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당신의 인생을 정리해드립니다 - 삶이 바뀌는 신박한 정리
이지영 지음 / 쌤앤파커스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10309 이지영.

제목을 자꾸 당신의 공간을 정리해드립니다-로 읽었는데 이 편이 더 정확한 느낌이다. 의도는 알겠지만 공간 대신 인생이 들어가니 뭐랄까, 주마등이 지나가는 기분…
2월 말 이 책 조금 읽는 중이었는데, 무조건 거실에 쇼파와 텔레비전을 놓을 필요가 없다는 내용 읽는 순간, 이사갈 집에서도 고정관념을 벗어난 공간 배치를 하면 어떨까 싶었다. 안방에 짜넣기로 한 붙박이장을 포기하고, 안방을 침실 대신 취미방으로 쓰자! 안방에다 거실장과 텔레비전, 쇼파(3인용이니까 가능할 거야), 작은 방에 있던 컴퓨터 책상이랑 기타들도 다 넣고, 다같이 노는 방으로 쓰는 거야. 거실에는 텔레비전 놓을 자리에 방방마다 있던 책꽂이 다 모아다 놓고 거실 중간에 지금은 놀고 있는 이케아 자작나무 원목 테이블 놓고 다같이 책도 보고 공부도 하고 보드게임도 하고 간식도 먹고! 제일 작은방에는 가구 최소한으로 놓고 침실로만 쓰는 거야…

...어디서 이상한 데 꽂혀가지고...라는 소리와 함께 무참히 까였다. 내가 뭐 한다고 하면 다 오냐오냐 했었는데 통념과 관습에 반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 온건한 곁의 사람은 가장 넓고 좋은 방에서 자고 싶다고 했다. 넓은 거실 놔두고 방에서 텔레비전 보는 것도 이해 못하고...
에잇, 거실 정복 실패다. 개인 도서관 수립은 다음 생애 할 일들로ㅋㅋㅋㅋㅋ

잘 버리는 법, 무조건 버리지 않는 법,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공간을 배치하는 유용한 팁을 많이 알려줬다. 마지막에 잇템이라고 소개된 걸이형 휴지통이랑 꼭꼬핀은 우와아아아! 세상엔 별 쓸모 있는 게 이미 다 있구나! 하고 적어뒀다ㅋㅋㅋㅋ

다만 18평 6인 가구(엄마 아들 딸과 그 두 자녀가 사는 집) 정리를 부탁하며 따로 사는 다른 딸이 100만원 가진 게 다라고, 이 정도로는 택도 없겠지만 다들 우울해 하니까 정리좀 제발...하고 일을 맡기고 하루 동안 작업 하는 사례를 보면서 정리 컨설팅의 비용을 가늠했다. 생각보다...많이 비싸구나...

얘들아, 정리정돈 알아서 잘 하자…쓸데 없는 거 버려서 자리 만들고 100만원 아낀 걸로 거기에 책 백 권 사서 채워야 하거든...ㅋㅋㅋㅋ 이미 추정치 3천 권 넘긴 우리집은 정리고 뭐고 글렀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다 이거야. 폐휴지 하치장이니 전부 압축해서 버려야 된다...비둘기 먹이 주다가 추락해서 죽고 싶네...ㅋㅋㅋ농담입니다. 있는 책 다 보고 죽겠습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잘 하자. 끝.


+밑줄 긋기
-종류별로 한곳에 모두 모으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책이 많은 집에서는 방마다 들어찬 모든 책을 꺼내서 한곳에 모읍니다. 옷이 많은 집도 옷장, 붙박이장, 서랍장마다 흩어져 있는 모든 옷을 꺼내어 한곳에 모읍니다. 그러면 1차로 ‘세상에! (책이/옷이/그릇이/장난감이) 이렇게 많았다니!’ 하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고 나면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남겨야 할지 느낌이 옵니다. 아무리 비우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그 상태에서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이제껏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물건은 집의 가장 큰 공간에 혹은 좋아하는 공간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집도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책은 무조건 서재에, 와인은 반드시 주방에만 두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고정관념을 깨는 순간, 집은 머물고 싶은 공간이 됩니다.

-정리하고 싶은 카테고리의 물건을 몽땅 꺼내어 한곳에 모읍니다. 책이면 책, 옷이면 옷, 전부 다 한눈에 보여야 합니다. 일단 다 꺼내서 펼쳐보고 전체를 파악합니다. 전체가 파악되면 우선순위가 매겨집니다. 우선순위가 생기면 다음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이 많은 물건을 버리지 못했던 이유는, 이것이 집에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같은 물건이 10개 있다고 칩시다. 집이 넓어서 10개를 다 수납할 수 있다면 버리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면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10개를 다 꺼내놓았는데, 아무리 봐도 버리고 싶은 게 하나도 없다면 그냥 10개를 다 보관하면 됩니다. 모두 다 나에게 소중한 것들이니까요. 오랫동안 꺼내 보지 않았고, 사용하지 않았던 물건이라도 소장하고 싶은 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절대 ‘버리기를 위한 버리기’는 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사용하지도, 전시하지도, 보관하지도 못하는 물건이라면 그 물건에 담긴 추억도 어쩌면 더 이상 가치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영 돌아보지 않을 추억이라면 건강하게 이별하는 연습도 필요하죠.

-희한하게도 어르신들은 숨은 공간 사이사이에 물건을 끼워 놓는 것을 굉장히 즐깁니다. 사이사이에 끼워놓았던 물건들을 다 꺼내서 한곳에 모아놓으면 부모님도 깜짝 놀랄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좋은 공간에 살아보는 것은 다이어트와 같아서 좋은 상태를 한 번 경험해본 사람은 아주 작은 노력이라도 좋아지는 쪽으로 기울이게 됩니다. 언젠가는 이전의 어수선한 상태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 속도 또한 서서히 느려질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시도 자체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철재는 철재끼리, 목재는 목재끼리 모아주는 것이 좋습니다. 멀바우, 오크, 월넛 등 목재도 컬러가 다양한데, 비슷한 컬러로 톤을 맞춰주면 더욱 좋습니다. 나무로 된 가구는 따뜻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반면에 철재는 차갑고 모던한 느낌을 줍니다. 대체로 원목가구는 침실이나 공부방에, 철재가구는 베란다나 주방에 두는 것이 잘 어울립니다.

-단, 겨울옷 중 패딩이나 모직 코트 같은 외투는 부피가 크기 때문에 많이 걸어두면 어수선해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런 옷은 팔 부분이 덜렁거리지 않도록 양쪽 소매를 주머니에 꽂아두면 고정되어 훨씬 깔끔해집니다.

-걸이형 쓰레기통: 주방 싱크대나 테이블에 걸어두고 사용할 수 있는 쓰레기통이다. 대형부터 소형까지 크기도 다양하다. 평소에는 접어놓았다가 사용할 때만 펼칠 수 있어서 냄새 걱정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주방에서는 요리 후에 멀리 이동하지 않고도 바로 쓰레기를 버릴 수 있으니 편리하다. 욕실이나 화장대에도 걸어두고 사용할 수 있다.

