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로셀라 포스토리노 지음, 김지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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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4 로셀라 포스토리노.

나치 독일 아래 학살당하거나, 사랑하는 이를 포함한 모든 것을 잃고 겨우 살아남은 유대인을 다룬 이야기는 많이 접했다. 초등학생 때 읽은 안네의 일기, 중학생 때 본 아트슈피겔만의 만화 쥐, 조금 더 커서 본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피아니스트, 쉰들러리스트 등. 나치에게 부역했던 연인이 나오는 영화 더 리더(소설은 아직 못 읽었다)가 조금 특이한 소재였다. 전범 재판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읽는 내내 어려웠지만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생각보다 쉽게 악한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이 책은 같은 시기를 겪은 독일인의 이야기이다. 대다수 독일인이 나치당에게 정권을 맡기고 전쟁이 일어나는 데 일조했지만, 모두가 나치를 좋아하고 전쟁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독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며 분노할 수도 있겠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틈새의 사람들을 지켜보는 경험은 새로웠다.

이탈리아 제목 Le assaggiatrici. 번역해보니 감별사, 시식가쯤 되겠다.
영어 제목 At the Wolf‘s Table. 늑대의 식탁에서. 늑대는 히틀러를 일컫는다.
히틀러가 달라 붙은 한국어 제목은 너무 노골적이어서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소설 앞 부분에서 히틀러의 음식, 히틀러의 뭐시기, 하는 서술이 반복되는데 작위적이고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책의 소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난 제목이긴 하다. 자기가 뭘 읽게 될지 알고 펼치는 건 좋은 점일 수도 있지만, 초반을 읽는 동안 제곧내(제목이 곧 내용)...하면서 약간 지루하고 유치하게 느꼈다. 그래도 참고 읽었더니 2,3부는 그럭저럭 재미있었다.

베를린에 살던 로자는 신혼 1년 만에 남편 그레고어가 전장으로 떠나고 함께 지내던 어머니가 공습으로 죽자 그레고어의 부모 헤르타와 요제프가 있는 그로스-파르치로 옮겨 가 그들과 함께 그레고어를 기다린다.
인근의 라스텐부르크 볼프스샨체에 히틀러가 머물고 있었다. 로자는 히틀러의 음식을 시식하라는 명령을 받고 군인들 손에 이끌려 매일 크라우젠도르프의 병영에 출입한다. 로자 말고도 레니, 엘프리데, 하이네, 베아케, 아우구스티네, 울라, 게르투르데, 자비네, 테오도라 총 10명의 여자들이 시식을 담당한다. 독살을 사전에 막는 총알받이 역할이라 여자들은 넉넉한 급여를 받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불안에 떨었다. 식재료 절도, 식중독, 원치 않는 임신, 중절, 데이트 강간, 신분 위장과 발각 등 온갖 일을 겪으며 여자들은 서로를 경계하기도 하고 우정과 사랑을 쌓기도 한다. 1부까지 음식을 둘러싸고 마치 여학교 학생들처럼 신경전 벌이다 친해지다 하는 모습은 별로 공감이 가지 않고 내 취향이 아니다 싶었다.
참전한 그레고어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로자는 삶의 희망을 잃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귀환만 믿고 알지도 못하는 곳에 그의 부모와 지내기 위해 왔는데, 기다림은 기약이 없어지고 살기 위해 먹는 음식이 끊임없이 생명을 위협한다면 절망하는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2부에서 새로 병영에 부임한 알베르트 치글러 중위의 등장과 함께 이야기가 다시 흥미로워졌다. 여자들에게 고압적이고 통제하려 드는 치글러 중위는 처음에는 그저 비호감 덩어리였다. 그런데 요제프가 정원일을 해주던 마리아 남작부인의 저택 파티에 로자가 초대받았을 때, 로자는 치글러와 마주친다. 이후 치글러는 밤마다 로자의 방 바깥에 와서 서성이고, 결국 마음이 움직인 로자는 그를 헛간으로 이끌어 육체 관계를 맺는다.
남편이 실종 상태이긴 하지만 로자는 시부모집에 얹혀사는 처지이고, 알베르트 치글러 역시 유부남인데다 나치군 소속이다. 로자는 알베르트에게 몸과 마음이 이끌리면서도 증오하던 나치, 자신과 시식가 여성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군인과 친밀한 관계가 된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그레고어가 돌아올 것을 걱정하고, 임신을 걱정하고, 시부모나 엘프리데가 알아차릴까 봐 두려워한다. 그것도 사랑인데, 로자와 치글러의 사랑은 모두에게 숨겨야 하고 서로에 대해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도 없다. 어쩌면 그런 불완전한 상황 때문에 둘은 서로에게 빠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종전과 독일군의 패전이 뚜렷해질 무렵 치글러는 로자를 베를린행 기차에 태워 피신시킨다. 로자는 이후 시부모도, 치글러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후일담처럼 짤막한 3부는 읽는 내내 찡했다. 50년 가량의 시간이 흘러 노인이 된 로자가 누군가를 만나러 하노버로 향한다. 죽어가는 옛 사랑을 보러 가는 일. 마지막에 로자가 병원 구내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 모습은 오래 전 시식하던 시절과 겹쳐지는데 그럴 듯한 마무리였다. 이 책의 중심 이야기는 전쟁 때문에 살아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애도라는 생각을 했다. 로자는 사랑하는 부모와 동생을, 친구 엘프리데를, 그레고어를, 치글러를 전쟁 때문에 잃었다. 그녀가 50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노년의 그녀는 혼자인 듯하다. 아이도 없고 사랑하는 이도 없이 늙어버린 미래. 그게 나라고 생각하면 눈물부터 나온다. 치글러가 로자를 베를린행 기차에 태우려 했을 때 ‘나를 제외한 전 인류가 정말로 죽음 대신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을 선호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목에 바위를 매단 채 모이 호수 바닥에 가라앉는 대신 궁핍하고 외로운 삶을 선택할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처럼, 사랑 없이, 영원히 혼자라도 살아 있는 편이 정말 나은 것일까. 긴 외로움 속에 그저 숨만 쉬는 게 아닐까.
그래도 그녀가 살아 남은 이유 또한 사랑 덕분이다. 치글러가 그녀를 살렸다. 그녀 또한 전쟁이 끝난 뒤 사랑했던 사람을 살려낸다. 그녀의 사랑은 끝났지만 그녀가 살려낸 사람은 또다른 사랑을 찾아서 제법 긴 여생을 보냈다.
살아있다면, 운이 좋다면 그렇게 다시 사랑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끝내 혼자 남더라도, 정말 끝까지 혼자일 거라는 단정과 포기 없이 사랑할 희망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 걸지도.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될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전쟁의 가장 나쁜 점은 사랑의 그런 가능성조차 자비 없이 박살내 버린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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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4시간만 일한다 - 디지털 노마드 시대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
팀 페리스 지음, 최원형.윤동준 옮김 / 다른상상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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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3 팀 페리스.

