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에게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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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2 김금희.

앙골아주.

김금희의 소설집을 처음 본 게 겨우 열세 달 전이다. 그때 반월이라는 소설을 보고 생각했다. 이제 편지를 쓰는 사람은 소설 속에 밖에 남지 않은 것 같다고. 선글라스 쓰고 섬을 누비며 우는 주인공을 보고 나도 그러고 싶다고. 이후 나는 무수히 많은 편지를 써 보내거나 보내지 않았다. 눈병에 걸려 저절로 누런 눈물이 줄줄 흐르고 햇볕에 눈이 시어서 선글라스를 샀다. 정작 선글라스를 벗을 무렵 울 일이 많았는데, 렌즈에 소금물이 묻은 채 굳으면 닦아내기 영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예약 구매를 해 놓고 한참 만에 받았다. 책 표지 뒷날개에 소개된 김금희의 책을 일 년 간 다 봤다.
책 앞머리를 읽을 때, 얇게 썬 동치미 한 조각 씹어 먹는 것 마냥 속이 시원했다. 아이참, 이제 나는 단문병에 걸렸나 봐. 물론 내내 단문은 아니고 소설이 진행될수록 생각도 기억도 많아지고 문장도 길어진다. 쉽게 읽히는 문장이 결코 쉽게 쓰이지 않는 걸 안다. 쉽지 않은 겨울과 봄과 여름을 보내며 그럼에도 쉬지 않고 쓰는 작가의 인스타그램에 몰래 구경하러 가곤 했다. 뭔가 이렇게 쉽게 받아 읽어도 되나 싶어 저절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화자인 이영초롱은 어린 시절 고모가 의사로 일하는 고고리섬과 제주 본섬에서 몇 년 간을 보냈다. “우리집이 완전히 망해버렸습니다.” 할망신에게 인사하며 해녀 할머니와 함께 사는 복자와 친해졌다.
어릴 때 친했던 친구들 얼굴이 여럿 떠오르지만 그 아이들과 멀어진 이유나 과정은 대부분 기억나지 않는다. 영초롱은 복자와 멀어진 일을 뚜렷이 알고 있다. 이선고모 집에 임공이 자주 온다는 걸 감춰달라는 복자의 부탁을 어기고 영초롱은 어른들에게 사실대로 말한다. 속이 상한 복자는 영초롱이 고모가 이규정에게 쓴 편지를 훔쳐봤다고 고모에게 이른다. 써놓고 봐도, 저들이 돌아볼 때도 정말 그게 별일이었나, 싶었을 일이다. 그러나 어떤 관계들은 작은 어그러짐과 틀어짐으로도 되돌리지 못하고 저만큼 멀어진다.
영초롱은 복자와 사이가 나빠진 뒤 복자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반복해서 썼다. 고오세는 영초롱이 뭍으로 떠난 뒤 영초롱에게 닿지 않을 잘못된 주소로 열 번 넘게 편지를 부쳤다. 고모는 감옥에 있는 규정에게 답장 받지 못하는 편지를 오래도록 부치다 말다 했다. 그런 부분을 읽을 때마다 뜬금없이 눈물이 핑핑 거렸다.
부모는 망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판사가 된 영초롱은 재판 중 욕을 한 뒤 제주도로 발령(또는 좌천)된다. 주인공의 직업을 판사로 하면 쓰기 참 어려웠을 것 같은데, 쉬운 길 택하지 않은 김금희가 더 좋았다. 더구나 재판 중 욕하는 판사라니. 판타지에 가깝지만 이런 거 난 왜 좋지. 고고리섬에 돌아온 영초롱은 어릴 때 자신을 좋아했던 고오세, 그리고 복자와 재회한다.
제주는 4.3.항쟁으로 많은 사람의 죽음을 묻은 섬이다. 그곳 의료기관에 일하던 간호사들이 안전 장치 없이 독한 약을 갈고 수당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초과근무를 하다 유산을 하거나 아픈 아이를 낳았다. 복자도 그 중 하나가 되었고, 영초롱이 관련 재판을 맡게 되었다. 가족과 어려서 떨어진 경험 때문인가, 이방인처럼 섬 사람들 사이로 녹아들지 못한 때문인가, 원래 그렇게 생겨먹어서 그런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영초롱이는 고집도 세고 말도 거르지 않고 막 던지고 마주한 사람의 진의를 믿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자기 앞의 사람이 자신을 믿지 못한다 여기며 서러워하고 막상 자기 속을 이야기해야 할 때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마지막에는 봉쇄된 땅에 가족도, 복자도, 오세도, 옛 애인 윤호도 없이 영초롱이 홀로 남아있다.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우리의 고립을 그대로 보여줘서 서글픈 게 한 가지 이유 같다. 영초롱이가 끝까지 가지 못하고 잠들듯 쉬어야 했던 것, 자기가 나서지 않아도 이길 수 있는 힘을 멀리서 지켜보는 일 때문인 것도 같다. 모든 게 내 뜻대로만 되는 건 아니니까 내려놓으라고 타이르는 말처럼 들렸다.

제주의 너무 센 바람과, 돌덩이 해안을 때리는 거친 파도와, 들불 번지는 오름과, 다른 세상 말 같으면서도 뜻이 알아지는 제주 사람들의 말과, 딱새우와 꽁치김밥과 다금바리를 파는 식당들과, 노란 유채밭과,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기자기한 스낵바 같은 걸 제주에 가 본지 20년 된 내게 선물처럼 건네준 장면들이 좋았다. 점점 잘 쓰게될 것 같다고, 기대하고 믿으며 기다린 작가가 오랜만에 편지처럼 보내온 소설을 나는 넙죽넙죽 잘 받아 먹었다. 내게도 흰 개에게 눈썹을 그려주고 농담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으면, 그래서 복자에게, 하고 편지를 쓸 수 있었으면 좋았겠구나.

