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렌드 동백꽃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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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처음 원두를 샀다. 십수년 전에는 다른 입점 업체들이 있어서 화장품, 가방, 쿠키, 샴푸, 같은 것도 샀었다. 별별 걸 다 팔았던 알라딘... 괜히 옛날 이야기...라떼는 말이야...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 구운 크로아상이랑 먹으려고 연하게 커피를 내렸다.
놀랍게도 별 맛이 없었다. 맛대가리가 없다 이 뜻은 아니고 시지도 쓰지도 달지도 않은 것이 진짜 특색이 없었다. 그런데 마시면 아 내가 커피를 마시는구나, 하는 생각은 든다. 뒷맛 같은 것조차 여운을 안 남기니 물처럼 마시라면 장점이긴 하겠는데 내리거나 마시는 동안 향도 거의 없다. 커피보다는 차 마신 기분이었다.
커피는 하나도 모르고 그냥 드립백에 든 거나 간편 필터 컵에 걸고 블렌딩 원두 갈려 있는 거 대충 사다 내려먹는 사람이라 내가 요령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오후엔 좀 더 진하게 내려서 도전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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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2020-01-19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도 두 번 구매했는데 그냥 평범하더라고요. 근데 얼마 전에 입맛에 안 맞는 원두도 몇 번 나와서 저는 이정도면 만족이다 싶어서 마셨어요. 예전에 향도 좋고 맛있던 알라딘 블랜드가 그리워요. ㅠㅠ

반유행열반인 2020-01-19 10:33   좋아요 1 | URL
다른 블렌드도 있었군요 ㅋㅋ 무난무난하긴 한데 너무 무난해서 다음엔 다른 종류 살 것 같아요. 200g 언제 다 먹지...

무식쟁이 2020-01-19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향이 없는 커피라니... 슬푸다..
뭔데 이러케슬프지?
(저 요즘 걤성폭발중이에요..)

반유행열반인 2020-01-19 11:49   좋아요 0 | URL
제 코가 이상한가 싶어 커피 꾹꾹 눌러 담아 지금 내리는 중인데요. 처음엔 향 비슷한 게 나는 듯 하다가 지금은 코를 처박고 들이대고 맡아도 음 어디갔니 어디갔어 하는 느낌이에요...진짜 말씀 듣고 보니 슬프네요. 뭔가 누가 떠나버리고 뒷자취 찾는데 안 남아서 서글픈 감각임...

반유행열반인 2020-01-19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하게 내리면 그 건포도향?과일향? 이라는 걸 긴가민가하게 느낄 수 있다. 그니까 태평양에 빠진 건포도알갱이의 향 정도...우유를 넣으면 조금 고소해져서 봐줄만 한 수준까지...이 커피는 무조건 진하게 먹는 걸로...

공쟝쟝 2020-01-19 14:22   좋아요 1 | URL
태평앙에 빠진 건포도라니 비유 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1-19 14:38   좋아요 0 | URL
나쁜 건 아닌데 진짜 심심한 커피라고 밖엔 할 말이 없어요 ㅋㅋㅋ

scott 2020-01-19 2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커피에 향이 없다니 이러면 원두를 사먹을 이유가 없네요. 그런데 왜 알라딘은 동백꽃향이 날것처럼 화려한 문구로 홀릭했네요. 로스팅에 문제가 있었나봐요태평양에 빠진 건포도 알갱이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0-01-19 21:22   좋아요 1 | URL
감각, 특히 미각이란 너무도 주관적이어서 제가 특정 냄새나 맛을 못 느끼는 미맹일수도 있지요!(열반인 미맹설) 그러니 어떤 분들에게는 좋은 커피일수도... 그러나 평은 대체로 평범하다는 말이 다수...(알라딘이 제 리뷰를 늘 싫어합니다. 맨날 까면서 매출 방해...)
 
