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성매매, 상식의 블랙홀
신박진영 지음 / 봄알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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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2 신박진영.

중학생 때, 학교 애들 중에 가출했다 돌아온 여자 아이들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수군댔다. 티켓다방 다니다 잡혀왔대. 창녀촌에 있었대. 그 조용한 말에는 오염된 존재, 우리와는 달라진 누군가를 멀리 밀어내는 힘 같은 게 실려 있었다. 아빠의 욕설과 폭력, 기물파손, 엄마와 동생을 학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늘 집을 뛰쳐나가고 싶게 만들었다. 그러나 돌아온, 혹은 돌아오지 못한 여자 아이들에 관한 소문은 가출 욕구를 참게 만들 만큼 강력했다. 나가봤자 갈 수 있는 곳은 그런 곳뿐이라는 체념.

아빠는 내가 수능을 앞둔 나흘 밤 연속으로 만취해서 장롱을 발로 차 부수고, 욕하고 소리지르고, 엄마를 죽이겠다고 목을 조르고, 텔레비전을 최대 볼륨으로 틀어놓고, 광란에 가까운 발작을 일으켰다. 이상하게도 내가 고입 연합고사를 앞두거나, 대학 졸업 후 취업을 위한 시험을 준비할 때처럼 중요한 일이 코앞으로 다가오면 무슨 방해 공작을 펼치듯 저런 짓을 하는 사람이었다. 폭력의 직접적인 피해자였던 엄마는 오히려 며칠 잠을 제대로 못자서 몽롱한데다 극도의 불안 상태인 나를 달래며 수능날 아침밥과 도시락을 챙겨주고, 안정에 좋다는 대추차가 담긴 보온병까지 들려주었다. 전날 술 마신 아빠는 아침까지 자고 있었고, 삼촌이 차로 한 시간 거리의 시험장에 태워다 주었다.
안정에 좋다는 대추차를 시험 시작 전 목을 축이기 위해 한 모금 마셨고, 불행이 시작되었다. 2교시 수리 영역 100분, 3교시 탐구 영역 120분 내내 배가 터질 것 같은 요의를 느꼈다. 그때는 시험 중 화장실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오줌 쌀 것 같아서 머리를 쥐어뜯고 나중에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문제를 억지로 풀었다. 제2외국어까지 다 마치고 시험장 나서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지원할 수 있는 대학이 몇 단계 낮아졌다는 강력한 예감이 들었고, 저녁에 가채점을 해보니 실제로 평소 모의고사보다 20점 정도 하락한 점수였다. 아 대추차...이후로도 쳐다보지도 않는 대추차…
반전은 그 해 수능이 미친 난이도라 다른 애들은 5-60점씩 마구 떨어졌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내 점수는 평소대로 유지된 거나 다름없었고 남들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대학에 다 붙어버려서 그 중에 하나를 골라서 갔다.

학교 이름 덕에 과외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쉬웠다. 그렇다고 떼돈 번 수준은 아니고 (첫 달은 중개소에서 수수료로 가져가고 쉽게 잘려서 안정된 소득도 아닌…) 두 개쯤 하면 60만원으로 월세 내고 간신히 생활비와 용돈 쓰는 정도였다. 덕분에 스무살 내내 가출의 연속이었다. 아빠가 때리거나 엄마를 못살게 굴면 며칠씩 집을 나왔다. 돈도 있고, 불쌍해하며 재워주는 자취하는 선배들도 있었다. 아예 엄마를 데리고 탈출 시도한 적도 몇 번 있었는데, 궁핍한 상황에 엄마는 결국 울면서 다시 집에 돌아가곤 했다.(완전한 탈출과 이혼은 내가 대학을 졸업한 뒤 마지막 가출로 겨우 이루어졌다.) 대학 입학부터 졸업 후 취업할 때까지 과외 말고는 다른 아르바이트나 소득활동을 해 본 적이 없다. 당시 최저시급에 비해 과외로 벌 수 있는 시간당 소득은 3-5배나 높았다. 일주일에 8시간만 아이들을 가르치면 저축까지는 몰라도 생존은 가능했고 공부와 동아리활동도 어렵지만 지속 가능했다. 운이 좋았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항상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 보는 버릇이 있어서, 만약 그때 시험을 망쳐서 과외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힘든 대학을 나왔다면, 대학을 나왔는데도 결국 취업에 실패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상상해 본다. 숨만 쉬어도 돈이 드는데. 나와 엄마는 아직 아빠랑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빠가 뱉던 욕설대로 정말 우리를 죽일 것 같다 싶어 결국 뛰쳐나왔을 것 같긴 한데, 그러면 뭘 해서 먹고 살았을까. 마지막으로 집을 나왔을 때 나는 취업 준비 중이었고, 엄마는 동네 고깃집이라도 취업해보려고 면접을 봤는데 너무 연약해 보인다고 거절당했다. 지역 여성인력개발센터에 가서 교육을 받고 중개소를 거쳐 아기돌보는 일을 하게 되셨다. 내가 아기를 낳을 때까지 4년 간 베이비시터일을 계속 하셨다.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단신에다 체구가 작고 쨈병뚜껑 같은 거 돌려서 여는 것도 잘 못할 만큼 힘이 약하다. (학교 다닐 때 체육을 제일 못했다.) 육체 활동에 취약하니 가사도우미나 아기 돌보는 일은 겨우 가능했을까.

이런저런 밥벌이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생각으로 헤매다가 가장 끝에는 이런 걸 선택이라고 해도 될까 싶은 무서운 경우에 다다르기도 했다. 육체 노동이든 사무직 노동이든 내 다른 노동력을 사 주는 곳이 없다면 결국에는 성을 파는 일까지 고려하게 될 것이라는 가정. 성이라는 게 사고 파는 대상이 되는 현실을 보여준 건 대중매체의 선정적인 탐사보도나 사건사고를 다룬 기사, 임권택의 ‘노는 계집 창’이나 김기덕의 ‘나쁜 남자’, ‘사마리아’ 같은 끔찍한 영화들, 김성모가 성매매집결지를 소재로 그린 수많은 만화 시리즈물 같은 콘텐츠들이었다. 실제로 주변에서 성매매 경험을 들은 건 친했던 대학 동기가 군대 시절 오피스텔 성매매를 몇 번 했었다고 해서 놀랐던 일이 유일하다.

이 책의 저자 신박진영은 이십 년 가까이 반성매매 운동을 하며 현장에서 성매매 피해자 여성이 겪는 어려움을 접하고 그들의 탈출과 성매매방지법 제정 등을 위해 활동해 온 사람이다. 거기에 여성학 연구까지 더해져 이 책은 한국 성매매의 역사부터, 국가의 묵인을 넘어선 성매매의 육성, 촘촘하게 계획되고 짜여지는 경제적 착취와 권력과의 유착과 계급 간 갈등과 성차별과 성 착취 같은 구조적 문제, 현실의 성매매 여성이 겪은 흔한 참혹한 사례들, 성매매를 합법화한 독일과 아예 비범죄 자유화한 뉴질랜드의 실패, 노르딕 모델로 불리는 스웨덴의 성구매 불법화 사례와 같은 정책으로 나아가자는 주장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전까지는 성인 간의 자율적인 거래까지 막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성적 동의와 합의는 거기에 자본과 경제적 논리가 들어서는 순간 가능하지 않은 일이 되어버리고, 모든 노동이 착취의 가능성이 있지만 특히 성의 영역은 노동으로 포함시키거나 합법화하거나 자유화하는 순간 벌어지게 되는 착취의 악순환과 인권침해가 더욱 심각하다는 것을 책의 사례와 논리를 따라가다보니 납득하게 되었다. 몇 년 전에 마이클 센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었는데 성을 명시적으로 거래 대상으로 놓는 일의 위험과 문제는 그 책에서 확인했던 품위와 가치, 강압과 불공정성과, 부패와 타락을 경계하는 일까지 연결되어 보였다.

