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밀레니엄 (문학동네) 1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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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6 재독. 스티그 라르손.

2014년 3월부터 4월까지 밀레니엄 시리즈를 읽었다는 메모가 남아 있다. 이 책이 나에게 다시 오는 데 11년이 걸렸다. 원래 책 소개는 잘 안 하는 편인데, 맞은 편 앉은 동료와 이야기 하다보니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니,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시리즈니 괜히 읊다가 아...국문학 전공자 앞에서 뭔 번데기 주름이냐… 하면서도 학교 도서관에 밀레니엄 1부 문학동네판이 소장되어 있는 걸 굳이 검색해서 동료에게 알려주었고, 작가이름과 책 제목을 받아 적고 검색하던 동료는 신이 난 듯 바로 도서관에 뛰어내려가 책을 빌려왔다. 오늘 아침 텀블러의 커피가 그 책에 조금 새어 가지고 곤란한 표정으로 내게 책을 보여주고 다른 컵의 커피를 나눠 주었다.

2014년 봄에는 밀레니엄 소설을, 초여름 다가가는 이맘쯤에는 스웨덴판 영화 세 편을 나눠서 조금씩 보았다. 소설 읽기 전 먼저 보았던 데이빗 핀처의 영화도 한 번 더 보았다. 생각보다 이 시리즈에 푹 빠져 있던 것 같다. 작고한 스티그 라르손의 후계자라 할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마저 쓴 ‘거미줄에 걸린 소녀’, ‘받은 만큼 복수하는 소녀’, ‘두 번 사는 소녀’까지 아쉬운 대로, 애틋한 대로 완결을 보고 말았다.

주말에 큰어린이와 스웨덴판 밀레니엄 1부 영화를 봤는데, 아이와 보기에 적당하지 않은 장면도 많았지만, 그래도 내가 한 때 푹 빠져 있던 리스베트라는 캐릭터를 소개하고 싶었다. 핀처의 영화까지 다음날 보려고 하자 곁의 사람이 ‘19금 영화잖아’하고 제동을 걸어서 좀 속이 상했다. 아이에게 나중에 보자, 했다. 전자책으로 빌린 밀레니엄 1부를 읽는 중에 스웨덴판 영화를 보고, 또 책을 보고 하니 대강의 줄거리나 디테일들이 조금 기억나는 듯했지만, 이런 이야기였구나, 싶게 새롭게 읽는 재미도 있었다.

여성 증오 범죄인 연쇄 강간 살인, 소녀의 실종, 후견인제도의 어두운 면 아래 폭력과 성범죄에 노출된, 그럼에도 내내 꿋꿋하고 매력적인 리스베트, 약간 멋질 때도 있지만 더 자주 저놈의 윤리관, 고지식한 놈, 거기다가 또 빙구같은 놈, 가지 마!!!! 거길 왜!!! 하고 고구마를 퍼먹이는 미카엘과 오랜만에 재회하니 반가웠다. 책의 판권은 이리저리 팔려 이번에는 문학동네판으로 1부를 봤는데, 2부, 3부는 연이어서 보게 될지 잘 모르겠다. 1부가 벽돌이라 열흘이나 붙잡혀 있었으니… 한 때 반했었고 빠져 있었던 인물들을 만나는 반가움이 있지만, 난 아직 만나지 못한 새 책들도 너무 많단 말이다. 2부는 천천히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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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까지만 해도 묵직한 덩어리처럼 명치를 꽉 메웠던 불안감이 확 풀려버린 듯했다. 에리카와 함께 있으면 항상 이런 기분 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도 그녀에게 동일한 안정감을 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벌써 이십 년이군.‘ 그는 생각했다. 에리카와 관계를 이어온 것도 벌써 이십 년이었다. 앞으로도 이십 년-최소한 이십 년-은 이렇게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람들에게 딱히 이런 관계를 숨길 생각은 없었다. 비록 자신들 때문에 이따금 다른 사람들과 어색 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리고 사람들이 쑥덕거린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가끔은 간접적으로 그들의 관계를 물어오기도 했는데, 그때마 다 둘은 사람들 말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알쏭달쏭한 대답으로 넘어가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레게르는 둘의 관계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다. 에리카 역시 미카엘과의 혼전 관계를 전혀 감추지 않았고, 그와 다시 만나게 됐을 때도 곧바로 남편에게 밝혔다. 예술가인 그레게르는 이 모든 관계를 감당해낼 수 있는 걸까? 아내가 다른 남자 와 잠자리를 할 뿐만 아니라 휴가까지 쪼개 산드함에 있는 정부의 별 장에서 일주일씩 지내다 와도 그레게르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창작 활동에, 혹은 그저 자기 자신에게 너무 열중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미카엘은 그레게르를 특별히 좋아하지 않았다. 어떻게 에리카가 이런 남자에게 반했는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남자 둘을 동시에 사랑하는 아내를 받아들여준다는 사실만큼은 항상 고맙게 생각했다.

