 함께 살고 있는 사람과는 왜 살고 있는 건지 더는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니까. (13, 그렇다면 저는 이삼십 년 전부터 50대였네요.)

-나는 스스로 정한 규칙들, 나의 일종이자 나의 것의 투영인 대리자에게 어떤 일이 나에게 일어난 그대로와는 다르게 일어나거나, 내게 일어난 적 없거나 내게 일어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는 것으로 상상해야 하는 규칙들로 인해 고갈되었네. 이 원고가 무언가를 전달한다면 그건 가면, 위장, 왜곡, 거짓말로 인한 나의 탈진이라고 할 수 있지. (16, 아무 것도 전달 못 했으면 이것이 진실이오! 하고 함정 파고 앉았다. 뿡.)

-당시 나는 내 인생에서 사라져주기를 염원하고 기도하던 불구대천의 원수가 자동차 사고로 갑자기 제거되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또한 믿지 않았다. 그것도 하고 많은 장소들 중에, 메이와 내가 최근에 수만 명의 군중과 함께 반전 시위를 했고 일요일이면 둘이서 긴 산책을 즐기던 센트럴파크에서 말이다. 전날 밤 내가 한 일이라곤 눈을 감고 잠든 것밖에 없는데 모든 일이 끝났다니. 누가 순진하게 그걸 믿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녀가 9년 전 소변을 사려고 흥정을 벌였던 톰킨스스퀘어 공원에서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더라면 (미학적 대칭성은 있어도) 믿기가 조금 더 어려웠을 터였다. (216, 나는 오늘 내 소설의 핍진성 과잉이 소설을 소설로 읽히지 않게 한다는 질책?을 들었는데, 로스 할배는 삶이야 말로 핍진성 따위 없고 니들이 작위적이다! 할 일이 툭 불거진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뿡.)

-어째서 사람들은 소설에 대해 말할 때보다 사실들에 대해 말할 때 자신들이 더 확고한 근거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느낄까? 사실들이 훨씬 더 다루기 힘들고 결론도 잘 나지 않으며, 상상력이 일깨우는 탐구심을 죽일 수도 있는데 말이야. (240, 그걸 또 못 알아들었을까 봐 주커먼까지 데려와 사족 다는 걸 보고 와...이 졸작으로 나 주커먼 나오는 시리즈 보지 말라고 발악하는 것 같다 싶었다.)

-자서전은 가장 조작적인 문학 양식이 아닐까 싶네. (249, 주석 그만 달라고... 메타 메타 메타 문학 그만 해 후져)

-모든 중독자의 주된 공포는 상실에 대한 공포, 변화에 대한 공포이고, 중독자들은 늘 기댈 수 있는 누군가를 찾고 있지. 그들은 의존적이어야만 하고, 자넨 완벽했어. 어쨌거나 자넨 믿음직한 사람으로 길러졌고(우웩 이걸 쓰면서 낯 안 간지러웠수?), 그 믿음직함은 중독자든, 아버지가 없는 사람이든, 아니면 그 둘 다이든 붕괴된 사람들에게 자석과도 같은 역할을 하지. 그들은 자네에게 들러붙어 놓아주려 하지 않고, 자넨 믿음직한 사람이라 일을 반밖에 못 마친 상태에서 떠나기가 쉽지 않지. (265, 내가 사랑한 사람이 난 이런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네게 머무른 거야, 하면 참 야마 돌 거야… 조시가 죽어서 이 부분 안 읽은 게 유일한 행운일지도)

-“오쿠파티오. 라틴어로 된 수사적 표현들 중 하나예요. ‘로마 제국의 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자. 침략군의 위풍당당함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자, 등등.’ (그리고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도 하지) 그리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떤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고 말함으로써 그것에 대해 언급하는 수사적 장치. 내가 궁금한 건, 그가 이해하지 못한 어떤 일이 그에게 일어난 적은 없었을까, 하는 거요.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99퍼센트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니까요. (277, 이해할 수 없는 걸 굳이 상상해서 이해해보려고 하는 놈들이 자꾸 뭘 쓰는 거니까…)

