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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로즈마리 퍼트넘 통.티나 페르난디스 보츠 지음, 김동진 옮김 / 학이시습 / 2019년 8월
평점 :
-20200908 로즈마리 퍼트넘 통, 티나 페르난디스 보츠.
중첩되는 차별을 인식하고 지적하고 잘못된 세상을 바꾸는 다양한 시도들.
대학 생활의 팔할을 보낸 곳은 내가 전공한 과반 공동체가 아니라 노래패 동아리였다. 처음에는 음악을 하겠다고(작곡할 줄 아는 선배를 꼬셔서 곡을 받아 대학가요제에 나갈 테다!)가입했지만, 동아리 소개 때 공연만 하는 게 아니라 교양을 쌓는 세미나, 심포지엄 같은 것도 한다는 말에 더 끌렸다. (순진한 새내기여…)
스무살 짜리가 참석한 첫 세미나는 어찌나 유익하고 재미있던지. 나보다 겨우 한두살 위의 언니 오빠들이 어쩜 저렇게 똑똑하고 말 잘하고 열띤 토론, 친절한 설명, 마무리 요약까지 완벽한지. 동아리에 뼈를 묻기로 결심했다.
파시즘, 군사주의, 여성주의, 경제학, 철학, 문화, 언론 등등 다양한 주제의 책을 함께 읽고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같이 공부한 주제로 계절마다 공연 기획안과 대본을 만들고 선곡을 하고 합주를 하고 공연을 했다. 준비할 일은 늘 많고 바빠서 동아리 사람끼리 자주 모여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누구 집에 가서 놀거나 자고 영화랑 공연도 보러갔다.
주로 언니들이 동아리 운영에 주도권을 가진 듯 보였다. 언니들은 하나 같이 능력있고 똑똑하고 열심이었다. 아빠가 술먹고 때리는 걸 피해 수능 이후 가출을 밥먹듯이 했는데, 아빠가 나를 잡으러 학교 동아리방까지 찾아오면 선배들은 ‘너네 아버지 동방 오셨다 오늘은 학관 근처 오지 마’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주고 갈 곳 없는 나를 재워주고 먹여줬다. 오빠들은 대부분 예의발랐고 말과 행동을 삼갔다. 동아리 내부에 반성폭력 회칙을 정해 놓고 모일 때마다 강조했고, 성희롱적인 발언이나 가부장적인 뉘앙스만 나와도 단체로 조져놓았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ㅋㅋㅋ.
굳이 말하면 가모장제에 가까운 곳이었는데, 나중에야 그건 집단이나 시스템 특성이 아닌 언니들 몇 명의 카리스마로 지탱되던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선배들이 동아리를 모두 졸업하고 내가 집행부가 되었을 때 제일 나이 많은 여자 선배는 나 하나 남았고, 남자 동기 둘과 바글대는 남자 후배들 틈에서, 세미나는 하기 싫고 음악이나 하고 놀고 싶다는 바람을 잠재우는 게 제일 힘들었다. 합숙 세미나 때, 음주는 마지막 날 밤에 하자는 약속을 어기고 첫날부터 몰래 술과 치킨을 사다 먹은 남자애들과 대판 싸우게 되었다. 음주를 나무라자 소리지르고 대들면서 자기들이 애냐고, 내 말을 자르며 담배를 피워 무는 후배들에게 충격 받아서 구급차에 실려갔다… 진짜 나는 단체 생활 무능력자에 가까운 것 같다. 조직을 유지할 역량도 다수와 잘 지낼 능력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아끼던 후배들한테 막말 들은 일에 상처받으며 슬프게 동아리 말년을 마무리 했다...눈물 또르르…