-물론 미카엘은 리스베트가 자신에 대해 보고한 내용을 알 리 없었다. 그러나 보고서를 본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게 한두 군데가 아니다.
특히 그가 재계의 늑대들을 혐오하는 이유가 급진적인 좌익사상 때문 이 아니라고 말한 부분에서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미카엘은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은 아니었어도 정치적 ‘이즘‘은 극도로 불신했다. 1982년 총선 때 그는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투표란 걸 했다. 사회 민주당을 선택했는데 이유는 하나였다. 보수파 예스타 보만이 재무부 장관에, 토르비에른 펠딘이나 자유주의자 올라 울스텐이 수상인 정권이 삼 년 더 연장되는 광경만큼 끔찍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 큰 열정 없이 올로프 팔메를 찍었는데, 얼마 후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팔 수상 암살, 무기회사 보포르스 스캔들, 에베 칼손 스캔들 등 추악한 정치 현실뿐이었다.

-˝내 생애 이십오 년, 혹은 삼 십 년은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하랄드 같은 인간들을 용서하며 보냈네. 그러고 나서 깨달 았지. 혈연이 사랑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랄드 같은 인간을 변호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도.˝

-˝사는 동안 내겐 수많은 적이 있었지. 그 속에서 한 가지 배운 게 있어. 패배가 확실하면 싸우지 마라. 하지만 나를 모욕한 자는 절대 그냥 보내지 마라. 묵묵히 기다리다가 힘이 생기면 반격하라. 더이상 반격 할 필요가 없어졌다 할지라도.˝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타인의 삶을 뒤지고 사람들이 감추려 드는 비밀들을 까밝혀내는 일에 은밀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스스로 기억 하는 한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저런 형태로 이 일을 해왔으며 지금도 계속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 드라간에게 임무를 받을 때만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만의 유희로 그런 일을 했던 것이다. 일할 때면 왠지 모를 만족감이 느껴졌다. 비디오게임을 할 때 느끼는 그런 종류의 희열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비디오게임의 주인공이 자신의 집 주방을 차지하고 앉아서 베이글 샌드위치를 권하고 있는 게 아닌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자, 시간이 됐어.˝
마르틴이 팽팽하게 당겨진 가죽끈 위에 한 손을 올려놓고 아래로 지그시 눌렀다. 미카엘은 끈이 목둘레에 더욱 깊이 박히는 걸 느꼈다.
˝항상 궁금했었지. 남자는 맛이 어떨까 하고 말이야.˝ 그는 끈을 누른 손에 무게를 실으면서 몸을 앞으로 구부려 미카엘의 입을 자기 입으로 덮었다. 그때였다. 얼음처럼 싸늘한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이 개자식아! 내 허락도 안 받고 어디다 주둥이를 들이대?˝

