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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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3 필립 로스.


 

 대부분의 책을 기대나 정보를 많이 갖지 않고 펼친다. 필립 로스나 보자, 얇은 걸로, 하고 가장 가까이 있는 걸 보기 시작했다. 첫문장과 마주한 내 시공도 새삼 6월, 한반도라 오, 했다.

 

-1950년 6월 25일 소련과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지원으로 무장한 북한의 정예 사단들이 38도 선을 넘어 남한으로 들어가면서 한국전쟁의 고통이 시작되었고, 나는 그로부터 두 달 반 정도 뒤에 뉴어크 시내에 있는 작은 대학 로버트 트리트에 입학했다. (13)

 

 책의 6분의 1쯤에 이미 19년 산 마커스는 죽었다고 까놓아서 그래서, 어디서, 왜 죽었는데, 하고 내내 궁금해하며 마커스가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사실 누구나 언젠가는 죽으니까 서사의 끝은 죽음이지 뭐. 4년 전 소설 강좌들을 때 선생님이 소설의 결말에 관해 (자세한 건 기억 안 나지만) 질문했는데 비슷하게 끝에선 다 죽는 거죠, 했던 것 같다.

 

 마커스가 대학에 가자 얘가 어디서 망하거나 죽을까 봐 불안에 사로잡힌 마커스네 아빠는 애를 엄청 닥달한다. 엄동설한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왔더니 애새끼 당구치고 방탕하게 다니는 줄 알고 문 잠가버린 아빠한테 질린 마커스는 집근처 뉴어크의 대학을 때려치우고 미국 내륙 오하이오 주의 와인스버그에 있는 대학에 편입해 기숙사로 들어간다. 1950년대에 미국에 징병제가 있었다는 것을 소설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대학생은 징집 유예가 있었지만, 졸업하고 나면 군대 끌려가서 한반도에 사병으로 투입되서 죽을 확률이 엄청 높아진다. 마커스의 사촌들도 그렇게 1,2차 세계대전에서 둘이나 죽었다. 죽기 싫으니까 열심히 머리 굴려서 최대한 학점 잘받고, 알오티씨 들어가서 장교 입대 자격도 얻고, 졸업할 때 고별사 할 정도로 우수학생 되어가지고 최대한 죽을 자리 아닌 곳으로 입대하자, 그러고나서 로스쿨가서 변호사가 되자, 우리의 마커스 엄청난 J였다. 성실하고 똑똑하고 그렇지만 불합리에 못 견디고 자유로운 영혼. 어찌보면 예민하고 지랄맞은 구석도 있다. 밤늦게 시끄럽게 음악트는 룸메 레코드판 뿌숴 버리고 결국 기숙사 방 옮기고,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애 욕했다고 새로운 룸메한테 욕해서 쳐맞고 또 방 옮기고, 그래서 너 적응에 좀 문제 있는 거 아니니, 하고 부른 학과장 방에 가서 러셀 타령하면서 갑자기 채플 필수 이수 그거 반대한다!!! 이러다가 못 참고 학과장방에 다 토해 버리고… 완전 공감은 아니지만 마커스가 왜 저러는지 자꾸 알 것만 같지…

 

 채플 설교 중 마커스는 어린 시절 뜻모르고 부르던 중국 군가를 속으로 몇 번이고 외친다. 나중에 그 노래 부르며 몰려 내려올 죽음을 그땐 모르고… 그 노래가 지금은 중국 국가로 쓰이고 있다고, 서문에서 필립로스가 소개해 놔서 궁금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중국 국가 ‘의용군진행곡’을 찾아보고 유튜브로 한 번 들어 보기도 했다.

 

-우리 모든 동포의 가슴에 울분이 가득하다. (92)

 

 노래 가사 속에서 이 책의 제목(indignation)이 나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이상했다. 내가 찾아본 중국 국가 가사 해당 부분은 울분, 분노로 해석할만한 단어가 없었다. 함성, 외침, 등으로 번역한 중국어 가사 속 한자 단어는 아무래도 이것이었는데.

吼声

 grand howl, loud call, roar에 가까운 중국어의 포효는 왜 영어 indignation을 거쳐 울분으로 번역되었을까. 책을 끝까지 읽으면 어떤 단서라도 얻게 될까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책을 다 읽고 서문을 다시 보니 2차 대전 중에 번역된 노래라고 하는데, 번역 주체는 나와 있지 않고 일본에 대항하는 중국을 지지하는 동맹국들이 많이 불렀다고만 되어 있다. 영원한 동맹은 없다…

 

 짧은 생애지만 짧은 사랑도 있었고, 뭐 그랬다. “좆까, 씨발” 한 마디로 한반도 끌려가서 며칠 안 되어 전사하는 이야기는 슬프지만… 마커스가 죽은 무렵의 한국전쟁 전투를 찾아보니 아마도 파주 근방의 ‘장단-사천지구 전투’ 초반에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사천강이 지도 검색으로도 안나와서 보니까 그냥 임진강 급의 강은 아니고 사천이라는 개천 정도 같고, 장단면도 현재는 대부분 북한 땅에 행정구역명도 바뀌었다. 친구랑 전에 하던 이야기도 생각났다. 난 그냥 아닌 건 아니라고, 들이받고 지적하고 끝까지 그러니까 결국 건드리는 사람이 별로 없게 되었지.(친구도 별로 없음) 그러니까 친구는 그냥 운이 좋아 여태까지 진짜 나쁜 사람 만나지 않아서 무사한 거라고 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전투 중이지도 않고 유신 시대도 아니고 왕정도 프랑스혁명도 아니고 마녀화형식도 없으니. 전근대시대였으면 사지가 남아나지 않았겠다. 혀도 뽑히고 하여간에 뽑힐 건 다 뽑혔을지도…

 

장단 사천강 전투는 해병대에게는 나름 전쟁 막바지의 중요한 전투/전장이었던 것 같다. 검색하면 주로 해병대의 공적 관련 자료가 나옴…


장단 사천 지구, 필립로스와 미국인들이 말하는 학살의 산은 백학산???


