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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평점 :
-20250525 정지아.
제목부터 신파조겠네, 별로 보고 싶지 않군, 하면서도 남들 다 보고 호들갑 가라앉으면 읽어야지, 하고 쟁여놨다. 작년 엄마가 담낭 제거술 받는 입원 때 들고 가시더니 금세 읽었다고 했다. 읽고 나니 역시, 제목은 책 팔 사람들이 붙여준 거군...이웃집 빨갱이, 그쪽이 더 내 구미에 맞았을 것이고 그랬으면 책은 더 안 팔렸을 것 같다. 좀 순화하면 상주일기 정도...
우리 아버지가 죽으면 장례식에 안 갈 가능성이 높고, 가든 안 가든 삼일 정도는 파티를 할 거라는 나놈이라서, 아버지가 다정하고 사람 됨됨이 좋고, 그래서 어려서나마 애틋함을 느낀 순간이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들에 공감을 못했다. 이문구의 ‘관촌수필’ 속 아버지 회상도 약간 그랬다. 오히려 질투 같은 감정에 에효, 인텔리 빨갱이 애비 둬서 싫지만 좋았겠네… 못되먹은 심보만 더 뒤틀리는 때가 많았다. 내가 쓰는 글은 늘 아버지로부터의 해방일지였으니 뭐 어쩔 수가 없다.
한 사람을 거쳐 간,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다들 좋은 말만 하고 가는 건, 죽으면 후해지는 사람 맘도 있을 것이고, 장례식장이라는 특수한 공간에는 진짜 척 지고 철천지 웬수 같은 사람들은 얼씬 안 할 거라 마냥 좋기만 한 사람 되는 게 가능도 하겠다 싶다.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를 주변 연 닿은 인물들로 입체적으로 그리려고 애쓰는 건 알겠는데, 나는 오히려 쥐포처럼 납짝해진 허구의 인간을 만났지 싶다. 아이 이건 소설이니까, 허구지만 핍진성 병에 걸린 나니까… 술 먹고 엄마를 쥐어패는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를 가진 삶은 살아보지 못했으니까…
혁명과 대의와 해방 세상, 인류의 진보를 위해 개인이 부서지는 이야기를 마냥 훈훈하게 읽을 수 없다. 오히려 동료를 배반하고 위장 전향 아닌 진짜 전향해서 낱낱이 비밀 다 고해 바치고 그렇게 쓰레기 인생 사는 인간상 그리는 게 나한테는 더 쉬운 일이겠구나… 내가 살아온 세상은 그렇게 어두웠구나 했다.
성대 용종 수술을 받고 묵음 요양한다고 구례 산동면에 가을 며칠을 머무른 게 십여년 전이었다. 지리산과, 빨간 열매 달거나 떨구던 산수유 나무와, 길마다 툭툭 보석처럼 떨어져 횡재한 기분 들게 하던 굵은 알밤 정도 생각난다. 빵과자 맛있어서 거의 주식 삼던 불란서베이커리(지금은 망함)랑 그 앞에 하나로마트도 내 밥거리 마련하던 곳… 그저 한적하고 그래서 이런데 묻혀 살고 싶다 한 시골 쯤으로 여겼는데, 그 산 속에서 사상 때문에 목숨 걸고, 또 살해 당하고, 삶의 다른 가능성들을 잃었던 사람들 이야기를 책 덕에 마주 할 수 있었다. 뼛가루 암때나 뿌리듯 마냥 설탕 가루 쳐 놨구만, 신파는 역시 난 됐다...싶지만 그래도 뭐 이제 나도 읽었으니 됐다. 주인공이 못된 척 할수록 난 더 못된 척 자꾸 경쟁하게 된다.
+밑줄 긋기
-열일곱의 나는, 방물장수 하룻밤 재우는 일에 민중을 끌어들이는 아버지나 그 말에 냉큼 꼬리를 내리는, 꼬리를 내리다 못해 죄의식에 얼굴을 붉히는 어머니나, 그때 읽고 있던 까뮈의 ‘이방인’보다 더 낯설었다. (13, 혁명 민중 운운하나마나 여기서부터 이 아버지, 여자 많이 밝히시네...했고 가게 주인 엉덩이 토닥일 때 그 심증을 확증으로 굳혀 버렸다. 뭐 왜 뭐)
-“사회주의의 기본은 뭐여?”
속도 없는 어머니, 아는 것 나왔다고 냉큼 알은척을 하고 나섰다.
“그야 유물론이제라.”