-미카엘처럼 그녀 역시 자신들이 추적하는 대상이 과거의 연쇄살인범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드러난 진실은 정말 뜻밖이었다.
예쁘게 정돈된 목가적인 마을 한가운데, 그것도 기업의 대표라는 사람의 지하실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실로 모든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고 쉽사리 이해되지도 않았다.
리스베트는 이 모든 미스터리를 나름대로 정리해보려 애썼다.
마르틴은 1960년대 이후로 여인들을 살해해왔고, 최근 십오 년간 은 매년 두세 명 꼴로 희생자가 있었다. 너무도 은밀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학살이어서 이 연쇄살인마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가져온 문서에서 부분적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마르틴의 희생자들은 익명의 여자들이었다. 스웨덴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 친구도 없고 사회적 접촉도 없는 이민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성매매를 비롯해 마약이나 알코올중독 등에 노출된, 이른바 사회적으로 소외된 여성들도 있었다.
리스베트는 성적 사디스트의 심리에 대해 개인적으로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이런 부류의 살인마들이 희생자의 물건을 즐겨 수집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종의 기념품인 셈이었다. 나중에 들여다보면서 과거의 즐거움을 부분적으로나마 다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기념품 말이다. 사디스트들의 이러한 성향을 마르틴은 특별한 형태로 발전시켰으니, 이른바 죽음의 문집을 꾸미는 일이었다. 그는 희생자들 을 꼼꼼히 분류했을 뿐만 아니라 개별적으로 평점까지 매겼다. 그들의 고통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논평했으며, 범행 장면을 담은 영상과 사진을 촬영하는 데 열중하기도 했다.
궁극적인 목적은 폭력과 살인이었다. 하지만 리스베트가 도달한 결론은 희생자를 사냥하는 일 자체가 무엇보다 그를 흥분시켰다는 점이 었다. 마르틴의 노트북 안에는 잠재적 희생자 수백 명에 관한 정보가 체계적인 데이터베이스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방에르 그룹 직원도 있었고, 그가 자주 다니는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 호텔 접수 담 당자, 보험회사 직원, 친분 있는 사업가들의 비서, 그리고 그 밖에도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다. 한마디로 일상에서 만나는 여자들을 모두 목록에 올려놓은 듯했다.
물론 마르틴이 살해한 이들은 이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실상 주위의 모든 여자들이 잠재적인 희생자인 셈이었으며, 그는 평소 이들에 대한 정보를 세밀하게 기록하고 검토해왔다. 이 목록은 그가 무수한 시간을 투자하는 열정적인 취미라고 할 수 있었다.

-미카엘은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혹시 네게 뭔가 민감한 일이야?˝
리스베트의 눈은 억누른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미카엘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난 사람들이 오직 교육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하지는 않아. 하지만 교육이 큰 역할을 한다고 믿지. 고트프리드의 아버지는 여러 해에 걸쳐 아들을 심하게 폭행했어. 그리고 그 흔적은 남는 법이지.˝
˝다 엿 같은 소리예요. 이 세상에 맞고 자란 사람이 고트프리드만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여자들을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는 것도 아니고요. 모든 건 그의 선택이었을 뿐이에요. 이건 마르틴에게도 똑같이 해당해요.˝
미카엘은 그녀의 말을 중지시키려는 듯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우리 이런 문제 가지고 싸우지 말자고.˝
˝싸우자는 게 아니에요. 항상 그런 개자식들에게 어떻게라도 정상을 참작해주려 애쓰는 꼴들이 한심할 따름이죠.˝

-˝지금 스웨덴 증시는 사상 최악의 폭락을 맞고 있어요. 그런데 이게 아무것도 아닌가요?˝
˝자, 들어보시죠! 우리는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는 스웨덴 경제이고, 다른 하나는 스웨덴 증시입니다. 스웨덴 경제가 뭐죠?
그건 매일 이 나라에서 산출되는 재화와 용역의 총합입니다. 예를 들 어 에릭손의 휴대전화, 볼보의 자동차, 스칸의 닭, 그리고 키루나와 셰 브데를 연결하는 운송 서비스 같은 것들이죠. 이게 바로 스웨덴의 경제이고, 이 경제는 일주일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는 웅변의 효과를 위해 잠시 멈추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증시는 전혀 다른 겁니다. 거기엔 경제도 없고, 재화의 생산도 용역도 없어요. 거기에는 환상만이 존재할 따름이고, 그 환상 속에서 사람들은 이 정도 기업이라면 수십억 크로나 이상 혹은 이하가 되어야 한다고 매시간 결정하기 바쁠 따름이죠. 이건 스웨덴의 현실이나 경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그렇다면 증시가 이렇게 자유낙하를 한데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인가요?˝
˝네. 조금도 중요치 않습니다.”

-원하는 건 단지 그와 함께 있는 것이었다. 그냥 그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것. 나름의 세계와 나름의 삶을 가진 특별한 존재라고 말해주는 것. 이젠 그에게 단지 우정의 표현만이 아닌 사랑의 표현을 전하고 싶었다. 내가 지금 미쳐가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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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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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5 정지아.

