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잠시 작게 고백하는 사람 - 황인찬의 7월 ㅣ 시의적절 7
황인찬 지음 / 난다 / 2024년 7월
평점 :
-20241124 황인찬.
작년 이맘쯤 찾았던 시흥시를 다시 찾았다. 연고도 뭐도 없던 동네인데, 황인찬 시인이 시니어 도서관에서 강연인지 북콘서트인지 한다고 해서 서해선 열차 타고 갔다. 노인들 틈바구니에 앉아 미래에서 온 스파이처럼 노인인 척 조용히 시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글쓰는 사람에 관한 환상은 없다. 쓰인 것을 좋아하는 것과 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의 구분은 비교적 확실해서. 오히려 가장 아름다운 걸 남긴 사람들일수록 주변 사람들은 이 또라이새끼 때문에 많이 불운, 불행했다, 하는 일화를 많이 보았기에 글은 흠모해도 글 쓴 사람은 흠모하려고 애쓰진 않는다. 흠모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뭐가 맞냐.
덕분인지 이번 산문집 읽을 때는 시인 목소리 그대로 음성지원이 되어 재미있었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하는 산유화를 다루는 건 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많은 자리에서 닳고 닳도록 했을 것 같지만, 그래서 이 책에도 또 나오지만 듣던 걸 다시 읽는 건 또 다른 느낌이 든다.
시흥시는 이름만 들으면 시가 흥할 것 같은 동네인데, 이 시인도 여기랑은 아무 관계가 없고, 그냥 행사 섭외되어 잠시 들렀다 간 곳이고, 나도 그냥 찾아간 곳인데, 어쩌다가 물기 없는 바다 흔적을 따라 돈가스도 먹고, 갈매기도 보고, 오리도 보고, 드넓게 아무것도 없는 진창에 갈대만, 갈대 말고 이름 모르는 짠물 견디는 풀들만, 그리고 나무랑 바람만, 약간의 갯내만 날아다니는 벌판을 오래도록 걸었다. 그게 좋았다. 가을이 무르익은 날이었는데, 한해만에 찾은 그곳은 작년보다 20일 정도 늦춰 찾아갔더니 이미 채도가 한 단계 바래 가을보다는 겨울에 가까운 시절이었다. 날은 흐리고 잠시 비가 지나가기도 했다. 그래도 제법 푹한 날이었고, 이번에는 작년에는 가지 않았던 자전거 모양 다리를 건너고, 갯벌의 건너편엔 그렇게 평행선처럼 거울처럼 꼭 비슷한 외줄기 길이 뻗은 걸 또 알게 되었다. 새로 간 길에는 새를 탐조할 수 있는 헛간 같은 게 있어서, 먼 진창의 오리들을 망원경으로, 맨눈으로 실컷 볼 수 있었다. 뽀또 속살 크림처럼 노란 치즈색 오리를 처음 보았는데, 이름은 직관적으로 황오리라고 했다. 이쪽으로 엉덩이를 두고 진흙에 빠지는 발을 힘겹게 옮기며 뒤뚱뒤뚱 걸어나가는 오리 두 마리가 너무 귀여웠다. 물속에 고개를 처박고 하늘로 엉덩이를 솟구쳐서 물고기를 잡는 놈들, 저들끼리 쫓고 쫓아가고 그렇게 평화로운 듯 사실은 치열한 체험 삶의 현장에서 저들만의 먹고사니즘하고 있는 오리들을 나는 한가로이 구경하였다. 오리를 구경하고 오리에 관한 시도 제법 썼다는 산문 구절은 그때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2010년의 두리반, 연인과 걷거나 머물던 보라매공원, 그런 공간들을 글로 마주하면 직접 겹쳐지지는 않았지만 살짝 어긋난 시간이든 실제가 아닌 글이든 어쨌거나 사람들의 삶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 교차하고 또 흘러가는 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7월의 일기를 11월에 읽는 게 적절한 걸까, 뭐 이런 식의 잠깐의 궁금증이 들 때마다 영리/영악한 시인은 물으실 줄 알고 이미 대답해 놓았습니다 프하하하 하듯이 미래의 독자와 티키타카를 잘했다.
+밑줄 긋기
-(반바지 타령이 허송세월 이어진다) 그러면 나는 그때도 반바지를 입은 또래의 사람들을 보며 반바지를 입느냐 마느냐 하염없이 고민을 하겠지. 혹시 제가 벌써 지겨우신가요. 하지만 이 짧은 책은 앞으로도 이럴 예정입니다. (26. 이런 불쑥불쑥이 앞으로도 이러면서 그게 이 책의 재미이고 매력입니다.)