+밑줄긋기. 나도 모르게 울멍울멍 거린 부분만 옮겨왔다.
-복자에게. 규정에게. 영초롱에게. 또 누군가에게. 나는 이제 편지를 쓰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건 마음을 키울 때나 유용하지 그러지 않아야 할 때는 섣부르고 끝없는 자기대화가 자기비하와 자격지심만 만들어낸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담담한 마음으로 다정한 안부를 건넬 수 있으면 좋겠다.

‘왜 뭔가를 잃어버리면 마음이 아파?
왜 마음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렇게 아파?
나는 일기장에 이런 말들을 쓰면서 하루를 마감했다. 그러다 12월에 접어들어서부터는 복자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처음에는 손으로 쓰려고 했지만 그렇게 해서 고개를 숙이면 눈물이 너무 쉽게 나는 것 같아서 허리를 반듯이 세우고 고모의 전동타자기로 쓰기로 했다. 가장 먼저 자판으로 친 말도 복자에게, 였고 가장 빈번하게 쓴 말도 복자에게, 였다.
복자에게,
복자야 안녕. 오늘 붓글씨 수업은 잘했니? 오늘 너가 벼루를 가져오지 않은 것 같아서 내가 빌려주고 싶었는데 네 짝이 빌려주었더라.
복자에게,
복자야 안녕, 성탄절에 요기 해왕선사에서 선물을 준다는데 거기를 갈 생각이 있니? 그런데 왜 절에서 성탄절에 선물을 준다는 것인지 아니? 정말 웃기고 웃긴 농담 같지.
복자야 안녕, 가게 될 중학교는 마음에 드니? 너가 엄마가 있는 제주시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어서 기뻐, 이제 엠비시 공개방송 매일 갈 수 있겠어.
복자야, 안녕?
복자에게,
복자야, 할망이 너가 잘 안 온다고 뭐라 하시더라.
제순이는 이제 눈썹이 없어, 다 지워지고 안 특별해졌어.
복자야,
복자야, 안녕,
복자에게,
복자야, 나는 이제 서울로 갈 것 같아.
그 많은 편지들은 부쳐지지 않고 모두 폐기되었다.’(100-101)

-오세가 영초롱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이 나는 너무 아팠다.

“그래. 세상이 그럴 수 있지. 세상이 그렇게 보이고 그렇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 그런데 영초롱아. 너가 보는 것이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늘 생각했으면 한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에 불과하다고 네가 내게 멋진 말을 알려주지 않았니. 그렇다면 법을 통해 볼 수 있는 인간의 면면도 최소한에 불과한 거야. 회사는 자본이니까 너가 말한 대로 흘러갈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나란 사람도 그렇게 흘러간다고 너가 말할 수 있니? 주민들 중에 이참에 땅이고 집이고 다 비싸게 팔고 가버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하지만 섬을 지키기 위해 연륙교 착공을 힘 모아 저지한 일은 어떻게 설명할 거니? 몸 지지러 갔다가도 섬의 고넹이돌을 단번에 알아본 그 마음은 어떻게, 싹 무시하면 되는 일이니? 너는 최소한의 도덕을 다루지만 나에게는 너가 최선의 사람이라서 나는 늘 너가 좋았어.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도 들어. 어쩌면 한번 기울어진 채로 시작된 관계는 복구가 되지 않을지도.”(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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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2 1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2 1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eBook] 돌이킬 수 있는
문목하 지음 / 아작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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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1 문목하. 읽다 말았어요.

SF장르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입에 오르고 별다섯 주는 이웃도 있어 읽었다.
OSMU를 고려하고 쓴 건지 영화나 드라마 느낌이 많이 났다. 세세한 장면 묘사는 나름 작가의 특색인 것 같지만...
진부한 표현, 흥행하는 한국 영화 특유의 느글거리는 대화체가 떠오르는 인물의 발화들이 힘들었다. 앞에서 비원이 드러나기 전에 윤서리가 경찰로서 범죄조직으로 비원을 관리하다 저지른 실수 두 가지를 자세히 안 다루고 추상적으로 얼버무리는데 거기서부터 집중력이 온통 떨어졌다.
그래도 참고 읽어보자, 익숙해지면 재미가 있겠지, 이 소설의 장점이 있겠지...꾸역꾸역꾸역 ㅋㅋㅋ
싱크홀과 초능력자들의 생존 투쟁, 권력 투쟁, 세력 간 다툼, 더구나 수백명의 생존자 겸 초능력자들이 소수의 우월한 지도자의 지배에 휘둘리고 그 안에 통제되고 제거되고...으악 내가 제일 싫어하는 세계관. 이런 것에 흥미로워 할 사람도 있겠지만 즐기지 못할 독서는 그만두기로 했다.
소재와 설정-인간을 뛰어넘는 능력, 그들끼리의 다툼, 초인이 죽으면 그 능력이 주변 누군가에게 전이되는 등-은 장강명이 쓴 호모도미난스와 아주 유사했다. 문장이나 구성력은 장강명 소설 쪽이 나 읽기에는 훨씬 나았다.
아작 출판사의 SF 소설을 네 권 시도 했고 그 중 두 권은 좋아하던 작가인데도 힘들게 읽었고, 두 권은 읽다 포기했다. 책 만듬새(편집이나 교정교열)가 미흡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내가 이 장르에 애착이 없어서일수도. 미련하게 참고 읽지 말기로 해요. 좋아하는 책만 읽기로 해요. 좋은 것만 생각하기로. 그러기에도 부족한 시간. 짧은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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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09-11 1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것만 읽기에도 시간은 짧죠ㅎㅎ 저는 반유행열반인님 리뷰를 읽고 장강명 작가님의 책에 영업 당하고 갑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9-11 18:05   좋아요 1 | URL
아이참 이러고서 장강명 별로야 ㅎㅎㅎ하실지도 몰라요. 작가의 첫 책이라고 하니 이 두께에 설정과 인물과 상상은 나름 참신한 부분도 있는데 제가 대화와 문장을 삭일 소화력이 없었어요. 저의 내공 부족입니다...

