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는 마음이 편했다. 크게 아픈 곳이 없고, 간호사들이 때마다 약을 주고 혈압과 산소포화도를 재고 갔다. 끼니마다 주는 밥을 거의 남기지 않고 먹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잘 때까지 드러눕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었는데, 병원 침대는 앉으면 불편하고 누우면 편했다. 그래서 누워서 뒹굴다 자다 휴대폰 만지다 반복했다. 가족들과 떨어져 여름캠프를 온 여섯 살 때의 기분이었다. 직업체험-병원에는 어떤 사람들이 일하고 있나요?편-을 보듯 수많은 사람들을 구경했다.
같은 병실에는 당뇨로 발가락도 상하고 거의 눈감고 계시고 코로 식사하시는 할머니와 보호자분(보호자 올 수 없는 병실인데 아주 심한 환자나 임종 근처인 분들은 상주허가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간호사에게 물과 약을 뿜고 밥 먹다 귀신같이 졸기도 하는 정신 상태가 온전치 않은 할머니, 정말 저렇게 늙으면 안 되겠다 싶게 간호사들에게 무례하고 밤중에도 사물함과 휴대전화로 소음을 내고 전화기는 절대 무음이 아니고 내내 시끄럽게 전화통화를 하던 또다른 할머니…(귀마개가 날 구했다) 어쩌면 저만큼 늙도록 살지 않는 게 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고 친구에게 메시지로 존엄사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뭔가 여기서는 내가 제일 어리고ㅋㅋㅋ 환자 같지 않은 느낌이었다.
폐색전증이 발병하면 팔에 이식한 피임제제를 유지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산부인과에 요청해서 제거하기로 했는데, 이게 너무 깊이 박혀 있어서 큰일이었다. 임플라논 하나 뽑으려고 분만수술방에 서울대 의대 교수님 세 분이나 오셔서 절절매는 건 재미있는 장면이었다. 거기 누워 있는게 내가 아니었다면 더 재미있었겠지만… 내 팔 헤집어지고 피가 솟는 게 수술방 조명 테두리에 비쳐서 구경하면서 흐어억 하고 ㅋㅋㅋ 그래도 포기 안 하고 책임감 있게 제거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감사… 짧고 잔잔한 입원기간 중 유혈 낭자하고 긴박한 장면은 이 정도였다. 발목인대 파열되었는데 무릎에 혈전은 왜 생기고 그게 왜 또 폐동맥에 들어가고 팔뚝의 임플라논은 어째서 빼야 하는가…ㅋㅋㅋㅋ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빈칸이다. 이 병 오기엔 젊은 나이이고 부상이 있었어도 오래 눕거나 깁스고정하지도 않아서 병증이 생길 요인도 딱히 안 보이고 검사 결과 씨티에서 폐색전증 발견된 거 말고는 혈액검사나 엑스레이나 심전도나 큰 이상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상 없다 소리는 안 하고 그냥 위험하다 또 실려오는 경우가 아주 많다 산책조차 하지 마라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어쨌거나 2박3일 동안 약 먹고 밥 먹다 퇴원하는 거 보면 중증질환 중에서도 경증인 모양이었다.
치료는 별 게 없다. 아침 저녁으로 항응고제를 두 번 먹는다. 그렇게 짧게는 세 달 길게는 평생 약 먹으면서 혈전을 안 생기게 하고 없어지길 기다리면서 몸 상태를 체크하는 것이다. 다 녹아서 약 끊기 전에 또 어디 막혀서 쓰러지지 않는 게 과제이다.
