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펭귄클래식 99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소연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20200329 버지니아 울프.

내 자리. 쇼파 앞에 폭 60센티미터의 간이 책상을 놓고 그 위에 폭 30센티미터의 독서대를 올렸다. 여기 앉아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다. 그나마도 마련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옆에서 가족들이 55인치 텔레비전으로 명탐정 코난 극장판을 보면 3M귀마개로 귀를 틀어막고 책을 읽는다. 꼬맹이들이 달려들면 핑크퐁을 틀거나 스티커북이나 만화책을 쥐어주고 독후감을 쓴다.
나에게는 나만의 방 뿐 아니라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픽션을 쓰는 걸 바라지만 이런 것들이 주어지지 않은 동안은 한 글자도 제대로 쓸 수 없다. 소설을 쓰지 않은 지 거의 넉 달 가까이 지났다.

이 책을 읽으며 몇 번을 멈추어야 했을까. 겨우 마지막 몇 쪽을 남겨두고 세탁기를 돌리고, 떡볶이를 만들고, 꼬맹이들을 먹이고, 설거지를 했다. 머릿속에 가물가물 남은 흔적이나마 끄적이는 동안 또 몇 번을 멈추어야 할까. 꼬맹이가 겨우 낮잠에 들고 더 큰 아이들이 식탁에서 방탈출 보드게임을 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 자리에 앉아 아무말잔치를 벌인다.

버지니아 울프가 살던 시대에 매년 500파운드가 어느 정도 가치였는지는 모르겠다. 10여년 차 경력의 내가 이백여만원을 벌기 위해서는 하루 최소 여덟 시간 근무와 한두시간의 출퇴근 시간을 들여야 한다. 초과근무를 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귀가하면 집안일, 육아.
휴직하는 동안 집안일과 육아 시간 외에는 읽고 쓸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렇지만 돌아가야지, 맞벌이의 삶으로. 한쪽에게만 부양과 대출상환의 부담을 지우는 건 부당하고 미안하다.
저에게 매년 500파운드의 유산을 물려주실 숙모님 안 계신가요.

100년 전쯤 미래의 우리에게 열심히 쓰라고, 돈을 벌고 자기 방을 마련하고 그 안을 어떻게 꾸밀지 궁리하라고, 세상이 달라질 거라고 말해준 버지니아 울프는 참 똑똑하고 재치있어 보였다. 대부분 옳은 말이고 여성을 향한 부당한 평가와 편견과 그늘과 제약을 제대로 인식하고 지적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나아진 시대에 사는 듯 보이는데도, 아이가 없고 유산을 받고 글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울프가 왜 부럽냐 나는. 아냐 안 부러워 나도 열심히 쓸 거야. 일기도 쓰고 독후감도 쓸 거야. 픽션도 쓸 거야. 아무말에 못생긴 글이라도 마구마구 쓸 거야.
그러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확보할 방법을 궁리한다. 새벽에 일찌감치 깬 동안 빈 자리를 눈치챈 꼬마가 울며 뛰어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얼른 사라져서 퇴근 후 한두 시간이라도 카페에 들러 뭐라도 끄적이고 올 수 있길 바란다. 아이들이 얼른 자라나고 나는 얼른 늙어버렸으면 좋겠다. 어른이 된 아이들이 각자의 삶과 사랑을 향해 날아가고 혼자 외롭게 남고 싶다. 막상 그런 날 닥치면 또 징징댈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못난 마음은 그런 먼 미래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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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3-29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읽으셨군요!!

반유행열반인 2020-03-30 06:45   좋아요 0 | URL
크 다락방님께서 먼저 읽고 독려하셔서 부지런히 좇았습니다!!!

공쟝쟝 2020-04-03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ㅠㅠ 얼른 늙어버리고 싶다...는 말이 참 서글프고 공감되요...

2020-04-03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3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3 1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4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4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5 0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로작 네이션 - 우울에 빠진 한 여자의 심리 보고서
엘리자베스 워첼 지음, 김유미 옮김 / 민음인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20200329 엘리자베스 워첼.

The Verve-The Drugs Don‘t Work
https://youtu.be/ToQ0n3itoII

스물 한 살 때 전공 수업 참고문헌 목록에 엘리자베스 워첼의 ‘비치-음탕한 계집’이 포함되어 있었다. 교수가 간단하게 책 소개를 했는데 무척 끌렸다. 겉표지에 발가벗은 저자가 가운데 손가락을 펼치고 속표지는 형광핑크색으로 장식된 그 두꺼운 책을 서점에서 뽑아들었을 때 나는 어쩔 줄 몰라했다. 지름신은 내 등을 자꾸 떠밀었지만 마침 과외알바가 다 짤려서 개털이었다. 결국 밥 몇 끼 굶지, 하고 책을 사서 부지런히 읽고 기말 페이퍼로 그 책 리뷰를 써냈다. 싸이월드를 뒤지니 2004년에 쓴 그 글이 남아있어 읽어보았다. 스물 한 살의 나야 어쩜 이런 걸 다 썼니.

올초 갑자기 생각나서 알라딘 서점에 저자 이름을 쳐봤다. ’프로작 네이션’이라는 책이 이후에 번역되어 나온 걸 알았다. 비치보다 훨씬 전에 쓴, 저자가 겪은 우울증을 다룬 자서전이라고 했다. 당장 사놓고 몇 달 후에 펼쳤다.