하나 2020-09-11 18: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짱 좋아요! “좋아하는 책만 읽기로 해요.” 222 “좋은 것만 생각하기로.”222 “그러기에도 부족한 시간. 짧은 계절” 222 헤헤 좋아하는 일만 가득하신 주말 보내세요 ^^

반유행열반인 2020-09-11 18:47   좋아요 1 | URL
하나님도 좋아요ㅎㅎㅎ좋은 주말 보내세요. 저도 웰컴홈 샀는데 루시아 벌린 세 권 다 삼 ㅋㅋㅋ저는 천천히 아껴 볼게요. (이러고 또 별로야 할지도 ㅋㅋㅋㅋ)

하나 2020-09-11 19:09   좋아요 1 | URL
ㅋㅋㅋ 저도 못 참고 일단 세권 다 샀어요. 저도 천천히 아껴 보고 있는데 계속 좋았으면 좋겠네요 :) 저도 요즘 변덕이 심해서 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님도 좋아요222

막시무스 2020-09-11 1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강명과 김중혁 작가에 관심이 가는데 혹시 추천해 주실 만한 작품이 있나요?ㅎ

반유행열반인 2020-09-11 20:05   좋아요 2 | URL
아ㅎㅎ제가 뭘 추천할 깜냥은 안 되어 송구스럽지만...장강명은 이번 신작 에세이 빼고 다 봤는데 댓글부대랑 우리의 소원은 전쟁이 잘 읽히고 재미있었어요.
김중혁은 소설은 딱 한 권 오래 전에 나온 악기들의 도서관 봤고 에세이는 무엇이든 쓰게 된다 읽었는데 그래서 잘 모르는 작가지만 이 작가는 산문보다는 소설 쪽이 훨 나았습니다. 반대로 김중혁 작가 친구라는 김연수 작가는 제 취향에는 소설보다는 산문집이 훠어얼 좋았습니다. (김연수 작가님 팬들 때리러 오신다...)

반유행열반인 2020-09-11 20:13   좋아요 1 | URL
그런데 막시무스님은 묵직한 고전 즐겨 읽으시는데 그에 비하면 가볍습니다 ㅎㅎㅎ장강명 작가는 그냥 기분전환용으로 후다닥 읽기에 좋게 잘 쓰시고요. (그래서 제가 두 달 만에 그 작가 책 여덟 권을 읽은 적이 있다죠...) 읽다 보니 질려서 안 봐 하면서도 또 신작 나오니 봐 말아 하네요. ㅎㅎㅎ 김중혁 작가는 너무 오래 전 소설을 봐서 (그것도 잘 쓰시긴 했는데) 요즘은 어떤 글을 쓰시는지 저도 궁금해져요. ㅎㅎㅎ

막시무스 2020-09-11 20:17   좋아요 2 | URL
추천 정말 감사드려요!ㅎ 책 관련 팟캐를 즐겨 듣는데 두분이 입담도 좋으시면서 깊이가 있어서 관심이 많이 갔었거든요!ㅎ 좋은 글에 항상 감사드리구요, 즐거운 주말되십시요!ㅎ

반유행열반인 2020-09-11 20:31   좋아요 1 | URL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막시무스님도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빌어요.

Yeagene 2020-09-11 2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는 호불호가 진짜 극과 극이네요...ㅎㅎㅎ
처음에 본 어떤 분은 진짜 심하게 칭찬하시는 거에요..김초엽 좋아하는 사람들은 문목하를 몰라서 그러는 거라는둥... ㅎㅎㅎ
두번째로 리뷰 본 분도 엄청 극호였고...ㅎㅎㅎ
세번째 이웃님과 열반인님은 불호군요..전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읽지 않을 것 같아요.것보다,<한국이 싫어서>만 읽어본 장강명 작가의 다른 책들에 눈이 가네요.<한국이 싫어서>는 그냥저냥이었는데 장강명 작가 호평이 많아서요..그냥 넘기긴 굉장히 아쉬웠거든요..위에 추천해주신 책들 읽어보겠슴다!:)

반유행열반인 2020-09-11 21:48   좋아요 0 | URL
가볍고 영화 같은 느낌은 이 책과 비슷한데 조금 더 오래 쓴 사람의 공력 차이 정도입니다. ㅎㅎㅎ 문목하 정말 좋다는 분들 많아서 망설이다 읽었는데 역시나 난 아니구나 했어요 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0-09-11 21:49   좋아요 0 | URL
그리고 문장은 김초엽이 문목하보다 훨씬 예쁘고 깔끔하지요 ㅎㅎㅎ저는 그 한국영화의 대사와 연기 같은 대화체를 그대로 문장으로 옮겨온 걸 안 좋아해요.
 
[eBook]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로즈마리 퍼트넘 통.티나 페르난디스 보츠 지음, 김동진 옮김 / 학이시습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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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8 로즈마리 퍼트넘 통, 티나 페르난디스 보츠.