자기계발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책을 쓰고 강연하는 일로 수익을 창출하고 너희도 나처럼 되면 돼-하는 다단계 영업 마냥 보인다.
그래도 이 책 제목 봐, 하루 4시간만 일해? 아니, 주4시간이랜다. 이쯤되면 예전 같으면 사기꾼이네...하고 넘겼을 건데 읽어보았다. 많이 심심했나 보다.
주로 마케팅 분야에서 일해온 저자와 다른 이들의 사례가 등장한다. 모든 직업에 적용하기는 힘든 조언들이 있었다. 제3세계에 아웃소싱하는 데는 영어권 노동자에게는 이점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래도 건질만한 것은 일과 삶을 대하는 태도였다.
우리는 긴 시간 직장에 머무르고 내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누군가에게 보여야 진짜 일하는 거라고 여겨왔다. 아닌 걸 알면서도. 개인 사정으로 몇 주간 두 시간씩 업무 시간을 단축했다. 동시에 전임자의 명예퇴직으로 새 보직을 같이 맡게 되었다. 하루 6시간, 내게 갑자기 주어진 생소하고 잡다한 일을 처리하는데 부족했을까? 일에 따라 다르겠지만 같은 일이라도 대개 10시간이 주어지면 10시간 동안 늘려서 하고 4시간이 주어지면 4시간 내에 끝마치게 된다. 짧은 시간만 주어지자 일의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고 시간 낭비하던 일들은 미루거나 집어치우게 되었다. 내 일이 아닌 것도 내가 떠맡고, 남과 나누어 할 일도 내가 혼자 다 하는 성격이었는데 여전히 약간은 그런 짓을 했지만; 그래도 거절하고, 분담시키고 혼자 하던 일을 많이 줄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왠만한 일은 다 처리되었다. 다행히 일에서도 큰 구멍난 적이 없었고, 작은 구멍이 나면 수습하면 되었고, 무사히 그 시기를 넘겼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 해도 상사가 안 받아들여주면 소용이 없다. 어떻게 재택근무를 놓고 딜을 할 수 있을지. 이 책에서는 흥미로운 방식을 가르쳐주었다. 시험 삼아 질러보고, 그 회사를 떠난 기간 동안 최대한의 성과를 올리고, 반대로 회사에 있을 때는 최저 성취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하하하. 그렇게 신뢰를 쌓은 뒤 일하는 날을 주3, 주2, 주1회로 줄이고, 남은 시간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즐기면 된다. 참 쉽죠? 안 받아들여지면 때려치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 회사 관둔다고 니 인생 안 망해. 하하하하 이렇게 쿨할 수가. 이런 긍정과 낙관은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는지 그게 더 부럽고 궁금하다.
이메일이나 메시지 작성에 특히 고심하고 문서를 뒤적이며 과도하게 정보를 수집하는 나는 그런 시간을 줄이자는 저자의 쿨함에 놀랍기도 하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 토씨 하나라도 받는 이가 기분 나쁘지 않을지, 못 알아 먹는 건 아닌지 걱정하며 정성을 들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나도 남이 보낸 이메일이나 메시지를 공들여 읽지도 별 생각 하지도 않잖아. 정보를 마구 수집하는 건 그저 불안을 다스리고 시간을 낭비하는 방법이 아니었는지.
주 1회 메일 확인, 전화 안 받거나 덜 받기, 이득도 없이 에너지만 빼앗는 골치거리 고객 잘라내기, 단순하고 시간 잡아먹는 일은 아웃소싱, 쓸데없이 긴 회의 줄이거나 빼먹기 ㅋㅋ 다 지키지는 못하더라도 그동안 무용하게 소모된 시간을 앞으로는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새 직장에서 전화번호 두 개 쓰고 단체카톡방 안 들어가서 직장 밖에서 업무지시 안 받는 건 잘 한 일인 듯하다. 급한 사람은 알아서 메일이나 문자메시지나 전화한다… 스트레스도 줄고 가끔 엉뚱한 정보로 분란 생겼더라 하는 소식을 뒤늦게 따로 전해 듣는 수준 ㅋㅋ
단순히 일하는 시간만 줄이고 최대한의 소득을 확보하는데 그치지 않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데까지 저자는 자신의 사례를 들어준다. 솔직히 이 부분은 공감이 가지 않았다. 당장 코로나 바이러스로 입출국이 묶인 상황이라 세계를 돌며 즐기는 삶이 가능하지 않기도 하고, 그보다도 원래 내가 집에 처박혀 있는 걸 너무도 좋아하기 때문인 듯. 최소한으로 일하고도 생활을 보장 받을 수 있다면 나는 남은 시간을 전부 읽고 보고 쓰는데 쓸 것이다. (정말? ㅋㅋㅋ) 휴직 이 년 동안 두문불출 한 달에 한 두 번 나간 적도 있는데 그래도 살 것 같다. 다만 가끔 산책으로 하루 만 걸음씩만 걸으면 조금 더 행복할 듯. 꿈같은 바람이지만 그런 꿈대로 사는 삶에 대해서도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겠다. 직장과 월급에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삶. 적게 소비하고 많이 행복하고 많이 사랑하는 삶. 아유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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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03-23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막 읽고 싶어졌어요 이 책 ^^ 근데 전업주부도 하루 4시간만 일해도 괜찮을까 음 싶은 거 있죠. 그럼 좋겠다, 근데 어쩐지 완전 불가능할 거 같아서 갑자기 힝 ㅠㅠ

반유행열반인 2020-03-23 18:07   좋아요 1 | URL
하루가 아니고 주4시간이더라구요.ㅎㅎㅎ 잦게 하는 일을 몰아서 하래요. 그렇다면 빨래는 주1-2회 돌리기, 식사는 한 번에 왕창 준비해서 조금씩 얼려놨다 데워 먹기, 청소도 못 견딜 수준까지 버티다 주1-2회 청소기 돌리기ㅋㅋㅋ 꼬맹이들 돌보는 건...아웃소싱? ㅋㅋㅋ 아 나 이미 그렇게 사는 거 같은데...왜 그런데도 시간 없지...그렇게 아껴 남은 시간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언지 생각하는 게 먼저인 거 같아요.

