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렌드 수국 - 200g, 핸드드립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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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제 오후에 이 커피가 배달되었는데, 이미 해도 저물고 두 잔의 커피를 마신 뒤라 아껴두었다.
아침에 냉동크림파이 신제품 나온 걸 에어후라이에 돌렸는데 맛있었다. 와, 막 크림 들어있어. 해동 안 해도 되고. 대기업의 기술력인가. 그 동안 쓰던 냉동생지는 녹이고 발효시키느라 오래 방치했어야 하는데 편했다. 냉동인 채로 돌려도 바삭바삭바삭한 겹겹이 막 살아나고...
갑자기 왜 파이 홍보냐...대기업 첩자 아님... 단점은 가격이 비싸다. 몇 개 안 들었다. 

블렌드 수국을 드립해서 파이와 함께 마셨다. 원두가 내가 좋아하는 과테말라와 온두라스가 섞여 있어서 기대가 되었다. 아직 자기만의 방도 조금 남았고 마트에서 사온 콜럼비아 원두도 남았는데 또 개봉해버렸다. 요즘은 몸과 마음이 바빠서 평일에는 드립 내릴 엄두를 못 낸다. 
커피 봉투 열었을 때 냄새는 내가 좋아하는 냄새인데 내릴 때는 별 향이 안 났다. 마실 때도 향이 진한 커피는 아니다.
맛은 신맛이 산뜻하고 깔끔하다. 다 마시고 나면 근데 왜 입 안이 화-한 느낌이지. 에전에도 알라딘 커피 중에 그런 거 있던 거 같다. 페퍼민트차 같이 화 한 뒷맛. 깔끔하고 나쁘지 않다. 여름에 어울려서 한 번 마셔볼 만 했다. 다음부터는 다시 싱글 원두....(아님 또 신상 블렌딩 나오면 낚여서 사겠지...)

수국은 꽃이 파래서 신기하다. 파란 꽃 하면 예전에 스머프 시리즈에서 스머페티가 파란 장미를 가지고 싶어 흰 장미에 자기 피부색을 쏟는 마법을 (가가멜한테였나) 위탁했다가 스머페티의 피부가 하얘지고 벌이 꼬여서 고생하는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흰 수국도 있지. 
수국 수국 자꾸 국수가 먹고 싶어지는 이름이다. 그런데 수국은 독이 있어서 못 먹는다고 한다. 독 있는 꽃 이름을 커피에 붙인 건 특이하다.
수국 수국 수국 누가 수근대는 거 같고 설국 짝퉁 물 속의 나라 같고 막 뒤에다 꼴통 붙여줘야 될 것 같고 수고한 사람한테 한 잔 내려줘야 할 거 같고 그런데 집에 드립커피 마시는 사람은 나 밖에 없으니 수고한/할 나놈한테나 내려 먹여야겠다. 

+조금 전에 한 잔 더 진하게 내려 마셔보고 알게된 것
-물 많이 넣고 연하게 +식으면 산미 강함
-물 조금 넣고 진하면 신맛 덜하고 카라멜?카카오?암튼 단맛이 강하게 남
취향대로 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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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쟁이 2020-06-14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국은 원래 흰색인데 땅의 질에 따라서 꽃색깔이 변한대요. 땅이 산성이면 파란색, 알칼리면 붉은색. 신기하죠. 유기농 리트머스꽃인듯.
얼마전에 읽은 나무 이름사전에서본 수국은 수구화라는 한자어에서 나온 이름인데, 수놓을 수. 공 구. 비단에 수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둥근 꽃. 뭐 이런 뜻.
그래도 국수는 먹고싶네요. ^____^

반유행열반인 2020-06-14 12:10   좋아요 0 | URL
우와아 무님 덕에 많이 배우네요. 그래서 꽃 주변에 명반 묻는다고 하는 거였군요. 수구화에 받침 ㄱ은 어디서 가져왔을까요. 제 이름 끝글자 받침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할래요. 수국 ㄱ 너 가져 난 하나 더 있어 하고ㅎㅎㅎ
 
[eBook] 온 마음을 다해 디저트 - 대단할 것 없지만, 위로가 되는 맛
김보통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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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3 김보통.

간밤 꿈에 반가운 목소리로 걸려온 전화에 나는 꿈속에서 조차 현실에서 하던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시간을 헤아리고, 현실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상대에게 일깨워주었다. 그랬던가, 하는 허탈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도 이게 꿈이구나, 했다.
마음이 쓰고 그런데 뭘 먹는다고 풀리는 사람도 아니고 책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날들이니 제목만 보고 달달한 거 골라 읽었다.
저자가 누군지도 몰랐다. 만화가인 줄도 몰랐네. 그런데 겸손한 거 치고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 썼다. 내가 못 가 본 나라에도 많이 다녀왔다. 맛있는 디저트를 찾아 먹고 만들 줄도 알고 디저트를 소재로 칼럼도 잔뜩 써서 이 책을 냈다. 그냥저냥 좋은 말들이 많았다.

