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평점 :
-20201011 황정은.
지난 해 같은 날 어떤 책을 읽었는지 북플이 알려준다. 일 년 전 너는 누군가에게 건네려고 김금희의 ‘오직 한 사람의 차지’를 서둘러 읽었지만 이미 가지고 있다는 말에 도로 들고 온 적이 있다. 오늘 너는 같은 이유로 부지런히 황정은의 ‘연년세세’를 읽는다. 따라 읽고, 따라 읽어, 하며 겹치는 책을 늘려간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자꾸 두 장을 겹쳐 넘기는 착각을 했다. 페이지 수를 확인하면 한 장이다. 아무래도 평량이 높고 두툼한 종이를 썼나 봐. 마침 양장판에 두께도 비슷한 에세이를 읽고 있는데, 두 책을 비교해 보니 같은 페이지일 때 이 책이 삼십 퍼센트쯤 두껍고, 전체 쪽수는 이 책이 백 페이지 가까이 적었다. 가격은 같았다. ㅋㅋㅋ...
황정은이 건네는 문장과 이야기의 무게를 생각하면 더 무거운 물성을 부여해도 그럴만 하지 싶다가도, 조금 더 죽은 나무, 날라야 할 늘어난 무게, 몇 푼 더 지불해야 하는 누군가의 노동의 대가, 차지하는 공간의 부피, 그런 걸 생각하면 최선인가요? 하고 묻고 싶었다. (황정은 작가 팬들이 때리러 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럼에도 연작소설로 네 이야기만 묶은 것은 적절했다. 다른 단편소설집 마냥 꼭 일곱 편 내외로 묶을 필요는 없지. 완결성 독자성 책 한 권을 관통하는 여운.
(그러니까 책 무게와 두께를 줄이고 책값을 내려 달라는,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이 좋은 책을 접하게 하라는 독자의 아우성이었습니다…)
다섯 권 째 읽은 작가의 책이고, 아직 세 권이 남아서 신이 난다. 이번 소설은 많이 말하는 대신 보여주었다. 누군가의 삶이 고단한 이유에 관해 읽는 사람이 스스로 묻고 찾도록 했다.
책을 다 읽은 뒤 왠지 모르게 이순일을 가운데에 놓고 가계도를 그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렸다. 글씨 못난 것 봐. 황정은은 작가의 말에 이 소설이 가족 이야기로 읽힐지 궁금하다고 써 놨다. 내가 한 일을 보면 나는 적어도 그렇게 읽었다. 가운데에 이순일을 놓는 이야기는, 그간 많이 부족했다. 한영진이나 한세진이 힘든 이유는, 이순일부터 잘 살기를 잘 모르면서 힘들게 겨우 살아남는 데에만 모든 힘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더 오래된 고통부터 차례차례 톺아 넘어가는게 맞지 않을까 싶었다.
-파묘
무덤을 해체하는 이들은 악의 없이 늙은 시골의 농부들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무릎이 아파 느리게 외조부 묘에 닿은 이순일을 기다려 주지 않고, 마지막 인사의 기회도 주지 않고, 묘를 파헤치고, 뼈조각을 태우고, 가루로 부숴 허공에 흩어 보낸다. 충분한 애도를 허용하지 않는 세상, 죽은 사람에게는 그저 마지막 불운일 뿐이지만, 기억과 상실을 적절히 추슬러 남은 삶을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는 가혹하다. 소리 없이 저지르는 폭력이다. 이순일이 아픈 손가락마냥 여기는 한세진만이 이순일의 곁에서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함께 한다.
-하고 싶은 말
이 소설 제목을 생각하는데 나도 모르게 ‘할 수 없는 말’로 자꾸 잘못 떠올렸다. 아무도 아닌, 을 아무 것도 아닌, 으로 자꾸만 잘못 읽는다고 속상?못마땅?해 하던 작가의 말이 괜시리 떠올라 머쓱….
‘너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어.’
‘거짓말.’
