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컴퓨터가 없다. 집에 데스크탑이랑, 윈도우 깔린 노트북이랑, 맥이랑 한 대씩 있긴 한데, 내건 아니다. 직장에선 터치스크린 되고 반대쪽으로도 확 접히는 삼성 플렉스북인가 뭔가를 새로 사 줘서 2년 간 썼는데, 휴직했으니까 이제 없다.

 관공서 증명서 뽑을 때랑 직장 원격 접속해서 연말정산할 때나 컴퓨터 (연5회 미만…) 가끔 쓰고, 태블릿으로 컴퓨터로 할 일을 다 한다. 

 2014년 초에 아이패드미니2를 사가지고 2019년에 고장 날 때 까지 인터넷도 하고 전자책도 보고 키보드 케이스 산 뒤론 소설도 이걸로 수십편 썼다. 


  로지텍에서 나온 아이패드미니2용 키보드 케이스, 울트라씬폴리오m1. 이름도 길다. 뚜껑에 태블릿을 챡 끼우면 미니노트북 마냥 귀여운 게 완성, 그런데 내구도가 너무 약해서 금세 태블릿 고정 부분이 깨져버림…쉬프트 키캡도 슝 빠져+고정부분 깨져 버림… 벌크로 사서 한글 각인도 없음… 로지텍은 마우스도 키보드도 처음 쓸 땐 사용감 좋고 간지나는데 내구도가 죄 망할 놈들이다. 가격도 비싸다. 그리고 키보드보다 아이패드미니가 먼저 고장나버림…그래도 키감 좋고 휴대성 좋아서 다음 기기 쓸 때 그냥 휴대용 키보드 마냥 들고 다니면서 잘 썼다. 최근까지도 이걸로 독후감 쓰는 중이었다. 


 알리익스프레스에서 만원도 안 주고 산 휴대용 키보드. 이건 위에 로지텍 키보드에서 케이스만 벗겨낸 형태와 크기. 쉬프트 하나 없어진 키보드 핑계로 이거 너무 싸잖아! 하고 질렀다. 그간 쓰던 키보드의 단점이 기기 한 대 밖에 페어링이 안 돼… 아이패드미니2 고장난 후 미쳐버린 나는 아이패드7(글 쓸 땐 커서 좋은데 전자책 보기는 너무 무거워서 가족에게 넘김), 아이패드미니5(지금까지 책 잘 보고 잘 씀), 아이패드10(수학문제집 풀겠다고 다시 큰 거 또) 기계를 많이 늘려 버렸다. 올초에는 세번째 사용자로 물려받아 오래쓴 아이폰5s 치워버리고 9년만에 새 폰으로 아이폰se3 샀다…(돈 쓸 거면 좀 벌라고…) 하여간에 이것도 미니패드랑 그냥 패드 옮겨가며 페어링 뗐다 붙였다 쓰긴 썼는데 키감이 너무 좋지 않아요… 가벼운 건 최고… 뒷면이 쇠판이라 없어보이는데 자석 케이스에 챡 들러붙어서 막 가지고 다니기 좋다. (작은꼬마가 딱 봐도 안 쓰는 것처럼 보였는가 막 낙서하고 스티커 붙여 주셔서 다 떼고 하나만 남겨둠)


 그러다가 키보드 페이퍼 스쳐 지나가다 아 나도 멀티페어링 키보드…갖구 싶어…이러고 뒤지다가 발견하고 만다.

 키보드가 왜 초록색이야… 그것도 박상륭 전집 막권과 주석책, 황인찬 시집의 그 초록색이야…

 너는 키보드가 있잖아 두 개나 있잖아… 

 저 키보드 만든 회사 왜 들어봤지… 십 년 전에 노트북용 간이 책상? 애니데스크? 그런 거 팔던 데잖아…이제는 키보드 만드나 봐…

 너는 근데 한 번에 기기 네 대 붙는 키보드 없잖아… 다 검정색이고 초록은 없잖아… 로지텍 유사 스펙보다 만원 넘게 싸… 키스킨도 그냥 준대…

 신속배송 우체국 택배로다가 오늘 아침에 상쾌하게 받아 버렸다. 키감 괜찮음. 네모 키에 거의 풀셋 크기라서 좋음. 소리 경쾌함. 

그치만 나는 소음을 싫어해서 키스킨 쓰고 쓸 거다…ㅋㅋㅋ

 요로케 아이패드미니랑 폰이랑 내키면 패드 한 개 더+usb동글 있어서 필요하면 노트북까지 한 대 더 페어링해서 왔다갔다 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미래입니다. 키보드 한 대로 여러 대 쓸 수 있는 미래…

 하다하다 요즘 보는 책 색깔 따라 키보드도 깔맞춤으로 사는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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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6-23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패드 미니를 유열님만큼 알차게 쓰는 사람 본 적이 없습니다 ㅋㅋㅋ 쪼끄만 화면으로 이것저것!! 전 패드도 큰거 써야 직성이 풀리고 문서작업은 노트북이 편하더라고요. ㅋㅋㅋㅋ 그리고 핸드폰 9년동안 쓴 사람 본 것도 처음....! 유열님의 물욕은 책으로 다 간것인가?!