 마커스 엄마는 마커스한테 건네듯 나에게도 감정에 대해 말했다. 야이 새끼야 성질 좀 죽이고 살아라...한 마디 할 걸 되게 착하게 다정하게 말했다. 맛탱이 간 남편하고 헤어질 결심 중에 그걸 번복하면서까지 그러니까 너도 그러고 살아, 하고. 그러고서 백살 가까이 산 마커스 엄마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저 성질 많이 죽인 거라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진짜예요...저 많이 착해졌답니다…

 


 제목을 “좆까, 씨발”. 로 뽑으려다가 참았다. 저거야 말로 울분이 아주 농축되어 있는 언어 아니냐. 너무 농축되면 목 맥히니까 거꾸로 놓고 식히기로 했다.

 

 

 

+밑줄 긋기

-두 가지가 나를 사로잡았다. 하나는 절묘한 가르마였다. 나는 그때까지 어떤 사람의 가르마 앞에서 그렇게 마음이 허물어진 적이 없었다. 또 하나는 그에의 왼쪽 다리였다. 그 다리는 그녀의 오른쪽 다리 위에 걸쳐진 채 박자에 맞추어 아래위로 흔들리고 있었다. 당시 유행대로 치마가 종아리 중간쯤까지 내려와 있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앉은 곳에서는 탁자 밑으로 다리의 쉼 없는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그애는 그 자리에 그렇게 두 시간은 앉아 있었을 것이다. 쉬지도 않고 메모를 했다. 그 시간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균등하게 양쪽으로 머리를 가른 가르마와 쉬지 않고 움직이는 다리를 본 것뿐이었다. 그렇게 다리를 움직이는 것이 여자아이에게는 어떤 느낌일지 자꾸 궁금했다. (56)

 

-삶에서처럼 나는 오직 있는 것만 알 뿐이고, 죽음에서는 있는 것이 있었던 것으로 바뀔 뿐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만 삶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계속 그 삶에 붙어 있게 된다. 아니면, 역시 이것도, 어쩌면 나만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나 혼자만. 누가 내게 말해줄 수 있었을까? 사실 죽음이 끝없는 무가 아니라 영원히 자기 자신에 관해 숙고하는 기억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았다 한들 죽음이 덜 무서웠을까? 어쩌면 이렇게 영원히 기억하는 과정은 그저 망각으로 가는 대기실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비신자로서 나는 내세가 시계, 몸, 뇌, 영혼, 신이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모양이나 형태, 내세는 기억이 없는 곳이 아니었다. 아니, 기억이 전부인 곳이었다. (64-65, 내세가 로스 할배의 상상대로라면, 나는 이미 내세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주 많은 시간을 자기 자신에 관해 숙고하는 기억에 파묻혀 살고 있(었)으니까… 종교인의 관점에선 야, 마커스, 니가 신을 부정해서 임마 니는 연옥에, 림보에 간 거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녹색 사각형 안뜰을 가로 세로로 교차하는 돌길을 따라 걸어다니는 다른 학생들을 부러운 눈으로 보았다. 왜 나는 학생들의 모든 요구에 답해주는 작은 대학의 광채 속에서 저들이 누리는 기쁨을 함께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기는커녕 왜 모든 사람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일까? 갈등은 집에서 아버지와 시작되었다.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끈질기게 쫓아왔다. 처음에는 플러서, 다음에는 엘윈, 다음에는 코드웰. 누구의 잘못일까? 그들의 잘못일까, 아니면 나의 잘못일까? 전에는 문제라고는 한 번도 일으켜 본 적이 없는 내가 어쩌다 이렇게 빠르게 문제투성이가 되어버렸을까? 그러면서 왜 불과 일 년 전에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한 여자애한테 알랑거리는 편지를 써서 더 큰 문제를 자초하고 있을까? (123, 마커스야...갈등의 목록도 역사도 생각보다 짧구나...더 길고 장구한 트러블메이커로서 드는 생각은…네가 경험이 적어서 그런 것 같다… 목록이 길어지기 전에 죽어서 아쉽+부럽구나...)

 

-너는 다른 모든 메스너와 똑같은 메스너야. 네 아버지도 한때 분별력 있는 사람이었어.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네 아버지도 다른 사람들처럼 미쳐버렸어. 메스너는 단지 정육점을 하는 사람들 집안이 아니야.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 집안이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집안이고, 발을 구르고 벽에 머리를 찧는 사람들 집안이야. 이제 갑자기 네 아버지도 다른 메스너들처럼 나빠졌어. 너는 그러지 마. 너는 네 감정보다 큰 사람이 되어야 해. 너한테 이런 요구를 하는 건 내가 아니야. 인생이 요구하는 거야. 안 그러면 너는 네 감정에 쓸려가버릴 거야. 바다로 쓸려나가 두 번 다시 눈에 띄지 않을 거야. 감정은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될 수 있어. 감정은 가장 무시무시한 속임수를 쓸 수 있거든. (184-185, 와… 다시 보니까 엄마의 혜안… 그치만 대부분의 엄마들이 하는 충고와 애원이 그렇듯 이것도 부질없지...)

