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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치 : 음탕한 계집
엘리자베스 워첼 지음, 양지영.손재석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평점 :
품절
-20040607 엘리자베스 워첼.
싸이월드에서 예전에 쓴 독후감을 발굴했다. 이십 대의 내가 (내 눈에만) 참 귀엽다.
Why do you call me ‘BITCH‘? Am I a Bitch?
-엘리자베스 워첼의『비치: 음탕한 계집』을 읽고-
대학에 들어와 중앙 노래패 활동을 하면서 페미니즘에 관한 세미나와 이런저런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고, 양성평등을 실현하려는 동아리 내 분위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한 힘들게 살다 가신 할머니, 어려운 상황이지만 여전히 강하게 살고 계신 어머니를 보며 ‘여자로 살기‘에 대해 스스로 많은 고민을 하는 중이다. 연애를 시작하면서 특히 남녀 간의 성과 사랑, 그 안에 담긴 정치성이나 권력관계에 관심을 갖게 된 와중에 수업시간에 소개된 『비치: 음탕한 계집』이라는 책은 제목부터 나를 잡아끌었다. 600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이 부담되기도 했고, 비싼 가격은 경제적으로 곤궁할 때라 생존을 위협했지만 꼭 읽고 싶다는 생각에 과감히 서점에서 이 책을 들고 나왔다. 기대한 만큼, 이 책은 그 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작하는 글과, 1편부터 5편까지의 다섯 가지 이야기, 마치는 글로 되어 있는 이 책은 각각의 편마다 책 한 권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수많은 영화 속 주인공, 배우와 모델, 정치인, 소설가, 뮤지션들이 등장하고, 많은 문학작품이나 영화, 노래가사, 실제 사건이 사례로 제시되어 다소 정신없긴 하지만 영화와 음악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가끔 아는 사람들과 작품들이 등장하여 읽는 재미를 더해주곤 했다.
「시작하며: 매력의 조작」이라는 제목의 글은 영화나 광고, 잡지에서 만들어내는 여성의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성을 일종의 무기로 사용하는, 나쁜 계집애, 비치에 대한 사람들의 왜곡된 환상을 비판한다. 여성은 지금까지 끔찍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어 온 자신의 욕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하고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를 원할 뿐, 결코 남성들의 생각처럼 그들을 겁주거나 지배하기 위해 성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우기 위해, 내 앞에 놓인 나의 것을 찾으려고 할 때 ‘비치‘라는 매력적인 성적 페르소나는 여성들을 사로잡지만, 그 길을 택하는 순간 ‘비치‘는 세상 사람들에 의해 낙인이 되어 그녀들로 하여금 외로운 길을 걷게 했다. (파국적인 사랑이나 고립된 삶 같은.)
「제1편: 남자가 여자를 대좌에 올려놓으면, 여자는 거기서 내려온다」에서는 성경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삼손의 머리카락을 잘라 그의 힘을 앗아간 여성 데릴라를 중심으로 여성을 성적 대상물로 만들어 놓았지만 정작 그것으로 인해 영향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남자들을 비판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삼손이 위험에 빠지고 비참한 최후에 이른 것은 데릴라가 삼손을 성적으로 유혹한 뒤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을 치명적인 무기로 여기고 그들 때문에 남성이 신세를 망친다는 주장은, 남성이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는 것과 다른 파멸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무시한 채 잘못을 모두 여성에게로 돌리려는, 그저 핑계에 불과하다. 언제나 여성은 남자를 파멸시키거나 권력을 얻고, 우위를 점하려는 어떤 ‘목적‘을 가졌을 때만 성적 매력을 이용한다고 여겨질 뿐, 그들이 그럴 능력을 가졌고, 그것을 즐기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즐거워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자신의 매력과 관능을 만끽하는 것이란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성이 위험한 존재라고 여겨지는 것,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것은 부당하다. 모든 즐거움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즐거움으로부터 소외되고 결핍된 여성들은 더 많이 원하게 될 뿐이다.
많이 개방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성적으로 ‘관대하지 못함‘을 본다. 남성들이 즐기기 때문에 연예인들의 누드집이 범람하다시피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즐기는데 그치지 않고 그녀들의 행실을 흉보거나 사생활까지 연관짓곤 한다. 자신들이 원한 매력이고 그 덕에 인기를 끌더라도 어딘가 폄하 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성적 매력이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뭔가 음모를 지닌 듯한, 고상하게 팜므파탈, 쉽게 말해 내 신세 망치는 나쁜년이라고 하면서도 그것을 뿌리치지 못하는 일부 남성들을 보며, 우리도 그저 그들처럼 자유롭게 즐기고 싶을 뿐이고 그럴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게 되길 바랄 뿐이다.