생존을 걱정하지 않고 노동의 대가가 제대로 보장되는 사회, 성을 판매와 구매 대상으로 고려할 수 없는 세상(오늘 날 인신매매와 노예제가 용납되지 않듯이)이 오면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 것이다. 내가 곤궁해지는 날이 와도 최악의 수치심과 모멸감을 감수하며 먹고 살 생각을 품지 않아도 되고, 영화나 만화 속에서 여성의 몸과 마음과 삶이 갈가리 찢겨 뜯어 먹히는 걸 보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려면, 그런 세상이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나 성의 구매와 판매가 어쩔 수 없는 것, 당연한 것이라는 편견을 없애는 일부터 시작일 것 같다.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당사자-되기를 선택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문제제기와 주장을 듣는 게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서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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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1-01-22 11: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검색해보니 2012년이네요) 변영주 감독의 영화 ‘화차‘ 를 보았어요^^
그때 그 내용이 너무 끔찍해 며칠간 힘들었거든요~~
그 힘든 이유중에
저한테 딸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것이었을 거예요^^
내가 여차해서 경계밖으로 밀려나면 나의 딸아이가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힘들었고 그렇게 만드는 사회가 너무 싫었어요**
반유행님의 글이 너무 그때 제 생각과 똑같아 많이 공감했습니다^^
글의 마지막 단락이 제가 항상 품고 있는 유토피아예요^^
근데 ㅠㅠ ㅡ이 표시가 절로**

페넬로페 2021-01-22 11:33   좋아요 4 | URL
아! 체구 작고 체력 약한 저와 딸아이^^
이것도 격하게 공감**

반유행열반인 2021-01-22 11:34   좋아요 3 | URL
저는 영화 화차는 아직 보지 못했는데 궁금해서 원작소설은 한 권 갖춰 두었습니다. 부족한 생각과 글에 공감해주시고 더 나은 세상에 대해 함께 꿈꿔주셔서 감사해요. 진짜 책 읽다 알게되는 여성들 이야기 죽음 이야기 들으면 저절로 ㅠㅠ

반유행열반인 2021-01-22 11:37   좋아요 4 | URL
작고 약한 사람도 경계 밖으로 내몰리거나 소모되어 일찍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사회가 진보된 거겠죠. 그런 의미에서 제가 밥벌이 하고 사는 건 과거보다는 나아진 것도 같지만 아직도 불쌍하게 죽는 여자랑 아이들 있는 (많은) 거 보면 갈 길 멀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나 2021-01-22 13:1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릴 때 아르바이트라고는 과외만 해본 사람이었다가, 가게하면서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게 됐는데 그 중에서 친해진 언니가 하나 있었어요. 끝내 사적인 관계로까지 발전되지는 못했지만, ˝그런 일 할 사람이 아닌데˝라고 엄마가 말씀하실 때마다 생각이 멈추게 됩니다. 그런 일 할 사람은 따로 있는 건가. 언젠가 어떤 책에서 ˝우리 중 누구도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드물었다.˝라는 구절을 보고 한참을 잊을 수 없었는데, 생각이 많이 필요한 주제 같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지나와서 여기 도착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1-22 13:54   좋아요 2 | URL
저는 부모님 가게 하는 거만 봤지 직접 장사를 해 본 적은 없는데도 자영업이 절대 쉬운 일 아닌 걸 알겠던데 하나님도 대단하심ㅋㅋㅋ노동자도 어렵고 자영업도 어렵고 대체 먹고 사는 건 왜 어렵냐!!! ㅋㅋㅋ 마지막 문장 왜 눈물 찡하냐 ㅋㅋㅋ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맙고 도착한 곳에서 환대해주셔서 또 고맙습니다 ㅋㅋㅋㅋ

2021-01-23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3 1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3 1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4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4 1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eBook] 2020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김금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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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0 김금희, 은희경, 권여선, 정한아, 최은미, 기준영.

김승옥 문학상 수상작품집은 처음 읽었다. 문학상에 관해 궁금해서 찾아보니, 2013년에 첫 시작해서 몇 년 하다 돈 없어서 중단했다가, 문학동네에서 다시 시상한지 이 년 쯤 되었다고 했다.
내가 굳이 소설 비슷한 걸 쓰기로 마음을 먹고, 그 결과 쓰여진 소설에서 조금 옛날 냄새랑 인간에 대한 환멸 같은 게 느껴진다면, 거기에는 김승옥이 기여한 바가 있을 것이다. 김승옥의 소설을 읽은 중학생 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그 때 쓴 건 독후감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로부터 20년 뒤에는 단편소설을 흉내낸 뭔가를 끄적이게 되었다.

작년도 수상집을 읽게 된 건 역시나 김금희가 대상을 타서겠지. 제목도 범상치 않았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래. 막상 읽은 소감은 김금희네, 그런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금희는 왠지 몇 년 전에 지나간 것 같다. 그러니까 양희와 국화와 경애와 매기까지, 그 다음은 조금 아리송해지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좋아요. 그냥 페퍼로니를 안 좋아해서 그럴 수도 있다. 소설은 좋았다.

은희경 소설은 놀랍게도 처음 읽는다. 집에 예전 소설집 수상작품집 등등 엄마가 그러모아 둔 책 꽤 많은데 읽은 게 하나도 없어. 나 대신 뉴욕 친구집에 승아를 보내놓고 민영이랑 티격태격 하게 만들어 놨는데, 음, 아직 젊은 감각이랄까 소설에 나이가 묻어 있지 않은 게 좋았다. 두 사람이 상대방의 입장을 모르고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각자의 하루를 요일 따라 보여주는데, 그게 현실에서 잘 못하는 일이니까, 이 시점 요 시점 쟤의 입장에서 보는 일은 다들 잘 못하고 하기 쉽지 않은 일이라 소설이 대신해 주니 좋았다.

음, 그런데 나이 묻은 권여선의 소설은 또 그것 대로 좋았다. 나이 먹어야 쓸 수 있는 글을 자꾸 생각하게 된다. 나이 먹어도 계속 쓰는 일의 대단함도 새삼 느낀다. 이 소설 읽고 잔 날 꿈을 꿨다. 엄마는 살아계신데, 며칠 후 돌아가실 거라고 딱 날짜도 정해져 있었다. 금요일이 장례시작, 월요일에 발인, 그런데 난 두 날짜 중 하루 약속이 잡혀 한 날짜에만 거기 갈 수 있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 와… 하여간에 둘 중 한 날 온다 그러고 돌아서다가 다시 엄마를 못 본다는 생각을 하니 막 너무 슬퍼져서 엄마, 하고 부르며 가던 길을 돌아 엄마에게 다시 갔다. 난 뭔 꿈을 꿔도 패륜왕이야...그런데 누군가를 잃을 예정이라는 감정은 정말 생생하게 서러웠다. 어릴 때 딸을 두고 집 나온 엄마가 다 자란 딸과 여행을 가는 장면이 다정해 보이면서도 심란했다. 상실이라든가 아이와 멀어지는 이야기는 같이 묶인 다른 소설들에서도 반복해서 등장했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너무 잠이 안 와서 이렇게 저렇게 뒤척이다 결국 휴대전화를 꺼내들고 바탕은 검게 글자는 희게 해서 정한아의 소설을 한 편 읽고 잤다. 정한아 소설도 처음 읽었다. 나는 온통 처음이지. 건물주의 딸, 하면 그럴싸하지만 그 나름의 고충이 있답니다...하는 소설이다. 설정만 보면 고까워할 사람도 있겠지만 소설을 직접 읽으면 나름 절박하다. 시원이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은 나도 막 알 것 같았다. 아이가 몇 달만에 수영장에 갔는데 그 한 시간 반 정도가 되게 무서웠다. 통학용 자동차도 차가운 수영장물도 수영강사도 하여간에 제발 아무도 아이를 해치지 말고 다시 나에게 온전히 돌려다오, 하는 마음이었는데 그런 날 밤 이 소설 읽으니 그런 마음이 다시 떠올랐다. 소설 제목이나 상징은 솔직히 좀 끼워 맞춘 거 같아서 별로였다. 낙원 예식장이 요양원이 되고, 딸아이가 엄마 싫다고 친아빠 있는 호주로 가기 전 캥거루 인형을 건네주고 가고, 예전에 두번째 남편하고 싸우고나서 바다에 갔다가 최라는 남자랑 만날래다가 못 만나고 내 인생 온통 망했고 303호도 304호도 301호도 노답이야...하는 이야기라서 제목이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인가 보다. 아 제목 너무 작위적이다.

