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시인선 151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1227 이규리.

여름에는 봄이 가득한 시집을 울면서 읽었다. 지난 봄이 슬퍼서 읽고 울었다. 겨울에는 겨울에 태어난 덕에 겨울 시집을 받아 읽었다.
어느 계절도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가장 온화하다는 봄에도 가을에도 혹독한 순간은 있었다. 겨울에 시작된 사람인 나는 우리는 어찌어찌 네 계절을 버티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첫눈은 못 되어도 계속 내리는 눈발로 닿고 싶다. 이 땅을 뜨지 않는 한 매해 만나는 겨울이 되고 싶다. 춥지만 차갑지 않게. 언 손은 감싸 쥘 이유가 있으니까.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로. 지구가 너무 뜨거워지면 안 되는 까닭.


+밑줄 긋기
희고 흰 것이 잔뜩 나오는 시집에서 가장 어둡고 검은 시를 골랐다. 음울이라 읽고 베껴 적었다.

-그늘만 찾는 풀들이 있다 뜻한 바 있어 택한 낙향처럼 그늘은 버려진 시간이 아니다 그 자리 온 작고 여린 생들, 착 깔린 이끼와 자잘한 괭이밥, 여기까지 온 마음을 다 안다 할 수 없어도

내 어둠을 살라 당신을 옥죄었던 그늘도 생각하면 어두운 날들의 축제였다

그늘이라지만 그늘은 둘레를 따로 두지 않고 제자리라 삼지도 않는다 험로를 어떻게 왔을까 싶지만 동류끼리는 셈이 있는 법이니

누구 간섭하지 않으면 좋으리라 가만히 두면 되리라 그 고요 안에도 다툼이 있는데 그건 그들만의 생기라 했다 최소의 의지라 했다

왜 그걸 비켜가라 했을까

햇빛도 제 안의 실의를 감추느라 그늘을 둔 것인데 쓰윽 베이던 차디찬 음해는 습한 세계는

누구나 제 폐허가 막막해서 푸아푸아 울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울음’ 전문)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 2020-12-27 17: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의 글까지 전부가 “울음” 전문이 되었네요. 그래도 “언 손은 감싸 쥘 이유가 있으니까.”

반유행열반인 2020-12-27 17:58   좋아요 2 | URL
헤헤 하나님이 좋게 봐주시면 늘 좋지만 알라딘에 이규리님 팬 많아서 저 때리러 와요 ㅋㅋ 원래 남들 다 읽을 때 안 읽고 숨죽이다 뒷북으로 읽는데 올해 가기 전에 읽은 권수 늘리려고 시 한 권 더 봤네요 ㅎㅎㅎ

하나 2020-12-27 18:01   좋아요 2 | URL
덕분에 저는 이 시집 한번 더 펼쳐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흰 것만 본 것 같아서.. 서정도 되는 우리 열반인님 남은 연휴의 겨울밤 평안히 보내세여!

반유행열반인 2020-12-27 18:03   좋아요 2 | URL
하나님도 안온 평화 모두 안고 휴일 잘 지내세요ㅎㅎㅎ 사실 저한테는 조금 어려운 시집이었어요 ㅋㅋㅋㅋ(그래도 시류 편승해서 별 다섯개 줌 ㅋㅋㅋ)
 
소설 보다 : 겨울 2020 소설 보다
이미상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2월
평점 :
품절


-20201227 이미상, 임현, 전하영.

소설보다는 처음 사 봤다. 중단편소설 세 편과 작가와의 인터뷰 실은 책이 3500원, 새 소설과 작가들 만날 기회로 괜찮은 기획 같다.
젊은작가상 수상집에서 이미상 작가의 ‘하긴’을 인상 깊게 읽었다. 다음 작품이 궁금한 작가였는데 올 겨울의 소설로 선정되었다고 해서 이 책을 펴게 되었다. 임현 작가도 나름 꾸준히?읽고 있으니까. 역시 젊은작가상으로 알게 되고 소설집을 사 보았는데 제법 인상 깊었다. 그때는 최신 한국소설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 처음 쓴 습작을 읽은 친구가 내 글이 되게 올드하다고 했다. 당연하지. 나의 한국소설 독서는 현대문학사를 따라 1920, 30, 40, 50년대... 전후 문학을 거쳐 김승옥 쯤에 멈춰 있었다. 그래서 최신 트렌드는 하나도 모르고 그나마 김애란 정유정 같은 작가 신작이 나오면 챙겨보는 정도였다. 새로 나오는 한국소설들 보기 시작한지 겨우 3년 밖에 안 되었다. 처음에는 뭔가 유행이나 시류 같은 게 있다고 착각했다. 지나고보니 그런 거 없고, 작가들은 그때 자기가 가장 쓰고 싶은 것, 그중에 자기가 쓸 수 있는 것을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상, 여자가 지하철 할 때
몇 쪽 넘기고서 역시 이 언니,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고 혼자 기뻐했다. ‘하긴’의 운동권 후일담은 진짜 뭔 미래 예언서처럼 되어 버렸어… 여전히 거리에서 일인 시위니 집회니 하면서 돌아다니는 586 운동가를 알고 있다. 처음에는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보니 그 사람이 옳았다. 독재자를 타도한 사람들은 거리에 남든가 다 죽었어야지, 빈 권좌에 올라서는 안 되었다. 잡소리가 기네.
지하철 안에서 분열된 얼굴들과 함께 위험도를 재어 가며 생존을 위해 눈알을 굴리고 분투하는 경험. 마지막에 아기 상어 노래 속 물고기들 처럼 살았다 뚜루뚜루- 하면서 해맑게 지상으로 올라오는 죽도록 피곤한 수진의 얼굴이 너무도 익숙해서 암울했다. 환대와 안전, 평등. 당연하게 마주할, 과오를 빚갚음하는 죽음과 그저 두려움에 떨다 당하는 개죽음. 일상과 구조 속의 계층화. 얼핏 보면 미친 소설인데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담아놔서 마냥 신기하고 우러르게 되었다. 이런 거 쓰려면 최소 4년은 쓰고 고치고 해야 하는 거였군요…작가의 다른, 다음 작품들도 자꾸 궁금해졌다.