-꼭꼬핀: 간단히 벽에 꽂은 후에 액자나 시계를 걸 수 있는 아이템이다. 벽에 못을 박기 힘들 때 사용하면 좋다. 현관 가까이에 꽂아두고 마스크나 자동차 키를 거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도 좋다.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1-03-09 2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장 넓고 좋은 방에서 자고싶은 그 마음 저는 무조건 동의합니다. ㅎㅎ 이 글 읽다보니 저희집도 정리를 또 한번해줄때가 됐는데 하면서 집을 슬금슬금 둘러보네요. 정리는 곧 버리기더라구요. ㅎㅎ

얄라알라 2021-03-10 00:42   좋아요 2 | URL
저도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임금님 주무시는 방에는 깊이 주무시라고 너저분한 거 화사한 거 없이 심플했다 하더라고요. 그 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버리고 또 버리는^^임금님도 아니면서

반유행열반인 2021-03-10 07:13   좋아요 1 | URL
정리는 곧 버리기 저도 이사 준비하면서 깨달은 바라 공감하네요 ㅎㅎㅎ잠이야 컴컴할 때 불 다끄고 적은 공간만 쓰는데 뭘! 하는 마음이었는데 다 같은 마음은 아닌가 봐요 ㅋㅋㅋ

하나 2021-03-10 00: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내가 들어갈 자리를 만드는 방법, 저도 알고 싶고요. 거실 정복 실패 안타깝네요. 저 예전에 어느 선생님댁에 갔는데 거실에 책상 두 개랑 책장 있어서 아,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신기했던 경험이 있어요. 통념 안에서도 어떻게든 열반인님의 자리를 잘 만들어보실 수 있길 바랄게요! 😌 잘자영!

반유행열반인 2021-03-10 07:16   좋아요 4 | URL
지금은 소파 구석 앞에 폭 일미터 남짓 바퀴달린 기둥 하나 달린 이동식 테이블 놓고 독서대 놓고 거기가 내 붙박이 자리거든요. 옆에서 게임하거나 티비에 장성규 나오면 책 보다 얼굴 들어 슬쩍 인상 쓰고 집중력 가다듬고 ㅋㅋㅋ다 방으로 쫓아내고 책보려고 했는데(차마 혼자 방에 처박혀 책 보는 나쁜 놈 안 할라고 ㅋㅋ) 실패예요...ㅋㅋㅋ좋은 하루 보내세요!

얄라알라 2021-03-10 00: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 열반님께서도, 여섯 식구 모여 살게 된 막내따님 사연이 인상 깊으셨나봐요. 12명이 하루 종일 작업했다고 기억하는데,

˝노는 방˝ 아이디어 좋아요. 각자 문닫고 들어가면 다른 행성 사람 되는지라 모아놓고 ˝노는 방˝에 같이 있는 것도 상상만해도~~~

반유행열반인 2021-03-10 07:18   좋아요 3 | URL
네 하루에 열두명 투입한 게 사장님(?)입장에서는 신경 많이 썼다는 표현으로 읽혔는데 다른 의미로는 열네톤 버린 집 만큼 어마어마했단 뜻이기도 할까요. 저는 18평에 하루 100만원이면 책에 나온 5-60여평 고대광실들 3일씩 하면 대체...이사 비용보다 크네...하고 감동을 무너뜨렸네요.
노는 방 좋지 않나요 ㅋㅋㅋ나만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ㅋㅋ집 전체 시끄럽지 않게 문닫고 티비보고 거 얼마나 좋습니까 ㅋㅋㅋㅋㅋ

Yeagene 2021-03-10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아이디어 괜찮은 것 같은데 까이셨군요;;;역시 같이 살 사람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ㅎㅎ
정리는 버리기..정말 맞는 말씀입니다.특히 이사는 그 정리의 좋은 기회가 되고요.몇십년만의 이사라 이번에 얼마나 열심히 버렸는지..;;;그렇게 버렸는데 이사와서도 또 버릴 게 나오더라고요;;; 열반인님 글구보니 이사준비는 잘 하고 계시죠?어련히 잘 하실테지만^^;;;

반유행열반인 2021-03-10 20:02   좋아요 1 | URL
정말 이번 이사를 잘 활용해야 겠네요 ㅎㅎㅎ 이사가고 나면 버릴 것 자체를 안 들이는 연습도 같이 하려고요.
제 아이디어 공감해주신 예진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이번 생은 평범한 배치로 살까 해요 ㅋㅋㅋ

공쟝쟝 2021-03-11 18: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장 넓고 가장 좋은 방에서 자고 싶었던 저는 침대를 거실로 뺐습니다!!! 그리고 그 침대에서 계속 누워서 책을 읽습니다!! 티비는 요? 티비는 침대 앞에 있습니다. 그럼 하루종일? 네! 침대에 있습니다! 곁의 지기에게 침대를 거실에 놓는 것 추천드려요... 티비도 함께요. 뭐하러 쇼파를 사요? 침대에 누워서 보면 되는데! ^ㅡ^

반유행열반인 2021-03-11 18:15   좋아요 1 | URL
우리집은 침대는 없고 퀸사이즈 라텍스매트 깔고 자는데요. 거실에 침대를, 거실에 침대를 놓는대 와하하하하 하고 안그래도 며칠 전에 그렇게 제 말을 곱씹더니 웃더라구요... 혼자 살면 진짜 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공쟝쟝님은 이지영 선생님의 가르침에 충실한 공간배치를 하고 계시네요. ㅎㅎㅎ

공쟝쟝 2021-03-11 18:26   좋아요 1 | URL
제 침대는 쪼꼬미 싱글 침대~ 저희 엄마도 와서 보시더니 놀라더라고요? 하지만 이내 적응하시고 침대를 쇼파처럼 사용하시고 심지어 침대 위에서 티비보며 식사하심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3-11 18:58   좋아요 1 | URL
해보면 편한 걸 아는 거지 ㅋㅋㅋㅋ집안 만이라도 내 맘대로!!!! 난 혼자 사는 세상 아니니 타인을 존중하는 삶으로.... ㅋㅋㅋㅋ

syo 2021-03-11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줄이라는 말은 아무도 안 하는 이 무서운 알라딘 세상 ㅋㅋ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3-11 22:3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심지어 그러는 와중에도 차곡차곡 늘고 있다지요....
 
[eBook] 문학책 만드는 법 - 원고가 작품이 될 때까지, 작가의 곁에서 독자의 눈으로 땅콩문고 시리즈
강윤정 지음 / 유유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10307 강윤정.

나는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데, 분명 읽기 시작하면 재미있는데, 자꾸 엉뚱한 책으로 도망친다. 이 책도 괜히 도망치다 빌린 책. 에세이, 라기보다는 실용서에 가깝다. 장성규가 워크맨에서 문학동네 파트타임 체험 갔을 때 김(정)영수 편집자 나오길래 소설가 아냐?하고 검색하다가 편집자K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강윤정 편집자가 같은 문학팀에 있다는 것을 스쳐지나가는 정도로 알았다.

책이 두껍지 않은데도 편집인이라는 직업인이 하는일, 해야 할 일, 책을 잘 만들기 위해 하면 좋을 일을 간단명료하게 잘 정리해 놓았다. 문학 편집자의 문장이란 이런 것인가! 싶다가 아, 다 그렇진 않을 거고 일잘러 전문성이란 이렇게 묻어나는구나, 업계 신참에게 유용할 만한 매뉴얼을 이만큼 친절하고 체계적으로 써낼 수 있구나, 하면서 새삼 감탄했다. 출판업계에서 일할 생각도 가능성도 없는데 이걸 왜 보고 있나, 하면 작가가 쓴 글이 어떻게 다듬어져 상품이 되어 나에게 닿는가, 그 과정에 대한 궁금함 때문이었다. 궁금함은 많이 해소되었다. 편집인의 덕목, 작가 만날 때 이렇게 하면 좋다, 하면서 깨알같이 내놓은 조언은 어느 분야에서든 정보를 수집하고 뭔가를 계획하고 클라이언트를 대할 때 공통으로 적용할 만한 유용함이 느껴졌다.

