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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20230717 앤드루 포터. 재독.
담임 선생님이 그렇게 오열하는 모습은 그 전에도, 후에도 본 적이 없다. 내가 휴직하기 전 마지막 학기에는 한 번 그랬다. 담임반은 아니던 아이들에게 욕을 하고, 화를 내다가, 교탁 앞에 서서 한참 미친놈처럼 줄줄 흐느껴 울었다. 나는 그렇게 내 첫 직업과 이별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도망 망해서 아무래도 다시 끌려갈 듯…
아무튼, 담임은 어느 날의 받아쓰기 10번 문제에 자기 이름을 불러주고, 담임의 이름을 발음할 수는 있었지만 미처 써 보지는 않았던 나는 례와 레 사이에서 엄청 갈등하다가, 역시나 리에-하는 발음은 내가 내본 적 없다 결론을 내리고 지우개를 들어 획 하나를 지우면서 레몬의 레를 선택하고 만다. 담임 선생님은 기다란 몽둥이로 그어진 개수만큼 손바닥을 쳤고, 겨우 한 대를 잘못 맞은 내 손바닥 맨아랫부분은 한동안 부어 있었다. 짝꿍은 뼈맞았네, 하고 자기가 맞춘 문제를 틀린 내 시험지를 넘겨다 보며 실실 웃었다.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단어로 기습한 담임이 부조리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십 몇년 뒤 자연지리학 중간고사 시험지의 교수님 성함 적는 란에, 끝자를 욱이 아닌 석으로 쓰고 비마이너스를 맞고 보니, 국민학교 1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은 스승의 존함을 틀리면 어디서든 아주 주옥된다는 교훈을 일찍이 심어주시려 했던 것 같다. 미천한 나는 미처 깨닫지 못해 먼훗날 그 미진함의 대가를 낮은 학점으로 치러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가르침에도 매질에도 열심이던 선생님이 손수건을 부여잡고 쓰러질 듯 흐느적이며 흐느끼며 교실에 들어섰을 때, 아이들은 떠들기를 멈추고 선생님의 울음 사이에 섞인 이름을 가만가만 감별해내고 있었다. 흐어헝 석순이가 죽었대애 허어어으어응- 아이들의 눈은 교실의 빈 자리로 쏠렸을 것이고, 그 자리의 주인이 다시는 학교에 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막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향년 8세.
석순이는 내 바로 뒤에 앉은 민희의 짝꿍이었고, 선생님이 교과서를 읽어 보라고 하면 어버버 했던 걸 보면 그렇게 똑똑하지는 않았지만 거칠지도 않았다. 옆 짝꿍 성식이 새끼가 제가 가져온 채변봉투 겉냄새를 맡다 내게 디밀기도 하고, 책상에 금을 그어두고 넘어간 지우개를 빼앗거나 여차하면 주먹질을 했던 것에 비하면, 석순이는 애들한테 못되게 굴지 않았다. 오히려, 연필 낙서를 해도 지우개로 잘 지워지고 노트 뒤에 받치면 글씨가 매끈하게 잘 써지는 책받침 하나를 내게 주기도 했다. 딱히 친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상호작용이 있던 아이를 다시 볼 수 없다니, 많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학예회에서 독창을 맡게 되어서 음악 전공한 옆옆반 선생님이 나를 방과후에 남겨두고 노래 연습을 시키곤 했다. 그렇게 남던 날 중 하루는 선생님들의 휴식 시간이었는지 교사 휴게실에 사과를 까놓고 장판 위에 둘러 앉은 자리에 나도 끼어 앉아 사과를 먹었다. 다니던 교회 버스에 치었대요. 동생 하나 있다던데. 고개를 수그리고 사과를 꼭꼭 씹어 먹는 척하면서도 귀를 세우고 선생님들이 나누는 그 이야기가 석순이에 대한 것임을 알아 듣고 있었다. 아이 장례가 끝난 무렵 담임 선생님은 석순이 어머니가 주시는 것이라며 아이들에게 공책 한 권 씩을 돌렸다. 석순이는 더는 함께 있지 못하게 되었지만 너희들이 그 몫까지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는 교훈 한 마디도 잊지 않고 전하셨다.
