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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혼자도 결혼도 아닌, 조립식 가족의 탄생
김하나.황선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20200105 김하나, 황선우
친구가 재미있게 봤다고 해서 궁금했던 책이다. 전자도서관에 9월 중순쯤 예약을 걸어놨는데, 해가 바뀌고 나서야 내 순번이 되었다. 에세이를 읽는 일 자체가 드물던 내가 작년에는 팔랑귀가 되어 나같지 않게 여러 권 읽었지 싶다.ㅎㅎ
40대 여성 둘이 한강 변 망원동에 30평대 아파트를 공동명의로 구입해 그곳에서 생활을 꾸려나가는 이야기이다. 아, 이렇게만 써 놓아도 뭔가 판타지같은 느낌이 든다. 2016년부터 함께 살기 시작했으니 이제 햇수로는 5년 차, 만 3년은 넘겼겠구나. 그 무렵보다 서울의 아파트는 두 배 이상 올랐고, 대출 규제 등등 부동산 정책은 가혹해져 서울에서 아파트를 구매한다는 것은 진짜 상상 속의 봉황 주작 해태 기린 같은 일이 된 요즘이다. 저자들은 카피라이터, 잡지사 직원, 강연자, 인세 받는 저자, 팟캐스트 진행자 등등 번듯하고 멋진 직업을 가지고 소득 또한 제법 잘 벌고 있는 능력있는 이들이다. 원래 있던 전세금, 거기에 약간의(집값의 20퍼센트 라면 정말 약간인 수준이다…) 대출, 거기에 또 부모에게 빌리는 것...에서 그냥 고개를 끄덕끄덕 하고 말았다. 넉넉하고 다정한 부모를 가진 사람들을 보면 나는 왜 획 하고 빈정이 상하는지 모르겠다. 계층과 계급 사회경제적지위 문화자본 같은 게 자꾸 떠오른다. 초졸 알콜중독 정신병자 아버지의 자녀 출신 프롤레타리아는 웁니다. 광광. 뒤틀린 마음.
너무도 다른 두 사람은 각자의 다름을 장점 삼아 가끔 티격태격하면서 서로를 다독여주고 멋진 인생을 살아간다. 두 사람이 산다는 것 자체가 내 인생에서는 거의 겪기 어려웠던 일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3살 10살 꼬맹이가 다 커서 독립한 뒤라면 빨라야 대략…17년 후? 뱃속에 사람 하나 만들고 시작한 결혼 생활에다 중간에 훈련소까지 보냈던 터라 신혼이라 할 만한 둘이 지낸 시간은 단 넉 달이었다. 그마저도 준비 없이 힘들게 힘들게 쥐어짜서 이룬 공간과 관계여서 마냥 힘들고 여전히 외로웠던 기억만 남아있다.
여자 둘이 집을 구매해서 산다는 이야기에 곁의 사람 반응은 당연히 둘이 연인이 아니겠냐, 하는 것이었다. 기사에서 언뜻 본 비혼 공동체, 주거협동조합 같은 움직임을 읊어줘도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뭐 아직까지 대다수 사람들의 인식과 반응은 이렇구나, 짐작하는 대목이었다.
여자 둘이 살아본 경험이 있긴 하다. 이건 거의 폭망에 가까운 실패담에 가깝다. 그래서 저토록 서로를 좋아하고 배려하고 친하게 잘 노는 모습이 신기하다. 사람의 문제일수도 있겠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하는 고백 같아서 부끄러울 따름이다.
