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20230221 김연수. 재독.
위로의 시차.
赤い鳥 - 白い墓
https://m.youtube.com/watch?v=YxCb7PldUxQ
석 달 전에 읽은 김연수 소설집을 다시 읽었다. 벌써, 싶기도 하고 까마득히, 멀기도 한 시간이었다.
책은 거기 그대로인데 (사실 알라딘 중고서점에 화풀이하듯 팔았다. 나빠서가 아니라 좋은 것이라도 냉큼 내던지고 싶은 마음일 때라. 그래서 이번에는 전자책을 빌려 읽었다) 그래서 더더욱 내 마음의 온도차가 선명한 읽기였다. 기억하기로 5년 간 재독한 책은 단 두 권이다. 장강명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과 이 책. 그리고 올해는 현우진의 뉴런 수1, 수2를 다시 볼 예정입니다…ㅋㅋㅋ
(브로콜리너마저의 노래처럼)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우울, 절망, 슬픔, 그런 게 있다는 걸 안다. 그런 위로가 무슨 소용일까 싶지만, 정작 힘겨운 순간에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때가 나같은 못난 이들에게는 특히 많지만, 없어도 될 것, 이 아닌 것을 이제 안다. 그 시간을 다 지나온 후에, 그때 거기에 내가 괜찮아지길 바라는 마음이, 그래서 건네는 수많은 말과 글과 눈빛과 손길이 있었다는 걸 너무 늦게라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면 당장은 그때만큼 힘들지 않은 시간이지만, 언제라도 다시 큰 슬픔이 닥쳐도 다 흘려보낼 수 있을 거라고 평온한 마음을 먹을 수 있다.
최악의 결말이 아니라, 평범한 나중을 떠올려 볼래? 이 노래 들어볼래? 이 그림은 어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잃는 슬픔이 너무 커서 말문이 막히던 때에 나는 그 사람들을, 그 시절과 기분을 잊지 말자고 이야기를 지었어. 그런 말들을 다 알아들으면서도 다 튕겨내고 골을 내던 내가 이번에는 인터넷에 도시 이름도 적어보고, 유튜브에서 찾은 노래를 띄워놓고 마저 읽고, 수많은 마크 로스코의 빛 중 어떤 것일까 궁금해 하기도 했다.
소설은 석 달 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좋았고, 그걸 다시 읽는 나만 조금은 달라져 있었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 희진의 물음처럼 던져 준 말은(사실은 설의법ㅋㅋㅋ강조의 효과) 우주까지는 몰라도 그 우주에 사는 기억하는 너는 달라져 있을 거야…하고 또 깨알같이 뭘 주섬주섬 챙겨주고 있었다.
그래서 내년에도 고집스럽게 울 거라고 골부리던 거울 속 나는 두 달 동안 그렇게 많이 울지 않고, 된장과 현미 몇홉을 챙겨 먹지는 않지만 아침마다 산에 나가 5킬로 남짓을 걷고, 여서일고여덟 시간 중 랜덤하게 그날 공부를 채우는 나를 얼마가 됐든 책망하지 않고, 그냥 이랬던 나를 나중에 기억하라고 매일 시간을 끼적여 놓고, 그때는 상상하지 못하던 평범한 오늘을 산다.
+밑줄 긋기
-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
“그러게. 그런데 살아보니까 그건 놀라운 말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한 말이더라.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고 우리는 죽지 않고 결혼해 지금 이렇게 맥주를 마시고 있잖아. 줄리아는 그냥 이 사실을 말한 거야. 다만 이십 년 빨리 말했을뿐. 그 시차가 평범한 말을 신의 말처럼 들리게 한 거야. 소설에 미래를 기억하라고 쓴 엄마는 왜 죽었을까? 그게늘 궁금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아. 엄마도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이토록 평범한 미래>중)
-
아무런 의미가 없어 무자비할 수밖에 없는 자연에 맞서기 위해 상징을 부여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정현이 평생 몰두해온 일이었다.
-
은정의 말을 듣고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때는 그저 은정이 이야기를 재밌게 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어떤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안다.
-
“얻어맞아 팅팅 부은 얼굴이 미워서 내가 ‘이딴 짓 하지 말고, 하던 대로 글이나 열심히 써’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글쓴다고 인생이 가만히 놔둘 것 같니?’라면서 흘겨보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그래도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것보다는 낫잖아. 해도 안 되는 일, 질 게 뻔한 일을 왜 하고 있어?’라고 했더니 이렇게 대답했어요. ‘버티고 버티다가넘어지긴 다 마찬가지야. 근데 넘어진다고 끝이 아니야. 그다음이 있어. 너도 KO를 당해 링 바닥에 누워 있어보면알게 될 거야. 그렇게 넘어져 있으면 조금 전이랑 공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져. 세상이 뒤로 쑥 물러나면서 나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나한테로.’ 무슨 바람이냐고 물었더니 ‘세컨드 윈드’라고 하더라구요. (<난주의 바다 앞에서>중)
-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저 역시 기만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저의 수많은 모습 중에서 자기들 입맛에 맞는 것들만 모아 저라는 이미지를 만들었으니까요.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는 논리적으로 앞뒤가 척척 맞겠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그것은 기만입니다. 실제의 제 삶은 앞뒤가 척척 맞아떨어지지 않거든요. 제가 선택한 제가 그럴싸한 이야기였듯이 선생님이 분석한 저 역시 또다른 그럴싸한 이야기겠지요. 〈사건의 결말〉 제작진이 편집한 저 역시 하나의 이야기이고요. 그러나 아시겠지만, 저는 그 어떤 이야기도 아니에요. 저는 혼돈 그 자체입니다. 카오스 그 자체예요.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진주의 결말>중)
-
아내에게 죽음이란 더이상 신간을 읽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더이상 읽지 못할 책들이 거기 켜켜이 쌓여 있었다.
