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 뒤라스가 펼쳐 보이는 프랑스판 ‘부부의 세계’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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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7 마르그리트 뒤라스.

뒤라스의 ’연인’, 소설과 영화와 작가의 삶에 대해 엄마는 자주 말하곤 했다. 누군가 어떤 이야기에 빠져들고 감탄하는 건 자기 삶의 궤적과 닮거나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었다. 언젠가는 봐야지- 하는 책과 영화가 자꾸 는다.
이 책은 처음 읽는 뒤라스의 소설이었다. 엄마에게 뒤라스 타령을 한참 듣다가, 책 광고에 ‘프랑스판 부부의 세계’라니까 왠지 끌려서 사버렸다. 초여름에 눈병이 심하게 걸린 병가 동안 눈꼽이 꽉 찬 눈을 억지로 떠가며, 흐르는 누런 눈물(슬퍼서가 아님)을 휴지로 찍어 가며 종영된 드라마를 1.5배속으로 정주행했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읽고 보니 낚였다는 생각만...마케팅의 1승.
겉표지와 책갈피는 예쁜 민트색이었다. 겉지 없이 천으로 감싼 표면은 아주 옛 책의 까슬한 질감이라 좋았다. 여자와 남자의 순간을 담은 흑백 사진을 액자처럼 앞표지 한가운데 붙였다. 파란색 압인 음각으로 제목과 작가 서명, 본문 일부를 앞뒤표지에 새긴 것까지, 책의 물리적 속성은 옛 소설에 어울린다 싶고 마음에 들었다.
본문 편집은 겉모습보다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원작이 그런 건지는 몰라도 문단 시작에 들여쓰기를 하나도 안 했고, 문단과 문단 사이 간격도 따로 띄우지 않았다. 여는 큰따옴표만 문장 마지막에 덩그라니 있고 그다음 줄에서 대화가 시작된 부분도 있었다. 녹색광선은 이번에 처음 보고 아직 펴낸 책이 많지 않은 작은 출판사 같은데 독자가 읽기 편하게 책을 만드는 기술은 부족한가 싶었다.
편집 탓인지, 번역 탓인지, 문장 읽기도 매끄럽지 않았다. 전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도 아니고 설명이 필요할 만한 내용도 없는데 더디게 읽혔다. 먼저 사둔 미셸 우엘벡의 ‘세로토닌’을 번역한 역자던데, 이런 문장이면 다음 독서도 괜히 걱정이 되었다. 책 투정이 길었네.

사라-자크 부부와 그들의 아들, 지나-루디 부부, 다이애나. 휴가를 함께 보내는 중인 친구들. 산기슭과 강, 바다와 절벽을 갖춘 해변 마을에서 40도가 넘는 찌는 더위에 내내 시달린다. 지치고, 당장 물에 뛰어들고 싶고, 시원한 바람 맞으며 모터보트를 타고 싶고, 차가운 캄파리를 들이켜고 싶고,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고. 휴가를 충분히 즐기거나 만족스러워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전후 잔여 지뢰를 제거하다 폭사한 젊은이의 시신을 찾으러 온 젊은이의 노부모가 버티고 있는 산에 찾아가고, 호텔에서 맛없는 식사를 하고, 바다에서 수영을 하거나 일광욕을 한다. 그들 사이에 모터보트를 몰고 온 낯선 남자가 끼어들고, 남자는 사라에게 관심을 보이다 짧은 저녁 시간 남몰래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소설 내내 아이를 맡기는 문제를 두고 불성실한 가정부와 사라 부부가 실랑이를 벌이고, 지나와 루디 부부, 사라와 자크 부부는 뚜렷하지 않은 이유로 티격태격하고 그러면서도 서로를 바라다, 원망하다, 떨어져 있고 싶다, 같이 떠나고 싶다, 갈등하고 서로의 차이를 마주하는 일을 반복한다. 먹고 놀고 쉬고 자고 덥다고 늘어지고 씻고 아이가 노는 걸 구경하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읽는 사람도 덩달아 권태롭고 지긋지긋하고 나른하게 했다.
자신을 욕망하는 남자가 생긴 일에 황홀해하던 사라가 너무 덤덤하게 체념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건 현실적이면서도 심심했다.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파에스툼으로 가는 여행을 제안하다 거절당하는, 그러다가 체념한 채 다 알아, 하고 남자와 사라에게 말을 건네는 자크의 마음은 어땠을까 궁금했다. 자크도 다이애나와 각별한 사이로 보이고 이전에도 먼저 하고 다닌 짓이 있어서 그런지 크게 고통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다들 너무 무덤덤해서 이새끼들 뭐지 싶었다.
제목만 보고 이들이 있는 곳이 타키니아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타키니아에 가면 작은 말이 벽화로 그려진 고분을 볼 수 있다고, 자크와 루디와 사라는 그 말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지만 그들이 정말 작은 말들을 볼 수 있을지, 결국 보았는지 알 수 없다. 구글 이미지에 검색해 말들의 그림을 찾았다. 벽화의 말도 있고, 같은 동네에 부조로 된 말 모형도 있는 모양이었다. 이전에 본 김영하의 시칠리아 섬 여행기에 나왔던 아그리젠토 신전만큼 좋다고 언급되어서 그제야 이 동네 이탈리아였군! 나도 거기 들어봤어 헤헤-했다.
크게 재미는 없었다. 일상과 인생은 크게 재미 없는 편이 안전한 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재미있는게 좋다. 늘 그런 거만 읽을 순 없지만 가끔 소설 속 놈들이 내 대신 망하고 싸우고 활활 불타다 죽고 멸망하고 그랬으면 좋겠다. 대리만족. 못된 독자.
마음껏 낯선 해변에서 보낼 수 있는 나날, 낮과 밤의 바다와 넘치는 햇볕, 할 일 없이 마냥 빈둥대는 시간을 누리는 모습은 많이 부러웠다. 물론 나 역시 사라처럼 아이 뒤치닥거리 하느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모습이 선하긴 하지만.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시대는 언제쯤 다시 만나게 될까.