제목부터 신파조겠네, 별로 보고 싶지 않군, 하면서도 남들 다 보고 호들갑 가라앉으면 읽어야지, 하고 쟁여놨다. 작년 엄마가 담낭 제거술 받는 입원 때 들고 가시더니 금세 읽었다고 했다. 읽고 나니 역시, 제목은 책 팔 사람들이 붙여준 거군...이웃집 빨갱이, 그쪽이 더 내 구미에 맞았을 것이고 그랬으면 책은 더 안 팔렸을 것 같다. 좀 순화하면 상주일기 정도...

우리 아버지가 죽으면 장례식에 안 갈 가능성이 높고, 가든 안 가든 삼일 정도는 파티를 할 거라는 나놈이라서, 아버지가 다정하고 사람 됨됨이 좋고, 그래서 어려서나마 애틋함을 느낀 순간이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들에 공감을 못했다. 이문구의 ‘관촌수필’ 속 아버지 회상도 약간 그랬다. 오히려 질투 같은 감정에 에효, 인텔리 빨갱이 애비 둬서 싫지만 좋았겠네… 못되먹은 심보만 더 뒤틀리는 때가 많았다. 내가 쓰는 글은 늘 아버지로부터의 해방일지였으니 뭐 어쩔 수가 없다.

한 사람을 거쳐 간,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다들 좋은 말만 하고 가는 건, 죽으면 후해지는 사람 맘도 있을 것이고, 장례식장이라는 특수한 공간에는 진짜 척 지고 철천지 웬수 같은 사람들은 얼씬 안 할 거라 마냥 좋기만 한 사람 되는 게 가능도 하겠다 싶다.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를 주변 연 닿은 인물들로 입체적으로 그리려고 애쓰는 건 알겠는데, 나는 오히려 쥐포처럼 납짝해진 허구의 인간을 만났지 싶다. 아이 이건 소설이니까, 허구지만 핍진성 병에 걸린 나니까… 술 먹고 엄마를 쥐어패는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를 가진 삶은 살아보지 못했으니까…

혁명과 대의와 해방 세상, 인류의 진보를 위해 개인이 부서지는 이야기를 마냥 훈훈하게 읽을 수 없다. 오히려 동료를 배반하고 위장 전향 아닌 진짜 전향해서 낱낱이 비밀 다 고해 바치고 그렇게 쓰레기 인생 사는 인간상 그리는 게 나한테는 더 쉬운 일이겠구나… 내가 살아온 세상은 그렇게 어두웠구나 했다.

성대 용종 수술을 받고 묵음 요양한다고 구례 산동면에 가을 며칠을 머무른 게 십여년 전이었다. 지리산과, 빨간 열매 달거나 떨구던 산수유 나무와, 길마다 툭툭 보석처럼 떨어져 횡재한 기분 들게 하던 굵은 알밤 정도 생각난다. 빵과자 맛있어서 거의 주식 삼던 불란서베이커리(지금은 망함)랑 그 앞에 하나로마트도 내 밥거리 마련하던 곳… 그저 한적하고 그래서 이런데 묻혀 살고 싶다 한 시골 쯤으로 여겼는데, 그 산 속에서 사상 때문에 목숨 걸고, 또 살해 당하고, 삶의 다른 가능성들을 잃었던 사람들 이야기를 책 덕에 마주 할 수 있었다. 뼛가루 암때나 뿌리듯 마냥 설탕 가루 쳐 놨구만, 신파는 역시 난 됐다...싶지만 그래도 뭐 이제 나도 읽었으니 됐다. 주인공이 못된 척 할수록 난 더 못된 척 자꾸 경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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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의 나는, 방물장수 하룻밤 재우는 일에 민중을 끌어들이는 아버지나 그 말에 냉큼 꼬리를 내리는, 꼬리를 내리다 못해 죄의식에 얼굴을 붉히는 어머니나, 그때 읽고 있던 까뮈의 ‘이방인’보다 더 낯설었다. (13, 혁명 민중 운운하나마나 여기서부터 이 아버지, 여자 많이 밝히시네...했고 가게 주인 엉덩이 토닥일 때 그 심증을 확증으로 굳혀 버렸다. 뭐 왜 뭐)