서문을 읽다가 이제 50대쯤 되었을 저자가 잘 살고 있나 궁금했다. 구글창에 검색하니 읭. 이 책을 살 무렵이 사망 날짜로 찍혀 있었다. 무심결에 이름 뒤에 자살.을 추가로 붙여 검색했다. 구글은 아니야, 사망원인: 유방암 이라고 알려주었다. 약간 부끄러웠다. 뭘 얼마나 안다고 자살했을 거라고 넘겨짚었을까. 한편으로는 자살하지 않고 사는 날까지 살았구나, 하고 안도했다. 누군가 해냈다면 나도 못할 건 뭐야 싶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똑같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다른 이유에서 불행하다는 톨스토이의 말은 자주 인용된다. 내 생각에는 그의 말은 전적으로 틀렸다. 그는 완전히 반대로 알고 있는 것 같다. 행복은 무한한 다양성을 가지고 있고 행복한 사람들과 행복한 가족은 수많은 방법으로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그러나 불행한 가족이 자신들의 슬픔과 극단적인 감정에 빠져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하지 못하는 동안, 행복한 가족은 행복하기 위해 많은 일들을 하거나 또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행복할 때는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많지만, 슬플 때에는 모든 생각과 감정이 절망으로 마비된 채 가만히 앉아서 불행을 끌어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불행한 가족은 모두가 똑같다...비정상적인 가정은 술을 마시는 엄마든, 아이들을 때리는 아버지든, 서로 죽일 듯이 미워하는 부모든, 어떤 문제라도 그 골격이 동일하다. 병리적인 현상의 원인에 대한 설명은, 어린 시절에 충분히 사랑을 받지 못했다든지, 또 다른 점에서 방치되었다든지 하는 것들로 항상 동일하다. 불행한 사람이 털어놓는 자신의 불행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른 모든 사람의 불행한 이야기와 똑같다는 것을 알게된다.’ (342-343쪽)

단정하는 것은 나쁜 버릇이지만 어려서부터 어떤 아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너네 아버지도 술을 많이 마시는구나. 어쩌면 엄마를 때리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거울 앞에서 볼 수 있던 그늘을 얼굴에 덮고 있는 약간 움츠려든 아이들에게 다가가 그런 생각을 직접 건넬 수는 없었다. 나도 그래. 우리집도 그래. 우리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인데다가 정신병자야.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면 나와 그 아이들의 마음이 좀 나아졌을까. 피씨통신동호회에서 만난 아이들과 전날 아버지가 술을 먹고 무슨 만행을 벌였는지(칼을 들고 죽겠다, 죽이겠다 난동을 피웠다, 마당에 드러누워 잠들었다, 가스 호스를 끊으려했다 등) 경쟁하듯 말하곤 했다. 서로를 위로하는 방식이었지만 그 뒤에 나오는 결론은 언제나 우리는 루저야, 하는 패배감과 무력감이었다.

그래서 다정한 아버지와 함께한 여가 시간을 말하는 아이들이 부러웠고, 화목한 가정의 일상을 자연스레 드러내는 걸 보면 거부감마저 들었다. 그런 게 가능해? 가족이란 게 그런 거야? 거짓말 아니야?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 워첼은 부모의 불화와 별거, 이혼을 겪으며 자랐다. 엄마를 기쁘게 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지만 엘리의 마음은 어린 나이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다. 스스로 우울증에 빠져 있다는 걸 일찍 인지한 듯하지만, 자신의 우울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관심을 끌기 위해 너무 오랜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 했다. 학교 탈의실에 숨어서 다리를 면도칼로 긋는 자해를 하고, 엄마가 일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맡겨진 유대인 여름캠프에서 약물 과다 복용을 하고 며칠 누워있기만 한다. 하버드에 입학한 뒤에도 자부심을 갖지 못하고 방황한다. 끝없이 사랑을 갈구하지만 버려질 거라는 걱정이 앞서서 연인에게 집착하거나 나쁜 남자와 쉽게 가까워지는 바람에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 코카인, 엑스타시, 술, 일, 많은 것들에 지나치게 빠져든다. 어려운 일에 처하면 금세 울어버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엉망으로 대하고 과도한 계획을 세웠다가 제대로 지키지도 못한다. 그런 상태가 악화되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원격학습을 한답시고 휴학도 하지 않고 도망치듯 영국으로 떠났다가 황폐해진 정신으로 미국에 돌아온다. 영국에 갔을 때가 제일 바닥일까 싶었는데, 정신과 의사와 상담 직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게 정점이었다. 다행히도 죽지 않았고 그 무렵 개발된 프로작 복용이 효과가 있었다. 자살 시도 이후 살고 싶다는 의지를 회복한 덕에 엘리는 살아남았고, 계속 프로작을 복용했고, 이 책을 썼다. (그리고 비치도 쓰고, 올해 초까지 살아있었다.)

끝없이 자신을 극한 상황까지 몰아가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좀 어떻게 해달라고 울부짖고, 그러면서도 스스로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엘리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아주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십 대 이십 대를 겪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우울증에 빠진 부모의 불화, 이혼, 사랑의 결핍과 갈망, 자살 충동, 항우울제 복용(프로작은 아니고 나중에 개발되어 효과가 더 좋다던 렉사프로), 자기 혐오, 자기 파괴적 행위들.

힘든 시기에 이 책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지나치게 동일시하고 더 우울에 빠졌을 것 같다. 차라리 조금은 나아진 지금 읽는 편이 다행인 것 같다.