+밑줄 긋기
-그것은 세상의 이면이었다. 고요하게 반짝이는 밤, 침묵으로 얼어붙은 고요한 해초들이 무성하게 들어앉은 밤이 그들을 떠받치고 있었다. 물고기들의 행렬이 불가해하며 손에 잡히지 않는 칠흑 같은 밤의 공간에 줄무늬를 그렸다. 군데군데 삶이 멈춘 곳들이 보였다. 헐벗고 텅 빈 심연들이 드러났다. 그곳으로부터 푸른 그림자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순수한 그림자가 감미로이 떠올랐고, 그것은 명백한 죽음의 광경이어서 도리어 생생한 삶을 웅변했다. 하지만 다이아나가 어서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고 소리쳤다.
“우리가 바다의 심연을 견딜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모르시겠어요?”
남자는 대답했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똑같이 등을 돌리고 선 두 남자를 보았다. 한 명은 그녀가 잘 알고 있었고 언제까지나 그럴 터였다. 다른 한 명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를 결코 이 이상 알지 못하리라. 그는 그녀가 결코 더 이상 알지 못하게 되어 버릴 남자였다. 또 다른 남자는 그녀가 결코 알지 못할 남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모든 삶을 동시에 다 살 수는 없어, 라고 루디는 말했었다. 두 남자에 대한 지식은 양립이 불가능했다.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사랑은 권태를 포함한 모든 것까지 온전히 감당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는 강물을 마주한 채 그녀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게 사랑이야. 삶이 아름다움과 구질구질함과 권태를 끌어안듯, 사랑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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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09-27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커버는 정말 예쁜데요… 사랑엔 휴가가 없다는 말이 인상 깊네요…

반유행열반인 2020-09-27 20:40   좋아요 2 | URL
SNS에 사진 예쁘게 나오는 거 노리고 디자인한 느낌이에요 ㅋㅋㅋ휴가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건데 저한테는 가혹하게 들려요.ㅎㅎㅎ

하나 2020-09-27 2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뒤라스 좋아요. <연인>이랑 <이게 다예요> 읽었는데 좋았어요. 사랑엔 휴가가 없다는 구절도, “이 새끼들 뭐지”도 좋네요 ㅎㅎ 이미 그러시고 계시지만, 사랑에 관한 반누님의 소설 리뷰가 모여서 하나의 책이 될 거 같다는 예감이 들어요. “박수현”이라는 평론가가 <서가의 연인들>을 그 주제로 다룬 걸 재밌게 읽었는데, 요즘 더 즐겁게 읽고 있어요.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숨도 안 쉬고 일독한 사람 올림 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9-27 20:42   좋아요 2 | URL
와 왜 하나님 혼자 김치국 드링킹 해주시는 거죠 저 대신? ㅋㅋㅋ뒤라스를 벌써 두 개나 읽으셨군요. 꼬꼬마는 갈 길이 멀고 험합니다. 이 새끼들 뭐지 하는 제 리뷰 보고 이렇게 쓰는 이 새끼는 뭐지 하는 하나님의 관심 덕에 요즘 알라딘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ㅋㅋㅋ

하나 2020-09-27 20:51   좋아요 2 | URL
제가 막 체실비치에서 리뷰 제 동생한테도 영업했는데 반유행열반인님 노예 한명 더 생겼다고요 ㅋㅋㅋㅋㅋㅋ 일단 헛살지 않으셨고요(중요), 헛살지 않았다고 해서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닌데,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도 가볍지만은 않게 촌철살인을 날려주시는 것이 반유행열반인님의 재능이죠! 저희 자매가 언제나 응원합니당 💚

반유행열반인 2020-09-27 20:59   좋아요 2 | URL
부족한 저에게 최초(?)의 자매 이웃?독자?가 되어주셔서 그저 감개무량 황공무지하옵니다. 하나님과 둘님(??내 마음대로 동생이니까) 남은 주말 밤도 행복하고 편안하시길 진심 기원합니다.

하나 2020-09-27 21:02   좋아요 1 | URL
반누님도 남은 주말 밤 행복하게 보내세요! 원 플러스 원 올림 :)

scott 2020-09-27 2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속 남자 알랑들롱인가요? 열반인님이 마지막에 올리신 말두마리 왠지 두마리 모두 숫컷일것 같다고 상상이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0-09-28 07:03   좋아요 1 | URL
저도 무척 궁금합니다 저 두 사람은 누구인가... ㅋㅋ 날개 달린 하늘의 말들이니 성별이 없거나 무지개성별(?!) 일 거 같아요.