-임현, 거의 하나였던 두 세계
소설도 소설인데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윤리와 논리에 대해 이야기 하는 부분이 더 마음에 남았다. 자기 소설 잘 안 읽는다고 안타까워 하는 모습도...친구가 작가와 같은 문학촌에 한동안 있었는데, 본인은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데 술먹은 다음 날 아침 마주친 작가님이 너 어제 어디서 술 마시고 들어오다 나랑 만나서 더 마셨잖아, 했다고. 그게 진짜 있던 일인지 놀리느라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좋아하던 소설가랑 술 마시고 밥 먹는다고 스스로를 성덕(성공한 덕후)으로 칭하던 자네도 소설가잖아...성덕 하지 말고 성골 되어라 너도…
가르치는 위치에 서는 일은 영 싫다. 누군가의 삶에 의도를 통해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걸 믿지 않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서. 그건 너무 막중한 일이다.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을 누군가에게 해야 밥 벌어 먹고 살 수 있는 삶. 그와중에 내가 하는 어떤 말들이 나도 모르게 누군가들을 다치게 하고 그에 대한 책임과 미움을 다 지고 가야 하고...비난 받고 벌 받는 누군가를 보며 저게 나였을지도 몰라, 하고 고민하는 삶은 지옥에 가깝다.

-전하영,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책에서 처음 만나고 새로 발견한 소설가이다. 제법 긴 중편 소설이었는데, 서른 일곱을 닷새 쯤 남긴 시점에서 서른 일곱과 스물 하나의 사랑?유혹?에 대해 이야기하니 저절로 발목이 잡혔다. 나는 스물 한 살에 시작한 사랑을 서른 일곱인 아직까지 하고 있고, 서른 일곱의 사랑이 언제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아직 모르겠다. 책 속 서른 일곱의 화자는 같은 나이의 친구 연수와 스물 한 살에 서른 일곱의 남자를 사랑했고, 그 남자와 같은 나이가 된 지금에 와서는 그런 남자들을 경멸할 줄 알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그래. 그때 겪지 않았으면 지금 같은 나도 없었을 걸. 나 역시 한 번도 주인공이 된 적이 없다고, 순종적이고 친절한 친구 옆에 꼬여드는 고학번이니 복학생이니 하는 징그러운 오빠들을 쫓아내는 목격자이고 향단이고 보호자라고 스스로를 생각해 본 적이 있거든. 그런데 말린다고 그게 되는 게 아니더라. 오히려 그 친구는 내가 말리던 선택을 하고 나를 피하게 되지. 그리고 마냥 목격자일 것 같던 나도 목격자를 필요로 하는 위치에 순식간에 놓이기도 한다. 그런데 또 지나고 보면 사실 남들의 인정도 부정도 손가락질도 아무런 의미가 없고, 인정하든 부인하든 그건 나의 몫이었다. 그러니까 굳이 남을 구하겠다고 애쓸 필요 없고 나 하나만 잘 구해도 다행이 아닐까 싶다. 뭔 소리 하는 거야 나...하여튼 이 작가도 소설집이 나오면 관심 있게 볼 것이다.

+밑줄 긋기

-나는 아무 힘이 없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 사람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라고 말했어. 그런 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제일 고귀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사람은 말이지, 불가능한 걸 꿈꾸는 대신 잘할 수 있는 것을 해야 돼. 근데 그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야. 가끔씩 나는 뭔가 다른 게 되고 싶거든. 뭔가 내가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중, 139)

-네가 모르는 게 뭔지 알아? 원하는 게 있으면 노력해야 돼. 사랑받으려면 정말 죽도록 노력해야 된다고.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중, 159)

-연인의 탄생에는 항상 목격자가 있는 법이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이야기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목격자 역을 맡은 여자에 대해 생각했다. 삭제된 분량의 삶. 나는 지난 삶의 대부분을 목격자로 살아왔으므로 남은 여자의 삶에 대해 항상 궁금해해왔다. 남자의 세계로 여자친구를 떠나보낸, 남은 사람의 시간, 여자 주인공의 특별함을 돋보이게끔 하기 위해 평범함의 기준처럼 제시되는 삶.(‘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중, 162)

-가끔은 무언가 이야기 같은 것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만의 속도로 내 인생을 통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중, 171)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 2020-12-27 1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살래요! 전하영 소설 부분에서 무릎을 치면서 광광 웃었다ㅋㅋㅋㅋㅋㅋㅋ(그래도 울었다 아님)

반유행열반인 2020-12-27 14:33   좋아요 1 | URL
광광 웃을 정도면 우리 되게 건강해진 거 아닐까요? 자꾸 본의 아니게 하나님 주머니 막 턴다 ㅋㅋㅋ나 다 읽은 거 주고 싶네요 ㅋㅋㅋ가져가세요!!!