 

-“팬티! 팬티! 팬티!” 사춘기가 시작할 때와 다를 바 없이 대학생들에게도 여전히 선동적인 이 말이 밑에서 우렁차게 되풀이하며 외쳐대는 환호의 전부였다. 여학생들의 방에서는 술에 취한 남자아이들 수십 명, 옷과 손과 상고머리와 얼굴에 블루블랙 잉크와 선홍색 피가 묻고 몸에서 맥주와 녹은 눈이 뚝뚝 떨어지는 아이들 수십 명이 닐 홀의 처마 밑에 있는 내 작은 방에서 영감을 받은 플러서가 혼자 했던 일을 집단적으로 재연했다. 그들 모두는 아니었다. 결코 그들 모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얼간이들만, 다 합쳐서 셋, 1학년 두명과 2학년 한 명-이들 모두 다음 날 가장 먼저 퇴학을 당하게 되지만-만 실제로 훔친 팬티에 대고 자위를 했다. 마치 손가락을 튀기듯 빠르게 자위를 한 다음, 각자 더럽혀진 팬티, 사정한 액체로 젖고 냄새가 나는 팬티를 아래로 던졌고, 밑에서는 뺨이 새빨개진 채 눈을 모자처럼 쓰고 용처럼 입김을 뿜으며 환호하는 하급생 무리가 두 팔을 들어올리고 그들을 선동했다. (214-215, 아이 참 드러운 놈들...의 가짜 광기. 집단 눈싸움에서 흥분한 무리가 떼지어 저지르는 난동 같은 걸 난 가짜 광기라 부른다. 진짜 광기를 보고 싶다면 독고다이로 모두가 차분하고 조용할 때 마커스의 방에다가 정액을 여기저기 싸지른 플러서의 앞부분 이야기로…)

 

-만일 그가 채플에 마흔 번 나가 마흔 번 출석표를 제출만 했다면 그는 지금 살아서 변호사 일에서 막 은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처럼 말도 안 되는 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알랑거리는 찬송가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신성한 교회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기도, 그 눈을 감고 하는 기도-썩어빠진 원시적인 미신! 하늘에 계신 우리의 어리석음! 종교의 치욕, 그 모든 미성숙과 무지와 수치! 아무것도 아닌 것을 둘러싼 광적인 경건함! 코드웰이 그에게 그래야만 한다고 했을 때, 코드웰이 그를 다시 사무실로 불러 마티 지글러에게 돈을 주고 대신 채플에 가게 한 것에 대해 렌츠 학장에게 반성문을 제출하고, 그런 뒤에 훈련의 방식이자 속죄의 방법으로 마흔 번이 아니라 총 여든 번 채플에 참석해야만, 다시 말해서 대학에 다니는 동안 거의 매주 수요일마다 채플에 가야만 퇴학을 안 시키겠다고 했을 때, 마커스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다름 아닌 메스너답게, 다름 아닌 버트런드 러셀의 제자답게, 주먹으로 학생과장의 책상을 내리치면서 두번째로 이렇게 내뱉는 것 외에 달리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좆까, 씨발.”

 그래, 멋지고 오래되고 도전적인 미국의 ”좆까, 씨발”. 그것으로 정육점집 아들은 끝이었다. 그는 스무 살 생일을 석 달 남기고 죽었다. 마커스 매스너(1932-1952)는 그의 대학 동기 가운데 불운하게도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유일한 학생이었다. (238, 그래서 내가 할 일은 채플 필수 이수 대학 목록을 찾아두고 거기는 원서를 쓰지 않는 것...누가 받아준대니...성적부터 만들고 생각해라...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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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이문구 지음 / 아로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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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9 이문구.

작년에 아프고 나서 올해 수능은 다 봤다 하고 책이나 보기 시작해서 뚝딱 반 년동안 백 권 보고 연말에 다시 공부 시작했다. 20년 전 쯤 읽은 ‘관촌수필’도 다시 보았다. 올해 수능특강 문학편 마지막에 ‘장곡리 고욤나무’가 실렸길래 야, 올 수능 전에 나 이거 실린 소설집 읽고 간다 했다. 그러다가 다른 문제집에 ‘우리동네 리씨’ 실린 걸 읽었는게 리낙천씨 캐릭터가 맘에 들어서 이 소설이 더 궁금했다. 그래도 일단 연계 교재 실린 작품이 우선이지? 하며 나무 시리즈를 먼저 보기로 했다.
엄마가 2007년 8월 13일 신림동 광장서적에서 산 책이라고 한다. 맨 뒷표지를 들추면 볼펜으로 그렇게 써 놨다. 광장서적은 이제 없어졌고 나는 신림동을 떠나 떠나 봤자 그짝이 그짝이라 옆동네 봉천동 붙박이가 되어서 벌써 십 년 가까이 살았다. 이문구 아저씨는 마지막 소설에서 까그매(까마귀) 어디 갔냐고 자꾸 묻는데, 거기서도 들리신다면 말해주고 싶다. 까마귀요 관악산 언저리랑 그 근방 언덕배기들 국사봉 장군봉 상도근린공원...하여간에 관악구 근처로 다 와서 잘 살고 있어요. 저 맨날 봐요. 맨날 들어요. 까옥까옥.

전봇대에서 한참 뭔가를 노려보던 그 까마귀, 마침내 해장국집 앞 벌어져 있던 종량제 봉투에 발을 뻗어 잽싸게 뭘 하나 나꿔채서 다시 전봇대로 올라갔다. 겨우 가져간게 사리면 빈봉다리, 꽝이었다. 라면 봉지 허무하게 떨구던 그 장면을 직접 보며 나는 또다른 국어 기출 문제에서 읽은 오세영의 시 속 까마귀를 생각했다. 그리고 코웃음쳤지. 그렇게 멋있는 새일리 없잖아.


전신이 검은 까마귀,
까마귀는 까치와 다르다.
마른 가지 끝에 높이 앉아
먼 설원을 굽어보는 저
형형한 눈,
고독한 이마 그리고 날카로운 부리.
얼어붙은 지상에는
그 어디에도 낱알 한 톨 보이지 않지만
그대 차라리 눈발을 뒤지다 굶어 죽을지언정
결코 까치처럼
인가의 안마당을 넘보진 않는다.
검을 테면
철저하게 검어라. 단 한 개의 깃털도
남기지 말고......
겨울 되자 온 세상 수북이 눈을 내려
저마다 하얗게 하얗게 분장하지만
나는
빈 가지 끝에 홀로 앉아
말없이
먼 지평선을 응시하는 한 마리
검은 까마귀가 되리라.
-오세영, ‘자화상2’ 전문

넘보지 않기는요 ㅋㅋㅋ요즘 까마귀는 쓰레기 봉투도 뒤져요…
까치 떼랑 까마귀가 싸우는 걸 봤다. 독고다이 까마귀가 머릿수로 떼까치들한테 밀려서 결국 다른 곳으로 날아갔고, 이때다 싶은 까치새끼들은 득달같이 도망간 걸 쫓아가서 더 멀리 쫓고, 쫓았다. 그걸 보면 까치나 까마귀나지 뭐. 뭐가 달라.

