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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평점 :
-20200305 권여선.
겨울 한가운데서 빌린 책을 여태 들고 있다. 내 책인양 쥐고 천천히 읽은 소설집 두 권 다 비슷한 때 나왔고 둘다 참 좋았다. 이제 도서관에서 빌린 건 어빙 고프만의 사회학 책 달랑 하나 남았다. 더디 읽겠지만 다 읽기 전에 도서관이 다시 열리면 참 좋겠다. 봄, 을 다시 볼 날을 기다린다.
평행우주의 나들은 죄 엉망이다. 직장에서 쫓겨나고, 이혼하고, 아직 정신병자 아버지와 한 집에 살고, 알콜중독이고, 여태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먹고, 아이를 잃고, 사랑을 잃고, 노숙을 하고, 성매매를 하고, 신용불량자이고 등등. 이런 상태의 다른 사람까지 엉망이란 뜻이 아니다. 나들은 그 상황에 처한 스스로를 못견뎌하고 불행해서 엉망이다.
나들을 가끔 불러 안부를 묻고 객관적으로 덜 불행해야 할 여기의 나를 다독인다. 못됐어. 그렇게 못된 방법까지 동원해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미워할 이유를 찾아내거나 만들어 낸 나는 때도 곳도 없이 펑펑 운다.
작가와 등장인물을 동일시하는 건 멍청한 짓인 걸 뒤늦게라도 알았지만, 이번 소설집 읽으면서 자꾸 이야기들을 쓴 한 사람이 자신의 나쁜 가능성들, 혹은 그 부스러기들을 쪼개서 여러 세상에 부려놨다 싶었다. 그걸 다시 합치면 혼자 살고, 늙어 가고, 소주를 물이나 차 처럼 마시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고, 예전 일을 돌아보고, 글을 쓰는 여자 한 명이 나타날 것 같다. 그건 나들 중 하나일 수도, 어쩌면 먼 미래의 나일수도. 그래서 읽는 내내 슬펐다.
-봄밤
단행본으로 한 편만 묶인 책에서 반년 전에 본 소설을 다시 보았다. 마지막 장 붙잡고 눈물 쏟는 걸 꾹 참느라 혼났다. 가련한 알류커플 영경과 수환. 친구는 이 소설을 트로트 명곡이라 했지만, 최루성 신파면 어떠냐 삶의 끄트머리까지 사랑이 있다면.
이번에는 기필코 영경이 술을 마시며 부르짖던 김수영의 시 전문을 찾아보기로 했다.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 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나의 봄과는 밤이 없다만.
-삼인행
곧 헤어질 부부인 주란과 규, 훈이 겨울 강원도로 여행을 떠난다. 집에 처박혀 있던 나도 몰래 따라나서니 재미있었다. 햄버거랑 홍게랑 황태 먹을 때 침흘리며 구경했다. 책 읽는 내내 술은 몰라도 술안주는 먹고 싶었다.
-이모
이모처럼 홀로 쓸쓸하게 아무 것도 안 하다 돈 떨어지기 전에 불쑥 죽고 싶다고 생각을 했는데 바보 같다. 사람 없이, 사랑 없이 견디지도 못할 거면서. 내민 손을 지지는 담뱃불. 그렇게 되지는 말아야겠다. 언 수도관을 녹이고 이웃과 관리 직원과 노숙인과 복닥댄 하루. 그 이후의 삶. 열심히 이모를 방문하는 관찰자인 조카 며느리(?)도 특이하다.
-카메라
사진, 돌바닥, 불법체류자, 상실, 우연, 되돌릴 수 없는 일들. 작위적이긴 한데 뒤늦게 아는 진실을 슬프게도 그려놨다. 내게도 뒤늦은 깨달음이 얼마나 더 이어질까. 아예 모르는 게 나을지 나중에라도 아는 게 나을지.
-역광
문학촌 신세를 많이 진 친구가 전한 풍경과 너무 똑같아서 깜짝 놀랐다. 눈이 머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 곧 모든 세상을 잃는 일이다.
-실내화 한켤레
다시 만난 어린 시절 친구라는 게 마냥 좋을 순 없구나, 이런 흙탕판. 참 난 친구가 없었어서 다시 만날 일 자체가 없어...하하하…
-층
엇갈림. 초밥 먹고 싶다. 오차츠케도 먹고 싶다. 엉뚱하게 지금은 치즈 돈가스가 제일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