수이 2020-03-23 18:36   좋아요 1 | URL
말도 안돼 ㅠㅠ 정말 다시 보니 주4시간이네요;;;; 가능할 수 있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추풍오장원 2020-03-23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유행열반인님께서 쓰신 글을 보니 자기계발서지만 읽고싶어지네요^^ 자기계발서는 포르노수준으로 취급하는데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0-03-23 20:50   좋아요 0 | URL
시간에 묶여 일하는 공무원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ㅎㅎ 다음 인생을 설계할 때라면 참고나 할 정도구요. 읽다보면 그래 너 좋겠다...정도. ㅋㅋㅋ좋겠다 까지고 따라할 엄두는 안 나요.
 
컬러의 말 : 모든 색에는 이름이 있다 컬러 시리즈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 지음, 이용재 옮김 / 윌북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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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2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
원제 The secret lives of colour

책 서두에서 색의 범주는 선천적이라는 주장(보편론)과, 색을 일컫는 언어가 없다면 인식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상대론)이 등장한다. 우리 눈은 셀 수 없는 빛깔을 구분할 수 있다. 다만 두 색 사이의 다름을 알아챌 수 있더라도 각각을 부를 말이 없다면 미묘한 개성은 뭉뚱그려지고 그냥 빨강, 그냥 검정으로 일컬어질 것이다. 색에 붙는 새로운 이름을 상술이자 마케팅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렇게 몰아 붙일 일만은 아니었다. 다양한 색이름은 분위기와 기분을 다채롭게 표현할 때 선택의 폭을 넓혀준다.
저자가 엘르 데코레이션 편집자의 제안으로 연재한 색에 관한 글들을 한 권으로 묶은 책이다. 잡지에 연재 되었을 때는 글에 등장하는 시각자료의 사진이 함께 제시되었을 것 같다. 이 책은 조그마한 색상표시 외에는 사진이나 그래픽이 별도로 등장하지 않아 아쉬웠다. 검색을 해서 회화나 유물 그림을 일일이 찾아 보아야 했다.
색이 등장한 배경, 쓰임새, 색을 나타내는 물감과 염료의 재료와 제작 방법, 유행한 시기, 염료의 유해성, 색이 쓰인 사례 등이 열거되어 있는데 하나하나 읽는 재미가 있었다. 빨강, 하고 뭉뚱그려진 안에도 스칼렛, 코치닐, 매더 등등 다양한 빨강이 담겨 있었다. 목차만 보면 엄청 많은 색이 다뤄진 것 같지만 책에 언급된 색채는 일부이다. 책 뒷편에 자세히 다루지 못한 다른 흥미로운 색들을 한 줄씩 언급하였다. 그 목록도 담지 못한 색이 많다.
미술을 잘 모르고 패션은 까막눈에 가깝다. 색에 대해 아는 것이 그나마 시작이겠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검정에도 콜, 페인스 그레이, 옵시디언(흑요석), 잉크, 차콜, 제트, 멜라닌, 피치블랙, 반타블랙 등등 수많은 이름이 있었다. 아프리카의 수많은 나라 이름이 검정을 가리킨다고 다른 책에서 읽었다. 모리타니(그리스어 모르), 기니(베르베르어 아구나우), 에티오피아(그리스어 아이토스오프시아), 소말리아(누비아어 소마리), 수단이 그렇다. 거무스름, 까망, 흑색, 새카만, 시커먼, 칠흑 등등...우리 말에도 다른 표현이 많다. 각각의 다름을 구분하고 이름 불러줄 수 있는 눈과 말을 가지고 싶다. 열심히 쳐다보고 궁리하고 공부하는 노력이 필요하겠다.

*책보다 찾아본 사진 정리

-리드화이트로 밑칠 된 안악3호분 벽화를 VR로 볼 수 있는 사이트
http://contents.nahf.or.kr/goguryeo/mobile/html5/an1.html

-아이보리-스코틀랜드 루이스 섬에서 발굴된, 바다코끼리 엄니로 만든 루이스 체스맨

-골드-금박이 잔뜩 쓰인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의 초상(1907)’

-데이지 펠로우즈. 타타 드 벨리에르(숫양 대가리)라 불린 쇼킹핑크색 17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카르티에에서 사들여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열심히 찾았지만 핑크 다이아의 실물 사진은 구하지 못했다.

대신 그녀가 카르티에에 주문 제작한 목걸이 사진 득. 화려하다 화려해.

-아마란스. 영원하다는 뜻으로도 쓰이는 이름.

-아니쉬 카푸어의 ‘스바얌브(2007)’ 윤기 SHADOW 세트장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는…(그런데 윤기 섀도우가 누구야…눈에 바르는 거야...BTS가 뭐죠...)

-코치닐, 선인장의 연지벌레. 딸기우유. 비건 중에는 이거 반대하고 안 먹는 사람도 있다고 함.

-버밀리언 바탕이 칠해진 폼페이 신비의 벽화 프레스코화

-호안미로-빛. 내 꿈 속의 색. 책에는 물망초색 물감을 팝콘 모양으로 칠해놨다고 표현되어 있다.