하나 2020-12-27 14:3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열반인님 알라딘 엠디 특채 가야된다... 책 진짜 잘 파셔... (걍 나도 비밀이야 안하고 깠다) 서른일곱 살 되니까 왤케 화가 나냐... 걍 광광 웃으면서 소설이나 읽어야지~~

반유행열반인 2020-12-27 14:41   좋아요 1 | URL
이제 깐 화 앞으로 십 년은 갈 건데...큰일이네요 ㅋㅋㅋ저는 십 년 쯤 화내고 나니 이제 좀 여유로워지는 중...(죄송합니다 먼저 갑니다...) 알라딘 엠디 언니들 나 싫어하지 않을까요 비속어 사용 책과 관계 없는 내용 판매를 저해하는 행위 등등...ㅋㅋㅋㅋㅋㅋㅋ무엇보다도 아 저런 애랑 같은 사무실 있기 싫다 ㅋㅋㅋㅋ하실 듯

하나 2020-12-27 14:44   좋아요 1 | URL
아.. 먼저 가서 길을 만들어죠요 ㅋㅋㅋㅋㅋ 알라딘 엠디 언니들 열반인님 좋아하실 듯... 알라딘 마을 매력악동쯤? 전 열반인님이랑 같은 사무실 있음 회사다닐래여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12-27 14:47   좋아요 2 | URL
음 일단 화를 더 내고 욕을 더 해야 합니다.... 뒤에서도 앞에서도 ㅋㅋㅋㅋㅋ뭘 가르치는 것인가 가르치기 싫다매...안 좋아할 거에요 리뷰 안 뽑아주는 거 봐!!! ㅋㅋㅋㅋㅋㅋㅋ그냥 내 돈 주고 사야지...저 같이 살던 언니랑 사이 왕창 나빠지고 멀어진 경험이 있어서 안전거리 두기로 해요 그냥 ㅋㅋㅋㅋㅋ가끔 만나면 좋은 친구입니다 ㅋㅋㅋㅋ

하나 2020-12-27 14:55   좋아요 2 | URL
(가끔) 만나면 좋은 친구 🎶도 어렵다.. 저도 꼭 그렇게 될게요! 일단 앞에서도 뒤에서도 화를 내서 심신을 가다듬고... 그리고 알라딘 진짜 우리 누나 서운하게 하지 마로라... 좋으면 좋다고 표현을 해라...

막시무스 2020-12-27 15: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열반님의 영업으로 구매해본 1인으로서 MD특채 강력하게 청원합니다!ㅎ

반유행열반인 2020-12-27 15:45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성원에 힘입어 알라딘 강제 이직하는 건가요 ㅋㅋㅋㅋ
 
[eBook] 화이트 호스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1226 강화길.

강화길 소설을 처음 읽은 건 2017년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이었다. 이후로 2020년 젊은 작가상 수상집, 멜랑콜리 해피엔딩, 나의 할머니에게, 악스트에 연재하던 장편(제목 생각 안 나…) 같은, 여러 작가 작품이 실린 책에서만 작가의 소설을 드문드문 읽었다.
몇 편 읽지 않았지만 나랑 별로 결이 안 맞는 작가 같아...했었다. 그리고 나 강화길 책 안 볼 거야...하는 마음까지 가게 된 것은 옹졸한 이유였다.
올해 초 어떤 외국소설 리뷰대회가 있었다. 책이나 작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별로 관심도 없어서(특히나 저렇게 대회랑 상금 걸고 책 팔아 먹는 거 왠지 싫어...하면서) 그런 게 있나 보다 하고 넘겼다. 마감을 얼마 남기지 않고 갑자기 친구가 같이 리뷰대회 참가해보자고, 꼭 나랑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얼떨결에 전자책을 사서 두툼한 책을 부지런히 읽고 독후감도 썼다. 그런데 정작 일이 너무 바빴던 친구는 중간에 책읽기를 포기했다. 내 리뷰는 선정되지 않았다.
그때 리뷰대회 심사위원이 강화길이었다. ㅋㅋㅋㅋ 앞으로 강화길 책 안 볼 거야! 하고 선언했다. 나중에 돌아보면 강화길에 대한 서운함보다 친구에 대한 원망이 더 컸던 것 같다. 그 뒤로 친구와 몇 번을 다투었다. 너는 왜 쉽게 약속하고 쉽게 어기는 거야. 나는 그 사소한 일들이 신뢰를 허무는 문제라고 심각하게 생각했다. 머리로는 친구의 과도한 초과근무 시간과 바쁜 몸과 지친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지쳐서 나를 챙기지 않고 외롭게 내버려두는 모습에 더 크게 실망했던 것 같다.
지금은 뭐 이러나 저러나 아무 상관이 없고, 친구와도 잘 지내고 그러니까 강화길 소설집 읽어야지 헤헤 하고 빌렸다. 안 볼 거야! 아니고 안 사 볼 거야! 라고 중얼대면서...나는 참 치사한 인간이다.

