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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 미러 - 우리가 보기로 한 것과 보지 않기로 한 것들
지아 톨렌티노 지음, 노지양 옮김 / 생각의힘 / 2021년 2월
평점 :
-20210225 지아 톨렌티노. 다 봤다!!!
최근 읽은 책 중 가장 많은 독후 활동을 하도록 부추긴 책 같다ㅋㅋ 어쨌거나 드디어 다 읽었다. 책 자체가 작가의 개인적인 부분을 많이 언급하다보니, 그걸 흉내내어 쓴 독후감에도 내가 많이 드러난 것 같아 약간 걱정되기도 했다. 그래도 재미있는 돌아보기였다. 책의 후반부는 읽으면서도 많이 힘들었다. 내용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닌데 다루어지는 문제와 나아갈 방향 자체가 감이 오지 않았다. 저자도 그런 걸 아는지 열심히 남들을 까다가도 자조와 반성이 오락가락했다. 3월 14일에 김금희 작가가 온라인 책모임한다는데 과연 참여할지는 미지수이다. 그냥 덕분에 사회 안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간만에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었고,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방향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7장 우리는 올드 버지니아에서 왔다
지아의 모교에서 벌어진 성폭력 보도(결국 무고로 밝혀진)와, 실제로 존재했던 남학생 클럽의 폭력성과 강간문화를 다룬 장이었다. 이 장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반성폭력 회칙을 정하고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관련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던 시기에 대학을 다닌 건(그리고 현재 배우자가 동아리에서 그런 활동을 함께 했던 사람인 건) 행운이었다. 나나 주변 사람들이 직접적인 성폭력 피해를 입지 않은 것도 참 다행이고 함께 공부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열심히 예방하려고 노력했던 일들이 효과를 발휘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런 징후들을 스치는 일은 피할 수 없었다.
-철 없는 새내기 남학생 하나가 동아리 악기 연습 시간에 수업 과제를 위한 설문을 한답시고 ”낙태에 동의하십니까? 낙태를 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안 된다고 생각해요?”하고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묻고 다녀서 언니 한 명이 밖에 나와 울면서 하소연 했다. “제발 저 소리 좀 그만 묻고 다니라 그래.” 아직은 자기 결정권도 모르고, 어떤 물음이 누군가의 상처를 후벼팔 수 있다는 생각도 못하던 어린애들이 모여 있었다. 돌아보면 대학생은 그냥 애기다 애기.
-여자친구가 있으면서도 자꾸만 나를 불러내 함께 시간을 보내길 바라던 남자애가 있었다. 외로운 마음에 뿌리치지 못하고 같이 토스트도 사 먹고 집에서 영화도 같이 보고 기타 연습도 했다. 남자애는 날더러 빨리 연애하라고,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자기에게도 꼭 알려달라고 했다. 그런 날이 정말 왔고, 그 말대로 알려줬더니 남자애는 비웃듯이 말했다.
“네가 누굴 좋아할 처지가 된다고 생각해?”
칼날처럼 말들이 마음에 박혔고 밤새 울었다. 그리고 그애에게 쌍욕을 잔뜩 하고 쳐낼 수 있었다. 그 남자애가 자기 고등학교 다닐 때 밤에 야자 끝나고 친구들이랑 야산에 밧줄 들고 숨어서 지나가는 여학생 강간을 모의한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줬었다. 결국 실행은 하지 못했다고 얼버무렸지만 그런 시도를 했었다는 것 자체가 엄청 충격을 주었다. 그딴 새끼도 어디서 새끼 낳고 잘 살고 있겠지. 공부 잘하고 머리 좋아도 인성 글러 먹은 말종은 어디나 존재한다. 덕분에 쓰레기 감별은 제대로 배운 것 같다.
-어느 교수(아직 테뉴어는 받지 못한)가 메일을 보내왔다. 수업 중 성폭력 가해를 했다고 학생들에게 지목 받았는데 그에 대한 탄원?해명?의견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상담 관련 수업인데 나 역시 상담 사례에서 성매매하던 청소년 J양에 관해 내가 긍정적으로 언급하자 교수가 ˝(J양에 대해)부러워하는 것 같애˝라고 해서 황당해하며 항의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자보에 지적된 내용과 내가 겪은 일에 관해 그런 부분은 학생들에게 불쾌감 줄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그런 일이 발생하면 바로 사과하라고 답을 했다.
이전에 교수가 조교에게 성폭력을 가한 사건이 크게 알려진 이후라 그런지, 그저 운이 좋아 그랬는지 몰라도 대부분 교수나 강사들은 말을 조심해서 했다. 그래도 습관처럼 밴 남성 이성애자 중심 언어습관은 가르치는 이들의 입에서 쉽게 튀어나와서 종종 빡치곤 했다. 문화인류학 수업 진행하던 교수가 자꾸 여성 배우자를 ‘마누라’라고 지칭하고, 남자와 남자가 함께 사는 상황에 관해 이상하다, 동성연애냐, 하는 말을 해서 메일로 해당 내용을 보냈더니 잘했다, 미안하다, 고맙다는 내용의 짧은 답을 보내오기도 했다. (다행히 학점 보복 같은 건 없었다.ㅋㅋㅋ)
공부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가는 곳이 대학일텐데,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이, 우리보다 더 살았던 사람조차 다 올바르게 처신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더구나 학생들끼리는 더 그랬다. 술도 팔아주고 아르바이트도 할 수 있고 학자금 대출도 받을 수 있는 어른 취급 해줬지만 겨우 만 십팔 세부터 이십 몇 세까지 모인 우리들은 너무 어리고 몰랐다. 뭐가 옳은지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알려주는 언니오빠들조차 고만고만 어렸고, 우리끼리 뭐가 옳은지 끝없이 묻고 답하고 공부하고 싸우고 울고 다치고 화해하고 멀어지고 해야 했다. 많은 연애가 사랑과 폭력의 경계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했다. 그렇게 심하게 아프지 않고 무난무난하게 자랐다면 더 좋았었겠는데. 아무튼 그 시기를 지나 지금은 이런 어른이 되었다.