최은미는 몇 년 전에 친구가 ‘눈으로 만든 사람’ 읽어보라 해서 찾아 읽고는 그때부터 젊은작가상 수상집을 챙겨보게 되었었다. 그 소설과 이 소설이 닿는 부분이 있는데, 너무 슬픈 지점이었다. 강원도, 하니까 ‘아홉 번째 파도’도 생각 나고. 미산도 척주도 가상의 지명 같지만 산그림자나 일찍 서늘해지는 저녁이나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게 막 생생하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지나간 일이지만, 전혀 아플 것도 없고 억울하기조차 하겠지만, 그 일이 한 사람의 인생이 내내 통과해야 하는 길고 긴 터널 같은 어둠이 될 수 있고 그것 때문에 자기를 자꾸 죽이고 싶어지고 자신을 싫어하게 될 수 있다는 걸, 모르니까 그런 짓들을 하겠지만. 하여간에 유정이 ‘내가 내게 나일 그때’를 단단한 마음으로 살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족같고 좆같다고 자꾸 욕하고 유태한테 야 유태야, 하고 뭐라고 하는 거 자꾸 거슬렸는데 막판에야 자꾸 그럴 수 밖에 없는 마음이 이해가 되었어...그래서 더 슬펐다. 족같으니까 족같다고 하지...

기준영 소설은 오래 전에 역시나 젊은작가상 수상집에서 한 편 읽었던 것 같은데, 그때보다 이 소설이 좋았다. 마지막에 털썩 들소 한 마리 던져주는 건 좀 뜬금 없었지만 그래도 괜찮은 소설이었다.
황정은 작가의 하고 싶은 말도 수상작이었다는데 작가의 요청으로 싣지 않았다고 했다. 이유가 궁금하지만 알 길이 없다. 연년세세는 전자책도 갖췄으니 언젠가 다시 읽고 싶다.

+밑줄 긋기
-너는 얼굴에 그늘이 하나도 없구나, 하는 것도 그에게서 처음으로 들어본 말이었다. 나처럼 가난한 애가 그럴 리가, 라고 답하면 그 가난 안 되겠네, 죽여야겠네, 하고 그가 말하는. 가난이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죽여요? 웃긴다, 하면 가난이 사람을 죽이니까 그 반대도 당연히 가능하지, 했던.

-나는 저 몸에 무엇이 찾아들면 강선이 되나, 하고 생각했다. 창호를 바른 문으로 어느 순간 들어선 빛에 아침이 시작되듯, 찬 공기에 콧속이 열리고 창공이 높아지면 불현듯 여름이 종료되듯 사람에게도 그가 사람이게 하는 시작점이 있을까.
(김금희,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중)

-사람들은 애써 진흙을 빚어 항아리를 만든다. 그러나 항아리가 만들어지면 실제로 쓰이는 것은 그 항아리가 품고 있는 빈 공간이다.(김화영의 리뷰 첫 머리. 도덕경의 은유를 인용한 것이라 한다.)


-엄마, 우리가 먹을 거 놓고 마음껏 싸우지도 못하게 된 건 뭐 땜에 그런 걸까?
음, 반희가 생각하다 말했다. 그것도 물고기랑 같은 이유겠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엄마, 나 사랑하지?
반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알아. 엄마 보면 날 사랑하는 거 맞아. 날 사랑해서 힘든 게 보여. 나도 엄마 사랑해. 그래서 힘들어. 근데 엄마, 내가 머리가 나빠서 잘 모르는 거야? 사랑하는 게 왜 좋고 기쁘지가 않아? 사랑해서 얻는 게 왜 이런 악몽이야? 사랑하지 않으면 이렇게 안 힘들어도 되는데, 미워하면 되는데, 왜 우린 사랑을 하고 있어? 왜 이따위 사랑을 하고 있냐고. 눈물도 안 나오고 숨도 못 쉬겠는, 왜 이런, 이런 사랑을 하냐고.
채운이 벌떡 일어나 가슴을 누르며 욕실로 뛰어들어갔다.

-차가 이쪽저쪽으로 기울고 심하게 쿨렁거렸지만 반희는 마치 땅콩 껍데기 속에서 구르는 땅콩처럼 아늑하고 편안했다. 딸이 운전하는 차라 아무 걱정 할 필요가 없었다.
(권여선, ‘실버들 천만사’ 중. 그러고 보니 소설 읽기 전에는 제목 뭐야...silver들의 오랜 역사인가...했는데 읽고 보니 엄청 예쁜 제목이었던 것이다. 끊지 말아요 천가닥이든 만가닥이든.)

-“누나는……”
말을 바로 잇지 못하고 유태가 숨을 골랐다.
“누나는 한 번이라도, 소설보다 먼저, 가족들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
“……”
“누나한테 누나 소설 말고, 다른 사람이 있어?”

-제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였어요.
몸안의 모든 수분, 모든 피를 빼내고, 모든 습기를 말리고, 비틀고, 보이지 않는 입자로 갈고 갈아서, 완전히 부수어서,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없애버리는 것. 몸을 없애는 것. 이 지긋지긋한 몸을 없애는 것. 이해받지 못하는 몸을 없애는 것. 유정이 오랫동안 원해온 것은 그것이었다.
(최은미, ‘내게 내가 나일 그때’ 중)

-또 한편으로는, 다행하고 무사한 길우와 내 미래를 본다. 운명에는 탄성이 있다. 어느 한때 우리는 마흔세 살쯤이고, 하루가 저무는 속도로 하루를 잃는 보통의 어른이다. 아이일 때보다 훨씬 많은 비밀을 품고 살지만, 비슷한 스타일의 외투 서너 벌 속에 스스로를 단정히 채워넣는 사람이다.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귀중하다는 표현과 나란히 붙여놓고 볼 수는 있으나 타인에게 쉽게 발설하지 않는 사람. 다만 우스워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진땀을 흘릴 만큼 힘을 들여야 하는 사람. 그리고 이 모든 연극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배역이 하나 더 있다고, 나는 그게 들소라고 느낀다. 지금 저만치서 그게 오고 있다고.
(기준영, ‘들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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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1-20 22: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꿈이 참 디테일 했네용. 저는 꿈에서 숫자라곤 예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로또번호를 알려주셨는데 기억력이 나빠서 그만..(진부한데 실화예요ㅋ)
떠오를때마다 맞았을지 걱정입니다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01-20 23:03   좋아요 5 | URL
저 연말에 엄청 좋다는 꿈 몇 개를 퍼레이드로 꿨는데 (임신하는 꿈 두 번, 미라 보는 꿈, 해몽 검색하면 다 무지 좋은 대박 꿈이라고 ㅋㅋㅋ) 로또를 안 사가지고 꿈 사르르 다 녹았어요 ㅋㅋㅋ그리고 지금 잘 지내고 있는 거 보면 다 좋은 꿈 맞았나 봅니다 ㅋㅋㅋ