아침에는 스콘을 구워 드립커피랑 먹었다. 이것도 디저트인가. 마지막 마카롱을 사러간지 20일이 넘었다. 봄에는 단 과자에 재난지원금 아동돌봄수당 전부 탕진하며 다녔는데 살만 찌고 단맛에 질려 당분간은 쳐다보기 싫다. 지난 주에는 가족의 생일이라 치즈케익을 사다 다같이 나누어 먹었다. 이번주 가족이 회사에서 받아온 벌꿀 카스테라는 애기들이 너무 좋아해서 난 딱 반 조각 밖에 먹지 못했다. 휴가 끝나고 출근하면서 크로아상 구운지도 오래다. 오랜만에 출근해서 이틀 간은 커피 한 잔 조차 타 먹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 그렇게 정신 없이 일하고, 수업을 들으러 가고, 그런 사이에 순식간에 이런저런 일이 정신도 못 차리는 틈에 일어나고
맞이한 주말은 보통 주말과 하나도 다른 게 없었다. 떡볶이를 만들어서 가족들을 먹였다. 오후에 디카페인 커피에 하겐다즈 카라멜 크륌브륄레 모찌??여하튼 비싼 아이스크림을 퐁당 빠뜨려 마셨다. 단맛이 주는 위로는 아주아주 짧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밑줄 긋기
베이글
“무기력은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상대는 웃었다. 안도의 웃음일 수도 있고, 허탈한 웃음일 수도 있다. 왠지 너무 성의 없는 것 같아 덧붙였다.

  “그럴 때마다 저는 작은 성취를 이루는 것을 반복합니다”라고 답했다. 예를 들면 베이글을 만드는 것처럼.

다시 말하지만, 무기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당연히 한 방에 이 괴로운 감정을 잊게 해줄 해결책도 쉽게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당장의 무기력이 너무나 크게 느껴지는 탓에 반전을 바라며 더 크고 강한 성취를 원한다. 하지만 큰 성취는 그만큼 성공 확률이 낮아 많은 경우 더 크고 강한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결국엔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무기력에 빠져 자신을 스스로 ‘뭣도 못하는 인간’으로 여기는 지경이 되는 것이겠지.
   
  그러니 베이글을 만들어 보시길. 삐뚤빼뚤 꽃을 그려보고, 턱없이 짧은 목도리를 짜보시길. 놀이터 철봉에 매달리고, 색종이로 거북이를 접어 보시길. 작은 성공의 연속에서 성장을 확신하시길. 사소한 실패를 겪으며 좌절에 둔감해지시길. 별것 없는 성취를 반복하며 승리를 체험하시길. 그런 나날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무기력을 등에 지고 살아갈 수 있는 어떤 신념이 생길지 모르니.

티라미수
티라미수는 이탈리아어로 ‘나를 끌어올린다’는 말로, 의역하자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뜻이다. 그때는 어원 같은 것은 몰랐으나, 그때의 티라미수는 여러 의미로 나를 구원해주었다. 솔직히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첫 미사보다도 더 감동적인 맛이었다.

아마레티
“하지만 우리가 망하는 건, 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지 우리 탓이 아니에요. 미디어에는 성공한 사람들이 나와 싱글싱글 웃으며 노력해서 성공했다 말하지만 마이크를 쥐여줘야 하는 건, 망한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이에요. 정말 망한 건, 평범한 노력으로는 살기 힘든 우리 사회예요.”

“여러분. 우리 아무렇게나 살아, 아무거나 됩시다. 

바클라바
번잡스러운 인파 사이로 커플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상하지. 막상 나는 성희롱 당하고, 설거지하고, 빈 병이나 팔면서 여행했지만 다른 여행자들을 만날 때면 좋은 기억만 가졌으면 했다. 슬픈 일 없이, 아프지 않고 돌아가길 바랐다.

도넛
중요한 건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거나, 선택한 것의 결과를 미리 짐작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는 도넛을 고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저마다 다른 맛의 도넛일 뿐, 어떤 맛이 더 우월한가를 따지는 것은 쓸데없다.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섭취한 칼로리만큼 살아내면 된다. 다소 고통스럽겠지만 도넛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당근케이크
케이크에 당근을 넣다니. 누가 그런 악의적 발상을 한 것일까. 아마 처음으로 해삼을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사람과 동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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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쟁이 2020-06-14 1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익힌 당근 골라내는 사람인데. 당근케잌에 들어간 당근은 조아해요. 해삼을 좋아해서 그론가..

반유행열반인 2020-06-14 12:19   좋아요 0 | URL
저도 당근케익 좋아요 ㅎㅎㅎ해삼은 그냥저냥...익힌 당근 골라내신다니 왜 귀여워요 ㅋㅋㅋ
 
식물학자의 식탁 - 식물학자가 맛있게 볶아낸 식물 이야기
스쥔 지음, 류춘톈 그림, 박소정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20200607 스쥔(史军).

식물책, 나무책을 좋아해서 괜찮아보이면 마구 빌리는데 식탁, 들어가니 조금 망설여졌다. 지난해 읽은 식용식물 몇 가지 다룬 책이 내실이 없었어서...그래도 이번엔 중국 저자야! 식물학자래! 두께가 조금 있었는데 잘 썼고 재미있었다. 이번 식물책 겸 먹보책은 성공이야.