-비싸터진 울트라마린으로 밤하늘을 칠한 티치아노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1520’)’

-페르메이르의 ‘간음한 여인과 그리스도’. 1945년 메이헤른이 이 그림을 나치에게 팔았다는 이유로 나치 부역 혐의로 잡힌다. 메이헤른은 작품이 자신이 그린 위작이라고 주장한다. (네덜란드 문화 유산 팔아먹은 역적? 가짜 그림 독일 놈들한테 팔았으니 애국자?) 그림에 쓰인 코발트 블루 컬러가 페르메이르가 죽고 130년 뒤에야 발견되었다는 것이 밝혀져 그림이 위작임을 증명한다. 재밌네. 그림 잘 그리네 ㅎㅎ

-이집션 블루 빛의 작은 하마 윌리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3500년 전 이집트 나일강 둑에 있던 다리 부러진 부적. 이집트인들이 숭배한 하늘, 나일강, 창조, 신성의 파란색.

-일렉트릭 블루. 체르노빌 핵누출 사고 때 밤하늘을 빛내던 방사능의 파란 빛. (사진은 그냥 전깃줄 빛나는 장면)

-버디 그리빛 드레스 입은 임산부. 그림 속 부부는 엄청 부자로 추정. 얀 반 에이크가 그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1434)’ 옛 화가들이 색감 좋고 변하지 않는 초록을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초록 물감 중에는 유독 물질도 많았다. 이 그림보다가 갑자기 초록색 신발이 가지고 싶어서 한참 검색하다 구매 포기함...내가 신으면 할머니 신발 같을 거야...참자...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1880’)’ 녹색 물감의 이상 반응으로 풀밭 군데군데 시든 것처럼 보인다.

-엄버 빛으로 그려진 카라바조의 ‘성 프란시스와 성 로렌스가 함께한 예수 탄생도’ 1960년대에 도둑놈들이 훔쳐가면서 훼손되었다고 한다.

-스펙트럼의 99.965%를 흡수하는 반타블랙. 아니쉬 카푸어가 이 색의 독점권을 사들여 다른 사람은 쓸 수 없다고 한다. 스튜어트 샘플은 이걸 비꼬면서 모두가 쓸 수 있고 아니쉬 카푸어만 쓸 수 없는 분홍(world’s pinkest pink)을 만들었다고 한다.

-카지미르 말레비치 ‘검은 사각형’

-존 디 박사가 소유했었다는 흑요석(옵시디언) 거울이 바쳐진 아즈텍의 신, 테스카틀리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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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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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9 아룬다티 로이.

이국적인 향신료 냄새를 풍기는 커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터번 쓴 인도 아저씨가 잔이 빌 새 없이 주전자로 물을 채워준다. 네팔이나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 사람일수도 있다. 그의 종교가 힌두교인지 이슬람교인지 시크교인지 불교인지 기독교인지 알지 못한다. 인도음식점에서 우리는 인도에 대해 더 알게 된 게 없었다.
닌텐도 게임 화면 속 트레이너를 따라 한 다리로 서고 양쪽 검지손가락을 위로 모아 쭉 뻗는다. 요가가 인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들었는데, 인도에서는 나무자세를 뭐라고 부를까. 경건함과 상쾌함이 동시에 찾아오는 태양예배 자세는 어떤 신을 향한 몸짓일까.
인도영화는 왜 항상 마지막에 다같이 낯부끄러운 군무와 떼창을 선보일까. 몇 편 보고 나면 굳이 더 찾아볼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렇게 인도를 잘 모르는 내가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 ‘지복의 성자’를 읽는 동안에는, 그곳 사람들 곁에 바짝 다가가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그들과 내가 바라는 건 매한가지였다.
자유, 사랑, 행복, 사람다운 삶, 혼자가 아닌 삶.
큰 바람이 아니지만 어디서나 이루기 쉽지 않은 꿈이다. 모두들 가끔 행복하고 가끔 슬프다가 결국 묘지로 향한다.