까마귀처럼 미움 받다 못해 무심해지고 어느새 누구도 모르게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디로 갔을까, 내내 궁금해하며 이문구 아저씨는 밤잠을 설치다가 나름대로 이렇게 저렇게 적어 놓았다. 우리 동네 시리즈도 그런 것 같고, 김명인 시에서 책 제목을 빌린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도 그랬다. 나는 차가운 도시 여자가 다 되었는데, 이제 대부분 죽고 있거나 죽어 없어졌을 농사 짓던 아저씨들 서사가 이렇게 흥미로워도 되는 거냐 싶었다.
1980-90년대 언저리의 몰락하다 못해 다 망한 갯가 농촌 이야기를 보면서 아저씨나 할배들 너무 미워하면 안 되겠네 사실 그렇게 미워한 적도 무서워 한 적도 없지, 그냥 놀려먹고 젊은애들 미래 당겨다 다 말아먹은 탓하고 그러기만 했지, 그런데 역시 자세히 봐도 예쁘진 않지만 가엾긴 하지, 그러고 재미나게 읽었다.

-장평리 찔레나무
시작부터 아저씨는 아니었다. 전화해서 자꾸만 니네 딸 수능 몇 점이나 받았냐고 부아 돋우는 시동생 새끼 때문에 골머리 앓는 부녀회장님이 첫번째 주인공이었다. 스스로 반갑잖은 이 왔슈, 하면서 기껏 키운 실한 고추밭 다 털어가고, 까치 고기나 좀 잡아다 얼려 놓으라고 지랄 떠는 시동생놈 꼬라지 보면서 속터지는 두 내외 보는데 와 진짜 왜 저도 같이 열받게 이렇게 잘 써 두셨나요… 세상에 가시 찌르듯 성가시고 얄미운 인간은 왜 이리 많을까요. 어디선가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인간일까요.

-장석리 화살나무
관촌수필의 민구 아버지는 좌익에 연루되었다 젊어서 돌아가시고 집안도 고초를 겪고 기운다. 이념 때문에 인간 취급 못 받고 목숨마저 위태롭던 이가 해안선을 질러 섬으로 가서 살아남도록 돕는 이들이 나오고, 마지막은 그렇게 살아 늙은 홍옹이 단테가 한 말은 아니라지만 하여간에 중립 타령한 애들 제일 조심하라고 제일 먼저 가까이서 뒤통수 칠 놈들이라고 이야기 전해듣는/전해 주는 이에게 말해주는 액자식 구성이 좋았다. 약간 원스어폰어타임인 헐리우드 처럼 만약에,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많은 도움으로 살아 남아 여기 할아버지처럼 늙었더라면...하고 쓴 기분이어서 그런 만약에, 를 읽을 때는 늘 짠하다.

-장천리 소태나무
농촌 야외 가서 카섹스 좀 하지 맙시다...한 마디 하고 싶은 걸 가지고 소설 한 편 잘 써 놨다. 소태나무 본 적도 먹은 적도 없지만 도로 뚫리고 도시에서 교외로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은 농촌 사람들에게 안 본 눈 사고 싶은 일도 많고 많게 씁쓸하게 만들었다는 걸 이렇게 박제해 놨다.
신규 발령 받은 학교에 매일 새벽부터 몸빼바지 입고 집게랑 봉투 들고 쓰레기 줍고 다니던 독특한 선생님이 계셨다. 그 분이 교감 선생님한테 막 속상한 듯 말하던 게 생각났다. 교감 선생님! 내가 학교 주차장에서 뭘 주웠는지 아세요? 콘돔! 한강변이라 그런가 외부차들 막 들어와서 별짓을 다 하고 가… 덕분에 젊어서 알았다. 사람들은 참 때와 장소 가리지 않는구만… 학교라고 하면 더 신날 수도 있겠네… 교회나 절, 고궁이랑 비슷한 배덕감… 여기까지...

-장이리 개암나무
예전에 ‘나무의 모험’이란 책 읽었을 때 야무진 이웃에게 넌 개암나무! 난 산사나무! 막 이랬었는데 개암나무 나오는 이 이야기가 참 좋았다. 날이 가무니까 비라도 오라고 기우제를 지내겠다는 마을 사람들, 그런데 이 지역 연고 없는 서울 사람이 묘를 여기다 써서 그렇다며 무덤을 파버리겠다고 작당을 한다. 거기다 대고 혼자서 끝까지 그게 말이 되냐고, 에미넴 싸대기 치게 8마일 찍어가며 충청도 사투리로 랩배틀 뜨는 인물이 나오는게 재미났다. 송곳 같은 사람이 그래도 동네마다 하나는 있구나, 그래서 우리 존재 다 망하진 않고 이럭저럭 버티고 있겠지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기우제 비과학 빼액 하던 아저씨도 자기네 꾸찌뽕 나무에다 까치가 집 짓는 거 보고 옛 고전에서 본 선비님들 집 앞 나무에 까치집 짓고 나서 다 과거 급제 했대...우리 고3 아이도 제발… 내년엔 지금 고2인 참한 조카 아이도 제발… 이러는 거 더 재미있었다. 인간은 참 모순의 존재라 재미있지. 잘 여문 개암 한 움큼, 열 세톨 주워다가 여섯 톨은 아이들 먹이고 일곱 톨은 묻어서 단 하나 난 나무를 키우는 아저씨,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무덤이라도 그거 파버리는 마을 사람들 말리는 거랑 아주 일관되게 올곧고 다정해서 이 책에서 제일 마음 가는 캐릭터였다.

