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열린 책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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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3 루시아 벌린.

전작 청소부 매뉴얼을 읽을 때는 온갖 풍파 겪고 힘든 사랑하는 등장인물들을 보며 저게 나야, 나일지도 몰라, 했었다.
두 번째 묶인 책은 읽어 말아 하다가 제목이 참 좋아서 그냥 샀다. 이 소설집에서 제일 마음에 든 소설 중 하나도 같은 제목이었다. 정확히는 ‘환상의 배’, ‘내 인생은 열린 책’, ‘그늘’ 이 세 편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다른 소설들은 막 겪은 일을 거의 그대로 가져다 붙인 듯 생생한데 세 가지 소설은 뭐랄까 진짜 소설 같았다. 답답하고 암담한 속에 아니면 지난 일들을 떠올리다가 만약 이렇다면 이랬으면 하고 써내려갔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이번 책을 읽을 때는 나 아니야, 나는 이렇게 살지 않았고 않을 거야, 조각가나 음악가나 약쟁이 남편을 만나지 않을 거고 아이도 넷씩이나 낳지 않을 거야, 공동묘지나 루브르박물관에서 길을 잃지 않을 거야, 투우를 보러가지도 않을 거야 했다. 그냥 읽은 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허름한 집, 거슬리는 또는 따듯한 이웃, 바닷가 생활, 주변을 둘러싼 꽃과 나무와 산, 그런 것들을 나는 이렇게 멋지게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밖으로 나다니고 돌아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들.

+밑줄 긋기
-그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지고 눈은 쾌감에 도취되어 반쯤 감겼다. 몸도 돌처럼 굳어지는 듯싶더니 천천히 몸을 흔들었고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는 에트루리아 무덤의 호색적인 그림처럼 관능적이었다. 그의 조용한 신음 소리는 독경을 외는 듯했다. 빅터는 싱글거리며 그런 버즈의 모습을 지켜보다 자신도 주사기를 채워 바늘을 꽂았다. 그리고 약이 주입된 순간 그는 장작불 속으로 쓰러졌다. 그것을 본 마야는 비명을 질렀지만 버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야는 높은 타판코에서 그대로 뛰어내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바닥에 착지하는 바람에 무릎이 까졌다. 넘어져 무릎이 까진 어린아이처럼 눈물이 앞을 가렸다. 머리카락과 살이 타는 악취가 번졌다. 마야는 빅터를 잡아 끌어 그의 머리를 모래에 대고 비볐다. 그는 죽었다. (‘환상의 배’ 중)

-난 형편없는 엄마야. 우리아이들을 위해 건강해야 해. 어휴, 난 난파선 같아. 이 집은 난파선이야. (’1974년 크리스마스’ 중)

-훈훈한 바람이 불었지만 제인은 갑자기 몸이 오싹했다. 깊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모든 게 일시적이라는 깨달음이었다. 투우장 전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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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누이
싱고 지음 / 창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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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30 싱고.
볕이 잘 드는 천장이 높고 커다란 도서관에서
이 책 정말 좋아. 했지.
시 읽어주는 누이야? 했더니 넌 못 알아 들었지.
나는 또 하나 집에 모셔 읽었다.
글도 그림도 좋고 실려 있는 시들도 다 좋았다.
마주 보고 정말 좋았어. 하고 싶지만.

—————
차심이라는 말 있지
찻잔을 닦지 않아 물이끼가 끼었나 했더니
차심으로 찻잔을 길들이는 거라 했지
가마 속에서 흙과 유약이 다툴 때 그릇에 잔금이 생겨요
뜨거운 찻물이 금 속을 파고들어가
그릇 색이 점점 바뀌는 겁니다
차심 박힌 그릇의 금은 병균도 막아주고
그릇을 더 단단하게 조여준다고......
불가마 속의 고통을 다스리는 차심,
그게 차의 마음이라는 말처럼 들렸지
수백년 동안 대를 이은 잔에선
차심만 우려도 차맛이 난다는데
갈라진 너와 나 사이에도 그런 빛깔을 우릴 수 있다면
아픈 금 속으로 찻물을 내리면서
금마저 몸의 일부인 양
(손택수 ‘차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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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07-31 2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걸 마흔 넘기면 확실히 깨닫게 되는데_ 음 근데 저는 타인들한테 관심 많은 거 같은데?