1. 성 정체성
어릴 때 문득 생각했다. 내 겉모습은 여자아이지만 몸 안에 남자아이도 함께 있는 것 같아. 그러니까 혼자서도 아이를 만들지도 몰라.
자가생식가설은 틀린 모양이다. 짝사랑하는 동안은 2세를 얻지 못했다.
지정된 성별대로 공학 중고등학교의 여자반에 배정되었다. 무럭무럭 자라 브래지어와 생리대와 스타킹과 립스틱을 샀다. 내내 남자아이들을 사랑했고, 아이가 생겼고, 낳았고, 젖을 물렸고 아기가 싼 똥을 치우고 안아서 재웠다. 그런 일들은 한 번도 의논 거리 된 적 없이 저절로 내 몫이 되었다.
내게 당연히 주어진 것이 누군가에게는 열망하는 삶의 형태이고, 그 중 이룰 수 있는 것이란 스타킹과 립스틱 같은 겉보기에 한정된 사람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들의 삶에 관심이 갔다. 기사를 찾아 보고, 영화나 책을 보았다.
‘아요디아 외곽의 숲 가장자리에 이르렀을 때, 람왕은 백성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 모든 남자들과 여자들은 집으로 돌아가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라.” 왕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던 남자들과 여자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오직 히즈라들만이 꼬박 십사 년을 숲가에서 충성스럽게 왕을 기다렸는데, 그건 왕이 그들에 대해 언급하는 걸 잊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우린 잊힌 존재로 기억되고 있는 거네? 와! 와!” 우스타드 쿨숨 비가 말했다.’
지워진, 잊힌, 부정당한 존재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들. 두 성별로 구분된 화장실 앞에서 어디로 들어갈지 망설이다 소변을 참고 돌아선 경험은 없었다. (줄이 길어 못 들어간 적은 많다.) 누군가에게는 고민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일로 힘든 사람들이 있다.
인도에는 히즈라와 칸나르라는 단어가 있다. 아프타브는 두 성을 한 몸에 지닌 간성인으로 태어났지만 산파와 부모의 판단과 바람대로 남자아이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아프타브는 자신이 ‘여자처럼’, 정확히는 여성의 치장을 한 히즈라처럼 되고 싶다는 것을 깨닫고 집을 나온다. 두니야(현실 세계)를 떠나 히즈라 공동체인 콰브가(꿈의 집)에 들어가 그곳 사람들과 함께 지내게 된다.
안줌이라는 새 이름을 얻은 그녀는 성전환수술을 선택하지만 불행히도 의사가 돌팔이여서 겉보기로만 여성성기를 얻는 대신 영원히 쾌락을 잃는다. 영화 속 헤드윅이 미군과 결혼해서 동베를린을 벗어나려고 성전환을 택하지만, 수술 실패로 화난 1인치를 울부짖게 된 상황이 떠올랐다. 그렇게나 고통스럽고, 실패 위험이 있고, 목숨까지 거는 수술을 어떤 사람들 말처럼 여성에게 나쁜 목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감내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었다. MtoF 트랜스젠더 수험생의 여대 합격 이후 ‘인간은 비둘기가 될 수 없다’는 혐오 범벅 글을 게시한 여성들 소식을 마주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며 연대한다는 사람들이 어째서 다른 이들의 고통은 외면하다 못해 모욕하고 짓밟을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콰브가의 구성원은 안줌처럼 여성으로 외과적 시술을 받은 사람 말고도 각자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한 종교와 성적 정체성을 가졌다. LGBT+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그 한 권에 소개된 성 정체성만 해도 80가지가 넘는다고 했다. 이토록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성별 이분법을 당연시하고 본인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지정된 성별을 절대시하는 사람이 많다. 지배적 규범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찾으려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멈추지 않는다.
원하는 성을 불완전하게나마 되찾은 안줌은 아기를 돌보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길에 버려진 자이나브를 거두어 키우면서 그 꿈을 이루는 듯싶었다. 아픈 자이나브가 저주에 걸렸다 믿고 쾌유를 빌기 위해 안줌은 하즈라트 영묘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발생한 이슬람교 대학살 와중에 동행한 자키르 미안은 살해된다. 안줌은 히즈라를 죽이면 운이 없다는 믿음 덕에 힌두교인 손에 죽지 않고 겨우 풀려나 동료들이 데리러 올 때까지 난민촌에 머문다. 학살의 목격자가 되는 일, 자키르 미안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안줌은 불안해 하고, 자이나브를 학살과 강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남장을 시키고 힌두교의 가야트리 만트라 찬가를 암송시킨다. 안줌의 오랜 부재와 불안에 지친 자이나브가 공동체 내 젊은 히즈라인 사이다를 엄마처럼 따르자 상처 받은 안줌은 콰브가를 떠나 묘지에 자리를 잡는다.
묘지에서도 안줌은 혼자가 아니다. 이맘 지아우딘이 말동무를 하러 찾아오고, 경비원, 시체안치소 일을 하던 사담 후세인이 그녀 곁에 머문다. 안줌은 가족의 묘지 위에 방을 지어 빈민들이 머무는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만든다. 우연한 기회로 일반 장례식장에서 거부하는 시신을 거두는 장례식장까지 함께 운영하기 시작한다.
‘“비루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일단 벼랑 끝에서 떨어지면 추락을 멈출 수 없어.” 안줌이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추락하면서 역시 추락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매달리게 되지. 그 사실은 빨리 깨달을수록 좋아. 우리가 사는 여기 이곳, 우리가 보금자리로 삼은 이곳은 추락하는 사람들의 집이야. 여기엔 하키카트(현실)가 없어. 이봐,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도 현실이 아냐. 우린 진짜로 존재하는 게 아냐.”
사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안줌을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가 말하는 방식도, 선택하는 단어도, 입을 움직이는 모습도, 썩은 이빨 위로 판 물이 든 붉은 입술을 움직이는 모습도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의 우스꽝스러운 앞니도, 그가 거의─혹은 전혀─이해하지 못하는 우르두 시를 통째로 암송하는 것도 사랑하게 되었다.’
옷차림과 화장으로 한껏 멋을 부리고 발찌와 유리팔찌와 달랑거리는 귀걸이와 코핀으로 꾸민 안줌의 모습에 긴 양말과 커다란 구두를 신고 머리를 양갈래로 땋은 삐삐롱스타킹이 자꾸 겹쳐보였다. 옆에서 그녀를 돕는 사담과 그의 흰 암말 파얄은 항상 삐삐와 함께 다니는 원숭이 친구 닐슨과 괴력의 삐삐가 번쩍 들어올린 흰 말과 닮았다.
고집이 센 듯하지만 언제나 자기 의견대로 과감하게 결단 내리는 안줌은 마냥 씩씩하고 그래서인지 매력이 철철 넘친다. 어머니 자하나라 베굼의 바람대로, 죽은 몸으로도 사랑의 시들을 낭송하던 하즈라트 사르마드의 보살핌을 받은 덕일까.