여유적적하고 식물에 대해 잘 알고 먹는 데도 일가견이 있어 나이 지긋한 으르신 생각했는데 읽다보니 80년대생이라고 했다!! 내 또래라니. 검색해서 저자 웨이보에 갔는데 음. 공부 잘 하게 생긴 학자의 SNS에는 예쁜 꽃 사진이 가득했다. 중국어는 하나도 모르지만 식물 사진만 봐도 힐링되는 기분. https://www.weibo.com/sjorchid 음 오늘은 수박이랑 망고 사진이 올라왔다. ㅋㅋㅋ

중국땅이 워낙 넓고 기후대도 다양하다보니 우리가 접하지 못한 채소 과일류도 있고 또 제법 근접한 지역이다보니 우리랑 겹치는 식재료도 많다. 식물의 이름을 우리가 친숙한 말 대신 중국어식 표기를 그대로 둔 게 많았다. 예를 들면 키위를 미후도, 토란을 우두, 캐슈넛을 요과, 꿋꿋하게 이렇게 적어놨다. 그래서 읽다보면 생소하고 헷갈리기도 한데, 잠깐씩 한국에서 부르는 이름이랑 컬러 도감을 같이 첨부해놔서 읽는데 크게 무리는 없었다.
저자가 글솜씨도 좋고 개그 코드가 나랑 맞아서 읽다보면 피식하는 부분이 많았다. 여러 성분과 특징, 몸에 기능하거나 맛을 느끼는 과학적 원리, 식물 내 포함된 인체에 위험한 성분 같은 걸 소개하는데 친절하고 자세해서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이런 거 보면 분명 과학책인데, 막 자기가 먹부림 부리다 망한 얘기나 실망한 얘기, 식물이나 풍광과 분위기에 젖어 적어 놓은 부분은 되게 감성터진다. 문돌이 뺨싸대기치는 이과생들이 너무 많아...문돌이도 좀 먹고 살게 살살해 줘…

중국도 우리처럼 뭐 먹으면 몸에 좋대! 하고 열풍 부는 경우가 많은가 보다. 엄마가 호두 주면서 이거 많이 먹어, 머리 좋아진대! 하는 건 중국도 똑같아서 웃겼다. 그런데 그런 소문-몸에 좋다 혹은 해롭다-에 대해 저자는 항상 근거 없어, 맹신하지 마, 너무 많이 처 먹으니 문제지. 적당히 조금씩 즐겁게 먹으면 괜찮아. 하고 땡 친다. 이건 한국의 최낙언 선생이랑 완전 똑같았다. 그래서 더욱 친숙했다.

책읽다가 충격받은 사실-키위(중국 이름 미후도)는 원산지가 중국(야생)이고 현재 중국이 생산량 1위 국가다. 레드키위도 중국 야생에서 건져낸 종이다. 백년 전 쯤 중국 놀러간 교사가 키위 씨앗 중국에서 뉴질랜드로 가져가서 뉴질랜드 사람들이 열심히 키워서 1960?70년도 쯤 자기들 국조의 키위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한다.
그랬어?!!! 냉장고의 골드키위야 말을 해 보렴. 너네 조상이 중국이란다. 어쩐지 우리 조상도 고려시대에 중국에서 도망왔다는데 그래서 내가 키위가 좋았던 것이냐. (정작 옛날 중국인들은 미후도 안 먹고 관상수로 씀)



-밑줄긋기
피스타치오처럼 딱딱한 흰 껍질을 깨물어 알맹이 부분의 얇디얇은 ‘땅콩껍질’을 문질러 깨끗하게 벗겨내면 라임빛 은행을 즐길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맛이 은행의 훌륭한 명성에는 못 미친다고 생각한다. 바삭하지도 않고 맛이 시원하거나 좋지도 않았다. 쫀득함과 딱딱함의 중간 정도 식감으로 마치 하루 정도 지난 찹쌀 경단 같았다. 물론 맛은 경단처럼 단순하지 않고 살짝 쓴 맛이 느껴졌다. 

부티르산butyric acid, 카프로산caproic acid, 메틸 N-뷰티레이트methyl butyrate, 메틸 헥산오에이트methyl hexanoate 등이 혼합된 이 냄새는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다. 바나나를 장거리 운송할 때 나는 희한한 악취와 상당히 비슷한데, 이는 지방산이 분해되면서 생기는 유기산의 고린내다.

  우리한테는 기분 나쁜 냄새지만 붉은가슴다람쥐Rubrisciurus rubriventer, 캐롤라이나 회색다람쥐Sciurus carolinensis, 흰코사향고양이Paguma larvata 등에게는 식사를 알리는 신호인 모양이다. 은행 종자 안에는 전분, 단백질, 지방이 다량 함유되어 있는데, 100그램당 전분 68그램, 단백질 13그램, 지방 3그램이 들어 있다. 영양가가 이리도 풍부한데 어찌 동물들에게 외면당할 수 있겠는가.

은행에 들어 있는 시안화수소산hydrocyanic acid 함량은 100그램당 무려 830마이크로그램에 달한다. 게다가 깅골산 등 화학물질은 은행을 상대하기 힘든 종자로 만들었다. 백과의 고장으로 유명한 저장성浙江省 창싱현長興縣 인민병원 기록에 따르면, 은행에 중독된 사례가 허다하다. 1세 미만의 영아는 은행 10알을 먹으면 치명적일 수 있고, 3~7세 아동은 30~40알을 먹으면 중독 증상이 나타날 수 있으며, 심각한 경우 사망에 이를 수 있다. 따라서 은행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부드럽지 않고 오히려 살기殺氣를 숨기고 있다.