-“사회주의의 기본은 뭐여?”
속도 없는 어머니, 아는 것 나왔다고 냉큼 알은척을 하고 나섰다.
“그야 유물론이제라.”
“글제! 글먼, 머리는 둿다 뭣혀! 생각혀봐. 사람은 하나님이 여개 사람이 있어라, 고런 시답잖은 말 한마디 했다고 하늘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먼지로부터 시작됐다 이 말이여. 긍게 자네가 시방 쓸고 담고 악다구니를 허는 것이 다 우리 인간의 시원 아니겄어? 사회주의자는 일상에서부텀 유물론자로 살아야 하는 법이여.” (16, 일단 나와 같이 먼지론 주장하는 사람 세상에 제법 흔했구나, 그건 반갑네, 싶고 이 책에 나오는 사회주의 블랙유머들이 그나마 좀 유쾌했다. 일상의 진지화...진지나 잡숴…)

-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잘 참는 사람은 싸우지 않고 그저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들고일어나 누군가는 쌈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가 된다. 아버지는 잘 못 참는 사람이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가 득세하는 것도 참지 못했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라는 봉건잔재도 참지 못했으며, 가진 자들의 횡포도 참지 못했다. 물론 두시간의 노동도 참지 못했다. 그런데 얼어 죽을 것 같은 고통은, 굶어 죽을 뻔한 고통은,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은 동료들이 바로 곁에서 죽어가는 고통은 어떻게 견뎠을까? 신념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내려와봤자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이라는 지극히 절망적인 현실 인식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68, 이제 어디가서 잘 참는다고 구라치지 말아야 겠다…)

-“암만 혀도 자네는 유물론자가 아니구만. 죽으먼 그걸로 끝인디 워디 묻히고 안 묻히고, 고거이 뭣이 중하대?”
방학 중이라 곁에 있던 내가 옳다구나 끼어들었다.
“아버지는 정말 무덤 필요 없어?”
“두말허면 잔소리! 땅덩어리나 아니나 쥐꼬리만 한 나라서 죽는 놈들 다 매장했다가는 땅이 남아나들 안 헐 것이다. 우리 죽으먼 싹 꼬실라부러라.”
입꼬리가 실룩이는 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으나 유물론자가 아니라는 말에 눌린 어머니는 더는 끼어들지 않았다.
“꼬실라서 니 펜한 대로 암 디나 뿌레삐레라. (….이하 생략)” (93, 플래그 붙여 둔 걸 보니 난 유물론 개그를 좋아하는구나… 중심 화자이자 관찰자인 딸래미는 아버지 유지를 너무도 잘 받들어서 곳곳에 아버지였던 먼지를 폴폴 뿌리고 다닌다. 아휴 난 그 감성 신파 못 견디겠는 패륜새끼)

-나는 그 사람들을 맞으러 접객실로 나갔다. 조문실을 가득 메운 늙은 혁명전사들 주변으로 이상한 결계 같은 게 드리운 듯했다. 내가 조문객이었다 해도 쉽사리 발을 디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접객실까지 흘러나오는 결의에 찬 그들의 말투도, 통일을 목전에 둔 듯한 흥분도, 나는 불편했다. 내 아버지도 그랬다. 분단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세상이 되었다는 데, 젊은 세대가 민족의 통일을 지상 최대의 과제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아버지는 분개했다. (146-147, 좌파 정치가가 나온다고 망치로 텔레비전 전면을 깨부시고 전두환 박정희 찬양하는 아버지나, 나는 진짜 깨시민 나이는 먹었지만 샤이 개딸, 그런데 내 딸년은 왜인지 진짜 보수 같은 짓만, 하는 어머니나, 어휴 뭐 중간이 없어 나 이제 평생 선거 안 해, 그러면서 민주주의 가르쳐야 되서 도망치려다 망한 나새끼는 뽈갱이 어매아배 아래 그 낙인 이겨내며 평생 살아야 했던 화자가 그럴 법도 하겠다, 싶으면서도 그래도 그 가정에는 다정도 있고 재미도 있었구나, 싶었다.)