반유행열반인 2023-06-23 15:32   좋아요 1 | URL
정독하셨으면 폰 한 대 쓸 동안 아이패드만 네 대 사는 짓거리(?)한 것이 포인트 입니다 ㅋㅋㅋ이상하게 큰 거 냅두고 자꾸 아이패드미니 가지고 뭘 하게 됩니다. 물욕은 두루두루… 죽으면 다 지고 가지도 못할 거 그만 사야하는데…

은오 2023-06-23 15:37   좋아요 1 | URL
근데 거의 다 합당한데요? 미니2를 고장날때까지 쓰셨고 미니5는 미니2 고장났으니까.... 미니로 문제집 풀긴 힘드니까 10도 인정 7이 쪼끔 걸리긴 하는데 ㅋㅋㅋㅋㅋㅋㅋ일단 폰 9년이 굉장히 신기해서 7정도야 뭐.... 이런 느낌이랄까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06-23 15:45   좋아요 1 | URL
와 은오님…되게 착하신 분…내 대신 합리화 다 해 주심 ㅋㅋㅋ정확히는 2014년에 아이폰5를 사고-그 폰은 직장용으로 계속 쓰고 아이들 고모가 쓰던 아이폰5s를 곁의 분이 물려 받아 몇 년 쓰고-그걸 제가 다시 물려 받아 오 년쯤 더 썼…저 아이패드 한 대 더 사도 될 거 같아요 ㅋㅋㅋㅋ프로로다가 ㅋㅋㅋㅋㅋㅋㅋ

은오 2023-06-23 15:5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저 일단 물욕 저거 취소합니다. 프로 좋더라고요.... 12.9면 더 좋긴 한데.... 아냐 유열님은 작은거 좋아하시니까 그만!!!! ㅋㅋㅋㅋㅋ

Yeagene 2023-06-23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요즘 엄마 필요하시다고 해서 제 새 것같은 중고놋북 드리고 왠지 로지텍이라도 하나 살까 이러고 있었는데 아이패드 미니 막 사고 싶어지네요ㅎㅎ

반유행열반인 2023-06-23 19:57   좋아요 1 | URL
저는 이북리더가 없어서 미니에다 눈 안 부신 필름 붙여서 화질구지 만들어서 잘 쓰고 있는데요 한글 문서랑 엑셀 이런 거 안 쓰시면 아이패드랑 키보드 조합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ㅎㅎ 한글이랑 엑셀 되긴 하는데 좀 이상한(?)앱들 거쳐야 해서? 그런데 많은 관료제 조직(특히 공무원)에선 쟤네들이 필수더라구요? ㅋㅋㅋ 아주 오랜만에 윈도우 켜고서 시스템 종료가 화면 아래 한가운데 있어서 못 찾다가 놀랬습니다…ㅋㅋㅋㅋ
 
과학하고 놉니다
정용준 지음, 하얀콩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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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1 정용준, 하얀콩.

씨없는수박김대중-불효자는 놉니다
https://youtu.be/l5wnskIO7HA

몰라. 제목 보고 샀다. 과학 교양서 좋아하는데 제목 보니까 씨없는수박김대중의 불효자는 놉니다 노래가 생각났다. 요즘 내가 딱 불효자고 놉니다. 공부한다 핑계-> 아프다 핑계로 핑계 스위칭해가며 육아고 가사고 노모에게 떠맡기고 책이나 보고 먹고 놀고 앉았어…작가 이름은 왜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랑 동명이인이야…ㅋㅋㅋ
막상 보려고 책 뒤표지가 보이게 챡 내려놨는데, 추천사를 엑소 이선호, 라는 사람이 써 놨다. 뭐야 엑소는 가수 아니야? 이선호는 누구야… 곁의 사람이 엑소 이선호? 요즘 여기저기 많이 나와, 해서 헉 하고 놀랐다. 내가 워낙 티비고 유튜브고 잘 안 보긴 하지만… 어르신도 아는 사람인데 난 왜 몰라, 그러고 급 검색에 들어갔다. 뭔가 상위 호환 진중권 같이 지적으로 생긴 서울대 의과학 대학원생 겸 과학 커뮤니케이터라는 직업을 스스로 만들어서 여기저기 강연하고 대중들한테 과학 재밌지? 뭐 이러고 다니는 유튜버 겸 강연자인 것 같았다. 그런 비슷한 직업들에 뭐 공돌이 용달, 닉네임이 뭐 이래, 또 누구누구…생각보다 과학을 재밌게 전하는 걸 업으로 삼은 사람 많구나 싶었다.

그러고나서 이 책을 펴니까 아까 닉네임이 뭐 이래, 이랬던 공돌이 용달이 이 책 공저자 정용준님이었다. ㅋㅋㅋㅋ 과학 실험 하는 유튜버이고, 실험 영상 컨텐츠를 만화 그리는 분이랑 협업해서 책으로 엮은 것이었다.

만화는 소소하게 볼만했고, 유튜브 컨텐츠처럼 한 꼭지씩 짤막하게 과학 실험이랑 과학 지식이랑 썰 푸는 개그 만화 형식이라 책 짜임새가 크게 체계적이지는 않고 그냥 파편적이었다. 그야 말로 심심풀이… 어린아이들이 보기에도 크게 나쁘진 않을 것 같아서 큰어린이에게 곧바로 넘겼다.

딱히 건진 건 없고…짤 두 개 정도가 마음에 들었다. 무슨파무슨파 하다가 대파…하는 거랑 인간도 방사선을 방출하므로 커플은 해롭다 이러는 거…나 왜 이런 쌈마이 개그 좋아함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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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6-21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용준, 이라고 해서 귀엽게 생긴 서울예대 선생하는 소설가일 거라고 짐작했답니다. 아니, 이 양반이 뭔 과학?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06-21 22:00   좋아요 1 | URL
심지어 만화 그림체도 저 유튜버 분보다는 소설가 정용준을 더 닮았더라고요 ㅎㅎ
 
사랑하는 이모들 창비만화도서관 7
근하 지음 / 창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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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9 근하.