Falstaff 2024-01-23 1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윽, 왜 이 리뷰를 못 봤을까요? 아, 오래 전이구나....
난 오늘 읽었답니다. 지금 독후감 쓰려는데 자꾸 책 표지의 흑백사진이 걸려서 말입죠. 남자가 나 젊은 시절에 찍은 거 같기도 하고 뭐 그래서.... (나 젊은 시절이 아니라 라이벌이 젊었을 때 찍은...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1-25 20:09   좋아요 1 | URL
일월 말에 독후감 쓰셨으면...내년에 올려주시나요? ㅋㅋㅋ 저는 뒤라스는 영 폼만 잡고 취향은 아닌 것 같아요. 팔백작님은 동양 신선 배추도사 무도사 마냥 생기셔가지고 뭐, 라이벌이, 젊은이가 뭐요? ㅋㅋㅋㅋㅋㅋㅋ
 
[전자책] 나의 할머니에게
윤성희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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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6 윤성희, 백수린, 강화길, 손보미, 최은미, 손원평.

와, 어째 모든 작가를 한 편 이상 다 봤지. 심지어 한 명 빼고는 소설집이나 장편소설책을 한 권 이상씩 봤다. 이상하게 강화길은 책을 읽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랑 안 맞아. 절대로 리뷰대회 심사할 때 안 뽑아줘서 삐진 건 아니고요. 그냥 안 맞음...ㅋㅋㅋㅋ

할머니에 대한 소설 모음집인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작가 중 할머니라 할 만한 연령층은 없다. 3,40대 정도. 할머니 소설가를 생각해 보면 이미 작고하신 박경리, 박완서 작가 정도가 늙도록 쓰신 분들. 소설책들을 열심히 사 모아 두고 정작 읽은 건 토지 말고 없네. 현역에서 여태 쓰시는 할머니 소설가는 왜 생각나는 사람 없나. 열심히 심사위원 하시는 오정희 소설가 정도. 우리 엄마보다 연세 많으시니 할머니라 해도 결례 아니길. 그런데 요즘도 쓰시나. 좋다좋다 말만 듣고 읽은 게 없다. 읽어봐야겠다.
할머니들은 이 소설집을 읽게 될까. 높은 확률로 스스로 할머니라 할 만 하지 않을 사람들이 주 독자층이 될 것이다. 저마다의 기억 속 이미지로 경험으로 관계로 남은 할머니를 떠올리며 눈물 지을까.
이젠 하다하다 할머니를 소비하는 문학인 걸까. 할머니가 되기 전 마음의 준비와 대비일까. 내게 도래할 미래에 관한 상상일까. 누구나 할머니가 된다는 말은 틀리다고 정확하진 않지만 비슷하게 손보미 작가가 작가의 말에 적었던데, 누구에게나 할머니가 있다는 말도 틀린 것 같다. 태어나기도 전에 할머니가 죽고 없는 사람도 있으니. 죽지 않았어도 부모가 조부모와 연을 끊었다던가 젊어서 집을 나갔다던가 등등.

자기 혈육인 할머니가 아니어도 주변 도처에서 마주하는 게 할머니잖아, 돌아볼 수는 있는 거잖아, 해도 거기 그렇게 살아오고 살고 있는 할머니를 들여다보는 일이 쉽지는 않다. 관심과 시선과 들어줄 귀를 기다리는 노년도 있지만, 늙음과 약해지고 소멸해가는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조차 폭력일 지도 모르겠다.
되게 어려운 주제인데 작가들 나름대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딱 이거다 하는 소설은 못 만났다. 백수린의 소설집에서 본 흑설탕 캔디가 처음 읽을 땐 좋다 했는데 두 번 읽으니 그냥 그랬다. 쓸데 없이 낭만적이야. 할머니 본인 입도 아니고 남은 일기장과 기억으로 재구성해 보는 손녀의 서사일 뿐.

할머니들의 인생에 관한 서사는 결국 나도 빚을 지게 될 것 같은데. 우리보다 힘들게 살았다. 서러웠다. 자손을 챙기거나 상처를 주었다. 망가지다 죽었다. 짐이 되었고 짐이 되기 싫어했다. 음 어렵다. 나의 엄마도 할머니가 되었다. 내가 할머니가 될 수 있을지는 살아남아 봐야 알 일이다. 책 제목이 왜 나의 할머니에게 인지는 다 읽고 나서도 모르겠다. 젊은 녀석의 무지와 몽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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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09-27 0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흑설탕캔디> 좋았는데 사실 할머니 입장에서 보면 살아있을 때 잘하지 싶기도 해요ㅎㅎ 저는 이 책 표지의 보들보들한 느낌과 일러스트가 마음에 들었어요(책값은 비쌌지만…)
잘 몰랐는데 오정희 소설가님 연세가 많으셨군요…

반유행열반인 2020-09-27 06:49   좋아요 1 | URL
저는 그 보들거리는 촉감을 못 느끼고 전자책을 봐서 정 없는 독후감을 썼을까요ㅋㅋ일러스트도 음 너무 튄다 했어요. 소설 하나하나는 개성이 있는데 한 권 묶인 게 할머니란 키워드 말고는 와 닿는 게 없었어요(특히나 손보미 소설 너무 나감...이 언니 요즘 길을 잃어도 너무 잃은 거 같아 슬퍼요 예전 소설은 무척 좋아했는데...) 오정희 소설가님은 제가 할머니 붙이다가 틀릴까 봐 어제 이거 읽으면서 찾아보니 1947년생이신가 그랬어요 ㅎㅎㅎ

바다그리기 2020-09-27 0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왓, 저 지금 이 책 읽고있어요.^^
할머니와 고 2때까지 함께 살았던 추억이 있어서 제목을 보자마자 확 끌렸거든요.
님은 분명 아주 멋진 할머니가 되실테니 꼭 살아 남으셔서^^ 아이들에게 오래 오래 기억하고픈 좋은 추억을 남겨주시기를..
(당신 아들과 손자들밖에 모르는 할머니의 뿌리깊은 남녀차별에 반발해 싸웠던 기억밖에 없는 저는 지금도 할머니와 함께 한 좋은 추억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좀 서글프거든요)
제가 지금 읽고있는 책을 읽으셨다니 반가워서 댓글 남기고 갑니다.
행복한 일요일 보내세요~

반유행열반인 2020-09-27 11:08   좋아요 0 | URL
바다그리기님과 겹치는 독서중이었다니 신기하고 기쁘네요. 사실 저는 빌놓고 하루 남아서 급하게 읽느라 제대로 감상을 못한 건지도...
 