내 발로 응급실 들어가서 저기…숨이 좀 가쁘고 흉통도 있고 의원에서는 이런 걸 써줘서… 그렇게 발견되는 환자는 많지 않은 모양이다. 대부분 이미 큰 수술이나 질환으로 입원하다가 급성으로 병이 오면서 진료과목 바꿔서 실려오거나… 돌아가신 분 부검해보면 아 사인은 이것…하는 병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운이 좋다고…어제 진단서 끊는다고 잠시 들른 정형외과 선생님은 말했지. 저기…선생님이 진료의뢰서에 왼발 오른발만 안 바꿔줬어도 혈관외과 일주일은 더 빨리 가서 심부정맥혈전증에서 끝났을수도?ㅋㅋㅋ어쨌거나 부종보고 진단 가능한 의원을 비교적 정확히 찝어주신 건 감사…
이런데도 공부는 이제 아주 조금만 할까…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가 곁의 사람에게 하지 마, 소리를 들었다. 그제서야 나도 하지 마, 했다. 야 조금 있다 갑자기 픽 하고 쓰러질 수도 있다면, 그런데도 지금 그렇게 싫어하는 수학풀고 있을 거야? 네버…그냥 해야 할 거 같아서요…
병원이 휴양지 기분이던 이유를 찾았다. 집에서도 그렇게 휴가 기분으로 지내기로 했다. 헤헤.
오전에는 섹스앤더시티 리부트 시리즈 앤저스트라이크댓을 다 해치웠다. 추억에다가 피씨랑 엘지비티쁠러스 묻혔다고 엄청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나한테는 좋았다. 내가 첫화 보고 있을 때 큰아이가 저 할머니가 주인공인가요? 해서 풉 했다. 캐리 너 왜 할머니 됨 ㅋㅋㅋㅋ 캐리 남편 빅이 첫화에서 실내자전거 타다 쓰러져 죽는다.(해당 배우가 미투 지목됨...그래서 죽여버림) 심장마비로… 아 나도 다치기 직전에 실내자전거 샀단 말이다 ㅋㅋㅋ그리고 이제 저런 돌연사 장면이 남일 같지 않다… 내가 퇴원 전 담당의 선생님께 실내자전거 타도 되요?했더니 한숨을 팍 쉬셨다. ㅋㅋㅋㅋ 그리고 캐리가 다리 절뚝이다 고관절인지 허리인지 수술하고 물리치료 받는 거 보고 그것도 남일 같지 않다… 미란다가 나는 행복하지 않아! 더 원해! 이러고 울먹이다 체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도, 로즈가 나는 이제 록이야! 하는 장면도, 샬롯이 그걸 인정해주고 유대인 의식에 트랜스젠더 랍비를 부른 것도 그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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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보고 나면 책이나 실컷 보자, 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헥헥 하고 드러눕기를 반복하다 보니 의욕을 잃고 책은 한줄도 안 보고 휴대전화만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책이 왔다. 그러니까 퇴원한 날 중고책을 주문했지..ㅋㅋㅋㅋ
여섯 살 아이가 처음으로 책을 사달라고 했다. 유치원 도서관에서 로봇 테오 시리즈를 대출받아 왔는데 가장 궁금한 에피소드-소방수 로봇과 화산이 나오는 책만 없다고 너무 가지고 싶다고 했다. 아니 마침 그 책이 시리 허스트베트 소설책 담아놨던 우주점 광주상무점에 있네요?? 광주는 늘 나에게 찾던 책을 제공한다…
두 권으로는 배송료가 안 사라져서 마침 땡처리하는 천원 이천원대 오래된 소설책들도 담고, 원래는 5만원이었다는데 5천원에 내놓은 지도책도 샀다. 이만삼천원에 책 여섯 권이면 진짜 개이득 아닌가… 포기의 순간…어느 완벽한 2개국어 사용자의 죽음…제목 다 왜 이럼 ㅋㅋㅋ나는 완벽한 1개국어 사용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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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비관주의자이던 내가 입원하고 나서는 오히려 꽤나 낙관적으로 굴었다. 일단 사망률 높은 병인데 아직 안 죽었고 실려가지 않고 병원에 걸어 가서 적절한 조치를 받았다. 죽더라도 막 시한부로 기간 정해놓고 엄청 아프면서 서서히 죽는 게 아니라 벼락치듯 슉, 나는 내가 죽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어서 다행이다. 물론 계속 운이 좋으면 약으로 다 녹이고 더 운이 좋으면 평생 약 먹지 않고 몇 개월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러다 책꽂이를 올려보고는 조금 울었다. 내가 모아 놓은 책, 만 권도 안 되는데 남은 평생 읽으면 그래도 반은 읽겠지, 했었다. 그런데 그거보다 덜 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조금 서러웠다. 그러면…있는 거나 잘 읽지 왜 또 책을 더 늘리니 나새끼야…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