이유를 모른 채 잠들지 못하고 울기만 하던 밤들, 고층 창 밖으로 몸을 던지고 싶은 마음과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싸우며 울던 날들(앞으로도 3층 이상은 살지 않기로 다짐했다), 잠든 아기와 빨랫줄에 널린 천기저귀를 번갈아 바라보며 두 사람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던 끔찍한 밤들. 이십대 후반에 6개월 간 복용했던 항우울제는 모든 불면과 우울을 걷어가지는 못했지만 자살충동을 억제하는 데는 효과가 있었다. 이후로 다시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은 없지만 우울과 불면과 자살충동은 잊을 만하면 몰려왔다 겨우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아직도 가끔 환한 낮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 한밤 중에 잠에서 깨어 어둠 속에 눈을 뜨고 있을 때 불쑥 드는 마음이 있다. 내가 너무 미워서 없애버리고 싶어. 그 때 내 곁에 누운 어리고 나이든 사람들의 잠에 빠진 숨소리가 들린다. 당신, 우리에게 최선은 아니지만 최악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조금 더 곁에 있어줘요, 하는 것 같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늘었다. 최소 여섯 개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그러니까 살아야지.

언젠가 내가 말했다.
내 삶은 열정도 재미도 없어졌어. 그냥 평범해.
곁의 사람이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도 행복해지기로 했잖아.
그 말은 내내 잊히지 않는 위로로 남았다. 무언가 되고 싶지 않은 삶, 위대한 뭔가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되는 삶, 그냥 평범하고 조용한 나날. 행복이 뭔지 조금은 알게 되었고 그런 마음을 유지하고 싶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워첼처럼 스스로가 아닌 다른 이유로 죽는다면 완전히 망한 삶은 아닐 것 같다.

‘나는 나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생각했고, 세상에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으며, 내 존재를 조금이라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나의 고통뿐이라고 생각했다. 삶에 대해 극도의 민감성을 갖는 것이, 인생을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무감각한 보통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드는 것보다 훨씬 순수하고 정직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은, 모든 것을 지나치게 강력하게 느끼면 결국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일들을 같은 데시벨로 인식하면, 포마이카 개수대 위를 기어가는 바퀴벌레의 죽음이 아빠의 죽음만큼 비극적인 일로 느껴진다. 사실은 밖에 있는 사람들 즉, 감정적인 에너지를 선택적으로 소모하는 사람들이, 감정상의 미묘한 차이를 끊임없이 단조로운 절망으로 대체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정직하다…나는 엉뚱한 순간에 나의 개인적인 얘기를 마치 남의 일처럼 늘어놓는 괴팍하고, 수다스럽고, 에너지가 넘치는 나의 성향을 내 친구들이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우울증에서 회복되어 가는 동안, 친구들은 내가 사려 깊지 못하고 도가 지나친 말을 하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행동을 나의 어쩔 수 없는 약점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나의 그런 점을 좋아했던 것이 아니었다…우울증은 오랜 시간동안 나의 잘못된 부분들을 설명할 수 있는 편리하고도 정직한 도구였고, 그러한 약점은 나의 좋은 면들을 두드러지게 할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다. 화학적인 치료를 받음으로써 그 모든 도구는 사라질 것이다.’ (439-441쪽)

책의 말미에 덧붙은 프로작 처방의 증가에 대한 견해와 커트코베인의 죽음(이 책이 마무리되던 1994년 봄에 그는 권총으로 자살했다)에 관한 소고는 논점이 흐릿하고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프로작이 쉽게 선택된다고 해서 다른 중증 우울증 환자의 고통까지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정도로 읽혔다. 일부는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약은 우울과 불안이 제거된 잔잔한 마음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알게 하는 수단으로 쓰일 때는 도움이 된다. 다만 약이 모든 걸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함께 하는 사람들, 관심, 사랑,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고 더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만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 바깥의 사람도, 화학물질도 약간 도울 뿐 나를 완벽한 행복으로 데려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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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치 : 음탕한 계집
엘리자베스 워첼 지음, 양지영.손재석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평점 :
품절


-20040607 엘리자베스 워첼.
싸이월드에서 예전에 쓴 독후감을 발굴했다. 이십 대의 내가 (내 눈에만) 참 귀엽다.