출판 사례로 내가 예전에 읽은 ‘뱀과 물’, ‘모르는 사람들’, ‘제주에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를 묶는 과정이 자주 나와서 더 흥미로웠다. 이렇게 누군가 집요하게 애정과 시간과 전문성을 들여 열심히 묶은 책이니 이제 까는 독후감은 살살 자제…할 게 아니라 다음 좋은 책을 만드는데 보탬이 되도록 열심히 읽고 열심히 까야지 하는 다짐을 했다. 기승전똥 이틀째...아 어제 이주윤 작가 책에서 구보씨 나오더니 여기서도 구보씨 나왔다. 봉준호 감독님 외할아버지 한 번 영접해야겠네 그려. 이 책 읽던 중간에 갑자기 뭔가 아이디어 생각나서 끄적이다가 다시 읽다보니 편집자의 폴더 속에 비슷한 기획안?같은 게 나와서 깜짝 놀랐다. 에라이 집어치워야지, 아니 해봐야 하나, 기획된 내용은 정지돈과 관련한 산문집이었고, 나는 비슷한 형식의 장편소설을 생각했으니 좀 다르다만...생각만 하다 끝날 듯. 단편이나 쓰자 꼬꼬마 나부랭이야…그만 쉬어 그만 쉬라고.

이제부터는 얇은 엉뚱한 책 그만 빌리고 소설 사 둔 거나 보자...하는데 주말이 끝났다. 소설을 보자. 독후감 적당히 쓰고 소설을 쓰자. 언젠간 쓰겠지 뭐.

+밑줄 긋기
-소설집은 일정 기간 모인 예닐곱 편의 단편을 묶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경우 본문 편집 과정에서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가 수록 순서이다. 여러 지면에 발표한 작품을 모아 스토리라인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을 차분히 일독하면서 작가가 이 기간 동안 어떤 문제나 소재에 관심을 기울였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맥락을 바탕으로 두고 가장 좋은 작품 두 편을 뽑아 맨 앞에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배치가 소설집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독자 대부분이 책의 앞부분부터 읽게 마련이므로 자연스레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을 앞에 배치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집 전체를 마무리하고 여운
을 남기기에 좋은 작품을 맨 마지막에 배치한다. 가운데에 놓일 작품은 길이와 톤을 고려해, 읽는 이의 몰입도를 가능한 한 높이는 쪽으로 고민한다.

-작가는 작품을 쓰고, 퇴고하고, 하나로 모아 다시 정리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여러 차례 반복해 읽었기 때문에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작가가 생각하는 좋은 작품과 독자가 생각하는 좋은 작품이 늘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소설집은 작가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편집자가 이 사이에서 연결고리가 되어 주어야 한다. 첫 느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첫 일독에 공을 들인다. 편집자로서 판단하기에 좋은 목차를 짜서 작가와 상의해 최종 목차를 결정한다. 작가 역시 본인 의견도 중요하지만 독자와 시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으므로, 편집자가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의견을 내면 거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의 기호를 기억해 주는 사람에게 불쾌감을 가질 사람은 없으니까. 작가가 먹지 않거나 하지 않는 게 있다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도 좋다. 싫어하는 것 말고 좋아하는 것. 자연스레 작가가 좋아하는 것에서 대화를 시작해 간다. 미팅에서 어색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일은 편집자의 몫이다. 자신이 내향적인 성격이라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어렵다 생각할수록 이런 디테일에 신경 쓰는 편이 좋다.

-책을 내 본 경험이 없거나 적은 작가의 경우 ‘과연 이걸 내가 잘 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가장 크다. 이 경우 ‘지금 출판계에 이 아이템을 필요로 하는 독자가 있다. 유사 도서로 이런 책이 있고 판매가 잘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온 책과 달리 당신에게는 이런 특장점이 있다. 이 부분을 잘 살려 쓰고 만든다면 좋은 책이 될 것이다’라고 설득해야 한다. 작가가 잘 모르는 본인의 강점을 편집자가 알아봐 주는 것, 의지할 수 있도록 전문성을 보여 주는 것이 필요하다.

-약속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정확하게 답하고, 기대하는 지점과 우려하는 지점을 솔직히 짚고, 작가가 낸 아이디어 가운데 쓸모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명히(그러나 부드럽게) 나누는 것. 그러니까 미팅이란 상대방과 나 사이, 상대방과 출판사 사이에 신뢰를 쌓는 일이며, 그 바탕에 각자의 전문성을 존중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일을 하면서 배워 나갔던 것 같다. 작가의 뜻에 무조건 맞춰서 점수 따는 자리가 아니라, 내가 어떤 편집자이고 내가 속한 출판사가 어떤 회사인지 작가가 가늠하고 판단하는 것만큼 나도 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는 사람인지 판단하는 자리라는 것 또한.

-그런데 독자가 다름 아닌 바로 그 책을 살펴보려고 ‘집어 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제목과 표지에 끌려서’이다. 독자가 의식했든 못했든 매대에 놓인 수많은 책 가운데 어느 한 권을 집어 든 건 그 책의 만듦새에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 놓인 책이 훨씬 더 재밌고 유익한 책일 수 있지만, 독자의 시선을 잡아 끌지 못한 책은 선택될 기회를 잃는다. 요컨대 독자는 책의 내용을 모른 채 책을 집어 구매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제목은 책의 만듦새에 참 중요하겠다. 내용보다 먼저 읽는 글이 바로 제목이니까.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조금 더 과하게 얘기하자면 ‘내용보다’ 중요하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편집자에게는. 좋은 원고를 쓰는 것이 저자의 몫이라면 그것을 독자가 집어 들고 싶은 책으로 만드는 것이 편집자의 일이니까.

-반면 한국문학에서 편집자가 우선적으로 장악해야 할 것은 그 작가의 작품 세계이다. 이전의 작품과 어떤 점이 같고 다른지를 파악하고, 이 책이 작가의 문학 인생에 어떤 작품으로 남을지, 이 작가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어디인지를 아는 것.

-이렇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일인가 싶지만 그래도 가 본다면, 느낌표는 1400년대 이탈리아의 시인 알폴레이오 다 우르비살리아가 고안한 문장부호로 알려져 있다. 그는 보다 생동감 있게, 큰 소리로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점 위에 선을 하나 그어 표시하였으며 자신이 만든 문장부호를 ‘감탄의 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늘날 거의 모든 콘텐츠의 소비가 모바일에서 일어나며, 완결되는 곳은 포털이 아닌 SNS다. 정보를 ‘검색’으로 얻던 시대에서 ‘소통’으로 얻는 시대로 이동한 것이다. 뚜렷한 취향과 견고한 자기다움으로 소통하는 ‘개인’에게 신뢰가 이동한 것이기도 하다. 『신뢰 이동』의 저자 레이첼 보츠먼이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신뢰하는 것이 공유경제의 핵심”이라 말했듯, 특정 분야의 안목이 있다면 권위에 기대지 않고도 능동적으로 드러내고 공유하고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도대체 이런 책이 왜 베스트셀러에 있는 거야?’라든가, ‘난 이 사람 정말 비호감이던데 왜들 좋아하는 건지, 원’과 같은 태도는 의식적으로 지양해야 한다. 도대체 왜 잘 팔리는지, 왜 사랑받는지 알아보고 연구해 보고 따져 보는 것, 평가하기보다 궁금해하는 것, 고집보다 유연함을 발휘하는 것이 기획자가 가져야 할 자질이다.