-장동리 싸리나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아저씨가 밤새 잠 못들고 달빛 훤하게 비친 곳에 풍란 그림자 보고 수묵화로 착각하고, 잡앞 저수지에 머물다 가는 새들을 떠올리고. 분위기나 묘사가 꽤나 돋보이는 소설이었다. 마지막에 고깃배 착각한 이야기는 뭔 금오신화 따라하듯 기이한 분위기도 있고… 이문구는 매월당 김시습 가지고 소설 써 놓은 게 있기도 하니까 이 소설 전개에 그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안 읽고 거의 십 년 전에 사 쌓고 그런 소설이 (집에) 있다는 걸 알기만 하고...여태 안 읽은 이문구 소설이 아직 남아서 행복…

-장척리 으름나무
나는 시골 (그래도 읍내) 살았어서 으름 먹어봤다. 삼촌들이 야생 바나나야, 하고 줬는데 씨꺼먼 씨만 겁나게 많고 미끄덩거리고 영 거슬리던 생각만… 자기 장인더러 으름덩굴 같다고, 우직하게 농촌 지키는 종구에게는 미련하다고 퉁박 주는 농촌운동 한다는 은산이 새끼 너무 얄밉더라…

-장곡리 고욤나무
나는 역시나 시골 출신이라 고욤열매도 먹어봤다. 할머니가 고염이라고 알려줬는데. 할머니네는 감나무는 없고 접붙일 때 놓쳐 작고 시꺼먼 열매 다닥다닥 열리는 고염나무만 집 앞에 하나 있었다. 할머니가 그걸 가지째 말려 곶감이다 하고 줬는데 먹잘 것도 없고 씨만 크고 살은 적고 조금 달긴 한데 덜 마른건 뜹뜨래 하고 먹기 싫었던 것 같다. 고욤 하면 그렇게 말라 비틀어져 일만 하다 할아버지한테 맞아 죽은 할머니만 생각난다. 이 이야기에서도 기출이 아저씨가 농지법 바뀌고 망했네 시발 하고 거의 우울증처럼 땅도 못팔고 땅팔아 돈달라고 지랄거리는 새끼들 때문에 속터지다 고욤나무에 송아지 목줄 매달고 죽은 일을 사촌 봉출이 아저씨가 명탐정 코난처럼 회상하고 관찰하면서 세상 재미없다더니 죽었네, 하는 주변 사람들한테 아닌데 이눔들아...속 생각 하는 구성으로 그려놨다. 과연 나놈이 이 책을 읽게 만든 기출이 아저씨 이야기는...수능 기출로 남을 것인가 미출제될 것인가 ㅋㅋㅋㅋ

-더더대를 찾아서
까마귀에서, 언년이에서, 더더대로 이어지는, 이문구의 문학관이 압축된 듯 읽히는 이야기였다. 나무타령하다 마지막은 갑자기 까마귀 타령으로 마무리해서 밀란쿤데라 전집 나온 뒤 갑자기 ‘무의미의 축제’ 하나 내서 전집에도 안 싣고 매롱하던 할배 생각도 좀 났지만, 잊었던 것들, 사라진 것들을 내내 궁금해하는 화자는 그것들을 그리워하는 것이겠지 싶었다.

이 소설집은 2000년에 동인문학상을 받았는데, 마지막 수상 소감도 재미있었다. 조선일보라 뭐라해도 이 상은 있을 만하고, 나도 주니까 잘 받고, 김동인 친일이라고 그 상을 받냐고 뭐라하는 놈한테는 우리 조상도 창씨개명도 했던 집안인데 내가 독립운동가도 아니고 뭐 어쩌라고 이러고 눙치는 거도 패기쩔고 뻔뻔한게 어디서 쳐 맞고 다니진 않았겠네...싶었다. 근데 술이랑 담배는 좀 줄이시지 벌써 이십 년 전에 돌아가시다니 좀 빨리 가셨네요 이문구 아저씨...그래도 쓸만큼 쓰고 가서 저는 남겨주신 거 재밌게 읽습니다 다음엔 우리동네 읽겠습니다… 6모 국어 1등급 맞고, 매번 4-5등급 언저리던 수학도(현실적으로 낮춰 잡은) 목표치였던 3등급 찍맞 컷으로 겨우 달성해놓고 그래도 신난다고 상이라고 오랜만에 읽다만 소설책도 다 읽고 독후감도 써갈기고 내일부턴 또다시 지하감옥 스터디카페로..읽던 책 한 권 다 해치워 속 시원한 주말 밤입니다… 저는 까마귀/사마귀도 제 친구 같아 좋지만 요즘엔 물까치가 더 좋네요...


+밑줄 긋기
-나 역시 저냥 저랬던겨. 달빛에 번들거리는 저 물빛마냥 살아온겨. 못나게. 지지리도 못나게. (177)

-까마귀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다만 여느 새처럼 예쁘지가 않다고 하여 미운 털이 박힌 새로 사람들에게 돌림을 받아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검은 깃털이 왜 미운 털이란 말인가. 또 짖는 소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사람들의 눈 밖에 난 셈이라지만, 까마귀 소리가 왜 저승에 가자는 소리나 곡을 하는 소리와 비슷하단 말인가. 까마귀를 훌닦는 험구는 덧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마을에 살면서도 서로가 뜨악하여 탐탁지 않게 보다 보니 조석으로 마주쳐도 으레 낯이 설 수 밖에 없었고, 낯이 설다 보니 오해만 되풀이되게 마련이었을 거였다. 그리하여 까치는 사람들에게 국조로 추대되어 한창 대접을 받아가며 사는 동안 까마귀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나은 새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새로 소외되어 외로움과 서러움을 도맡아서 살다가, 언젠가부터는 원래 없었던 새처럼 숫제 구경도 하기가 어렵도록 죄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29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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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정의 발화점 2 - 완결
박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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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6 박선우.

