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이별의 푸가 - 철학자 김진영의 이별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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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8 김진영.

장기하와 얼굴들-가장 아름다운 노래
https://youtu.be/1zlNEGGnXSE
“밝게 빛나는 너처럼 예쁜 내 노래는
주인을 잃고 파란 하늘에 흩어지네
나의 노래가 별이 되어 뜬 밤하늘 아래
너의 마음은 그를 향해서 밝게 빛나네”

술을 거의 먹지 않던 집인데, 몇 주 전부터 곁의 사람이 맥주를 사온다. 주말마다 술을 마셨다. 경복궁, 파울라너, 서머스비, 백록담, 광화문, 에델바이스, 남산, 이름 예쁜 것들이 꽃냄새와 과일냄새를 풍기며 뱃속을 채웠다. 화장실에 들어가면 거울에 비친 새빨개진 얼굴을 보고 몰래 조금 울었다. 샤워로 울음을 지우고 쿨쿨 잤다.
나는 유디트가 되어보려고 짧은 이별을 위한 긴 편지를 쓰고, 총도 쏘고, 소매치기를 시켜 린치도 하고, 모가지도 베어보지만 잘 안 되었다. 그래서 진부한 키워드를 검색해 진부해보이는 책들 사이에서 들어본 것 같은 제목의 책을 골라 읽었다. 들어본 것 같은 책은 언제나 늦게 좇아 읽은 걸 늦게 안다. 밑줄을 하나도 치지 않고 그냥 눈을 글자에 문질렀다. 진부한 이야기의 좋은 점은 내가 겪는 일이 하나도 특별하지 않고 보편적인 일이고 감정이라고, 그러니 오래 빠져 있을 필요도 없고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이유도 없다고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남의 슬픔을 보면 또 왜 닭살이 돋는 또라이라 저렇게 궁상 떨고 있으면 남보기에 나도 참 싫겠구나 하면서 감추고 참고 숨기고 시간이나 얼른 가라고 아무거나 주워읽는다.
밀란쿤데라 영감님 책 다시 읽기를 작년 말쯤 시작했는데, 겨우 두세 권 책을 읽을 시간만 있었고, 아직도 다시 읽고 싶은 책은 잔뜩 남았는데 뭐 그럼 혼자 열심히 다시 읽으면 되지, 뭐가 문제야 하고 책등을 훑는다. 그러고보니 이별의 왈츠도 있었다. 5년 전에 읽었지만 안 읽은 거나 다름 없는 상태니까 다음은 너로 정했다, 밀란츄! 노구를 이끌고 지팡이를 휘두르며 먼 프랑스로부터 나를 때리러 쫓아오는 영감님 상상은 정말 웃겼다. 할아버지 코로나 조심하세요. 제가 사는 관악구는 코로나 성지가 되었어요. 하나님이 있다면 왜 가장 신실한 사람들 사이에 병이 퍼지는 걸 냅두셨나요. 저는 오랑의 시민이 되어 유폐되었습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게 아니지만 아무도 없고 병이 옮고 병을 옮기지 않기 위해 조용히 집에서 올릴 기도를 생각하지만 저는 기도할 줄을 모르는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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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06-28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반유행열반인님 자가격리?! -_- 아니어야 할 텐데. 근데 쿤데라 할아방 다시 읽으니 좋아요? 나두 다시 읽고싶어진다.

김진영 선생님은 넘 좋아.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근데 아 저 책은 읽어보지 않았어요.

반유행열반인 2020-06-28 11:29   좋아요 1 | URL
마음만 격리고 내일 출근합니다 ㅎㅎㅎㅎ
쿤데라 할아방 저는 언제나 최애에요. 꿈나무 변태를 만든 변태 할아범ㅎㅎㅎ
저는 김진영 선생님 책은 처음이고 신파를 안 좋아하는데 이건 신파 절창이더라구요.