‘구멍’이라는 소설에서 화자의 어린 날 친구였던 탈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이상하게도 30년도 더 전에 죽은 반 아이가 생각났다. 나는 여섯 살 때 유아원에 다녀오다 갈림길에서 헤어진 친구가 가방 옆구리에 허술하게 꽂아둔 유치원에서 나눠준 안내문을 바닥에 휘날리고 가는 걸 보았다. 그걸 주워주겠다고 달려가다 바닥에 철푸덕 넘어졌다. 넘어져 있는 위로 자동차가 달려와서 나는 그대로 차 밑에 깔렸다. 웬일인지 차는 나를 밑에 놓은 채 멈췄고, 나는 차 밑에서 나가보려고 발버둥이를 쳤는데, 펼쳐진 옷자락이 바퀴에 깔려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마침 그 앞에 있던 아주머니 상회(청과물 가게)주인이 운전자에게 신호를 줘서 차는 천천히 뒤로 후진을 했고, 이제 운신이 된다 싶은 나는 벌떡 일어나서 까맣게 멀어지는 친구 뒤를 쫓아가며 떨어진 안내문을 줍고, 다시 그 친구를 따라잡아 손에다가 안내문을 쥐어주고, 그러고는 돌아서서 터덜터덜 집에 갔다. 겉옷에 온통 바퀴자국을 찍고 온 나를 본 엄마가 몸 이곳저곳을 살피고는 혼비백산해서 아주머니 상회에 달려가 목격담을 듣고 왔다. 내 기억의 많은 부분은 그러니까 엄마의 2차 가공물일 수도 있다. 내 몸집이 차 밑에 다 차지 않을 만큼 작지 않았다면, 차 바퀴가 경로를 조금 더 옆으로 잡아 나를 밟고 지나갔다면, 그날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굳이 기억해 낼 사람도, 기억해서 여기에 적어 둘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석순이는 나보다 운이 나빴다. 그렇지만 내 머리에 그런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 그게 조금은 운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일단 써 놓았다.
그리고 나는 이 소설집 다시 읽을 거라고, 사고 싶어하는 이웃에게 일단 홀드, 했었다. 워…한 편 두 편 읽을 수록 아니야, 당장 사, 내가 이 소설집을 얼마나 좋게 읽었었는지 금세 알았다. 벌써 4년이나 지났다니. 다른 이웃도 이 소설 기억 하나도 안 나는데 하여간에 좋았다고 했던 그런 기억만 남고, 나도 이야기 흔적은 어렴풋한데 막상 다시 읽으니 진짜 좋다. 진짜 잘 썼다.
그때 내가 읽은 건 전자책이었고, 뒤에 편집인 중에 김봉곤 있다고 좋아했던 기억도 난다. 빌려 읽고 좋아서 바로 중고책으로 하나 샀는데, 문학동네에서 나온 새 책이 아니라 그보다 10년은 더 먼저 21세기북스에서 나온 판을 구했다. 번역자도 같은데 책이 더 싸서?ㅋㅋㅋ 막상 받으니 책 상태는 세월 탄 흔적이 남아 추레해 보여서 조금 실망했었다. 결국 사 놓고 4년은 더 묵혀 더 추레해질 것이었지만...ㅋㅋㅋ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3/0717/pimg_7921671143937658.jpeg)
와 표지...겉커버 디자인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함 가득...우산쓰고 걸어가는 하이힐 신은 종아리에 초점 맞춰 있다. 이 사진 불법촬영 아닌지 걱정도 되고, 그런데 비 오는 날...개를 산책 시키러 나온 것인가...개는 비 맞고 가로등에 오줌 누고 있다. 그런데 책등에는 개랑 개목줄은 생략하고 우산 쓴 여자만 누끼 따서 척 얹어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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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3/0717/pimg_7921671143937662.jpeg)
겉커버 매우 귀찮아 하는 편이라 휙 벗기니, 의외의 민트색...이거 색은 안 나쁜데 이 책이랑 어울리냐 하면 글쎄…
단단한 하드커버 휙 펼치면 또 의외의 베이비 핑크 ㅋㅋㅋㅋㅋ 아… 아아….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3/0717/pimg_7921671143937661.jpeg)
그런데 겉표지에 소개된 북커버 디자이너는 검색해보니 의외로 네임드였다. 모방범 표지도 28 표지도 이분 작품… 죽 둘러보니 디자이너 분 문학동네에서 오래 일하시고 나름 히트친 책들 표지 디자인 많이 하신 것 같은데 나랑 미감은 아주 많이 맞지 않다는 것을 모든 책 표지에서 느꼈다… ㅋㅋㅋㅋ
21세기북스는 이렇게 오묘한 책 디자인으로 별로 많이 팔지 못하고 절판 했나 본데, (나는 출판사가 망한 줄 알았음 아직도 있음 마법천자문으로 떼돈 범) 몇 년 후에 판권을 문학동네가 사서 내가 읽을 무렵 다시 출판한 모양이었다.