반유행열반인 2020-08-01 02:49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막 서로 스토킹하고... ㅋㅋㅋㅋ

북깨비 2020-08-01 09:11   좋아요 1 | URL
오. 확실히 저도 마흔 넘고 깨달음이 온 것 같아요! 그래도 남들은 뭐 읽나~ 에는 아직도 엄청난 관심이 쏟고 있습니다만.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0-08-01 09:50   좋아요 1 | URL
마흔 넘어 본 다음 정말인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ㅋㅋㅋ저도 관심 많아서 ㅋㅋㅋ

수이 2020-08-01 10:24   좋아요 2 | URL
북꺠비 / 남들이 뭐 읽나 이거에 관심 있는 건 북깨비님이 북깨비님이셔서 그런 것도 있고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싶어요. 전 마흔 전에는 정말 세상에서 나 혼자 잘난 척 살았는데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지 알고 (물론 사업을 말아먹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ㅋㅋ) 한층 겸손해졌어요. 그래도 가끔 재수없이 군다고 절친들은 그러지만 -_-

수이 2020-08-01 10:26   좋아요 1 | URL
반유열 / 물론 케이스 바이 케이스지만 한번 바닥에 닿고 다시 치고 올라올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다시 치고 올라오지 못해서 영영 괴로워하다 이 세상 뜬 선배님들도 많아서 생각하면 괴롭다 ㅠㅠ
 
마음의 오류들 - 고장 난 뇌가 인간 본성에 관해 말해주는 것들
에릭 R. 캔델 지음, 이한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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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30 에릭 캔델.

이상심리학 개론서를 훑어보면, 목차에 열거된 대부분의 질환에 해당하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나는 관련 학문을 전공하지 않았고, 그러니 실습에 참가하거나 임상 사례를 접할 이유가 없었다.
나의 아빠는 내가 초등학생 때 조현병(당시에는 정신분열증) 발작이 일어나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엄마는 내가 지켜본 상황, 갑자기 없어진 아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아빠는 발작이 일어나기 전까지 심한 불안과 망상과 수면장애에 시달렸다. 더 오래 전부터 심하게 술을 마셨고, 언어폭력이나 신체폭력, 물건을 때려부수는 행위로 아내폭력, 아동학대를 저질렀다. 나는 직접 당하는 쪽은 아니었지만 엄마나 동생이 고통을 겪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며 자라났다. 그것 또한 심한 후유증을 남겼다. 아빠는 강박적인 성격도 심해서 가족들의 행동을 통제하고, 감시하고, 결과물이 완벽하지 못하면 차라리 다 부숴버리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아빠는 우울증이 심해졌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정신과약의 부작용으로 밤낮 없이 잠만 잤다. 중간에 자살시도로 청산가리를 캡슐에 넣어 먹기도 했는데, 엄마가 이상한 징후를 눈치채고 삼킨 캡슐이 터지기 전에 토하게 만들어서 살려냈다. 끔찍한 생각이지만 이후 당한 고통을 떠올리며 먼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를 하기도 했다. (몇 분만 기다릴 것을…)
약을 끊은 뒤에는 술에 의존했고, 도박도 하고, 폭력은 이어지고, 결국 아주 심한 며칠이 이어지던 어느 무렵 내가 엄마를 데리고 가출한 뒤, 이혼 절차를 밟고 나서야 내 임상 참관(?)을 마칠 수 있었다. 물론 그 이후로도 우리를 찾아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어떻게 알았는지 바뀐 내 연락처로 전화나 메시지가 걸려와 공포를 느낀 적도 있지만 지금은 대부분 잊고, 엄마가 아빠 욕하는 걸 들을 때나 동생이 아빠와 똑같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데 엄마가 시달리고 하소연하는 걸 들을 때나 가끔 생각나는 정도이다.
그리고 여러 심리학, 정신질환, 범죄학, 신경과학, 뇌과학 책을 읽을 때도 가끔 떠오른다.