수이 2020-06-28 11:54   좋아요 2 | URL
아니니 다행~ 쿤데라 할아범이 세상에 얼마나 수많은 꿈나무 변태들을 만들었을까 상상하니 상상 불가_ 김진영 선생님 신파 ㅋㅋㅋ 인정_ 신파 좋아하지 않아 라고 하고싶은데 난 언제나 신파에 질질 짜는 스탈 같아.

마음만 격리_ 나두 ㅋㅋㅋ 그러고 좀이따 술 퍼마시러 관악구 간다 ^^ 관악구에서 술 퍼마시면서 반유열님 생각 해야지!

반유행열반인 2020-06-28 11:58   좋아요 0 | URL
으아니 수연님 우리 동네 강림!! 신림역 인근은 피하세요...거기 교회 다녀온 분들이 주변 상권으로 흩어져서 위험...
그렇게 따지면 서울대입구역 인근도 위험...우리집이 제일 안전한데 내가 술을 다 퍼마셔서 맥주 한 캔 밖에 없어서 안 되겠다...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못난 인간은 생각 마시고 좋은 이들과 술 마셔서 신난다 생각하시며 즐거운 시간 보내오소서.
 
[eBook] 남자의 뇌 - 무엇이 남자의 행동을 조종하는가
루안 브리젠딘 지음, 황혜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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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5 루안 브리젠딘.

원래는 신경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먼저쓴 여자의 뇌를 보려고 했는데 이 책이 먼저 빌려져서 읽었다.
성별 격차는 존재하고 뇌나 호르몬의 차이로 인한 결과라는 연구도 자주 소개된다. 과학이 잘못된 행동이나 성향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을 아는 것은 나와 다른 이들이 왜 저 모양인지 이해하고 대응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다른 걸 애써 다르지 않다고 무시하는 것도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 아니다.
사랑에 빠지고 성욕을 느끼고 하는 과정을 뇌와 호르몬의 작용으로 묘사하는데도 왜 이리 야하냐. 으하하. 이런거 왜 좋아해. 화를 잘 내고 감정적인 부분에 대한 설명은 좀 빡치긴 했다. 아무래도 저도 테스토스테론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만.
아직 한참 키워야 할 생후 800일짜리 꼬맹이가 밤낮 없이 날뛰는 걸 본다. 여자아이를 10년 정도 키워본 뒤라 차이가 분명히 보이기는 한다. 사춘기 남자애가 되어 반항과 늦잠과 지루함과 성욕을 폭발 시키고 비슷비슷한 놈들이랑 치고박고 사고칠 날을 생각하면 이런 책이라도 읽고 마음의 대비를 하는 것도 필요할 듯 한데. 반대로 나보다 더 옥시토신을 뿜뿜하는 다정한 남자들도 있는 걸 보면. 정말 성차인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아, 번역에서 새로운 단어 배웠어!!
찌무룩하다:마음이 시무룩하여 유쾌하지 않다.
나 찌무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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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0-06-25 2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후 800일 남자아이의 미래의 사춘기가 궁금하네요~~
생후 약 7330일 정도의 딸아이도
저를 찌무룩하게 만들어요 ㅠㅠ
찌무룩하다!
표현이 절묘해요^^

반유행열반인 2020-06-25 21:44   좋아요 1 | URL
저는 겁부터 나네요 두 번의 사춘기를 거칠 예정이므로..,으아니 7000일이 넘으면 저는 다 내쫓아버릴 예정입니다 ㅋㅋㅋ
찌무룩하지 마시고 유쾌하고 시원한 밤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eBook]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 - 결혼 페미니즘프레임 3
정지민 지음 / 낮은산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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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4 정지민.

제목과 차례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빌렸다.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 나도 그게 궁금해.
폭력
재정 계획
자유와 평등
성차
한남
시가
출산과 육아
폴리아모리
비혼 시대
경멸
불륜
함께 살기
차례만 봐도 무슨 이야기 할 지 궁금하다!!

