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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평점 :
-20200319 아룬다티 로이.
이국적인 향신료 냄새를 풍기는 커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터번 쓴 인도 아저씨가 잔이 빌 새 없이 주전자로 물을 채워준다. 네팔이나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 사람일수도 있다. 그의 종교가 힌두교인지 이슬람교인지 시크교인지 불교인지 기독교인지 알지 못한다. 인도음식점에서 우리는 인도에 대해 더 알게 된 게 없었다.
닌텐도 게임 화면 속 트레이너를 따라 한 다리로 서고 양쪽 검지손가락을 위로 모아 쭉 뻗는다. 요가가 인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들었는데, 인도에서는 나무자세를 뭐라고 부를까. 경건함과 상쾌함이 동시에 찾아오는 태양예배 자세는 어떤 신을 향한 몸짓일까.
인도영화는 왜 항상 마지막에 다같이 낯부끄러운 군무와 떼창을 선보일까. 몇 편 보고 나면 굳이 더 찾아볼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렇게 인도를 잘 모르는 내가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 ‘지복의 성자’를 읽는 동안에는, 그곳 사람들 곁에 바짝 다가가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그들과 내가 바라는 건 매한가지였다.
자유, 사랑, 행복, 사람다운 삶, 혼자가 아닌 삶.
큰 바람이 아니지만 어디서나 이루기 쉽지 않은 꿈이다. 모두들 가끔 행복하고 가끔 슬프다가 결국 묘지로 향한다.
1. 성 정체성
어릴 때 문득 생각했다. 내 겉모습은 여자아이지만 몸 안에 남자아이도 함께 있는 것 같아. 그러니까 혼자서도 아이를 만들지도 몰라.
자가생식가설은 틀린 모양이다. 짝사랑하는 동안은 2세를 얻지 못했다.
지정된 성별대로 공학 중고등학교의 여자반에 배정되었다. 무럭무럭 자라 브래지어와 생리대와 스타킹과 립스틱을 샀다. 내내 남자아이들을 사랑했고, 아이가 생겼고, 낳았고, 젖을 물렸고 아기가 싼 똥을 치우고 안아서 재웠다. 그런 일들은 한 번도 의논 거리 된 적 없이 저절로 내 몫이 되었다.
내게 당연히 주어진 것이 누군가에게는 열망하는 삶의 형태이고, 그 중 이룰 수 있는 것이란 스타킹과 립스틱 같은 겉보기에 한정된 사람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들의 삶에 관심이 갔다. 기사를 찾아 보고, 영화나 책을 보았다.
‘아요디아 외곽의 숲 가장자리에 이르렀을 때, 람왕은 백성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 모든 남자들과 여자들은 집으로 돌아가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라.” 왕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던 남자들과 여자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오직 히즈라들만이 꼬박 십사 년을 숲가에서 충성스럽게 왕을 기다렸는데, 그건 왕이 그들에 대해 언급하는 걸 잊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우린 잊힌 존재로 기억되고 있는 거네? 와! 와!” 우스타드 쿨숨 비가 말했다.’
지워진, 잊힌, 부정당한 존재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들. 두 성별로 구분된 화장실 앞에서 어디로 들어갈지 망설이다 소변을 참고 돌아선 경험은 없었다. (줄이 길어 못 들어간 적은 많다.) 누군가에게는 고민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일로 힘든 사람들이 있다.
인도에는 히즈라와 칸나르라는 단어가 있다. 아프타브는 두 성을 한 몸에 지닌 간성인으로 태어났지만 산파와 부모의 판단과 바람대로 남자아이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아프타브는 자신이 ‘여자처럼’, 정확히는 여성의 치장을 한 히즈라처럼 되고 싶다는 것을 깨닫고 집을 나온다. 두니야(현실 세계)를 떠나 히즈라 공동체인 콰브가(꿈의 집)에 들어가 그곳 사람들과 함께 지내게 된다.