저런 아빠와 함께 사는 가족들 역시 정상이기 쉽지가 않다. 엄마는 심한 우울증과 신체화된 증상(만성 두통, 위염) 으로 고통 받았고 늘 굳은 얼굴로 힘없이 우리를 대하곤 했다. 엄마가 안아주거나 손을 잡아준 기억은 거의 없다. 나는 동생과 둘이 놀거나 싸우고, 혼자 책을 보거나 공부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불렀다. 친구들과 잘 지내는 방법을 몰라 자라는 내내 힘들어했다.
불안증세가 심해 아직도 뭔가를 반복해서 두드리거나 떨어지거나 하는 둔탁음이 들리면 괴로워한다.
10년 전에는 우울증과 자살충동이 심해서 반 년 정도 약물 치료를 받았다. 출산 후에도 우울증이 재발했지만 수유 중이라 그대로 참아냈다. 그러고나서 또 어느 해에는 성대수술, 맹장수술 같은 걸 받으면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졌고 돌발행동을 자주 했고 신경안정제를 오남용하기도 했다.
중독 성향이 심해 약물 의존도도 높고, 게임 같은 것도 한 번 시작하면 일상생활이 어려울 지경까지 갔다가 완전 삭제를 해야지나 빠져나온다. 술도 아토피성 피부염 때문에 강제로 참아서 그렇지, 스무 살까지 진탕 마시던 시절만 해도 술만 마시면 사고를 크게 치곤 했다. 요즘은 같이 사는 사람이 밖이든 안이든 자기가 옆에 있을 때만 마시자고, 그러면 수습해준다고 몇 년 전에 당부를 해놔서 (그리고 많이 마실 기미만 보이면 브레이크를 걸어줘서-_-) 그럭저럭 사람 구실은 하고 산다.

지금은 매우 양호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항우울제와 항불안제와 수면제를 먹으면서 어떤게 편안한 마음인지, 숙면인지 정상의 상태를 경험하고 아 이게 정상이구나, 하는 걸 알 수 있게 되었다.
우울증은 재발이 심하고 그냥 평생 같이 갈 만한 병인데, 요즘은 상태가 좋은 걸 확실히 느낀다. 직장이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에 오면서 아침에는 동쪽을 향해 아침볕을 받으며 30분, 저녁에는 반대로 지는 해를 보며 서쪽으로 또 30분씩 걷다보니 햇빛과 걷기의 효과가 확실히 발휘되는 것 같다.
수면장애는 아직도 심해서, 새벽 세네시에 갑자기 깨서 아침까지 못 자고 눈뜨고 지새는 날도 자주 있긴 한데,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한다. 나는 그냥 잘 못 자는 사람으로 태어났구나 하고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보낸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잠이 들고 아니면 일찍 일어나서 빵을 굽고 커피를 내린다.

내 가족은 왜 불행했을까, 아빠는 엄마는 왜 이상했을까, 나는 왜 이상할까, 에 대해 뇌과학, 뇌장애에 대한 책은 많은 설명을 해준다. 어디가 고장났고, 남들과 어떤 부분이 다른지. 쉽게 완치되지는 않지만 앞으로 어떤 치료 가능성의 전망이 있는지.
마음과 몸, 영혼과 육체를 이분하는 시도들이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그런 게 아니라고, 뇌의 어딘가, 호르몬의 어딘가, 뇌와 호르몬에 영향을 주는 유전자의 어딘가가 남들과 달라서 다른 행동과 심리를 보여주는 거라고 설명해준다. 당장 해결되지 않고 답이 없더라도 이유를 아는 일은 도움이 된다.

이 책은 그런 마음의 고장의 원인을 밝히기 위한 다양한 연구 과정을 따라간다. 이미 뇌에 관한 책을 적잖게 읽은 터라 다시 나오는 사례가 반갑기도 하고 재미있는 부분도 있었다. 물론 학술적인 내용, 뇌신경과 호르몬의 작용 기제 같은 설명은 여전히 어렵다. 뇌에 대한 책을 처음 읽는 사람들은 이 책이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 뭐 그럴 땐 관심 있는 질환이랑 흥미로운 사례만 적당히 골라 보면 될 것 같다.

-자폐는 사람들과 의사소통하거나 관계 맺기 어렵고 남들의 표정이나 반응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은 반대로 우리가 어떻게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지를 밝히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자폐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 변화가 있어 이것이 뇌의 특정 부분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호르몬 변화 또한 우리의 사회적 행동에 기여한다. 그러니까 사회적 관계 맺음조차 많은 부분 생물학적 영향을 받는다. 이런 사실을 아는 일은 이전에 부모의 양육 태도 탓이라는 둥, 예방주사를 잘못 맞으면 걸린다는 둥 하면서 수많은 부모의 마음에 못을 박던 낭설들과 죄책감은 털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장애는 그저 너도 나도 겪을 가능성이 있는 운과 우연일 뿐. 그로 인해 받을 수 있는 고통과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모두가 노력해야 할 문제이다.