Why do you call me ‘BITCH‘? Am I a Bitch?
-엘리자베스 워첼의『비치: 음탕한 계집』을 읽고-
대학에 들어와 중앙 노래패 활동을 하면서 페미니즘에 관한 세미나와 이런저런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고, 양성평등을 실현하려는 동아리 내 분위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한 힘들게 살다 가신 할머니, 어려운 상황이지만 여전히 강하게 살고 계신 어머니를  보며 ‘여자로 살기‘에 대해 스스로 많은 고민을 하는 중이다. 연애를 시작하면서 특히 남녀 간의 성과 사랑, 그 안에 담긴 정치성이나 권력관계에 관심을 갖게 된 와중에 수업시간에 소개된 『비치: 음탕한 계집』이라는 책은 제목부터 나를 잡아끌었다. 600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이 부담되기도 했고, 비싼 가격은 경제적으로 곤궁할 때라 생존을 위협했지만 꼭 읽고 싶다는 생각에 과감히 서점에서 이 책을 들고 나왔다. 기대한 만큼, 이 책은 그 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작하는 글과, 1편부터 5편까지의 다섯 가지 이야기, 마치는 글로 되어 있는 이 책은 각각의 편마다 책 한 권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수많은 영화 속 주인공, 배우와 모델, 정치인, 소설가, 뮤지션들이 등장하고, 많은 문학작품이나 영화, 노래가사, 실제 사건이 사례로 제시되어 다소 정신없긴 하지만 영화와 음악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가끔 아는 사람들과 작품들이 등장하여 읽는 재미를 더해주곤 했다.
「시작하며: 매력의 조작」이라는 제목의 글은 영화나 광고, 잡지에서 만들어내는 여성의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성을 일종의 무기로 사용하는, 나쁜 계집애, 비치에 대한 사람들의 왜곡된 환상을 비판한다. 여성은 지금까지 끔찍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어 온 자신의 욕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하고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를 원할 뿐, 결코 남성들의 생각처럼 그들을 겁주거나 지배하기 위해 성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우기 위해, 내 앞에 놓인 나의 것을 찾으려고 할 때 ‘비치‘라는 매력적인 성적 페르소나는 여성들을 사로잡지만, 그 길을 택하는 순간 ‘비치‘는 세상 사람들에 의해 낙인이 되어 그녀들로 하여금 외로운 길을 걷게 했다. (파국적인 사랑이나 고립된 삶 같은.)
「제1편: 남자가 여자를 대좌에 올려놓으면, 여자는 거기서 내려온다」에서는 성경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삼손의 머리카락을 잘라 그의 힘을 앗아간 여성 데릴라를 중심으로 여성을 성적 대상물로 만들어 놓았지만 정작 그것으로 인해 영향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남자들을 비판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삼손이 위험에 빠지고 비참한 최후에 이른 것은 데릴라가 삼손을 성적으로 유혹한 뒤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을 치명적인 무기로 여기고 그들 때문에 남성이 신세를 망친다는 주장은, 남성이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는 것과 다른 파멸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무시한 채 잘못을 모두 여성에게로 돌리려는, 그저 핑계에 불과하다. 언제나 여성은 남자를 파멸시키거나 권력을 얻고, 우위를 점하려는 어떤 ‘목적‘을 가졌을 때만 성적 매력을 이용한다고 여겨질 뿐, 그들이 그럴 능력을 가졌고, 그것을 즐기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즐거워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자신의 매력과 관능을 만끽하는 것이란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성이 위험한 존재라고 여겨지는 것,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것은 부당하다. 모든 즐거움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즐거움으로부터 소외되고 결핍된 여성들은 더 많이 원하게 될 뿐이다.
많이 개방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성적으로 ‘관대하지 못함‘을 본다. 남성들이 즐기기 때문에 연예인들의 누드집이 범람하다시피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즐기는데 그치지 않고 그녀들의 행실을 흉보거나 사생활까지 연관짓곤 한다. 자신들이 원한 매력이고 그 덕에 인기를 끌더라도 어딘가 폄하 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성적 매력이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뭔가 음모를 지닌 듯한, 고상하게 팜므파탈, 쉽게 말해 내 신세 망치는 나쁜년이라고 하면서도 그것을 뿌리치지 못하는 일부 남성들을 보며, 우리도 그저 그들처럼 자유롭게 즐기고 싶을 뿐이고 그럴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게 되길 바랄 뿐이다.
「제2편: 영계 아가씨, 아빠 집에 계셔?」는 어릴 때 강간당한 경험이 있고, 미성년자이면서 못난 유부남에게 반했으며, 그 남자로 인해 콜걸이 되기까지 한 배경과 십대 소녀의 혼란스러운 특징을 무시당한 채 애인의 부인을 죽이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 자체와 평소의 태도만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강한 형벌을 받았던 에이미 피셔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영화나 광고, 음반시장에서 ‘롤리타‘콤플렉스를 조장하고 소아성애증자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어린 소녀들은 자신이 하는 일들이 남성들의 성적 환상과 흥분을 불러일으킨다는 것도 모른 채(혹은 어렴풋이 그걸 알면서도 그 결과 자신이 겪게 될 일들을 모른 채)행동하곤 한다. 페미니스트들도, 사법 체계도, 그녀의 가족도 에이미를 돕지 못했다. 세상은 소녀들에게 유치하고 소녀가 아닌 타인들이 만족할 만한 대중문화와 이미지, 상품들을 내놓을 뿐이
었다. 이에 반발하여 자신들의 삶을 창조해나가려는 소녀들이 팬진, 밴드, 클럽을 만들었고 이것이 주류문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소년들의 성적 권리는 보장되지만 소녀들이 이것을 요구할 때 그야말로 화냥년에 비치, 괴물로 몰리는 세상에서, 에이미는 한 때의 좋지 않은 경험에 대해(못난 유부남과 사귀고 그에게 그의 마누라를 죽이라는 사주를 받은 것)툴툴 털고 더 좋은 길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기보다는 감옥에 오랜 기간 갇혀 있었으며 세상으로부터 저주받고 버림받았다. 그에 비해 그 못난 유부남 버타푸코는 토크쇼에서 유명세를 타고 버젓이 잘 살고 있다.
이 사건은 내게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우리 나라는 그나마 미성년자와 성매매를 한 사람들을 엄중하게 처벌하고 있어 다행이다. 십대 소녀시기를 막 거쳐왔기 때문에 나는 잘 알 수 있다. 그 불안하고 어디로 튀어버릴지 모를 혼란, 어디든 나를 던지고 부숴 보고 싶은 욕구, 그 결과가 매우 충격적이고 괴로울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잊혀지고 또 잘 모른다. 소녀들은 그야말로 부서지기 쉽다.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황에서 
성적 경험은 그 소녀의 인생을 바꿔 놓을 수 있다.(정신적 충격이나 원치 않는 임신 등을 통해서 말이다.)그런 사실은 무시한 채 자신의 느끼한 욕망만을 채우려는 일부 성인 남성들에 대해 나는 분노를 느낀다. 
「제3편: 저기 또다시 그녀는 떠나가고...」에서는 여성의 우울증과 절망, 자살에 대해 이야기한다. 헤밍웨이의 손녀 마고의 자살, 문학가였던 실비아 플라스와 앤 섹스턴의 자살, 마약에 찌든 모델과 뮤지션들, 많은 재주 있는 여성들이 평생을 따라다닌 우울증으로 고통받았고 그것으로 인해 파멸했다. 그런데 대중문화와 언론은 이들을 아름다움이란 리본으로 포장한다. 죽음으로 그들의 가치는 상승하고 생전에 인정받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재조명, 
재평가, 재창조하지만 그것은 살아있는 이들의 환상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환상 속에 아름다운 미친 여자들, 우울증 환자들은 매력적인 성적 대상으로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그녀들의 삶은 그녀들 자신에게는 그저 고통이었을 뿐이며 그것을 견뎌내기 위해 예술혼을 표출하며 겨우 살아가거나 그 고통에 파묻혀 일찍 죽어버리곤 했던 것이다. 절망적인 미인들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 역시 그녀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약하고 죽어 가는 것을 즐기는 것은 가학적이고 잔혹하다고 느껴져 몸서리 쳐졌다. 작가는 특히 그녀들의 재능이 아닌 생전의 유별난 성격, 기이한 행동, 그리고 그녀들의 죽음이 그녀들을 회자시키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음울하고 기괴한 아름다움, 고통의 미학을 나 역시 선호하는 편이지만 그것이 모델들을 마약 중독자로 만들고 죽게 까지 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홀의 코트니 러브를 작가 역시 상당히 좋아하는 듯, 광기에 사로잡힌 듯 자신의 끝없는 욕망을 끊임없이 채우려는 그녀를 작가는 옹호하고 있다. 제멋대로 굴긴 하지만 그녀는 아름답고 음악과 연기에 재능을 보이고 있다. 그런 그녀를 사람들은 히트곡은 남편인 커트 코베인이 다 써준 것이다, 그녀가 그를 죽였다, (울부짖는 모습에)왜 또 저러냐? 하는 반응을 보인다. 괴팍하고 괴짜인 남성 배우들은 늙을 때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재능을 인정받는 반면 요즘의 코트니는 오히려 헐리우드나 주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바꾸고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전략일지라도 다소 안타깝긴 하다.