인체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 모든 세포가 정상적으로 호흡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화학 물질 사이에 전자를 전달하는 게 호흡 작용의 본질인데, 시안화물이 이런 전자 이동을 가로막는 데 선수다. 시안화물이 세포에 침입하면 전자 전달계를 마비시키는데, 이는 세포의 에너지 공장 스위치를 내린 거나 마찬가지다. 그 결과 세포의 생명 활동이 갑자기 멈춰버려 몸 전체가 붕괴된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각종 야생 식물의 신기한 건강 및 치료 효과에 대해서는 흘려 듣기 바란다. 야생 식물을 먹고 병을 치료한 사례가 없는 건 둘째 치고, 야생 식물에 함유된 약용 성분이라도, 반드시 정제해 의사의 지도 하에 사용해야 안전하게 효과를 볼 수 있다. 유효한 식물 화학물질이라고 해도 정상세포를 죽일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콜히친이 정상세포를 많이 죽이는 것처럼 말이다. 약을 건강보조식품처럼 먹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아름다움이란 어쩌면 위험과 동일선상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유독성 식물들이 춥고 배고플 때 인류의 식단에 들어왔지만, 생사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는 목숨을 보전하는 게 최상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먹을거리가 풍부할 때는 굳이 그런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독이 있는 음식에 도전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간파균에서 나는 진한 견과류 향은 이웃들을 자주 끌어들이는데, 식감이 쫄깃해서 잘못하면 혀를 씹을 위험이 있다.
ㅋㅋㅋㅋ

익숙하지 않거나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버섯은 안 먹는 게 상책이다.

  버섯을 먹고 안 먹고는 순전히 좋아하는 마음에 달려 있다.

어느 한 음식을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건 결코 이성적인 방법이 아니다. 이는 어떤 음식이 만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상대적으로 음식의 다양성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쉽게 할 수 있고 위험성을 낮출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는 생활하면서 늘 여러 가지 선택에 직면한다. 우리는 그 선택 덕분에 쾌감을 누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로 인한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먹고 안 먹고는 균형에 관한 문제다. 음식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자기 손에 있는 선택권을 잘 선용하며, 쉽게 믿거나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아야 먹는 일이 즐거워질 것이다.

생칠이 최종적으로 형성하는 칠막漆膜은 바로 이 페놀들이 결합해서 생긴 결과다. 이 과정은 오늘날 플라스틱을 생산하는 과정과 거의 똑같다. 단, 플라스틱 생산에는 촉매제가 들어가야 하지만, 생칠은 자체적으로 라카아제laccase라는 촉매제를 가지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망고도 옻나무과 식물이라는 걸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망고에도 우루시올이 미량 들어 있기 때문에 알레르기를 일으켜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열대과일의 왕인 망고를 좋아해도 민감한 체질인 사람들은 망고를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내 주위에 한 친구는 망고를 볼 때마다 흥분해서 막 먹는데, 매번 입과 볼이 퉁퉁 붓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곤 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망고를 먹기 위해서라면 그런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다행히 옻나무에 피부가 직접 닿는 것만큼 망고 알레르기 증상이 심각하지는 않다.

  이 밖에도 고급 견과인 캐슈Anacardium occidentale도 옻나무과 일원이다. 우리가 이 견과를 먹을 때에는 독이 든 껍질이 벗겨져 있는 상태라 다행이지만, 캐슈의 속살에는 여전히 세 가지 단백질(Anao 1, 2, 3)을 포함한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들어 있다. 따라서 캐슈는 알레르기 환자들에게 여전히 악몽이었다. 그런데 반갑게도 과학자들이 캐슈 알레르기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내었다. 아황산나트륨으로 캐슈를 처리하면 알레르겐을 상당부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캐슈의 맛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파인애플은 알레르기를 일으키기 쉬운 과일이다. 파인애플에 들어 있는 브로멜라인bromelain 때문이다. 파인애플을 먹기 전에 소금물에 담가두었다가 먹으면 이 위험을 없앨 수 있다. 

질산염이나 암모늄 자체에는 독성이 전혀 없다. 따라서 질산염과 접촉해서 중독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질산염의 동생인 아질산염은 다루기 쉬운 대상이 아니다. 아질산염은 헤모글로빈을 강점해 산소 부족으로 사람을 죽게 만든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아질산염이 아민amine 물질과 결합해 발암물질인 니트로사민nitrosamine을 생성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질산염이 인체 내에서 아질산염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먹은 질산염은 소화기관을 통해 혈액으로 들어가는데, 이 질산염들은 침샘으로 보내진다. 타액이 분비되면서 질산염은 또 구강으로 들어간다. 구강에 있는 수많은 세균들은 질산염을 아질산염으로 환원시킨다. 알고 보면 문제는 인체가 자초했던 것이다! 대다수 질산염은 소화기관으로 들어가 새롭게 순환을 시작하는데, 일부는 체외로 배출된다. 이때 본분을 지키지 않는 아질산염은 소란을 피울 궁리를 한다. 만약 위장의 산성酸性에 문제가 생기면 아질산염은 아민과 쉽게 결합해 강력한 발암물질로 변신한다. 질산염과 아질산염의 가장 두렵고 무서운 점이 바로 이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미량의 아질산염은 구강 미생물 환경을 유지하는 필수 조건이다. 아질산염이 있기 때문에 유해한 혐기성 세균이 말썽을 일으키지 못한다. 또, 많은 아질산염은 일산화질소로 환원된다. 이 물질은 인체가 정상 혈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상에 있는 물종은 본래 인류를 위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자연과 평화롭게 공존하고, 모든 물자가 제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게 만드는 방법이야말로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1904년 어느 뉴질랜드 교사가 후베이湖北성의 한 교회에서 선교 중인 여동생을 만나러 중국에 왔다. 그런데 이 교사의 이름이 미후도의 운명과 단단히 묶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녀의 이름은 바로 이사벨Mary Isabel Fraser이었다. 그해 이사벨은 델리시오사의 종자 한 봉지를 뉴질랜드로 가져갔다. 그녀가 가져간 종자는 미후도 세 그루로 자라 순조롭게 개화하고 열매를 맺었다. 이 세 그루가 현대의 미후도 산업을 일으킬 줄이야! 현재 전 세계 키위 공급량의 80%를 차지하는 품종인 헤이워드Hayward가 바로 이 델리시오사 세 그루의 후손이다.