[전자책] 오래 준비해온 대답 - 김영하의 시칠리아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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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5 김영하.

이탈리아에 가 본 건, 내 범선을 타고 제노바와 그 일대를 누비던 온라인 대항해시대 속에서였다. 시칠리아 섬은 그 게임 속 시라쿠사 항구만 열려있었다. 시답잖은 교역품만 팔아 퀘스트 할 때만 빼고 좀처럼 들르지 않던 섬.
게임 한 지도 오래, 비행기를 타고 딛은 땅을 떠났다 온 지도 오래. 여행기를 그렇게 즐기지는 않지만 김영하가 쓴 에세이라길래 펼쳤다. 여행기는 어느 정도 금가루 꽃가루 뿌리고 색칠해서 뻥을 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먼저 가 본 자가 권능을 가지고 갬성 터뜨리며 뉴욕헤럴드트리뷴 하고 외칠 듯한 분위기를 잘 못 견디는데. 이 책은 꽤 좋았다. 기차와 배와 스쿠터와 버스를 타고 평생 가볼지 어쩔지 모를 섬을 작가의 눈과 기억과 사진을 빌어 둘러보았다. 바다가 있고 산이 있고 거기 사는 사람들의 삶이 있고. 나는 파스타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어쩜 이탈리아 가서 살라고 하면 살 수 있을지도 몰라. 삼시세끼 파스타만 먹으래도 괜찮아. 뜨거운 햇볕 쬐며 낯선 거리를 헤매고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며 분통을 터뜨리겠지만. 그럴 꿈이라도 꿀 수 있는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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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09-25 2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영하도 이탈리아도 다 좋아요! 저는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구판으로 읽었는데, 이 여행을 떠나게 된 이유가 와닿아서 사진 찍어두고 그부분은 지금도 종종 읽어요 ㅎㅎ 이번에 퇴사하고 이탈리아 가려고 했는데, 못 가구 집에서 콜바넴 틀어놓구 샐러드 파스타 주문해서 먹었죠 모 ㅋㅋㅋ 아 저 여름 너무 좋아해서 여름이 긴 곳에 가고 싶어요. 언젠가는 그럴 날이 오겠죠? :) (게임도 좋아하시는구나 더 좋아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9-26 09:38   좋아요 1 | URL
이 책이 예전 나온 걸 재발매한 거라 하더라구요. memory lost memento 뭐시기가 이전 제목인 거 하나님 덕에 집고 가네요. ㅎㅎ
지금은 하는 게임이 하나도 없는데 게임을 아예 안 한 뒤로 책을 많이 보게 된 거 같아요 ㅋㅋ 아니 이탈리아를 가려고 하셨군요! 저는 겨울이 없는 나라에 사는 게 꿈인 적은 있었어요 ㅎㅎ

막시무스 2020-09-26 0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항해시대!ㅎ 아이템 찾느라 맘 졸이며 구석구석 작은 배로 헤매이던 시절이 저에게도 있었네요!ㅎ
즐건 주말되십시요!ㅎ

반유행열반인 2020-09-26 09:40   좋아요 0 | URL
네 배 타고 구석구석 다니는 거 정말 재미있어서 책도 안 보고 하던 젊은 시절이 있었네요. 막시무스 님도 즐건 주말 보내시길!!!!

수이 2020-09-26 0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칠리아!!! 반유열님 꿈이 이루어지기를!

반유행열반인 2020-09-26 09:39   좋아요 0 | URL
아! 저 시칠리아나 이탈리아에 꼭 가고 싶은 꿈은 없는데 그냥 막연하게 먼 곳 다녀오고 싶은 마음만 있어요 ㅎㅎㅎ축복 감사합니다.

syo 2020-09-27 14: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분통을 터뜨린다는 표현, 저는 잘 안 써서 몰랐는데 상상을 해보니까 뭔가 좀 귀여운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분통이 팡 터지면서 분가루를 하얗게 뒤집어 쓰는데, 그러고 나니까 진짜 내면의 분통이 터지면서.....
그런 이미지.

반유행열반인 2020-09-27 15:41   좋아요 0 | URL
가루 뒤집어 쓰고 어리둥절. 그 분통이 아닌데...분유통 동생하고 퍼먹다 가루 뒤집어쓰고 뒤지게 맞은 적은 있어요.
 
[전자책]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 박상영 에세이
박상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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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0 박상영.