어쩌다 보니 창비에서 나온 만화가 집에 잔뜩 모여 있었다. 이번 만화는 좀 짧았다.
엄마의 죽음, 아빠가 아프다고 해서 효신은 대구 진희 이모집에 잠시 살러 온다. 이모는 주영이란 여자와 함께 산다. 진희 이모가 출근한 사이 효신은 주영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주영으로부터 진희 이모와 자신이 사랑하는 사이라는 말을 듣고 효신은 다소 혼란스러워 한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챙겨주는 모습에 정이 들고, 연락이 잘 안 되던 아빠에게 다시 돌아가기 싫다고 하다가 결국에는 아빠와 함께 살러 가면서 이모들과 헤어지는 걸 아쉬워 한다.

마음 붙이고 서로 따뜻하게 대해줄 수 있으면 어디든 가족이지, 정상성에 의문 제기하는 이야기는 영화 ‘가족의 탄생’에서도 보았고,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도 읽었고, 많은 책이나 영화나 드라마들이 점차 다양한 거주 공동체들을 이야기한다. 혼자 사는 사람들도 늘어나는데, 그 사람들이 누군가와 혈연이나 혼인으로 이어진 관계가 아니더라도 같이 돕고 지내고 싶을 때 그런 공동체 유지에 도움이 될 만한 법이나 제도나 인식은 아직 갖춰지지 않은 것 같다. 이 이야기에서는 효신이 엄마의 동생? 언니? 어쨌든 친족 관계의 사람과 잠시 살게 된 이야기이지만, 만일 효신이 이들과 계속 함께 살기로 했다면, 그런데 혹시라도 진희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주영이 효신을 돌보기로 한다면 입양 같은 절차 없이도 큰 문제 없이 지낼 수 있을지? 법정후견인 같은 제도? 책에서 배운 법과 제도 같은 것들이 실세계에서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다…

주제는 조금 무거운데 서사가 많이 빈약하고 큰 갈등 같은 것이 없어서 혼자 만약 이런다면? 이런 상상을 혼자 하고 있었다. 일부일처와 그 자녀, 기껏해야 그 부부의 부모 정도로 이루어진 가족 형태만을 가정책에서 배우고 또 으레 누군가의 가정을 사람들이 그렇게 상상한다. 저번 서울시 민방위 오발령 때 어떤 아들내미가 자기 엄마를 업고 대피한다고 지하철역까지 뛰었다는 커뮤니티 글이 있었는데, 다들 아빠는? 안방에 혼자 남은 아빠 ㅠㅠ 이런 댓글을 잔뜩 달고 있었다. 야 이새끼들아 아빠 없는 사람 널렸거든… 상상력 빈곤한 놈들… 아빠도 엄마도 없는 빨간 머리 앤도 무럭무럭 잘 자랐지 않냐…. 물론 마릴라 아주머니와 매튜 아저씨가 있어야 잘 자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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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gene 2023-06-21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번에 오발령 났을 때 반려동물을 챙긴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3-06-21 18:03   좋아요 1 | URL
저는 그냥 어리둥절 하다가 옆 사람에게 지진? 미사일? 이렇게 묻고 다시 누웠네요 ㅋㅋㅋ
 
왜 결혼과 섹스는 충돌할까 - 현대 성생활의 기원과 위험한 진실
크리스토퍼 라이언 & 카실다 제타 지음, 김해식 옮김 / 행복포럼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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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9 크리스토퍼 라이언, 카실다 제타.

내 본 머리칼은 흑인들이 많이 가진 곱슬에 가깝다. 감고 내버려 두면 자동 히피펌이 된다. 숱마저 많아서 감당하기 힘든 그것을 2000년도 무렵 새천년과 함께 유행한 매직 스트레이트 라는 신문물이 일정기간 감춰 주었다. 학생이라 돈이 없어 자주는 못 펴고 반년에 한 번씩, 직장을 가지고는 어린이들 평생 갖는 졸업앨범에 민폐를 끼칠 수 없어서 앨범 촬영 철마다 한 번씩, 오랜 시간과 높은 비용을 들여 머리를 폈다. 유효기간은…2주쯤? 새 머리가 뿌리부터 자라면 급속히 말린다 ㅋㅋㅋ그리고 내 곱슬머리는 너무너무 강력해서 펴 놓은 옆머리들도 그쯤 되면 다시 구부러지며 부자연스러운 곡선과 직선이 혼재하게 된다.

마지막 매직 스트레이트는 2년 전 아직 휴직 전이다. 작년에는 공부에 미쳐가지고 커트도 한 번인가 두 번 겨우 했다. 요즘은 날이 더워서 포니 테일 묶는 걸론 해결이 안 되니 머리를 바짝 모아 틀어올려 목덜미가 나오게 하고 있는데, 문득 어제 저녁 아예 짧게 잘라 봐야지…생각했다.

단발까지는 고등학생 때 매직스트레이트 하면서 해 보았는데, 워낙 숱이 많으니 밍키 같은 머리가 되었다. 몇차례 미용실에서 제가 숏컷은 안 될까요…물으면 파마도 빡시게 해야 하고(아니 나 태어나길 파마하고 태어났건만) 그냥 매직이나 하라고 했다. 빡치는데 빡빡 밀까…한 적도 여러번이지만 워워 순간의 실수가 오랜 시간을 좌우한다…

그렇지만 당분간 매인 것도 잃을 것도 없는 나야, 다음 병원 방문은 세 달 후이고, 망하면 안 나가고 칩거해도 별 일 없지 않느냐…이 참에 해 보자… 이 동네 이사 오고 거의 8년 째 가는 국사봉 바로 아래 산꼭대기 미용실(주고객층: 배드민턴 동호회 아저씨들, 국회단지 할머니들)이라면 거절 없이 잘라줄 것 같았다.
고충을 토로하듯 일부러 바글바글 묶지 않고 간 곱슬머리를 미용사 선생님은 가차 없이 슉슉, 평소에도 내 머리는 5분이면 잘라주던 것을 이번에는 조금 신경써서 30분쯤 잘라주시고 바닥에는 곱슬 가발 세 개 쯤 만들 것 같은 머리카락이 덮였다. 이게 다 제 건가요? 그려 니거여…하시는 선생님께서는… 만이천원으로 순식간에 아줌마를 아저씨로 만들어주셨다 ㅋㅋㅋ
생전 처음하는 짧은 머리라 거울 보면 왠 남자애가 자꾸 보여서 친해지려고 매번 손을 흔들어 안녕! 해준다. 그러고나서 책상 앞에 얌전히 앉아 그동안 읽던 흥미로운 책을 마저 다 읽었다.