직업을 갖게 되고, 외부 행사를 참여하면서 온갖 개저씨들의 희롱과 추행을 경험한 뒤에야 알았다. 내가 언니들의 보호 아래 그나마 고충 없는 나날을 경험했구나. 여자가 주도권을 가지고 무시되거나 대상화되지 않는 조직이란 정말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성평등과 거리가 먼 조직 안에서 할 수 있는 저항이란, 남들보다 규정집과 메뉴얼과 법령을 열심히 공부한 뒤 조목조목 따지기, 상냥하기보다는 씩씩한 척 센 척하며 말하기, 외모 가꾸지 않기(잠이나 더 자고 전투력을 키울 테다) 정도 였던 것 같다. 시간이 가면서 저절로 해결되는 부분도 있었다. 어린 여자애일 때는 그렇게 개무시하더니 나이 한 살 두 살 먹어가고 경력이 쌓일 수록 조심스럽게 대하는 게 느껴졌다. 첫 번째 직장보다 두 번째 직장이 조금 더 민주적인 분위기였고 사람들이 예의 바른 탓일 수도 있겠다. 일과 가정의 양립에 관한 정책이 전보다 나아진 것을 체감하긴 하지만 아직도 바뀌어야 할 조직 문화, 제도, 인식이 넘친다. 맘충, 노키즈존이라는 말은 정말 없어졌으면 좋겠다. ㅠㅠ 차라리 그냥 벌레 같은 인간이라고 욕해… 엄마와 아이를 싸잡아 하는 혐오는 존재와 놓인 상황 자체를 부정당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를 준다.
연초에 읽은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에서 저자가 말하는 페미니즘의 정의는 이랬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
성차별주의와 착취와 억압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기 위해 열심히 말하고 글쓰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지지한다. 그렇다면 나는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말로 페미니스트를 붙이는 것은 망설여진다. 그러기에는 아는 것도 말할 수 있는 것도 행동하는 바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잘 모른다는 말을 하며 물러나고, 잘 몰라서 그러지, 공부좀 해, 하는 말에 주눅드는 게 어느 순간 짜증났다. 여성의 삶에 관한 문학 작품이나 산문집 같은 걸 조금씩 찾아보고 있다. 페미니즘의 다양한 관점에 대해 한 번쯤 봐 두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페미니즘을 퀴어링’에서 언급된 로즈마리 퍼트넘 통의 이 책을 읽기로 했다.
페미니즘 안에서도 시대에 따라, 도움을 받는 이론 배경에 따라 무척 다양한 관점들이 존재하고, 그들끼리 서로의 한계와 개선점을 논의하며 변화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유주의, 급진주의(자유의지론vs문화적 관점),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유색인종(미국 내 또는 제3세계-전 지구, 포스트식민주의, 초국가주의), 정신분석, 돌봄 중심, 에코, 실존주의,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제3의 물결, 퀴어 페미니즘까지- 각자가 놓인 위치에 따라, 주목하는 지점이 다 달랐다. 여성 억압과 차별이라는 공통의 관심에다 가부장제, 자본의 착취, 계급 문제, 인종 문제, 식민주의와 선진국의 저개발 착취, 거기에다 심리적 분석과 여성에게 요구되는 역할, 환경과 지구에 대한 관심과 인간종 중심적 사고, 존재 자체의 불안과 언어가 만드는 세상, 권위의 해체, 우습게 만들기, 다양성의 강조, 성소수자의 젠더까지 중첩된 문제는 끝도 없이 다양했다. 아마 시대가 갈수록 그런 교차되는 문제나 입장은 더 늘어갈 것이다. 다음 개정판에서는 정말 제4의 물결을 다룬 장이 추가될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이렇게나 다양한 이유로 다른 존재, 낮은 존재 취급 받고 소외 받고 고통 받을 수 있구나, 참 지겹게도 안 바뀌는 세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특별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급진주의 내에서도 자유의지론과 문화 페미니즘이 다양한 지점에서 생각을 달리하고 있는 걸 짚을 때였다. 굳이 말하자면 저는 급진주의 자유의지론 페미니즘의 입장에 더 동조하게 되는군요… 자세한 설명은 본문의 표 하나로 한 방에 확인하십시오…(맨 아래 이미지 첨부합니다…)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옛날에도 그랬지만 읽을 때마다 졸렸다. 타도 자본주의 만으로 이상 세계가 올 리가 없잖아... 그래서 소련과 중공과 북한 여성들의 삶은 얼마나 나았었나 나아졌나 모르겠다. (이쯤에서 누가 때리러 올 것 같고…)