+현재 남은 로스옹 재고 사진...우리 패거리는 안 찍힘.. 다행히도 주커먼 시리즈 하나도 안 샀네...유령 퇴장 살 뻔 어휴...퉤퉤
+연보의 스티커 보고 저렇게 까지? 죽었다고 입체적으로 붙이기까지 해야 해? 했는데..
마지막 스티커 뒷면을 보고 알았다. 로스옹 제삿날을 4월 22일로 잘못 표기해서 일일이 수작업으로 스티커질 했을 것을...다들 같이 스티커 붙였나요... 어우 로스옹 돌아가셨어 노젓자 이러고 급하게 두 달만에 나온 책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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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05-06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미국 3부작? 을 아직 안읽으셨군요 ㅋ 부럽습니다~!! 저는 이책 읽다가 포기했습니다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5-05-06 18:57   좋아요 1 | URL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후반부에 길게 이어지더라구요 ㅋㅋㅋ 미국3부작이 어떤 소설들인지 잘 모르지만 재고가 넉넉해서 연1시리즈씩 한 6년은 버티겠네요 ㅋㅋㅋ
 
이반지하의 공간 침투
이반지하 지음 / 창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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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3 이반지하.

프로 퀴어 정병러의 (우)수작 타령을 하다가, 사 놓고 안 본 이반지하 책을 읽기로 했다. 두 번째다. 첫 번째 책보다는 나 이제 덜 웃길 거야, 엄숙근엄진지, 그런 느낌으로다가 조금 묵지근해진 느낌이라 처음에는 아...두 번째 나온 책을 먼저 볼 걸 그랬나…그걸 안 사고 세 번째로 훅 넘어오는 건 트릴로지에서 2부는 원래 김빠지니까 제껴, 하고 맥락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건 아닐까, 배트맨 비긴즈 보고 다크나이트 안 보고 다크나이트 라이즈로 바로 가면 어...하는 그런 거인지는 ‘나는 왜 이렇게 웃긴가’를 안 봐서 아직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웃기다는 첫 책이 마냥 웃기지 않아서 아마도 저 웃기다고 주장하는 두 번째 책은 한참 미뤄둘 것 같다.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를 읽고 생각보다 많이 이반지하선생에 관해 찾아본 것 같다. 일단 김하나 선생과 북토크 같은 걸 하면서 최대한 점잖은 사람의 상호작용 의례를 하려는 노력도 보고, 유튜브에서 편의점 알바 하는 일상을 공개하며 아빠가 이렇게 힘들게 벌어 먹고 살아, 비슷한 말을 브이로그에 담으며 덤덤한 체험 삶의 현장을 보여주는 것도 보았다. 동아리 방에 몇 년 묵은 교환일기인지 빵다이어리인지 이름 기억 안나는 기록장에 적힌 소8 이란 이름도 계속 어른거리고, 곁의 사람에게 ‘김소윤씨는 디스크가 터져서 수술을 받았대’ 해 봤자 스무살 무렵 스치듯 안녕한 동기의 건강사에 대해서는 그래? 하고 정치 뉴스만큼에도 관심을 안 갖는 뭐 그런 나만 혼자 쌓는 내적 친밀감… 팬심은 아닌 것 같고 그냥 나의 어떤 가능세계의 예술가의 삶 같은 걸로 어설픈 동일시를 하는구나 싶었다.