미친 사랑의 서 - 작가의 밀애, 책 속의 밀어
섀넌 매케나 슈미트.조니 렌던 지음, 허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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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7 섀넌 매케나 슈미트, 조니 렌던
부제 작가의 밀애, 책 속의 밀어
원제 Writers between the covers

싸이월드가 완전 망하고 접속마저 안 되다가 우연히 갔더니 다시 로그인 되었다. 특정 시기에 남긴 일기가 거기 다 있어서 그거라도 백업해 두자, 했는데 만만치 않았다.
2003년에서 2006년까지, 대학 4년 간 남긴 기록의 장르는 거의 연애물이다. 그게 달달한 연애소설 같은 부류가 아니라 주로 고통의 서사라 문제다. ㅎㅎㅎ짝사랑과 불균형한 감정과 집착.
개인적 경험만 보면 사랑의 증상은 자주 내가 미친 게 아닐까 헷갈릴 만했다.
-불안하다 -잠을 못잔다 -특정 행동이나 사람에 집착한다 -우울하고 눈물이 많아진다 -의심하고 망상에 빠진다. -분노조절이 안 되어 감정을 폭발시킨다.
내가 한 건 어느 하나도 사랑이 아니었다, 그냥 욕망이다, 라는 말에 누군가 그냥 사랑이라고 부르자고 했다.
내가 그렇게 불러주지 않으면 그건 정말 사랑이 아닌 게 되니까, 그러면 그 사랑도, 그 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가엾다고 했다.

그래서 나보다 더한 미친 놈들 이야기가 위로가 될까, 하며 이 책을 골랐다. 목차를 펼치니 작가판 연애가중계 같은 가십이 가득했다. 영미문학은 워낙 무지해서 이름만 듣고 읽어본 적 없는 작가만 가득이다. 그래도 읽는데 큰 상관은 없었다. 왜나면 남의 연애사는 언제 읽어도 재밌으니까. 더구나 중혼, 환승, 다각관계, 동성애, 양성애, 죽고 죽이고 난리가 났으니 지루할 틈이 없었다. 아니 사실 유부남 유부녀랑 얽히고 까고 다른 사람 또 만나고 하는 이야기는 너무 많이 반복되서 뒤로 갈수록 물릴 지경이었다.

인생과 영혼까지 글로 남겨 팔아먹던 이들이라 그런가, 일기, 편지, 자서전 같은 게 많이도 남아서 이들은 죽어서도 안식하지 못하고 사골 우리듯 가십거리로 우려진다. (그 덕에 이 책도 나왔지.) 내 친구 하나는 다른 친구 하나와 죽으면 서로 컴퓨터 하드 야동 및 집필작을 정리해주기로 동맹을 맺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게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외국 같으면 유언 집행 변호사에게 클라우드와 메일 비번을 알려주고 내가 죽으면 이 수백 통의 메일과 수천 개의 일기를 즉시 다 날려버리시게...하는…
그것도 뭐 유명하고 알려진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액션이긴 하겠다. 정류장, 승강장, 버스나 지하철 안, 북적이는 거리, 대도시의 인파 틈에 묻혀 있는 우리를 생각한다. 익명은 그럴 때는 축복인지도 몰라. 그러니 조용히 행복하게 살다 가자.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로.

처음 본 날 한 친구는 내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괜찮다고, 이제는 평온하고 잘 산다고 했다. 그랬더니 뜬금없이 그러다 불같은 사랑에 빠져서 인생 망할 수도 있다는 소리를 중얼댔다. 미친놈이 갑자기 뭐래. 저주하는 거냐. 너네 아버지 일찍 죽어서 잘 됐네 (그분이) 너한테 마지막으로 잘 한 일이야 부럽다(진심이었다)는 패드립으로 답변해주었다. 아마 그 날 친구가 오면서 읽었다는 책이 이 책이라 저런 소리가 뜬금없이 튀어나왔지 뒤늦게 생각했다. 무슨 책인지 말 안 하고 대강 내용 설명만 했었는데 나중에 이 책 제목이랑 목차 보니 딱 저거 봤었구나 싶었다.
그래서 그 미친놈들 지금은.

+밑줄 긋기
-비트 제너레이션의 작가놈들이 진짜 역대급 개막장 폭망이었는데 (아...여친 머리에 잔 올리고 맞춘다더니 여친 머리에 총 쏜 새끼...하아…) 버로스에게 들은 내용을 긴즈버그가 케루악에게 편지 보낸 구절은 막 가슴을 쳤다.
“우리가 인간의 형상을 갖고 태어난 건 사랑과 고뇌를 인간의 문자로 배우기 위해서야. 그러니 사랑이라는 위험을 감수하는 건 의무나 마찬가지라고.”