황금색 과육의 미후도는 인류의 심미적 본능에 확실히 더 부합했다. ‘햇살을 담은 과육’이라는 광고 문구도 대중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이것이 델리시오사의 신품종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미후도, 즉 키넨시스chinensis라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현재 시장에서 볼 수 있는 골드키위는 품종이 두 가지다. 하나는 중국에서 육종한 금도金桃이고, 다른 하나는 뉴질랜드에서 재배한 제스프리골드Hort16A다. 전자는 중국과학원 우한武漢식물원이 장시성江西省 우닝현武寧縣에서 발견한 키넨시스 야생 우수 식주를 발전시킨 것이고, 후자는 뉴질랜드가 중국에서 인종한 키넨시스의 잡종후대filial generation다. 제스프리골드가 일본에서 성공적으로 판매된 1998년부터 계산하면, 골드키위는 불과 십여 년 만에 시장점유율 20%를 차지했는데, 이는 과일색에 대한 인류의 선호도가 여실히 드러난 결과다. 고무적인 것은 노란색 과육인 키넨시스 경쟁이 더 이상 뉴질랜드 혼자만의 게임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후도의 원산지인 중국도 마침내 치열한 세계 시장 경쟁에서 저력을 갖추게 되었다.

  금빛 과육을 자랑하는 품종 말고도 붉은색 과육을 가진 키넨시스 역시 최근 시장의 다크호스로 등극했다. 홍양紅陽과 초홍楚紅 두 가지가 대표적인 품종인데, 안토시아니딘이 풍부해서 과심果心 부위에 가까운 과육이 화려한 붉은색을 띤다. 처음 레드키위를 먹었을 때 나는 외국에서 수입한 고급 과일을 먹었구나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레드키위 품종이 전부 중국에서 나고 자란 토종이라는 걸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양배추 군단이 중국에 전해진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양배추 방면군의 세력은 이미 막강하다. 꽃양배추, 브로콜리, 로마네스코 브로콜리, 콜라비 등은 모두 양배추의 다양한 변종에 불과하며 우리가 먹는 부위와 형태만 다를 뿐이다.

사온 브로콜리를 금방 다 먹지 않으면 윗부분의 초록색 꽃봉오리가 작은 노란색 꽃으로 변하는데, 유채꽃과 상당히 흡사하게 생겼다. 양배추가 유채꽃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TRPM8 수용체에는 그것의 신분을 나타내는 ‘CMR1cold and menthol receptor 1’이란 별칭도 있다. 이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CMR1의 주된 기능은 차가운 온도 자극과 멘톨의 자극을 받아들여 유기체에 차가운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고추가 우리에게 아릿한 느낌을 주는 것도 고추가 온도를 높여서가 아니라, 고추에 들어 있는 캡사이신이 상응하는 신경수용체를 자극해서 뜨거운 물에 데인 듯한 느낌을 받게 만드는 것이다.

힘든 환경에서 자란 식물들이 광고에서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대상이 되었다. 보통 이런 구실을 댄다. “생각해 봐. 그렇게 힘든 환경에서 살아남았으니 그만큼 특별한 능력이 있지 않겠어? 먹으면 당연히 몸에 좋지 않겠냐고.” 하지만 실제로 그런 능력은 없다. (단호)

현대인의 문제는 너무 적게 먹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이 먹는 데 있다. 우리는 어떤 신기한 음식을 통해서 과식으로 인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를 바 없다. 빙초든 일중화든 우리 음식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이지 절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음식을 다양하게 먹는 것만이 영양 공급과 신체 건강을 보장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조금씩 골고루 먹으렴)

맛있는 향신료의 이름들을 들으니 순간 달도 커다란 화이트 초콜릿처럼 느껴진다. 말하는 바에 의하면, 매년 중추절中秋節을 보내고 나면 월계수 잎 하나가 지구에 떨어지는데, 마노瑪瑙 같은 그 잎의 가치가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다만 그걸 주운 사람이 아직까지 한 명도 없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누군가가 그 잎을 주웠다면, 그 잎은 고기 삶을 때 들어갈까 아니면 디저트 안에 들어갈까?

고기를 삶을 때 솥 하나에 월계수 잎 하나만 넣어도 충분하다. 너무 욕심을 부렸다가는 고깃국이 월계수국이 되고 만다. 내가 직접 겪어봐서 잘 안다.
ㅋㅋㅋㅋ

충채冲菜, 개채芥菜 종자(겨자씨), 산규山葵, 랄근辣根 등에서 알싸한 맛이 나는 건 이소티오시아네이트isothiocyanate라는 화학 물질 때문이다. 이 물질에는 특수한 개말芥末 향이 있다. 거의 모든 십자화과 식물에는 이 물질이 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배추, 무, 양배추, 브로콜리에도 이런 매운 맛이 있다. 이 특수한 향은 사실 해충에 대항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냄새를 견디면서까지 범죄를 저지르려는 곤충들은 거의 없지만, 이런 위협쯤은 아랑곳하지 않는 특이한 동물들도 물론 있긴 있다. 심지어 이런 자극적인 맛에 빠지기도 하는데, 인류도 마찬가지다.