서평 형식을 취한 ‘오물자의 출현’을 제외한 나머지 소설은 모두 ‘나’의 1인칭 시점이고, 화자 모두 여성이다. 그들이 느끼는 불안, 불편, 불만족, 막연한 두려움 같은 감정과 기분을 작가는 섬세하게도 그려놓았다. 그래서 읽는 이도 덩달아 불안하고 불편하다. 이 분야는 거의 독보적이 아닐까 싶다. 일상이 스릴러다. 가장 친밀한 배우자가, 연인이, 선생이, 제자가, 시어른이, 조부모가, 이웃이, 그리고 정체 불명의 존재가 그 불안의 근원이다. 사실 불안은 바깥이 아닌 내 안의 감정이다. 기질이든 성장배경이든 지난 경험이든 사회구조든 가족관계든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도록 휘젓고 흔든다. 그 속에서 소설 안의 나들은 체념하지 않고 질문하고 반항한다. 불확실하고 불분명한 불안의 근원을 직시하기 위해 탐색을 멈추지 않는다.
답은 찾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하는 때가 더 많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되지 않잖아? 작가가 꽂혀버린 하얀 말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나는 끝내 이해하지도 흥미롭게 읽지도 못했지만 나머지 소설은 괜찮게 읽었다. 야, 이런 거 잘하네, 나도 만만치 않은 불안쟁이인데 이걸 이렇게 쓰네, 이렇게 쓸 수 있구나, 읽는 사람에게 불안감도 옮길 수 있구나, 다음 번 책에서는 그 불안에 어떤 쥐구멍만한 탈출구라도 내어줬으면 좋겠다 싶었다.

-음복
제사 스릴러
-가원
가혹한 양육자 외할머니와 다정했지만 한량이었던 외할아버지와 빈집
-손
내가 틀릴 수도 있다, 학교+마을 스릴러
-서우
네가 속을 수도 있다, 학교+택시 스릴러
-오물자의 출현
오물자는 인형이라는 뜻이다, 기록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화이트 호스
세입자 스릴러
-카밀라
실연 스릴러

...나새끼 후려치는 게 예의 없구나…


+밑줄 긋기
-그때 나는 이미 뭔가를 예감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앞으로 내가 그와 비슷한 남자들을 만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자신의 진짜 능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들. 어쩔 수 없이 부당한 현실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들. 기회만 주어진다면, 이번만큼은, 정말이지 이번만큼은 제대로 해낼 수 있다고 믿는 남자들. 그들과 헤어질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어쩌다보니 겨우 이 정도 얄팍함에 자신을 갖는 남자들만 만난 것일까. 아니면 이 세상에는 이런 남자들만 있는 것일까. 결국 나는 그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들 중 누구도 달라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그날 벌어진 일도.(‘가원’ 중)

-이런 말들을 듣고 있으면 소문이란 진실보다는 어떤 바람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제발 실제로 그랬으면 하는 마음.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 그러면 적어도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다. 언제 마음을 놓아야 하는지 알 수 있다.(‘서우’중)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 2020-12-26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상 스릴러 종합 세트네요. 이걸 이렇게 쓰네... 느끼신 걸 보면 강화길 작가가 불안에 대해 잘 썼나봐요. 다음 번에는 어떤 쥐구멍만한 탈출구라도 내어줬으면, 하는 마음 어떤 마음인지 알 거 같아요! 저도 까만 말이 더 좋아요! 까악까악~

반유행열반인 2020-12-26 18:43   좋아요 1 | URL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을 잡히게 쓰니까 신기하네요. 하긴 쥐구멍이 있으면 이만큼 긴장감 없겠죠 영악한 작가 같으니... 까악까악ㅋㅋㅋ

파이버 2020-12-26 18: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글 제목에서 빵 터졌어요ㅎㅎ 까만 말이 더 좋다니ㅎㅎㅎ 저는 가원이 제일 좋았었어요 소설집 뒤에 발표 시기가 실려 있던데 최근에 발표한 소설 순으로 좋았었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12-26 18:44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최근작이 좋고 음복 가원에서 빵 터지는 거 보면 역시 어디서든 꾸준하고 끈질기게 존버하면 뭐라도 되는구나 싶었어요. 하얀 말에 왜 꽂혔는지 아직도 노이해...컨츄리를 안 좋아해서 그런가...

막시무스 2020-12-26 19: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저도 단편집을 통해 음복, 손, 호수를 보았는데, 지금 이 글보고 생각해보니 쓰릴러네요!ㅎ 서늘한 뭔가가 있었네요! 개인적으로 음복이 참 좋았던것 같아요!ㅎ 즐건 주말저녁되십시요!

반유행열반인 2020-12-26 19:49   좋아요 2 | URL
네 일관되게 등골에 소름 심어줘서 조금 물리기도 해서 쉬엄쉬엄 봐야겠더라고요 ㅎㅎ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빕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8-21 1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신작 읽고나서 다시 이 리뷰보니까…정말 쥐구멍 내줬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리틀 드러머 걸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4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1225 존 르 카레.