큰 기대 없었는데 저자의 글쓰기가 마음에 들었다. 하고자하는 말을 뚜렷하게 잘한다. 밑줄 벅벅 긋고 싶은 말도 많이 한다.
결혼과 페미니즘을 양립하려는 시도, 저자는 나보다 조금 더 젊고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결혼 제도와 관계와 가부장제와 평등에 대한 사유는 깊고도 넓었다. 스스로를 가부장적이고 한남이라고 탓해본 경험, 시가나 남편이 완전 폭망한 상대는 아니라 불행하지 않다는 점, 이성애자로 남성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반대편엔 자기혐오와 맞물린 여성혐오가 있고) 결혼을 받아들인 점에서 뭔가 어떤 흐름에 거스르는 죄책감을 동반한다는 것까지 입장이나 생각에 공통점이 많아서 공감된 부분도 많은 것 같다.

고집과 독선과 집착과 불안과 몸과 마음의 병과 미안해하기 위해 온갖 미안한 짓을 저지르는 나에게 마냥 괜찮아, 너 하고싶은대로 다해, 하며 위로하고 참아주는 사람과 산다. 그 사람이 자란 환경도 나 못지 않게 불행했는데, 한 번도 누굴 때려 본 적 없고 부모에게 맞거나 욕먹은 적 없이 자라나 어린아이에게 마냥 다정하고 너그럽다. 시가 어른들도 다 비슷하게 착하고 나는 명절이나 행사에 방문하면 손님 마냥 먹고 놀고 쉬다 (아주 가끔 미안해서 설거지 한 끼 정도만 하고) 돌아온다. 반면 내 부모나 조부모는 아이를 때리고 욕도 하는 가풍을 보여주셨지… 부디 나의 자손들은 더 훌륭한 쪽의 영향을 더 받기를…
여자, 남자를 대하는 잘못된 방식이 구조화된 것도 문제지만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의 문제인 것도 같다. 가부장제의 롤모델을 보여줄 아버지가 일찌감치 도망쳐버려서 그런 영향 없이 엄마와 누나의 다정한 보살핌만 보고 자란 남자는 오히려 아빠보다 엄마같고, 누구처럼 도망치지 않고 책임지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며 좋은 사람이 되었다. 나도 그런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자꾸 마음과 다르게 못된 가부장이 된다. 이건 구조와의 싸움인 동시에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제도와 관계와 차별과 불평등에 관해 미리 사유한 사람들의 글을 많이 읽고 스스로도 많이 고민하고 반성해야겠다. 사람 쉽게 변하지 않고 고쳐쓰는 거 아니라고도 하지만, 나는 나를 고쳐쓸 수 있으면 좋겠다. 뚝딱뚝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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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06-24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좋은 마무리_ 나도 같이 읽으면서 뚝딱뚝딱

반유행열반인 2020-06-24 20:13   좋아요 0 | URL
뚝딱뚝딱 자가수리 두잇마이쎌프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 상처 입은 뇌가 세상을 보는 법
엘리에저 J. 스턴버그 지음, 조성숙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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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0 엘리에저 스턴버그.
이 책의 영어 제목은 NeuroLogic이다. 제목이 ‘신경논리(학)’하고 붙어 있었으면 내가 이 책을 봤겠어. 알라딘 전자도서관에서 제목만 보고 2월부터 줄을 섰는데 여태 기회가 안 왔다. 그러다가 자치구 전자도서관에 신간으로 입고가 딱 되서 예약해서 금세 받았다. 그런데 이번 주중에는 너무 바빴다. 책 볼 틈도 없었다. 반납일이 다 되어서 토요일 자정 가까이까지 부지런히 읽었다. 
영어 원제랑 동떨어지는 낚시성 제목들도 많은데,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는 책의 내용을 제법 적절하게 담으면서 나를 꼬실 정도로 잘 지은 한국어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어렵기도 하지만 무척 흥미로운 주제와 사례를 담고 있어서 여유를 가지고 볼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 싶었다. 나중에 다시 사서 보고 싶다.