작년에 박상영 작가의 소설 두 권을 만났다. 신선하면서도 걱정했다. 내 더러운 버릇 가운데 하나가 남의 신변을 지레짐작하고 미리 걱정하는 일인데, 아, 소설은 되게 재미있는데 이 작가 멘탈이고 피지컬이고 건강이 위태로워 보인다? 나는 재미있지만 너는 괜찮겠어? 그러다가 내가 누굴 걱정해, 나나 잘하자, 했었다.
어쩌다가 작가가 연재한다는 칼럼 딱 한 편을 읽었다. 이 에세이집에 실린 19번째, 거의 마무리에 다가간 글이었다. 그 글 안에 에세이 출간 소식이 담겨 있어서(점쟁이에게 올해 이 책도 나올 건데-하는 식으로 흘려서) 책이 나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인생 마지막 점을 보러간 날(이제 점 안 봐)이 제법 유쾌하고 희망적으로 읽혔다. 그래서 새 에세이가 나오자 이걸 사 말아, 장바구니에 넣다 뺐다 했다. 좋아하는 소설가들 에세이 보고 실망한 적이 많아서 이번에도 그럴까 봐… 그렇게 반 년 버텼더니 전자 도서관 신간에 이 책이 나와버렸어… 소설책 두 권은 사 봤으니까 용서해줘요...세 번째 소설집은 사 볼게요 작가님아…
제목으로 쓰인 말이 매 꼭지 마지막마다 자조하는 농담처럼 반복된다. 탐식은 다양한 과몰입, 과의존에 빠지곤 하던 내가 유일하게 침범(?)하지 않은 분야라 식욕에 대해서는 맞장구치지 못했다. 요즘 비임신 상태로는 인생 최대 몸무게를 찍으며 체중 걱정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수면장애에 시달리고 야식에 빠져드는 텅빈 마음은 조금 알 것 같았다.
에세이 절반은 회사 생활과 글쓰기를 병행하는 고충을 풀어놓는다. 책의 딱 중간에서 작가는 회사를 그만둬버린다. 책을 펼치기 전 미리 읽은 연재 분량이 가장 밝은 이야기였고 나머지 팔할은 내내 어두컴컴했다. 어두컴컴할 것 같다고 짐작만 하다가 실제로 어두컴컴한 일상을 마주하게 되니 막 즐겁게 읽히지는 않았다. 마지막에 그럼에도 존버하는 너님들 파이팅(실제 책에 이런 구린 표현은 절대 쓰이지 않았습니다…내 방식의 후진 번역)하는 마무리도 식상했다. 하지만 뭐 어쩌겠냐. 나는 꿈을 이루었으니 너도 다 때려치고 네 꿈을 향해 나아가라! 이것도 무책임하고, 대책 없이 집어치우면 인생 말아먹기 좋으니 신중해라- 하는 것도 힘든 하루 겨우 보내는 사람들에게는 공허한 말일 뿐이다. 결국에는 나는 이렇게 살았고, 이런 선택을 했고, 어찌어찌 여기까지 와 있습니다- 하고 보여주는 것 이상은 없겠다. 그게 약간 감동을 줄락말락하고, 아쉽기도 짠하기도 하다가, 역시나 결론은 나나 잘하자, 했다. 한 번 더 말하지만 세 번째 소설집은 사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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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0 2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21 0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21 0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21 0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21 0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20-09-21 1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도 전자책으로 봐야겠다. (사서볼게요 상영님)

반유행열반인 2020-09-21 13:06   좋아요 1 | URL
아 사서 안 본 사람 낯부끄러워...

- 2020-09-21 13:24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여기에서 왜 상영씨를 부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ㅋㅋㅋㅋㅋㅋ

하나 2020-09-21 1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박상영 작가 드디어 회사 그만뒀군요. ㅋㅋㅋㅋㅋ 저는 아직 작품은 못 읽구, 우연히 에세이만 한 편 봤는데요. 거기서 7시에 회사 앞 카페로 출근해가지고 글 쓰다가 9시에 출근한다는 걸 봤어요. 제가 작년에 그거 보고 다들 그렇게 사는 거구나, 하고(귀가 얇은 편) 아침에 회사 앞 카페에서 영어 공부하다 출근하고 밤에 강남까지 영어학원 다니다가 어느 날 길에서 멈췄어요. 수사가 아니라 정말로. 허리가 아파서 걸을 수가 없었는데, 한의원 갔더니 ˝홧병˝이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만 그런 거 아닌 거 같아서 다행이다. 그렇게 사니까 밤에 배고프지)

반유행열반인 2020-09-21 13:07   좋아요 1 | URL
와 진짜 대단한 일 하시니.. 홧병나죠 ㅋㅋㅋ우리 너무 열심히 살지 말아요 하나님...

하나 2020-09-21 13:09   좋아요 1 | URL
누님도 오후 일과는 너무 열심히 지내시지 말구요 ^^ 오늘 볕 좋은데 커피 루팡도 잠깐 하시구요!
 
[전자책] 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 문학동네 / 2017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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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9 이언 매큐언.

욕망의 불균형, 파도처럼 부서진 사랑.

에이섹슈얼이라는 말을 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무성애로 번역되는 말로 일컬어지는 성적 정체성 안에도 복잡한 스펙트럼이 있어서 아예 성적 욕망이 없는 사람, 어떨 때는 끌리고 어떨 때는 안 끌리는 사람, 성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없는 사람, 수많은 가능성과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비극은 욕망의 불균형에서 시작된다. 로맨틱한 마음으로 서로를 향한 사랑을 키웠지만, 성적 욕구에서 불균형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그것 또한 큰 비극일 것 같다. 한쪽이 (섹스하는 것 또는 안 하는 것을) 마냥 참으며 불행한 관계를 유지하거나, 결국 그 불균형 때문에 사랑도 관계도 흩어질 수 있다. 이 소설은 하룻밤 사이에 서로의 불균형을 직면하고 깨져버린 사랑을 그려놓았다.
스토리텔링에 관한 책 ’이야기의 탄생’에서 이 소설이 몇 차례 언급되어 흥미를 느꼈다. 직전 읽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몰아치는 섹스 이후 자신들이 놓인 상황과 위치 때문에 금세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연인의 이야기였다면, ‘체실 비치에서’는 풋풋하게 마음과 관계를 키워 결혼까지 도달한 두 사람이 첫날 밤 첫 섹스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망해버리는 이야기였다. 어쩌다 연달아 고른 소설들이 열탕과 냉탕을 오가네….