이십 대에는 야후 사이트의 세계 채팅방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영어로 대화를 시도하는 취미가 있었다. 미국놈들이나 유럽 선진국놈들 채팅방에 가면 영어를 버벅거리거나 채팅의 약어를 모르는 티만 내도 무시당하고 욕설을 들었다. 기껏 관심을 주는 건 음란한 말을 건네는 변태들 뿐. 인도인들 채팅방이 유독 많았는데 속내는 어떤지 몰라도 말하는 건 서구놈들보다 한결 친절했다. 먼저 이것저것 묻고 대화에 끼워주었다. 갑자기 파레토의 법칙을 설명해달라는 인도 사람이 있어서, 경제학 개론서를 뒤지며 나름대로 설명해주었다. 그 사람은 갑자기 책을 보내달라고 졸라서, 내 책은 한국어라 님이 못 읽어요 못줘요...하고 달래던 기억도 난다. 동방신기를 좋아해서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열광하던 푸에르토리코의 소녀, 이탈리아의 엔지니어 아저씨 같은 사람은 한참 수다를 떨다가 (그래, 라떼는 카톡은 없고 이런 거 있었다?) 엠에센 메신저에 추가해서 가끔 안부를 주고 받기도 했다.
모함마드도 엠에센 메신저에 추가했다. 프로필 사진에 기관총을 들고 있었다. 왜 총을 들고 있냐고 물으니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가자에 산다고 했다. 나는 거기에 컴퓨터도 있고 인터넷도 된다는 게 놀라웠다. 그냥 다른 곳에 사는 사람이 나를 놀리느라 거짓말한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날 나눈 말 대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우리는 결국 이길 거야.
이후 모함마드는 다시 로그인 하지 않았고 지금은 그 메신저마저 사라졌다. 정말 모함마드가 가자지구 주민이었다면, 아직 살아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마음이 불편했다. 만약 살아 있다면 아직도 기관총을 손에 쥐고 있겠지. 살아남는 게 싸우는 것이고 싸우는 게 살아남는 거니까 거기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공격하는 이스라엘 군인들 소식을 들을 때 화를 내는 것 뿐이었다.

이웃님 한 분과 박찬욱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가장 최근 연출한 드라마 이야기를 잠시 나눴고, 또다른 이웃님의 카레 포스팅에서 존 르 카레 이름을 보고 아, 드라마는 못 보니 책이라도 함 보자 하고 리틀드러머걸을 빌렸다. 공교롭게도 책을 빌린 다음날 존 르 카레가 작고했다. 괜히 내가 책 빌려서 돌아가신 것 같잖아...하다가 내가 그럴 만한 능력도 힘도 없다는 주제 파악을 하고 2주 동안 두꺼운 책을 열심히 읽었다.

첩보물, 공작과 테러와 암살 같은 건 거의 읽은 적이 없다. 빌릴 때도 이 책에 대한 정보를 전혀 알지 못했다. 존 르 카레가 첩보 요원 출신 작가라는 사실도 나중에 알았다.

이런저런 급진적 정치 투쟁에 참여하던 배우 찰리가 이스라엘 첩보팀에 포섭되어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아랍인을 사랑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조작?하고, 결국 유대인들이 그 투쟁 세력을 섬멸하는 데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멘탈이 무너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아랍인 미셸의 대역을 맡은 요세프(베커) 또한 찰리의 거울처럼 혼란을 느낀다. 둘이 조우하고 붕괴된 상태로 재회하는 모습은 그나마 위안이 되었지만 온전하지는 못했다.
나라, 민족, 점령, 해방, 투쟁 같은 거대한 목표에 짓눌려 도구처럼 이용되고 쉽게 죽임당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내내 힘들었다. 각자의 개인사가 감춰진 채 조직의 목표에 헌신하는 요원들, 전사들을 보면 그들을 그 자리에서 삽질하게 만드는 신념이란 무엇일까, 궁지로 몬 인생의 상처는 무엇이었을까 내내 궁금했지만 이야기가 모든 걸 다 담을 수는 없다. 주요 인물들의 지난 고통만 나온다. 감옥에 간 아버지, 부적응의 세월, 유대인 또는 아랍인에게 희생당한 가족과 이웃과 동포, 고문과 부상과 치욕.
누구도 미워하기는 힘든 게, 책 속에서 싸우는 유대인도 팔레스타인인도 모두 희생자이고 생존자였다. 이스마일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피의 복수 카눈처럼 요세프도, 미셸도, 칼릴도, 쿠르츠도, 그리고 찰리와 헬가도 먼저 흐른 피의 값을 받아내거나 갚는데 이용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개인이 장기판의 말처럼 휘둘리고 다치는 모습을 보는 게 현실이든 이야기든 참 힘들게 느껴진다.

종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오늘 태어난 예수가 복수를 말하거나 남을 해치고 빼앗는 것을 허락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용서와 사랑을 설파했다지. 가장 어려운 일이라 가치가 있을 것이다. 부족한 나는 용서 대신 분노하고 온전히 사랑하는 대신 의심하기만 한다. 그 편이 더 쉬우니까. 책을 읽는 동안 내심 누군가가 공작의 과정에서 포기하고 실패하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이야기는 끝없이 달려서 누군가를 터뜨리고 부수고 죽이는 데 성공했다. 죽이고 싶은 상대를 죽이는 일을 포기하는 일이야 말로 가장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모두가 비겁해서 그런 포기는 정말 드물게 일어난다. 그래서 세상은 아직도 슬픔과 고통이 가득하다.

+밑줄 긋기
-50미터쯤 앞에도 작은 카페의 불빛이 보였지만 그 너머로는 다시 황량한 눈의 고원들과 목적지 없는 도로뿐이었다. 그토록 황량한 곳에 어떤 미친놈이 카페를 열었는지는 아마도 내세에나 풀릴 수수께끼일 것이다.