작가는 페미니즘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의제로 여성들의 우울증을 정치화 시킴으로써 오히려 그 사적인 가능성을 파괴해왔음을 비판한다. 슬픔을 가진 여자들의 존재 가능성을 점점 지우며 침묵하게 만들고, 분노의 외침만 존재할 뿐이다. 우울증과 까탈스러운 성격, 소위 ‘비치같은 짓‘의 본래 의미는 ‘절망‘이라는 것. 세상이 남성이 이 섬세하고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여성이 되지 않는 이상 어려울 것 같다.
「제4편: 외야석의 금발 미인」은 힐러리 로뎀 클린턴에 대해 ‘능력 있고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여성으로 언론이 떠들고 있으나, 사실 그녀는 남편과 결혼했을 뿐, 그리고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뿐 그녀에게 어떤 정당화 된 권력이 없다는 것을 들어 스스로 자신의 정당한 몫 찾기 내지 능력 발휘를 포기하고 있는 힐러리를 비판하고 있다. 힐러리 뿐 아니라 외도로 업무의 스트레스를 풀고 휴식을 취하려는 남자들(빌 클린턴과 같은)이 존재하기에 존재
하는 그들을 물고 늘어져 어떤 권력을 획득하려는 여성들 역시 비판하고 있다. 클린턴의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하고 탄핵 이야기까지 나왔던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외도 사건은 당시에 어린 나이였음에도 워낙 화제가 되어 기억하고 있지만, 이 책에 열거된 것은 아직 그 이전인 듯하며 빌 클린턴이 그만큼 바람둥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작가는 결혼으로 인해 여성은 모든 능력 발휘의 기회를 포기해야 하는 사회 역시 비판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성
공을 위한 길을 나서든지 아니면 남편을 도와 그의 성공을 돕든지 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지만, 남편을 돕고 가사 일을 하는 것 역시 엄청난 노동이며 따라서 여성들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장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작가는 힐러리가 영부인이 봉급을 받을 수 있는 제도를 건의하든지 의회 승인 절차를 밟아 공직을 받든지 하여 정당한 권력을 얻을 수 있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뒤에서 압력을 행사하여 욕을 먹는 것을 비판한다. 물론 이 책이 나온 1998년 이후 르윈스키 사건이 터지고 힐러리는 나름의 독립성을 찾아 2000년에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남성에게 의존적인 신분 상승과 권력 획득은 보기 좋지 않고 여성의 정당한 지위 향상에 저해되는 것이리라,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하는 것이 떳떳하고 더욱 멋있는 것이라고 나 역시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에게 너무 불리하게 되어있는 사회 구조와 뿌리 깊은 잘못된 인식들, 출산과 육아 등이 아직까지는 그녀들을 방해하고 있으며, 아직은 기득권을 쥐고 있는 남성을 이용하지 않고는 상승할 수 없는 여성들 역시 존재함을 간과해선 안 될 것 같다. 남성 중심의 제작진 속에 남성들의 관심을 끌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여자 연예인의 경우가 그 예일 듯 하다. 
「제5편: 그녀를 사랑했지만 죽여야 했어」는 O.J심슨이 니콜 브라운 심슨을 살해했다는 의혹에도 불구하고 무죄로 풀려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매 맞는 여성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들이 맞고 있다면 왜 아직도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반복된 폭력으로 인한 무력감, 도망갈 수 없다는 절망감, 혹은 나아지리라는 기대 내지 더 나아질 것이 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 자기 비하의 감정이 혹은 그녀의 가족이 그녀들을 묶어 놓을 수 있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니콜은 어린 나이에 O.J와 사랑에 빠졌고 결혼하게 되었다. 그녀와 그가 사귈 때부터 O.J는 그녀의 월세를 내주고 비싼 차를 사 주었는데, 그 비싼 선물이 그녀를 얽매게 될 것임을, 그녀에 대한 폭력의 대가라는 것을 니콜의 부모는 몰랐거나, 알면서도 모르는 체 했다. 사위의 경제적 도움을 받으며 니콜의 친정은 넉넉한 삶을 살았고, 니콜은 17년 간 두드려 맞으며 살았다. 그녀가 이혼을 원했을 때 그녀의 친정 가족들은 극구 말렸고, 그럼에도 니콜은 결국 이혼했으며, O.J의 질투로 살해당했다. 니콜은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도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를 만났으며, 살해당할 것을 운명인양 담담하게 받아들인 듯 보인다. 너무 황당한 것은 그녀의 가족들은 억울하게 죽은 그녀를 위해 범인을 처벌하려하기 보다 물주인 사위를 감싸고돌았다는 것이다. 그나마 페미니즘을 위해 일한다는 니콜의 동생 데니스조차 언니가 맞고 산 사실을 부인하며, 언니를 위한 법정에도 제대로 출두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피해 여성인 자기 언니도 구제하지 못하는 여자가 누굴 위해 일한다는 건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끔찍하지만 흥미롭게 지켜본다. 아름다운 여성이 맞았다. 죽임을 당했다. 변태스러운 가학애와 피학애의 조장, 그것도 포르노가 아닌 영화나 음악 가사와 같은 대중문화에서. 폭력적이고 폭력 암시적인 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피에 열광하게 한다. 『볼링포콜럼바인』이라는 영화에서 문제를 제기했듯이 폭력과 불안을 조장하는 사회에서는 고등학생들이 총을 들고 자기 반 친구들을 갈길 위험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데이트 강간‘이라는 말이 존재하고 ‘아니라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은, 여성의 의사결정과 무관하게 자행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사랑하려 하지만 서로의 우위를 정하려는 줄다리기를 하다 무너지고 깨지기도 하고 서로를 죽이기도 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때로 어그러져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것이라고 믿게되고, 그래서 집착하게 되는 것 같다. 이것이 사랑을 파탄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상대를 죽여버리는 파국에 이르는 것이 난 참 두렵다. 서로 함께 지내면서 행복하기 위한 것이 사랑이 아니었던가?
「마치며: 내가 이것 때문에 다리털을 깎았나?」에서는 독신 여성으로 사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듯 그려낸다. 홀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곳을 다니고 느끼고, 많은 사람들을, 많은 남자들을 만나고, 부딪히고 깨지고 아파 보면서 진정한 사랑을 찾든지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찾든지 아니면 그저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든지 할 필요가 있다는 것에 공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은 성급하다. 일단 사랑에 빠지면 눈앞의 남자가 전부인 
듯 싶다. 나의 어머니는 선을 본지 3주만에 결혼을 결정하셨고 결혼 일주일만에 매일매일 술에 취해 새벽에 들어오고 유리와 가제도구를 부수는 남편에게 질려버렸으며, 두 달만에 이혼을 생각했지만 이미 뱃속에 내가 생겨버려서 20년째 그 남자에게 매어 있다. 빠른 결정, 적은 경험은 이처럼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나를 비롯해 많은 여성들은 스쳐 지나가는 사랑들을 쉽게 ‘경험‘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그 상처를 너무 두려워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시행착오는 더 나은 삶을, 사랑을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성경부터 시작해서 대중문화, 예술, 정치, 그리고 가장 사적인 부분까지 얽혀있는 섹스와 사랑, 남녀간의 관계에 대해 폭격을 맞은 듯 많은 사람과 사건과 생각을 내 머리에 퍼붓는 계기가 되었다. 지나치게 몰입하고 공감하여 작가의 의견에 덜 비판적이었던 점은 반성한다. 그렇지만 이 책이 내가 여성으로서 더 나은 삶을 살고 더 나은 사랑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다. 나는 정말 자유롭고 즐거운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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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 인권학교 - 노숙인도 우리와 같은 시민이에요! 톡 꼬마 철학자 7
그자비에 에마뉘엘리 지음, 레미 사이아르 그림, 배형은 옮김, 노명우 감수 / 톡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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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7 그자비에 에마뉘엘리, 소피보르데 글, 레미 사이아르 그림, 노명우 감수.