뭐 그런저런 것도 이번에 다시 읽으며 알게 된 사실...그래서 지난 번에 읽으면서 비문 있다고 투덜댔던 ‘코네티컷’의 문장도 궁금해서 구판에서 다시 찾아보니, 조사만 조금 다른데, 바꾸기 전 문장이 조금 더 나은 것 같지만 그거나 개정판이나 역시 이상했다… 그거 하나 빼곤 그냥 문장도 다 좋음…했지만 한 군데 좀 더 읽기 까끄러운 페이지 나옴…(자세한 건 아래 발췌 참고 ㅋㅋㅋ)
4년 만에 읽은 소설집은 내 멱살을 잡고 자기 무릎에 나를 앉혀 놓고 자꾸만 자꾸만 물었다. ‘좋지? 소설 좋지? 근데 왜 자꾸 도망가?‘ 나는 특히나 이 소설이 좋네, 이 책 다 좋네, 하고 답할 수 밖에 없었다. 목덜미에 소름 돋고 가슴 쥐어뜯듯 떨리듯 좋은데 그렇게 소설 좋아하는 놈이 자꾸 소설 피하면서 ‘원소의 이름’ 이런 걸 먼저 읽고 있었다. ㅋㅋㅋㅋ
이 책을 읽기 전에 한낮의 우울을 우울의 우물로 맘대로 고치며 우물우물 거리는데, 옮긴 이의 말에 고통의 우물은 깊어진다, 이런 문장이 나왔다. 뭐 그렇다고...그렇게 하나도 안 비슷해 보여도 책들은 어찌어찌 이어진다.
장마철이라 머리가 너무 말리고 뻗쳐서 초사이어인이나 피구왕 통키가 자꾸 생각났다. 커트한 지 한 달 만에(예전엔 미용실 일년에 한 두 번 감…) 미용실 가서 옆머리 팍 쳐 달라 했더니 미용사님 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너무 과감했다. 순식간이었다. 거울보니까 아 저 머리 나 아는 머린데...진, 진중권!!!! 안경 쓴 거 보니까 진중권이잖아… 나는 내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나보다 이십살은 더 많은 진중권이 되었다… 집에 미학오디세이 내가 안 샀는데 있긴 있는데 안 봤다...근데 내가 진중권 본 게 한 권 있긴 한데 그것은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나는 어떻게 몰락하는가...열심히 독후감에 남기고 있잖어...길다 오늘 잡소리가 너무 길다.
+밑줄 긋기
-콜린은 그즈음 이미 본과 입학이 확정되어 있었고, 나는 5월이면 그와 함께 볼티모어로 간다는 데 이미 동의를 한 터였다. 곧이어 여름이면 우리는 결혼을 하게 될 터였다...콜린은 총명했고 야심찼으며, 나는 그가 훌륭한 의사가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내게는 무슨일이든지 내가 선택한 일을 할 수 있는 자유 시간이 생길 터였다. 나는 일을 해도 됐고 하지 않아도 됐다. 나는 분자물리학 관련 서적을 읽고 아무도 알지 못할 이론들을 만들면서 나의 나날들을 보낼 수도 있었다. 나는 그때에도 콜린이 내게 거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러다 보니 나도 나 자신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120, 특별히 좋아서 그은 게 아니라, 한 페이지 안에 ‘-터였다.’ 3개나 나와서 ㅋㅋㅋㅋㅋ 은오님이 이 책을 읽는다면 이 페이지 읽으면서 몹시 거슬려할 것이 걱정된 터였다.ㅋㅋㅋㅋㅋㅋ)
-다른 사람이 당신을 채워줄 수 있다거나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이 두 가지가 사실상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추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나는 콜린과의 관계에서 그런 식의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다만 그가 나의 일부, 나의 중요한 일부를 채워주고 있고, 로버트 역시 똑같이 중요한 나의 또 다른 일부를 채워주었다고 믿을 뿐이다. 로버트가 채워준 나의 일부는, 내가 생각하기론, 지금도 콜린은 그 존재를 모르는 부분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쉽게 파괴도 할 수 있는 나의 일부다. 그것은 닫힌 문 뒤에 있을 때, 어두운 침실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제일 편안하게 느끼는, 유일한 진실은 우리가 서로 숨기는 비밀에 있다고 믿는 나의 일부다. 로버트는 거의 10년 동안 내가 콜린에게 숨긴 비밀이다. 가끔은 그에게 말을 할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기를 10년이 되었고, 그동안 우리는 유산, 파산지경, 그리고 시부모님의 죽음을 지나왔다. 이제 나는 우리가 함께 헤쳐나갈 수 없는 일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내가 두려운 것은 그의 반응이 아니다. 나는 그를 잘 알고 있다. 내가 아는 그는 그 사실을 내면화하여 속으로만 삭일 것이다. 그 때문에 나를 미워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내색은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도 그는 아마도 내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을테고, 내게서 로버트에 대한 감정을 듣는다고 해도 내게 상처주지 않을 방법만 생각할 사람이다. 나는 그것을 안다.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들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그것은 다만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 뿐이다. 하여 나는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내게 그러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127-129)
+4년 전 독서 흔적
https://blog.aladin.co.kr/lunanuna/11110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