-“당신은 내 나라를 저버린 영국인이오.” 그가 조용히 선언했다. 눈앞에 드러난 증거조차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갑자기 그가 고개를 들더니 불만이라도 토하듯 고개를 젖혔다. 요제프가 쏜 화기의 위력에 몸에 불까지 붙었다. 방아쇠를 당길 때 가만히 서 있으라고 배웠으나, 요제프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총알을 믿지 않았다. 그는 총알을 타깃에 박아 넣기라도 하려는 듯 끝까지 쫓아오며 쏘아댔다. 진부한 침략자처럼 문을 뚫고 들어와 곧바로 적에게 달려든 것이다. 그는 두 팔을 완전히 뻗은 자세로 계속 거리를 좁혔다. 그녀는 칼릴의 얼굴이 터지는 광경도 보았다. 몸을 뒤틀며 도움을 청하듯 벽을 향해 두 팔을 뻗는 것도 보았다. 총알은 그의 등을 뚫고 흰 셔츠를 망가뜨렸다. 그는 두 손을 벽에 댔다. 의수 하나, 진짜 손 하나. 이윽고 너덜거리는 몸이 미끄러지며, 스크럼을 뚫고 나가려는 럭비 선수처럼 웅크리고 앉았다. 하지만 이미 그때쯤 요제프가 다가와 두 다리를 걷어차 그의 마지막 여행을 재촉해주었다.

-난 죽었어요. 난 죽었어요. 난 죽었어요.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 2020-12-25 1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대단쓰.. 야후에서 세계인들이랑 노셨구나. 라떼는 미소년이죠! ㅋㅋㅋ MSN 진짜 오랜만이네요. 열반인님 읽고 계신다는 소식을 어디선가 듣고, 이 책 저도 오늘 사서 오늘 도착했어요. ˝죽이고 싶은 상대를 죽이는 일을 포기하는 일이야 말로 가장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모두가 비겁해서 그런 포기는 정말 드물게 일어난다.˝ 저도 요즘 비슷한 생각해요. 부수고 해치고 싸우고 죽이는 게 더 쉬운 길이고 다른쪽이 더 어려운 일 같다는.. 오늘 같은 날 마음을 다잡고 멋진 리뷰 남기시는 거도 대단 / 그와중에 성탄절에 어울리면서도 묵직한 마무리는 더 대단... 님들아 이게 우리 열반인님이다!!!

반유행열반인 2020-12-25 19:10   좋아요 1 | URL
사람이 극단으로 외로우면 외계로 신호 보내고 그러는 거죠 ㅋㅋㅋㅋ 오늘 같은 날 책 읽고 리뷰 쓰는 거 말고 할 일 없어서인데 그걸 이렇게 금가루 바르고 띄워주는 세인트 하나님 ㅋㅋㅋㅋㅋ엠에센이 미소년이었어요? 미소녀 합시다 ㅋㅋㅋㅋ

라로 2020-12-26 10: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존 르 카레, 죽기전에 두 번 테리 그로스라는 사람과 인터뷰 하는 거 들었는데,,,, 울었다오.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삶을 살다가 간 착한 작가더라구요. 저는 그의 책을 다 좋아합니다. 팬이에요!!! 그런데 인터뷰를 들으면서 내가 좋아한다고 하면서 그에 대해서 넘 몰랐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란 인간이 늘 그렇지 뭐 했어요.

반유행열반인 2020-12-26 10:35   좋아요 1 | URL
따뜻한 라로님 울린 작가라니 전 겨우 처음 읽었으니 하나도 모르는 걸요 그래도 책 많이 남겨주고 가셨으니 하나하나 찾아보려구요 ㅎㅎㅎ
 
윤리적 잡년 - 자유로운 사랑에 대한 실용지침서
재닛 하디.도씨 이스턴 지음, 금경숙.곽규환 옮김 / 해피북미디어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1218 재닛 하디, 도씨 이스턴.

연초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이 여름에 개봉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코로나19 덕에 극장에 가려던 계획은 번번히 무산되었다. 결국 오늘 옆의 사람이 VOD서비스에서 구매해줘서 함께 테넷을 보았다. 거꾸로 해도 테넷, 똑바로 해도 테넷. 텔넷 인터넷 네트 이런 게 생각나는 제목이었다.
영화는 훌륭했다. 얼마나 훌륭하냐면 세 살 짜리가 좋아하는 경찰차, 구급차, 소방차, 트레일러, 헬기, 배 같은 게 전부 등장해 애기는 자기가 아는 탈 것의 이름을 열심히 불러댔다. 불이야! 같은 것도 외치고. 열 살 짜리도 나름의 이해력을 발휘해 이것저것 떠들어대고 물어가며 흥미로워했다. 세 살 부터 곧 마흔인 사람까지 같이 모여 볼 만한 영화가 얼마나 되겠어. 더구나 모든 걸 비틀어보고 의심하고 거꾸로 보는 반골에게 딱인 영화였다. 하, 주인공 키 작은 유색 인종 남자로 한 것 봐. 여자랑 어린이는 건드리지 마시죠! 일어날 일은 일어나지만 우리가 노력하면 바뀔지도 몰라, 는 뻥.