만6세 때 읽던 책부터, 만40세까지 쳐사모으는 책들을 꾸역꾸역 이고 지고 오느라 자꾸만 넓혀낸 공간과, 반지하에서 15층의 온 벽면이 책장인 공간으로 기어 올라오느라 정작 책 읽고 놀 시간에다 노동력과 정신력까지 섞어 갈아 화폐로 교환하고, 그걸 또 알라딘에 바치며 온갖 폐지로 교환하는 삶을 돌아보았다. 집게처럼 버리지도 못하고 지고 다니기도 힘든 자신의 작품들을 (하필이면 회화작가여서 캔버스를 놓을 곳도 없어서) 트렁크에서 꺼내지 못하는, 퀴어 문화제며 헤테로 결혼식 사회에 온갖 북토크까지 이런저런 행사 안 가리고 스스로의 삶을 지탱하느라 애쓰는 예술가를 보며 아...저것이 보헤미안...주렁주렁 달린 인간들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알림장과 회신문에 사인을 하고 숙제나 시험 공부를 열심히 안 하면 그래그래 적당히 살다 나중에 조금 힘든 노동하며 지내는 삶도 나쁜 건 아니지, 그런 속물적인 쁘띠부르주아지 행세하는 내가 되어 버린 오늘을 괜히 부끄러워하면서…

돌출된 디스크가 더 망가지지 말라고 9900원에 산 8킬로그램짜리 쇳덩이 케틀벨로 데드리프트 흉내를 내면서 아휴, 난 수술할 만큼 심해지지 않은 게 어디냐, 혈전 막혀 퉁퉁 붓던 다리에 하지정맥류까지 돋을 기미가 보이니 이런저런 압박스타킹을 수집하면서 서서 일하는 사람의 필수템이지, 거기에다 걸칠 파격 할인하는 옷가지 나부랭이들을 장롱에 치덕치덕 쌓고 신발장에 자리가 없어 한숨쉬며 신발들을 포개어 놓는 나는, 책을 읽으며 내심 예술 안 하길 잘했다...커밍아웃 할 일 없어 다행이네...하는 치졸한 내가 자꾸 고개를 디밀어서 꼴밤을 백 대 쯤 먹여주고 싶었다.

+밑줄 긋기
-어디로 갈 것인가,
가 아니라 속한 곳에서 도망치는 것이, 멀리멀리 달아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감각.
뛰지 않고 있어도 바람이 옆머리를 흩뜨리며 마음의 정면으로 휭휭 불어닥치는.
향하는 것이 아니라 떠나는 것이다.
이따금 다시 붙잡혀 올 것을 알면서. (10)

-그런데 그렇게 딱딱 맞춰서 이 단추를 저 구멍에만 끼울 거라면 이 세상에 간지와 멋이랄지, 인간성 같은 건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 하지만 나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인간으로 존재하길 포기했다. 교복 속을 살뜰히 채운 충전재로서 죽음 같은 10대를 살아냈다. (53)

-나는 어느덧 쑥쑥 자라, 벗을 건지 입을 건지를 넘들 앞에서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비로소 사회에서 이 정도의 자유는 허락없이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 사회에서 이만큼 늙어내지 못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55)

-호텔이 만드는 쾌적함이 노동의 산물인 것은 모를 수 없이 당연했으나 그걸 적나라하게 드러내보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어떤 노동이 있다는 것은 감각되지 않아야 쾌적했다. 하지만 그 노동이 되는 기분은 어땠더라. (118)

-이 사회에서는 비로소 어떤 쓸모가 완전히 박탈당한 후에야 소위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136)

-그것 말고도 다채로운 폭력이 정말 많은데, 강간은 왜 그토록 매력적인 장치인가. 강간은 왜 이리 예술 서사에서 뛰어난 기능을 갖고 있나. 무대 위 강간에 대해선 으레 관객 모두가 어마어마한 피해라고 그 폭력성을 단번에 수긍하기 때문일까. 현실 강간은 그게 범죄이고 피해라는 걸 인정받기까지 여전히 너무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갖고 중립 얘기를 하시는데, 예술로 넘어가면 갑자기 모두가 저것은 진짜! 고난이고 진짜! 고통이라는 데에 쉬이 동의하는 것 같다. 강간은 인생을 망쳐버린다고!
내 경험에 따르면 인생을 분명 망치기는 하는데, 글쎄 뭐랄까, 사실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그런 거다. 그렇게 처음부터 동등한 입장에서 만져지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그렇게 동등하게 만져진 사람이 몇이나 되려나. 한국에서 평생을 살면 아주 어릴 때부터 남녀노소에게 강제로 만짐당하게 되는 것이고, 그건 나이가 들어서도 매한가지다. 조금만 정신을 놓고 있으면 그런 일이 후루룩 생긴다. (326)