표지 제목은 왜 이렇게 크게 뽑은 겨. 장미는 무엇. ‘왜 결혼과 섹스는 충돌할까’ 충돌하는 겨? 괜히 곁의 사람이 시무룩할까 봐 아니여 그런 거 아녀…누가 아무 말 안 했는데 괜히 삼가고 사리면서 읽는 동안 책꽂이에 제목 잘 안 띄게 꺼꾸로 꽂아두고 그랬다 ㅋㅋㅋㅋㅋ
원제는 sex at dawn-새벽의 섹스, 하는 관능적 이미지와 인류 여명기의 섹스, 이런 중의적 의미를 담지 않았을까 싶다. 진화심리학, 문화인류학, 생물학 등 다양한 학문의 수많은 연구들 가지고 와서 ‘표준적 담화’라 칭한, 일부일처제, 문화인류학에서 모노가미로 다루는 혼인 내지 짝짓기 행태에 대해, 사실 초기 인류가 그렇게 생겨 먹진 않았어! 하고 반론을 제기하는 문제적 책이었다.

초기 인류는 우리 유전적 이웃인 보노보나 침팬지에 가까운 난혼이었다, 고릴라처럼 승자 독식 일부다처제-는 오히려 아니고, 굳이 말하면 일처다부제-에 가깝다, 몸이랑 뇌가 처음에 그렇게 생겨 먹었고, 진화란 그게 그렇게 단기간 내에 바뀌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지금의 수많은 갈등과 불행의 이유가 되고 있다, 뭐 거칠게 후려치면 이런 이야기로 400쪽을 꽉꽉 채워 두었다.

나는 뭔 책인지도 모르고 제목 담대하네, 이러고 펼쳤는데 기대도 안 했던게 엄청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이 책이 (심지어 유명하고 위대한 스티븐 핑커의 인간관도 엄청 까고) 다양한 기존 주장들을 반박하듯, 이 책을 반박하는 책도 나온 것 같긴 하고, 본인들도 어떤 부분들 서술할 때는 대상화나 반여성적인 측면이라고 공격당할 걱정도 제법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재미있는 주장이었고, 설득력 있어 보이는 부분도 많았고, 좀 억지스럽다 하는 부분도 있긴 했지만 대체로 공감해 버렸다.

책 말미에 이전에 읽은 에스더 패렐의 ‘mating in captivity’(한국어판 ’왜 다른 사람과의 섹스를 꿈꾸는가‘), 이스턴과 리츠의 ’the ethical slut’(한국어판 ‘윤리적 잡년’)도 인용 되어 있어서, 야, 나 이거 다 봤다, 반갑구만, ㅋㅋㅋ책만큼은 나도 모르게 비슷한 번지수 잘 찾네…뭐 그런 생각도 잠시 하고…

이런 급진적인(?) 책이 나온지는 십년 조금 넘었고, 내가 사는 세상은 어찌 되었나…돌아보니 응 일부일처 안 해 그냥 결혼을 안 해 하는 비혼의 흐름이 대세가 되었고, 너무 성애성애 하는 세상에 지친 듯 에이섹슈얼 내지 그레이섹슈얼인 사람들의 목소리도 제법 들리고(신간 소식도 들리고), 그렇지만 뭐 민법은 여전히 민법이고, 퀴어축제에선 경찰이랑 공무원들이 싸우고, 가장 급진적인 최근의 변화라면 평생 길었던 내 머리가 싹둑 짧아진 것 정도겠다.
어렵지 않아요. 삶은 흐르고 변하는 것. 우리 모두는 유동적인 존재들. 수학하다 시집 읽다 소설 보다 과학책 보다 섹스책 보다 그러는 거지 뭐…인생 별 거 있나…




+ 밑줄긋기
- 어떤동물도 그본성과 조화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죽음의 위협을 받아서는 안된다. (117)

-여자와 남자는 결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랑은 계절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고 간다. (모수오족 여성 양 에르체 나무, 148)

-여성이 많은 자율권과 권위를 가지는 사회는 결정적으로 남성 우호적이며, 평온하며, 관대하며, 성적으로 풍성한 경향이 있다. 남자 친구들이여, 이해하는가? 만약 당신이 살아가면서 성적 기회가 적어 불행하다면, 여성을 비난하지 마라. 대신 여성이 권력, 부, 지위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라.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지켜보라. (156)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특유의 우아함으로 다음과 같은 적절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한 사람 이상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그렇게 매우 분명한가? 부모의 사랑(부모는 자신들의 모든 자녀들을 똑같이 사랑하는 체라도 하지 않는다면 비난을 받는다), 책에 대한 사랑, 음식에 대한 사랑, 와인에 대한 사랑(샤코 마고에 대한 사랑이 호크에 대한 사랑을 가로막지 않으며, 우리가 매일 백포도주를 마신다고 해서 적포도주에 대해 불신을 느끼지는 않는다), 작곡가에 대한 사랑, 시인에 대한 사랑, 휴일의 해변에 대한 사랑, 친구에 대한 사랑…에서는 그럭저럭 여러가지를 사랑할 수 있는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성애적 사랑은 그것에 대해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모든 사람이 즉각적으로 인정하는 하나의 예외일까?” (174)