인터스텔라에서 천체 사이가 아무리 멀어도, 블랙홀을 뚫고 가야 내 생애 안에 겨우 닿을까 말까 한 사이라도, 사랑하니까 나는 간다, 만나러 간다 했다면, 테넷에서는 어쩌면 나란 존재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을 수 있고, 그렇게 누군가를 구할 수도 있고, 내가 망하면 아마 미래의 내가 다시 돌아와 고쳐 놓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어차피 여기의 내가 죽어도 또다른 내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고, 동시에 또는 다르게 명멸하는 존재가 나라면 아이참 많은 일이 잘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런 세계관을 상상하는 것은 겁나 희망적이고 낙천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여기저기에 존재하려면 겁나 바쁘고 정신 없겠구나 싶기도…

이 책 읽기는 호기심과 경계가 나름 넓다 하는 나에게도 도전이었다. 일단 두께가 두껍다. 책을 처음 받았을 때 노끈으로 맨 자국에 표지가 조금 훼손되고 속표지도 어디 습기 먹은 거 마냥 쭈글대서 같이 산 중고책보다 상태가 안 좋아 조금 빈정 상했다. 읽다 보면 발견되는 오타들도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런 급진적인 책을 번역하고 출간한 출판사의 시도는 높이 사고 싶었다. 가끔 근본주의자들이 스스로 급진주의로 칭하면서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타도하려는 시도를 하는 걸 보면 어이가 없다. 급진은 이만큼 액셀 밟는 걸 말하는 거 아닐까…

다양한 성소수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게 오래되지 않았다. 이 책은 그중에서도 다자연애, 비모노가미, 폴리아모리에 대해 다룬다. 저자 중 한 명은 일흔이 넘었고, 두 저자는 같이 산 적은 없지만 연구 동료이자 연인이자 친구로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왔다. 자신들과 주변 사람들의 수많은 사랑과 연애와 성생활의 미담과 실패담과 시행착오와 경험적, 실천적 지식을 사례와 함께 나눈다.

Slut을 번역한 잡년,은 우리나라에서 다수의 사람과 성경험을 한, 주로 여성을 지칭하는 걸레라는 말처럼 가치판단과 비하가 담긴 용어이다. 그 말로 지칭되던 이들은 게이나 퀴어가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그 용어를 받아들여 긍정의 의미로 역전하는 시도를 한다. 잡년, 걸레라는 말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문란함, 무책임함, 더러움, 무규칙, 질병의 온상 같은 이미지와 달리 다자 연애를 지속 가능하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지식과 마음의 준비와 예의 범절과 책임감과 계획과 합의와 고민이 필요하다. 이 책을 읽으면 그런 고민을 끝없이 주고 받는 관계와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질투를 이해하고 다스리는 법, 안전하고 더 즐거운 성생활을 하기 위한 지침과 팁 같은 것은 모노아모리를 고수하거나 이성애자, 동성애자 상관 없이 도움을 받을 만한 부분으로 읽혔다. 항상 스스로를 너무 미워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을 강조한다. 비슷한 책들을 읽을 때마다 접하는 이야기였다. 나를 사랑할 줄 알아야 남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건 당연한 이야기인데도 나에게는 오래도록 어려운 일이었다. 아주 조금이나마 나를 그렇게까지 미워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고 이상하고 달라보이는 삶도 생각보다 유서가 깊었다. 결국 삶이라는 건 끝없는 자기합리화의 과정일 뿐일지도 모르지. 합리화해도 너무 창피할 정도가 아닌 정도로만 살면 되지 않을까, 완전무결한 흠 없는 삶은 환상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내용은 큰 무리 없이 받아들이고 읽을만 했는데, 책 후반부의 그룹섹스나 난교파티 참여 요령 같은 건 조금 많이 어려웠다 ㅋㅋㅋ아 나도 선이 없는 놈은 아니구나...심리적 장벽 느꼈어...무서워…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들’에서 7-80년대 프랑스에서 파르투제?하다가 실려가는 여친 나오는 장면 봐서 좀 충격받은 게 있는 것 같다. 몇 년 전 언론에서 소라넷이니 초대남이니 하면서 스와핑이나 갱뱅 같은 거 이루어지는 거 엄청 무섭게 까는 거 봐서 흠, 과연 저런 상황이 동의와 합의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저것도 또다른 방식의 성매매와 성착취 아닐까 싶었는데. 저자들은 교양 갖추고 철저한 규칙과 위생 지침을 바탕으로 강압적인 놈은 알아서 퇴출시키는 안전한 상황의 단체 친교?도 가능한 것처럼 소개하지만. 이부분은 흠좀무였다…

나는 그저 누구도 최대한 아프거나 다치지 않고 더 큰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랄 뿐. 그런 다양성을 말하는 다양한 삶의 방식을 그린 책을 조금씩 읽고 있을 뿐이다. 당장 뭘 하겠다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밑줄 긋기
-자신에게 잘하라. 사랑의 핵심은 누군가의 아름다움과 강인함과 미덕에 대한 사랑이 아님을 기억하길. 오히려 누군가가 우리의 나약함, 우둔함, 초라함 앞에서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는 모습이다. 이 무조건적인 사랑이 우리가 연인들에게 갈망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기대하는 것이다.(217)

-”그는 나의 감정을 용인한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원하는 모든 걸 말한다. 사실, 그가 내 이야기를 북돋우는 셈이다. 나는 모든 것을 말하는 것, 질투와 슬픔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것들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감정들은 내 연인에게서 어떤 저항도 받지 않아서 힘을 상실한다. 그는 그 감정들을 그저 들어주고 가만히 놔둔다.”(219)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운 마음에 대한 해결책 하나는 누군가를 사랑하면 얼마나 기분 좋은지 떠올리는 것이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기분이 좋아지고 싶다면 누군가를 사랑하라.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231)

