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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용도 ㅣ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마크 마리 지음 / 1984Books / 201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20190426 아니 에르노, 마크 마리
전자 도서관에 한참 안 들어갔다. 읽을 책을 안 가지고 밖에 나와서 뭘 빌려볼까 하고 들어갔다. 대출된 도서 썸네일을 한동안 멍하니 봤다. 무슨 책을 빌렸었지. 빌린 적 없다. 그런데 누가 또 책을 빌려 놨다. 눌러 봤다.
이 책이었다. 아니 에르노는 처음이야. 그래, 유령아 나도 읽을게.
A와 22살 연하 애인 M은 섹스 뒤에 전날 널부러 놓은 옷가지들을 사진으로 찍었다. 그 사진들을 보다가 이것에 대한 글을 각자 쓰기로 한다. 둘이 만나기 시작했을 때 A는 유방암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수술, 항암치료 투병동안 둘은 함께 한다. 이 책은 그 결과물(사진)의 결과물(글)이다.
남녀가 만나고, 사랑하고, 섹스하고, 여행하고, 아프고, 옷을 입거나 벗고 하는 건 보편적이다. 그런데 여러모로 이질적인 부분도 많았다. 프랑스인인 그들의 삶과 여기 내 삶의 간극이 딱 그만큼일 것이다.
1. 이 책의 글감이 된 대부분의 사진 속에서 신발은 가장 눈에 띄는 오브제다. 닥터 마틴, 흰색 뮬, 검은 하이힐. 좌식 생활에 신발 벗고 실내에 들어가는 내 일상에서는 마주할 일이 매우 드문 광경이다. 신발과 엉켜있는 겉옷, 속옷 따위가 낯설다.
2. 그들은 브뤼셀로, 베네치아로 여행을 간다. 어떤 곳은 여러 번 간다. 유럽인들은 이어진 땅 위로 다른 나라를 우리가 부산이나 광주나 대구 가듯 드나든다. 비행기나 배 아니면 국경을 넘을 수 없는 갇힌 신세가 새삼 답답하다.
3. 질투가 많은 나는 생각한다. 내가 유명 작가라면 방금 만들어진 똥기저귀를 펼쳐 놓고 묘사하면서 아기와 나의 관계를 풀어 놓겠지.
국민학교 시절 주무르던 찰흙 정도의 점도를 가진 노란 똥이 기저귀 안에 소중하게 싸여 있다. 어제 만들어 먹인 이유식 속 브로콜리는 드문드문 박힌 초록 점으로 변해 고단했던 지난 밤을 추억한다.
지나치게 빈정댔지만, 벗어 놓은 허물들이 이룬 난장판을 미적 구상으로 포장하고 사진에다 글 두 편까지 불멸의 존재로 단단히 박제해 놓는 글쟁이들의 고약함에 혀를 내두른다. 똥을 싸도 박수 갈채 받는 이들에 대한 비뚤어진 마음, 역시 질투다.
4. 질투가 많은 나는 또 생각한다. 철저한 문돌이 예술가들끼리 사랑하니 이런 아기자기한 사랑의 유희를 글로 나눌 수 있다. 사진 하나로 각자 쓴 글을 나중에 교환해 보기. 한 번에 두 글을 보는 독자들은 눈치챈다. 둘이 생각한 것, 경험한 것의 교집합이 글에서 그대로 드러난다고. 아마 둘은 그걸 확인하고 무척이나 흡족했겠지? (그리고 헤어지지 않았다면 또 옷가지를 벗어던지고...얼씨구 절씨구...다음 날 또 사진을 찍었겠지. 흥)
유령에게 부탁한다. 다음엔 좀 더 재미있는 책으로 골라줘. 정체가 궁금하다. 내 알라딘 전자 도서관 아이디로 맘대로 드나드는 누구냐 넌.
(표지에 째려보는 눈이 있는 나보코프의 절망을 빌려서 대신 째려보게 해 놨다. 사진의 용도는 다 봤지만 이번에는 먼저 반납하지 않기로 했다. 유령아 천천히 마음 놓고 읽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