서울역을 지나다 아주 슬픈 표정을 하고 앉아 있는 아저씨를 본 기억이 난다. 겉차림은 초라하고 힘이 없어 보였다. 주변에는 아무 데나 누워 있는 사람들, 걷거나 날아다니는 비둘기들.
어느 오전에는 병원에 다녀오다 한참 거리를 걸었는데, 길 위에서 노숙인으로 추정되는 많은 사람들을 마주쳤다. 햇볕을 쬐며 가만히 앉아 있기도 했고, 주민센터 앞 배달음식 그릇 봉지를 뒤지며 남은 음식물을 집어먹다 내가 다가오자 아무 일도 안 한 척 봉지를 여미기도 했다. 마스크를 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위기 상황에서 가장 큰 위험에 놓이는 사람들.
자칫하면 미끄러지고 넘어져 누구나 놓일 수 있는 위치. 거리의 사람들도 한뎃잠을 자는 삶을 즐기지는 않을 것이다. 춥고 덥고 의식주 해결이 안 되고 화장실 사용과 씻기 같은 최소한의 욕구조차 채울 수 없는 삶.

프랑스 저자들이 쓴 노숙인 인권에 관한 어린이책이다. 짧은 책이지만 노숙인에 대해 알고 싶은 어른이 읽기도 좋았다.
프랑스에는 노숙인 구조대가 있다고 한다. 어려움에 처한 노숙인을 돕고 병원이나 쉼터로 데려간다고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이 책에서는 돈이나 먹을 걸 주는 게 나쁘다고 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도울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눈이 마주칠 때 미소지어 주기.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받을 수 있게 하기. 그 부분을 읽을 때는 노숙인들 중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도 많다는데 괜히 웃어보였다가 해코지 당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다. 이내 그런 생각하는 자체가 벌써부터 우리랑 다른 사람이라 선 긋는 게 아닌가 싶어 부끄러웠다.
우리나라에도 노숙인 자활을 돕는 지자체 정책과 시민단체가 있다는 것을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서울시 다시서기센터 www.homelesskr.org
홈리스행동 www.homelessaction.or.kr
사이트를 통해 코로나 감염 예방을 빌미로 노숙인들에게 거주하는 곳에서 퇴거를 요구하는 사례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빈곤 퇴치와 자활을 돕기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모습도 사진이나 글을 통해 볼 수 있었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뭘까 하다가 네이버 아이디 세 개 콩 털어서 노숙인쉼터랑 무료급식소에 기부를 했다. 아룬다티 로이 소설 속에서 무덤가에 머물던 안줌과 주변 노숙인들이 생각났다. 세상 모든 거리의 사람에게 벽과 천장이 막히고 편히 화장실 쓸 수 있는 깨끗한 거처가 마련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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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파민형 인간 - 천재인가 미치광이인가
대니얼 Z. 리버먼.마이클 E. 롱 지음, 최가영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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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6 대니얼Z.리버먼,마이클E.롱.