동아리에 두 살 위 언니가 있었다. 걸핏하면 주사 부리고 난동피우다 이제는 손찌검까지 하는 아버지 때문에 나는 20살 되자마자 가출을 밥먹듯이 했다. 그때마다 언니 집에서 신세를 지곤 했다. 언니는 수더분한 성격이었고 친구와 자취하는 동안, 그리고 다시 원룸에서 혼자사는 동안 내가 묵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 20살 말에 엄마를 데리고 첫번째 탈출 시도로 서울에 올라왔는데, 엄마는 빈털터리 신세에다 준비된 것 없는 막막한 마음으로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나만 서울에 남아 독립의 결실을 독식하게 되었다. 싱크대도 없이 방 하나 욕실 하나만 갖춘 자그마한 방 안에서 나는 홀로 잠자고 일어나고 먹고 학교에 다녔다. 컴퓨터가 없어서 가끔 언니 방에 가서 컴퓨터를 빌려 썼다. 나름 말이 잘 통한다 생각했고, 둘다 과외를 하면서 비싼 월세 감당하는 게 버거운 것을 토로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증금을 합쳐 같이 방 두 개짜리 집을 구하고 월세를 나누면 훨씬 넓으면서도 저렴하게 지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21살 나와 23살 언니는 같이 방을 보러다녔고, 마침 적당한 위치의 이층 셋집을 구했다. 살던 사람이 세탁기와 냉장고와 가스렌지를 팔고 갔다. 군대가는 다른 선배가 가구를 맡기고 가서 침대는 언니 방에, 책상은 내 방에 놓았다. 그렇게 세간도 쉽게 갖추고 함께 사는 삶을 쉽게 시작한 듯 보였다.
집의 구조 자체가 그렇게 만만치는 않았다. 큰 방은 볕이 잘 들었다. 크기도 어마어마하게 커서, 종종 단체로 동아리 친구들이 놀러와도 한 열 명쯤은 여유롭게 둘러앉아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작은 방은 부엌 겸 거실을 사이에 두고 어두컴컴한 옆집 뷰로 종일 빛이 들지 않았다. 크기도 침대 하나 들어가면 꽉 찰 만큼 작았다. 처음에는 큰 방에서 함께 생활하고 잠을 자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둘다 남자친구가 있었고 자고 깨는 시간도 다르고 결국 나는 큰 방, 언니는 작은 방에서 주로 생활하게 되었다. 그것부터가 갈등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주 잘 알고 있지만, 나는 내가 그렇게나 예민하고 까칠한 인간이라는 것을 그때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남들 보기에는 사소하고 치졸할 만한 것들 하나하나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언니는 정말 안 치웠고 매우 잘 어질렀다. 얼굴에 붙였던 흉터 패치가 거실 바닥에 들러 붙은 채 하나 둘 늘어갔다. 토너를 발라 얼굴에 문지르고 지저분해진 화장솜이 바닥을 굴러다녔다. 화장실 타일 위로 흩뿌려진 핏자국이 마르도록 닦지 않았다. 나라고 뭐 엄청 깔끔하게 굴지도 않았을텐데, 남이 그러는 건 보고 있기 힘들었다. 내가 굉장히 이기적이고 내건 내거 니건 니거 라는 관념이 강한 것도 그 무렵 처음 알았다. 늦게까지 과외를 마치고 주린 배를 쥐고 라면 사 둔 게 있지, 가서 먹어야지, 하고 집에 도착해 찬장을 열었을 때, 텅 비어있는 것을 보고 분개했다. 그게 몇 번 이어지니 폭발해서 남의 것좀 함부로 먹지말고 먹었으면 좀 사두라고 버럭질을 해댔다. 냉장고에 계란을 사서 채워둘 때도, 나는 또 가리는게 많아서 좀 가격이 나가고 커다란 신선대란 특란 같은 걸 사서 팩째로 넣어두었다. 언니는 조그맣고 표면이 지저분한 계란을 사왔다. 그 두 가지를 섞어서 계란 놓는 자리에 놓더니, 어느 날 냉장고를 열어보니 큰 계란은 다 먹어버리고 언니가 사온 계란만 남아 있었다. 나는 그런 거에도 막 화가 났다. 애초에 섞어 놓질 말든가, 지가 사온 걸 먹지 왜 내 걸 먹어! 세탁기에 자기 남자친구 양말은 왜 섞어 빨아 기분 더럽게!