중첩되는 차별을 인식하고 지적하고 잘못된 세상을 바꾸는 다양한 시도들.

대학 생활의 팔할을 보낸 곳은 내가 전공한 과반 공동체가 아니라 노래패 동아리였다. 처음에는 음악을 하겠다고(작곡할 줄 아는 선배를 꼬셔서 곡을 받아 대학가요제에 나갈 테다!)가입했지만, 동아리 소개 때 공연만 하는 게 아니라 교양을 쌓는 세미나, 심포지엄 같은 것도 한다는 말에 더 끌렸다. (순진한 새내기여…)
스무살 짜리가 참석한 첫 세미나는 어찌나 유익하고 재미있던지. 나보다 겨우 한두살 위의 언니 오빠들이 어쩜 저렇게 똑똑하고 말 잘하고 열띤 토론, 친절한 설명, 마무리 요약까지 완벽한지. 동아리에 뼈를 묻기로 결심했다.
파시즘, 군사주의, 여성주의, 경제학, 철학, 문화, 언론 등등 다양한 주제의 책을 함께 읽고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같이 공부한 주제로 계절마다 공연 기획안과 대본을 만들고 선곡을 하고 합주를 하고 공연을 했다. 준비할 일은 늘 많고 바빠서 동아리 사람끼리 자주 모여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누구 집에 가서 놀거나 자고 영화랑 공연도 보러갔다.
주로 언니들이 동아리 운영에 주도권을 가진 듯 보였다. 언니들은 하나 같이 능력있고 똑똑하고 열심이었다. 아빠가 술먹고 때리는 걸 피해 수능 이후 가출을 밥먹듯이 했는데, 아빠가 나를 잡으러 학교 동아리방까지 찾아오면 선배들은 ‘너네 아버지 동방 오셨다 오늘은 학관 근처 오지 마’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주고 갈 곳 없는 나를 재워주고 먹여줬다. 오빠들은 대부분 예의발랐고 말과 행동을 삼갔다. 동아리 내부에 반성폭력 회칙을 정해 놓고 모일 때마다 강조했고, 성희롱적인 발언이나 가부장적인 뉘앙스만 나와도 단체로 조져놓았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ㅋㅋㅋ.
굳이 말하면 가모장제에 가까운 곳이었는데, 나중에야 그건 집단이나 시스템 특성이 아닌 언니들 몇 명의 카리스마로 지탱되던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선배들이 동아리를 모두 졸업하고 내가 집행부가 되었을 때 제일 나이 많은 여자 선배는 나 하나 남았고, 남자 동기 둘과 바글대는 남자 후배들 틈에서, 세미나는 하기 싫고 음악이나 하고 놀고 싶다는 바람을 잠재우는 게 제일 힘들었다. 합숙 세미나 때, 음주는 마지막 날 밤에 하자는 약속을 어기고 첫날부터 몰래 술과 치킨을 사다 먹은 남자애들과 대판 싸우게 되었다. 음주를 나무라자 소리지르고 대들면서 자기들이 애냐고, 내 말을 자르며 담배를 피워 무는 후배들에게 충격 받아서 구급차에 실려갔다… 진짜 나는 단체 생활 무능력자에 가까운 것 같다. 조직을 유지할 역량도 다수와 잘 지낼 능력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아끼던 후배들한테 막말 들은 일에 상처받으며 슬프게 동아리 말년을 마무리 했다...눈물 또르르…

직업을 갖게 되고, 외부 행사를 참여하면서 온갖 개저씨들의 희롱과 추행을 경험한 뒤에야 알았다. 내가 언니들의 보호 아래 그나마 고충 없는 나날을 경험했구나. 여자가 주도권을 가지고 무시되거나 대상화되지 않는 조직이란 정말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성평등과 거리가 먼 조직 안에서 할 수 있는 저항이란, 남들보다 규정집과 메뉴얼과 법령을 열심히 공부한 뒤 조목조목 따지기, 상냥하기보다는 씩씩한 척 센 척하며 말하기, 외모 가꾸지 않기(잠이나 더 자고 전투력을 키울 테다) 정도 였던 것 같다. 시간이 가면서 저절로 해결되는 부분도 있었다. 어린 여자애일 때는 그렇게 개무시하더니 나이 한 살 두 살 먹어가고 경력이 쌓일 수록 조심스럽게 대하는 게 느껴졌다. 첫 번째 직장보다 두 번째 직장이 조금 더 민주적인 분위기였고 사람들이 예의 바른 탓일 수도 있겠다. 일과 가정의 양립에 관한 정책이 전보다 나아진 것을 체감하긴 하지만 아직도 바뀌어야 할 조직 문화, 제도, 인식이 넘친다. 맘충, 노키즈존이라는 말은 정말 없어졌으면 좋겠다. ㅠㅠ 차라리 그냥 벌레 같은 인간이라고 욕해… 엄마와 아이를 싸잡아 하는 혐오는 존재와 놓인 상황 자체를 부정당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를 준다.

연초에 읽은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에서 저자가 말하는 페미니즘의 정의는 이랬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
성차별주의와 착취와 억압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기 위해 열심히 말하고 글쓰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지지한다. 그렇다면 나는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말로 페미니스트를 붙이는 것은 망설여진다. 그러기에는 아는 것도 말할 수 있는 것도 행동하는 바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잘 모른다는 말을 하며 물러나고, 잘 몰라서 그러지, 공부좀 해, 하는 말에 주눅드는 게 어느 순간 짜증났다. 여성의 삶에 관한 문학 작품이나 산문집 같은 걸 조금씩 찾아보고 있다. 페미니즘의 다양한 관점에 대해 한 번쯤 봐 두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페미니즘을 퀴어링’에서 언급된 로즈마리 퍼트넘 통의 이 책을 읽기로 했다.