8장 어려운 여자라는 신화
페미니즘이 공론화 된 뒤의 명암에 관해 가장 직접적이고 뼈 때리게 그린 장이었다. 여성이라고 모두 옳을 수 없고, 모든 페미니즘이 그 이즘 만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없고, 정말 열심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이 기여한 바나 노력한 바에 비해 더 큰 명성과 소득을 얻는 사람도 많다는 사실이 아팠다. 여성을 혐오하고 비하하든, 치켜세우고 시대의 아이콘으로 받들든, 자기들이 보고 싶은 틀대로 그때그때의 입맛대로 끼워맞추는 일에 대해 경계하는 점이 좋았다. 같은 행동이고 같은 여성인데 누군가의 의도대로 추앙받다 패대기쳤다 하는 건 대중매체나 언론이나 소셜네트워크에서 끝없이 이루어지는 일이다. 여기서도 엘리자베스 워첼의 비치가 나와서 반가웠다. 아, 그리고 유명인사의 언동을 추앙하는 것의 함정, 결코 훨씬 많은 알려지지 않은 여성을 대변할 수 없는 다른 입지와 상황에 대해 말하는 부분도 좋았다. 각자 선 자리가 다르고 계층 계급 인종 지역 언어 기혼 미혼 성적지향 종교 직업 지위 등등에서 여성들은 각기 다른 조건과 대우에 처한다. 자신이 놓인 자리가 아닌 다른 곳을 이해하고 공감하기란 참 어려운 일 같다. 적어도 나와 다른 위치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을 비난하느라 에너지를 써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픈 걸 다독이기만 한대도 우리 가진 시간과 힘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중요한데다 힘을 씁시다.
9장 결혼, 나는 당신이 두려워요
지아처럼 나 또한 결혼식 같은 의례를 좋아하지 않았다. 임신이 먼저였고, 혼인신고와 전세자금대출신청을 동시에 했다. 그렇게 어른이 되었고 결혼식은 내 인생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가 여섯 살 되었을 때 시어머니가 리마인드 웨딩 무료촬영권, 이란 걸 어디서 얻어다 내밀 때 알았다. 결국 한 번은 치러야 더는 듣지 않을 말들이 있다는 것, 의식은 우리가 아닌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때부터 다섯 달 간 준비했다. 목표는 규모도 비용도 최소한으로. 마침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식장 대관을 해 주는 걸 알고 아침 일찍 광클해서 일단 장소부터 잡았다.(대관비가 무려 육만원!!!) 예식 후 피로연은 도서관 직원들 급식제공하는 업체에서 저렴하게 뷔페식으로 공급해주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웨딩홀이 아니다보니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 다 알아서 해야했다. 인터넷 쇼핑으로 자잘한 것들 주문했다. 웨딩드레스조차 사이즈 재서 알려주면 만들어 택배로 보내주는 사이트에 주문해서 삼십만원대에 해결했다 ㅋㅋㅋ 메이크업도 동네에 오피스텔에서 해주는 야매 (그렇지만 프라이빗 샵이라고 우기지 ㅋㅋ) 같은 곳에서 저렴하게 했다. 부케는 조화랑 리본 사다 직접 만들었다. 주례는 필요 없고, 내 아이가 나레이션을 해 준 신랑 신부 소개 영상을 틀고, 아이와 아이의 사촌이 들러리로 입장했다. 밴드에서 건반 치는 친한 언니가 피아노 반주해줬고, 먼저 입장한 신랑이 기타 치고 신부 입장하면서 ‘너의 의미’를 불렀다. 혼인서약 할 때는 ‘일상으로의 초대’를 부르고, 가수가 된 친구가 자기 동생 결혼식에서 부른 ‘축의금’이라는 노래를 재사용(?)해 축가를 불러주었다. 사진 촬영은 박물관에서 유물 촬영 일하던 친구가 해줬다. 그렇게 친구들 도움 얻어 하객 백명 조금 넘게 모시고 파티 하듯 마쳤다. 뭐 당연히 결혼반지도 웨딩케익도 없었다. 화려하지 않고 준비는 힘들었지만 스스로 다 하고 돈 낭비도 허투루하지 않아서 내내 그렇게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뭐 안 했어도 상관 없었겠지만 그냥 재미있는 추억이 되었다.
우리가 한 것처럼 작정하고 다 알아서 준비한다, 하지 않는 이상 남들 하는대로 웨딩 업체와 웨딩홀에 맡기고 스드메 각종 촬영 등등을 업체에 계약하면 상당한 비용이 든다고 한다. 그런 비용을 조금이라도 회수하려면 하객이 많아야 하고, 그래서 그리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이나 부부와는 일면식도 없는 부모의 지인들까지 초대해서 식을 치르는 경우가 많다. 잘 모르겠다. 각자의 선택이겠지만 코로나 때문에 계속 날짜 미루며 고생하는 예비 부부들 보면 안타깝기도 했다. 굳이 남들에게 널리 알리지 않아도 같이 사는 건 가족이 되는 건 변함 없는 일인데 본말이 바뀐 느낌이다. 그냥 형식 때문에 정작 중요한 사람과 마음과 관계가 소외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