우리가 인식하고 감각하는 세상이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뇌의 가공을 거친 결과라는 것은 올리버 색스의 ‘환각’, 최낙언의 ‘감각 환각 착각’에서 알게 되었다. 이미 올리버 색스의 책들에서 만난 병례들이 자주 등장해 반가웠다. 

책의 앞쪽에 뇌지도 그림이 제시된 게 좋았다. 원작 부록에 있던 그림이라고 하는데 전문가가 아닌 독자를 위한 세심한 배려로 느껴졌다. 물론 늘 찾아보는 건 아니지만, 수시로 나오는 이마엽, 이마앞엽겉질 정도는 어디에 있나 시각적으로 보는 게 도움이 되었다. 

챕터별로 질문을 던지며 뇌 일부 기능이 손상되거나 정상 작동하지 않는 독특한 사례를 제시하고 질문에 대한 답을 뒷받침할 만한 연구 결과를 정리한다. 저자가 의사로서 진찰한 사례와 환자와 나눈 대화는 더욱 생생하게 읽혔다.

 
1장 | 시각장애인은 꿈속에서 무엇을 보는가?
지각, 꿈, 외부세계의 창조
꿈을 예언, 예지 같은 신비로운 능력으로 보던 시대도 있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꿈은 그 꿈을 꾸는 사람의 경험과 생각이 섞여 만들어진 산출물인 걸 알게 되었다.(이 책에서도 한 번 더 설명해준다.)
혀 차는 소리를 내서 주변에 일으키는 반향으로 공간을 인식하는 시각장애인의 이야기가 신기했다. 저자가 박쥐의 반향정위와 비교하기도 했다. 다양한 감각은 서로 교차하고 영향을 주는 지점이 있다고 한다. 시각장애인들이 이러한 교차점과 다른 감각을 동원해 시각의 부재를 보완하는 동안 (예를 들면 츳츳 소리를 내고 들을 때) 시각정보를 처리할 때 활성화되는 뇌 부분이 작동한다고 한다. 
꿈에 관해서는, 일곱 살 이후 후천적으로 시각을 잃은 사람은 이전 시각 기억으로 정상 시력을 가진 사람들처럼 보는 꿈을 꿀 수 있지만 진짜 시각 이미지를 경험해 본 적 없는 선천적인 시각 장애인의 꿈은 다소 다르다는 게 (뭔가 보는 듯 하더라도 반향정위를 인식하는 것과 유사할 것이라는 게)저자의 주장이다. 

2장 | 좀비도 차를 몰고 출퇴근할 수 있는가?
습관, 자기통제, 자동행동
의식적으로 집중하지 않고 운전하면서 다른 일까지 하는 사례를 들고 있는데, 나는 면허가 없으므로 비슷한 자동행동으로 설거지를 생각했다.
식사 후 조금 있다가 설거지통을 보면 말끔하게 비어있다. 신난다-누가 설거지를 했어! 응 그게 나야… 나는 내가 설거지한 것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다. 무아의 상태로 뭘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딴 생각을 하거나 명상하듯 알파파를 뿜어대며 거품 묻은 수세미로 그릇을 문지르고 흐르는 물에 헹궈서 정리대에 차곡차곡 쌓는다. 
저자는 이런 행동이 습관 체계가 형성되고 무의식을 통해 일이 처리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의식적 행동을 하는 동안 의식을 집중하는 다른 행동과 멀티태스킹도 가능하다고 한다. 
케네스 파크스가 몽유병으로 의심되는 상태에서 장인 장모를 살해한 사건은 정말 끔찍했다. 가끔 두려워하는 일들이 있다.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도 모르고 나쁜 일을 벌이는 상상을 했다. 졸피뎀계 수면제를 먹고 저녁 내 있었던 일을 다 잊어버린 경험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자유의지에 기반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 사람들이 심신미약을 주장하는 범죄자를 엄청 미워하지만, 의지 밖 의식 밖 행동의 가능성도 염두에 둘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와 범죄자 마인드…)