-몸, 욕망, 섹스를 더럽고 나쁘다고 가르쳤던 그 믿음 때문에 성적 자존감을 개발하는 게 매우 어렵다.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경험을 어떻게 할 수 있기 한참 전인 청소년기를 성욕, 성적 판타지, 자위 행위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보낸 시간이 많다. 많은 이들이 타인과 접속할 때 자신의 수행 능력에 집착하며 시간을 보낸다. 혹 잘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느라 바쁘다. 이게 얼마나 좋은 느낌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우리의 욕망과 환상이 이성애자와의 모노가미 결혼을 넘어 뻗어나갈 때, 우리는 자기 수용에 관한 추가 공격에 시달린다. 일부 사람에게 우리는 섹스에 미친 변태이자 경멸의 대상이다. 타인의 눈에, 그리고 우리 자신의 눈에 아주 많이 그렇다. 신조차 우리를 미워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때문에 기분이 나쁜 나머지 자신을 그저 숨기고 싶어진다면, 섹슈얼리티의 풍부함을 흠씬 느끼기 어렵다.(356)

-요리에서부터 테니스와 천체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뭐든 능숙해지고 싶다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그 방법을 배워야 한다. (363)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 2020-12-19 21: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나도 선이 없는 놈은 아니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열반인님 너무 좋아... ㅋㅋㅋㅋ ˝이상하고 달라보이는 삶도 생각보다 유서가 깊었다.˝ 다양한 삶의 방식을 그린 책을 읽어주시는 덕분에 저도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랑받지 못할까봐 두려운 마음에 대한 해결책은 밀란 쿤데라옹이 생각나네여... 새 책 샀는데 노끈 자국 찍혀있거나 그럼 넘 슬프죠. 저도 데이빗 보위 평전 독자펀딩이라 파본 안 만들려고 걍 끌어안았는데 펼쳐볼 때마다 슬픔입니다. 흙

반유행열반인 2020-12-19 21:41   좋아요 2 | URL
이런 거 왜 좋아해 하나님...선 없는 분이구나 ㅋㅋㅋㅋ 읽고 팔 생각하면 흠난 책 빡치는데 그냥 가지고 있을 거면 별일 아닌 거죠...모두가 완벽할 수는 없다 너도 나처럼 흠이 있지만 엄청난 책이구나ㅋㅋㅋ

하나 2020-12-19 21:53   좋아요 2 | URL
˝너도 나처럼 흠이 있지만 엄청난 책이구나 ㅋㅋㅋ˝ 나도 따라해야지... 자기의 선이 어디까진지 알기 위해서라도 많은 책을 읽어봐야될 거 같아요. 당장 뭘 하겠다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12-19 21:55   좋아요 2 | URL
자꾸 읽다보면 선도 넓어지고 고양이 마냥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고 그러다 세상도 구하거나 말아먹고 그러는 거지..ㅋㅋㅋ이과생들이 응 그런 거 아니야 양자역학은 말야..나도 몰라..하고 쫓아오다 도망가는 상상 중...

scott 2020-12-19 22:09   좋아요 3 | URL
어떡해 제목,,,,제목이,,,
뇬 ㅋㅋㅋ 잡 ㅋㅋㅋ

자유로운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 인데

뭉쳐서 다니는 ㅋㅋㅋ
코로나로 비대면 시대 로봇이 이런 욕망을 채워주지 않을까요 ㅎㅎ
요리-테니스 까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할수 있고 천체 물리학은 별자리 외우고 ,,,하면 가능 !

알라딘 너무 한점이 새책을 중고책 처럼 취급해서 배송해주면서 100원짜리 설문지 돌려놓고 다음번 배송때도 주문자 한테 찰진 여 ㅅ을 먹여요
엄청 항의 하고 사진 찍어보내면 블랙리스트에 올려놓는다고 (지인이 알려줌)
이책이 만듬새부터 두툼해서 뭔가 출판사에서 꼬ㅁ꼼하게 처리 못하것일수도 있지만 눌림자국은 기냥 안펼려서 알라딘에서 창고에 쳐박아둔것 같네요

scott 2020-12-22 10:24   좋아요 2 | URL
열반이님, 하나님 오늘,,,노멀 피플 7회 보실지 모름 ㅋㅋㅋ

너무빠지면 안됌!!!

하나님 더 빠져들기전에 열반인님 저책 팔아치워버려욧!!

얄라알라 2020-12-20 01:20   좋아요 3 | URL
저도 리뷰 자알~~ 따라가며 읽다가 ˝나도 선이 없는 놈은 아니었구나...˝ 여기서 큭 했는데 첫 댓글에 하나님께서^^

반유행열반인 2020-12-20 08:46   좋아요 2 | URL
scott님 알라딘도 문화 재단 사회적 공헌 단체 아니고 그냥 책팔이 영리기업이다 생각하면 꾸겨진 거라도 팔아먹고 싶겠지...하고 맙니다 ㅋㅋㅋ 왜 저를 팔라고 하세요... 하나님 유다 만들고 저 예수 만드시려고....드라마 같은 위안이라도 있어야죠 아 쟤들 인생 연애사 나보다 난감하네 하고 위안도 받아야 하고요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12-20 08:47   좋아요 2 | URL
얄리알라북사랑님도 웃음에 선 없는 분이시군요 ㅋㅋㅋㅋㅋㅋ

scott 2020-12-19 22: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데 ,북플에서 표지만 보면 옌레커 소설인줄 알았네요 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0-12-20 08:44   좋아요 2 | URL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새 버전 표지랑 너무 비슷하죠 ㅎㅎㅎ

2020-12-20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20 0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0-12-24 2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유행열반님!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12-25 07:4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페넬로페님도 메리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