 하안이는 은성이를 좋아했다. 몸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이 보일 만큼. 그런 하안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효정이는 하안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활활 타는 불이 옮겨 붙은 것 같았다. 잘 모르던 사이에서 조금 아는 사이, 친해질락말락 하는 사이, 그리고 좋아하는 사이,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거기서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이, 이런 미묘한 관계들의 지점을 잘 그린 만화라고 생각했다. 사실 많은 사이들이 그렇게 무 자르듯 선명하지 않고 또 가까워질 듯 멀어지기도 한다. 서사에서나 아예 헤어지거나 뭔가 명확하게 관계에 명명이 되거나 영원한 사랑 어쩌구 하는 거지. 그래도 친절한 작가, 핍진성 바르느라 조금은 고구마 먹은 기분이 될 독자들에게 마지막에는 원하는 장면(?)을 산뜻하게 건네주고 마무리했다.

 수능 국어 단골 작품 중 춘향전을 보다가 든 생각이다. 겨우 열여섯 된 여자아이 남자아이가 만난다. 그네 타러 나온 여자아이 겉모양만 보고 남자아이가 하인 보내서 찔러본다. 편지도 주고 어쩌고 저쩌고 플러팅 성공, 여자애네 집에 가서 폭풍 섹스한다. 정든다. 그런데 우리 아빠가 회사 다른데 발령 났어…서울로 가야 해… 여자애는 야 니가 나 꼬셔 놓고 뭐야 나 죽이고 가든가 데리고 가… 그러다가 체념하고 가라 가… 주안상 잘 차려 먹여 보내준다. 고을에 새 관료새끼가 춘향이 예쁘다는 소문 듣고 와서 야 니 엄마 기생? 너도 기생, 나랑 섹스 해, 한다. 춘향이는 나 이미 몽룡이랑 섹스, 다른 놈이랑은 할 생각 없어, 해 하라고! 안 하면 감옥 가라… 진짜로 감옥에 가두고 나중에 몽룡이가 와서 풀어준다.


 그때는 열여섯이면 어른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열아홉 스물 이렇게 설정해도 뭔가 논란의 서사일 듯하다. 과거 사람들은 삶이 짧아서 그랬던가 그래서 고민할 시간이 짧았던가 좋아하는 마음 뒤에 상대와 뭘 하게 될지 뭘 바라는지 명확했나 보다. 요즘은 사랑은 그런게 아니라고, 너는 나랑 하려고 만나는 거냐고 개처맞을 일이 많아서 하여간에 뭐든 삼가야 한다. 


 청소년기의 사랑은 더 그렇다. 그랬다. 무얼 이루고 무얼 바라는지도 모르고 좋아하는 마음은 커지기만 하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대개는 그냥 좋아만 하다 끝났다. 좋아하는 마음을 들키든 밝히든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귀는 애들은 고3 때까지도 되게 예외적인 경우였다. 경찰대 준비하던 같은 반 남자아이는 옆반 여자아이를 쉬는 시간마다 자기 무릎에 앉혀 놓고 놀았다. 그게 그렇게 열받더라… 왜 내가 열이 받던지 ㅋㅋㅋ 우리 시대에는 춘향이 몽룡이 되기는 드물고 되어서도 그닥 좋을 일도 못 된다. 고딩엄빠 이런데 나왔다가 조혼의 폐해만 보여주고 조기이혼하는 엔딩만 간간히 들리고… 뭐가 좋다 나쁘다 그런건 아니고 그냥 그렇더라고…


 효정이는 하안이를 좋아하게 되면서 “사랑은 결국 솟구치는 불길 속에 자신을 던져넣는 것 만큼이나 지독히 괴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조금만 맞는 이야기 같았다. 사랑의 감정은 자각했는데 거기서 뭘 더 어쩌지 못할 때 그런 것 같다. 이해 받고 아끼고 함께 좋은 순간을 나눌 수 있으면 괴로움이 본질은 아니겠지. 그런 좋은 것들을 갈망하지만 그것이 외부의 방해물이든 혹은 관계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든 얻지 못할 때 겪는 고통이지 싶다. 그런데 그렇게 이루지 못해 괴로운 건 사랑만은 아니다. 성적 향상도, 취업도, 선거 당선도, 공모전 당선도, 한정판 굿즈 획득이나 최애 가수 콘서트 티켓 획득도 그러하다… 그런 욕망조차 사랑의 범주 안이겠지만… 그러면 살아가는 중의 너무 많은 것들이 다 사랑하는 일이겠다. 


 읽은 것도 쓴 것도 너무 없어 주절주절 말이 많네… 이 웹툰 완결은 2019년도였다는데 단행본은 2023년에 나왔다. 오늘 3년째 공부하고도 개빠가인가 나아질 기미 안 보인다고 징징 좌절했는데 연재+책 엮기 까지 저렇게 걸린 거 보면 내가 징징댈 일도 아니겠다… 아니 그래도 수험 생활 9수 10수 할 수는 없잖아… 그러면 사람이 좀 많이 망가지지 않겠니… 그런 망가진 사람들도 사랑하겠다고 사랑하는 사람 지키겠다고 개삽질도 하고 그러지 않니… 부정칭 미지칭 읍읍 아무말 대잔치

나는 이상하게 이런 장면이 좋더라. 생활의 지혜. 여름 끝나면 보호 덮개를 꼭 씌워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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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essa 2024-05-06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Wow

반유행열반인 2024-05-07 15:53   좋아요 0 | URL
Wow!!! lol
 
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 태학산문선 103
이옥 지음, 심경호 옮김 / 태학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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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3 이옥.