-로버트 라이트는 <도덕적 동물>에서 “남녀 사이에 기본적인 저변의 동학은 상호 착취이다. 때로 남녀는 서로를 비참하게 만들도록 고안된 것처럼 보인다.”라고 통탄한다.
그것을 믿지 마라. 우리는 서로를 비참하게 만들도록 고안되지 않았다. 이 견해는 우리의 진화된 성향들과, 우리가 살고 있는 농업사회 이후의 사회경제적 세계 사이의 부조화에 대한 책임이 진화에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일부일처제적이라는 주장은 단순히 거짓말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계속해서 서로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대부분의 서구 사회가 고집하는 거짓말이다. (328-329)

+유인원의 신체 구조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픽토그램. 너무 수컷 중심 연구 아니냐, 싶겠지만 또 반대로는 어찌, 뭘 재겠나, 가시적이고 쉬운 게 늘 연구되겠지…싶다가도 그런데 저거 다 어떻게 쟀대…사람은 물어보면 거짓말칠테고 고릴라 침팬지 보노보 이 친구들은 설마 죽여서 잰 게 아니길…(눙물 쥴쥴 좆간이 미안해…)

(못생김 주의)
+아줌마에서 아저씨로 변태(metamorphosis), 우화(emergence), 아니 머리카락을 잘랐는데 왜 성별이 바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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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6-19 18: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멋, 긴 머리 때도 좋지만짪은 머리도 보기 좋은데요? 보이시하고 시원시원하지 않나요? 저도 사실은 고수머리에 머리숱도 많아 남의 얘기 같지가 않네요. 예전엔 제 머리가 싢었는데 나이 드니까 제 머리가 좋아지더군요. 잘 잘라주기만 하면되니까. 아, 스트레이트 파마 저도 한동안 했는데 처음했던 그 기분은 정말 구원의 빛을 보는 것 같았죠. 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06-19 18:44   좋아요 3 | URL
안녕하세요 스텔라 케이님, 처음 잘라보니까 많이 어색한데 오늘 같은 날 정말 시원하네요. 스트레이트 첫날 보다 오늘이 더 구원 받은 느낌이에요 ㅎㅎ 돈도 시간도 덜 들면서 간편한 길이 있었는데 너무 많이 버텼구나 하고요 ㅋㅋㅋㅋㅋ

Yeagene 2023-06-19 18: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마지막 열반인님 모습 보고 깜놀했네요 ㅎㅎㅎ 저 무슨 말 하려고 했죠?;;;;

반유행열반인 2023-06-19 18:45   좋아요 1 | URL
무슨 말 하시려고 했는지 저도 궁금한데요? 입틀막 이런 건가 ㅋㅋㅋㅋㅋㅋ하여간에 아저씨 됐네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Yeagene 2023-06-19 18:54   좋아요 1 | URL
아 저는 역시 일부일처제가 좋은 것 같네요 고지식한 사람이거든요 뭐 이딴 얘기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ㅎㅎ열반인님 션해 보이시네요!♡

반유행열반인 2023-06-19 19:16   좋아요 1 | URL
저는 뭣이 됐든(?) 다같이 사이만 좋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ㅎㅎㅎ

청아 2023-06-20 15: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열반인님 위아래가 분위기가 완전 다르네요(당연한 건가?ㅋㅋㅋㅋ)
커트도 제법 잘 어울리시네요. 처음이시군요? 저도 요즘 더워서 숏 커트 할까 벼르고 있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6-20 17:16   좋아요 2 | URL
넵 처음인데 뭘 그 무거운 예쁘지 않은 털뭉치를 달고 다녔나 싶어요 ㅎㅎ 짧은 버전이 드라이빨이라 감고 보니 혼란의 카오스가 되었어요 ㅎㅎㅎ 같이 시원하시죠 ㅋㅋㅋ

우끼 2023-06-20 16: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짧머 한 어느 어린 날에 동생 친구가 저더러 형이라 한게 잊혀지지 않아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06-20 17:15   좋아요 2 | URL
우끼형!!!!

새파랑 2023-06-22 0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 글로만 보던 열반인님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제 이미지는 순해(?) 보입니다~!! 숏컷이 더 잘 어울리시는거 같습니다 ^^

반유행열반인 2023-06-22 17:32   좋아요 1 | URL
제 글은 안 순(?)한 가요? ㅋㅋㅋ 이 편한 걸 이제야 짜르다니…생애 제일 시원한 여름 되겠습니다 ㅎㅎㅎ
 
[eBook] 여우와 나 - 한없이 다정한 야생에 관하여
캐서린 레이븐 지음, 노승영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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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7 캐서린 레이븐.

