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eBook] 02 (영이) - 김사과 소설집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3년 3월
평점 :
-20200818 김사과.
그날 너무 이른 아침 도심에 도착했다. 나는 서울역부터 시청을 거쳐 광화문과 종로와 삼청동과 하여간 그 주변에 가면 늘 신난다. 어딘가의 중심에 있는 느낌인데 나는 거기 속해 있지 않고 거기에 별 기여도 하고 있지 않은데 그 공간을 빈둥대고 있는 게 좋다.
온라인으로 서울도서관 가입은 진작 해 놓았는데 회원증을 발급 받지 않았었다. 아직 아홉 시가 안 되어서 동그란 잔디광장을 바라보며 도서관 앞을 왔다 갔다 했다. 나처럼 문 여는 시간이 안 되었는데도 주위를 서성이는 사람이 몇 있어서 신기했다. 아홉시, 안에 있던 사람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도서관에 들어가는 데도 큐알코드를 찍으라고 했다.
플라스틱 카드로 된 회원증을 받았다. 이제 서울시도서관, 관악구도서관 두 개를 갖게 되었다. 사실 종이책은 거의 빌린 적이 없다. 회원증을 발급 받으면 전자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어서 온 것이다. 사실 도서관에 올 생각은 없었는데 열흘 전 쯤 잡은 약속이 장소가 바뀌고 시간은 너무 이르고 그런데 마침 도서관이 있어서 들어갔다.
도서관은 회원증 발급과 대출 반납 외의 업무는 모두 중단상태였다. 열람을 막으려고 테이블은 전부 폴리스라인 같은 차단줄로 막아 놓았다.
나는 도서관 일층과 이층을 오가다가 보고 싶던 책을 검색해 이층에서 책을 찾았다. 지난 주 개강한 소설 강좌에서 선생님이 꽤 오래 작가론 같은 걸 풀어준 김사과의 소설집이었다. 서가에 서서 책을 읽고 있는데 조그맣고 어려 보이는 사람이 책정보를 인쇄한 쪽지를 들고 헤매고 있었다. 흘긋 훔쳐보고 책이 있는 곳을 짚어주었다. 감사합니다, 하고 조그만 사람이 손을 뻗었지만 꼭대기칸 그 책에 손이 닿지 않았다. 강신재 작품집? 뭐 그런 거였는데. 나도 엄청 조그만 사람인데 그 사람보다는 조금 더 커서 까치발로 손을 뻗어 책을 꺼내주니 다시 감사합니다, 하고 책을 받아 사라졌다.
거의 한 시간 반 동안 서서 김사과의 등단작 영이를 읽었다. 그러고나서 책 뒤로 가서 역시 수업에 언급되었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를 읽었다. 두 작품 다 폭력과 폭언과 자기부정과 분열과 개박살나는 가족과 찢어지는 자아가 나온다. 두 번째 소설을 다 읽을 쯤 도서관 직원한테 저지 당했다. 선생님, 여기서 열람하시면 안 되니 대출을 해 주세요. 검색할 때 전자도서관에도 같은 책이 있는 걸 알고 종이책을 빌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회원증만 만들고 대출도 안 하고 나왔어.
그러고나서 코로나가 다시 퍼지고 있으니 조만간 도서관은 다시 닫지 않을까. 오늘 도서관 홈페이지를 보니 아직 안 닫았네.
예정된 약속은 생각보다 짧게 마주 앉아 커피 한 잔만 마시고 궁금하던 사람의 눈과 코와 입만 보고 악수를 나누고 끝이 났다. 내 맥주! 콩국수! 뭔지 모르지만 파스타 같은 요리!!!
점심은 버거킹에서 행사하는 치즈와퍼를 시켰다. 패티 겉이 온통 숯처럼 타서 검은 가루가 덕지덕지 묻어났다. 한입 먹으니 써서 다시 만들어주세요 했다. 햄버거를 다시 만들어 달라고 한 건 기억하기로는 처음 있는 날이다.