  재미있는 점은 우리가 잘게 자르지만 않으면 이 채소들은 자극적인 향을 풍기지 않고 온순하다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이 화학 무기들이 글리코시놀레이트glucosinolates의 형식으로 존재한다. 동물들에게 공격을 당할 때에만 이에 상응하는 효소가 작용하는데, 이때 글리코시놀레이트가 분해되어 이소티오시아네이트를 방출하면서 코를 찌르는 물질로 변신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식물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내게 식물 사진을 보내서 대마가 맞는지 물어보는 네티즌들이 가끔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사진 속 주인공은 피마자蓖麻子나 추규 같은 식물들이었다. 나는 질문자가 건넨 감사 인사에 뭔가 불만이 가득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말에는 “어째서 나는 대마를 만나지 못하는 거야!”라는 속뜻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야이 예비 대마사범들...근데 왜 나도 어째서 나는! 하냐...

요과는 껍질이 없는 단순한 견과가 아니다. 따라서 다음에 요과를 먹을 때는 독이 있는 단단한 껍질, 그걸 벗겨내기 위해 애쓰던 노동자, 그리고 요과를 받치고 있는 ‘대형 사과’를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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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06-07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겠는데요?? 식물책은 재밌거나 재미없거나 둘 중 하나인데

반유행열반인 2020-06-08 03:08   좋아요 0 | URL
재미도 있고 유익했어요. 저 아저씨 웨이보에 (한자 잘 모르지만 제가 읽기로) 식물인스쥔. 하고 적혀있는데 식물인간 말장난 한 듯 싶어 웃기다가 저렇게 이름 앞에 뭘 붙일만큼 한 부분에 정통한 게 나도 있나 싶어 곰곰 생각해봤지만...그냥 반유행열반인 말고는 이룬 것도 내밀 것도 없네요. ㅎㅎㅎ syo님은 독서인syo 붙여도 안 부끄러울 듯 ㅎㅎㅎ
 
자아 연출의 사회학 -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연기하는가
어빙 고프먼 지음, 진수미 옮김 / 현암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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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6 어빙 고프먼.

6년 전에 같은 저자 같은 역자의 ‘상호작용의례’를 읽었다. https://m.blog.naver.com/natf/221297909803
내용과 용어가 생소하고 어려운데도 사람끼리 대면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방식이 흥미로워서 열심히 정리하면서 읽었다.
‘자아 연출의 사회학’은 어빙 고프먼의 첫 저작이고, 상호작용의례는 이 책보다 8년 후에 나왔다. 사회학, 사회문화 공부할 때 미시사회학, 상징적 상호작용론이라고 언급되는 짤막한 부분이 바로 어빙 고프먼과 랜들 콜린스 같은 학자들의 연구와 이론에서 나온 것이다. 같은 역자가 번역한 랜들 콜린스의 ‘상식을 넘어선 사회학’도 쟁여놨는데 곧 (아마도 몇 년 안에…) 봐야겠다. ’사회적 삶의 에너지’도 궁금한데 비싸서 아직 안 사고 망설이고 있다…

책의 차례는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1. 공연
2. 팀
3. 영역과 영역 행동
4. 모순적 역할
5. 배역에서 벗어난 의사소통
6. 인상 관리의 기술
7. 결론

아 써 놓고 보니 왜 읽은게 하나도 기억 안 나...옮긴이의 말에 역자 선생님이 한 쪽으로 친절하게 요약해 놓으셨다. 그걸 그대로 옮겨 보자...ㅋㅋㅋ

“우리의 삶은 수많은 일상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되고, 상호작용은 어떤 종류든 남들 앞에서 개인이 자아를 연출하는 ‘인상 관리’공연의 성격이 있다. 공연(상호작용)은 여러 사람이 팀으로서 협력해야 가능한 협동 작업으로서, 유대 형성의 기제로 작용한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 공간에는 공연이 이루어지는 무대 위와 공연을 준비하고 공연을 마친 후 긴장을 푸는 무대 뒤가 있다. 무대 위와 무대 뒤는 물리적으로 분리되는 경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분리된 그 두 영역에서는 사람들의 겉모습, 몸가짐, 행동 방식도 상반되게 나타난다. 또한, 공연에는 공연자와 관객뿐만 아니라 공연을 돕거나 공연자들의 관계를 복잡하게 만드는 다양한 형태의 모순적 역할도 있다. 무대 위라고 해서 반드시 공연자들이 맡은 배역만 연기하지는 않는다. 배역에서 벗어난 은밀한 의사소통이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배역에서 벗어난 은밀한 의사소통도 공식 의사소통에 못지않게 공연자들의 유대를 강화하는 기능을 하며, 때로는 공연자와 관객, 공연 팀들의 지위 차이와 경계선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공연에 갖가지 장애가 생겨 인상 관리에 차질이 생기면, 사람들은 보통 공연을 중단하기보다는 수습하는 경향이 있다. 공연자가 방어 기법을 동원하거나 관객이 공연자를 보호하거나 관객이 공연자를 돕는 요령을 발휘하도록 공연자가 관객을 유도하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아를 획득하고 유지하며(일관되고 변함없는 자아가 아니라 복수의 상황적 자아), 사회는 더러 대립하고 분열하는 때가 있어도 대체로는 서로 협력하는 개인들의 유대로 형성되고 유지된다.”