책을 읽다 말고 계란후라이를 부쳐서 나시고랭 소스랑 소시지랑 볶은밥 위에 얹어 어린이들 밥을 먹였다. 산 속 오두막에 사는 저자는 계란 흰자만 먹고 노른자를 까치 먹으라고 바깥에 버린다. 아니 까치도 계란 노른자를 얻어 먹는데 내 새끼들은 어미가 책 본다고 굶기고 있네…하고 번뜩 정신이 들었다. ㅋㅋㅋㅋ
아니 그런데 아깝게 흰자만 먹네…하면서 머랭 쿠키를 만들기로 했다. 진짜 계란은 아니고 유통기한이 벌써 일 년 넘게 지난 프리믹스로 하는 거지만 더 미룰 수도 미룰 이유도 없었다. 나는 이제 시간을 아끼지 않아! 머랭 쿠키를 만들 땐 만화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에 나온 해머의 주제가 ‘뭔가의 번데기‘를 흥얼거린다. 첫 머리 가사가 이렇다. “머랭이란 뭘까, 머랭이란 뭐지- 그건 뭔가의 번데기가 아닐까?!” 아니야 임마… 생각난 김에 머랭 쿠키랑 누에번데기를 같이 먹는다. 어린이들은 질색을 하다가 번데기 두 마리 먹을 수 있으면 오늘 피아노 연습 안 해도 돼, 했더니 큰어린이는 번데기 두 마리와 영혼을 맞바꾸고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처음 창밖의 황조롱이를 봤을 땐 놀랬다. 비둘기랑 다르게 얘는 올라서기도 힘든 보일러 연통이나 조그만 부엌 창턱, 화장실 창턱 같은 데 걸터 앉아 있었다. 생각보다 아파트 출몰이 흔한 놈인 모양이었다. 가끔 거주자 관리가 소홀한 테라스에다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는 놈들도 있는지 어떤 커뮤니티에 자기 집에 새끼 황조롱이가 자라고 있는 사진을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 그 게시물 아래 댓글로 ‘세상에 이런 일이’ 영상을 링크해 두었다. https://youtu.be/3fXxbBJk45E
길이 들어 사람 머리통 위에서 놀고 잘 따르던 참새를, 황조롱이가 눈앞에서 낼름 채 가 냠냠 먹어버린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새랑 놀던 사람의 망연자실한 표정이 인상 깊었다. 살아있는 무엇이든 정이 붙으면 그런 거겠지…

그러니까 귀여운 야생 여우에게 애착을 느끼는 것도 그렇게 부끄러울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책 속 여우 친구인 저자는 한동안 여우에게 친밀감 느끼는 걸 남들에게 감추고 연구하는 척 한다. 생물학자는 동식물을 의인화하면 프로페셔널하지 못하지, 뭐 그런 분위기가 있나 보다.
사슴 뛰어다니고 독수리 날고 철새 텃새 바글거리는 산골짜기에 땅 사서 파랑지붕 오두막 짓고, 강의 하는 때 제외하면 그곳에 은둔하는 저자는 집 주변에 초지를 꾸미려고 계획을 세운다. 밭쥐가 꽃씨를 굴 앞에 모으는 습성을 보았으니, 밭쥐 살기 좋게 잡초떼기 조성해 놓고 얘들이 꽃씨 모은 거 쓱싹해다 심으면 되겠지? 예상과 달리 밭쥐는 저자가 원한 리아트리스 씨앗이 아닌 다른 걸 잔뜩 모아 놓고 무성하게 번식한다. 그 밭쥐들을 여우가 열심히 잡아 먹는다. 여우는 저자를 무서워하거나 꺼리지 않고 꾸준히 방문해서 둘은 친구처럼 잘 지낸다. 여우 친구가 여우에게 ‘어린왕자’를 읽어주고 같이 거닐기도 한다. 덕분에 나는 이 책 읽다 말고 ‘에린왕자’를 보았다. ㅋㅋㅋ 함께 자주 언급된 ‘모비딕’이랑 ‘프랑켄슈타인’도 보고 싶어졌다.

진과 토닉으로 이름 붙인 두 그루 노간주나무에 새떼가 날아드는 걸 기분 좋게 감상하고(파랑새 앉은 나무가지를 프로판가스불로 비유하는 거 보면 표현력 천재), 성가시게 구는 이웃 까치 테니스공(배불뚝이)과 찢긴 꼬리 부부랑 안 친하면서도 노른자 자주 챙겨주고 까치가 죽었을 땐 많이 슬퍼하고, 예전 레인저 시절 살리지 못한 부상당한 아기 사슴을 떠올리며 두고두고 슬퍼하고, 여우가 사라지거나 죽을까 봐 내내 걱정하는 모습을 보면 여우 친구가 얼마나 자연 속에 사는 걸 행복해하고 동식물을 사랑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을 꺼리고 조용한 곳이 좋은 나이지만 여우 친구 만큼 고립무원 대자연 속에 혼자 살 자신은 하나도 없다. 같이 사는 사람이 없으니 야생 동물이랑도 친구가 되는 걸까? 아니면 야생 동물이랑 친구가 될 수 있으니 굳이 곁에 사람이 없어도 되는 걸까? 나는 반려 동물 문화를 별로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길들인다는 것은 너무도 인간중심적이고 동물의 생사와 복지가 온통 키우는 인간에 달려 있다는 점 때문에 그게 싫어서 동물을 키우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인적 드문 산 속에서는 그런 반려 내지 가축이 아닌, 야생 상태의 동물과 사람이 친해지는 관계도 있긴 있구나, 삶의 방식도 생명들이 이어지는 형태도 참 다양하고 내 생각은 좁구나, 했다.

박사 학위를 했다는 것 말고는 여우 친구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의도한 것인지 여우 관점에서 쓴 글에서는 여우 친구를 소녀-라고 칭해서 저자가 교란시킴 ㅋㅋㅋ) 비타민 씨 발견자 센트죄르지가 죽었을 때 학부생이었다고 해서 아…1985년에 대학생이셨으면 저 애기때 어른이었네요 ㅋㅋㅋ갑자기 머릿속 주인공이 젊은이에서 할머니로 바뀜 ㅋㅋㅋㅋ다 읽고 앞표지 다시 보니까 박사님 연세가 우리 엄마랑 같았다. 여우와 보낸 시절은 조금 더 과거일수도 있긴 하지만, 역시 까치 같이 꿋꿋한 삶의 방식이나 글솜씨나 다 연륜으로 갈고 닦은 결과였어…

사람보다 대형 야생동물들이 현관 앞을 더 자주 지나가는 거주 장소를 책으로 읽으며 어림짐작이나 해보지 제대로 된 상상을 할 수 없었다. 내 세상은 좁다. 책으로나 바깥과 이어진다. 다는 아니어도 낯설고 상상조차 못할 식물들은 사진을 찾아 봤다. 사진에 의존하지 않고는 그 나무들을, 새들을, 산비탈을, 강의 흐름을 떠올릴 수 없는 삶이란. 콘크리트 벽 안에 오래오래 갇힌 나란 생명체란. 이것도 삶이지만 무얼 말하고 무얼 쓸 수 있을지.

