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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눈으로 만든 사람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6월
평점 :
-20210627 최은미.
평온한 주말이었다. 볶음밥을 볶아 먹고. 물냉면을 말아 먹고. 닭다리살을 튀겨 치킨에 맥주를 나누어 먹고. 엄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휴대전화 화면을 내밀 때까지는.
이거 아빠 번호 맞지? 여태 이 번호를 써?
011로 시작해 중간 자리가 세 자리인 그 번호, 집을 나온 뒤 아빠가 전부 해지해버리기 전까지 엄마와 동생이 같은 뒤 네 자리를 쓰던 그 번호. 나만 왠일인지 마지막 한 자리 수가 살짝 달랐었다. 부재중 전화 두 통에 나와 엄마는 온통 흐린 얼굴로 마주 앉아 말이 없었다. 집을 나올 때는 세상에 있지도 않던 일곱살 터울의 꼬맹이 둘이 뽀로로의 집을 서로 가지고 놀겠다고 싸우고 있었다. 세상 태평하고 또 노동에 먼 통근길에 치여 사는 아이들의 아빠는 코를 골며 낮잠을 잤다.
나는 엄마에게 이참에 번호 바꾸지 뭐, 요즘 알뜰폰은 8900원에 통화 문자 데이터까지 완전 무제한이래, 앉은 자리에서 엄마의 신분증과 카드를 꺼내 유심과 새 번호를 신청했다. 어차피 가장 친한 친구들이랑 외가 식구 말고는 연락할 일도 없잖아. 십 년 된 번호니까 싹 정리할 겸 바꾸고 이제 용인 쪽 사람한테는 알려주지 마요.
엄마는 그러마 했고 오늘 알뜰폰 통신사에서 새로 나온 번호가 문자메시지로 안내되었다. 사실 엄마는 괜찮아 보였지만 내가 불안하니까 한 일이었다.
아빠는 내 번호도 이미 알고 있다. 집을 나오고 얼마 안 되어서 아빠가 핸드폰을 다 해지하자 새로 휴대전화 번호를 가입했다. 그런데 거기로 아빠로부터 전화와 메시지가 걸려와서 화들짝 놀랐다. 대꾸를 안 하고 차단해 버렸다. 그냥 누가 내 번호를 알려준 건지 궁금했다.
아주 오랜 후에 되게 어이 없는 경로로 번호가 알려진 것을 알았다. 몇 년이 지난 후에 겨우 엄마와 아빠의 이혼이 마무리 되고, 아빠는 값이 나가는 세간은 모두 챙기고 책과 책장과 피아노만 남겨주었다. 그 짐 안에서 이말년 친필 사인이 담긴 이말년 시리즈 스탬프가 나왔다. 내가 집을 나올 때는 이말년이 데뷔하지도 않은 때였다. 문득 생각이 났다. 집 나온 뒤 어느 디자인 용품 판매 사이트에서 이벤트를 했다. 내가 좋아하던 이말년의 그림으로 스탬프가 출시되었는데, 댓글 응모를 하면 세 명인가 뽑아서 도장을 무료로 준다고 했다. 나는 아마도 그 이벤트에 응모를 했고, 잊어버렸다. 그런데 왠일인지 그 디자인 판매 사이트의 회원정보에 전화번호는 새로운 것이, 주소는 아빠의 집이 담겨 있던 것이었다. 이말년은 친히 내 댓글을 뽑았고, 내 새 전화번호와 이말년 도장이 담긴 택배가 아빠집으로 향했고, 뭐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말년 사인이 새겨진 스탬프 케이스 안에는 이말년 특유의 심각한 표정의 대머리 캐릭터가 너희들…하면서 얼마 안 남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도장이 마구 찍혀 있었다. 아빠는 이 도장을 케이스 안에 찍어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주 잠시 궁금했지만 그깟 인간 뭐하러 궁금해, 하고서 겨우 떨쳐 버렸다.