-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스스로의 인생 앞에서 우리 모두는 그처럼 진지한 표정이리라. 그걸 두고 괜찮아진다느니, 좀 있으면 나아진다느니 같은 말을 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 어떤 말로도 우리는 위로받을 수 없다. 그게 이십대 초반에 그가 가진 견해였다.
-
사랑이 시작된 것은 그 직후, 월드컵과 대통령선거의 열기로 서울이 달아오르던 2002년 여름이었지만, 둘의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더 이전에 시작됐다. 그러니 정미가 이 세상에 없다고 해도 아직 둘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고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중)
-
명준이 이제는 굳게 믿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얼굴은 유동한다. 흐르는 물처럼 시간에 따라 조금씩 과거의 얼굴에서 미래의 얼굴로 바뀌어간다. 그렇게 우리의 얼굴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 덕분에 거기 희망이 생겨나는 것이라고그는 생각한다. 그게 예술이 하는 일이라고도. 배우는 표정으로 그 시간적 간극을 압축해 조명 아래에서 드러내 보인다. 현재의 얼굴에 과거를, 또 미래를 모두 담고서.
-
그녀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 아버지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그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인생에는 있는 법이다.(<엄마 없는 아이들>중)
-
다시 한번, 그 밤의 빛이 희진의 눈앞에서 출렁거렸다. 그렇다면 그건 아마도 언젠가 우리가 함께 나란히 서서 바라본 빛일지도 모르겠다. 마크 로스코의 빛이라면 말이다. 내 머릿속으로는 곧장 하얗게 핀 벚꽃잎들과 한없이 어두운 갈색의 사각형들이 떠올랐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3/0221/pimg_7921671143752951.jpeg)
일본 DIC가와무라기념미술관 ‘로스코의 방’ 시그램 벽화. 이미지 출처:https://m.blog.naver.com/miraebookjoa/220387043884
-
나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동안에도 나를 기억한 사람에 대해서 말이야. 그렇다면 그 기억은 나에게, 내 인생에,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중)
-
애써.
사전에는 ‘몸과 마음을 다하여 무엇을 이루려고 힘쓰다’라고 나와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무엇도 이룰 것이 없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다하지 않는 사이.
-
영원한 여름의 해변, 라일레이에서 지훈은 리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를 안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없었다. 영원한 여름에서 나누는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마음이 없어도 둘은 밤이나 낮이나 사랑할 수 있었다.
-
두번째 찾아갔을 때, 지훈은 리나가 현관의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가, 이윽고 다시 잠겼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하지만 지훈은 이제 리나가 비밀번호를 바꾸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렇다면 문이 열린다 해도 그비밀번호가 진짜 비밀번호가 될 수는 없었다.
옛날이야기, 모두 옛날이야기……
꽃이 지는 건 꽃철이 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이 끝나는 건, 이제 두 사람 중 누구도 용기를 내지 않기 때문에.(<사랑의 단상 2014> 중)
잃어버린 옛 사랑을 못 잊고 그리워하고 왜 잊지 못하고 찌질하게 구질구질하게 구니, 하는 사람에게 사랑이 어떻게 쉽게 없던 일이 되냐고 한 대 쥐어박는 느낌은 알겠는데, 이 소설의 저 부분, 문이 열린다 해도 그 비밀번호가 진짜 비밀번호가 될 수는 없었다.는 문장을 위해 마련된 저 장면은 아주 나쁘게 여겨졌다. 내가 사는 집에, 이제는 사랑이 아닌 사이에, 아니 뭐 그 누구라도 갑자기 도어락 열고 비밀번호 누르고 심지어 번호 맞아서 스르륵 열리고 다시 잠겼다, 로 그냥 한 번 열어만 보고 뒤돌아 갔으니 난 완전 나쁜 놈은 아님… 사랑이 깊으면 그럴 수도 있다고 눙치기에는 이거 시점 바꾸면 진짜 범죄 호러물 아닌가 싶었다. 애틋한 마음 가지려다가도 독자에게 초를 치는 장면이었다. 허락된 공간 외에는 비밀번호 알고 있다고 막 열어보고 그러는 거 아닙니다… 누군가는 생존에 위협을 느낍니다… 라고 굳이 적어줘야 되는 거냐… 대부분이 좋은 소설집이었지만 저 부분은 큰 흠이었다, 티라고 부르기엔 큰 흠.
-
‘세상은 경이로워’라고 말하는 것과 ‘세상은 품에 안을 때 경이로워’라고 말하는 건 다르다. 세상은 품에 안을 때 경이롭다는 말은 경이로움이 내게 달린 문제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세상을 안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
그는 “빛으로 가득 찬 이 몸들보다 나은 곳이 있을까?”라고 썼다. 이 경이로운 문장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 나는 잘 알게 됐다. 직전의 시구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삶이라는 힘든 노동은/어두운 시간들로 가득하지 않아?”(작가의 말 중. 메리 올리버 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