수능 국어공부는 공부라기보다 여가 생활에 가깝다. 문제 풀이하고 틀리면 물론 개빡치지만, 조금이라도 들어보거나 좋아하는 작가 작품, 관심 분야 지문이 나오면 흥미가 생긴다. 고전 시가나 산문은 영 꼴보기 싫고 지긋지긋했는데, 자꾸 보아야 재밌다, 이것도 그렇다. 발췌본으로 토막토막 보는 고전들도 이제는 재밌다. 아무렴, 들여다 봐도 도무지 늘 궁리 안 하는 수학, 과학에 비하면 이건 여가생활 맞다.

빈출 작가 중 이옥이란 이름이 눈에 띄었다. 글은 그냥 고만고만했는데, 자꾸 나오니까 궁금해서 산문집이랑 어린이책이랑 갖춰 놨다. 그중 하나를 펼쳤는데, 한문을 한글로 번역한 학자 선생님이 문장을 엄청 힘줘놔서 아니 왜 이렇게 멋을 부려...했다. 이옥의 수많은 수필, 소설, 전 등등 중에서 몇 작품을 선정하고 번역자가 글 끝마다 논평 같은 걸 덧붙여 놨다. 책 머리에 이옥에 대한 소개를 읽고 그제서야 어떻게 살다간 사람인가 알았다. 왕족 후손이긴 한데 뭔 고조부였나 위에 조상이 서얼이라 이옥 신분도 그닥 높지 않았다고 한다. 글깨나 써서 성균관 들어가고 벼슬을 할랑말랑, 그런데 당시에 정조가 문체반정하는 때라서 이옥의 독특한 글쓰기, 문체, 이런 걸 정조가 되게 싫어했나 보다. 얘 문장 고칠 때까지 아침마다 깜지 50줄씩 쓰라고 해, 이러다 못해 야 그냥 군대 보내, 와...죄 지은 벼슬아치나 양반은 군대로 유배처럼 보내버렸는데 이옥은 자꾸 그렇게 쫓겨났다. 군대 끌려갔다가 다시 초시 장원해서 까방권 생겼는데 까먹고 관청에 스스로 신원회복 같은 거 해야 되는데 안 해가지고 벼슬길은 막히고… 그래서 그냥 지방 가서 글쓰고 놀다가 오십대에 죽었다.
계속 공부하고 글쓰고 시험 보고 했던 거 보면, 그리고 좀 잘 써서 계속 시험 통과한 거 보면 나름 벼슬길에 뜻 있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뻔한 거 쓰기 싫다고 문체 안 바꿔서 쓸쓸하게 살다 간 인간… 결국엔 이런 반항아들의 글이 남는다. 그당시 관료는 뭐했나 별로 안 궁금하지만 이 사람이 남긴 글은 궁금하지 뭐니. 근데 읽어보면 독특한 깨알 디테일이 있긴 한데 또 막 엄청 명문 그런 건 잘 모르겠다. 어디에 어느 아무개 하고 시시콜콜한 걸 많이도 남기긴 했다. 막 왕가의 일 벼슬아치 나라의 일 이런 거 말고 일반 민중 이야기 떠도는 이야기 아녀자 이야기 이런 걸 적어 둬서 아,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거 비슷하다… 이렇게 알게 해줬다. 소설도 이것저것 남겼는데, 수능 국어 모의 문제 풀다 한 번 읽은 심생전을 책 말미에서 한 번 더 읽으니 또 새로웠다. 다른 신분 간 사랑 나누다 결국 일찍 죽어 버린 연인 이야기를 적어 두고, 이 이야기 출처가 어려서 선생님이 해주시면서 이렇게 연애질 하라는 게 아니라, 하물며 남녀 일도 이렇게 정성을 다하면 여자 마음이 열리는데 니들 공부 열심히 하면 뭔들 못 이루겠니...이러고 교훈적으로 전한 게 오래 기억에 남아 책 뒤져 보니 비슷한 야사가 많아서 여기 글로 남깁니다, 하고 뭔 액자에 액자 구성으로… 괜히 패관문학 같은 거 쓴다고 임금님한테 쳐 맞을까 봐 눈치보면서 교훈도 바르고 내가 지은거 아니고 어디서 주워들은건데...이렇게 틀까지 갖추며 눈치보면서도 그래도 적어두고 싶어 못 견디겠다!!! 이러는 천상 글쟁이…

이옥도 소소하게 재미나게 읽었지만, 정말 뭔 웹소설 같은 거 쓰고 싶은데 소재 없으면 고개를 들어 고전문학을 보라…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렘물의 정석 구운몽, 기담 금오신화 이런 거 말고도 진짜 막장 전개에 재미난게 많다. 어제는 수능특강에 소개된 삼선기 다이제스트를 공부(?그냥 논 거 아니냐…)했는데, 이게 또 스토리가 스펙타클했다.(궁금하면 수능특강 문학 참조…)

이렇게 온갖 책 읽을 시간을 잃은 유폐된 수험생에게 숨은 명작, 숨은 반항아들 소개해주는 수능 국어는 한줄기 빛… 작가가 불행할수록 읽는 나는 즐거운 사례는 늘어만 가고… 난 그냥 명작 안 남기고 행복하게 살다 갈란다…했지만 이 나이에 수능을 준비한다고 꼴값하는 바람에 행복하게만 살기는 이미 글른 듯… 다음 독서는 수능특강 연계 작가 이문구의 소설집들로 픽...ㅋㅋㅋ 오늘 우리동네 리씨 문제 지문으로 읽는데 이거도 너무 재밌어서 풀버전으로 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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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5-03 0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수능 국어로 여가 생활를 하시는군요?! 근데 이옥이란 사람 재미있네요. 글도 궁금해짐… 그나저나 유열 님 웹소설 쓰시면 깨알 재미날 거 같으니, 올해 수능 뜻대로 안 풀리면…. 웹소설 씁시다.