안줌이라는 새 이름을 얻은 그녀는 성전환수술을 선택하지만 불행히도 의사가 돌팔이여서 겉보기로만 여성성기를 얻는 대신 영원히 쾌락을 잃는다. 영화 속 헤드윅이 미군과 결혼해서 동베를린을 벗어나려고 성전환을 택하지만, 수술 실패로 화난 1인치를 울부짖게 된 상황이 떠올랐다. 그렇게나 고통스럽고, 실패 위험이 있고, 목숨까지 거는 수술을 어떤 사람들 말처럼 여성에게 나쁜 목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감내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었다. MtoF 트랜스젠더 수험생의 여대 합격 이후 ‘인간은 비둘기가 될 수 없다’는 혐오 범벅 글을 게시한 여성들 소식을 마주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며 연대한다는 사람들이 어째서 다른 이들의 고통은 외면하다 못해 모욕하고 짓밟을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콰브가의 구성원은 안줌처럼 여성으로 외과적 시술을 받은 사람 말고도 각자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한 종교와 성적 정체성을 가졌다. LGBT+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그 한 권에 소개된 성 정체성만 해도 80가지가 넘는다고 했다. 이토록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성별 이분법을 당연시하고 본인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지정된 성별을 절대시하는 사람이 많다. 지배적 규범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찾으려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멈추지 않는다.
원하는 성을 불완전하게나마 되찾은 안줌은 아기를 돌보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길에 버려진 자이나브를 거두어 키우면서 그 꿈을 이루는 듯싶었다. 아픈 자이나브가 저주에 걸렸다 믿고 쾌유를 빌기 위해 안줌은 하즈라트 영묘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발생한 이슬람교 대학살 와중에 동행한 자키르 미안은 살해된다. 안줌은 히즈라를 죽이면 운이 없다는 믿음 덕에 힌두교인 손에 죽지 않고 겨우 풀려나 동료들이 데리러 올 때까지 난민촌에 머문다. 학살의 목격자가 되는 일, 자키르 미안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안줌은 불안해 하고, 자이나브를 학살과 강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남장을 시키고 힌두교의 가야트리 만트라 찬가를 암송시킨다. 안줌의 오랜 부재와 불안에 지친 자이나브가 공동체 내 젊은 히즈라인 사이다를 엄마처럼 따르자 상처 받은 안줌은 콰브가를 떠나 묘지에 자리를 잡는다.
묘지에서도 안줌은 혼자가 아니다. 이맘 지아우딘이 말동무를 하러 찾아오고, 경비원, 시체안치소 일을 하던 사담 후세인이 그녀 곁에 머문다. 안줌은 가족의 묘지 위에 방을 지어 빈민들이 머무는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만든다. 우연한 기회로 일반 장례식장에서 거부하는 시신을 거두는 장례식장까지 함께 운영하기 시작한다.
‘“비루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일단 벼랑 끝에서 떨어지면 추락을 멈출 수 없어.” 안줌이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추락하면서 역시 추락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매달리게 되지. 그 사실은 빨리 깨달을수록 좋아. 우리가 사는 여기 이곳, 우리가 보금자리로 삼은 이곳은 추락하는 사람들의 집이야. 여기엔 하키카트(현실)가 없어. 이봐,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도 현실이 아냐. 우린 진짜로 존재하는 게 아냐.”
사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안줌을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가 말하는 방식도, 선택하는 단어도, 입을 움직이는 모습도, 썩은 이빨 위로 판 물이 든 붉은 입술을 움직이는 모습도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의 우스꽝스러운 앞니도, 그가 거의─혹은 전혀─이해하지 못하는 우르두 시를 통째로 암송하는 것도 사랑하게 되었다.’
옷차림과 화장으로 한껏 멋을 부리고 발찌와 유리팔찌와 달랑거리는 귀걸이와 코핀으로 꾸민 안줌의 모습에 긴 양말과 커다란 구두를 신고 머리를 양갈래로 땋은 삐삐롱스타킹이 자꾸 겹쳐보였다. 옆에서 그녀를 돕는 사담과 그의 흰 암말 파얄은 항상 삐삐와 함께 다니는 원숭이 친구 닐슨과 괴력의 삐삐가 번쩍 들어올린 흰 말과 닮았다.
고집이 센 듯하지만 언제나 자기 의견대로 과감하게 결단 내리는 안줌은 마냥 씩씩하고 그래서인지 매력이 철철 넘친다. 어머니 자하나라 베굼의 바람대로, 죽은 몸으로도 사랑의 시들을 낭송하던 하즈라트 사르마드의 보살핌을 받은 덕일까.
2. 카슈미르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 국제 분쟁 사례로 카슈미르 지역이 지도와 함께 제시되어 있다. 카슈미르의 일부는 파키스탄 땅이지만, 일부 지역은 주민 대부분이 이슬람을 믿고 지배층이 힌두교도인 인도의 지배령이다. 이슬람교도들은 지배계층에 수단을 가리지 않고 저항하고, 인도군은 저항군을 진압한다.