-거짓말은 어려운 일. 중혼까지 하고 두 남자를 오가며 미국 동부와 서부를 넘나든 아나이스 닌의 이야기가 특히 충격적?이었다. 참….에너지가 넘치시네요…참...부지런한데다 철저하시네요...
‘하나둘 내뱉기 시작한 거짓말을 눈덩이처럼 불어나, 나중에는 자신이 알리바이로 댄 지인들의 이름 같은 세부사항을 일일이 메모카드에 기록해 ‘거짓말 상자’에 정리해둬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결혼은 뭔가요.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사례가 너무 많이 나왔다. 그런 삶들이 작가들의 작품에 푹 녹아있다. 난 읽은 게 없지만. ㅎㅎㅎ
“인생을 편안하게 해주는 남자를 사랑하는 게 과연 좋은 일인지 모르겠어. 나는 인생을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남자를 사랑하고 싶어.”-이디스 워튼, ‘나무의 과일’

-더글라스의 아내가 된 헬렌의 말은 참 용감해 보였다. 다만 더글라스의 원래 부인인 애나를 홀대하고 밀어내려 들었던 것 때문에 용감할 뿐 멋있지는 않아…
”사랑이 찾아왔는데 상대방의 피부색 때문에 결혼을 주저할 만큼 겁나지는 않았어요.”
(헬렌은 백인이고, 더글라스는 흑인이어서 둘이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린치를 많이 당했다고 한다.)

-오스카와일드는 도리언그레이의 초상은 읽었는데, 재밌었는데, 아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도 이 부분 읽을 때는 욕이 나왔다. 그냥 부인 버리고 남자랑 하고 싶었다고 솔직히 말하면 덜 미울텐데...미래에는 인공 자궁이 빨리 등장했으면 좋겠다. 아니면 남성도 임신하는 기술… 그것도 아니면 스위치 끄고 켜듯 간편한 피임술… 그거 아니면 평등은 요원하고 여성은 저런 개소리에 영원히 고통받는 것…너무 빻은 소리라 긴데도 다 옮겨와 봤다.
“형태가 망가지고 뒤틀리고 흉측한 것에 욕정을 느낄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아내의 임신한 몸을 보고 이렇게 토로했다. “출산이 욕정을 죽였고, 열정은 임신에 묻혔다.” 자신의 감정이 그렇게 극적으로 변한 것을 애석해하며 와일드는 이렇게 썼다. “결혼했을 때 나의 아내는 춤추듯 반짝이는 눈동자에 웃음소리마저 노래하듯 듣기 좋은, 백합처럼 뽀얗고 늘씬한 아름다운 소녀였다. 억지로 만지고 키스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늘 몸이 안 좋았고, 그것도 모자라-아! 떠올리기도 싫다. 구역질나서.”

1992년 초2 때 도서관 회원증 만들어보고 오늘 처음 만들어봤다. 구 통합 회원증인데 동네 가장 가까운 작은 도서관에서도 발급이 되었다. 책은 제법 있는데 공간이 워낙 협소하고 책이 배치된 상태가 안타까웠다. (막 책들 머리 위에 제목도 안 보이게 마구 꽂혀 있는 책들도 많다.) 전자도서관 빌린 거랑 집에 산더미 같은 것들도 아직 다 안 봤는데 ㅋㅋ(알라딘이 내가 2211권 사고 그 중에 11퍼센트인가 봤다고 했다...그런데 오늘 책 또 샀지롱...두 번이나 주문함...아직 엊그제 주문한 거 도착도 안 했는데...) 그래도 도서관 오랜만에 오니 뿌듯하다. 와서 빌린 책은 안 보고 키보드 꺼내서 독후감만 실컷 썼다. ㅎㅎㅎ
얄팍하고 안 사 볼 듯한 거 세 권 빌려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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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쟁이 2020-01-18 0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은 사랑에 온마음 불사르는 타입이신가봐요. 사랑의 불나방님. 역시 열정적이야..
그리고 저.. 고백하자면..사실은 이 책도 제가 다다다다음번쯤 읽으려고 침대협탁에 올려둔 책이라는. 대출해온 도서관 책들 먼저 읽어야해서 미뤄놓은 건데 이번엔 열반님이 먼저 읽으셨군요. 내가 먼저 읽었어야 하는데. 아까비..
그래서 그 미친 놈들은 지금은.. 하실 때. 그 뒷부분은 실눈뜨고 후다다닥 넘겼어요. 스포절대안봄.