2. 카슈미르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 국제 분쟁 사례로 카슈미르 지역이 지도와 함께 제시되어 있다. 카슈미르의 일부는 파키스탄 땅이지만, 일부 지역은 주민 대부분이 이슬람을 믿고 지배층이 힌두교도인 인도의 지배령이다. 이슬람교도들은 지배계층에 수단을 가리지 않고 저항하고, 인도군은 저항군을 진압한다.
우리 나라 사람 중 믿는 이가 그리 많지 않은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대립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서로를 향해 핵탄두를 날리겠다고 위협하고, 국지적 교전은 끊이지 않고, 대규모의 무력 충돌과 전쟁으로 국제 정세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슬람 전사들은 인도 한복판에서 자살 폭탄 테러로 맞서고, 인도 정규군은 이들을 색출해 고문하고 학살하며 주민들을 폭력과 공포로 다스린다.
왜 그런 극단의 증오를 키우게 되었을까. 이 물음에 대학 시절 함께 연극을 준비하던 네 친구, 틸로마타와 무사, 나가, 비플랍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답을 주었다. 틸로와 무사는 잠시 연인이었고, 나가와 비플랍 또한 틸로를 연모했다. 한 때의 우정과 애정으로 맺어진 그들의 인연은 카슈미르에서 기묘하게 얽히고 꼬인다.
무사는 자신이 나고 자란 카슈미르를 틸로에게 보여주고 싶어한다. 틸로는 카슈미르를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수많은 사건과 그에 대한 의문을 기록으로 남긴다. 권력자의 이해관계와 이슬람 전사 목에 걸린 현상금 때문에 많은 카슈미르인들이 인도군의 손에 죽는다. 그래도 카슈미르는 아자디(자유, 독립)를 외치며 저항을 멈추지 않는다.
‘문제의 폭발음은 옆 도로에서 빈 망고 프루티* 용기가 승용차에 깔리면서 난 소리임이 후에 밝혀졌다. 누구 탓을 하겠는가? 망고 프루티(신선하고 진한) 용기를 길에 버린 사람? 인도? 카슈미르? 파키스탄? 승용차 운전자? 대학살의 원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사실들은 입증되지 못했다.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그게 카슈미르였다. 그건 카슈미르 탓이었다.
삶은 계속되었다. 죽음도 계속되었다. 전쟁도 계속되었다.’
이슬람교도 희생자를 기리는 장례 행렬 도중 음료수병이 터지는 폭음에 놀란 인도 군인들이 발포한다. 안전해야 할 집 발코니 위에서 행렬을 구경하던 무사의 아내와 딸 미스 제빈은 그 총알에 맞아 죽는다. 이슬람 전사들을 잔인하게 사냥하는 인도군 지휘관 암리크 싱은 그날 총기 난사의 장본인이나 다름 없으면서 위로랍시고 무사를 불러 들여 굴욕을 준다. 무사는 사고 이후 다양한 신분으로 위장하며 저항 운동에 투신한다. 그의 친구 굴레즈 마저 현상금을 노린 암리크 싱의 손에 (무사로 위장되어) 살해되고 굴레즈의 보트에 머물던 틸로도 체포된다. 무사는 가까스로 도망치고, 틸로는 정보국에서 일하는 비플랍에게 연락해달라고 자신을 가둔 군인들에게 요청한다. 비플랍은 본인 대신 기자인 나가를 틸로가 구금된 곳에 보낸다. 틸로가 풀려나는 데 도움을 준 일을 계기로 나가와 틸로는 결혼한다.
틸로와 나가의 결혼 생활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다. 무사는 내내 떠돌다 여행하는 틸로 곁에 잠시 왔다 가곤 한다. 나가와 이혼한 틸로에게 건물을 세놓아 거처를 마련해 준 비플랍은 틸로가 떠난 뒤 방에 남은 자료들을 살피며 암리크 싱의 죽음이 정말 자살이었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죽음으로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땅. 내 목숨마저 내 손에 달리지 않은 희망 없는 곳의 사람들에게 싸움 외의 선택지가 있는지 조차 의문이었다. 한 쪽의 절멸 이전에는 끝나지 않을 싸움을 멈출 방법을 누가 알고 있을까.
‘죽음은 더 깨끗해지고, 불운은 더 짜지고,
대지는 더 진실해지고, 더 끔찍해진다.’

3. 여성, 인도 여성으로 산다는 것
소설에는 수많은 엄마와 여성이 등장한다. 자하라나 베굼은 아프타브의 간성을 발견하고 하즈라트 사르마드 영묘를 찾아가 아이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빈다. 혼자서 고통스러운 비밀을 간직하다 아이 아버지에게 사실을 알리지만 너무 늦게 알렸다고 비난만 받는다.
마리암 이페는 불가촉천민과 교제하여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아이 아버지는 (아마도) 살해당하고, 딸 틸로는 한 번 버려졌다 다시 친어머니 마리암에게 입양된다. 양어머니인 양 진실을 감추고 평생을 살다 임종 전 치매와 섬망으로 틸로를 힘들게 한 어머니, 틸로가 의자를 부숴버린 다음 날 숨을 거둔 그녀의 삶 역시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의미 없이 던진다 생각하고 틸로가 받아적었던 어머니의 말 ‘나 지금 고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 같다. 그러니?’, 그리고 생전 어머니가 좋아하던 셰익스피어의 구절이 히즈라들에 둘러싸인 마리암 이페의 두 번째 장례식날 틸로에게 떠오르는 순간은 마르케스 소설 속 환상들처럼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틸로의 삶은 현대 여성이 겪을 수 있는 온갖 어려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 성희롱을 하고 집앞까지 찾아와 수작 부리는 상사를 처리하기 위해 틸로는 운동으로 몸을 키우며 대비한다. 혼자 사는 여자가 겪는 위협을 막으려고 자신을 마약거래상이라 여기는 이웃의 오해를 일부러 수정하지 않는다. 무사와의 사랑 후 생긴(제빈이나 굴레즈가 될 수 있었을) 아이는 나가와 결혼하기 위해 중절 수술로 없앤다. 보호자 없이 마취 없는 수술을 받고 기절했다가 다른 환자와 함께 쓰는 침대 위에서 깨어나는 장면은 악몽 같았다. 피임도 낙태도 여자의 몫으로 여기는 세상은 인도 말고도 무수히 많다.
틸로는 굴레즈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었지만 동행자가 만류한다.
‘”...여자들은 무덤 근처에 가는 게 허용되지 않거든요. 나중에 가요. 다들 떠난 뒤에.”
여자들은 허용되지 않는다. 여자들은 허용되지 않는다. 여자들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건 여자들에게서 무덤을 보호하기 위함일까 아니면 무덤으로부터 여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일까?’
애도의 기회조차 성별에 따라 달리 주어지는 지역이 있다. 보호할 이익은 하나도 없는데도 그렇다.
틸로는 시위 장소에 버려진 아기를 데려다 미스 제빈 2세로 키우려고 한다. 모성이란 타고나는 것이라는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아기를 원하는 안줌이나 틸로를 보면 무한한 사랑을 쏟을 수 있는 약한 사람을 원하는 마음이 이해가 간다. 누구나 죽기 전까지, 어떤 암흑 속에서도 사랑을 주고 받길 원하니까. 아기는 그런 사랑을 쏟기에 적합한 존재이다.
편지를 통해 알려진 미스 제빈 2세(우다야)의 친엄마 레바티의 삶은 참혹하고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레바티의 어머니는 지참금이 적다고 결혼식날 거부당하고 남편에게 잔인하게 학대당하다 버림 받는다. 마을 사람들은 레바티의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카스트를 운운하고 어머니를 부정한 사람 취급한다. 성장한 레바티는 공산당에서 활동하다 경찰에게 붙잡혀 집단 강간을 당하고 아이까지 낳게 된다. 공산당의 숲속 게릴라 투쟁에서 아기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던 그녀는 아이를 잔타르만타르 집회 현장에 놓고 왔다. 그녀는 당의 나쁜 점을 알면서도 떠날 수 없고, 증오하는 이들 때문에 생긴 아이지만 ‘아기가 너무 작고 귀여워서’ 죽이지 못한다. 아이를 도시에 둔 그녀는 죽음을 각오하고 숲으로 돌아간다.
학살의 현장에서 여성들은 다른 종교와 이념을 가졌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강간당하고 살해된다. 정부에 대항하는 세력도 성별 불문하고 성고문과 강간을 당한다. 타고난 여성 뿐 아니라 히즈라들조차 성희롱과 성폭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분쟁의 현장에서 인간성이 제일 손쉽게 파괴되는 사람은 약자인 여성과 아이들이다. 세계 곳곳에서 공포와 불안에 떨며 고달픈 삶을 이어가는 게 여성 대부분의 삶이지만 소설을 통해 확인한 인도의 상황은 독보적으로 끔찍했다.