플로렌스와 에드워드가 어째서 잠자리 한 번 갖지 못한 채 결혼식 날 처음 (할 뻔) 하게 되었나, 하는 의문에 답하듯 소설은 시대적 배경과 두 인물의 성장 과정을 깔고 간다. 1940년대 출생의 이십 대 젊은 연인, 아직 러브앤피스-방종의 1960년대 후반까지 닿지 못한 1960년대 초반에 이루어진 결혼, 체면치레와 관습과 예의를 따지는 영국 옥스퍼드 출신 배운 사람들, 부유한 사업가 아버지와 교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바이올린을 전공한 플로렌스와 시골 마을 교장 아버지와 뇌손상으로 가족을 돌보는 연기만 할 수 있는 어머니를 보며 자라난 역사학을 공부한 에드워드의 우연한 만남과 사랑을 키운 일 년 남짓한 시간.
에드워드의 성장 과정은 지금의 모습을 이해할 만큼 제시되었다. 아픈 어머니와 쌍둥이 여동생들, 어설프지만 가족을 챙기고 아이들을 키운 아버지, 시골 가난한 집 출신이라 저도 모르게 쭈굴한 마음, 역사 연구에 대한 관심과 열정, 젊은 혈기로 벌이는 언쟁과 주먹다짐, 으아아아 결혼했다 첫날밤이다 섹스다!!! 하고 일주일 동안 자위 행위를 참는 기대감이 플로렌스의 손길 하나로 삽입도 전에 플로렌스의 몸위에 범벅쳐버리고 좌절하는 상황을 납득하게 했다.
반면에 플로렌스가 느끼는 성적 접촉에 대한 혐오는 굉장히 두루뭉술하고 희미하게 제시되었다 싶었다. 소설의 시점이 에드워드 일인칭이 아닌데도 그랬다. 아주 자세하게 그려지지는 않은 아버지와 친밀했던 어린 시절, 스킨쉽이 부족하고 거리감 느껴지는 철학 교수 어머니의 양육 태도, 음악을 향한 플로렌스의 열정 외에는 특별한 트라우마적 사건이나 종교적, 성적 억압적 분위기의 교육이나 시대상 같은 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혀를 넣는 키스를 비롯한 성적 접근에 대한 현재의 거부감만 반복해서 표현되었다. 경험 부족 때문인지 타고난 기질 때문인지 제시된 상황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섹스에 대한 에드워드의 갈망과 플로렌스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두 인물의 관계가 어그러지는 게 주된 갈등이었는데, 플로렌스가 그런 태도를 갖게 된 이유나 짐작할 만한 암시조차 에드워드의 성장 배경에 비해 부족하게 제시된 것 같아 아쉬웠다.
그들이 헤어진 이후 플로렌스의 사중주단이 언젠가 그녀가 했던 약속처럼 위그모어홀에서 (에드워드를 위해)모차르트의 현악오중주를 연주했던 일을 평론 형식으로 전하는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찡했다. 플로렌스는 말한대로 이루었지만 에드워드는 9C석 자리에 앉아 환호를 보내기는 커녕 플로렌스가 연주회를 한 것조차 몰랐다. 에드워드는 플로렌스와 이혼?파혼?한 이후 그럭저럭 연애와 성생활을 즐기고 짧지만 또다른 결혼 생활도 경험한다. 말년에 고향에 돌아와 플로렌스가 그를 찾아오며 걷던 시골길을 산책하면서 그제서야 플로렌스와 나눈 것 만한 사랑이 여생 내내 없었음을 돌아본다.
이놈의 사랑이란, 하찮은 문제로도 쉽게 박살나는 마음이란. 어렵다.
언제부턴가 결혼이란 사랑의 완성이고, 영원의 맹세이고, 낭만적 감정의 지속과, 만족스러운 성욕 충족과, 여생의 편안함과 안정을 주는 무언가로 기대되는 것 같다.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수많은 이혼 커플, 남보다 못한 사이로 애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다며 으르렁대는 부부, 섹스리스라는 말, 부부의 세계 같은 드라마, 혼외 관계를 다룬 무수한 소설과 영화가 보여주고 있다. 플로렌스와 에드워드가 거쳐간 시간은 사랑 이외의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도 섹스를 원하는 한 사람과 원하지 않는 한 사람이 서로의 차이를 깨닫는 순간 유지될 수 없는 사랑이란, 혼인/연인 관계란, 대체 뭘까 싶었다. 체실 해변의 조약돌 크기가 거리마다 달라지는 건 두 사람도 독자도 확인하지 못했다. 둘의 관계가 무너진 순간 에드워드 눈에 다르게 보이는 풍경이 마냥 슬펐다.

+밑줄 긋기

-에드워드는 강력한 개인의 무자비한 성품, 노골적인 기회주의, 그리고 행운이 수백만 명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 비딱한 결론 덕에 B마이너스라는 점수를 받아 일등 자리까지 위태로울 뻔했다.
  그런데 그가 우연히 깨달은 사실은 전설적인 성공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은 거의 없으며 단지 초조함과 고통스러운 야망을 배가시킬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곳에 손—사실 손등이었다—을 대는 것이 그녀에겐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또 기쁘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러기 위해 엄청난 혐오감을 극복해야 했다.