우리 나라 사람 중 믿는 이가 그리 많지 않은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대립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서로를 향해 핵탄두를 날리겠다고 위협하고, 국지적 교전은 끊이지 않고, 대규모의 무력 충돌과 전쟁으로 국제 정세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슬람 전사들은 인도 한복판에서 자살 폭탄 테러로 맞서고, 인도 정규군은 이들을 색출해 고문하고 학살하며 주민들을 폭력과 공포로 다스린다.
왜 그런 극단의 증오를 키우게 되었을까. 이 물음에 대학 시절 함께 연극을 준비하던 네 친구, 틸로마타와 무사, 나가, 비플랍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답을 주었다. 틸로와 무사는 잠시 연인이었고, 나가와 비플랍 또한 틸로를 연모했다. 한 때의 우정과 애정으로 맺어진 그들의 인연은 카슈미르에서 기묘하게 얽히고 꼬인다.
무사는 자신이 나고 자란 카슈미르를 틸로에게 보여주고 싶어한다. 틸로는 카슈미르를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수많은 사건과 그에 대한 의문을 기록으로 남긴다. 권력자의 이해관계와 이슬람 전사 목에 걸린 현상금 때문에 많은 카슈미르인들이 인도군의 손에 죽는다. 그래도 카슈미르는 아자디(자유, 독립)를 외치며 저항을 멈추지 않는다.
‘문제의 폭발음은 옆 도로에서 빈 망고 프루티* 용기가 승용차에 깔리면서 난 소리임이 후에 밝혀졌다. 누구 탓을 하겠는가? 망고 프루티(신선하고 진한) 용기를 길에 버린 사람? 인도? 카슈미르? 파키스탄? 승용차 운전자? 대학살의 원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사실들은 입증되지 못했다.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그게 카슈미르였다. 그건 카슈미르 탓이었다.
삶은 계속되었다. 죽음도 계속되었다. 전쟁도 계속되었다.’
이슬람교도 희생자를 기리는 장례 행렬 도중 음료수병이 터지는 폭음에 놀란 인도 군인들이 발포한다. 안전해야 할 집 발코니 위에서 행렬을 구경하던 무사의 아내와 딸 미스 제빈은 그 총알에 맞아 죽는다. 이슬람 전사들을 잔인하게 사냥하는 인도군 지휘관 암리크 싱은 그날 총기 난사의 장본인이나 다름 없으면서 위로랍시고 무사를 불러 들여 굴욕을 준다. 무사는 사고 이후 다양한 신분으로 위장하며 저항 운동에 투신한다. 그의 친구 굴레즈 마저 현상금을 노린 암리크 싱의 손에 (무사로 위장되어) 살해되고 굴레즈의 보트에 머물던 틸로도 체포된다. 무사는 가까스로 도망치고, 틸로는 정보국에서 일하는 비플랍에게 연락해달라고 자신을 가둔 군인들에게 요청한다. 비플랍은 본인 대신 기자인 나가를 틸로가 구금된 곳에 보낸다. 틸로가 풀려나는 데 도움을 준 일을 계기로 나가와 틸로는 결혼한다.
틸로와 나가의 결혼 생활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다. 무사는 내내 떠돌다 여행하는 틸로 곁에 잠시 왔다 가곤 한다. 나가와 이혼한 틸로에게 건물을 세놓아 거처를 마련해 준 비플랍은 틸로가 떠난 뒤 방에 남은 자료들을 살피며 암리크 싱의 죽음이 정말 자살이었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죽음으로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땅. 내 목숨마저 내 손에 달리지 않은 희망 없는 곳의 사람들에게 싸움 외의 선택지가 있는지 조차 의문이었다. 한 쪽의 절멸 이전에는 끝나지 않을 싸움을 멈출 방법을 누가 알고 있을까.
‘죽음은 더 깨끗해지고, 불운은 더 짜지고,
대지는 더 진실해지고, 더 끔찍해진다.’
3. 여성, 인도 여성으로 산다는 것
소설에는 수많은 엄마와 여성이 등장한다. 자하라나 베굼은 아프타브의 간성을 발견하고 하즈라트 사르마드 영묘를 찾아가 아이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빈다. 혼자서 고통스러운 비밀을 간직하다 아이 아버지에게 사실을 알리지만 너무 늦게 알렸다고 비난만 받는다.