페미니즘 시작과 발달 과정, 배경으로 삼는 이론 대부분이 유럽, 미국에서 나왔고 운동 참여 주체도 백인 지식인층 여성부터 시작한 터라 그런 한계점을 짚고 가는 일이 중요한 것 같다. 페미니즘의 목소리에 중년 여성들, 어머니 세대에서 더 반발하는 것도 어쩌면 그분들이 겪은 어려움과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엄마는 왜 그러고 미련하게 사세요 하면서 젊고 낯설고 새로운 이야기를 불친절하게 디밀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 처럼 아시아, 한국의 페미니즘의 관점과 주장들을 일목요연 정리한 책도 있을 것 같긴 한데. 뭔가 정리를 할 만큼 탄탄한 이론과 이슈가 있긴 할까, 그만한 파장이 있었나 하는 것조차 나의 무지와 자기비하 같은 거겠지. (이쯤에서 또 누군가 단체로 때리러 올 것 같고…)
제일 흥미 있는 부분은 9장의 실존주의,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과 10장의 제3물결, 퀴어 페미니즘을 다룬 내용이었다. 현대철학은 개론서 같은 데서 볼 때마다 아 하나도 모르겠는데 뭔가 막 다 그럴싸 해, 맞는 말 같아, 했는데 이 책에서 사르트르, 보부아르, 미셸 푸코, 주디스 버틀러 이런 사람들이 여성 억압과 타자화와 권력 문제 어쩌고 하는 말들도 뭔가 와 닿았다. 자기들끼리도 부딪히는 이야기가 많은 데도 얘 말도 쟤 말도 맞는 거 같고 얘들을 비판하는 주장들도 일리가 있어 보였다. 기존과 다른 새로운 관점으로 문제의 원인을 짚고, 다양성의 범위를 넓혀가는 일은 언제나 매력있어 보인다. 젊은 세대들에게 설득력을 가지려면 쿨병 같은 것도 좀 필요하지 않나 싶었다. (그런 흐름을 진지하지 못하다고 때리는 사람들 이 책에 많이 나온다…)
책 읽던 중간에, 함께 읽을 책 목록을 슬쩍 둘러 봤는데, 읽은 게 딸랑 두 개 밖에 없었다… 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올해 작고하신 엘리자베스 워첼 ‘비치’! 엘리님아, 님이 제3물결 페미니스트였어? 왜 난 몰랐지...모르고 읽었나…마약 없고 남자 없고 가정 불화 걱정 없는 세상에서 먼지 상태로 편히 쉬세요...
읽고 싶은 책도 생겼다. 페미니즘 관점에서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한 소설들이 흥미로웠다. 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이 책 읽던 중간에 샀다… 마지 피어시의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는 왜 절판이야...왜 전자책도 없어...일단 중고알리미 걸어 둠...그리고 주디스 버틀러 ‘권력의 정신적 삶’ 이건 전자 도서관에 있으니 아주아주 심심할 때 읽어보기로 했다.
전자책 페이지 숫자 보고 엄청 쫄았는데 매일 차근차근 한 장씩 읽었더니 열하루만에 다 봤다. 전부다 확실하게 이해하고 가자, 하는 마음으로 읽은 건 아니라 얼마나 소화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밑줄은 겁나 많이 쳐놨다. 나중에 생각나면 다시 찾아봐야겠다. 내 삶을 더 나아지게 할 답까지는 구하지 못했어도 내 삶이 힘든 이유는 조금이나마 설명해주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조금씩 더 알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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