엄마는 나와 함께 집을 나온지 14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아빠가 잡으러 오고, 도망다니는 꿈을 꾼다. 이번 전화도 그런 꿈을 꾸었다고 말하고 이삼일 지나서 온 것이라 참 이상도 하지, 싶었다. 오래도록 불안했다. 아빠가 갑자기 우리가 사는 곳을 찾아내거나, 내 직장에 찾아와 해코지를 하는 상상을 했다. 딸에게 살해 협박을 하다 기어이 전처를 흉기로 찔러 죽인 살인자의 기사를 보며 남의 일 같지 않게 여겨졌다. 이혼 판결을 받은 법정에서 마지막에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는 엄마를 쫓아오며 아빠는 니들 다 죽일 거야, 했댔나. 아니면 나의 피해망상인가. 엄마는 정말 다행히도 25년 간의 학대와 폭력을 끊어내고 법적으로 남이 되는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존속과 비속의 관계란 법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동료에게 이런 이야기를 대강 털어 놓자, 너도 개명하지 그래(엄마는 몇 년 전 개명을 하셨다), 하길래 내가 웃으면서 가족관계증명서 떼면 누구누구의 자 하고 다 나오는데 뭣하러, 했다. 나는 어느 날인가 나의 가족관계증명서에 부 라고 써 있는 이 지긋지긋한 인간이 부양료 청구 소송을 걸어오는 건 아닌지 하고 걱정하기도 한다. 그날을 대비해 여러 궁리를 해 둔다. 이혼의 원인은 결혼 초부터 지속된 배우자와 자녀를 향한 가정폭력 때문이었고 그 판결문이 남아 있을 것이다. 아비란 인간이 동생에게 훈육이랍시고 가하던 신체적, 정서적, 성적 폭력, 그때는 심한 장난이라고, 제발 장난 좀 그만하세요 했지만 이제는 성추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끔찍한 짓거리들. 가족의 피해를 늘상 목격하고도 제대로 말리지 못하던 나의 무기력과 수치심. 고통을 겪던 엄마와 동생. 엄마를 향하던 성적인 욕설, 말하여지지 않았지만 짐작할 만한 학대, 벨트를 풀러 쇠로 된 버클로, 수십 개의 무거운 금속 열쇠로 철퇴마냥 내리치는, 흐르는 피, 깨져 나뒹구는 반찬 그릇, 흐르는 반찬 국물로 오염된 바닥의 역겨움, 망치로 내리친 문고리, 깨진 현관문, 볼륨 100까지 틀어올린 텔레비전 소음으로 가려진 폭언과 욕설과 비명. 동생과 대놓고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은 없지만 동생은 정서적으로, 삶에 많은 부침을 겪고 아빠를 직접 증오하는 대신 나와 엄마에게 원망을 투사하여 사이가 매우 안 좋아진 채로 멀리 이사를 가버렸다.
친족 성폭력에 관해 거듭 다루어진 이 소설가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렇게 자꾸 떠나온 곳을 돌아보게 되었다. 최은미가 쓴 미산과 같은 곳이 내가 떠나온 용인이다. 나고 자라 25년을 살았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 몇 십킬로미터 떨어져 있지만 잔인하던 아빠와 할아버지가 사는 그 동네가 폭격이라도 맞아서 사라졌으면 하는 것.(용인 주민들께는 죄송합니다…우리 아빠랑 할아버지 사는 집만 딱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러니까, 이런 생각도 했다. 과거에 고통을 겪은 이들에게 이제는 잊으라고, 괜찮아 질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 겠다고. 잊지 말고 계속 퍼부어 대세요. 아프게 하던 그 사람들 욕을 하고 나도 같이 욕을 하고 죽어라 빌고 제발 사라져라 아주 많이 아파라 그리고 제발 앞에 나타나지 마라 하고 온갖 저주를 하세요. 미워하는 삶이 고통이라고 용서 하고 잊고 살라 말하는 이들에게 좆까세요 좆같은 족같은 것들아 제발 좀 닥치라고 하세요. 그새끼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무슨 나쁜 짓을 했는지 계속 까발리고 파헤치고 반복해서 말하고 쓰고 또 다시 쓰고 그런다고 절대 그런 일들이 없는 나날로 돌아갈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서라도 내 잘못이 아니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 수 있는 날까지.
그 입을 막지 않고 그 손을 꺾지 않는 게 겪지 않은 사람들이 건넬 수 있는 가장 큰 위로인 걸 이제는 압니다. 그래서 엄마한테도 많이 미안해요. 엄마 이제 벗어났으니까 그만 말하고 잊고 살아, 그냥 그걸 소설로 써, 나한테는 이제 그만 말해, 했던 날이 너무 미안합니다. 조금 더 참고 들어줄게요 이제. 조금 더 같이 욕하고 정신 바짝 차리고 해치러 오지 않게, 해칠 의도가 없대도 내가 뭘 잘못했어, 사랑했다, 이딴 개소리 듣지 않게 어떻게든 해볼게요.