마리암 이페는 불가촉천민과 교제하여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아이 아버지는 (아마도) 살해당하고, 딸 틸로는 한 번 버려졌다 다시 친어머니 마리암에게 입양된다. 양어머니인 양 진실을 감추고 평생을 살다 임종 전 치매와 섬망으로 틸로를 힘들게 한 어머니, 틸로가 의자를 부숴버린 다음 날 숨을 거둔 그녀의 삶 역시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의미 없이 던진다 생각하고 틸로가 받아적었던 어머니의 말 ‘나 지금 고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 같다. 그러니?’, 그리고 생전 어머니가 좋아하던 셰익스피어의 구절이 히즈라들에 둘러싸인 마리암 이페의 두 번째 장례식날 틸로에게 떠오르는 순간은 마르케스 소설 속 환상들처럼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틸로의 삶은 현대 여성이 겪을 수 있는 온갖 어려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 성희롱을 하고 집앞까지 찾아와 수작 부리는 상사를 처리하기 위해 틸로는 운동으로 몸을 키우며 대비한다. 혼자 사는 여자가 겪는 위협을 막으려고 자신을 마약거래상이라 여기는 이웃의 오해를 일부러 수정하지 않는다. 무사와의 사랑 후 생긴(제빈이나 굴레즈가 될 수 있었을) 아이는 나가와 결혼하기 위해 중절 수술로 없앤다. 보호자 없이 마취 없는 수술을 받고 기절했다가 다른 환자와 함께 쓰는 침대 위에서 깨어나는 장면은 악몽 같았다. 피임도 낙태도 여자의 몫으로 여기는 세상은 인도 말고도 무수히 많다.
틸로는 굴레즈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었지만 동행자가 만류한다.
‘”...여자들은 무덤 근처에 가는 게 허용되지 않거든요. 나중에 가요. 다들 떠난 뒤에.”
여자들은 허용되지 않는다. 여자들은 허용되지 않는다. 여자들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건 여자들에게서 무덤을 보호하기 위함일까 아니면 무덤으로부터 여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일까?’
애도의 기회조차 성별에 따라 달리 주어지는 지역이 있다. 보호할 이익은 하나도 없는데도 그렇다.
틸로는 시위 장소에 버려진 아기를 데려다 미스 제빈 2세로 키우려고 한다. 모성이란 타고나는 것이라는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아기를 원하는 안줌이나 틸로를 보면 무한한 사랑을 쏟을 수 있는 약한 사람을 원하는 마음이 이해가 간다. 누구나 죽기 전까지, 어떤 암흑 속에서도 사랑을 주고 받길 원하니까. 아기는 그런 사랑을 쏟기에 적합한 존재이다.
편지를 통해 알려진 미스 제빈 2세(우다야)의 친엄마 레바티의 삶은 참혹하고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레바티의 어머니는 지참금이 적다고 결혼식날 거부당하고 남편에게 잔인하게 학대당하다 버림 받는다. 마을 사람들은 레바티의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카스트를 운운하고 어머니를 부정한 사람 취급한다. 성장한 레바티는 공산당에서 활동하다 경찰에게 붙잡혀 집단 강간을 당하고 아이까지 낳게 된다. 공산당의 숲속 게릴라 투쟁에서 아기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던 그녀는 아이를 잔타르만타르 집회 현장에 놓고 왔다. 그녀는 당의 나쁜 점을 알면서도 떠날 수 없고, 증오하는 이들 때문에 생긴 아이지만 ‘아기가 너무 작고 귀여워서’ 죽이지 못한다. 아이를 도시에 둔 그녀는 죽음을 각오하고 숲으로 돌아간다.
학살의 현장에서 여성들은 다른 종교와 이념을 가졌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강간당하고 살해된다. 정부에 대항하는 세력도 성별 불문하고 성고문과 강간을 당한다. 타고난 여성 뿐 아니라 히즈라들조차 성희롱과 성폭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분쟁의 현장에서 인간성이 제일 손쉽게 파괴되는 사람은 약자인 여성과 아이들이다. 세계 곳곳에서 공포와 불안에 떨며 고달픈 삶을 이어가는 게 여성 대부분의 삶이지만 소설을 통해 확인한 인도의 상황은 독보적으로 끔찍했다.
4.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크게 고통 받는 사람들
-도시로 용수와 전기를 댈 댐이 세워지면서 마을이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홍수 피해로 온 동네가 통째로 진흙에 잠겨 더는 살 수 없는 곳이 된다.
-시골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도시로 와서 빈민, 저임금 노동자, 마약중독자가 된다.
-도시의 공장은 오염 물질을 쏟아내고 유독 가스 유출 사고로 인근 주민들이 죽거나 실명하거나 장애가 생긴다. 사고에 책임이 있는 회사는 이름만 바꾼 채 계속 영업을 한다.