-아무튼 군대란 참 남자고등학교 같은 곳이었는데, 거기에는 입시라는 부담스러운 관문이 없었다. 지루한 시간을 버티고 나면 전역이라는 해방만 있는 셈이니, 시간이 느리게 흘러 생기는 초조함은 있을지언정 미래의 성취에 대한 불안은 느끼지 않아도 좋았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에게는 군 복무 시절이 제법 마음 편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친구가 그런 사람이었는지도.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군대가 마음 편한 시절이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폐쇄적인 분위기와 억압적인 문화를 차치하고라도 당시 나에게는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미칠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확실히 시간을 되돌린 것만 같다는 감각이 주는 이상한 기분이 있었다. 젊은이들 사이에 있으니 몸도 마음도 젊어진 것 같다…...고 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매일 운동을 억지로 하는 바람에 몸이 조금 건강해지긴 했음), 스무살 남짓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감정을 교류하는 동안에는 분명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때가 많았다. 열 살쯤 어린 친구들과 어울리는 동안 십대 후반, 아니면 이십대 초반에 느꼈던 불안이나 슬픔, 미움과 같은 감정들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친구는 그 시간을 돌이키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군 시절 한 친구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은 좋겠어요. 저는 스물둘이라 시속 이십이 킬로미터로 가고 있는데 형은 삼십몇 킬로미터로 가고 있잖아. 군대 빨리 끝나겠다.” 세상에 별말을 다 듣는구나 싶었지만, 돌이켜 보면 정말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 것만 같다. 시간이란 참 야속하고도 웃기는 것이군요.
또다른 내 오랜 친구는 이백 살까지는 살고 싶다고 했다. 삶이 너무나 지겹고 버겁다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그 말을 듣고 나는 너무 놀라 되물었다. 삼십몇년 사는 것도 이렇게나 힘든데 살아온 세월의 몇 배나 되는 시간을 어떻게 견딜 수가 있겠느냐고. 친구는 세상에는 아직 즐기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고, 앞으로는 더 재미있는 것이 생겨날테니 그걸 최대한 즐겨야 한다고 답했다. 친구의 답변을 듣고 정말 크게 놀랐다. 삶에 대한 이런 낙관이라니. 그것은 단지 세상에 대한 순진한 기대는 아니었으리라 나는 짐작했다. 삶이란 이토록 지루하고 괴로운 것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재미있는 것을 더 찾아 움직여야 하리라는 일종의 대항 의식(?)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의료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으니 인간의 수명이 이백 살까지는 족히 늘어나리라는 것이 친구의 이어진 설명이었는데, 그 또한 참 아득하게 들렸다. 그 이야기는 어쩐지 SF소설에서 소재로 자주 삼는 냉동 수면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기술을 통해 우리의 육체가 시공 속에서 소모되는 것을 견디게 함으로써 우리를 미래로 옮긴다는 점에서 분명 냉동 수면과 의료 기술을 통한 수명 연장에는 닮은 구석이 있는 것이다. 그 아득한 이야기를 나는 차마 감당하지 못하고, 나 먼저 이 세상 뜨겠노라 농담을 던졌는데, 친구는 어쩐지 조금 쓸쓸하게 웃었다.
누군가는 과거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또 누군가는 먼 미래를 그린다. 그것은 조금도 특이한 일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돌이킬 수 없는 시간과 가닿을 수 없는 시간에 대해 상상하곤 하니까. 마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현재와 조금 어긋난 곳에 위치해 있고, 그렇기에 우리는 자꾸 다른 시간을 그리게 된다.
문득 두 친구를 나란히 떠올리게 된 것은 내가 과거나 미래 어느 쪽으로도 딱히 가닿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나 또한 가끔 상상하기는 한다. 내가 만약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다면, 혹은 몇 세기 후의 미래까지 살 수 있다면, 따위의 생각들을. 하지만 나는 그 어떤 시간대도 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쪽이다. 어쩌면 내가 시를 쓰는 것도 그런 까닭일지 모르겠다. 시는 현실로부터 조금 비스듬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이고, 그 자리에 서서 자꾸 지금은 아니라고, 이곳은 아니라고 말하는 일이다. 지금과 여기를 벗어나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가 닿을 수 없는 미래를 그리는 일, 그 마음의 작용이 결국 시인 것이다.