+밑줄 긋기
-평소에는 구불구불한 강의 만곡부 개수를 헤아려 위치를 가늠하고, 구름의 변화를 살펴 시간을 가늠하고, 검독수리를 찾는 것으로 운을 가늠했지만(일곱 마리가 최고 기록이었는데 네 마리면 일기장에 적어둘 만했다),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암컷이 수컷보다 오래 사는 건 포유류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포유류는 새끼를 기르는 책임을 맡은 쪽이 오래 산다.

-이슈메일은 바깥공기와 육체노동의 필요성을 느끼자 교사라는 버젓한 직업을 그만두고 고래잡이 선원이 된다. 고래를 죽인다는 것만 빼면 완벽한 직업이다. 작살잡이를 위해 고래를 찾는 임무를 이슈메일은 “등한시”한다. 돛대 꼭대기에 올라가서는 고래를 지켜보는 게 아니라 명상하고 삶에 필요한 철학들을 궁리한다. 망보는 동안 한 번도 “고래다!” 하고 외치지 않는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돛대 꼭대기에 서야 했다면 눈을 감고 미러 선글라스를 쓰고 “고래를 구해주세요” 티셔츠를 입었을 것이다. 당신처럼. 또는 당신이 아는 누군가처럼. 아니면 당신이 알았던 누군가처럼.
그것도 아니면 예전의 당신이었던 사람처럼.

-철새를 죽이는 것은 범죄이지만 수렵조를 죽이는 것은 스포츠다. 이 터무니없는 사고방식은 ‘외국에서 태어났거나 조상이 외국에서 태어난 생물은 우리의 생태계에 해롭고 서식지를 교란한다’라는 논리로 모욕적 처우를 합리화했다.

-내 삶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나를 선택하지 않은 것에 의해 휘둘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나는 아빠의 말 한마디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말이 인상적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내게 말을 한 것 자체가 인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식을 갖고 싶지 않았다. 네가 자식을 가질지 알고 싶지 않다. 네가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니다.” 그는 조금 있다 이렇게 덧붙였다. “좋은 소식은, 네가 인생에서 뭐라도 이루게 된다면 적어도 내게 감사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그가 이 말을 한 것은 내가 열두 살 때였다. 나에 대한 그의 태도를 한눈에 보여주는 이 말들은 나의 감정 상태와 나의 모든 관계와 그 뒤로 내가 한 모든 일을 짓눌렀다.

-회색 플란넬 같은 사슴 귀 두 개가 불쑥 나타나더니 부엌 창문을 문질러 얼룩지게 했다. 귀에 붙어 있는 것은 비교적 작은 수사슴으로, 호색적인 시선만 빼면 여느 사슴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도시에서 사는 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언제나 나는 머릿속에는 그려지지만 손에는 닿지 않는 것을 향해 나아갔으며, 목표에 도달하면 다음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손에 닿는 것은 너무 가깝게 느껴졌고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 것은 너무 멀게 느껴졌다. 나는 언제나 스스로를 어느 황무지의 아고산대 능선에 홀로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일주일 내내 우리는 바위를 아메리카들소로, 아메리카들소를 바위로 착각했다. 나는 외로운 바위들이 관심을 끌려고 아메리카들소인 척한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말한 것은 바위를 그만 뚫어져라 쳐다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메리카들소가 바위인 척하는 것은 프라이버시를 지키고 싶어서라고도 말했다. 이렇게 말한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치 상처 입은 마멋에게서 핏방울이 배어나오듯 산길에서 짙은 분홍색 구름의 물결이 쏟아져나오는 광경을 바라보며 잠들었다.

-그의 선원용 재킷은 단추가 달아난 자리가 벌어져 있었다. 그가 내 야구 모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명예롭고 존경할 만한 수고는 죄다 딱 질색이야.” 『모비딕』에 나오는 문구였다. 책에서 이슈메일에게는 교사라는 진짜 직업이 있다. 그는 그만둔다. 자신의 사명을 추구한다. 피쿼드호에 승선하여 고래와 사귄다.

-표지에 접은 자국이 깊이 파인 경량 페이퍼백이 내 허벅지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퀴퀴한 책 냄새를 들이마시며, 삐죽빼죽한 책장 가장자리를 바루려고 가장 참혹한 흉터를 엄지손가락으로 눌렀다. 문장에는 수십 가지 필기구로 강조 표시가 되어 있었고 여백은 메모로 빼곡했다. 15년 전 구입한 헌책이었다. 지금 생각으로는 모서리가 곰비임비 접힌 소설책과 나는 둘 중 하나가 풍화할 때까지 함께할 것 같다.

-새끼들이 소란을 피우는 와중에 북슬북슬한 주황색 짐승 하나가 바위 위에서 춤추고 있었다. 그 순간보다 더한 행복을 다시는 경험하지 못해도 나는 여한이 없다. 우리 여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 여우는 무시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토끼를 낚아채 가운데를 꽉 물어 주둥이 양쪽으로 축 늘어지게 했다. 토끼는 내가 그날 아침 돌돌 말아 짠 치약 튜브를 닮았다.