페미니즘 안에서도 시대에 따라, 도움을 받는 이론 배경에 따라 무척 다양한 관점들이 존재하고, 그들끼리 서로의 한계와 개선점을 논의하며 변화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유주의, 급진주의(자유의지론vs문화적 관점),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유색인종(미국 내 또는 제3세계-전 지구, 포스트식민주의, 초국가주의), 정신분석, 돌봄 중심, 에코, 실존주의,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제3의 물결, 퀴어 페미니즘까지- 각자가 놓인 위치에 따라, 주목하는 지점이 다 달랐다. 여성 억압과 차별이라는 공통의 관심에다 가부장제, 자본의 착취, 계급 문제, 인종 문제, 식민주의와 선진국의 저개발 착취, 거기에다 심리적 분석과 여성에게 요구되는 역할, 환경과 지구에 대한 관심과 인간종 중심적 사고, 존재 자체의 불안과 언어가 만드는 세상, 권위의 해체, 우습게 만들기, 다양성의 강조, 성소수자의 젠더까지 중첩된 문제는 끝도 없이 다양했다. 아마 시대가 갈수록 그런 교차되는 문제나 입장은 더 늘어갈 것이다. 다음 개정판에서는 정말 제4의 물결을 다룬 장이 추가될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이렇게나 다양한 이유로 다른 존재, 낮은 존재 취급 받고 소외 받고 고통 받을 수 있구나, 참 지겹게도 안 바뀌는 세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특별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급진주의 내에서도 자유의지론과 문화 페미니즘이 다양한 지점에서 생각을 달리하고 있는 걸 짚을 때였다. 굳이 말하자면 저는 급진주의 자유의지론 페미니즘의 입장에 더 동조하게 되는군요… 자세한 설명은 본문의 표 하나로 한 방에 확인하십시오…(맨 아래 이미지 첨부합니다…)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옛날에도 그랬지만 읽을 때마다 졸렸다. 타도 자본주의 만으로 이상 세계가 올 리가 없잖아... 그래서 소련과 중공과 북한 여성들의 삶은 얼마나 나았었나 나아졌나 모르겠다. (이쯤에서 누가 때리러 올 것 같고…)
페미니즘 시작과 발달 과정, 배경으로 삼는 이론 대부분이 유럽, 미국에서 나왔고 운동 참여 주체도 백인 지식인층 여성부터 시작한 터라 그런 한계점을 짚고 가는 일이 중요한 것 같다. 페미니즘의 목소리에 중년 여성들, 어머니 세대에서 더 반발하는 것도 어쩌면 그분들이 겪은 어려움과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엄마는 왜 그러고 미련하게 사세요 하면서 젊고 낯설고 새로운 이야기를 불친절하게 디밀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 처럼 아시아, 한국의 페미니즘의 관점과 주장들을 일목요연 정리한 책도 있을 것 같긴 한데. 뭔가 정리를 할 만큼 탄탄한 이론과 이슈가 있긴 할까, 그만한 파장이 있었나 하는 것조차 나의 무지와 자기비하 같은 거겠지. (이쯤에서 또 누군가 단체로 때리러 올 것 같고…)
제일 흥미 있는 부분은 9장의 실존주의,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과 10장의 제3물결, 퀴어 페미니즘을 다룬 내용이었다. 현대철학은 개론서 같은 데서 볼 때마다 아 하나도 모르겠는데 뭔가 막 다 그럴싸 해, 맞는 말 같아, 했는데 이 책에서 사르트르, 보부아르, 미셸 푸코, 주디스 버틀러 이런 사람들이 여성 억압과 타자화와 권력 문제 어쩌고 하는 말들도 뭔가 와 닿았다. 자기들끼리도 부딪히는 이야기가 많은 데도 얘 말도 쟤 말도 맞는 거 같고 얘들을 비판하는 주장들도 일리가 있어 보였다. 기존과 다른 새로운 관점으로 문제의 원인을 짚고, 다양성의 범위를 넓혀가는 일은 언제나 매력있어 보인다. 젊은 세대들에게 설득력을 가지려면 쿨병 같은 것도 좀 필요하지 않나 싶었다. (그런 흐름을 진지하지 못하다고 때리는 사람들 이 책에 많이 나온다…)

책 읽던 중간에, 함께 읽을 책 목록을 슬쩍 둘러 봤는데, 읽은 게 딸랑 두 개 밖에 없었다… 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올해 작고하신 엘리자베스 워첼 ‘비치’! 엘리님아, 님이 제3물결 페미니스트였어? 왜 난 몰랐지...모르고 읽었나…마약 없고 남자 없고 가정 불화 걱정 없는 세상에서 먼지 상태로 편히 쉬세요...
읽고 싶은 책도 생겼다. 페미니즘 관점에서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한 소설들이 흥미로웠다. 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이 책 읽던 중간에 샀다… 마지 피어시의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는 왜 절판이야...왜 전자책도 없어...일단 중고알리미 걸어 둠...그리고 주디스 버틀러 ‘권력의 정신적 삶’ 이건 전자 도서관에 있으니 아주아주 심심할 때 읽어보기로 했다.