(207-210. 두 친구의 일화와 시간, 그걸 시에 이어 붙이는 이 부분이 책에서 제일 마음에 들어 통으로 들어다 옮겨 적었다. 사실 저건 시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시를 전부 소설이라고 바꿔 말해도 틀리진 않다. 나는 이래서 시인의 산문이 소설가의 산문보다 더 좋다. 소설가들은 소설 외 산문에서는 문장을 아낀다. 아껴도 너무 아껴 구두쇠들… 그런데 시인의 산문을 보면 이런 수다쟁이들이 어떻게 말들을 참고 저 손바닥만한 시어들을 아껴가며 꾹꾹 눌러 담았을까...시 쓰는 건 극기일지도… 난 못한다 못해 나는 군더더기형 부사형 인간이다 이러고 새삼 신기해하게 된다….)
-이제 너에게 비밀을 말해줄게
이 책에는 너의 미래가 적혀 있고
그 일은 모두 다 일어날 거야
언젠가 네가 바닷가에 갔을 때
너는 혼자가 아닐 거야
그때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있을 거야
수면은 빛을 받아 눈부시게 산란하고 있을 거야
두 사람은 바다를 보며 이상한 농담을 던지지
그떄 나눈 농담은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도 계속 되풀이되며
두 사람을 웃음 짓게 할 거야
아침이 오면 식탁 위에 올려둔 꽃의 향기를 맡으며 새로운 아침을 맞을 거고 밤이 오면 포근한 어둠 속에서 낮 동안의 일을 이야기할 거야
그러다 깜빡 잠들어버리겠지
서로의 머리를 맞댄 채로
두 호흡을 교환하며
부드러운 꿈속에 빠져드는 거야
그건 아주 평화로운 밤일 거야
가끔 슬픔이 찾아올 때도 있지
하지만 그때는 결코 혼자가 아닐 거야
갓 구운 빵을 나누며 그 순간 서로가 같은 온기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겠지 이렇게 작고 사소한 것이 삶의 위로가 된다는 당연한 사실에 놀라며 잠시 서로를 끌어안을 거야
그거면 된 거야
다 괜찮아지는 거야
너에게는 더 많은 기쁨이 있을 거야 딸기밭에 딸기가 매달린 것을 보며 웃을 거고 강아지가 나비를 쫓아 뛰어다니는 것을 보며 웃을 거야
물론 아무 일이 없어도 웃을 수 있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있다면 말이야
이제 너에게 진실을 말해줄게
지금 마주잡은 두 손이 한 권의 책이 되는 거야
거기 적힌 일은 앞으로 모두 다 일어날 거고
그 책의 가장 첫줄에는 사랑이라고 적혀 있지
그다음에 적히는 건 무슨 일이든 좋을 거야 시시한 일도 괜찮고, 놀라운 일도 좋겠지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해
그 책에는 기쁨이 가득할 거고
마지막에는 두 사람은 오래도록 행복했다고 커다랗게 아주 커다랗게 적혀 있을 거야
(232-235, ‘미래의 책’ 전문. 이전 산문집에도 친구들을 위한 축시가 나오는데, 이번 책에 실린 시는 읽는 순간 나한테 선물한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나한테 읽으라고 실어둔 거니 내가 내맘대로 선물처럼 받는데 세상 기쁘고 좋았다. 이 책을 산문집이라 했는데 다시 생각하니 이책은 날짜를 붙여 일기 형식이지만 에세이랑 시랑 다 섞여 있고 서간문도 있어서-사실 남의 편지 읽을 땐 좀 별로다 나한테 부친 것도 아니고 수신인 분명한데 그 사람한테 흠모의 말 잔뜩 늘어놓은 거 보면 괜히 샘남 그렇게 존경할 수 있는 사람 갖는 거조차 샘날 일이 아닐까 싶어서- 그냥 산문집은 아니고 하이브리드 짬뽕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해 봤어요 느낌인데 그게 또 읽기 괜찮았다. 산문 질릴 쯤 시 한 편 이렇게 강약중강약 있는 책이라서)
아, 새로운 마니아 되면 북플이 알림메시지를 앱에 띄우는데 궁금해서 둘러보니 나는 이제 syo님을 제치고 황인찬의 1번째 마니아가 되었다. 우하하하 시의 요정 시요가 수능 국어 수능 수학 1등급을 만드는 사이 나는 황인찬 전작을(아직 구관조 씻기기는 남겨둠… 젊은 풋풋한 시에 실망할까 봐 조금 겁남. 그래도 그림책까지 다 본 독자 여기 있다) 하고 마니아 1등급을 쌓고 있었던 거였군… 마니아 탈환하려면 따라 읽어라 2인자여...훗훗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