반유행열반인 2020-01-18 03:21   좋아요 0 | URL
죄송해요 스포할 뻔 ㅋㅋ그래도 밑줄 긋기라고 명시했으니 잘 했죠? 어쩜 책 취향 찰떡이네요 무님하고 저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1-18 03:28   좋아요 0 | URL
심지어 스포 안 보고 쩜프하는 거도 ㅋㅋ저도 처음엔 미리 읽는 게 너무 싫어서 마구 쩜프하고 그랬는데요 나중에 보니 발췌한 거 읽어도 책 볼쯤엔 다 까먹는 게 진실이더군요...

등대지기 2024-03-02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헐 저 이 글 이제 봤어요. 나보다 더한 미친놈들 보면 위로가 될까 싶어서<-ㅋㅋㅋㅋㅋㅋㅌㅋㅋㅋㅋㅋ 사람 마음 다 똑같네요^_^b❗️❗️ 사랑은 원래 미친거다에 한표요

반유행열반인 2024-03-03 09:40   좋아요 1 | URL
앜ㅋㅋ 근데 저 벌써 이 글이 전생의 나=지금 나랑 다른 놈이 쓴 글 같아요 ㅋㅋㅋ전생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지금의 등대지기님에 유사하다?!!! ㅋㅋ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리커버 특별판)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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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5 벨 훅스