「제2편: 영계 아가씨, 아빠 집에 계셔?」는 어릴 때 강간당한 경험이 있고, 미성년자이면서 못난 유부남에게 반했으며, 그 남자로 인해 콜걸이 되기까지 한 배경과 십대 소녀의 혼란스러운 특징을 무시당한 채 애인의 부인을 죽이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 자체와 평소의 태도만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강한 형벌을 받았던 에이미 피셔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영화나 광고, 음반시장에서 ‘롤리타‘콤플렉스를 조장하고 소아성애증자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어린 소녀들은 자신이 하는 일들이 남성들의 성적 환상과 흥분을 불러일으킨다는 것도 모른 채(혹은 어렴풋이 그걸 알면서도 그 결과 자신이 겪게 될 일들을 모른 채)행동하곤 한다. 페미니스트들도, 사법 체계도, 그녀의 가족도 에이미를 돕지 못했다. 세상은 소녀들에게 유치하고 소녀가 아닌 타인들이 만족할 만한 대중문화와 이미지, 상품들을 내놓을 뿐이
었다. 이에 반발하여 자신들의 삶을 창조해나가려는 소녀들이 팬진, 밴드, 클럽을 만들었고 이것이 주류문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소년들의 성적 권리는 보장되지만 소녀들이 이것을 요구할 때 그야말로 화냥년에 비치, 괴물로 몰리는 세상에서, 에이미는 한 때의 좋지 않은 경험에 대해(못난 유부남과 사귀고 그에게 그의 마누라를 죽이라는 사주를 받은 것)툴툴 털고 더 좋은 길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기보다는 감옥에 오랜 기간 갇혀 있었으며 세상으로부터 저주받고 버림받았다. 그에 비해 그 못난 유부남 버타푸코는 토크쇼에서 유명세를 타고 버젓이 잘 살고 있다.
이 사건은 내게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우리 나라는 그나마 미성년자와 성매매를 한 사람들을 엄중하게 처벌하고 있어 다행이다. 십대 소녀시기를 막 거쳐왔기 때문에 나는 잘 알 수 있다. 그 불안하고 어디로 튀어버릴지 모를 혼란, 어디든 나를 던지고 부숴 보고 싶은 욕구, 그 결과가 매우 충격적이고 괴로울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잊혀지고 또 잘 모른다. 소녀들은 그야말로 부서지기 쉽다.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황에서
성적 경험은 그 소녀의 인생을 바꿔 놓을 수 있다.(정신적 충격이나 원치 않는 임신 등을 통해서 말이다.)그런 사실은 무시한 채 자신의 느끼한 욕망만을 채우려는 일부 성인 남성들에 대해 나는 분노를 느낀다.
「제3편: 저기 또다시 그녀는 떠나가고...」에서는 여성의 우울증과 절망, 자살에 대해 이야기한다. 헤밍웨이의 손녀 마고의 자살, 문학가였던 실비아 플라스와 앤 섹스턴의 자살, 마약에 찌든 모델과 뮤지션들, 많은 재주 있는 여성들이 평생을 따라다닌 우울증으로 고통받았고 그것으로 인해 파멸했다. 그런데 대중문화와 언론은 이들을 아름다움이란 리본으로 포장한다. 죽음으로 그들의 가치는 상승하고 생전에 인정받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재조명,
재평가, 재창조하지만 그것은 살아있는 이들의 환상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환상 속에 아름다운 미친 여자들, 우울증 환자들은 매력적인 성적 대상으로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그녀들의 삶은 그녀들 자신에게는 그저 고통이었을 뿐이며 그것을 견뎌내기 위해 예술혼을 표출하며 겨우 살아가거나 그 고통에 파묻혀 일찍 죽어버리곤 했던 것이다. 절망적인 미인들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 역시 그녀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약하고 죽어 가는 것을 즐기는 것은 가학적이고 잔혹하다고 느껴져 몸서리 쳐졌다. 작가는 특히 그녀들의 재능이 아닌 생전의 유별난 성격, 기이한 행동, 그리고 그녀들의 죽음이 그녀들을 회자시키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음울하고 기괴한 아름다움, 고통의 미학을 나 역시 선호하는 편이지만 그것이 모델들을 마약 중독자로 만들고 죽게 까지 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홀의 코트니 러브를 작가 역시 상당히 좋아하는 듯, 광기에 사로잡힌 듯 자신의 끝없는 욕망을 끊임없이 채우려는 그녀를 작가는 옹호하고 있다. 제멋대로 굴긴 하지만 그녀는 아름답고 음악과 연기에 재능을 보이고 있다. 그런 그녀를 사람들은 히트곡은 남편인 커트 코베인이 다 써준 것이다, 그녀가 그를 죽였다, (울부짖는 모습에)왜 또 저러냐? 하는 반응을 보인다. 괴팍하고 괴짜인 남성 배우들은 늙을 때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재능을 인정받는 반면 요즘의 코트니는 오히려 헐리우드나 주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바꾸고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전략일지라도 다소 안타깝긴 하다.