-그녀가 로큰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그러니 계속 시도할 까닭도 없다는 뜻으로 그가 말하자 그녀는 순순히 인정하면서 자신이 참을 수 없는 건 드럼이라고 말했다. 곡이 너무 간단하고 또 대부분 단순한 사분의 사박자인데, 왜 이 무지막지한 쿵, 탕, 쨍그랑 하는 소리로 박자를 맞춰야 하는가. 이미 리듬 기타뿐 아니라 가끔 피아노 연주도 있는데, 도대체 드럼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연주자들이 박자 소리를 들어야 한다면, 메트로놈을 쓰면 되지 않는가. 에니스머 사중주단에 드러머를 영입하면 어찌 될 것인가. 그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녀가 서양 문명을 통틀어 가장 솔직한 사람이라고 말해줬다.
  “그래도 당신은 날 사랑하잖아.”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는 거야.”

-그는 그녀를 등지고 돌아서서 해안선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고 다시 돌아와서 거칠게 자갈밭을 발로 차며 공중에 작은 돌들을 흩뿌렸고, 개중에 몇 개가 그녀의 발 가까이에 떨어졌다. 그의 분노가 그녀 자신의 분노를 일깨웠고, 그녀는 갑자기 그들의 문제가 뭔지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너무 예의발랐고, 너무 경직됐고, 너무 소심했고, 까치발을 든 채 서로의 주위를 빙빙 돌며 중얼거리고 속삭이고 부탁하고 동의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침묵에 가까운, 사교적인 배려라는 담요가 그들을 결속하는 만큼이나 그들의 차이를 덮어버리고 그들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제나저제나 의견 차이가 날까봐 두려워했고, 이제 그의 분노가 그녀를 그런 두려움에서 해방시키고 있었다. 그와는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 그녀는 그의 감정을 해치고 싶었고 혼내주고 싶었다. 그것은 그녀 안에 깃들어 있는, 파괴의 쾌감을 향한 너무도 낯선 충동이었고, 그녀는 그것에 전혀 저항감이 일지 않았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고, 그를 증오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처음 말하기 전까진 살면서 한 번도 말해본 적이 없는 이 무자비하고 경이로운 말들을 할 참이었다. 그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고, 그녀를 비난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위엄을 총동원하고 있었다.

-“...내 말은, 바로 이거야. 에드워드, 난 당신을 사랑해,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살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그 누구도, 아무도…… 아무도 우리가 뭘 했고 뭘 하지 않았는지 모를 거야. 우리는 함께 있고, 함께 살 수 있을 테고, 그리고 당신이 원한다면, 정말로 원한다면,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당연히 그런 일이 있겠지, 난 이해할 거야, 아니 그 이상으로, 그걸 원할 거야, 내가 그러는 건 당신이 행복하고 자유롭게 되길 바라기 때문이야.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아는 한 절대로 질투하지 않을 거야.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음악을 연주할 거야. 내가 인생을 살면서 하고 싶은 건 이것뿐이야. 솔직하게 말할게. 난 단지 당신 곁에 있으면서, 당신을 돌보고, 당신과 함께 행복해하고, 사중주단과 일하고, 언젠가 위그모어 홀에서 모차르트처럼 아름다운 곡을, 그런 곡을 당신을 위해 연주하고 싶을 뿐이야.”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그의 확실한 사랑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그의 다독거림뿐이었다. 사랑과 인내가, 그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만 했어도, 두 사람 모두를 마지막까지 도왔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들의 아이들이 태어나서 삶의 기회를 가졌을 것이고, 머리띠를 한 어린 소녀가 그의 사랑스러운 친구가 되었을까.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체실 비치에서 그는 큰 소리로 플로렌스를 부를 수도 있었고,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도 있었다. 그는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제 그를 잃을 거라는 확신에 고통스러워하면서 그에게서 도망쳤을 때, 그때보다 더 그를 사랑한 적도, 아니 더 절망적으로 사랑한 적도 결코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그녀에게는 구원의 음성이었을 것이고, 그 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을 거라는 사실을. 대신, 그는 냉정하고 고결한 침묵으로 일관하며 여름의 어스름 속에 선 채, 그녀가 허둥지둥 해변을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힘겹게 자갈밭을 헤쳐나가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작은 파도들이 부서지는 소리에 묻히고, 그녀의 모습이 창백한 여명 속에서 빛나는 쭉 뻗은 광활한 자갈밭 길의 흐릿한 한 점으로 사라져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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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09-19 2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놈의 사랑이란, 하찮은 문제로도 쉽게 박살나는 마음이란. 어렵다.˝ 그러니까요. 저는 이런 문장을 보고 한동안 먹먹했던 거 같아요.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그의 확실한 사랑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그의 다독거림뿐이었다.(...)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이제 안 그래야지~ 누나라고 부르도록 해, 이러면서 ㅋㅋㅋㅋㅋ 좋아하는 건 가져버려야죠. 뭘 그렇게 쉽게 상처 받고 그랬나 몰라.
소설에서 플로렌스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는 것도 공감되네요. ^^

반유행열반인 2020-09-19 21:13   좋아요 1 | URL
하나님이랑 겹치는 책도 많아서 좋아요. 주로 늦게 읽기 시작한 제가 더 후발주자지만 ㅋㅋ그래요. 앞으로는 다 가져버리세요 ㅋㅋㅋ이언 매큐언이 남자라 대놓고 여자 마음은 나는 몰라 모르겠네- 하는 것 같아 조금 더 노력해서 싸보지 으이구 대작가님이 왜 이리 게으르대 하고 조금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9-19 21:13   좋아요 1 | URL
오타좀봐봐 써보지를 싸보지래...나새끼의 리비도...죄송합니다....ㅋㅋㅋ