읽은 지 오 년 이상 된 책은 안 읽은 거나 다름없다고 느낀다. 그러니 스무 살 무렵 동아리에서 공연준비를 위해 얼마 간 진행한 세미나에서 열심히 읽었던 여성주의 관련 책들은 이제는 제목마저 생각나지 않는다. 어쨌든 친구들과 열심히 공부하고 나서 월경 페스티벌이란 이름의 축제 무대에서 공연을 했었다. 스물한 살에는 엘리자베스 워첼의 비치 표지를 보고 누드에다 가운데 손가락까지 올린 저자의 도발적인 모습에 안절부절못하다 없는 돈을 탈탈 털어 결국 손에 넣고 말았다. 그 덕에 참치캔 하나를 몇 번에 나눠가며 몇 끼 밥을 떼워야 했지만 책 자체는 재미있게 읽었다. (생각난 김에 검색해 보니 같은 저자의 프로작 네이션 이라는 책도 너무 보고 싶어져서 질러버렸다...) 스물두 살에는 다이어트의 성정치 등의 책을 보고 친구들과 몸과 성차별에 대해 전공 수업 발표를 했던 기억이 난다. 취업하고 얼마 안 되어서 그냥 읽고 싶서져서 이갈리아의 딸들을 사 봤다.
거기까지다. 다 십 년도 넘은 시절이다. 이후로 비슷한 책 조차 한참 안 본 것 같다. 불평등과 차별에 대해 가르치고, 깨알같은 업무 목록에 양성평등 교육 담당이라고 적혀 있긴 했다. 인권, 차별, 평등 등등의 단어가 들어간 연수를 몇 차례 이수했지만 건성건성 들었다. 그러니 아주 오래 안 읽고, 잊어버리고 살았다.
어려서 열심히 읽은 한국 소설은 주로 남성 작가들이 쓴 것이었다. 길게 봐야 이삼 년 전? 아주 최근에야 젊은 작가상 작품집 같은 걸 읽기 시작하면서 여성 작가들이 많이 활약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 녹아있는 성소수자, 젠더, 페미니즘 같은 소재들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그때 나의 반응은...그닥 공감하지 못했다. 가장 인기를 끌었던 어느 작가의 소설은 담고 있는 메시지의 가치나 반향과 별개로 너무 후지게 썼다는 반감 때문에 좋은 말을 하지 못했다. 굳이 찾아 읽으면서도 시류 편승해서 열심히 팔아 제끼려고 급조해 쓰거나 출판한 탓에 완성도가 떨어지는 글들 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편견이었을까. 메시지를 담으면서 예술성까지 챙기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걸 알면서도 문학의 가치와 역할에 유독 편협하고 인색하게 굴었던 것 같긴 하다.
쏟아져 나오는 담론과 논쟁과 투쟁의 모습, 관련 분야의 책들을 나는 외면했다. 혹은 저렇게까지 해야 해? 오히려 반감과 역풍을 가져오고 여성 인권 신장에 부정적일 것 같다는 옆 사람의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하기까지 했다.
왜 그랬을까, 궁금했다. 나는 왜 애써 무관심하거나 냉소했을까. 역설적이지만 오히려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인 사람의 스톡홀름 증후군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이성애자, 기혼자, 임신중절대신 임신과 출산과 육아를 선택하고 경력을 중지한 채 휴직 중인 사람. 주로 문학에서 제기된 문제지점을 보면서 뭔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가치 있는 헌신이라는 믿음으로 선택한 일들이 온통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존재 만으로도 체제를 공고화하는 데 부역하는 사람. 물론 그 공고화된 체제 안에서 큰 고통을 겪는 것도 나같은 위치의 사람일텐데. 그렇다고 그런 것들에 문제를 제기한다면 불편해질 관계, 상처입을 사람을 생각했다.
이런 자각도 있었다. 나의 배우자는 어려서 나와 세미나와 공연을 함께했고 성장 배경의 영향이 있는 것인지 이유는 모르지만 소위 말하는 억압적인 남성상과는 거리가 멀다.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가사나 육아에 있어서 스스로 하는 부분은 제한적이고 내 지시와 요청에 따르거나 돕는 수준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우습게도 남성 가부장이 부재한 상황에서 상호 호혜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이뤘냐, 하면, 억압을 넘어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나는 성별만 바뀌었을 뿐 그 가부장의 역할을 열심히도 재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역할은 전통적인 엄마들 하는 부담을 지면서, 가족 구성원을 대하는 태도는 내가 원하는대로 많은 부분을 통제하고 대부분의 결정을 내 마음대로 하면서 그걸 제대로 따라주지 못할 때 잔소리를 퍼붓고 거기에 언어든 신체든 폭력적인 요소까지 가끔 동반되는 일이 있었다.
자각을 못하는 게 아니라 끊임 없이 자책하고, 고쳐야지, 하면서도 나아지다 악화되고. 그러니 그런 문제제기를 하는 글들을 볼 때면 눈물 가득한 채 노려보는 눈이, 가리키는 손가락이 온통 나를 비난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나아지고 싶고 달라지고 싶은 마음은 있다. 그래서 남들이 남기는 글도 읽어 보고, 어떤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는지, 어떤 정책이 요구되고 있는지 조금씩 관심을 가지는 중이다. 입문서라도 다시 보자,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골랐다. 페이지가 얇아서 제일 마음에 들었다. 저자가 ‘명료하고, 간결하고, 쉽게 읽히는 책’이라는 바람을 실현한 책이라고 했다.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가고 솔직히 말하면 아주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흑인 여성으로서 성차별문제와 인종차별문제 양쪽 모두에 민감함을 가지고, 수십 년 간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 투신, 헌신, 연구한 저자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 페미니즘 운동의 약사는 제법 생생하게 와 닿는 부분이 있었다. 책의 내용 또한 수많은 페미니즘 갈래 중 하나의 주장이겠지만 그래도 운동의 문제점과 나아갈 방향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안하는 부분이 가치 있어 보였다. 깊이있지는 않아도 페미니즘과 연결될 수 있는 삶의 다양한 부분을 최대한 많이 언급해 놓은 것이 입문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 꼭지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이 있다면 더 자세하게 파고들어간 다른 책들을 찾아볼 수 있으니까.
어제 사회과교육과정을 오랜만에 뒤적여 보았다. 차별과 불평등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국가수준 문서에 명시되는 날이 올까? 하는 질문에 친구는 오지 않을까, 하고 답했다. 나에게는 그 정도까지 확신은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어린 친구들이 차별과 착취와 억압이 문제라는 것을 알고 해결하려 노력하는 사람으로 자라는 데 기여할 만한 방법을 궁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밑줄 긋기
-이 명료한 개념 정리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
-억압의 가해자가 남성 뿐 아니라 여성 스스로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책에서 저자가 계속 성토하는 개혁적 페미니스트들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 기득권에 편입되어 올바른 변화를 방해하는 역할을 하고 있던 건 아닌가 돌아보게 되었다.
‘의식화 모임이 거둔 가장 강력한 성과는, 모든 여성에게 내면화된 성차별주의, 다시 말해 가부장제적 사고와 행동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직시하고 페미니스트로 거듭나라고 촉구한 것이다. 이러한 개입은 여전히 필요하다. 페미니즘 정치를 선택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런 단계를 꼭 거쳐야 한다. 외부의 적과 맞서려면 그전에 내면의 적부터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를 위협하는 적은 성차별주의적 사고와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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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01-15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님 요즘 열독하시네요. 저는 그렇지 못한데......
알라딘 뜨문뜨문 등장하는 syo의 빈자리(그리 큰 것도 아니겠지만)를 반님이 채워주세요.....
저는 현실세계에서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더 많이 채워야 하지 않나 싶어요.....