-정부군과 힌두교도 민간인들의 무차별 학살로 자식을 잃은 이슬람교도 어머니들이 집회를 하지만 그들의 외침은 공허하게 흩어진다. 고통을 호소하는 시위대 옆으로 철없는 쇼핑객들이 나아진 삶을 찬양하며 큰 상처를 준다.
“어머, 와아! 카슈미르! 정말 즐거운 곳 같은데! 이제 완전히 정상화되어서 관광객들에게 안전할 거야. 우리 갈까? 얼마나 멋지겠어.”
-길에서 단식 투쟁을 하는 아자드 바르티야 박사는 아기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들에게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폭행과 인쇄물 압수를 당한다.
-죽은 소의 사체를 치우는 카스트였던 사담의 아버지는 이유 없이 그를 구속한 경찰의 방임 아래 군중에게 소 도살자로 몰려 맞아 죽는다. 사담은 그 일을 겪고 나서 이름을 이슬람식으로 고치고 아버지를 죽게 만든 경찰을 없애는 걸 목표로 정부에 반대하는 활동에 나선다.
-마을 바보 취급 받던 지적 장애인들(무사가 모우트라 지칭한다)은 점령군에게 제일 먼저 살해 당한다.
“카슈미르에서는 거의 모든 모우트들이 죽임을 당했어. 명령에 복종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제일 먼저 죽임을 당한 거야. 어쩌면 그래서 우리에겐 그들이 필요한지도 몰라. 우리에게 자유로울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니까.”
“혹은 죽임을 당하는 법이나?”
“여기선 똑같은 의미야. 오직 죽은 자만이 자유로우니까.”
-빠른 개발과 인구 성장 속에 인도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불평등을 드러낸 나라가 되었다.
‘차들이 20차선을 쌩쌩 달리고 양옆으로 강철과 유리로 된 고층 빌딩들이 들어서고 있는, 밀밭만큼 넓고 ‘오줌을 누는 게 불가능한’ 고가도로를 달렸다. 하지만 출구로 빠지자 고가도로 밑은 완전히 딴 세상임을 알 수 있었다─도로포장도 안 되어 있고, 차선도 없고, 가로등도 없고, 통제도 안 되는 거칠고 위험한 세상에서 버스, 트럭, 거세한 황소, 릭샤, 사이클, 손수레, 보행자 들이 생존을 위한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한 종류의 세상이 굳이 성가시게 멈추어 알은체하지 않고 다른 종류의 세상 위를 날아갔다.’
-틸로의 파일 속 카슈미르 주민 경험담 중 아래 기록을 읽고 깜짝 놀랐다.
‘P가 내게 말하기를, 최근 ‘친선 작전’의 일환으로 군에서 스물한 명의 아이를 해군 배에 태워 소풍을 데려갔다고 했다. 그 배는 전복되었다. 스물한 명의 아이가 모두 익사했다. 익사한 아이들의 부모들이 시위를 벌이자 군은 그들에게 총을 쏘았다. 운좋은 사람들은 죽었다.’
아이들이 물에 빠져 죽고 항의하는 부모들이 더 큰 상처를 받는 이야기가 여기서도 되풀이된다. 우리가 모르는 어디선가 일어나선 안 될 일들이 자꾸만 반복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슬퍼졌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는 사례들. 분쟁 속에 결국 제일 먼저 희생되는 건 가장 약하고 아픈 사람들이다.
온통 절망투성이인 것 같지만, 등장인물들은 희망을 보여준다. 어려움을 함께 겪고 도와주는 친구와 이웃이 있고, 새로운 사랑이 피어나고, 서로를 축복한다. 사담과 자이나브의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 안줌은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하즈라트의 무덤을 찾아간다.
‘안줌은 기도를 올린 후 사르마드에게 젊은 부부를 축복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리고 사르마드─지복至福의 성자이자, 위로받지 못한 자들의 성인이며, 정확히 규정될 수 없는 자들, 신자들 속의 신성모독자, 신성모독자들 속 신자의 위안慰安인─는 그렇게 해주었다.’
약하고 소외된 자들이 찾아갈 장소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우리 곁에도 그렇게 기대어 행복을 빌 곳이 이미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큰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가장 큰 기쁨을 나누고 싶을 때 함께 하는 가족, 연인, 이웃, 친구들. 사랑하는 이들이 살아 있는 성자임을 잊지 않는다면 조금 더 행복하고 조금 덜 불행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