-좋은 작품이란 뭘까요? 요건은 다양합니다. 우선 많은 독자가 공감할 만한 작품이 있겠죠. 독자가 지금 이 순간 고민하는 것에 귀 기울이는 작가의 작품, 나아가 누구나 자라면서 혹은 나이를 먹으면서 한 번쯤 겪었음 직한 감정의 흔들림에 관심을 두는 작가의 작품이 오랜 시간 많은 독자가 사랑하는 작품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자기만의 확고한 작품 세계로 마니아 독자층을 만들어 가는 작가의 작품도 좋은 작품일 것입니다.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 2021-03-07 23: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나 전에도 생각했는데 이 사람은 뭘해도 한다 ㅋㅋㅋㅋㅋㅋ 아니 안 피곤한가 오늘도 썼네? 싶었던 날이 하루이틀이 아님. 무릎이 갈려도 읽고 쓴다 우리 열반이 그렇게 소설도 뙇, 서평집도 뙇! (그 기획 뭔지 궁금해서라도 이 책 읽고 싶어요) 잘 자요! 내일 조심조심 잘 댕겨와요!

반유행열반인 2021-03-08 06:57   좋아요 2 | URL
한 권 읽으면 한 편 짧게라도 쓰는 거라서요 이게 내 수다고 놀이니께ㅋㅋ독후감은 그냥 막 싸지르는데 다른 글도 그리 되면 좋겠네요.. 정지돈 이승우 책 만드는 거 살짝 언급되니까 하나님도 읽다가 반갑다! 하실 걸요ㅋㅋ신형철님 평론에서 뽑아서 표지 카피 쓰는 거도 나와 ㅋㅋㅋ 하나님도 좋은 하루 조심조심 보내셔요——

공쟝쟝 2021-03-07 23:5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보자, (중얼중얼... 나 분명히 퇴사할 때는 소설 보는게 목표 였는데.. 왜 철학책 따위로 목표가 바뀌어있지? 밀크맨 보고 너무 지쳐.. 그로기 상태됨.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게 소설읽기..) 그나저나.. 오랜만에 각잡고 페이퍼들 살펴보니.. 이보세요, 반반님!! 너무 열심히 읽어놔서 따라가기 벅차 잖아요. 😱 하지만 기대해, 식음만 허하고 읽어버릴거다. 그나저나 당장 나 뭐 먼저 읽죠? 저 백수됐으니까 빨리 소설 추천 한권 해주세요.. 강한걸로! 헤어나올 수 없는 걸로!!!! ㅋㅋㅋ 너무 어려운 책은 반사~!!

반유행열반인 2021-03-08 06:52   좋아요 2 | URL
김금희 읽어요 김금희 ㅋㅋ짧은 걸로다가(짧은 소설 모음집이나 매기 같은 중편이요ㅋㅋ)때리지 않는데 자기 반성 오지게 하게 되다가 그래도 인간을 버리지 않게 해주는 김금희 ㅋㅋㅋ(최은영파 계도중)

공쟝쟝 2021-03-08 11:04   좋아요 1 | URL
최은영파는 김금희작가님의 아름다운 문장에 감동하지만 종종 최은영님을 더 좋아해야겠다 생각해서 아직 김금희를 너무 사랑할 수 없습니다...(금희찡 미안해요..) 그치만 밥먹구 도서관 갈꺼다 휘리락~

scott 2021-03-07 23: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올해 안에 단편 쓴다에 1표 검 ^.^

반유행열반인 2021-03-08 06:53   좋아요 3 | URL
단편이라도 써야해요 ㅋㅋㅋ몇 년 전 처음 쓸 때는 월간 열반인 했는데 작년에는 격월간(?) 올해는 계간 될 거 같아요....1표 감사합니다. 천천히! 시작해(보려는 마음을 먹어)보겠습니다ㅋㅋㅋ(자꾸 미루는 마음 ㅠㅠ)

얄라알라 2021-03-08 0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까는 자제...깔게..^^ 열반님 글의 그 시원한 맛에 자꾸 찾습니다! 단편들을 배치할 때 저런 고난도의 정신노동과 고뇌가 따르는 거군요. 무조건 맨 앞에 오는 글이 제일 재밌어서 배치된 것으로만 알았느넫

반유행열반인 2021-03-08 06:55   좋아요 1 | URL
맨앞이랑 두번째가 좋은 거 딱 오긴 하는데 한 권 관통하는 서사를 만들려고 애쓰더라구요. 오늘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Yeagene 2021-03-08 1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진짜 올해 안에 뭐 쓰시는 거에요? 저도 너무 보고 싶네요>_<
참,오랜만에 김금희 읽고 있는데 문장이 넘나 깔끔해서 깜놀했어요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03-08 19:22   좋아요 1 | URL
김금희 좋게 읽으셨다니 저도 기쁘네요 ㅎㅎㅎ올해 안에 많이 쓰자! 다짐만 하는 중이예요 ㅋㅋㅋ독후감이라도 내내 쓰겠지요. (그걸로 쓴 걸로 쳐달라면 안 되겠죠 ㅋㅋ)

라로 2021-03-08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뜸 그만 들이고 그냥 하나 써봐요!!!(조급한 라로씨;;;;ㅎㅎㅎㅎ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03-08 21:47   좋아요 1 | URL
저 첫 시작한 사 년 전부터 여태 쓴 게 이십 편 넘어요 ㅎㅎㅎ그리고 반 년 쉬었네요 ㅋㅋㅋ(막작?초고가 작년 시월...) 새 봄에 하나 만들어야 겠슙니다 ㅎㅎ독촉 감샤합니다 ㅋㅋㅋ

라로 2021-03-08 22:21   좋아요 1 | URL
기대하겠어요!!!^^

라로 2021-03-09 2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열님 아직도 손 많이 아프죠? (갑자기 스토커가 된 느낌;;;)

반유행열반인 2021-03-09 20:20   좋아요 0 | URL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방금까지 하이드로콜로이드 필름 붙이고 있다가 진물이 안 나오길래 떼고 그냥 반창고로 바꿨어요 ㅎㅎ 아직 새 살 안 난 부분이 동그랗게 남아가지고... 스토커 아니고 다정한 이웃이죠 ㅎㅎㅎ
 
[eBook]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 - 출세욕 먼슬리 에세이 2
이주윤 지음 / 드렁큰에디터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10306 이주윤.