집터가 안 좋았는지, 그저 운이 없던 해였는지, 그곳에서 사는 동안 우리 둘 모두 온통 안 좋은 일만 겪었다. 몸이 아프고, 나는 아토피가 너무너무 심해져서 피부가 다 벗겨져 걷기 힘들 정도였다. 온통 뒤집어진 얼굴을 챙모자로 가리고 진물과 피가 흐르는 다리에 바지가 엉겨 붙는 걸 고통스러워하며 겨우 학교를 오갔다. 언니도 수술 받을 일도 생기고 건강이 안 좋아졌다. 게다가 둘다 그곳 사는 동안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언니는 헤어졌는데도, 전 남자친구가 찾아오면 집에 들이는 눈치였다. 내가 엉엉 울면서 따졌다. 왜 그러고 살아, 소중히 대해주지도 못하는 남자 왜 받아줘. 남의 인생에 오지랖도 참 쩔었다. 결국 내가 잠든 동안 몰래몰래 만나는 것 같았다. 사실 난 남의 인생 걱정한 게 아니라 그냥 누가 드나드는 게 싫었지 싶다.
언니가 어느 날 조심스럽게 말했다. 방을 바꿔보는 게 어떻겠냐고. 마음 속으로는 좁고 어두운 방에서 언니가 지내는 게 미안한 적도 있었는데 막상 그 말을 들으니 울컥했다. 싫었던 거지. 결국 짐 옮기기 번거롭다고 없던 일이 되었지만 끝까지 난 이기적이었다.
몸이 아파서 하던 과외를 다 그만두고 괜찮았던 학생 한 명은 언니에게 소개시켜줬다. 그 학생에게 내가 언니에 대해 많이 불평했었나 보다. 기억도 안 났는데. 언니가 어느날 과외를 마치고 오더니 학생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풀어놨다. 내가 이러이러했던 걸 걔한테 말했었다며.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이미 웃고 있는 게 아닌 걸 알았다.
딱 1년 쯤 지내고, 우리는 새로운 집을 알아보았다. 언니는 같은 블록에 있는 고시원을 개조한 것 같은 원룸을 구했고, 나는 큰길 건너가서 산꼭대기에 있는 역시 고시원을 개조한 풀옵션 신축원룸을 구했다. 세간을 학교 커뮤니티에 올려 팔아 버렸다. 더 이상 우리는 친한 사이가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그러고도 몇 해 지나 얼마간 같이 밴드도 하긴 했지만 ㅎㅎ. 혼자 살지언정 절대로 친한 이와 같이 살지 말아야겠다, 좋은 사이도 망가지기란 이렇게 쉽구나 했다.
내 입장에서만 이렇게 싫었던 기억들 풀어놓지만, 사실은 돌아보면 그런 걸 왜 싫어하고 못 견뎌 하고 또 굳이 직접 입에 올려 비난했는가 하며 뒤늦게 후회하는 일들이다. 왜 착한 언니에게 잘해주지 못했을까. 잘해주기는 커녕 그토록 못되게 대했을까. 둘다 마냥 힘들게 살았는데. 반대로 언니도 나에 대해 거슬리는 게 많았을 텐데 언니는 내게 별 말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나는 뻔뻔하게도 저렇게 불만 토로한 것 외에는 내가 잘못한 일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이고 한심한 인생.
사람이 함께 한다는 건 그만큼 참아내고 양보하고 또 나를 바꾸는 일인 것 같다. 또한 맞지 않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조심스럽게 상처 받지 않는 방식을 최대한 고민하면서 전할 말의 양을 줄이고 줄여 정말 필요할 때만 건네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여전히 그게 서툴고 내 멋대로 굴면서 살고 또 후회하고 미안해한다. 반대로 같이 사는 이는 내게 뭔가를 바꾸기를 요구하지도, 원하는 걸 토로하지도 않는다. 그냥 묵묵히 할 일을 하고, 해달라는 일을 하고, 내가 불만을 쏟아놓으면 그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듣고 있다. 그리고나서 별 말 없이 내가 이야기한 것들을 기억하고 하라던 대로 행동을 바꿔놓은 채 살아간다. 나는 아직 멀었다. 후회만 하지 말고, 미안해만 하지말고 나도 달라져야지. 오래도록 보아야 할 사람들에게 상처주지 않는 좋은 사람이 되는 일이란 어렵지만 내가 꼭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