햄버거를 우걱우걱 꾸역꾸역 다 먹고는 양파냄새가 가시지 않은 입을 달고 작년 가을 처음 가 본 어떤 건물 앞 잔디밭을 둘러보았다. 소녀상이 놓여 있고, 그 옆에 수국 같은 꽃과 나무로 둘러싸인 벤치가 있어서 앉았다. 여름의 이곳은 처음이고, 아마도 마지막일 것이었다. 비가 그쳐 들고 온 우산은 짐만 되었다. 약간 습하고 더운데 바람이 가끔 선선 부는 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예정에 없는 만남 속에 처음보는 손바닥 한가운데 점, 바닥에 눌러죽은 비둘기의 깃털 흔적, 사우론의 본거지 같은 어어어엄청 높은 건물, 커피를 파는 중고서점 같은 걸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었지만, 다행히 나는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고, 나도 아직 잘 살아 있다. 잘못된 세상과 폭력과 괴롭힘과 분노와 그걸 다 무너뜨리고 싶어하는 마음으로부터 살짝 비껴 나간 채로 나는 그냥 소설을 읽을 뿐이다. 흠 나도 욕 잘 하는데. 이거 내가 고등학교 때 일기장에 써 놓은 것 같아. 그치만 지금은 이렇게 못 써.
나는 행복한데 불행하고 불행한데 행복하다. 엉망진창인 과거에 얽매여 있지만 극복하고 잊어버린 부분도 많다. 나는 점점 많은 걸 잊어가고 있다. 나는 진심으로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살 만한 존재가 되었다. 불안과 걱정과 그리움이 짓누르면 맥주를 한 캔 따고, 신경안정제를 두 배로 먹고, 몸을 괴롭히거나 즐겁게 하고, 길고 긴 일기나 길고 긴 편지를 쓴다.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눈으로 훑는다. 인터넷에서 장을 보고 옷을 사고 신발을 사고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사 마시거나 드리퍼에 원두가루를 넣고 뚝뚝 떨어지는 커피 방울을 바라보며 기다린다. 시간이 가길 기다린다. 내가 죽어 없어지고 세상이 망하길 기다린다. 그건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야겠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무료해서 이런 걸 읽고 아무말이나 끄적이고 조금 있다가는 써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사 먹고 2주차 강의에 들어가서 합평을 받을 것이다. 모든 게 아무 소용도 없고 그냥 시간을 보내는 데 지루함을 줄이기 위한 일이다. 왜 요즘에는 돈지랄이라는 말을 플렉스한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써도 늘지 않는 글을 배우겠다고 글쓰기 강좌를 수강하는 게 플렉스인지, 돈지랄인지, 나만의 시간을 갖는 일인지, 자기 계발인지, 지푸라기를 잡는 절박함인지, 그저 시간 때우기인지, 기타 선택지가 있는지, 내 마음이 골라잡기 나름인데 지금은 그냥 모르겠다.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애쓰고 싶지 않다. 아무말잔치나 해야지. 헤헤헤헤.
영이-분열된 영이와 개가 된 아빠
과학자-고추장 중독자와 거식증에 걸린 한나, 안나?
이나의 좁고 긴 방-대학 졸업하면 두부공장에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죽인 할머니가 자꾸 내 방에서 잠을 자네.
준희-전남친을 마주친다면. 더러운 아저씨와 모텔에서 섹스를 한 생각이 그때문에 떠오른다면.
나와 b-나와 비와 깡패와 본드와 실패한 화장
정오의 산책-선지자, 깨달은 자, 뭘 말하고 싶은지는 모르겠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나는 너무 착하게 살아와서 아줌마와 아이를 죽이고 아버지와 엄마를 죽이고 누나는 김치 범벅이 되어 밥을 계속 먹는다.
매장-아 이거 무슨 소설인지 까먹음. 아 서울 좆까 하는 글임.
아!!!!!전자책으로 읽다 만 책 빌려서 나머지를 읽었는데, 서울시 전자도서관은 내가 그동안 이용해 본 전자책 뷰어 중 역대급으로 거지 같다. 앱 리뷰에 가보면 시민의 분노가 응집된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불편함에 익숙해져서 결국 다 보긴 했지만, 공짜니까 참는다만, 귀찮게 시청 앞까지 가는 수고를 덜 수 있다만, 진짜 좆같이 만든 앱이다. 이거 개발한 업체에는 소송 걸어야 하고 담당자는 시말서 써야 한다. 차라리 알라딘 도서관이나 예스24도서관이나 교보도서관 같은데 위탁하지, 꼴에 자체 앱 개발하겠답시고 세금 꼴아박아서 아주 끔찍한 뭔가를 만들어 놓았다. 보던 책이 사라지고, 책갈피나 밑줄 긋기도 정상 동작 안 하고, 인터페이스도 구리고, 책 한장 넘기는데 막 로딩 표시가 화면 가운데에서 뱅글뱅글뱅글 몇 초 쯤 지나야 넘어간다.(항상 그러진 않고 가끔 정상 동작도 한다.) 터치 잘못하면 후루루루루룩 책장이 지마음대로 넘어감.
그래도 다른 데 없는 책 많다고 또 시불시불하면서 빌려보겠지 나새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