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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과 가죽의 시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4
구병모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4월
평점 :
-20211213 구병모.
구병모의 소설을 모조리 읽은 시점이 있었는데 올해 나온 소설은 잠시 쉬고 있었다. 그러다가 신간 소식 듣고 밀린 책까지 두 권을 한 번에 샀다. 가장 마지막 읽은 심장에 수 놓은 이야기도 그렇고, 이 책도, 가장 최근 나온 상아의 문으로도 경장편, 중편, 작은 장편(?) 분량이 작가가 이야기 풀어내기에 적당했는지 책 세 권 다 자그맣다.
예전 한 스푼의 시간에서 인간 아닌 AI 주인공이 오히려 사람에 대해 더 파고들도록 했던 것처럼, 이 책에서는 불멸의 존재가 필멸자들, 사라질 것들에 대한 애틋함을 전한다. 빨간구두당과 이후 단편집마다 실리던 전설과 민담을 변주하는 방식을 이 책에서도 또 사용했다. 구두방 부부가 잠든 새 대신 구두를 만들어주던 인간 아닌 존재들이 인간의 외형을 갖추고, 그러나 죽지 않고 아주 오랜 시간 인간 사회에 스며들어 서서히 사라지거나 여태 남아 있는 이야기를 상상해 썼다.
그러고보면 궁금하다. 누가 가죽 외피에 밑창과 굽이 달린 구두라는 형태를 만들어 처음 신기 시작했을까. 아마 처음에는 발굽 없고 발바닥 약한 인간이 이족 보행까지 하느라 갈라지고 굳은 살 박히고 쉬이 다쳐 아픈 발을 보호하려고 대충 질긴 재질로 둘둘 말던게 그나마 살가죽과 비슷한 짐승가죽으로 이어졌겠지. 살가죽 감싸는 또다른 껍질, 보호막인 의복처럼 바늘로 꿰매고 이어 붙이는 게 당시로는 오래 물건을 잇는 최선의 방법이었겠지. 그런 방법은 누군가에게서 다시 누군가에게로 알려지고 이어지고 누군가 조금 더 나은 방식을 더해 더 질기고 편하고 예쁜 신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요즘의 나는 구두를 신지 않아…석유화학 고분자 물질로 틀에 푹 찍어낸 크록스에서 나온 고무신만 몇 년째 막 사모으고 오래 전 산 가죽 구두는 이사 준비하면서 거의 다 버렸다… 썩지 않는 신이 썩는 신을 몰아냈네…
버드 스트라이크 때 문장이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막 화내는 독후감 썼는데, 이번 책은 한참을 고민하고 고심하고 다듬었을까, 갤포스를 요즘도 쭉쭉 짜드시며 쓸까, 이제 이 정도 경지면 어느 정도는 내려놓고 구두를 깁듯 그냥 물흐르듯 써나갈까 궁금했다. 아마도 짧게 쓴 시라도 말을 굴리고 깎고 문지르고 하니까, 이 책도 그랬을 것 같다. 서사는 약하고 (갈등이라야 유진과 안이 각을 세우는 정도? 그나마도 구두를 완성하고 안이 유진의 공연을 보러 가면서 슬그머니 해소된다…) 문장은 날카롭고 섬세하다. 그러고는 왜 사는지 왜 태어나서 죽지 않는지 묻고 또 답한다. 그걸 보면서 참 필멸자로 태어나 다행이다…사랑하는 사람 다 죽고 혼자 남으면, 세상 변하고 이상해지고 하는 꼴 무한히 보려면 얼마나 지겹겠어…싶었다. 반지의 제왕에서 아르웬이 먼 미래의 영원한 외로움을 생각하면서도 사랑하는 아르곤 따라 중간계에 남는 장면도 자꾸 겹쳐 보였다. 그렇지. 잃더라도 한 번도 얻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지.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알고 오래 그리운 게 낫지.
+밑줄 긋기
-“사라질 거니까, 닳아 없어지고 죽어가는 것을 아니까 지금이 아니면 안 돼.”(149)
-꽃받침에 아무리 단단히 매달리더라도 길어야 한두 주의 유예라니, 살아 있는 모든 것이……구체적으로는 살아 있는 것이 뿜어내는 모든 것들의 유효기간이 어쩌면 이리 짧은가. 무대에서 제 눈을 찌르는 시늉을 하는 오이디푸스를 보며 안은 생각한다. 하나의 동작은 한 송이의 꽃과 같아, 개화를 시작하여 이어지는 순간만 살아 있고 동작이 완결되는 순간 소멸한다. 음악은 그것이 연주되는 동안만 살아 있으며 사실상 연주라는 것은 소리가 자신의 죽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행위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차라리 생겨나지 않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미 세상에 태어났다면 되도록 빨리 죽을 일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에는 그런 대사가 나오면서 인간의 운명과 세계의 허무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이 극에는 대사가 없다. 다만 세상에 미처 당도하지 못한 아기의 모카신과, 삶을 얻었기에 만날 수 있었던 작고 가녀린 존재들이 안의 마음속에 양각화를 그린다. (161-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