-나는 눈을 어지럽히거나 내가 왔다 갔다는 흔적을 바보같이 큼지막하게 남기고 싶지 않다. 나의 깊은 스키 자국은 얼어붙어 들쥐에게는 또 다른 산이 되고 어민족제비에게는 올라야 할 능선이 되고 달리는 사슴에게는 발목을 접질릴 도랑이 된다. 나는 예의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굳이 남기는 자국은 우리 자신의 성격을 나타낸다.

-아내가 안에서 소나무 가지를 꺾어 진흙 화덕에 던져넣다가 갑자기 가지 하나를 화덕에서 끄집어낸다. 나뭇가지의 잿빛 껍질 조각 사이로 사람 눈알만 한 연분홍색 구슬 두 개가 볼록하다. 말랑말랑한 고체 분홍콩점균은 태워버리기엔 너무 아름답다. 그녀는 수영 말리는 바구니를 얹어둔 너럭바위에 예쁜 가지를 올려놓는다.

-우리에 갇힌 흰매는 자유롭게 살아가는 매만큼 귀한 존재일테지만, 하는 행동이 다르다. 우리에 갇힌 동물은 야생동물과 달리 인간 중심 세상에서 이익을 얻으며 우리에 의해 고분고분해진다.
나는 깨달았다. 내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무언가가 어떤 존재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는가, 어떻게 살고 무엇을 하는가였다.
며칠 뒤 이 깨달음을 여우에게 들려주었다.
“내가 이제 어른이 돼서 뭐가 될 건지 아니? 동사가 될 거야.”
동사라고?
“그래, 동사와 부사. 형용사도 괜찮아.”
그동안 나는 스스로를 명사로 정의하려 했다. 동사를 써야 하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직업과 동일시되는 직함으로 나를 나타냈다. 직함을 나타내는 명사로 사람들을 현혹했다. 어쩌면 고의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젠 누군가 내게 그는 가수다가 아니라 그는 노래한다라고 말했으면 좋겠다.

-내가 써야 하는 말은 입니다가 아니라 합니다였다. 그래서 몇 가지 동사를 고르기 시작했다. 쓰다, 가르치다, 사람과 야생동물의 관계를 탐구하다. 땅을 돌보다.
모든 근심이 단지 잘못된 문법적 선택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삶에서 발견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여우가 말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여기저기서 풀이 소용돌이칠 때마다 여우의 머리가 솟아올랐다. 달빛이, 또는 넓은 띠를 이룬 채 반짝이는 강의 물빛이 여우들의 작고 뾰족한 주둥이를 역광으로 비췄다. 하나, 둘, 셋, 넷…… 셀 수 없을 만큼 그들은 빨리 나타났다 사라져……, 그래…… 머리다……. 아니…… 너무 빨리 없어졌네. 머리 하나가 소용돌이에서 튀어나와 왼쪽, 오른쪽, 다시 왼쪽으로 기울더니 지난해의 여러해살이풀 줄기 아래로 잠수했다. 소용돌이를 예측하여 여우의 머리가 솟아오르는 순간을 포착하려 했지만 번번이 놓쳤고 그들이 너무 빨라서 어지러웠다. 밤은 점점 초현실적으로 변해갔다.

-“이 숲이 절정 단계에 거의 도달했을 때 (극적 교란인) 산불이 덮쳤어요. 숲은 로지폴소나무와 함께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죠. 산사태, 홍수, 벌목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시계가 원점으로 돌아가요. 제가 보기에 이 숲은 다시 한번 절정 단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절정 단계의 숲은 자신의 물리적 환경과 완벽에 가깝게 소통한다. 이렇게 소통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변동이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절정 단계는 편안하며 가장 안정적인 단계다. 그 무엇의 전주곡도 아닌, 모든 것의 정점.

-숲과 마찬가지로 내 삶도 여러 단계를 거쳐 발전하여 절정 단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나는 여우와의 관계가 내 삶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내 삶의 목적임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목적이 직업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척 우습긴 하지만, 오만 가지 걱정을 하고 깊이 생각한 뒤에 내가 정작 방향을 바꾼 것은 달빛 속의 새끼 여우들이라는 물리적 사건과 그에 따른 감정 때문이었다. 이성과 합리성은 아무 관계가 없었다. 그가 나를 신뢰했다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이성을 제쳐놓은 탓에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깜박했다. 여우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그 관계를 무엇으로 대체하게 될까? 여우와의 관계는 나의 첫 진짜 관계이자 마지막 관계가 되는 것일까?

-우리의 본능은 무엇이 자연적인지 우리에게 알려주며, 우리 사회는 무엇이 정상적인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어느 쪽에 귀를 기울일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테니스공은 땅바닥을 쏘다니며 얼어 죽은 식물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잎이 달린 뾰족한 갯능쟁이 잔가지들을 집었다. 돌풍이 그녀의 부리에서 잔가지를 낚아채 데굴데굴 굴리면, 까치는 검은 눈을 부릅뜨고는 바람 채찍에 깃털을 두드려맞으면서도 단단한 진흙을 움켜쥐고 꿋꿋이 서서 또 다른 잔가지가 떨어져 날아오길 기다렸다.



+밭쥐 노역으로 모으려다 실패한 리아트리스

+분홍콩점균(나뭇가지 위 연분홍 구슬들)
사진 출처:https://m.cafe.daum.net/forestguide/174G/2878

+요제프 볼프, 1856, 솔개를 공격하는 흰 매들
출처:https://www.jhnewsandguide.com/scene/gyrfalcons-striking-a-kite-1856/image_9ea80cce-8151-56b4-9b2a-f50672c83a1f.html

+왠지 위에 분홍콩점균 생각나는 오늘의 머랭 쿠키(분홍 새똥 아님) 굽기 전, 구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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