-우울증에 대한 뇌와 호르몬의 문제는 ‘우울할 땐 뇌과학’에서 자세히 읽어보았다. 그 책에는 시도해볼 수 있는 수많은 완화 방법이 등장해서 훨씬 더 실용적이다. 아, 이 책에서 알게 된 사실, 마약류로 알고 있던 케타민이 몇 년 전 우울증 치료제로 미국에서 승인되었다고!!! 이 책 생각보다 최근에 나온 책이었다...국내에서는 아직 케타민이 처방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기존 우울증약은 복용 기간이 한참 지나야 효과가 나오는데 케타민은 훨씬 작용 속도가 빠르다고 한다. 그리고 약 뿐 아니라 상담, 인지행동요법과 같은 심리요법도 뇌를 변화시킨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울할 땐 뇌과학’에서 권하는 실천 방법 또한 해볼 만한 것이다. 당장 햇볕과 운동량 만으로도 나아진 마음 상태를 보면 수긍이 간다. 다만 그런 시도조차 어렵고 나와 남의 생명에 위협까지 줄 수 있는 우울 상태라면 전문가의 도움과 약물치료가 확실히 필요하다. 우울증, 양극성 장애 또한 유전적 요인이 뇌와 신경전달물질, 효소 같은 곳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타고 나는 부분에 대해 나약하다느니, 정신력의 문제라느니 하는 소리는 함부로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조현병은 완화시킬 수 있는 약이 계속 개발되고 있다. 이 병 또한 엄청 유전자 영향이 커서 나는 늘 나도 모르게 정신줄 놓을 미래를 걱정한다. 실제 진단 받은 건 아빠 하나지만, 할아버지나, 증조할머니가 보이던 이상행동, 이상성격을 생각하면 우리 집구석은 빼박… 나는 언제든 병원에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걱정은 그만 하기로 한다. 하하하. 이 책에서 한 챕터 할애해 다루고 있지만, 조현병, 우울증, 양극성장애는 미술, 문학, 과학 분야에서 창의적인 재능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물론 모든 정신병자가 예술가가 되는 건 아니지만… 억제되거나 손상되거나 이상을 나타내는 뇌 부분이 있으면 반대로 더 두각을 나타내고 활성화되는 뇌의 기능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 경우도 있다…(다 그렇지는 않고 그냥 그렇다고….) 아, 이렇게 뇌의 특정 기능은 손상을 입었지만, 오히려 다른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독특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의 사례는 올리버 색스 박사의 책에 많이 등장한다. 그 책들은 사례를 훨씬 더 흥미롭고 심지어 감동적으로 그려놓고 있다. 고장난 뇌와 마음에 대해 처음 읽을 때는 색스 박사님 책들을 강추한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환각,

-치매, 파킨슨병, 헌팅턴병에 대한 부분은 크게 관심이 가지 않고 이해도 잘 안 되었다. 주변에 비슷한 기억, 인지 장애나 운동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면 달라졌겠지. 가끔 내가 늙어서 치매가 와서 나도 모르게 온갖 비밀을 쏟아내고 상스럽고 성스러운 말들을 쏟아내는 걱정을 한다. 뭐 그땐 나는 죽은 거나 다름 없으니 역시 걱정하지 않기로 한다. 가족들에게도 그런 상태가 되면 괜히 끼고 있느라 고통 받지 말고 조용히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달라고...미리 말해 놔야겠다. 노후란 어떤 모습일까… 잘 늙을 수 있을까 하아…

-불안, 외상후 스트레스, 잘못된 의사결정에 대한 부분은 조금 심각하게 읽었다. 두려움이 형성되는 과정 또한 조건-반응과 같은 것이고 뇌에 특정한 경로가 형성되는 일이라고 한다. 노출 요법(일부러 불안을 일으키는 자극을 자꾸 줘서 그래도 별일 없다는 것을 알려줌)이나 아예 기억을 완전히 지우는 방식으로 두려움, 불안을 없앨 수 있다고 한다. 우리의 의사결정이 생각보다 합리적이지 않고, 감정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다른 책들도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자세하게 읽어본 적은 없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도 다시 알아보고 싶다.