하나 2021-01-20 23: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누군가를 잃을 예정이라는 감정은 정말 생생하게 서러웠다.˝
˝하여간에 제발 아무도 아이를 해치지 말고 다시 나에게 온전히 돌려다오.˝

김승옥 문학상 수상작 이야기 행간에 묻은 열반인님 이야기까지 합쳐져서 소설 한 편 읽은 기분이에요. 은희경 작가 소설엔 나이가 안 묻어나서 좋고, 권여선 작가 소설엔 나이가 묻어나서 좋다는 말씀 공감됩니당. 덕분에 요즘 한국소설 다시 조금씩 읽고 있어요. 저도 김승옥 당연히 좋아했고요. 어서오세요. 여기서부터 서울입니다. 이런 걸 어떻게 소설에 쓰지? 생각했던 게 생생하네영. 여기서부터 한밤중입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

반유행열반인 2021-01-20 23:08   좋아요 3 | URL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오늘을 떠나 편안한 잠의 세계로...안녕히 가세요 ㅋㅋㅋ

2021-01-21 0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1 07: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1 0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1 0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부만두 2021-01-21 07: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승옥의 소설을 읽은 중학생 때, ...에서
아, 어쩐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반유행열반인 2021-01-21 08:29   좋아요 2 | URL
이거는 뭔가 영광에다 터무니 없는ㅋㅋ도 섞어야 하지 않을까요!!!! 소설 읽는 사람 치고 김승옥 안 읽은 사람 없을 것 같아요 ㅋㅋㅋ더구나 수능 문학 영역 대비 단골이고ㅋㅋㅋ그 야한 걸 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01-21 11:25   좋아요 1 | URL
전 김승옥 읽었지만 아주 나중에 커서 읽었어요. 그때도 ‘아 어렵고 지루하네 이 아저씨‘ 했던 기억만 나요;;;;
아마도 제가 학력고사 세대라 그랬나요? (아님 아님 절대 아님. 전 그저 어려운 소설 무서워한 쫄보임)

반유행열반인 2021-01-21 11:46   좋아요 1 | URL
지금 읽어보시면 아이코 이십 삼십 대 벌거숭이가 이런 걸 쓰다니 ㅋㅋㅋ하고 무릎 탁 치실 수도 있어요 ㅋㅋㅋ

막시무스 2021-01-21 08: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작품집 좋아하고 특히 페퍼로니는 이해할 수 없는 묘한 매력때문에 잊혀지지 않네요!ㅎ 특히 페퍼로니가 뭐지?라는 의문과, 이야기중 박지원산문에 관한 수업내용에 대한 의문이 지적하신 김화영교수님의 도덕경 구절같은 매력일것 같은데 잘 모르겠더라구요! 덕분에 고속버스에서 혼자 즐건 리뷰 했습니다! 좋은 하루되십시요!ㅎ

반유행열반인 2021-01-21 09:33   좋아요 1 | URL
멀리 다녀오시나 보네요 ㅎㅎ 제가 후발(?)주자이지만 같은 책 늦게 나마 읽게 되어 즐겁네요. 추운 날씨에 안전하게 잘 다녀오세요!!! 아, 페퍼로니가 뭔지는 아마 김금희도 모를 거에요 ㅋㅋ그냥 다른 친구 말 집어오거나 막 던진 거에 한 표 ㅋㅋㅋ
 
밀실에서나 하는 철학
사드 지음, 정해수 옮김 / 민음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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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8 사드.

(산뜻한 월요일부터 불편함과 불쾌함을 감당하고 싶지 않은 분께서는 이 리뷰를 점프하셔도 좋습니다. 괜찮아요. 이해해요. 저도 이걸 왜 읽었니 나새끼야 싶거든요.)

알라딘에는 bl물이나 성애소설 같은 장르만 전문으로 리뷰하는 분들도 계셔서 이게 뭐라고, 싶지만 막상 쓰고 나면 별다른 센 내용도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사드라면 원전을 읽는 이든 원전의 내용을 인용하는 글을 보는 이든 각오가 필요하지 싶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영화나 도서에 청소년 관람불가, 19세 이상 관람가 같은 사전 심의를 거친 딱지를 붙이는 짓에 대해 강한 반발심을 가졌다. 과연 유해성이라는 걸 누가 판단하고 증명할 수 있는지, 그걸 법으로 막는 것이 가능한지 또한 옳은 건지 내내 의문이었다. 사실 비디오 가게에서 빨간 딱지 빌리려다 까인 게 불만이어서 그랬을 수도(…)
그런 마음은 영화 ‘볼링 포 콜롬바인’을 본 뒤 더욱 굳어졌다. 감독 마이클 무어는 콜롬바인의 두 남자 청소년이 케이마트에서 산 총알과 총을 들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난사하고 마지막에는 자신들을 죽이고 끝난 참혹한 사건을 카메라에 담았다. 언론은 소년들 방에서 발견된 마릴린 맨슨, 람슈타인 같은 음반을 지목하며 이게 문제네, 했고 마이클 무어는 응 아니야, 아무데서나 총 살 수 있고 무기로 먹고 살며 수시로 전쟁을 벌이고 흑인에게 총을 쏘는 이 나라가 문제야, 했다. 감독은 마릴린 맨슨 인터뷰도 영화에 담았는데, 십대부터 맨슨을 좋아했던 나는 신나서 그 부분에 집중했다. 외향만 무시무시하게 치장하고 가사만 센 척할 뿐, 무대 아래 맨슨은 멀쩡하게, 똑똑하게 말을 엄청 잘 해서 재미있었다.

그때부터는 아니지만, 하여간 가장 무섭고 끔찍하다는 영화는 다 찾아보고 다닌 때가 있었다. 아마도 십 년 전쯤이었고, 악마를 보았다 같은 걸 극장에서 두 번 보고 집에서 또 다운 받아 보고, 그때 살로, 소돔 120일도 보았다. 그저 사람의 상상력이란 어디까지 가는 것일까, 그 상상력을 어떻게 구체화하는가 하는 흥미로 보았다. 아주 우울한 시절이긴 했는데 우울이 먼저이고 무서운 영화는 다음이었다. 그때 본 영화 중 ‘세르비안 필름’이야말로 손꼽히게 끔찍하고 강렬한 영화였다. 그런데도 늘 결론은 현실보다 끔찍한 픽션은 없다는 쪽으로 기울고 만다. (뉴스를 보면 아시겠죠…)

사드를 처음 읽은 건 2013년이다. 우연히 ‘소돔 120일’이란 책이 19세 미만 관람불가 딱지가 붙은 채로, 출판 금지였던 게 아주 오랜만에 풀려나왔다, 하는 보도를 접하고 전에 본 영화의 원작은 어땠을까 싶어(영화 본 뒤 원작 소설 보는 걸 좋아한다) 사 보았다. 그땐 알라딘을 안 할 때라 페북이랑 일기장에 감상을 남겨 놨네...https://m.blog.naver.com/natf/221297784892
왠지 고도의 책 홍보에 낚인 것 같고, 책의 유해성을 논하려면 이 책 읽은 나를 장기 추적 관찰하라고 써 놓았는데, 아직 아무도 죽이거나 고문하거나 똥을 먹거나 강제추행(?)같은 건 하지 않았으니 여러분, 책이나 영화를 너무 과대평가하지 마세요. 뭘 읽거나 본다고 사람 안 바뀐대요. 다만 이상한 인간이 이상한 걸 읽고 못된 짓을 해서 인과관계를 혼동할 수는 있겠지만…