‘...대학생을 대상으로 정치적 신념을 묻는 대규모 설문조사가 실시됐다. 연구팀은 피시험자 중 절반은 손세정제가 비치된 장소로 안내하고, 나머지 절반은 손세정제가 비치되지 않은 장소로 안내해 설문지를 작성하게 했다. 손세정제는 은연중에 감염의 위험을 상기시키기 위한 장치였다. 실험 결과, 손세정제를 옆에 두고 앉았던 학생들은 도덕규범, 사회사상, 국가재정 측면에서 보수주의 성향이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실제로 투표소 곳곳에서 손세정제가 눈에 띄었던 일이 우연이 아닌 것이다.’ (본문 244-245쪽)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시기에 선거까지 겹치니, 우리는 이 실험의 현실 적용 결과를 곧 확인할 수 있겠다. 기표소에 비치된 비닐장갑과 손세정제는 정말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결과를 낳을까? 책에서 말한대로라면 현재 상황이 불리한 정당이 있을지도. 이 책에는 이런 실험 결과가 자주 인용된다.

나는 스스로 중독에 취약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한 가지에 몰입하면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특정 행동에 꽂히면 끝없이 반복한다. 운동이나 자기계발 같은 유용한 것이면 좋을텐데, 불행히도 컴퓨터 게임이나 모바일 게임에 미쳐서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삭제나 계정 폭파 같은 극단의 조치 뒤에야 멈춘 적이 있다. 대개 중독이라는 말이 붙는 일은 반복할수록 안 좋은 것들인데, 글로 적기 부끄러울 만큼 다양한 안 좋은 시기를 겪었다. (게임...SNS…약물...알코올...김성모 만화...기타 등등…)
처음에는 즐거움을 주었던 일도 그 지경쯤 되면 난 이걸 하는 게 정말 싫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는데 몸은 어느새 패턴화 되어 그 싫은 짓을 반복하고 있다. 해결책은 완전히 단절하는 기간을 두는 것이다. 적당히 즐기며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수준의 중용이 내게는 없었다. 불행한 인생.
과몰입형 성격의 장점도 있다. 입시공부나 대회참가, 공채시험 같은 성취지향적 활동에서 목표를 향해 무서운 집중력을 보였다. (늘 그런 건 아니고...가끔…) 어쨌거나 그 덕에 밥벌이는 하고 산다. 내가 하는, 겪는, 궁금한 일에 관해 집요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오래 시간을 쏟다보니 업무 수행 능력도 나쁜 편은 아니다. 작은 일에 너무 진을 빼서 삶이 피곤할 뿐...

그런 내 눈에 이 책이 들어왔다. 당신을 미치광이이자 천재로, 중독자이자 창조자로 만드는 욕망의 분자 ‘도파민’.
미치광이래. 중독자래. 욕망이래. 내 얘기 막 나올 것 같다?
사실 알라딘에서 과학책을 사면 주기율표 북램프를 준대서 급히 고른 책이었다. 막상 받은 북램프는 별로 예쁘진 않았지만 취침등으로 잘 쓰고 있다. 열받는 건 큰 마음 먹고 이 책을 지르고 고이 모셔뒀더니 내가 이용하는 전자책 도서관마다 이 책이 신규 입고 되었다. 아...좀 참을 걸…
그래도 어느 날 이 책을 펼쳤을 때,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다행이었다. 한 번쯤은 들어봤을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인간 행동과 성격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구석구석 어떤 분야에까지 마수?를 뻗치고 있는지 다양한 사례와 실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해주는 책이었다.