-보내는 이 ……『자음과모음』 2019년 봄호
이 책을 사고, 이 소설을 읽다가 아파트 옆 동을 건너다보다가, 아주 꽂혀 버렸다. 나에게는 왕래하는 이웃이 없지만, 아래층에 사는 아기 엄마의 SNS와 지역맘카페 아이디를 우연히 알게 되고는 한동안 염탐했었다.(…) 결국 그 아기 엄마랑 친해지지 못하고 온갖 정보만 혼자 알다 이사를 왔다. 이런 내가 부끄러운데 나는 관계 맺는 게 서툰데 남한테 관심은 많고 그래서 그런 이야기로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이 소설이 너무 잘 써 버려서…
-여기 우리 마주 ……『문학동네』 2020년 가을호
아주 오랜 뒤에 코로나19가 지나가던 2020년의 봄, 여름을 누군가 묻는다면 이 소설을 읽으라고 말할 것이다. 너무 징글징글하고 서글펐다. 슬픈 봄과 여름이었고 사람은 생각보다 적응력이 빨라서 또 조금은 나아지긴 했지만 슬펐던 일이 슬펐던 일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다.
-눈으로 만든 사람 ……『자음과모음』 2016년 봄호
최은미를 알게 된 첫 소설이 이것이었다. 2017년에 어설프게 소설 습작을 시작하고, 내 글이 너무 올드하다고 소설가 친구가 이 소설을 읽어보라고 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젊은작가상수상집을 읽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는 알아서 한국문학 작가들을 찾아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도 너무나 강렬하고 아팠는데, 4년이 지나서 다시 읽어도 여전히 아팠다. 겨우 읽기만 하는 내가 아프면 윤희 누나는 얼마나 더 아프겠냐.
-나와 내담자 ……『문학3』 2018년 3호
짧은데, 상담자가 내담자인 나를 이렇게 여겨주길 바라며 시점을 바꾸어 쓴다고 생각하면 더 슬프다. 나는 그나마 괜찮은 상담자인 정신과 선생님을 만났었는데 몇 년 후에 SNS를 보니까 그 선생님도 상태가 상당히 안 좋았다. 나보다 더 병들어 있었다. 그 소아정신과 진료실의 장난감들, 기찻길, 권해주던 오소희 여행기, 재미없던 박민규 소설 같은 게 생각난다. 더는 상담을 이어가질 못하는 내담자가 누군가 나를 기다려주길, 하고 바란다고 생각하면, 그렇게라도 나아지고 싶고 상담하러 가고 싶지만 못 가는 마음이라면. 슬프다. 좋은 선생님 찾기 생각보다 너무나 어렵다. (나는 텔레비전에서만 보는 거지만 오은영 박사님도 안 좋아한다…ㅋㅋㅋㅋㅋㅋㅋ)
-운내 ……『릿터』 2019년 6/7월호
신이화차, 목련을 먹는지는 나도 몰랐다. 목련정전도 기회되면 읽어봐야 겠다. 민간요법이니 대체의학이니 수련이니 거 아주 좆같은 거. 무언가 다른 사람을 아프다고 낙인 찍는 거도 좆같고 진짜 아픈 사람을 낫게 해 줄 것처럼 희망 고문하면서 사실 자기도 정말 낫게 해줄 거라고 자기기만 오지게 하면서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새끼들 진짜 짜증난다…
-美山 ……『문학동네』 2018년 봄호
은석이가 살아있는 듯 아닌 듯 이런 형식 나는 아주 슬퍼가지고.
-내게 내가 나일 그때 ……문장 웹진 2019년 12월호
이것도 두번 읽은 소설인데 눈으로 만든 사람 에필로그 같은 느낌인데 정말 슬펐다. 살아남으려고, 조금이라도 나아져보려고 소설을 쓰는 건데 그게 나를 아프게 하면 진짜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11월행 ……『나의 할머니에게』(다산책방, 2020)
이 소설도 두번 읽었으니 이 책에 세 편 정도가 다시 읽는 소설인데. 처음 읽을 땐 그저 그래 그랬는데 두 번째 읽으니 좋았다. 템플스테이까지는 몰라도 나도 산에 가고 싶고 절에 가고 싶다. 신자는 아닌데 그냥 요즘 쉬이 못하는 일이라 더 하고 싶은 거 같다.
-점등 ……『현대문학』 2017년 8월호
이것도 불교 소설에 가까운데 인상 깊었다. 도심의 연등 행렬 제대로 본 적 없는데 이 시대가 얼른 지나가고 나아져야 다시 볼 기회가 생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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