‘밀실에서나 하는 철학’은 두 번째 읽은 사드책이다. 일부러 찾아본 건 아니고 어떤 중고책 판매자가 책 9권을 3만원도 안 되게 팔아서 어쩌다보니 갖춘 책인데 갑자기 생각나서 연말부터 읽다가 새해 맞이로 다 보았다.(...잔혹한 연초여…) 이새끼는 이렇게 추잡하고 시간 빼앗을 책을 벽돌처럼 써 놨어… 두 권 다 비슷한 감상이다. ㅋㅋㅋㅋ
사드는 책을 아주 많이 읽었다고 한다. 책이 이렇게나 위험합니다… 아까 한 말이랑 모순되긴 한데, 사드의 책에 담긴 주장들 자체가 앞에서 한 말이랑 마구 모순되고 상충된다. 읽다보면 이 사람은 정말 철저하게 기존의 가치와 통념과 도덕을 전복하고 뭉개고 싶은 것인가, 아님 역설적 표현으로 철저하게 자기 생각과 반대로 표현한 것인가, 하다가 살면서 겪은 굴곡이나 가정사나 투옥 경험이나 기이한 성벽 같은 걸 보면 그냥 애초에 미친놈이라 자기가 한 짓 때문에 불운하게 살다간 놈인가 싶기도 했다.
계몽주의 시대에 니들이 말하는 자유 평등이 반대자들 대량학살하고 감옥 가두는 거냐, 좆까, 하는 거나 아직 기독교의 영향이 많이 남은 세상에 신 좋아하네, 기독교 좆까, 설사 그것이 강한 풍자의 목적일지라도 저렇게 대놓고 패륜, 절도, 간음, 동성애, 살인까지 그 당시는 물론 지금도 절대 금기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왜 장려되어야 하는지 구구절절 논증할 수 있는 그 미친 패기는 무엇인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수많은 책이 익명 출간되고 오랜 기간 금서가 되었고 그 덕에 늘 도망다니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로 고난을 겪다 죽는 거 보면 굳이 그렇게 힘들게 살아야 했니 사드여…

“속지 말자. 그 종족 번식이라는 것은 결코 자연법칙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이미 설명한 바와도 같이 그저 허용된 것일 뿐이야. 그리고 또 인류가 멸종 되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한들 자연의 입장에서 무슨 대수란 말이냐! 만일 그러한 불행이 발생하면 모든 것이 끝장난다고 믿는 우리 인간의 오만함에 대해 자연은 얼마나 비웃겠는가! 인류가 멸종한다 해도 자연은 자신의 영역에서 인류가 사라진 것을 조금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 이미 여러 종의 동물이 멸종되었는데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더냐?”
얼핏 읽으면 만화 ‘기생수’에서 오른쪽이나 그 동족 기생생물이 인간 뼈때리는 내용 같기도 하고, 극단적 생태주의자의 강한 호소 같기도 하지만...속지 말자. 닥치고 항문 섹스가 짱이다! 하는 맥락에서 등장한 말이다(…)
이 소설의 막장 끝판 음란왕 돌망세(엉덩이 전문)는 온갖 음란 행위를 코칭하면서 중간중간 저렇게 자신의 철학과 가치관의 썰을 풀며 아직 성경험이 없던 외제니를 교육한답시고 이런저런 이상한 짓을 한다… 옆에서 열심히 거드는 생탕주 부인-미라벨 공자 남매(근친상간 전문)와 하인 오귀스탱(“아! 지기미! 입이 끝내주네...아기씨 입은 증말 생생혀! 울 정원에 핀 장미 송이에 코를 대는 것 같아유.”등등 이 미친 이상한 사투리 번역 ㅋㅋㅋ 그리고 같이 즐기던 귀족놈들은 전부 오귀스탱에게 이놈저놈 하대하고 자기들끼리 어려운 이야기 할 때는 이놈아 나가서 기다리다 부르면 들어와, 막 이지랄….ㅋㅋㅋ평등주의 어디갔냐 이 계몽주의 시대 놈들아...), 겨우 하루 동안 일곱 개의 대화 형태로 두 여성에 세 남성이 온갖 성행위 펼치며 이게 짱이지, 사랑, 동정, 선행, 도덕, 신앙 이런 게 다 거짓이고 이게 진짜야, 하는 대화 형식의 소설이다. 돌망세가 말로 자 다들 요렇게 저렇게 이렇게 자세 취하시고, 준비 됐으면 시작, 하면서 다섯이서 기차놀이(…) 여러 번... 물고 때리고 흘리고 난리를 부리다 외제니를 찾으러 온 외제니 엄마를 막장 범죄 피해 희생양으로 삼고 야 좋다, 저녁먹자, 하고 끝난다.

저러는 와중에 돌망세는 자꾸 진지하게 뭐 있어보이는 논조를 펼치는 게 웃겼다. 제일 긴 다섯 번 째 대화편에는 아예 대화가 아닌 소책자 형태의 논설을 끼워 넣어서 돌망세가 내내 하던 개소리를 한 번 더 강조해 놓았다. 분명 개소리인데 어떤 건 또 가끔 맞는 소리로 들려서 아 내가 이제 이 책을 읽고 드디어 이상해지는 것인가, 아닌가 이건 사드가 고도의 전략으로 개소리 중 맞는 말을 설파하는 것인가 내내 헷갈렸다. 맨 뒤 해설을 보면 이건 나만 헷갈린 게 아니라 그간 사드를 연구한 수많은 사람들이 겪은 혼란인 것 같았다.

그러니 굳이 심심하시면 읽는다는 거 말리지 않구요...우리 뭐 읽는다고 이상한 사람 되는 그런 쪼렙 독서가들 아니잖아요… 물론 읽으라고 대놓고 권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알아서 판단하세요…

새삼 나는 극단적인 표현의 자유 옹호가로구나 싶다. 이런 창작물조차 나름의 의미가 있지 싶다. 물론 이러다가도 내 구미에 안 맞으면 막 씹겠지ㅋㅋ씹는 것과는 별개로 당신의 개소리를 환영합니다 왜냐 내가 씹기 위해서 입니다… 그치만 이건 어떻게 씹어야 할지 모르겠다. 여성의 성적 자유를 옹호하는 듯 하다가 그 논리가 여자는 모든 남자의 쾌락을 위한 존재이고 그러니 남자를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최대한 많은 여성 남성 불문하고 즐겨야하고, 자기 쾌락과 자유를 위해 남을 희생하는 게 뭐 어때 고통 주는 게 뭐 잘못이야 그게 자연이야, 이런 미친 소리 하는 거 보면 이거 진짜 진심이냐 어떻게 사람 새끼가 사람 껍데기 쓰고 이런 말을 하냐 설마 이것도 뭔 풍자와 비꼼이 아닐까 제발 그랬으면 안 그러면 내가 그동안 이 책 읽은 게 개헛짓거리한 거잖아… 그런 혼돈의 카오스한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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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gene 2021-01-18 15: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드라니...열반인님 독서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궁금해집니다..
읽느라 고생하셨어요!