작가는 페미니즘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의제로 여성들의 우울증을 정치화 시킴으로써 오히려 그 사적인 가능성을 파괴해왔음을 비판한다. 슬픔을 가진 여자들의 존재 가능성을 점점 지우며 침묵하게 만들고, 분노의 외침만 존재할 뿐이다. 우울증과 까탈스러운 성격, 소위 ‘비치같은 짓‘의 본래 의미는 ‘절망‘이라는 것. 세상이 남성이 이 섬세하고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여성이 되지 않는 이상 어려울 것 같다.
「제4편: 외야석의 금발 미인」은 힐러리 로뎀 클린턴에 대해 ‘능력 있고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여성으로 언론이 떠들고 있으나, 사실 그녀는 남편과 결혼했을 뿐, 그리고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뿐 그녀에게 어떤 정당화 된 권력이 없다는 것을 들어 스스로 자신의 정당한 몫 찾기 내지 능력 발휘를 포기하고 있는 힐러리를 비판하고 있다. 힐러리 뿐 아니라 외도로 업무의 스트레스를 풀고 휴식을 취하려는 남자들(빌 클린턴과 같은)이 존재하기에 존재
하는 그들을 물고 늘어져 어떤 권력을 획득하려는 여성들 역시 비판하고 있다. 클린턴의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하고 탄핵 이야기까지 나왔던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외도 사건은 당시에 어린 나이였음에도 워낙 화제가 되어 기억하고 있지만, 이 책에 열거된 것은 아직 그 이전인 듯하며 빌 클린턴이 그만큼 바람둥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작가는 결혼으로 인해 여성은 모든 능력 발휘의 기회를 포기해야 하는 사회 역시 비판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성
공을 위한 길을 나서든지 아니면 남편을 도와 그의 성공을 돕든지 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지만, 남편을 돕고 가사 일을 하는 것 역시 엄청난 노동이며 따라서 여성들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장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작가는 힐러리가 영부인이 봉급을 받을 수 있는 제도를 건의하든지 의회 승인 절차를 밟아 공직을 받든지 하여 정당한 권력을 얻을 수 있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뒤에서 압력을 행사하여 욕을 먹는 것을 비판한다. 물론 이 책이 나온 1998년 이후 르윈스키 사건이 터지고 힐러리는 나름의 독립성을 찾아 2000년에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남성에게 의존적인 신분 상승과 권력 획득은 보기 좋지 않고 여성의 정당한 지위 향상에 저해되는 것이리라,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하는 것이 떳떳하고 더욱 멋있는 것이라고 나 역시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에게 너무 불리하게 되어있는 사회 구조와 뿌리 깊은 잘못된 인식들, 출산과 육아 등이 아직까지는 그녀들을 방해하고 있으며, 아직은 기득권을 쥐고 있는 남성을 이용하지 않고는 상승할 수 없는 여성들 역시 존재함을 간과해선 안 될 것 같다. 남성 중심의 제작진 속에 남성들의 관심을 끌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여자 연예인의 경우가 그 예일 듯 하다.