3장 | 상상만으로도 운동 실력이 좋아질 수 있는가?
운동 통제, 학습, 심상 시뮬레이션의 힘
거울뉴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 운동도 안 하다보니 내가 아무리 심상 훈련을 해 봤자 근육이 저절로 생기는 일은 없겠지만 ㅋㅋ그래도 이미지트레이닝이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는 놀라웠다. 
유령통증이라고 들었던, 절단 환자의 부재한 신체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가려움의 이야기가 여기에서도 나왔다. 부재한 신체 대신 거울로 반대편 몸을 비추고 허공에 다리가 있는 양 긁어서 증상을 완화시키는 방법도 신기했다. 우리 뇌의 상상력과 모방, 공감능력은 때때로 거추장스럽기도 하다...

4장 |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기억할 수 있을까?
기억, 감정, 자기중심적인 뇌
남들이 보기에는 거짓말이지만 본인은 거짓말인지도 모르고 하는 말짓기증이 인상 깊었다. 완결성 있는 이야기를 요구하는 우리의 뇌는 무엇이든 가져다 붙여서라도 부재와 의문을 해소하려고 한다.
수많은 이야기들도 그런 경향이 만들어낸 결과물 같다. 영화 라쇼몽도 생각났다. 모든 해석은 결국 자기중심성을 벗어날 수 없고 나 또한 나에게 유리한 진실만 말하고 적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억과 기록의 취약성. 진실이라는 게 가능한지도 모르겠고. 그런데도 그거 붙들고  뭔가를 알아내겠다고 기를 쓰는 사람의 마음이란. 
그나마도 기억을 뒷받침할 글도 사진도 사람도 물건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면, 그래서 모든 게 쉽게 잊혀진다면, 일어났던 일조차 없던 일이 될 수 있을까. 

5장 | 왜 사람들은 외계인 납치설을 믿는가?
초자연적 경험담과 기이한 믿음이 생겨나는 이유
수면마비, 뇌 혈류의 일시적 차단으로 보는 환각 등을 사람들이 스스로 납득할 만한, 문화권에서 공유되는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등장했다. 외계인 납치설은 미국인들의 공유 장르라는 사실도...알게 되었다. 
같은 수업 듣는 분이 쓴 소설 중에 과거 학대 경험으로 인해 해리성 장애-기억을 잃고 야간에 시력이 저하되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 경험을 한 화자는 천사를 만나서 시각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며 초자연 현상 동호회에서 실마리를 찾으려고 시도한다. 이 책을 보고 그런 상상력을 발휘하신 걸까, 아니라면 이 책을 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6장 | 조현병 환자에게 환청이 들리는 이유는?
언어, 환각, 자아/비자아의 구분
조현병에 대한 이 챕터는 특히나 관심있게 읽었다. 아빠가 25년 전에 조현병 발작을 해서 망상적 사고를 보이다 입원하는 모습을 지켜본 경험이 있었고, 그 이야기를 지난 주 과제로 써 냈다. 다 쓴 후에 이 책을 읽긴 했지만, 조현병 환자가 듣는 환청, 자기 의지가 아닌데 남에 의해 생각이 심어졌다고 생각하는 등의 증상의 이유를 짚어낸 부분이 뭔가 크게 도움이 됐다. 혼잣말을 타인의 목소리로 지각하는 일, 자기가 한 생각조차 자기 생각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게 되면서 환청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전기물고기가 자기가 곧 전기신호를 내보낼 것이다-하고 의식한 뒤 전기신호를 방출하는 식으로 다른 동물의 신호와 자기가 내보낸 신호를 구분하는 수반 방출계라는 기능에 연결지어 설명한다. 
내가 나라는 감각, 나와 남을 구분하는 감각, 나의 말 나의 생각과 남의 말 남의 생각을 구분하는 일조차 당연한 게 아니고 그게 뒤틀리고 어그러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섬뜩했다. 