반유행열반인 2020-01-15 22:22   좋아요 0 | URL
우와 현실세계에서 syo님이 있어야 할 채워야 할 자리가 생긴 게 저는 정말 반갑고 기쁘게 여겨집니다. 곱고 재미난 글 자주 못 보게 된 건 이 작은 공동체와 저 개인에게 아주아주아주 큰 손실이지만...눈물 닦으며 괜찮아 어여 가 하는 중입니다...

무식쟁이 2020-01-16 14: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의 내 안의 혁명. 하나.
한 명이라도 말하게 되는 내일. 혁명 둘
모두 말하게 되는 날. 큰 혁명. ... 이라고 <디디의 우산>을 읽고나서 메모장에 끄적여 놓았었네요 제가.

반유행열반인 2020-01-16 15:06   좋아요 0 | URL
우와 뭔지 모르게 되게 심오해요. 저는 디디의 우산 읽고 막 깠던 거 같은데...황정은님 좋아하지만 빠가 무서워서 살살...ㅋㅋㅋ 큰 혁명 오면 막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그럴까요 ㅎㅎㅎ

무식쟁이 2020-01-16 15:17   좋아요 1 | URL
저는 뭐 맨날 혼자 방구석 혁명중이라. 제3의 장소(like 알라딘)에서 제대로 말하는 사람들 (like 반x행x반x님) 보면 참 멋져요.

반유행열반인 2020-01-16 15:21   좋아요 0 | URL
네? 제가요? 제대?제대로? 제 뭐요? 저 그냥 방구석 키보드 워리어요...ㅋㅋㅋㅋ참 멋지다 고이 넣어두셔요...무님 취향 특이하셔요...

무식쟁이 2020-01-16 15:56   좋아요 1 | URL
왁. 방구석 키보드 워리어 ㅋㅋㅋㅋ
열반인님이 말씀하시니까 막 간지나고 막..🤭

근데. 저 취향 특이한거는 쵸큼 맞는거 가타요.. 😒

반유행열반인 2020-01-16 16:11   좋아요 0 | URL
아...취향 특이한 사람한테 약한 특이한 취향을 가진 저인데...약해집니다...간지도 넣어두세요...저한테 왜 이러세요 ㅋㅋ(갑자기 급 제가 모이웃님한테 하던 액션을 떠올리며 아 이런 기분이셨겠다...하고 급반성중입니다...)

2020-01-16 15: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16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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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3 줄리언 반스