반유행열반인 2021-01-18 15:12   좋아요 2 | URL
제가 시작한 일은 제가 책임지자 하고 어케어케 읽긴 했는데... 사실 고생은 진지한 부분 읽을 때 재미없던 거 말고는 괜찮았습니다 ㅋㅋㅋ

하나 2021-01-18 15: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섯이서 기차놀이(...) 🙀 사드는 사드네여... 저는 예전에 들뢰즈가 사드 넘 중요하게 다뤄서 마조히즘이라는 책도 찾아보고 그랬던 거 같은데.. “당신의 개소리를 환영”하는 열반인님을 환영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1-18 15:15   좋아요 1 | URL
평론이나 해설 같은 거에도 사드 자주 나오니까 뭐 대단한가 싶은데 사실 그냥 난해한 텍스트다 싶으면 가져다 붙이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 ㅋㅋㅋ 하나님의 다정한 소리로 저의 개소리도 중화해주세요 ㅋㅋ세상의 균형은 필요하지 암암

청아 2021-01-18 15: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드는 설치냐 안된다 그 사드밖에 몰랐어요.(무식 당당) 역시 열반인님! 또하나 배웠습니다. 대단쓰!

반유행열반인 2021-01-18 15:32   좋아요 1 | URL
사디즘의 그 사드보다 미사일 싸드를 먼저 아시다니 순수한데다 사회적인 미미님이신데요ㅋㅋ솔직히 읽을 수록 이새끼 포르노계의 아버지(그니까 현실에서 했다가는 철컹철컹 본인도 실현하다 철컹철컹) 원흉 쯤 된다 싶어 착잡함도 없지 않았습니다...

몰리 2021-01-18 15: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지기미! 입이 끝내주네...아기씨 입은 증말 생생혀! 울 정원에 핀 장미 송이에 코를 대는 것 같아유.”
-- 아 이 번역, 빵 터졌습니다. 증말 생생혀. ;;;;; ㅜㅜㅜㅜ

저도 이 책 여기저기서 인용하길래 궁금해져서 얼마 전 열어보고서는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가, 사드라는 인간도 있고 뉴튼이라는 인간도 있고
예수도 있질 않나. 잠시 감탄이.... 일더라고요.

반유행열반인 2021-01-18 15:37   좋아요 1 | URL
번역가가 나름 이건 어느 지역 사투리도 아니고 원전에 사드가 막 단수형 쓸 데다 복수형 쓰고 문법 안 맞게 엉망진창 한 걸 나름대로 표현한 거라고 해명 애쓰는 거도 재밌었어요. 이거 말고도 많은데 옮기기엔 19금이라 제일 무난한 걸 고른다고 골랐는데 다시 봐도 웃기네요 ㅋㅋㅋ인간이 이렇게나 다양해서 같이 살고 만나고 헤어지는 재미가 있지 싶어요.

syo 2021-01-19 1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런 거 읽고 잠들면 그날 밤 꿈이 심상치 않더라구요....
현실에서는 하지 못할 것들을 해보는 꿈도 가끔 꾸지만, 도리어 견딜 수 없는 것들을 억지로 견뎌야 하는 꿈도 종종 꾸는데;;;

반유행열반인 2021-01-19 15:55   좋아요 0 | URL
야한 꿈이에요 무서운 꿈이에요 ㅋㅋㅋ 저 책을 어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지겠네...
 
[eBook]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다나베 세이코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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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5 다나베 세이코.

영화 있는 거 보고 장편인 줄 알았는데 단편이더라. 친구가 말한 소설과 같은 이름의 영화를 예전에 본 줄 알았는데 그 무렵 본 건 ‘메종 드 히미코’였다. 문득 처자식 다 버리고 떠난 게이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워졌다. 히미코도 그렇고, 마츠코도 그랬고, 일본 영화에는 결함 많고 상처 받기 쉽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나말고도 저렇게 완벽하지 않은 존재들이 함께 세상을 이루고 있다는 걸 자꾸 보여주며 위로를 시도하는 건가.
일본 소설은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무라카미 류 소설 좀 찾아본 것 말고는 별로 본 게 없다. 가끔 읽으면 이걸 어떻게 읽어야 하나 늘 낯설다. 그런데 이 소설집 번역자가 무라카미 류 소설 많이 번역했던 양억관 아저씨였다. 오, 일단 심리적 장벽 한 단계 낮아졌음. 소설가 다나베 세이코는 우리 외할머니랑 같은 1928년생 용띠였다.(밀란 쿤데라는 한 살 어린 뱀띠라오…) 우리 외할머니는 아직 잘 계신데 다나베 세이코 할머니는 2019년에 돌아가셨다. 사후에 리커버판으로 다시 나온 모양이다. 책이 처음 나온 해는 내가 날 무렵인 1985년이고, 다나베 세이코가 57살일 때 낸 책인데, 책의 등장인물은 지금 내 나이 또래인 삼십 대 여자가 퍽 많다. 나이 들어 쓴 소설들은 노년에 관한 것일까 싶어 잠시 검색해 보니 에세이집도 여러 개 썼나 보다. 여자는 허벅지- 라는 에세이집에 잠시 관심이 갔는데 별점 한 개랑 안 좋은 평이 잔뜩ㅋㅋㅋ 음담패설 에세이래… 역시 이 할언니… 내공이 느껴진다…

친구는 소설집 안에 슬픈 사랑, 금지된 사랑 이야기가 많다고 했는데 어쩐지 그런 사랑하는 여자들 대부분이 씩씩하고 꿋꿋해 보였다. 그건 어느 정도는 체념의 결과이고, 남들이 뭐라면 어때 아무렴 어때 나는 내 갈 길 간다, 하는 주체성 같기도 했다. 물론 어떤 여자 인물들은 남자에게 의존하고 남자가 그지같이 구는 데도 어쩔 줄 모를 때도 있었지만, 30몇 년 전의 사회상 생각하면, 그 당시 내 나이면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 키우고 전업주부로 가정에 매여 있는 인구 비율이 많았을 텐데 그걸 감안하면 자기 일 열심히 하면서 남자가 떠나도 스스로 자신을 먹여 살리며 알아서 잘 하는 여자들을 일부러 열심히 등장시킨 것 같다. 그건 당연한 거야!라고도 할 수 있지만 사실은 대단한 일이다. 그러니 스스로를 먹여 살리고 그와중에 열심히 사랑도 하는 사람들은 자부심 느껴도 되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먹여 살리지 않더라도, 지금은 나 자신만 사랑하려고 애쓰는 중이더라도 죽지 않고 열심히 살아남기로 한 사람 또한 대단한 일 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밑줄 긋기
-“꿈에 나오면 어떡해…”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보긴 왜 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을 때. 무서워도 안길 수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호랑이를 보겠다고...만일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평생 진짜 호랑이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중)

-그리고 우네의 상냥함에 마음을 놓고, 아무렇게나 몸을 맡겨오는 어린애 같은 유지의 젊음에, 우네는 영문 모를 슬픔을 느낀다.
어른이란 존재는 그 상냥함 뒤에 언제나 공갈과 위협의 칼날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그런 순진한 신뢰가, 우네의 가슴에 아프게 와닿는다. 순진무구한 소년소녀를 웃음과 과자로 유혹해 잔인하게 죽이는 유럽 사회의 성범죄자들, 그리고 그림 동화에 나오는 범죄자들의 고독한 쾌락을, 우네는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모두 정치한 이중인격자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
(‘사랑의 관’ 중)

-“우리, 산꼭대기 검은 땅에 커다란 구멍을 파서, 남모를 사랑의 관을 묻나니.” …
말로 다할 수 없는 둘만의 사랑이었네
우리 누운 관 위에 풀이 피어나는 날에도
이 사랑 아는 이 없으리
(‘사랑의 관’ 중)