반유행열반인 2024-05-03 10:44   좋아요 1 | URL
저는 웹소설이란 걸 존재만 알았지 도무지 읽을 엄두가 안 나서 + 대중 보편적인 감정과 취향 파악이나 공감 능력도 부족해서 창작도 어렵지 않을까요? 무엇보다도 ‘책만 읽던 서생 두 남장 기생 제자에 훼절 당하고 기생학교 교장 되다!’(삼선기 대략 줄거리…) 이런 제목 붙인 글 읽기도 쓰기도 저에겐 너무 고난도 ㅋㅋㅋㅋ으으으 ㅋㅋㅋㅋ

잠자냥 2024-05-03 11:04   좋아요 1 | URL
웹소설 계 평정중이신 고라니상한테 좀만 배우면 될 거 같은데요?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5-03 12:55   좋아요 0 | URL
평정은 그분이계속하시면 되고 남에게 배우는 걸 제일 잘 못하는 저는 그냥 이렇게 까까까 독후감이나 쓰고 살다 죽는 걸로….ㅋㅋㅋㅋㅋ

희선 2024-05-11 04: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떤 책에선가 이옥이라는 이름 본 듯도 하네요 거기에는 여러 사람 이야기가 담겼던 것 같은데... 어쩌면 다른 사람이 책 읽고 쓴 글에서 봤을지도...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군요


희선

반유행열반인 2024-05-11 08:10   좋아요 0 | URL
여러버전으로 많이 나왔더라구요. 김려라는 친구가 이옥 글을 발굴해서 정리해서 책으로 엮어 놓은 덕에 원재료가 많아서 어린이책 산문집 전집 요렇개 저렇게 가공해서 내기도 쉽겠더라구요. 이야기는 다양하고 소소하고 ㅋㅋ
 



 네 권만 어떻게 골라. 네 권이나 어떻게 골라. 모아 보니 다들 좋긴 한데 어딘가 모서리 하나씩 콩콩 빻은 책들이다. ㅎㅎㅎㅎㅎ

 닉네임 다섯글자 제한 모르고 막 적었다가 열인됨… 나 멕일려고 여섯자 안 한 거지…



오늘 치인 시 한 편. 그지 손글씨. 오세영 시집 살 것 같다. 전집(절판) 말고 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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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4-04-23 2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명의 벌레처럼 무명을 ㅜㅜ

반유행열반인 2024-04-23 22:42   좋아요 1 | URL
이름이랑 빛이랑 다 없는데 나는 다 있다 ㅋㅋㅋ 저는 세상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헉 했는데 치이는 부분이 다 다른듯요 ㅋㅋ 공부하다 보면 여기저기서 온갖 유수 한자 다 다른 단어가 나와서 저는 그때마다 유수님을 떠올립니다 ㅋㅋㅋ

유수 2024-04-23 22:44   좋아요 1 | URL
저도 거기도 치였는데(질척) 지금 스스로가 벌레같아갖구 꽂혔나봐요

반유행열반인 2024-04-23 22:45   좋아요 1 | URL
아이참 이렇게 반짝거리는 벌레가 ㅋㅋㅋ너는 유충 나는 반충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4-23 2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이벤트 남들 올린 책 보는 거도 되게 재미있다. 나랑 백년의 고독이랑 죽음의 한 연구 겹치는 사람보고 쿵 해서 오, 누구야 밤샘소년 어딨어 나와, 이러고ㅋㅋㅋ

잠자냥 2024-04-24 10:37   좋아요 1 | URL
왜 사드는 안 넣으셨쬬? 실망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4-04-24 14:15   좋아요 1 | URL
걔는 책은 별로고 인생책 아니고 인생인생이어서???(???)잠자냥남이 왜 실망하셔요…대체 왜…

잠자냥 2024-04-24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엿 많이 드셨나요? 🤣

반유행열반인 2024-04-24 14:15   좋아요 0 | URL
??? 이거 욕한 건가요????? ????

잠자냥 2024-04-24 14:20   좋아요 1 | URL
엥? 아침에 읽을 땐 분명 ˝나 멕일려고 여섯자 안 한 거지…˝에 엿이 있었는데....!!!!😱😱😱

(제가 잠이 덜 깼나 봅니다..... 헐.. 욕 아닙니다. 죄송)

잠자냥 2024-04-24 21:21   좋아요 1 | URL
아 유열 님 제 댓글 욕으로 듣고 사라지셨어 ㅠㅠㅠㅠㅠㅠㅠ

반유행열반인 2024-04-25 19:34   좋아요 1 | URL
우리 자냥이 언니… 제 또래 젊은이인가 했는데 없던 엿 글자도 보이고 노안 초기 증상을 보니 아무래두 저보다 한참 언니이실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 막 던지는 것 같아도 은근 선타기에 신경쓰시는 군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4-04-25 23:54   좋아요 1 | URL
아 제가 예의에 어긋나는 건 또 싫어해서… 다행입니다. 오해로 상처드렸을까 봐 진심 그제어제오늘 걱정. 🥹

- 2024-04-24 1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는 박상륭을 담아둡니다… 사드 왜없냐며 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4-25 19:36   좋아요 1 | URL
박상륭 진짜 저는 외롭게 개샹마웨로 살다 이거저거 막 써 갈기고 디진 변태들이 왜 이리 사랑스러운지…살아있으면 좀 덜 사랑스러웠을 듯 ㅋㅋㅋ

새파랑 2024-04-24 2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죽음의 한 연구> 사놓긴 했는데 손이 안갑니다. 열반인님 인생책이군요~!!

그런데 <새버쓰의 극장>은 안보이는군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4-25 19:37   좋아요 1 | URL
진짜로 새버스의 극장 한 3초 고민하다가 다독한 책 위주로 골랐습니다. 새버스도 한 십년 후 한 번 더 읽고 그때도 좋으면 인생네권을 다섯권으로 갱신하는 것으로 ㅋㅋㅋ
죽음의 한 연구는 이십년 간격으로 두 번 읽었는데 두 번 다 좋더라구요. 저는 보뱅을 못 좋아하잖아요. 다 각자 맞는 책의 결이 있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