도파민, 하면 뭔가 저절로 쾌락이 뿜뿜 솟을 것 같은 이미지이지만, 실제로는 미래를 바라보는 기대감과 함께 뭔가를 계속하도록 의욕이 넘치게 만드는 힘이라고 한다. 이 미래지향 호르몬의 반대편에는 현재지향적 화학물질, 세로토닌, 옥시토신, 엔도르핀, 바소프레신, 엔도카나비노이드 계열 분자들 등등이 있다. 얘네들은 행복을 말할 때 자주 등장하는 호르몬이다.
첫 장부터 사랑에 빠지게 하고, 그 사랑을 걷어차고 새 사랑을 찾게 만드는 도파민의 작용이 등장해서 재미있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반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하며 미래를 꿈꾸게 하는 것은 도파민이지만, 콩깍지가 벗겨진 뒤에도 그 사랑을 잔잔하게 유지하며 행복으로 이끄는 것은 현재지향적 화학물질의 역할이라고 한다. 사랑에도 단계가 있는 것이다. 눈부신 미래를 향해 돌진하는 사랑에서 친숙하고 지속되는 사랑으로의 전환. 자꾸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게 만드는 도파민을 극복하는 일이란 쉽지 않을 수도 있겠다.

도파민은 사랑의 묘약이 되기도 하지만 약물, 술, 도박, 포르노에 빠져 인간 노릇을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승리와 지배와 권력에 취해 끝없이 상승을 향한 노력을 하도록 이끌지만 행복을 주지는 못한다.
도파민의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은 예술, 학문 등의 분야에서 창조성을 발휘할 수도 있지만, 운이 나빠 유전적, 환경적 요인이 작용하면 조현병 같은 정신질환의 발현율이 높아지기도 한다. 연구에 따르면 예술가와 정신질환자와 꿈꾸는 사람의 뇌 활동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러니까 기왕이면 창조적이고 예술적인 미친놈이 되고 싶다구…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데에도 도파민 관련 유전자가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도파민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록 진보, 현재지향적 회로의 영향 하에 놓인 사람일수록 보수인 경향이 있다고 한다.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주의자는 소수자 관련 정책(저소득층 복지, 이민자 포용, 동성혼 등)은 반대하면서도, 그들이 가진 손실혐오, 가해 혐오라는 기재 때문에 오히려 봉사나 기부와 같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는 적극적일 수 있다는 설명이 재미있었다. 반대로 도파민의 수혜자?인 진보주의자는 변화한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고 사회를 낫게 만들겠다고 뛰어다니지만, 정작 사회성이나 공감능력은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아인슈타인이 한 말을 보라: “사회 정의를 향한 열정과 사회적 책임은 이렇게나 강렬한데 가급적이면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싶지는 않으니 나도 내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프하하...영감님 저도 제가 잘 이해되지 않네요...인류는 사랑하지만 사람대하는 일은 무서워요...
사고 훈련 만으로도 보수성과 진보성이 조정된다는 실험 결과도 흥미롭다. 구체적 사고(어떻게?)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보수주의가 유지되지만, 추상적 사고(왜?)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소수집단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진다고 한다. 질문과 전략에 따라 교묘하게 원하는 답변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섬뜩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원하는 방향으로 정책이나 여론을 이끌 때 유리한 전략이 될 수 있어 보인다. 잘들 활용해 보시게나…

마지막 장은 모험적 인류에 대한 이야기인데, 고고학, 인류학 관련 책에서 몇 번 읽었던 인류의 이동을 도파민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니 흥미로웠다. 도파민을 자극한 동물이 탐험 행동이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실제로 인류의 이주경로를 따라 유전자 데이터를 분석하니 도전 정신이 투철한 유전자를 가진 후손 집단이 많았다고 한다. 이건 유전자가 사람을 멀리 보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런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멀리까지 살아남고 도달했다고 볼 수도 있다. 불만족감과 동요를 일으켜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더 나은 곳을 찾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특정 유전자와 호르몬에서 나온다니, 뭔가 사람이 꼭두각시 같은 느낌도 든다.

저자의 결론은 미래 지향의 도파민을 잘 활용하되 그 역작용은 극복하고, 현재지향적 회로와 조화를 잘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조화를 이루는게 말은 쉽지만 이미 물질의 지배를 받고 어떤 인간들은 날 때부터 그렇게 생겨 먹어서 그렇다, 하는 말을 실컷 해 놓고선, 사람이 자유의지로 뭔가를 바꿀 여지라는 게 있을까 싶었다. 사람 마음이 마음대로 되니!
그래도 내가 왜 이렇게 중독에 취약한가, 한 자리에 머무는 걸 못 견디는가, 변화를 갈망하는가, 하는 물음에 특정 물질의 작용이 영향을 줬다고 설명을 들으면 나름 위안이 될 수도 있겠다.
거의 환원론 수준으로 이게 다 도파민 때문이다! 하는 건 조금 지나치다 싶을 때도 있었다. 저자도 유전, 환경 등 다양한 요인의 영향도 있다오- 다 도파민이 한 건 아니라오- 하면서 수시로 얼버무리기는 한다.

어쨌거나 재미있는 독서였다. 내가 이 책을 드문드문이지만 끝까지 읽고 독후감을 쓰게 만든 것도 결국 미래 지향의 도파민 놈이겠지? 완성된 글 한 편이라는 쾌감, 좋아요라는 자극, 이걸 얼른 읽고 새로운 책을 정복하러 나아가자 므헤헤헤- 하는 부추김. 아 이렇게 써놓으니 징그럽다. 징그러운 물질의 힘. 어쨌든 그것이 나라는 인간을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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