-중독에 대한 부분은 언제 읽어도 재미있다. 사실 중독에 대해 가장 흥미롭게 읽은 책은 ‘도파민형 인간’이다. 그 책은 주제랑 챕터부터 재미가 없을 수 없게 뽑아 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중독을 개인의 의지 문제, 도덕적 결함으로 취급하지만 뇌과학의 발달은 그것이 뇌의 고장과 관련 있고 오히려 중독자들이 처벌 아닌 치료가 필요한 상태임을 알려주고 있다.
...요즘 나의 많은 상태는 중독의 징후와 매우 가깝다. 말과 글과 관계에 대해서도 중독이 될 수 있나 보다. 도파민은 어디에나 관여하기 때문에. 우리가 쾌락을 추구하는 행동을 하면 도파민이 보상경로를 통해 행동을 강화하게 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뇌가 맛이 가면 보상과 쾌락이 제공되지 않아도 끊임 없이 갈구하는 행동을 보이게 된다. 물질이나 자극 자체가 중독을 부추기는 게 아니라, 쾌감을 느끼던 환경적 상황, 기억, 감정 같은 단서마저 촉발 요인이 된다는 게 슬프다. 중독은 일종의 잘못된 습관이다. 그게 뇌에 박혀 버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젠더 정체성과 뇌에 관한 부분은 개략적이지만 관심이 갔다. 여기서는 성적 지향은 다루지 않는다. 생각보다 뇌과학이 그쪽 부분은 아는 게 없다고 저자가 쿨하게 인정하고 넘어가 버린다… 그래도 염색체, 생식기, 호르몬에 따라, 성별에 따라 뇌와 신경회로, 그로 인한 행동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그 부분은 ‘여자의 뇌’, ‘남자의 뇌’에서 자세하게 읽었다. 차이를 이해한 뒤 그걸 더 나은 삶과 관계를 이끄는데 활용해야지, 현실의 문제나 잘못을 정당화하는 데 끌어다 붙이는 짓만 안 하면 좋겠다. 차이 자체를 부정하고 지우는 것도 긍정적인 변화와 개선에 도움은 안 될 것 같다.

-의식, 무의식과 정신분석학에 대한 이야기는 크게 재미는 없었다. 저자는 뇌과학이나 신경과학과 정신분석이 연결될 가능성이 있는데도 정신분석이 그런 과학적인 노력을 별로 안 해서 묻히는 분위기라고 조금 안타까워하는 느낌이 든다. 자기감, 자의식,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생각과 행동을 자기 의지대로 하고 있는가, 과연 자기 의지라는 게 존재하긴 하는가, 우리는 그냥 물질과 전기신호와 호르몬과 자극-반응, 프로그래밍 인풋-아웃풋하는 인형 같은 놈들은 아닌가, 우리도 그냥 짐승 아닌가, 그런 생각도 가끔 드는데, 어쨌거나 이런 부분까지 파악하고, 파고들고, 탐구하고, 더 나아지겠다고 애쓰는 건 또 인간 뿐이니까 조금 자부심을 가져도 될까 싶다.

작동을 멈추고, 사라지고, 더 이상 감각할 수 없을 때야 비로소 평온함과 행복과 정상적인 상태에 대해 감각하는 게 인간인 것 같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상은이 언니가 다 맞았네. 그러니까 아프면 아픈대로, 내가 좋은 날이 있었어서 지금 이렇게 힘들구나, 그러다 또 나아지겠구나, 하고 흘려보내야 할 시간도 있다.

아...그리고 이 책보다는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가 쬐에에끔 더 재밌다. 그 책도 어렵긴 마찬가지이지만...뇌질환, 신경질환 외에도 우리가 살면서 겪는 체험과 마음에 대해 더 다양하게 다루고 있어서 그런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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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07-31 2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유열님 우리 걷고 장난치고 맥주 좀만 마시고 그렇게 놀까요? 근데 저한테는 너무 어려워요 뇌 관련서_ 올리버 색스 박사님은 워낙 글솜씨가 좋아서 그냥 막 넘겼던 거 같은데 제 뇌는 비둘기만해서 그런가 벌써 다 까먹었다...... 킁킁.