하나 2020-09-19 21:17   좋아요 1 | URL
아 기절할 거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진짜 미쳤어. 왤케 웃겨. 요즘에 진짜 젤 재밌는 새럼이에요. 마성의 누나야 정말.. 저는 토끼와 거북이처럼 3년 정도 쉬었읍니다. 부지런히 따라잡겠습니다 ^^ (그르게~ 나는 모르겠네 몰라~ 했던 부분이 좀 있긴 했던 거 같아요)

반유행열반인 2020-09-19 21:20   좋아요 1 | URL
참고로 쉽게 질리는 msg 같은 속성이에요...금방 시큰둥하실 겁니다... 그럼 저 혼자 힝힝 하나님 요즘 왜 댓글 안 달아줘? 하고 짝사랑하면서 울 걸요...

하나 2020-09-19 21:2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저는 괜찮아요 짝사랑도 💚 계속 지금처럼 부탁드려요 누님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9-19 21:30   좋아요 1 | URL
저야 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나님 갑자기 잠슈 타지 마시고 오래 같이 놉시다
ㅋㅋㅋ

하나 2020-09-19 21:40   좋아요 1 | URL
잠슈 안 타고 오래 있을게여 ㅋㅋㅋㅋ 누님이 계신데 어딜가요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9-19 21:43   좋아요 1 | URL
그 약속 꼭 지켜주세요...난 이거 캡쳐해 놔야겠다. 캡쳐명 지키지못한약속.jpg 안 되게 해주세요 ㅋㅋㅋ

하나 2020-09-19 2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저는 북플로 먼저 보고 반유행열반인님 서재는 나중에 왔는데요. 제목이 너무 좋아버려. ˝참을 수 없는˝

반유행열반인 2020-09-19 21:14   좋아요 1 | URL
저 진짜 인내심 있는 척 하면서 엄청 성질 급하고 참지 못하는 놈입니다 ㅋㅋㅋ

하나 2020-09-19 21:18   좋아요 1 | URL
그렇게 살아야 되는 거 같아요. ㅋㅋㅋㅋㅋㅋ 저는 못 참는데 참는 척하다가 최근에 터져버렸고요. 정말 호밀밭의 파수꾼 홀든처럼 열다섯에 내야 됐을 거 같은 화를 지금 내고 있는데 지금이라도 해서 다행인 거 같아요. (그러고나니까 요즘 약간 분노 가라앉음)

반유행열반인 2020-09-19 21:21   좋아요 1 | URL
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참지 말고 망할 테면 망하라지 하고 자기 보전과 자기 행복과 자기 위안을 위해 사는 겁니다...(막 이러고 타락의 길로 인도함...자기 인생 아니라고 막말함...)

하나 2020-09-19 21:32   좋아요 1 | URL
캡쳐했어요 ㅋㅋㅋㅋㅋ 이따 일기에 응원의 말 코너에 옮기려고요. 맞아여 망할 테면 망하라지~ 한 번 사는 인생인데요! ㅋㅋㅋㅋ 안 착한데 참으면 진짜 병나는데

바다그리기 2020-09-19 2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감상도 늘 재미있게(혹은 감명 깊게) 읽고 있지만, 두분의 핑퐁 댓글도 너무 재미있는 건 뭐죠? ㅋㅋ
읽어야지, 생각만 하면서(괜히 혼자 부담도 느끼면서) 흥미가 더 끌리는 책들에 항상 뒤로 밀리는 책이었는데 조만간 읽어야겠네요.
얼마전 ‘밤에 우리 영혼은‘이란 책에서 말 그대로 손만 잡고 서로의 존재를 위로 삼아 한 침대에서 잠만 함께 자는 70대 커플의 사랑 이야기를 읽으며 이게 정말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저는 어쩐지 이 책에서도 여주인공에게 공감(개연성이 부족하다 해도)할 수 있을듯한 느낌이 드네요.
아무튼 이렇게 또 읽어야 할 책이 한권 더 늘어서 저는 정말 기쁩니다. 정말이예요.......

반유행열반인 2020-09-19 21:41   좋아요 2 | URL
바다그리기님이 댓글 관전하셨다니 괜히 부끄러움 ㅋㅋㅋㅋ 저는 손만 잡고 살래면 놉... 여주인공 아직 너무 창창하고 자기 자신을 모르는데 참을 줄 모르는 남주인공이 바보같이 내패대기 쳤다는 생각만 듭니다...잘 달래고 서로 일신우일신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했으면 비극 아니었을 거 같다는 생각을 나이 먹은 저는 합니다....ㅋㅋㅋㅋ
기쁨 드려 감사합니다. 바다그리기님께서도 먼저읽은 책들 풀어 주셔서 제게 읽고 싶은 기쁨 주세요. 바쁘시겠지만 리뷰 남겨주세요. 꼭 꼭 ㅋㅋㅋ(떼씀ㅋㅋㅋㅋ)

syo 2020-09-20 1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섹스인건가.... 요즘 섹스에 좀 천착하고 있는 중이온데.... ☺

반유행열반인 2020-09-20 11:31   좋아요 1 | URL
어이어이 침 닦고 입 다물고 ㅋㅋㅋ섹스 안 맞아서 망한 ‘사랑’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