...천잰데? 역시 전공자 교수님 클라스. 맞아맞아 내가 읽은 게 이런 내용이었어ㅋㅋㅋㅋ
공연으로 번역해 놓았지만 퍼포먼스, 라는 용어를 생각하면 오히려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어빙 고프먼은 연극적 관점, 이라고, 사회생활의 장을 연극에 비유해 개개인 또는 팀의 상호작용을 연출과 연기를 통해 사람들이 합의한 상황 정의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과정으로 설명했다. 이 얼마나 신통하고 재미난 표현인지. 살아오고 겪어온 상황들을 이 관점에 대입해보면 신기하게 들어맞고 해석하기 쉬워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모든 사회 관계와 상황을 다 포용할 수 있는 틀은 아니라고 저자도 말하긴 한다.
이런 비판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저자의 관점대로라면 사람들은 사회와 관계와 상황 정의를 유지하고 문제가 생겨도 그것을 수습하는 쪽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는 듯 그려지는데, 이런 관점은 극적인 변화나 극단적인 갈등, 혁명, 전쟁, 폭력 같은 상호작용에 대해서는 설명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그런건 기능론 갈등론 구조주의 같은 데서 열심히 하고 있으니 뭐… 그러니까 되게 잔잔하고 평온한 일상생활과 자잘하고 사소하면서 극복 가능한 문제 정도까지만 설명 가능...
또한 뭔가 문제 상황이 생기는 것은 각각의 역할을 맡은 공연자가 제대로 퍼포먼스 수행을 못하거나, 수행을 못할 만한 상황이 닥치거나 했을 때인데 이 말대로라면 지나치게 사회문제에 대해 개인에게 많은 책임을 돌리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어쨌거나 자아라는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고, ‘자아정체성’하고 땅땅 못 박아 놓을만한 것도 아니고, 유동적이고 공연 무대에 따라 달라지고 같이 공연하는 사람들, 어느 팀에 서느냐, 공연자냐 관객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 점은 흥미로웠다. 이를 테면 교사는 정말 잘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서 교사로 인정 받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교사라고 여길 만한 퍼포먼스를 잘 수행하고 주변에서도 그 퍼포먼스가 잘 시연되도록 받쳐주고 맞장구쳐주고 퍼포먼스가 위협받을 때 거들어주고 해서 교사 노릇을 계속하게 된다는 것이지...ㅋㅋ 어떤 속성이 주체에 딱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상황과 상호작용 중에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통찰은 끄덕끄덕 하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나이기 위해서는 고립되고 은둔해서는 안 된다는 거...수많은 관계 안에서 나름대로 요구받는 것이든 내가 보여지고 싶은 모습이든 열심히 보여주려고 분투해야 그런 내가 있을 수 있다는 거...오독 오해 오역한 건지 몰라도 그렇게 알아 들었다.

1월 30일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 세 권 드디어 다 봄 ㅋㅋㅋ그런데 도서관 언제 여냐 열어야 반납하지...회원증 만들고 겨우 두 번 대출함...코로나야 얼른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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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0-06-16 0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얼마전에 어빙고프먼 짧게 언급하는 책 읽었었는 데. 역시 흥미롭다..*

반유행열반인 2020-06-17 19:00   좋아요 0 | URL
역시 사회학책 하면 쟝쟝님 ㅎㅎㅎ
 
맨 얼라이브 - 남자를 살아내다
토머스 페이지 맥비 지음, 김승욱 옮김 / 북트리거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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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5 토마스 페이지 맥비.

사람, 인류를 가리키는 man, human, mankind 같은 말을 대체할 말이 있나 궁금하다. 문득 경애의 마음(맞나)에서 피조, 하고 부르던 말도 떠오른다. Creature. 그런데 피조물, 하고 옮겨두면 또 너무 수동적인 느낌이 든다. 우리는 누군가 만들어내고 영향 받아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스스로 만들어가는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런데도 자조, 주체, 하고 사람을 부르면 또 사람이 아닌 기분이라. 에라 모르겠다. 성중립적인 말들 또는 중심을 여성으로 전환하는 신조어들을 접하지만 늘 수긍이 가는 건 아니다.
성 정체성은 그렇게나 나를 살아가는데, 세상을 바라보는 데 큰 힘을 행사한다. 지정된 성별과 스스로 느끼는, 원하는, 파악하는 성별이 다를 때 그 사람의 삶은 쉽지 않다. 사는 거 자체가 쉽지 않은데 스스로를 인정하고 선택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주변을 설득하거나 설득할 필요가 없다고 다짐하고 편견과 폭력에 맞서고 지워지는 것을 견디며 숨어 살거나 지워지는 것을 거부하거나 하게 된다. 뭔가를 끊임 없이 선택하게 만드는 세상과 싸워야 한다.
트랜스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 다큐멘터리, 기획 기사 같은 데서 많이 접했다. 트랜스남성에 대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적게 드러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로 했다.

토마스가 남자로 살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표현은 내내 문학적이고, 주변, 신체상태, 내면 묘사가 치밀하고 섬세한 에세이였다. 인스타그램으로 저자의 페이지를 찾아보았다. 아내와 함께 있는 그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그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다니고 어릴 적 성학대를 가한 아버지를 직면하고 엄마에게 진짜 아버지를 묻고 강도에게 총살 당할 뻔 하다가 자신이 여자(로 태어났고 아직도 그렇게 보인다)라는 이유로 겨우 살아남는 동안 파커라는 연인, 배우자가 함께한다. 그런데 책 표지 날개에는 제시카 블룸과 살고 있다고 써 있었다. 같은 사람인가? 책의 가장 가까운 시점이 십 년 전이니 사랑은 흐르고 변하고 달라질 수 있는 거지. 그런데도 괜히 슬펐다. 책에서 파커가 남성호르몬을 맞으며 변화하는 토마스를 보고 동요하는 장면이 계속 나와서 더 그랬다.