-공교롭게도 아버지의 옛 처제가 막 나간 문으로 이번에는 어머니의 옛 시동생이 아내는 물론 아이들 셋을 데리고 나타났다. 속 모르는 사람이 보고 개판이라고 욕을 해도 할 말이 없을 집안사였다. (165, 정상가족성 좆까소, 평등주의 어매아배 양쪽 집안이 재가해서도 이렇게 왕래하는게 얼리아답터 집안, 내 취향…)

-“질 줄 알았응게.”
“예?”
그가 되물었다. 나도 묻고 싶었다.
“질 게 뻔한 전쟁이었소. 우리야 기왕지사 나선 몸이제만 그짝은 사상도 읎고 신념도 읎는디 멀라고 뻔히 질 싸움에 끼울 것이요.” (179, 질 걸 알면서도 싸우는 마음, 그러니까 넌 빠져, 하는 게 폼 잡는 거 같으면서도 그나마 나에게 먹히는 신파...슬램덩크인가…)

-“긍게이. 이상허지야. 여개 앉아 있응게 자꼬 그날 생각이 나야. 쫌 대줄 것을…...나 아픈 중 빤히 아는 사램이 자개도 오죽허먼 그랬을랑가 싶고야…...” (248-249, 망자 태우는 자리에서 그때 못해준 것 미안하고 아쉬울 수 있겠지만, 대줄 걸, 대줄 걸, 성욕 해소 못해준 거 어머니가 곱씹고 있는 장면은 선 넘네 싶었다. 웃기라고 웃프라고 넣은 장면인데, 아비도 사람이었네, 뭐 그런 건가 싶지만 자식이 모르던 아비의 인간적인 장면이 저런 식으로 그려지는 건… 후반부에서 짜게 식었소.)


+2013년, 지리산에서 횡재. 밤 세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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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5-05-25 17: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손바닥을 가득 채우는 밤 세알, 횡재 인정합니다^^ 잘 지내시지요?

반유행열반인 2025-05-25 18:22   좋아요 1 | URL
얄님 반갑습니다 ㅎㅎㅎ 오래 전의 횡재인데 사진만 봐도 뭔가 뿌듯해서 올려봤어요 ㅋㅋㅋ
 

못 먹고 쟁여둔 원두 봉지가 까 둔 거 세 개(에티오피아 게샤, 탄자니아, 과테말라였나), 안 깐 거(브라질, 또 에티오피아) 두 개, 총 다섯 봉지나 밀려있다.
새 커피 궁금해병자인 나는 기어이 커피를 사고나서야 아...이거 블렌딩인가? 콜롬비아+부에노스아이레스? 아님 콜롬비아에도 저런 지명이 있는가? 다시 커피 정보를 확인해야겠다.
콜롬비아 하니까 백년의 고독, 다시 읽고 싶은데, 하다가 지금 읽다 말다 내던지다 들다 하는 책 목록을 확인한다.

‘음식의 영혼, 발효의 모든 것’-곡물 발효, 그리츠 읽을 차례다. 벽돌인데 제법 많이 지나왔다. 읽기보다 요즘은 책들을 지나가거나 지나치는 기분이다.

‘성과학 마스터 클래스’ 원제가 Come as you are인데, 그대로도 좋고 너바나 떠올리면 더 좋은 것을 참 속되게도 실용주의적으로 바꿔놨구만... 나 같으면 컴 애즈 유 아-성의 과학, 나는 정상이다- 따위로 원제 살리고 책은 못 팔고 회사에서 짤려서 질질 찌고 나오면서 너바나를 들었을 것 같다. 아니, 비정상이면 안 돼? 너무 정상성 강조한다. ‘정상이다.’엄청 나오는데, 노말 어브노말일지 세인 인세인일지 원문 못 읽을 나는 모르겠다. 그냥 유아 올라잇 했을 것도 같다.

‘밀레니엄1-여자를 증오하는 남자들’ 이건 직장 동료가 스릴러? 이런 거 좋아한다고 댄 브라운, 해리포터 같은 내가 한 권도 안 읽은 이름을 대는데, 거기다 대고 스웨덴 범죄 스릴러 한 권 보시죠, 데이빗 핀처 영화도 같이, 이러고 학교 도서관에 소장 검색까지 해줬다. 왜 이 책이 중학교에!!! 문학동네판으로!!! 신난다!!!알려주자마자, 동료가 빌려오는 걸 보고 찔려서 나도 전자도서관에서 빌렸다. 집에 웅진 뿔 시절 종이책도 있는데, 같은 번역가인데도 일단 첫 장 보니 개역판이야! 판권만 산 거 아냐! 이러고 문장 윤문 좀 해 둔 티는 났다. 십일년전 읽었으니 다시 보면 또 재미있을지...그 사이 너무 많은 책이 긁고 지나갔어...