감사하게도 글을 기다린다고 안부 인사 건네신 이웃에게 제대로 대답도 못했다. 정신 없이 한 주가 지나갔고, 읽은 게 없으니 독후감을 쓸 수도 없었다. 철푸덕 철푸덕 넘어져서 마우스 잡으면 마우스패드에 닿는 손바닥 그 부분 겉살이 동그랗게 날아가고 피가 났다. 청바지 무릎 한쪽은 쓸려 망사가 되고 집 가서 벗어보니 무릎살이 까지고 멍이 들었다.(흑흑) 툭 빠진 한쪽 안경알이 굴러 도망가는 걸 붙잡아 다행히 수리도 마쳤다. 분명 시간을 쏟았고 퇴근은 늦는데 해야 할 일은 계속 남는다. 다음주는 더 바쁠 예정인데 미처 못한 준비들을 미룬 채 무방비로 새 월요일을 맞을 예정. 주말에는 놀 거야. 날 그냥 때려라 미래여 엉엉.

병이 돌고 모이지 마세요, 여행가지 마세요, 하는 시절이라도 자고 돈 벌 공간은 필요하니까, 지나다보면 여기저기 뚝딱뚝딱 공사장이 참 많다. 건축 규모도 작업 환경도 천차만별이라, 어떤 곳은 중국계 동포나 중국인이나 몽골인으로 추정되는 노동자들이 안전모도 작업화도 없이 허름한 복장으로 쇠기둥을 나르고 시멘트를 붓고 때때로 모닥불을 쬐며 잠시 쉬고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는 백색 유정란 같이 매끈한 안전모와 형광색 조끼를 갖춘 건설 노동자들이 뚝딱뚝딱 지이이잉 쿵쾅쿵쾅 일하는 굉음을 내다가 오후 다섯 시 땡 하는 순간 고요함만 남기고 사라지는 신기한 광경도 보았다. 시마이인지, 저녁식사 시간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갑자기 왜 공사장 얘기를 꺼냈지. 아, 추우나 더우나 눈에 보이고 또 필요한 공간을 만드느라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으니, 쓰잘 데 있는지 없는지 모를 일 하는 월급루팡 주제에 불평 말고 열심히 일해라 나새끼여! 너만 힘든 거 아니다! 괜히 한 번 셀프로 혼내고 싶었다…

사실 혼낼 게 아니라 위로가 필요한 거 아닐까. 힘든 건 힘든 거니까…(일관성 없는 양육자여…) 나의 마음과 몸의 그릇은 요만해서 쉬이 금이 가 버리고 줄줄 뭔가 새고 있으니, 책이라도 슬렁슬렁 담기는 걸(혹은 대충 흘려 보내도 안 아쉬울 걸) 보고 싶었다. 뭐라도 봐야 독후감을 쓰잖아…
마침 이웃님의 사랑 고백 담긴 전 상서를 보고 아, 이주윤 작가는 좋겠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애절하게 편지를 주고 받던 날이 있었지, 편지는 내가 먼저 써야 답장을 받거나 못 받거나 했는데, 일기조차 못 쓰고 살면서 무슨, 세상의 모든 책들이 작가가 우리에게 보내는 편지 아니겠니, 거기에 독후감을 쓰는 게 답장 같은 거지, 별 거지 같은 청승을 떨다가 이 책을 빌렸다.
얇고, 기대만큼 금세 읽고, 그런데도 글쓰기에 잔뼈가 굵고 재주넘기도 잘하는 작가의 글쓰는 이야기가 재치 있게 담겨 있었다. 나란 놈은 예전에 ‘아무튼, 술’ 읽을 때도 비슷했지만, 대놓고 웃기기 위해 썼고 실제로 수많은 독자들 배꼽을 빼놓는 책들도 심드렁하게 보면서 노력하시네요, 애쓰십니다, 하고 짠 한 마음을 가지는 웃음 코드 오류를 지니고 있어서(반대로 남들 안 웃는 이상한 부분에서 혼자 터짐. 병입죠, 병) 차분하고 편안하게 읽었다.
쉽고 가볍고 즐겁고 낙천적인 글을 쓰는 것은 재능이고 기질이고 재주이고 또 그렇게 쓰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 같다. 나도 그런 어조를 시도해 봐? 그러면 즐거워질까? 이 책 독후감 쓰기 전 잠시 생각하다가 억지로 그러는 게 더 지치는 일 같아 그만 두었다. 노력하시네요, 애쓰십니다, 하고 짠 한 마음을 많은 이들에게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저자가 쓴 새 책이나 칼럼에 관한 악플이 잔뜩 달려 멘탈 터지던 경험을 보고는 많이 찔렸다. 악성 독후가미스트(?)로서 말씀드리자면, 재미가 없거나 생각이 다르거나 책 만듦새나 글 씀새가 기대 이하여서 불평하는 부분도 분명 있겠지만, 대부분은 부러워서 그런 겁니다. 내가 닿지 못한 세계, 겪지 못한 삶의 모습, 거기에 더해 계속 쓰고 읽히고 글로 인해 알려지는 그런 경험까지- 잘 쓰고 싶은 열망은 가졌지만 결과물도 성취도 기대에 못 미치는 그런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쓸 수 있는 글이란, 했다가 방금 고침 ㅋㅋㅋ글자로 이루어진 똥도 있으니) 글 자체에 대한 합당한 평가가 아닌 인신공격과 자기 신세한탄을 투사해 남을 욕하는 짓일 뿐이죠…
그러니까,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하듯 글이나 씁시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씁시다. 나도 그러기로 했다. 누가 나를 미워하거나 욕하면 내가 부럽구나? 하기로. 누군가 미우면 아 난 쟤가 부럽구나, 하기로. 그리고 언젠가는 네놈들 이야기 모조리 다 써 버릴 거야. ㅎㅎㅎ

...그런데 읽으면서 밑줄 긋기 할 부분 많이 찾지는 못했다. 제일 웃겼던 말은 저자의 아빠가 잔소리하면서 날린 ‘쭈그렁방탱이’(이상한 거에서 웃김. 듣는 사람은 빡쳤을 건데). 빵 터지던 대목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웃음은 웃을 준비를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 같다. 나는 늘 준비가 되어 있질 않다네. (이런 똥도 있습니다. 기승전똥. 부러워서 그래요.)


댓글(23)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아 2021-03-06 19:0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어쩐지..에구..다치셨었군여.
ㅠㅇㅠ 청바지 망사될정도면 많이 아팠겠어요. 게다가 안경...그래도 노래하듯 글쓰자는 클라이막스에 흐뭇해집니다. from. 열반인님 글 스타일 부러워하는 미미

반유행열반인 2021-03-06 19:07   좋아요 5 | URL
에구..에서 흐뭇..까지 다정함이 여기까지 꾸덕꾸덕 상처연고처럼 달라붙는 기분입니다.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미님ㅎㅎ

라로 2021-03-06 20:2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나 지금 쉬는 시간인데 내 서재도 안 가고 반열님 서재 왔다요. 오늘 일 룰루랄라 정도로 마음도 몸도 가벼운데 하품은 왜이리 나오던지. ㅎㅎㅎ 암튼 다친 줄도 모르고 왜 글 안 올라오냐고 해서 미안해요. 많이 다쳤나보다. ㅠㅠ 다친곳 안봐서 뭐라고 하긴 그런데 보통으로 에어 드라이로 뭐 붙여서 막고 그러지 마세요. 😅 그건 그렇고 이 책 얇아서 그런가? 막 좋진 않았어요. 선생님 전상서에 속았나? 했는데 오빠~~~ 그 책은 막 웃었어요. ㅎㅎㅎㅎ
반열님이 책 내면 내가 전상서 보낼게요. (한다면 하는 라로씨. 🤣)

반유행열반인 2021-03-06 20:43   좋아요 4 | URL
마우스도 키보드도 잡아야 하고 원래는 맨손 설거지인데 위에다 면장갑 끼고 고무장갑끼고 해야 해서 웻드레싱(가짜 피부 같은 거요) 했어요 ㅎㅎ쉬는 시간엔 쉬셔야죠! 저랑도 결이 딱 맞진 않고 그래도 저분 주변사람들은 많이 웃고 잘 지내겠구나 싶더라구요(사진 찾아보고 더욱 확신에 차 끄덕끄덕 함 ㅋㅋ) 전상서는 지금도 가능하잖아요(알라딘이가 전서구로 대륙횡단해서 소식 날라줌 ㅋㅋ) 리뷰 하나 페이퍼 하나 백자평 하나씩만 삼종세트로 잘 부탁드립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시원한 김치국 선물 감사드려요. 오늘 일과도 잘 마치시길!!!