반유행열반인 2020-08-01 02:48   좋아요 0 | URL
걷고 장난치고 맥주마시고 뭔가 어마어마한 코스 ㅋㅋㅋ뇌책 저도 잘 모르는데 그냥 주워 읽다보면 재밌는 부분도 많아요. 색스 박사님 책 나오는 사례도 다 신기하고 ㅋㅋ중독에 대한 책 보면 좀 재밌지 않을까요 어머 내 얘기잖아 하고 이입되고 ㅋㅋㅋ

yeshot21 2020-08-11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려움 잘 이겨내시고 씩씩하게 살아가시는 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8-12 07:4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지나고 나면 그냥 성장과정이 저랬지, 하고 떠오르는 정도이지 어려웠구나 하는 건 겪을 때 지나면 잊어버려지더라구요.
 
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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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6 백수린.

나도나도 집중력 좋게 금방금방 뚝딱 다 읽어버렸다. 엉뚱한 질투조차 귀엽게 봐주는 사람은 이제 하나도 없다.

이전 읽었던 소설집보다 백수린은 확실히 더 잘 쓰게 되었다.
그런데 읽는 내내 나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나는 프랑스어도 하나도 모르고 프랑스는 가 본 적도 없는데 소설에서 프랑스 이야기가 무한반복된다. 세 권 내내 그래서 으 이제 프랑스 그만, 그만, 하고 싶었다. 물론 자신이 겪은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걸 계속 쓰게 되는 거지만. 그래서 나는 반지하와 술주정뱅이나 정신병자인 부모와 폭력의 현장과 망하는 연애 따위만 자꾸자꾸 쓰잖아. 에이 심통난다.
그리고 자꾸만 희미해지는 연인들, 이루어지지도 않은 사랑들, 내가 나이고 싶은데 그걸 놓치는 걸 느끼는 여자들이 자주 나와서 슬펐다.
백수린은 점점 더 잘 쓰고 점점 더 마음을 울리고 지나간 것들을 더듬게 만드는 글을 잔뜩 만들어낼 것 같다.
나는 뒷부분 소설들이 조금 더 좋았다. 아직은 집에 가지 않을래요. 흑설탕 캔디.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읽다가 식식대던 소설들이 결국 제일 좋았대. ㅋㅋㅋㅋ

읽다 보니 소설도, 사랑도, 그리워하는 일도, 기대하는 것도, 삶도 다 내패대기 치고 싶었다. 식식. 읽다가 울고 싶지도 뭔가 써서 누굴 울리고 싶지도 않다.
울 줄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못 느끼는 돌덩어리가 되고 싶은 날이다.
뭐 이러다가 한숨 코 자고 나면 또 나아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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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그리기 2020-07-26 2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열심히 스스로를 지각하고 타인의 삶과 글에 열려있는 분이 돌덩어리가 되고 싶으시다니요.. ㅜㅜ 님이 쓰신 이야기를 읽게될 날을 기대하는 어느 소심한 이웃을 위해서 늘 씩씩하시기를.. 편안한 밤 보내세요~

반유행열반인 2020-07-27 14:57   좋아요 1 | URL
글과 말로 사람을 어떻게 알겠어요. 저를 매우 과대 평가 하고 계신듯해서 죄송하고 또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돌덩어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한데 오늘은 그래도 괜찮아요. 따뜻한 댓글 감사합니다.

수이 2020-07-26 2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울지 마 울지 마 푹신 자 유열아

반유행열반인 2020-07-27 14:58   좋아요 0 | URL
우리 모두 울지 마 ㅋㅋㅋ 유열이 잘 자고 잘 일어나 일도 하고 밥도 먹고 하루 보내고 있습니다. 수연님 좋은 하루 보내요-

공쟝쟝 2020-07-29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숨 자고 나아지셨기를..*

반유행열반인 2020-07-29 12:53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잠이 늘 약이죠 ㅎㅎㅎ
 
나는 페미니스트인가 - 100년후 독자에게 던지는 물음 일제강점기 새로읽기 2
나혜석 지음 / 가갸날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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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6 나혜석.

제목은 묶은 이들이 붙인 것이고, 여덟 개의 산문이 묶인 책이다. 역사 만화책 보다가 나혜석이 나온 부분에 꽂힌 무렵 전자책으로 작가의 소설집도 사고, 이 책도 샀다. 오디오북으로 윤석화가 읽어주는 나혜석의 ‘경희’도 들었다.