전자책 페이지 숫자 보고 엄청 쫄았는데 매일 차근차근 한 장씩 읽었더니 열하루만에 다 봤다. 전부다 확실하게 이해하고 가자, 하는 마음으로 읽은 건 아니라 얼마나 소화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밑줄은 겁나 많이 쳐놨다. 나중에 생각나면 다시 찾아봐야겠다. 내 삶을 더 나아지게 할 답까지는 구하지 못했어도 내 삶이 힘든 이유는 조금이나마 설명해주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조금씩 더 알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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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09-08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너무나도 재미 없어서 하루에 한 챕터도 읽지 못해내고 있습니다....
대단하시네요. 당해낼 수 없는 끈기. 공부 잘 하는 사람은 다 이유 있다더니.....

책을 아예 다 퍼담으셨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출판사에서 때찌하러 올 지도?

반유행열반인 2020-09-08 23:38   좋아요 0 | URL
아 맞다 내가 읽을라고 퍼놓은 거 너무 긁어다 붙였네 하고 이제 지울라고요 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9-08 23:42   좋아요 0 | URL
때찌 무서워서 다 지움 ㅋㅋㅋ

공쟝쟝 2020-09-08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야 이언니 이거 다읽으면 어떡해??? (이제 펴는 자..)

반유행열반인 2020-09-08 23:39   좋아요 0 | URL
재미없어서 얼른 보고 딴 거 볼라고...

공쟝쟝 2020-09-08 23:46   좋아요 1 | URL
나 서론 방금 다 읽었는데 재밌눈디😚

반유행열반인 2020-09-08 23:51   좋아요 1 | URL
재밌다가 없다가없다가없다가 있다가 없다가 해요. 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9-08 23:51   좋아요 1 | URL
원래 두꺼운 책은 서론과 결론이 제일 재밌음다

공쟝쟝 2020-09-08 23:53   좋아요 1 | URL
서론과 결론만 재밌다는 스포일러 ㅋㅋㅋㅋ 어쩐지 자유주의 펴자마자 잠이 온다디리리로로옹🥱 잘자용..!

반유행열반인 2020-09-08 23:54   좋아요 1 | URL
아 이미 독후감에 썼지만 급진주의, 포스트식민주의, 실존주의와 친구들, 제3물결과 퀴어 친구들 여기가 재밌었습니다. 잘자융

공쟝쟝 2020-09-09 00:05   좋아요 1 | URL
난 아마 사회주의, 정신분석, 에코, 실존주의 좋아할 것 같은데... (아닐 수도..)... 우리가 이렇게 달라요 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9-09 07:05   좋아요 0 | URL
와 이렇게나 다른가...

비연 2020-09-09 0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다 읽었다..ㅠ 이런... 그것도 열 하루 만에..라고 쓰셨다. 반유행열반인님. (손들고 반성중)

반유행열반인 2020-09-09 07:03   좋아요 0 | URL
자기 속도로 필요대로 천천히 즐겁게 읽어가요 비연님- 이런 도 반성할 일도 아니잖아요 ㅋㅋ 저는 다른 책으로 도망갈라고 얼른 읽은 거에요
열하루 중에 하루는 쉬었습니다ㅋㅋ

단발머리 2020-09-09 0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에 익숙한 책이 링크되어 있어 반갑게 들어왔습니다. 열흘만에 다 읽으셨다니 정말 대단하신데요!

반유행열반인 2020-09-09 09:11   좋아요 0 | URL
네 보라보라 책 저도 읽었습니다. 대단하긴요. 저는 이런 책을 거의 처음 읽는 걸요. 여러 권 읽고 갖춘 단발머리님이 더 대단하십니다. ㅎㅎㅎ

수이 2020-09-09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멋져, 금세 읽을 줄은 알았는데 이 책만 읽었던 것이로군요! 게으름 피우고 있었는데 나도 이제 슬슬 달려야겠다.

2020-09-09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09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09 0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0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0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0 1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eBook]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이슬아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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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7 이슬아.

남의 말 더럽게 안 듣는 내가 이상하게도 책에 관해서는 남의 말을 잘 듣는 편이다. 빡치는 건 빡치는 거고, 좋은 책은 봐야한다. 엄마가 집에 가시기 전에 말했다.
엄마집에 아니 에르노 책,
응 두 권인가 있어.
세 권. 집착이랑, 단순한 열정, 칼 같은 글쓰기(내가 사 줘서 안다…)
그치. 단순한 열정이 재밌어. 다른 건 별로야.
저번에는 집착이 재밌다며…칼 같은 글쓰기 내가 한참 만에 구해줬잖아.
응, 그런데 안 봤어.

풉하하하하. 제가 구매내역을 보니 3년 전에 구해드렸네요...아직 안 읽으셨군요...제가 먼저 읽겠네요...지난 번 독후감의 훈훈함 파괴…
엄마는 소설이 고쳐도 고쳐도 끝이 없다고 한탄하셨다. 그래도 문장이 조금씩 늘고 있는 기분이라고. 나는 저 쌔끼들이 얼른 커야 뭘 쓰던가 말던가, 카페는 다 닫고 집에서는 뭐가 하나도 안 돼, 하며 요즘 아무 것도 안 쓰는 핑계를 댔다. 그래도, 젊어서 시작했으니, 조금씩 천천히- 엄마는 그 말을 남기고 현관문을 닫으셨다.
늦게나마 같은 취미를 갖게 된 덕에 이런 말을 나눌 수 있어 좋았다.

나는 엄마도 아빠도 별로 안 닮았다. 내가 낳은 아이 둘도 나를 닮지 않았다. 그런데 지인들은 자주 말한다. 나 아는 언니 너랑 꼭 닮은 사람 있는데- 직장동료 중에 너랑 닮은 사람 있어- 너 내 동생이랑 닮았다- 이웃님 누구누구랑 너랑 닮았어-
겉모양은 본 적 없는 생판 남들을 닮았다지만, 성격이나 선호는, 하다 못해 내장 주름이라도 유전자를 나눈 이들과 닮았겠지. 오늘 이런 모양으로 이러고 사는 데 조금씩 영향을 서로 주고 받았겠지. 다들 내게서 좋은 것만 가져가면 좋겠다. 흑흑.