라로 2021-03-07 11:26   좋아요 1 | URL
지금도 가능한가요?? 서재글?? 뭐야요?? 근데 저는 리뷰와 100자평,,,거의 안 써요,,, 그래도 그런 것을 써 달라는 거죠,,, 뭐 노력,,,,당근 해야죠. 반열 선생님이 책 내시면!!^^;;;

반유행열반인 2021-03-07 12:1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저 힘써 정진해보겠습니다 ㅎㅎㅎㅎㅎ

막시무스 2021-03-06 20: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힘든 한주 보내셨네요! 담주는 이번주 고생의 배로 보상받으실겁니다! 몸조리 잘 하시고 즐건 주말되세요!

반유행열반인 2021-03-06 20:45   좋아요 4 | URL
축복의 말씀 감사합니다. 제가 사는 서울 근처 오셨다 가셨더라구요? 저도 이번주에는 출장 갈 일 있었는데 그 도심으로 보내주면 좋아라 했을 거 같아요 ㅎㅎ끝나고 종로 알라딘도 가고 보고 싶은 사진전도 가고 ㅋㅋ그러나 아쉽게도 출장지는 그냥 우리 동네ㅋㅋㅋ 막시무스님도 평온한 주말 보내세요!

붕붕툐툐 2021-03-06 21: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에구~ 다치셔서 더 바쁘고 신경쓰이는 한 주셨을 거 같아요~ 주말엔 푹 쉬시면서 재충전 하자고요!! 전 늘 너무 웃을 준비가 되어있어서, 남들 웃는 것에도 웃고, 남들 안 웃는데서도 웃는데, 남들 안 웃는데서 웃어서 혼난적도 있어요~;;;;
미움은 질투가 백퍼 맞다고 생각하는 1인입니다~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03-06 22:07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붕붕툐툐님도 풀충전하시는 주말 되시길 빌어요. 잘 웃는 사람 좋은 사람인데 누가 혼냈대요 제가 가서 혼내줘야 겠습니다!!!

scott 2021-03-06 21: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다치셨는데 포스팅까지 열반이님 그냥쉬기 주말에 숨만 쉬기 ^ㅎ^

반유행열반인 2021-03-06 22:07   좋아요 4 | URL
읽는 게 숨쉬는 거래요 열반이는 ㅋㅋㅋscott님도 즐겁고 푹 쉬는 주말 보내셔요~~

하나 2021-03-06 2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가 부럽구나?˝에서 물개박수 쳤어영. ㅋㅋㅋㅋㅋㅋ 나 이런 거 너무 좋자나... 언제나 저를 빵 터지게 하는 열반인님. 3월 초라 열반인님 무척 매우 되게 바쁘실 거 같아서 기다렸어요. 조금 지나면 나아지겠죠. 3월의 그곳은 읽는 게 숨쉬는 거 같은 열반인님도 정신없게 해... 저 열반인님이 부러웠던 그 리뷰에서 ˝위아더월드하니, 유아낫얼론이라.˝ 이 구절 인용한 거 좋았어요. 그러니까 아프지 마로라!

반유행열반인 2021-03-07 07:36   좋아요 1 | URL
아 저런 따옴표에서 인류애 같은 거 쫌 느꼈어야 했는데 ㅎㅎㅎ몸과 마음에 새 살이 솔솔 돋도록 힘써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ㅎ

syo 2021-03-08 16:09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엄밀히 말하면 그 구절은 인용이 아니예요 ㅋㅋㅋㅋ 저는 어느 책에서도 그런 구절을 만난 적이 없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3-08 16:14   좋아요 1 | URL
저작권자의 오리지널리티 주장이 나왔습니다. 사실 확인 부탁드립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하나 2021-03-08 16:2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그러네요 쇼님이 인용한 거는 마이클 잭슨 형밖에 없었어. 고 문장이 리뷰하신 책이랑 넘 찰떡이어가지구..

syo 2021-03-08 16:22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바로 이 지점에서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제가 이주윤 선생님께 제가 쓴 줄 알았다고 한 말이 완전 개 구라는 아니라는 사실이.....

Yeagene 2021-03-07 19: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읽는 게 숨쉬는 거라니 넘나 멋있잖아요..아 나도 이런 멋진 말 하고 싶다..ㅠㅠㅠ
열반인님 많이 다치신 것 같은데 주말에 충분히 쉬셨는지 몰겠습니다.
쉬엄쉬엄 하셔야해요...ㅠㅠㅠ

반유행열반인 2021-03-07 19:33   좋아요 1 | URL
그냥 경미한 찰과상(손)과 타박상(무릎)이에요ㅋㅋㅋ 걱정해주셔서 감사하고 걱정끼쳐 송구스럽습니다. 덕분에 잘 숨쉬고(?)있어요. 예진님도 남은 주말 산소 호흡 잔뜩 하시고 새로운 한 주도 건강하게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1-03-07 23: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크랩해둔 부분들, 다시 읽어도 깨알 재미. 저 역시 대놓고 웃기려는 글보다는 슬프곺괴로워 몸부림 치는 글들을 좋아하는 편인데요 ㅋㅋㅋ 친구왈 “넌 마조히스트여” 아.... 넵 ㅋㅋㅋ 악성독후가미스트의 자기인식에는 못미치는 고백이지만 ㅋㅋ 제가 m입니다.
악성독후가미스트라는 말이 너무 웃겨서 지금 매우 즐거워 하는 중. 암튼 부러워요, 부럽다구! 그대여, 다 써버리십시당.

반유행열반인 2021-03-08 06:49   좋아요 2 | URL
남 괴로운 글 좋아하니까 진성 개S(대문자)아녀? ㅋㅋㅋ부러워요=미워요 아녀? ㅋㅋㅋㅋ 저도 독후가미스트 혼자 만들고 뿌듯한 중. 클하에 자기 소개할라니까 할 말이 없어서 만들었다가 부끄러워서 못 써먹었잖아여....

공쟝쟝 2021-03-08 11:11   좋아요 1 | URL
악성 베토벤 이후의 최고의 악성이야 ㅋㅋㅋ (웃다가 눈물훔치기)
남 괴로운 글을 보면서 그 남에 자기를 이입해서 함께 괴로워한다구... 괴로움 중독같아.. 근데 사실 또 내가 괴로운건 아니니까 S인가... 괴로운걸 좋아하는 걸 보는 건...? (정체성의 혼란)
부러워요 = 사랑해요 / 날 미워해요? = 그렇다면 난 사랑해요 / 날 싫어해요? = 사랑해요 / 나에게 욕해서라도 관심을 줘!!
저 이상한 댓글의 맥락——-> 이거 진성 m 아녀?? 암튼 부러우면 난 안밉구 좋더라. 부러워하는 게 이기는 거다!
 