“글제! 글먼, 머리는 둿다 뭣혀! 생각혀봐. 사람은 하나님이 여개 사람이 있어라, 고런 시답잖은 말 한마디 했다고 하늘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먼지로부터 시작됐다 이 말이여. 긍게 자네가 시방 쓸고 담고 악다구니를 허는 것이 다 우리 인간의 시원 아니겄어? 사회주의자는 일상에서부텀 유물론자로 살아야 하는 법이여.” (16, 일단 나와 같이 먼지론 주장하는 사람 세상에 제법 흔했구나, 그건 반갑네, 싶고 이 책에 나오는 사회주의 블랙유머들이 그나마 좀 유쾌했다. 일상의 진지화...진지나 잡숴…)
-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잘 참는 사람은 싸우지 않고 그저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들고일어나 누군가는 쌈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가 된다. 아버지는 잘 못 참는 사람이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가 득세하는 것도 참지 못했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라는 봉건잔재도 참지 못했으며, 가진 자들의 횡포도 참지 못했다. 물론 두시간의 노동도 참지 못했다. 그런데 얼어 죽을 것 같은 고통은, 굶어 죽을 뻔한 고통은,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은 동료들이 바로 곁에서 죽어가는 고통은 어떻게 견뎠을까? 신념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내려와봤자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이라는 지극히 절망적인 현실 인식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68, 이제 어디가서 잘 참는다고 구라치지 말아야 겠다…)
-“암만 혀도 자네는 유물론자가 아니구만. 죽으먼 그걸로 끝인디 워디 묻히고 안 묻히고, 고거이 뭣이 중하대?”
방학 중이라 곁에 있던 내가 옳다구나 끼어들었다.
“아버지는 정말 무덤 필요 없어?”
“두말허면 잔소리! 땅덩어리나 아니나 쥐꼬리만 한 나라서 죽는 놈들 다 매장했다가는 땅이 남아나들 안 헐 것이다. 우리 죽으먼 싹 꼬실라부러라.”
입꼬리가 실룩이는 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으나 유물론자가 아니라는 말에 눌린 어머니는 더는 끼어들지 않았다.
“꼬실라서 니 펜한 대로 암 디나 뿌레삐레라. (….이하 생략)” (93, 플래그 붙여 둔 걸 보니 난 유물론 개그를 좋아하는구나… 중심 화자이자 관찰자인 딸래미는 아버지 유지를 너무도 잘 받들어서 곳곳에 아버지였던 먼지를 폴폴 뿌리고 다닌다. 아휴 난 그 감성 신파 못 견디겠는 패륜새끼)
-나는 그 사람들을 맞으러 접객실로 나갔다. 조문실을 가득 메운 늙은 혁명전사들 주변으로 이상한 결계 같은 게 드리운 듯했다. 내가 조문객이었다 해도 쉽사리 발을 디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접객실까지 흘러나오는 결의에 찬 그들의 말투도, 통일을 목전에 둔 듯한 흥분도, 나는 불편했다. 내 아버지도 그랬다. 분단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세상이 되었다는 데, 젊은 세대가 민족의 통일을 지상 최대의 과제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아버지는 분개했다. (146-147, 좌파 정치가가 나온다고 망치로 텔레비전 전면을 깨부시고 전두환 박정희 찬양하는 아버지나, 나는 진짜 깨시민 나이는 먹었지만 샤이 개딸, 그런데 내 딸년은 왜인지 진짜 보수 같은 짓만, 하는 어머니나, 어휴 뭐 중간이 없어 나 이제 평생 선거 안 해, 그러면서 민주주의 가르쳐야 되서 도망치려다 망한 나새끼는 뽈갱이 어매아배 아래 그 낙인 이겨내며 평생 살아야 했던 화자가 그럴 법도 하겠다, 싶으면서도 그래도 그 가정에는 다정도 있고 재미도 있었구나, 싶었다.)
-공교롭게도 아버지의 옛 처제가 막 나간 문으로 이번에는 어머니의 옛 시동생이 아내는 물론 아이들 셋을 데리고 나타났다. 속 모르는 사람이 보고 개판이라고 욕을 해도 할 말이 없을 집안사였다. (165, 정상가족성 좆까소, 평등주의 어매아배 양쪽 집안이 재가해서도 이렇게 왕래하는게 얼리아답터 집안, 내 취향…)
-“질 줄 알았응게.”
“예?”
그가 되물었다. 나도 묻고 싶었다.
“질 게 뻔한 전쟁이었소. 우리야 기왕지사 나선 몸이제만 그짝은 사상도 읎고 신념도 읎는디 멀라고 뻔히 질 싸움에 끼울 것이요.” (179, 질 걸 알면서도 싸우는 마음, 그러니까 넌 빠져, 하는 게 폼 잡는 거 같으면서도 그나마 나에게 먹히는 신파...슬램덩크인가…)
-“긍게이. 이상허지야. 여개 앉아 있응게 자꼬 그날 생각이 나야. 쫌 대줄 것을…...나 아픈 중 빤히 아는 사램이 자개도 오죽허먼 그랬을랑가 싶고야…...” (248-249, 망자 태우는 자리에서 그때 못해준 것 미안하고 아쉬울 수 있겠지만, 대줄 걸, 대줄 걸, 성욕 해소 못해준 거 어머니가 곱씹고 있는 장면은 선 넘네 싶었다. 웃기라고 웃프라고 넣은 장면인데, 아비도 사람이었네, 뭐 그런 건가 싶지만 자식이 모르던 아비의 인간적인 장면이 저런 식으로 그려지는 건… 후반부에서 짜게 식었소.)
+2013년, 지리산에서 횡재. 밤 세 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