보내야 하는 시간동안 책을 읽었다. 의외로 그 시간이 꽤 괜찮았다! 밖은 춥고 안은 따뜻했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그런데 무척 재미있었다. 아직 읽지 않은 책이 많이 남은 게 신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 걱정이 들었다. 그저 평범하고 최악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던 살아온 날들, 그 작은 역사를 문득 돌아보다가 나야 말로 구제불능의 쓰레기였고 내 인생 자체를 부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면 어쩌나 하는. 그래서일까 미리부터 스스로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매번 되뇌이고 가깝고 먼 예전 일들을 돌아보며 부끄러워 하는 일을 반복한다. 다 부질없는 짓이다. 내가 상처주고 고약하게 굴었던 사람들은 내가 그러는 걸 모른다. 안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이십 대 어린 날. 나는 이제 두 사람 분을 먹어야겠군, 하며 커다란 오리지널 와퍼를 꼭꼭 씹어 삼켰다. 두 줄이 그어진 사진을 보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니어 와퍼 하나를 겨우 꾸역대며 삼키고 밤새 토하던 옆 사람 모습이 기억난다.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사람 너무 무서워서 죽어버리는 건 아닐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지만 그 정도의 충격을 받을 정도로 준비되지 않은 임신은 두 사람 모두에게 큰 사건이다. 그래도... 배부른 채 수근대는 소리 무시하며 낳기 며칠 전까지 돈벌러 나가고 찢어지는 고통으로 낳고 젖먹이고 안아 재우는 건 누구였을까요. 목을 매거나 욕조에서 손목을 긋지 않은 건 감사할 일이지만. 그냥 십 년 전의 그런 일들 생각이 난다.
주제는 사뭇 다르지만, 잃었던 기억을 되짚어가는 구성에서 올드보이가 생각났다. 전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아니, 자기가 겪은 일을 어찌 잊지? 기억에도 있고 일기도 쓰고 편지도 쓰고 하잖아. 그런데 그런 것들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 진실을 담는데 취약하고 편향된 관점이 담기는지 뒤늦게 알았다. 거기에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축복인양 바라던 망각이 기억을 잠식하는 꼴을 드디어 보게 되었다. 이런 거구나...내가 틀릴 수도 있겠구나...그걸 모르고 누굴 미워하고 누구에게 미움받는 걸 모르고 살 수도 있겠구나… 약간 무서워진다.
어릴 때는 여럿이 몰려다니고 농담 따먹고 궤변 늘어놓고 그러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특히 남자애들 패거리 노는게 너무 재미있어 보였는데. 그깟 빻은 놀이가 뭐가 부러웠나 모르겠다. 면밀히 주변인으로 관찰하며 배운 거라곤 음담패설과 욕뿐, 남남이고 여여고 여남이고 셋 이상의 이너써클에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사춘기 남자아이들이 노닥거리는 소설 보면 괜히 회한에 젖는다. 지나고 보면 걔들도 다 저 살기 바빠서 안 만날 걸...토니가 친구도 없고 부인하고도 이혼하고 자식도 안 찾아오고 하는 걸 보면 대체 말년에 남는 사람이란 누굴까 무얼까 싶다. 저놈처럼 눈치없고 생각 없이 살지 말고 주변 사람들에게 착하게 대하며 살아야겠다 싶다. 급 교훈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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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쟁이 2020-01-14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지나면 인간은 멋대로 기억을 재배치하는가봐요. 저도 이소설 엄청엄청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음. 이것도 재구성된 기억인지 자신감 급하락.

반유행열반인 2020-01-14 16:55   좋아요 0 | URL
책 읽고 좋았었다고 남은 기억은 정확하지 않아도 누구도 해치지 않으니 자신감 하락하지 않는 걸로!! ㅎㅎ
 
LGBT+ 첫걸음
애슐리 마델 지음, 팀 이르다 옮김 / 봄알람 / 2017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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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1 애슐리 마델
작년에 퀴어의 사랑을 다룬 한국 소설들을 몇 편 읽었다.
문득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알아보려는 노력은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었다.
태어나서 주어지는 대로 자신을 규정하고 혹은 규정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성을 스스로 또는 남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용어를 만들고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한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수많은 갈래 중에서도 섹슈얼리티나 젠더에 한정하고도 책에 소개된 것만 80여가지였다.
하나하나 용어들을 보며 다 외우고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책 초반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분법을 넘어서 스펙트럼, 좌표 위에 그릴 수 있는, 혹은 심지어 표시할 수 없는 정체성이 있다는 걸 아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무심히, 혹은 호기심에서 던지는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수많은 말들이 누군가를 단정하고 규정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자신을 찾고 설명하고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거나 삭제당하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도 기억하기로 했다.
자신에 대해 말하는 퀴어들의 사례를 곁들인 용어집 형식이라 재미있거나 쉽게 읽히는 편은 아니다. 스스로에 대해 많은 물음을 던지는 과정에 있다면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도움이 될 듯하다. 사람은 범주화하길 좋아하고 거기서 안정을 느끼니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아주 가까운 말을 찾는 일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다양한 끌림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무성애를 포함해 설명하였다. 왜 퀴어축제에서 무지개 모양을 쓰는지 이제 좀 알 것 같은데 사실 무지개로도 부족할 만큼 다양한 차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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