두 말 사이에는 간극이 있지만 나는 저 두 말을 붙여 놓고 싶었다. ‘그 모든 진짜같던 거짓말’(이건 브로콜리너마저)에 속아 ‘너무 늦었어’하며 어떤 말도 들어줄 여력 없이, 생각할 틈도 없이 노동에 지친 삶을 살게 된 한영진을 미워할 수 없었고 그저 안타까웠다. 다른 이들의 편안한 잠을 도울 이불을 팔지만 정작 이불을 파는 사람은 너무 피곤해서 제대로 눕지도 못하는 늦은 밤.
소설 합평 모임에서 K-장녀, 라는 말을 처음 듣고 저게 뭔가 했는데, 가가호호 대대손손 이어지는 장녀 희생의 서사를 여기에서 또 마주하니 입이 쓰고 썼다. 저도 장녀거든요…
-무명
눈 속에 처박힌 채 입안 가득 맛을 본 무명맛의 눈. 이름 없는 자. 제목을 자꾸 유명으로 고치고 싶어졌다. 그러면 자꾸 유명을 달리하다, 유명한 사람 같은 게 생각나서 에이 아니잖아, 했다.
순자로 살아온 이순일의 삶. 순자라는 이름이 흔한 만큼, 순종을 미덕으로 삼고 부모가 있건 없건 돌봄 노동을 위해 희생되고, 배움과 직업 선택의 기회 따위는 말살되고, 그러다가 재산을 양도하듯 배우자에게 넘겨져 또다시 자기 아이와 자기 아이의 아이를 키우다 늙는 삶이 너무도 흔하고 보편적이어서 슬펐다. 나도 그런 보살핌이 없었으면 자라나지도, 내 아이들을 키우지도 못했겠지. 그렇다면 나는 그들의 입을 막는 대신 나라도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왜 자꾸 외면하게 되는 걸까. 고통이 전달되는 걸 피하지 않고 듣고 묻고 위로하는 사람이 결국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거야.
-다가오는 것들
미아 한센뢰베의 영화 제목에서 소설의 제목을 따 왔다. 나는 보지 않은 영화이다. 뉴욕에 간 한세진이 이모 할머니(이순일의 이모)의 손녀 제이미와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는 일. 911과 세월호 참사와 탄핵촛불집회와 미군과 결혼 이민을 떠난 재미 동포들과 해외 입양 고아들까지. 하나하나 중요하고 기억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지만 한 소설에 너무 많은 것들을 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간에 국가폭력, 이라는 말을 보자 문득 묻고 싶었다. 그래서, 촛불 이후 정말 그 말이 지시하는 힘과 행위와 작위와 부작위가 사라졌나요? 아직 남은 잘못들은 왜 말하여지지 않나요? 지금, 정말 정의로운 나라가 되는 중이라고 생각하나요? 왜 아직도 힘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은 넘쳐나나요? 그 이유라고, 적이라고 어딘가를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올라갔을 때 보이는 얼굴은 정말 결백한가요?
왜 갑자기 정치글 됨 ㅋㅋㅋ
하미영의 섬세함이 예민함이 되지 않고 질병이 되지 않는 세상이란, 가능할까, 행복할 수 있을까, 다가오는 것들을 너무 미워하지 않고 덤덤하게 맞이했다 다시 흘려보낼 수 있을까. 궁금함이 많아지는 소설이었다.
해를, 세대를 거듭해도 달라지지 않은 (징그러운) 것들. 이 원래 이 독후감의 제목이었는데 형용사를 빼 버렸다. 괄호 안에 그러나 우리를 망치지 못한, 같은 말을 넣거나 문장 뒤에 그러나 우리가 바꿔나갈 것들, 같은 희망적인 말을 덧붙이고 싶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 소설책 안에서 나는 그런 희망을 찾지 못했다. 내가 숨은그림찾기를 못하는 놈이라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 잊어. 그것이 정말 비결이면 어쩌지.’ 당한 폭력과 모욕과 수모를 잊는 것 밖에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면, 정말 어쩌지.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0/1011/pimg_792167114269755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