4.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크게 고통 받는 사람들
-도시로 용수와 전기를 댈 댐이 세워지면서 마을이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홍수 피해로 온 동네가 통째로 진흙에 잠겨 더는 살 수 없는 곳이 된다.
-시골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도시로 와서 빈민, 저임금 노동자, 마약중독자가 된다.
-도시의 공장은 오염 물질을 쏟아내고 유독 가스 유출 사고로 인근 주민들이 죽거나 실명하거나 장애가 생긴다. 사고에 책임이 있는 회사는 이름만 바꾼 채 계속 영업을 한다.
-정부군과 힌두교도 민간인들의 무차별 학살로 자식을 잃은 이슬람교도 어머니들이 집회를 하지만 그들의 외침은 공허하게 흩어진다. 고통을 호소하는 시위대 옆으로 철없는 쇼핑객들이 나아진 삶을 찬양하며 큰 상처를 준다.
“어머, 와아! 카슈미르! 정말 즐거운 곳 같은데! 이제 완전히 정상화되어서 관광객들에게 안전할 거야. 우리 갈까? 얼마나 멋지겠어.”
-길에서 단식 투쟁을 하는 아자드 바르티야 박사는 아기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들에게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폭행과 인쇄물 압수를 당한다.
-죽은 소의 사체를 치우는 카스트였던 사담의 아버지는 이유 없이 그를 구속한 경찰의 방임 아래 군중에게 소 도살자로 몰려 맞아 죽는다. 사담은 그 일을 겪고 나서 이름을 이슬람식으로 고치고 아버지를 죽게 만든 경찰을 없애는 걸 목표로 정부에 반대하는 활동에 나선다.
-마을 바보 취급 받던 지적 장애인들(무사가 모우트라 지칭한다)은 점령군에게 제일 먼저 살해 당한다.
“카슈미르에서는 거의 모든 모우트들이 죽임을 당했어. 명령에 복종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제일 먼저 죽임을 당한 거야. 어쩌면 그래서 우리에겐 그들이 필요한지도 몰라. 우리에게 자유로울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니까.”
“혹은 죽임을 당하는 법이나?”
“여기선 똑같은 의미야. 오직 죽은 자만이 자유로우니까.”
-빠른 개발과 인구 성장 속에 인도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불평등을 드러낸 나라가 되었다.
‘차들이 20차선을 쌩쌩 달리고 양옆으로 강철과 유리로 된 고층 빌딩들이 들어서고 있는, 밀밭만큼 넓고 ‘오줌을 누는 게 불가능한’ 고가도로를 달렸다. 하지만 출구로 빠지자 고가도로 밑은 완전히 딴 세상임을 알 수 있었다─도로포장도 안 되어 있고, 차선도 없고, 가로등도 없고, 통제도 안 되는 거칠고 위험한 세상에서 버스, 트럭, 거세한 황소, 릭샤, 사이클, 손수레, 보행자 들이 생존을 위한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한 종류의 세상이 굳이 성가시게 멈추어 알은체하지 않고 다른 종류의 세상 위를 날아갔다.’
-틸로의 파일 속 카슈미르 주민 경험담 중 아래 기록을 읽고 깜짝 놀랐다.
‘P가 내게 말하기를, 최근 ‘친선 작전’의 일환으로 군에서 스물한 명의 아이를 해군 배에 태워 소풍을 데려갔다고 했다. 그 배는 전복되었다. 스물한 명의 아이가 모두 익사했다. 익사한 아이들의 부모들이 시위를 벌이자 군은 그들에게 총을 쏘았다. 운좋은 사람들은 죽었다.’
아이들이 물에 빠져 죽고 항의하는 부모들이 더 큰 상처를 받는 이야기가 여기서도 되풀이된다. 우리가 모르는 어디선가 일어나선 안 될 일들이 자꾸만 반복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슬퍼졌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는 사례들. 분쟁 속에 결국 제일 먼저 희생되는 건 가장 약하고 아픈 사람들이다.
온통 절망투성이인 것 같지만, 등장인물들은 희망을 보여준다. 어려움을 함께 겪고 도와주는 친구와 이웃이 있고, 새로운 사랑이 피어나고, 서로를 축복한다. 사담과 자이나브의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 안줌은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하즈라트의 무덤을 찾아간다.
‘안줌은 기도를 올린 후 사르마드에게 젊은 부부를 축복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리고 사르마드─지복至福의 성자이자, 위로받지 못한 자들의 성인이며, 정확히 규정될 수 없는 자들, 신자들 속의 신성모독자, 신성모독자들 속 신자의 위안慰安인─는 그렇게 해주었다.’
약하고 소외된 자들이 찾아갈 장소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우리 곁에도 그렇게 기대어 행복을 빌 곳이 이미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큰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가장 큰 기쁨을 나누고 싶을 때 함께 하는 가족, 연인, 이웃, 친구들. 사랑하는 이들이 살아 있는 성자임을 잊지 않는다면 조금 더 행복하고 조금 덜 불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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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3 - 1921-1925 의열투쟁, 무장투쟁 그리고 대중투쟁 (박시백의 일제강점기 역사만화) 35년 시리즈 3
박시백 글.그림 / 비아북 / 201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20200314 박시백.



아침마다 커피 내려먹을 때 쓰는 유리 머그. ‘나는 개다’의 구슬이가 새겨져 있다.
근데 보면 볼수록 너 누구 닮았어... 표정이랑 나는 개다, 하는 말까지 자꾸 누가 생각나...아,

박열!

