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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평점 :
-20191001 루시아 벌린
자기가 지나온 시간을 담담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씩 뜯어보면 끔찍하고 징글맞고 처절한 일들인데 말하는 사람이 이제는 아무런 감흥 없는 듯 말하는 걸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물론 아직도 괜찮지 않은 걸 들으면서 알 수 있다.
화자나 주인공의 이름은 다르지만 결국 퍼즐 조각처럼 작가의 인생이 맞춰지고 연대표가 그려진다. 중남미와 미국 여기저기를 옮겨 다닌 삶, 안착할 수 없던 여러 배우자와 연인, 엄마와 외할아버지는 또라이, 외할머니는 방관자, 동생의 말년은 시한부 암환자, 신체적 어려움과 또래 아이들의 배척과 잦은 전학, 교사, 통역자, 번역가, 청소부, 응급실 간호사, 병원 사무원, 음식점 점원 등 다양한 직업 경험, 마약 중독자 배우자, 알코올 중독, 교도소, 치료감호소, 중독자모임, 글쓰기 교실, 네 아이를 키우기, 하나씩 따로 떼어 한 사람씩 겪게 해도 어마어마한 일들인데 한 사람의 인생이다. 그리고 그녀가 쓴 글들이 남았다.
세사르와 잠수하고 사랑을 나누는 모든 달과 모든 해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 슬픔에서 세사르가 다시 나오니 괜히 반가웠다. 바다에서 다져진 단단함, 여자한테 배 살 돈을 털어내는 매력 보면 나쁜 남자인 건 확실한데도 나도 그 해변에 가면 홀딱 반했을 것 같다.
아픈 샐리와 함께한 이야기도 여러 소설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어 나온다.
샐리와 루의 엄마를 보면, 자꾸 나인 것 같고 나를 욕하고 원망하는 나 죽은 뒤의 내 자식들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엄마를 이해해 보려고 결혼하러 가는 젊은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는 딸들의 모습은 절박하고 애절하고 기특하고 슬프다.
술에 취해 어쩔 줄 모르는 날들, 엉터리 배우자, 연인들과 함께 꼬여가는 인생을 보면 그게 내 전생 같고 내 미래 같고 어쩌면 실현되었을지도 모를 다른 평행세계의 나같고 그렇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누군가의 불행을 보면 나는 안 그래서 다행이라거나 가엾게 느끼는게 아니라 그렇게 저게 어쩌면 나야 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