「제5편: 그녀를 사랑했지만 죽여야 했어」는 O.J심슨이 니콜 브라운 심슨을 살해했다는 의혹에도 불구하고 무죄로 풀려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매 맞는 여성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들이 맞고 있다면 왜 아직도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반복된 폭력으로 인한 무력감, 도망갈 수 없다는 절망감, 혹은 나아지리라는 기대 내지 더 나아질 것이 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 자기 비하의 감정이 혹은 그녀의 가족이 그녀들을 묶어 놓을 수 있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니콜은 어린 나이에 O.J와 사랑에 빠졌고 결혼하게 되었다. 그녀와 그가 사귈 때부터 O.J는 그녀의 월세를 내주고 비싼 차를 사 주었는데, 그 비싼 선물이 그녀를 얽매게 될 것임을, 그녀에 대한 폭력의 대가라는 것을 니콜의 부모는 몰랐거나, 알면서도 모르는 체 했다. 사위의 경제적 도움을 받으며 니콜의 친정은 넉넉한 삶을 살았고, 니콜은 17년 간 두드려 맞으며 살았다. 그녀가 이혼을 원했을 때 그녀의 친정 가족들은 극구 말렸고, 그럼에도 니콜은 결국 이혼했으며, O.J의 질투로 살해당했다. 니콜은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도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를 만났으며, 살해당할 것을 운명인양 담담하게 받아들인 듯 보인다. 너무 황당한 것은 그녀의 가족들은 억울하게 죽은 그녀를 위해 범인을 처벌하려하기 보다 물주인 사위를 감싸고돌았다는 것이다. 그나마 페미니즘을 위해 일한다는 니콜의 동생 데니스조차 언니가 맞고 산 사실을 부인하며, 언니를 위한 법정에도 제대로 출두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피해 여성인 자기 언니도 구제하지 못하는 여자가 누굴 위해 일한다는 건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끔찍하지만 흥미롭게 지켜본다. 아름다운 여성이 맞았다. 죽임을 당했다. 변태스러운 가학애와 피학애의 조장, 그것도 포르노가 아닌 영화나 음악 가사와 같은 대중문화에서. 폭력적이고 폭력 암시적인 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피에 열광하게 한다. 『볼링포콜럼바인』이라는 영화에서 문제를 제기했듯이 폭력과 불안을 조장하는 사회에서는 고등학생들이 총을 들고 자기 반 친구들을 갈길 위험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데이트 강간‘이라는 말이 존재하고 ‘아니라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은, 여성의 의사결정과 무관하게 자행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사랑하려 하지만 서로의 우위를 정하려는 줄다리기를 하다 무너지고 깨지기도 하고 서로를 죽이기도 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때로 어그러져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것이라고 믿게되고, 그래서 집착하게 되는 것 같다. 이것이 사랑을 파탄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상대를 죽여버리는 파국에 이르는 것이 난 참 두렵다. 서로 함께 지내면서 행복하기 위한 것이 사랑이 아니었던가?
「마치며: 내가 이것 때문에 다리털을 깎았나?」에서는 독신 여성으로 사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듯 그려낸다. 홀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곳을 다니고 느끼고, 많은 사람들을, 많은 남자들을 만나고, 부딪히고 깨지고 아파 보면서 진정한 사랑을 찾든지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찾든지 아니면 그저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든지 할 필요가 있다는 것에 공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은 성급하다. 일단 사랑에 빠지면 눈앞의 남자가 전부인
듯 싶다. 나의 어머니는 선을 본지 3주만에 결혼을 결정하셨고 결혼 일주일만에 매일매일 술에 취해 새벽에 들어오고 유리와 가제도구를 부수는 남편에게 질려버렸으며, 두 달만에 이혼을 생각했지만 이미 뱃속에 내가 생겨버려서 20년째 그 남자에게 매어 있다. 빠른 결정, 적은 경험은 이처럼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나를 비롯해 많은 여성들은 스쳐 지나가는 사랑들을 쉽게 ‘경험‘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그 상처를 너무 두려워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시행착오는 더 나은 삶을, 사랑을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성경부터 시작해서 대중문화, 예술, 정치, 그리고 가장 사적인 부분까지 얽혀있는 섹스와 사랑, 남녀간의 관계에 대해 폭격을 맞은 듯 많은 사람과 사건과 생각을 내 머리에 퍼붓는 계기가 되었다. 지나치게 몰입하고 공감하여 작가의 의견에 덜 비판적이었던 점은 반성한다. 그렇지만 이 책이 내가 여성으로서 더 나은 삶을 살고 더 나은 사랑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다. 나는 정말 자유롭고 즐거운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