나는 개새끼로소이다/하늘을 보고 짓는/달을 보고 짓는/보잘것없는 나는/개새끼로소이다/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뜨거운 것이 쏟아져/내가 목욕을 할 때/나는 그의 다리에다/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나는 개새끼로소이다.(박열, ‘개새끼’ 전문)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를 여러 개 보았다. 박열, 암살, 밀정 등등. 김형민의 책 ‘한국사를 지켜라’에서 여러 독립운동가들을 만난 후였다. 내 또래 아니면 나보다 훨씬 젊은 나이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목숨을 던진 이들이 무수했다. 그들은 독립된 나라에 사는 자신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독립된 나라에서 비교적 평안하게 살고 있다. 잊지 않고 감사하는 일 밖에는 할 게 없다.

작년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다 보았는데, 35년을 보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빌리다보니 예약한 책 중 3권을 먼저 보게 되었다.

1919년 3월 1일의 전국적 항거에 놀란 일본은 문화통치라는 기만적인 이름을 걸고 식민 통치 방향을 전환한다. 조선인을 감싸 안는 척 하지만, 여전히 차별이 심하고 독립운동은 분쇄하고 지식인들을 회유하여 일본 지배를 돕는 친일 인사를 늘린다.

만세 운동 이후 평화적 독립운동에 회의를 느낀 독립운동가들은 무력 폭력 수단을 동원해 투쟁을 이어간다. 김원봉이 이끈 의열단의 폭탄 투척과 암살 시도, 만주와 연해주의 수많은 독립군, 자기 목숨을 던지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폭력 투쟁에 임한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두려웠을텐데, 그 두려움을 딛고 간절히 바라는 독립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던진 사람들.

권력과 지도층이 생기는 조직에서 늘 그렇듯 노선 투쟁, 파벌 싸움은 이 시대에도 징그럽게 이어진다. 자유시에서 무장 해제 당하고 동포인 군인들 손에 죽어간 독립군들을 볼 때는 진짜 안타깝고 화가 났다. 지휘권과 노선을 두고 다투다가 결국에는 숙청해 버리는 수순이라니.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가 널리 퍼져나갔는데 국내에서도 어떤 사상과 방향을 따르냐를 두고 끝없이 분열이 일어났다. 독립운동에 쏟을 단일한 조직을 만들지 못하고 내부 분열에 힘을 소모한 게 아쉬웠다.

상하이 임시정부 쪽은 더욱 가관이었다. 하아 이승만... 임시대통령이라면서 미국에서 유유자적하다가 뜻대로 안 된다고 잠시 중국 왔다 금세 자리 떠버리고 독립자금 끊고 자기 지위 보전에 유리한 움직임만 취하던 놈...해방 후 학살자가 될 사람이 초대 대통령 되었을 때부터 대한민국 현대사가 꼬인 게 아닌가 싶다.

이와중에 1920년대에는 조선, 동아일보도 창간하고, 온갖 문예지도 창간해서 다양한 문예사조가 활동한다. 그 때 나온 시, 소설들 지금 봐도 재미있는 게 많다.

나혜석 이야기가 잠깐 나왔는데, 이 언니 너무 멋있는 거다. 원조 페미니스트. 자유인. 나혜석에 대한 책과 영화를 보고 싶어졌다. 찾아봐야겠다.

박경리 소설 토지에 백정의 형평사 운동이 나와서 관심 있게 봤었다. 마침 토지를 읽던 해에 진주 여행을 갔다. 진주성과 박물관에 가서 형평사 운동에 대한 유물, 사료들을 한참 들여다 보았다. 어느 시대에나 소수자가 있고 그들의 인권 운동에 반대하는 백래시가 있었다. 백정과 동급 취급 받고 싶지 않다는 양반, 농민들. 어떻게 너희들이 감히 사람 대접 받고자 하냐며 손가락질하고 심지어 폭력으로 억압하던 기득권과 거기에 맞선 사람들, 백정들 편에 선 또다른 소수의 양반, 농민들. 싸움이 없으면 보장되지 못하는 권리가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알겠는데 선봉에 나서기는 커녕 거드는 것조차 두렵다. 대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의 비겁함만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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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3-16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 싱크로율....뭡니까?!

반유행열반인 2020-03-16 11:31   좋아요 0 | URL
구슬이 컵 맨날 볼 때 마다 너 누구니...하다가 만화책 삽화 보고 사진 보니 그 분이셨습니다...영화 박열 속 이제훈은 아주 많이 미화된 거였다는...제훈아 제훈아 넌 나랑 동갑인데 왜 젊고 잘생겼니...

무식쟁이 2020-03-18 2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래퍼중에 디보 라고 있어요....
여기까지만 말할게요.....

반유행열반인 2020-03-18 21:20   좋아요 0 | URL
검색해봐야지 ㅋㅋ나 어제 누구랑 무님 보고싶다고 얘기했더니 무님 나왔어요! 텔레파시?!

반유행열반인 2020-03-18 21:31   좋아요 0 | URL
프하하 디보 ㅋㅋ탈색머리 때 딱 저리 삐쳤네요. 무님한테만 하는 말인데 저도 7년 전에 저 디보 같은 양아치 탈색했었어요 ㅋㅋ머리도 저렇게 뻗치고 ㅋㅋ

무식쟁이 2020-03-18 22:15   좋아요 1 | URL
ㅋㅋ 누구랑 뒷담화를 하셨을까나..(대충 누군지 감은 옵니다만.)
진짜 텔레파신가. 오늘 그냥갑자기 북플생각이 뙇!! 났어요.

반유행열반인 2020-03-18 22:27   좋아요 0 | URL
앞으로 보고싶음 종종 텔레파시 할게요. 무님이 톡을 안 해줘서...(시무룩)

무식쟁이 2020-03-18 22:47   좋아요 1 | URL
악 ㅋㅋㅋ 첨으로 귀여웠다
(시무룩)에서.

반유행열반인 2020-03-18 23:32   좋아요 0 | URL
제 귀염력 너무 늦게 발견하심...너무 오래 잠수하시지 말고 종종 안부 전해주세요 한 달에 한 번이라도...(맘대로 요구함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