[eBook] 아무튼, 목욕탕 - 마음의 부드러운 결을 되찾을 때까지 나를 씻긴다 아무튼 시리즈 36
정혜덕 지음 / 위고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10301 정혜덕.

누군가는 영혼까지 붙은 특정 음식을 먹으면서 푼다. 누군가는 동전 몇 개 넣으면 흘러나오는 음악과 어우러진 에코 잔뜩 들어간 자신의 목소리로, 누군가는 저 먼 곳의 요기들처럼 나무나 전사나 코브라의 자세로, 또 누군가는 이어폰을 꽂고 하염 없이 달리면서 잊고 털고 채운다.
이 책의 누군가는 목욕탕에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스스로 또는 목욕관리사의 도움을 받아 묵은 때를 벗기고, 흰우유 한 팩을 마신다. 그러고 목욕탕을 나서면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세 아이를 먹이고 남편과 투닥이고 실수를 자책하는 등등 모든 사는 일에 지친 몸과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리고 충전되는 모양이다. 대중목욕탕을 찾은 지 너무도 오래된 나는 새삼 신기하다. 그런 육체적이고 단순한 위안 거리가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아직 내게 맞는 잊고 털고 채우는 활동을 찾지 못했다. 읽고 쓰는 일이 어느 정도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긴 하지만 이건 너무 머리와 마음을 쓰는 일이기도 해서 조금 더 쉬운 뭔가가 필요해. 쟤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편협하고 혐오가 가득한 남의 멍청한 말에 발끈한 마음은 따끈한 탕물에 몸을 담글 여유가 없어서 그냥 샤워나 대충하고 신경 안정제 몇 알을 입에 털어 넣으며 오늘 밤은 제발, 죽은 것처럼 잠들었으면, 아니 그냥 자다가 죽었으면, 그러다가 아침이 되면 다시 살아나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갔으면, 싶은 밤이다.

+밑줄 긋기
-순수한 연애, 오랜 연애, 시원찮은 연애, 미친 연애 등 각종 연애를 경험하고 나니 두 문장이 남았다. 첫째, 사람 마음은 변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가 되어 애끓는 절규를 외친들 소용이 없다. 사랑이니까 변한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사랑이니까 변하는 것이다. 사람 마음은 시시각각 움직이고 일관성을 갖추기가 굉장히 어렵다. 나는 변했는데 상대방이 아직 안 변했으면 나쁜 년이 되는 것이고, 반대 경우는 나쁜 놈이 되는 것이다. 둘 다 비슷한 시기에 변하면 유통기한 만료이니 미안해할 사람이 없어서 다행일 수도 있다. 둘째, 그러므로 낭만적 사랑은 언젠가 시든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내 경험상 대체로 그렇더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혼자 목욕하러 온 분들은 말없이 몸을 씻고 때를 민다. 그런 분들이 만든 묵직한 침묵, 그 침묵이 주는 안정감을 누리고 있으면 남의 입에서 나와 내 귀로 들어온 독한 말들이 몸 밖으로 천천히 빠져나간다. 탕에 앉아 묵은 각질을 불리며 마음에 낀 말의 때도 함께 녹이곤 한다. 마음을 후벼 파는 말을 더는 곱씹지 않고 땀과 함께 내보낸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03-01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2 0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Yeagene 2021-03-02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지금 장문의 댓글을 남겼는데 실수로 날렸어요...ㅠㅠ이런 바보팅이..ㅠㅠ 흑흑
열반인님 기운이 없으신 것 같아요.
괜찮으신지 걱정되네요 ㅠㅠ

반유행열반인 2021-03-02 13:50   좋아요 1 | URL
언제나 걱정 해주셔서 감사해요 ㅋㅋㅋ일하기실어증이죠 뭐 ㅋㅋㅋㅋ힘내보겠습니다. 예진님이야 말로 새 직장에서 고생 많으시겠어요 화이팅!!!!

2021-03-02 2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2 2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7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8 0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eBook]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0년 11월
평점 :
판매중지


-20210228 김소영.

성탄절을 앞둔 교회 안은 추웠다. 성가대 연습 중 (성가대 지휘하던) 피아노 선생님의 어린 조카가 놀러왔다. 동그란 눈에 포동포동 귀여운 아이 목에 익숙한 목도리가 걸려 있었다. 어, 저건,
내 거예요.
남색 면으로 된, 상표까지 내 것이었다. 겨우내 아끼며 매고 다녔는데 어느 순간 사라져서 너무 섭섭했다. 내가 피아노 학원에 두고 왔구나, 그걸 저 아이가 매고 왔구나 싶었다. 말 없이 한동안 잠자코 있던 선생님이 말했다.
네가 그렇다고 하면 네 거 겠지.
선생님은 조카의 목에서 목도리를 풀러 내게 건네주었다. 열두 살의 나는 대여섯 살 아이가 올 때보다 춥게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채 그저 잃어버린 물건을 찾은 기쁨에 신이 나서 연습을 마치고 목도리를 두르고 집에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뒤 친구네 집에 갔더니 친구가 옷장을 열고 내 목도리를 내밀었다. 저번에 놀러왔다가 두고 갔다며. 재질과 상표는 같았지만 내 목도리는 남색보다는 남보라색에 가까웠다. 그걸 친구네 집에서 찾은 뒤에야 알았다. 집에 돌아와 두 개의 목도리를 나란히 걸어 놓고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런데도 끝내 목도리를 선생님께 돌려주지 못했다. 아직은 어리고 어리석었다. 내가 틀렸었다는 걸 밝힐 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이십오 년이 흐른 지금까지 부끄럽다.
피아노 선생님은 그렇게 나를 처음 믿어준 어른이었다. 그뿐 아니라, 대회에 나가고 싶다는 내게 추가적인 수업료를 받지 않고도 시간을 내어 특별 레슨을 해 주고, 자장면을 사 주고, 피아노가 없는 내가 언제든 원하면 연습을 하러 오라고 주말에도 학원을 열어주셨다. 단순히 피아노만 가르치지 않고, 청음과 음악 이론까지 상세히 가르쳐준 뒤 문제를 다 맞추면 아이들에게 백점 맞은 개수만큼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라고 동전을 쥐어주셨다. 나는 주먹 한 가득 이걸 다 받아도 되나, 걱정하면서도 학원 아래 있는 슈퍼로 뛰어내려가 아이스크림과 초콜릿을 마음껏 사 먹었다. 여름방학 때는 희망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수안보 와이키키 온천으로 여름캠프를 가기도 했다. 대부분 엄마아빠가 일을 하느라 여름휴가를 떠날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이었는데, 적은 비용만 받고 다른 친한 피아노 선생님을 섭외해 봉고차를 대절해 내려가서 놀이기구도 태워주고, 수영장도 데려가고, 아이들을 씻기고 머리도 묶어주고 일일이 다 챙겨주셨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렇게 아이들을 챙기고 돌보는 일이 보통의 마음으로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고마운 분이었는데 내가 조금 자라면서 피아노 치는 게 조금씩 재미가 없어졌고 어느날부터인가 흐지부지 학원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뒤늦게 선생님이 결혼할 예정이고, 그래서 지방으로 이사를 가신다는 소식에 슬퍼하면서 학원(겸 선생님 숙소, 어느 때부터인가 건물 임대가 끝나면서 선생님이 사는 빌라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에 찾아갔다. 선생님은 외출해서 안 계시고 선생님 어머니만 집을 정리하고 계셔서, 엄마에게 졸라 준비해간 선물(귀걸이나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로 기억한다)을 건네고 아쉬워하며 돌아오던 기억이 난다.
내내 자존감이 낮은 삶을 살아왔지만,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어른이 내가 힘들어하면 위로해주고, 내가 잘 하고 싶었던 피아노 연주를 잘할 수 있게 독려해주고, 어린 아이가 누릴 만한(주전부리부터 여름캠프까지) 것들을 챙겨주었던 경험은 아직까지 마음 한 구석을 덥혀준다.
덕분에 아이들을 대할 때 존댓말을 하고, 어른 대하듯 말을 걸고, 한 번이라도 아이들을 웃기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말과 행동을 하는 어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남의 아이들에게는 조심스럽지만 내 아이들에게는 모진 때도 많아서 십 년 내내 반성하는 못난 어미이긴 하지만...ㅠㅠ 김소영 선생님이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읽으며 피아노 선생님이 내내 생각났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계셨으면 좋겠다. 지방에 가서도 나 말고도 다른 아이들도 많은 가르침 받았다면 정말 좋았겠다 싶다. 그런 어른들이 많은 세상이라면 가족 안에서 상처 받고 주눅들어 있던 아이들도 내가 그렇게 못난이는 아니라고, 나도 저런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다고 크게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아 2021-02-28 23: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놀랍네요. 그분 반응에 저도 당연히 열반인님 목도리인줄 알았어요! 살면서 저질러온 실수들은 참 오래 기억에 남아 곱씹게 되네요. 지금 제꺼 생각남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3-01 10:52   좋아요 2 | URL
미미님 버전도 듣고 싶네요. 정말 내 거인 줄 알았는데 그 덕에 내가 틀릴 수도 있다, 틀릴 때가 많다, 단단히 알았죠...