-‘어쩜 이렇게 사람을 안을 수 있을까.’
포옹뿐만 아니라, 입술 위에 따스한 눈처럼 떨어지는 남자의 부드러운 입술도 어딘지 모르게 자신의 입술과 꼭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서 감탄하고 만다. 몸이, 또는 인생의 틀이 잘 들어맞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바의 몸은 딱딱하지만, 이와코에게는 하나도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팔도 혀도 입술도 한없이 부드러웠다. 남자의 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생명의 매끄러움 그 자체라는 느낌이었다. 몸 자체가 만족의 한숨인 것 같았고, 이와코는 그 한숨에 안겨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눈이 내릴 때 까지’ 중)

-리에는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그대로 의자에 앉아 할말을 잊고 말았다. 농담도 할 수 없었다. 기력이라도 넘쳤으면 무슨 말이라도 했을 테지만, 마침 기분이 가라앉아 있어서 자기연민의 눈물만 스멀스멀 구토처럼 치고 올라왔다.
그런 감정이 갑자기 수그러든 것은, 그 순간, 미노루가,
“밥”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리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엉?”
“밥. 빨리 밥 줘. 배고파.”
“지금 내가 밥차릴 때야! 먹고 싶으면 자기 손으로 해 먹어!”
“뭘 먹어? 오늘 저녁은 뭐야?“
벼락이 떨어지고, 창이 빗발처럼 날아 오더라도, 자신의 바람기가 발각이 나더라도, 어쨌든 리에가 밥을 지어주리란 것을, 미노루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빛나는 에고였다. (‘사로잡혀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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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1-01-16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조제가 단편이었구나. 저는 그 영화 혼자 살 때 진짜 많이 틀어놨어요. 거기 나오는 남자애가 밥을 되게 맛있게 먹거든요 ㅋㅋㅋ (이상한데 치인다..) 다시 혼자로 돌아가면 슬프겠지만 그것도 괜찮아, 라는 말에는 열반인님 말씀처럼 체념도 있고 주체성도 있고 그렇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반유행열반인 2021-01-16 11:26   좋아요 1 | URL
저도 처음 듣고 아, 조제가 단편이었구나 생각했어요. 밥 맛있게 먹는 남자애 좋으다ㅎㅎㅎ 다시 혼자로 돌아가도 괜찮아, 하겠지만 호랑이 봐도 안 무서운 같이가 더 괜찮아, 싶네요. (기만자.... ㅋㅋㅋㅋㅋ죄송합니다)

하나 2021-01-16 11:28   좋아요 1 | URL
힝..입니다 ㅋㅋㅋㅋㅋ 니 내 좋지, 금 내랑 호랭이 보러 가자! (금방 배운다...)

반유행열반인 2021-01-16 11:35   좋아요 1 | URL
그래 가자 호래이 보러 ㅎㅎ

syo 2021-01-16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리뷰 써야 하는데 ㅋㅋㅋㅋㅋㅋㅋ 요즘 리뷰가 손에 잘 안 잡히네욬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1-16 20:17   좋아요 0 | URL
언넝 써서 다음 달에는 사만원 받으세요 ㅋㅋㅋㅋ
 
[eBook] 진실의 흑역사 - 인간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
톰 필립스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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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5 톰 필립스.

작년 이맘쯤 독일 철학자가 쓴 책 ‘거짓말 읽는 법’을 읽었다. 그전까지는 막연히 속기 싫고, 속이기도 싫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런데 거짓말이란 생각만큼 발생 과정도 작동 원리도 단순하지 않았다. 책의 내용은 명확히 이해하기 쉽지 않았지만, 읽고 나니 인식과 발화와 진실에 관해 했던 그동안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스스로를 뼈가 다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물고기 같은 사람으로 여겨왔다. 거의 평생을 거짓말을 정말 못하고 시도하더라도 티가 심하게 난다고, 그러니 그저 있는 그대로 알리는 것이 최선의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실행했다. 그러나 결과가 늘 좋지는 않았다. 주변 사람들의 불만 사항을 그대로 전하고 이런 점은 고쳐보자고 말하자 상사가 펑펑 울었다. 말하면 이해해줄 거라 생각한 사람은 시간이 지날 수록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을 불쾌해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을 가지고 이면의 사건, 지난 삶의 궤적 같은 걸 듣고자 하던 사람들조차 결국에는 무거운 짐을 떠맡은 것처럼 캐묻던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그래서 속고 싶은 것에 속는다. 이 책에는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일찍 간파한 사람들이 남을 열심히 속여먹은 사례가 여럿 나온다. 자신의 경제적 이득이나 명성을 위해 결국 남을 해치고 착취한 망나니들은 역사에 악당으로 기록되고 오래도록 비난 받는다. 그러나 때로 거짓말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목적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수단으로 활용되고 그런 일은 크게 욕을 먹지도 않는 것 같다. 수많은 여론전, 아픈 사람을 위로하고 낫게 하는 최면술, 흥밋 거리이자 재미를 주는 픽션들이 그렇다. 이 책 초반부터 마지막까지 거듭 회자되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구라의 향연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그렇게 상습적으로 뻥을 쳐대고도 뭔 위인으로 이백년 넘는 동안 추앙받고 있잖아…

인류 역사가 내내 거짓말로 꽉 차 있었고 모든 거짓말이 유해한 것이 아니라고해도, 그러니까 포기하고 거짓말 잘해서 잘먹고 잘살자 하는 게 저자의 결론은 아니다. 오히려 노력장벽을 허물고 조금이라도 진위 여부를 파악하려는 시도를 하고, 진실을 가려버리는 수많은 정보제한(유료 정보같은 것…)을 풀고, 거짓을 가릴 수 있는 전문가와 언론인이 협력 좀 하자고 말한다. 낙관적이고 희망을 버리지 않는 건 전작 인간의 흑역사나 비슷한 것 같다. 비아냥거리고 시니컬한 블랙 유머를 마구 던지지만, 다 잘되자고 하는 소리 아니겠습니까...하는 것 같은.
별 상관 없는데 왜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하는 이명박 음성 지원되냐...진실, 거짓, 믿어, 못 믿어, 하는 소리 입에 올리는 경우는 대개 의심해 봐야 하는 게 맞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싫어하는 상사 앞에서 싫은 티 안 내고 예의바른 시늉도 할 줄 알고, 갑자기 원격회의 시간 바꾸자는 연락에 육아 때문에 곤란한데요, 하고 거절할 줄도 알고, 굳이 묻지도 않는 말을 일부러 건네지 않고, 혼자만 알고 속에 담아둔 말의 가짓수가 제법 늘어나게 되었다. 결국 행복하려면 어느 정도의 자기 기만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한다. 안 그러면 내내 스스로를 미워하다가 삶이 끝나 버릴 것만 같아서, 그렇게 되었다.

+밑줄긋기
-유사 이래 진실과 거짓의 본질을 파헤친 사람들은 모두 한 가지 핵심적인 원리를 거듭 발견했다. 우리가 옳을 수 있는 경우의 수는 극히 제한되어 있지만, 틀릴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무한에 가깝다는 것이다.