‘아버지의 해방일지’ 이제 어지간한 남들은 다 본 거 같애? 엄마가 작년 수술 받으실 일 있을 때 입원 가방에 챙겨갔는데 반나절 만에 다 봤다 해서 읽고 있는데, 서술이 유쾌하긴 하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 치숙처럼 일인칭 관찰자 시점 고전미 넘치고 반어적 유머도 넘치고...35페이지까지 봤는데 그냥 끝까지 잔인한 역사도 덤덤 낄낄 훈훈하게 끝날 거 같은 예감적 예감...

‘운동 독립’ 헬스장 십육년 전인가 석달 끊어 놓고 삼사일 나가고 땡친 기억, 이제 혼자 집에서 실내자전거 타고, 덤벨로 마라카스 챱챱 하고, 케틀벨로 이거 데드리프트 맞냐, 호이짜 하고, 서울시에서 하루 이백원 주는 거 (걷기 앱) 받겠다고 팔천걸음 채우려 하고 뭐 이 정도면 독립 정도가 아니라 독립운동가 육체유공자 아닐까 혼자 착각하면서 (체지방률 15퍼센트 후반대면 빙하기 오면 제일 먼저 죽지 않을까) 그래도 뭐 놓친 거 있을까, 궁금함 반, 그냥 자기네 피티 클래스 홍보물 아닐까, 걱정 반으로 사 읽기 시작했는데 그냥저냥 처음 읽는 장르(?)라 읽을 만하다.

‘나보코프 단편전집’ 이건 읽고 있다기 보다 전자책이라 어디 가서 짧게 집중력 있게 읽긴 어려울 때 단편이니까 봐야지, 하고선 아...생각이 짧았다 그렇게 읽는 거 아냐....하면서 그냥 그런 막간 시간은 듀오링고로 때우자, 하고 아랍어를 다시 시작했다. 2017년부터 했다는데, 그 계정은 친구 추가 해놨는데 막상 로그인은 번호 바꿔 그런가 안 되서 새로 파서 무료 슈퍼 삼일 이제 곧 끝나는데...광고 안 보니 세상 행복하지만 지갑은 짠돌이라 구독은 참는 중...

커피원두-콜롬비아-백년의 고독-읽는 책들 뭐 이렇게 씨잘데 없는 소리로 카페인을 낭비 중이었구만....커피 얘기하라고... 달달하고 산미는 거의 없고 떫거나 쓴 맛도 없고 깔끔, 근데 이거 아는 맛인데? 무슨 맛인지 꼬집어 말 못 하겠고 라즈베리 건자두는 내 입에는 다 아닌데...럼은 안 마셔 봐서 모르는데...알라딘 커피 할인쿠폰 먹여도 역시 비싸... 콜롬비아를 이돈씨... 옛날 처럼 부룬디 코스타리카 뭐 이런 특이한 커피들 소개해주면 좋겠다...예멘이라든가... 말라위라든가...

아 이 커피 이름 진짜 혼란하고 재밌긴 했다. 콜롬비아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나? 에어로빅? 마시고 나면 에어로빅 해야 할 거 같은데 할 줄 모름... 과테말라 아디스아바바 몰라 필라테스 이런 커피도 어딘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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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으로만 실컷 보던 전천당 학교 도서관엔 19권까지 있는데 집에는 18권까지 밖에 없다고 사달라는 작은 어린이... 20권이랑 시즌2랑 번외편도 사달라고...

나는 커피를 내려 마실 아침 시간도 없어서 원두가 쌓여만 가는데 또 질러버리는 만행... 산딸기 프룬 럼이라니 대체 무슨 맛인데...내일 먹어보기... 청포도 젤리 이제 설탕 사지 마...

운동 책은 처음 사 봐... 전자책 충동구매...

사은품 정리함은 어린이 장난감 넣으려는데 생각보다 많이 작고 페인트 냄새? 플라스틱 냄새? 데님 쇼퍼백도 그러더니 그림 화려한 애들 냄새가 심하다. 비가 엄청엄청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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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머스캣 젤리 64g - 샤인머스캣 태국 과일 젤리 64g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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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과일 젤리 정복... 쿠폰 먹이려면 두 봉지는 사야 되네요... 망고가 더 맛있는데 샤인머스켓도 적당히 탱글쫄깃 해요. 이제 단 거 그만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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