이슬아의 첫 책, 내가 읽은 이 작가의 두 번째 책이다.
먼저 읽었던 심신 단련은 작가의 두 번째 산문집인데 그럭저럭이었다.
이 책은 작가가 그린 만화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림체가 넘모 귀엽다!
슬아씨의 엄마 복희씨의 직설적이면서도 둥그렇고 따뜻한 말들이 정말 좋았다. 복희씨와 웅이씨를 묘하게 닮은 슬아씨는 개성 넘치고 깜찍하게 자라나서 역시나 좋았다.
가난하고 끝없이 일해야 하는데도 다정한 가족과 그 속에서 사랑 받으며 유쾌하고 씩씩하게 자라난 사람을 보면 신기하다. 똑같이 가난할 거면 우리집도 저랬으면 좋았겠다 싶다. 세상의 다양한 직업, 다양한 만남이 참 신기하다.
슬아씨가 손바닥 문학상을 탄 글은 참으로 야심이 넘쳤다. 독립출판사 운영하고 일간 이슬아 연재하는 소식 들었을 때 아이참 야무진 사람이네 했는데 글이고 그림이고 다 야무졌다. 너무 야무져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호다닥 읽어버린 즐거운 책이었다.
오늘은 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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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09-07 22: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았다니 다행이다. 숭늉 사발로 두 대접 마시고 귤 까먹는 저 아가 자유롭게 살면 또 우리는 우리만의 시간이 있겠지. 어머님이랑 소설 쓰기 이야기 넘 좋다. 잘 자.

반유행열반인 2020-09-08 07:01   좋아요 0 | URL
굿나잇 굿모닝 ㅎㅎㅎ

syo 2020-09-07 22: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읽고 막 벌벌 떨었어요, 너무 좋아서....

반유행열반인 2020-09-08 07:02   좋아요 0 | URL
그럼 저도 벌벌 좋아서....

하나 2020-09-08 1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젊어서 시작했으니- 오.. 어머님께서 툭 던져주신 말씀에 오늘의 제가 괜히 위로 받네요. 오늘도 다 좋으셨음 좋겠어요 ^^ 어디로 가기 위한 게 아니라, 그저 춤을 추기 위해 추는 거라니깐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9-08 14:15   좋아요 1 | URL
맞아요 어디로 안 가도 무엇이 안 되어도 그냥 읽고 그냥 쓰면 시간은 잘 가고- 업무 시간도 광속으로 잘 가고- ㅋㅋㅋ
 
사랑 중독 - 너무 지나치게 사랑하는 병
수잔 피보디 지음, 류가미 옮김 / 북북서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20200906 수잔 피보디.

한동안 메마르게 지냈다. 내 스스로 다양한 과몰입에 취약한 것을 알고, 현재 상태가 금단 현상인 걸 알았다. 그렇지만 뭘, 어쩔 수 있을까. 게임 중독이 심하면 아예 삭제하고 돌아보지 않았다. 술과 약이면 닿지 않는 곳에 치워버렸다.
갈망하는 대상이 사람이라면, 관계라면. 대개는 내 바람과 상관 없이 상대의 무관심과 냉담이 알아서 먹이를 주지 않았다. 그렇게 멀어진 거리에 괴로워하다 한참 지나면 견딜만큼 저절로 희미해지고 나아졌다.
제일 힘들 때 검색을 하다 이런 제목의 책을 찾았다. 10년 전쯤 나온 이 책이 꽤나 절실했는데 절판인데다 도서관에서도 구할 수 없었다.
권여선 소설 ‘봄밤’에서 영경은 사랑하는 수환마저 내버려두고 요양병원을 뛰쳐나와 술을 퍼마신다. 당장 미칠 듯한 중독자의 몸과 마음은 필요한 것을 채워주면 일단은 진정이 된다. 장기적으로는 해로울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숨은 돌린다.
여름이 다 가기 직전 원하던 걸 잔뜩 퍼마시고 다소 진정되었다. 그때 중고알리미가 절판된 이 책을 찾아줘서 차분한 마음으로 읽었다. 책을 먼저 읽었다면 마구 퍼먹지 않아도 서서히 가라앉았을까. 이제는 알 수가 없네.

사람과 사랑과 관계에 중독되는 원인과 과정, 그로 인한 문제점을 이 책은 잘 정리해 놓았다. 한 두 가지가 아닌 원인의 거의 대부분에 해당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불화와 결핍과 트라우마와 소외의 경험, 과거의 상처를 채우기 위해 기대는 대상이 사람이고, 친밀해 질 무렵 지나치게 관계에 집착하고, 의심하고, 그러다가 관계가 악화되고, 잘못된 상대를 만나면 일방적으로 스스로를 희생하다가 지쳐 나가 떨어지곤 했다. 아주 어릴 때 너무 여러 번 잘못 패턴화된 짝사랑을 경험했다. 십 대 후반쯤 이 책을 보았으면 그런 관계들을 조금 줄일 수 있었을까. 애초에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면 이런 책에 관심이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ㅎㅎㅎ

언제나 문제는 자기존중감,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 혼자여도 괜찮다는 꿋꿋함이다. 나이를 먹어도 상실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은 왜 사그라들지 않을까. 너무 애쓰지 않기, 어쩔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이기, 변화가 나를 죽이지는 않는다는 것 알기, 오히려 지나친 사랑이 나를 죽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닫기. 이제는 할 수 있을까.