-내 거짓말은 크게 세 가지 유형이었다. 내가 해놓은 일에 대한 거짓말, 내가 단시간 안에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거짓말, 그리고 사회생활과 관련한 거짓말이었다.
첫 번째 유형의 거짓말은 주로 출판사와 에이전시 사람들에게 원고가 아주 잘 써지고 있고 벌써 많이 써놨다고 문자와 이메일로 알린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두 번째 유형은 주로 직장 동료들에게 내가 맡은 일을 곧 하겠다, 내일까지는 뭔가 결과가 나온다고 자신 있게 말한 것이었다. (역시 죄송합니다.) 세 번째 유형은 이른바 하얀 거짓말로, 이런 것을 하지 않으면 사회생활이 삐침과 싸움으로 얼룩져 파국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니 어쩔 수 없었다. 이를테면 모임에 참석 못 하는 이유를 꾸며서 말했고, 문자를 이제야 막 확인했다고 누가 봐도 뻔한 거짓말을 했고, 친구가 누구와 싸우고 있을 때 네 말이 백번 옳다, 재수 없는 자식이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다는 식으로 위로해준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세상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대부분 참이라고 전제할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으면 불안과 망상에 휩싸여 횡설수설하며 살게 될 테니까. 그러다 보니 우리는 무언가가 참이 아닐 가능성을 현격히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뉴스에서 뭐라고 하면 그게 아마 사실이겠지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멀쩡하고 믿을 만하게 보이면 사기꾼은 아니겠지 생각한다. 여러 명의 목격자가 뭔가를 보았다고 하면 뭔가가 실제로 있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한 전제들은 하나같이 생각만큼 믿을 만한 게 못 된다.

-멘켄은 이렇게 적었다. “진실의 문제는 대체로 불편한 데다가 따분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인간의 심리는 뭔가 더 재미있고 위안을 주는 것을 추구한다. 욕조의 실제 역사가 어떻게 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것을 파헤치는 일은 끔찍한 작업일 테고, 그렇게 고생해봤자 나오는 건 아마 일련의 평범한 사건들일 것이다.”
“내가 1917년에 지어낸 허구는 최소한 그보다는 나았다.”

-상상의 산맥부터 철저한 허구의 나라와 황당무계한 이국땅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의 구라꾼들은 잘도 구라를 쳤으니, 그 비결은 간단했다. 누가 세상 반대편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한들, 직접 가서 확인해보기는 굉장히 어렵다는 점이었다.

-탐험가들은 지도에 산이 있다고 하니 산이 있다고 상상했고, 지도 제작자들은 탐험가들이 봤다고 하니 지도에 또 반영해 넣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가공의 산맥은 오래도록 건재할 수 있었다.

-진짜 그럴듯한 거짓말은, 그래서 문제다. 한번 세상에 내보내면 소기의 목표를 이루고 나서 조용히 소멸하지 않는다. 거짓말은 좀비와 같다. 절대 죽지 않고, 사람의 뇌를 노린다.

-우리가 만들어낸 괴물들은 과거에 갇혀 있지 않다. 우리와 발맞추어 나란히 걸어왔다.

-금융 거품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몇 장 앞에서 금융 거품 사례를 열거할 때 1637년 ‘튤립 광풍’이 빠진 게 의아했을지도 모른다. 네덜란드에서 튤립 값이 폭등했다가 폭락하는 바람에 수많은 튤립 투기꾼이 망한 그 사건은, 역사를 통틀어 아마 가장 유명한 금융 거품 사례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어리석음을 논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주제가 되었는데, 그렇게 된 것이 1841년에 나온 찰스 맥케이의 고전 『대중의 미망과 광기』에 소개되면서였다. (사실 이 책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도 그 책에서 얻었다.) 안타깝지만, 그 이야기도 완전히 거짓은 아니라 해도 최소한 턱없는 과장인 건 맞는 듯하다. 맥케이는 튤립 광풍에 관한 정보를 금융 투기 반대론자들이 쓴 소책자에서 얻었는데, 실제로는 튤립 가격의 변동으로 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튤립 버블이 뻥이 센 이야기였다니..)

-우리는 항상 개소리 속에서 살 수밖에 없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뿐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가짜 뉴스’ 금지법을 만들려고 하는 각국 정부가 유념해야 할 점이다. 그런 식의 대응은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를 새로 낳을 수 있다.)

-그러니 다음번에 어떤 정보의 출처를 확인할 때는, 이렇게 스스로 물어보자. 이 정보가 내 개인적 편향에 딱 들어맞는 건 아닌지? 나는 이 정보를 최대한 의심하면서 바라보고 있는 게 맞는지? 이런 태도를 사회 전체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자기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는 사람에게 칭찬해주는 아량을 더 키워야 한다.

-‘가짜 뉴스’ 담론의 제일 우려스러운 점은 사람들이 가짜 뉴스를 믿는다는 점이 아니라, 진짜 뉴스도 믿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진실은 획일적이고 협소하다. 항상 끊임없이 존재하며, 별다른 능동적 활력 없이 수동적 성향만 지닌 자도 인지할 수 있는 듯하다. 그러나 오류는 무한히 다양하다. 실재에 대응하지 않으며, 순전히 창안자 머릿속의 창작물일 뿐이다. 그 드넓은 벌판은 영혼을 마음껏 펼치고, 무한한 재능은 물론 아름답고 흥미로운 허언과 낭설을 한껏 펴 보일 장이 된다.”
...아, 그 보고서(바로 위에 멋있는 말로 인용구 딴 글…) 저자가 누구냐고? 진실 탐구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그 실험을 자기 집 뒤뜰에서 주관했던 사람?
그야 물론, 벤저민 프랭클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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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1-01-15 18: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사진 보고 빵터진 1인 ㅎㅎㅎㅎ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01-15 18:36   좋아요 1 | URL
코로나 무서워서 입원하신 그 분...

하나 2021-01-15 20: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개소리 속에서 산다는 말이 맘에 드네요. 이 정보가 내 개인적 편향에 딱 들어맞는 건 아닌지 점검하라는 것도요.

저도 투명하기론 남부럽지 않은 사람인데 요즘은 말을 좀 참게 됩니다. 열반인님과 비슷한 이유로요. 상사를 울리시다니 ㅋㅋㅋㅋㅋ (역시 나랑 비슷한데 늘 더 쎄다...) 저도 예전에 구지도교수님 거의 울릴 뻔한 적 있어서.. ㅋㅋㅋㅋ 진짜와 가짜 한참 나누던 시절이라.. 행복을 위해 사회적으로 원만한 사람이 되겠읍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1-15 20:47   좋아요 2 | URL
같이 원만한 사람이 되어 봅시다 ㅎㅎㅎ개소리라는 말 이 책에 참 많이 나오는데 개가 억울할 것 같긴 해요. 그만큼 진솔한 소리가 없는데 짖고 낑낑대고 다 뜻이 명확 ㅋ

파이버 2021-01-15 2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싫어하는 상사한테 싫은 티 내고 왔는데 쫌 찔리네요ㅎㅎㅎ 둥글게 둥글게 되려면 저는 나이를 좀더 먹어야 할 것 같아요

반유행열반인 2021-01-15 22:18   좋아요 1 | URL
아니에요 잘 하셨어요 앞으로도 가끔가끔 ㅋㅋㅋ

수이 2021-01-15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기기만 힘들다 너무..... 더불어 살아가기도....... ㅠㅠ

반유행열반인 2021-01-16 07:50   좋아요 0 | URL
그냥 자신을 쪼끔만 더 애껴줘요 내 미운털은 가끔 못 본 듯 하구요...ㅠㅠ

syo 2021-01-16 2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작의 글발은 여전하군요. 그 책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분명 재밌고 웃긴데, 왜 나는 꽂아놓고 읽지를 않는 걸까요.... 거짓말처럼....

반유행열반인 2021-01-16 20:18   좋아요 0 | URL
지난 번 책은 너무 뻔한 내용을 그러모은 재주가 가상했고 이번 내용은 잘 모르던 온갖 사기 거짓말 행각 모아 놓아 더 흥미롭게 읽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