-그러니까 나는 이제 저런 사람들이 된 것이다. 누군가를 보필하고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주로 기능하며 그 누군가가 베푸는 것에 아주 적절한 리액션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도, 또 이 다음에도 베풂을 받을 수 있다. (340-341)

-그리고 또 돈이 좋은 이유는 남들을 시켜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어찌 보면 결국 쾌적해지기 위함인데, 귀찮고 지저분한 일들을 위탁해버릴 수 있게 해준다. 또 먹고 싶은 게 있을 때 정말로 메뉴만 고르면 된다는 게 좋은 것 같다. 어떤 걸 시켜야 제일 본전을 뽑을지 고민할 필요없이 너그러워지는 것이다. 사람이 간장 종지처럼 자잘자잘해지지 않게 도와준다. (343)

-하지만 여전히 궁금하다. 나는 얼만큼 가난하고 얼만큼 부유한지. 넘들도 그런 궁금증을 갖고 있는지. 혹시 나만 이렇게 매사에 어리둥절하고 있는 건지. 아무래도 이런 궁금증은 너무 상스러운지. 그렇게 분노도 혁명도 없이 일생을 탈 없이 살다 가도 괜찮은 건지.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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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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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1 아니 에르노.


BIGBANG(GD&T.O.P) - 쩔어(ZUTTER)
https://youtu.be/D8t8A8E_Tqc

단순한 열정을 5년 전에 읽었다고 한다. 언제인지 기억은 안 나고 독후감이 남아 있으니까. 집착을 안 읽었을 줄은 몰랐다. 이건 얇다니까 읽어봐야지, 아니 에르노 안 읽는다면서! 뭔가 괜히 욕박고 싶을 때 이 작가 걸 꺼내 읽는 거 아닐까 싶었다.

-‘이걸 쥐고 있는 한 이 세상에서 방황할 일은 없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지금 와서 이 문장을 곰곰 생각해보면, 이것 말고는, 이 남자의 페니스를 손으로 꼭 감싸쥐는 것 말고는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였던 것 같다. (10)

초반부부터 아이 참 아니 에르노가 또 아니 에르노 했네...똥을 싸도 박수갈채를 받고 남자친구 아침 발기한 성기 붙들고 있던 걸 회상하다 써 갈겨도 노벨상을 받고 뭐 그러는 거다. 차 버렸든 차였든 이제 부재의 상태로 발광을 할 테니까 일단 봐주고 넘어간다.

-모든 여선생에게서 완절무결하고 단호한 태도를 찾아내면서, 내가 그들 모두를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하지만 전에는 나도 선생이었고,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들은 여전히 선생이지 않은가-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고등학교 시절, 여선생들이 너무 강렬한 인상을 주어서 그 직업을 갖게 되거나 그들을 닮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생각하던 때의 기억을 되살려냈다. 나의 적이 속한 그 집단은, 그 이름과 그렇게 잘 어울렸던 적이 결코 없었던 것들, 즉 교직 종사자 전체로 확대되었다. (14)

오늘 명예퇴직 공문을 가만 들여다보며 20년 이상이래...난 연금 밀린 걸 다 털어 넣어도 이제 17년 몇 월인 걸… 그런데 그만두면 뭘 해 먹고 사냐 빚은 뭘로 갚냐 출근하겠다고 사재낀 옷이랑 신발값은 어쩔 거냐 하면서 자기를 전직 교사였다고 회상하는 아니 에르노가 조금 더 밉게 읽혔다.