7장 | 최면 살인은 가능한가?
주의집중, 영향, 잠재의식 메시지의 힘
저자는 직접 영향을 주려고 시도하는 최면의 힘은 강하다고 보지만, 서브리미널이니 하면서 몰래 심어놓는 메시지의 영향은 크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광고가 구매를 촉진하는 부분은 잠재의식을 건드리는 것보다 대놓고 최면 걸듯 세뇌하는 쪽이 더 강력할 수도 있다는...정말 그런지는 모르겠다. 파이트클럽에서 영화 필름 사이마다 타일러 더든이 포르노 장면 끼워넣던 생각이 난다. ㅋㅋㅋ 은근하게 던지던 말들이 나에게 어떤 감정과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기분 나쁘지 않게) 투덜거리던 날들도. 
정신적 손상 없이 정상 사고가 가능한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 살인을 유도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는 게 저자의 주장. 최면이 가능한 것은 맞지만, 살인 급의 강력하고 파괴적인 명령을 받으면 최면을 통해 강력한 집중력을 가졌던 사람조차 의식적으로 되돌아보고 억제하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까 최면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의 자기 암시가 작동한 결과일 수 있다. 레드썬.

8장 | 다중인격은 똑같은 안경을 공유하지 못한다?
인격, 트라우마, 자기방어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는 여러 자아를 가지고 심지어 그 자아들의 시력조차 다른 사람의 사례가 등장한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던 학대의 경험. 되게 슬픈 이야기였다.
다중인격에 관한 건 주로 영화에서 독특한 인물과 그로 인한 사건을 다룰 때 등장한다. 뇌와 인식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자아란 무엇일까,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자아는 뇌의 어느 부분에 있을까 하는 의문에 닿아 있었다. (저자 말대로라면 어느 부분이 아니라 뇌 도처에 있고 뇌가 작용하고 기능하는 동안 만들어지고 변하는 게 자아이고 정체성인 듯…)
정체성을 유지하는 일이 우리의 생존에 더 유리했기 때문에 무의식은 그 정체성을 위협하고 구멍이 나는 부분을 메우려고 나름의 방식을 만들어 왔고, 그런 기능들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사고와 인식부터, 일상이 깨어지고 망가져서 원래 하던대로 사고와 인식을 하기 어려울 때 그 틈을 메꾸는 방법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이 흥미로웠다. 와 다 흥미롭대. 그런데 진짜 읽고 있으면 다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연구결과가 가지는 설명력,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과정조차 대단해 보였다. 

뇌에 대해 알아가는 건 나라는 개체, 인간이라는 종, 사회라는 그물, 거기에서 생겨나는 이야기에 대해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래서 앞으로도 열심히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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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심신단련 - 이슬아 산문집
이슬아 지음 / 헤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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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7 이슬아.

이슬아의 책은 처음 읽는다. 이웃이 인용한 짧은 글만 보다가 전자도서관에 올라왔길래 빌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작가가 출판사를 시작하며 분투하는 사연은 알고 있었다. 기억을 짜냈더니 그 무렵 자주 회자되는 걸 보면서 작가 SNS에 들어가서 트럭으로 책을 나르고, 계단을 오르고, 뭐 그런 사연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에세이는 잘 안 읽던 사람인데, 그래도 어쩌다보니 전보다는 자주 본다. 누군가의 일상과 삶을 코앞에서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 때도 있고, 내가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이걸 왜 보나 싶을 때도 있다. 그런 책과 글이라도 한 줄 이상은 건질 게 있으니, 배울 만한 삶의 태도 같은 게 있으니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보려 한다.
이 책에서 건진 점은, 글로 먹고 사는 노동자의 삶, 독립 1인 출판사 대표의 생활, 연애든 우정이든 가족관계든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고 느끼고 감사할 줄 아는 삶, 사이좋게 사는구나, 자존감이 높구나, 뭐 그런 감상 등등.
전자책 맨 뒷장 책 정보는 작가가 낸 서평집 정보가 잘못 들어가 있었다. 알고 있나요...

-에필로그에서 밑줄.
‘우리는 서로를 놓치고 나서도 서로에게서 배운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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