괴물 같은 아버지처럼 살지 않기, 남을 해치지 않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기,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토마스는 그렇게 살기 위해 애썼다. 가슴을 제거하고, 역기를 들고 윗몸일으키기를 하며 근육을 키우고, 남성호르몬을 맞고, 책에 쓰인 시점부터 몇 년 뒤에는 아마추어 복서가 된다. 그렇게 폭력적이거나 타인에게 위협을 가하는 존재가 아닌, 남성성을 스스로 만들어간다.
이름을 고르고, 신체적 성별을 고쳐가고, 부모를 직면하며 받아들일 사실과 그러지 않을 것을 골라내고, 그렇게 자신을 자신이 원하는 존재로 만들어나가는 토마스의 모습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토마스가 10년 넘게 아버지를 안 본 것처럼 나도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지 13년이 되었다. 자라면서 20년 동안 아버지에게 맞은 적은 없었다. 20살에 술주정하며 엄마를 때리는 아빠를 노려봤다고 얼굴을 맞은 게 처음이었다. 그러고 4년 뒤 또 엄마를 때리려는 아빠를 먼저 때렸다가 얻어 맞은 날이 마지막이었다. 그날로 엄마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 원하지 않는데 술취한 아빠에게 입맞춤을 강요당한 적이 한 번 있었지만, 성 학대라 할 만한 일을 당한 기억도 없다.그렇지만 아빠는 손가락으로 동생의 엉덩이나 성기를 찌르는 짓을 장난이랍시고 수차례 저질렀다.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도망다니는 모습을 나는 그저 옆에서 지켜보았다. 공부 안 하고 책상 안 치운다는 이유로 훈육이랍시고 술 취한 채 동생을 밤늦도록 무릎 꿇려 놓고 잔소리하는 모습 또한 보아야 했다. 무서워서 숨죽이고 공부하는 척하며 외면했다. 비겁하게도 내가 직접 타겟이 안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을 것이다. 조금 크고 난 뒤에야 엄마에게 주정을 하거나 동생을 괴롭히면 그만 좀 하라고 화를 낼 수 있었다. 그제서야 삼가는 척 하는 아빠였지만 술에 취하면 내가 반항했던 걸 분해하며 ‘네가 00대 나왔으면 다냐’하고 맥락 없이 화내곤 했다. 동생은 지금도 제대로 말리지 못한 엄마와 나를 향해 원망이 많다. 가장 상처 입었고 편히 살지 못한다. 가족들과 사이도 무척 나쁘다.

토마스가 아빠 로이를 만나러 가서 그와 찻집에서 이야기 나누는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 토마스는 아빠의 장례식에 갈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빠를 다시 볼 생각도 없고 아빠가 죽어도 장례식에 상주가 될 생각도 찾아갈 생각도 없다. 이게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토마스처럼 뭔가 맺힌 걸 풀 기회도 함께 포기한 것을 안다. 사실 실질적인 위협도 있다. 이혼한 부인을 끝내 쫓아와 죽인 남자의 뉴스를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눈에 띄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지르던 게 엄마가 법정에서 아빠를 대할 때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게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몇 년 전까지 끈질기게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아직도 우리의 거처를 수소문하고 다닌다는 소식에 꿈자리가 사납다.
개같은 아버지가 세상에 너무도 많지만, 그런 사람이 되지 않고 잘 자라는 아이들도 많다. 나는 아직 모르겠다. 스스로를 미워하고 내가 나쁘다고 여기면서도 그 이유를 찾지 못했었다. 그런데 결국은 그렇게 여길만한 이유를 만들고 다닌다. 나는 이제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솔직하고 거짓말을 못하는 게 내 장점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는 이제 그런 사람이 못된다. 확실히 좋은 사람이 되긴 틀렸고 더 나쁜 사람, 누군가를 해치고 다치게 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만 바라는데 자신이 없다. 올바르게 살겠다는 다짐은 커녕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 자체를 포기한 것 같다.
뜬금없이 씩씩한 생존자를 보면서 괜히 자괴감 느낀 날이다. 오래 아파서 그런 것 같다. 이제 거의 다 나았고 긴 병가도 오늘로 마지막. 열심히 일하고 남에게 조금이라도 도움될 만한 일을 해야겠다. 그러면 나아질지도 몰라. 나쁜 놈이 될 가능성이 조금은 줄어들 지도.

미국, 유럽 발매판은 우리나라 책 표지랑 다르다. 하나는 토막난 검은 남자의 신체, 또 하나는 종이인형 같은 사람 형상. 토마스는 열심히 그 토막들을 바로 맞추고 종이장 같이 날리는 존재를 탄탄히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적어도 이 책 안에서는 그랬다. 나도 그렇게 지금보다는 강해지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약한 몸과 약한 마음이 악한 존재가 되기란 순식간이지 싶다. 누구도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없다. 잘못된 마음가짐과 잘못된 선택 같은 게 차곡차곡 쌓이다 어느 순간 훅.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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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쟁이 2020-06-07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구.. 병가중이셨군요.
아프지마세요.. ㅠㅠ

반유행열반인 2020-06-07 11:3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오래 갔는데 이제 거의 다 나아서 다음주 출근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