원인과 문제점은 상세하고 정확하게 짚은 책이지만 ’회복’이라는 챕터에 제시된 해결책은 미흡하게 느껴졌다. 자기 인식을 정확히 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도움이 될 테지만, 지지해 주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갑자기 영성 타령 하면서 신(또는 자신이 믿는 절대적인 존재, 힘)에 의탁하는 방법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 하는 대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영성을 향한 사랑 만이 유일한 영원한 사랑 어쩌고 하는 건 내내 잘 읽다가 순간 짜게 식게 만들었다. 12단계 회복 프로그램을 책 말미에 소개하는데 여기서도 계속 신 타령 기도 어쩌고 해서 주욱 훑어보고 말았다. 종교를 가졌거나 뭔가를 간절히 믿을 수 있는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겠지… 불신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놈들이 가는 지옥불에서 영원히 활활 타오를 예정입니다...

집착을 줄이고, 관계와 사람에 대한 강박을 덜고, 스스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고, 외로워도 괜찮다고, 내가 나를 위로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싶다. 그 정도는 노력해보겠다.
잘 지냅니다. 계속 잘 지내려고 합니다.

+밑줄 긋기(이 페이지가 책 한 권의 핵심을 거의 다 담고 있다.)
-친밀한 관계는 우리의 인생을 믿을 수 없을 만큼 확장시킨다. 우리는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커다란 만족을 얻고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는 데 큰 도움을 얻는다. 그러나 친밀한 관계는 우리의 생존에 꼭 필요한 요소는 아니다. 그것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선택 사항이다. 더군다나 우리의 자기 존중감은 특별한 누군가를 만나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성적 끌림이나 욕망만으로 인생을 살아나갈 수 없듯이, 사랑만으로도 인생을 살아나갈 수 없다. 인생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사랑만큼이나 주의 깊은 판단력,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것,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는 일 또한 중요하다.
결국 우리는 완벽한 사랑은 평생토록 지속된다는 신화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로지 영적인 사랑만이 영원히 지속된다.) 우리가 변화하는 대로 우리의 관계도 변화한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랑도 사라져간다. 그렇다고 해도 낙담할 필요는 없다. 변화가 인생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그 변화가 인생을 흥미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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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09-06 2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희집 냉장고에는 늘 탄산수가 40병씩 쟁여져 있어요. 한번 책 읽기 시작하면 잠도 잘 못자구요. 용케도 중독을 돌려막으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지나가는게 나을 때도 있지만, 같이 잘 지내고 싶어서요. 계속 그래보고 싶어서요 ^^

반유행열반인 2020-09-06 20:08   좋아요 1 | URL
저희집 냉장고도 탄산수가 가득한데 반갑습니다 ㅋㅋㅋ 저는 책은 쉬이 잘 덮어서 그나마 중독 방지용으로 잘 써먹고 있는데, 중독 종목을 바꿔가며 돌려막기! 그런 신박하고 불건전한 방법이 있었군요. ㅋㅋㅋㅋ 잘 지냅시다.

수이 2020-09-06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탄산수는 뼈와 치아에 치명적인데......... 책 리뷰 다 읽고 댓글 읽고 댓글 반응을....... 밑줄 긋기 문장 좋다. 아까 신간 훑어보니 중독에 대한 책도 새로 나와서 장바구니에 넣어놓았는데_ 나이 들면 안 좋은 게 절판된 책 하나하나 찾아내서 읽을 정도로 바지런하지 못하다는 점, 아니다, 나만 그렇게 나이드는 걸 수도 있는데 어쨌거나 저는 그렇더라구요. 그저께 글도 좋았지만 오늘 글이 더 좋다. 왜 그런가 보니 미래지향적이라서 그런 거 같아요. 현재를 살면서도 과거를 계속 되돌아보면서도 미래를 향해 고개는 빳빳이 들고 있는 게 마음 편해서 그런 것도 같아요. 아니면 너무 주입식 교육을 받은 나쁜 교육의 결과인가;;;

반유행열반인 2020-09-06 21:56   좋아요 0 | URL
유럽 사람들 탄산수 많이 먹던데... 미래 유러피안 수연님 어쩔 거에여! 미리 냉장고 쟁여두고 익숙해지십시오! ㅋㅋㅋㅋ
저는 사라진 책 보면 괜히 더 집요하게 찾아 읽고 싶더라구요.
이 글 미래지향적 아니에요...과거에 푹 매몰되어 있어요... 속고 계신 겁니다... 언제나 좋게 읽어주셔서 그리고 예쁜 말 많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쁜 수연님.

파이버 2020-09-07 0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만으로 인생을 살아나갈 수 없다니 뭔가 씁쓸하네요.... 종교가 없는 저는 제 자신을 믿고 사랑하기로 결심ㅎㅎㅎ
그리고 원하시던 책 구하신거 축하드려요 기다리다보면 중고알리미가 울리는 날이 오는군요 저도 다음에 이용해봐야겠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9-07 06:28   좋아요 1 | URL
사랑만으로는 안 되고 사랑도 있어야지요. ㅎㅎㅎ 필요조건이되 충분조건은 아닌...(맞나)
중고알리미는 절판도서 찾을 때 꽤 유용하게 쓰고 있어요. 대신 부지런하지 않으면 더 부지런한 분들이 샥샥 채가서 에이 하고 입맛만 다시게 되는 단점 ㅋㅋㅋ좋은 한 주 보내세요. 파이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