하나 2021-02-28 23:3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으앙 이 책도 좋아하고 열반인님 리뷰도 좋아해요! 그때 그 피아노 쌤이 오늘의 열반인님을 매력맨으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셨군.. 리뷰 읽으면서 생각한 건데,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우리가 어린이였을 때 환대 받았던 경험에 대해 말하게 된다는 점 같아요. 저도 고마웠던 기억이 몽글몽글 솟아나면서, 그걸 꼭 갚는 어른이 되어야지 다짐해보는 밤입니다. 어린이 한 명이 자라는데 마을 하나의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말은 그런 말인 거 같구.. 모든 것이 우리를 파편으로 조각내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관심을 놓지 말아야지. 꼭 코트 받아주는 어른이 되어야지... 잘자요!

반유행열반인 2021-03-01 10:54   좋아요 2 | URL
어제 자려고 누웠는데 저 이야기 결말의 다른 버전도 생각났어요. 뒤늦게 섬유유연제 넣고 빨아다 제 착각이었어요 하고 선생님께 목도리 돌려드리고 선생님은 그랬구나 하고 책망하지 않는...그런데 지금 목도리 두 개 다 나한테 없고 일기장 뒤져도 목도리 사건의 실마리조차 없어서 그냥 죄책감이 만든 어나더결말인 것으로 ㅋㅋㅋ바랐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ㅋㅋㅋㅋ코트 받아주는 어른이 되어야지 2222

바람돌이 2021-03-01 00: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린 시절 누구든 정말로 좋은 선생님 한분을 만났다는건 참 복받은 일인것 같아요. 그저 괜찮은 선생님은 많지만 나에게 정말 특별한 좋은 선생님은 쉽지 않지요. 그건 또한 그 좋은 선생님을 알아보고 마음에 남길 수 있는 마음가짐도 있어야 하는거잖아요. 반유행열반인님의 마음과 선생님의 마음이 서로 만나 오래도록 좋은 기억이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

반유행열반인 2021-03-01 10:57   좋아요 1 | URL
네 제가 복받은 경험이 있어서 그나마 이 정도 사람 구실 시늉이라도 하게 된 것이겠죠 ㅋㅋㅋ저 분 말고도 좋은 선생님 많이 계셨네요 힘들게 하시는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ㅋㅋㅋ어떤 어른이 되고 되지 말아야 할지 두루 경험했고 이젠 제 몫인데 마음에 남은 대로 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얄라알라 2021-03-01 03: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짠해요. 열두 살 기억이 여태 갈 수 있는데는 강렬한 고마움, 미안함....피아노 쌤 말씀까지 다 기억하실 정도로 작지 않은 에피소드였겠어요. 어린 시절^^


반유행열반인 2021-03-01 10:59   좋아요 2 | URL
기억은 부분적이라 좋은 기억만 남은 건지ㅋㅋㅋ정말 고마운 선생님이긴 하셨어요. 책 읽다 떠오르는 기억 뒤져보면 이야기거리가 참 많더라고요. 독서의 장점이자 단점 ㅋㅋㅋ흑과거 소환 ㅋㅋㅋㅋㅋㅋㅋ

syo 2021-03-01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선생님께 배워 좋은 선생반님이 되셨잖아요!

선생반님 이거 뭔거 이상하죠?
반선생님도 이상해서 고른건데..... 😥

반유행열반인 2021-03-01 11:38   좋아요 1 | URL
선생님 소리 듣는데 왜 안 맞는 옷 같을까요 후생님하고 싶다...생선님이나...책임감도 덜하고....반생선님ㅋㅋㅋ

Yeagene 2021-03-01 15: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악 ㅋㅋㅋㅋ
열반인님 이야기 읽다가 저도 모르게
엄청 당황해 버렸네요 ㅎㅎ
왜 제 이야기도 아닌데 제 볼이 빨개지는 듯한 느낌이죠;;;
지금 바로 생각나지는 않지만 저도 어렸을 때 비슷한 경험이 있는 것 같아요.사실 다 비슷비슷하지 않을까요...
자라서 중학생들 과외 선생님 잠깐 해봤는데 어린 아이들 챙기는 게 손이 많이 가고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네요..피아노 선생님 대단하십니다.열반인님 좋은 선생님 만나셨어요..:)

반유행열반인 2021-03-01 15:4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직접 저지른 저는 회한 속에 삽니다. 올드보이처럼 어디 갇혀 군만두만 먹으래도 반성할 거 같아요 ㅋㅋㅋ 저도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은 못 되어도 나쁘지 않은 어른이 되고 싶네요ㅎㅎㅎ

jiyun 2021-03-02 2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연히 ‘트릭미러‘ 리뷰를 보다가 이 블로그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재밌는 글, 상상하게 되는 글을 써주셔서 몰입해서 읽었네요. 어릴 때 피아노를 가르쳐주시던 그 많은 선생님들은 지금 다 어디에 계시는걸까요. 궁금해졌습니다.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반유행열반인 2021-03-03 02:3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jiyun님. 제 부족한 글을 함께 나눠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좋은 피아노 선생님들은 아직도 아이들이 음악을 좋아하는 계기가 되어주시고 계셨으면 좋겠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