-이러한 탐색과 광적으로 여러 단서들을 짜맞추는 행위를 보며 지능의 탈선적 사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차라리 지능의 시적 기능, 문학과 종교 및 편집증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그 기능이라고 하고 싶다.
게다가 나는 그 시기에 가졌던 욕망, 감각, 행위들을 추적하여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내가 겪은 대로의 질투를 써나가고 있다. 내게는 그것만이 이 강박관념에 물질성을 부여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늘 본질적인 무언가를 놓칠까봐 두려워한다. 요컨대, 실재에 대한 질투로서의 글쓰기. (38)

사이버 스토킹에 흥신소 놀이는 거참 저의 고약한 취미 중 하나였는데… 이미 40년생 언니 아니지 할머니도 지겹게 편집증의 삶을 살고 그걸 또 치덕치덕 폼나는 단어 발라 문장으로 적어 두셨다. 전 이제 손 씻었습니다. 행복해요. 라라라라랄

-나는 내가 대량생산되어 대체될 수 있는 존재임을 확인했다. 이 논리를 거꾸로 뒤집어서, 그의 젊음이 가져다주는 이점들이 그에 대한 나의 집착에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인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성찰해보려고 애쓰고 싶은 의욕은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나는 자기 기만이 주는 희열과 난폭함에서 절망으로부터 구원되는 길을 발견했다. (47-48)

내가 아닐 수도 있었어…는 언제나 씁쓸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할머니한테도 그가 아니었을 수도 있었어… 젊은 남자 수시로 갈아끼웠잖아… 젊은 건 아름답지만 네 뭐 젊은이한테 집착하느라 세월 보내고 쭈그러지는 할머니들 보면 조금 안타깝긴 합니다… 인생의 무게는 각자의 몫…

-가장 커다란 행복처럼 가장 커다란 고통도 타자로부터 오는 것 같다. 나는 두려움 때문에 그 고통을 피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이해한다. 그들은 그 고통을 두려워하여 적당히 사랑하거나, 음악이나 정치참여, 정원이 있는 집과 같은 관심사의 일치를 더 중시하거나, 혹은 삶과 유리된 쾌락의 대상으로 여러 명의 섹스 파트너를 둠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이 육체적 사회적 고통에 비하면 비이성적이며 심지어 물의를 일으킬 만한 것일지라도, 하나의 사치일지라도, 나는 생의 평온하고 유익했던 몇몇 순간보다도 그 고통을 더 사랑할 것이다. (50)

할머니...찐마조히스트 인정… 전 그 반대로 사랑하기로 했어요… 생의 평온하고 유익했던 몇몇 순간들로 그 고통들을 몰아낼 것이다.

-(학교에서 문학 텍스트의 구절들에 제목을 붙이듯이, 자기 삶의 순간들에 제목을 붙이는 것은 아마도 삶을 통제하는 수단이 아닐까?) (67)

통제 욕구도 인정… 제목을 붙이고 일단락해 놓으면 일단 편-안-

-그 여자는 자신이 다른 곳에서도, 또다른 여자의 생각과 육체 속에서도 살고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으리라. (69)

우리 할머니도 내가 여기서 아마도 질투의 감정으로 매번 읽고 까고 안 읽어 시바 하다 또 꺼내 읽고 또 까고 하고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을 것이다….

감기약 먹고 골골 졸려운 오후에 이 책 읽고 대작가 까는 독후감을 쓰다 보니 아주 잠이 싹 달아나게 개운한 아드레날린 샘 솟음… 제가 소작가면 까지도 않아요… 할머니는 버섯 같은 무엇이나 까고 계셨군요…. 인상 깊지만 꼬추타령은 일절만 옮기기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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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북을 잘못 샀나?했더니
책 맞습니다... 한 권만 샀겠어요...디카페인 커피도 샀습미다.
또 책들고 꽂을 데 찾다 한숨 폭 쉬고 아무데나 대충 꽂아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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