시대를 앞서 간-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래한 시대는 그 앞서 간 사람과 같은 행보를 보이는 사람을 포용할 만큼 달라졌는가?
아이를 가지고 낳고 조리하고 키우는 동안 겪는 고통을 넘는 굴욕과 수치와 자괴감은 여전하다.
개성적이고 남과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을 뒤에서 혹은 앞에서 손가락질하고 입에 올리고 그런 사람은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며 혐오하는 것도 여전하다.
성에 따라 다르게 판단되는 정조의 관념, 이제 정조라는 말은 잘 쓰이지도 않고 조금이나마 변한 인식도 있겠지만 이성과 관계를 많이 맺는 남자에게는 부러움과 매력과 능력을 부각하고 여자에게는 헤프고 걸레 같고, 그런 비난과 동시에 나도 한 번 안 될까 하고 들이대는 이중적인 태도도 여전하다.

1920-30년대에 배우고 다른 세상을 접하고 예술하던 여성이 가정과 배우자와 시댁에 얽매여 고충을 겪던 모습은 100년이 지났어도 다른 여성들의 삶 속에서 반복되고 재현된다. 이혼 뒤에 독신의 나은 점, 불행하면서도 행복하다고 부르짖는 글은 요즘의 비혼주의자가 늘어나면서 나오는 이야기랑도 크게 동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삶에 대한 자각, 해명, 선언, 의지와 다짐이 꾹꾹 담겨 있는데, 글에 드러나지 않고 연표 아래 칸에 말년에 양로원에 들어가고 시설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사실은 슬프다. 그림을 그려 상을 받고 자기 주장을 지면에 글로 발표하고 홀로 서는 삶을 꾸려가고자 했지만, 그 10년 가까운 연표의 공백 동안 작가가 겪은 녹록치 않은 현실은 어땠을까 상상이 가지만 상상하기가 싫다. 자식을 잃고, 사랑을 잃고, 사회에서 배척 당하고, 자신의 삶이라는 배경 때문에 그림은 팔리지 않고, 경제적으로 곤궁하고, 정신을 놓고, 길을 떠돌고, 그리고…
인형의 집을 나간 노라는 어디로 갔을까,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물음을 자주 접하는데,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하는 나혜석이 지은 노래 가사가 이 책에도 실려 있는데,
막상 나혜석은 자식과 경제적 곤궁 앞에 최린과의 일을 두고 오해다, 나는 이혼하고 싶지 않다, 매달렸지만 김우영은 이미 다른 여자를 얻고 나혜석에게 돈 한 푼 주지 않고 아이 넷도 시댁에서 끼고 있고 (나중에 신문 기사에서 본 것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친모가 남자랑 바람나서 나간 걸로 되어 있고 지워진 사람이 되어 나혜석의 자녀들은 노년까지 친모가 누군지 숨기고 살았다고 한다) 결국 시댁과 주변인과 남편의 배척으로 가정 밖으로 내몰린 것처럼 읽혔다. 그렇다고 파리에서 애정을 주고 받던 최린이 받아줬던 것도 아니라, 나혜석은 최린에게 정조유린에 대한 배상 소송을 청구했지만 패소했다.
삶이 꼬여도 참 지랄같이 꼬이고 마냥 슬픈데 어쨌거나 그녀의 글을 읽고 그녀의 삶에 대해 찾아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삶의 불행이라는 건 개인 만의 문제나 책임이나 운과 우연의 문제일 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회와 제도와 통념과 주변 사람들의 인식과 그를 바탕으로 한 행동이 뒤섞여 나타난다. 항상 바닥으로 떨어지는 불안과 공포와 자책으로 사는 나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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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07-26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슬프다 ㅠㅠ 슬픕니다 ㅠㅠ 그때나 저때나 달라진 게 그닥 많지 않게 느껴지는 건 저뿐일까요? 유열님

반유행열반인 2020-07-26 11:42   좋아요 1 | URL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그나마 비슷한? 생각과 마음과 처지의 사람들이 어딘가 모여 슬픕니다 슬프다 할 수단이 늘어난 게 위안일까요. 이런 책도 읽을 수 있고.

2020-07-26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26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26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26 12: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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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6 12: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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