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가르강튀아 | 팡타그뤼엘 대산세계문학총서 35
프랑수아 라블레 지음, 유석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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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30 프랑수아 라블레.


시작은 밀란 쿤데라 영감탱이 탓이었다. 2015년 ‘배신당한 유언들’을 읽으며 라블레 타령이 하도 많이 나와서 전자책으로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을 샀다. 읽는데, 뭔 익살 많이 떨어 놓은 것 같긴한데 주석이 너무 많았다. 아니 웃을라고 각주 보는 거 너무 슬프지 않냐… 프랑스어 언어유희를 1개국어 독자는 이해할 수 없음... 독서 쪼렙이던 나는 주석도 다 따라 읽어야 하는 줄 알았다. 이 전자책은 오래전에 만들어 그런가 주석이 막 본문 사이사이 막 낑겨 있어 가독성도 나쁨...완독 실패!
2018년에 ‘소설의 기술’보고 아 읽어야지… 마음만 먹는다.
2019년에 ‘만남’을 읽은 뒤 다시 도전한다… 10분의 1쯤 읽고 중도 탈락!
뭔 4년 주기로 라블레 병이 도지는가. 주로 밀란쿤데라 산문집 한 권 볼 때마다 재발하는 병…할배가 그만큼 라블레 짱짱맨!!!하기 때문...
다시 4년 뒤. 2023년 밀란 쿤데라 옹이 작고하시면서 ‘커튼’으로 전작(인 줄 알았는데 뭔 유럽 타령하는 얄팍한 책 또 나왔더라…) 잠정 완료 후, 할배의 유언 실현-이라는 제목으로 독서 목록을 만들고 라블레 책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주석도 적당히 건너뛸 거고, 나는 그동안 실내자전거로 근력을 키우고 온갖 허접스러운 책들로 독서력도 (아마도) 키웠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다 읽어냈다. ㅋㅋㅋ 이제 영화 ‘인터스텔라’를 다시 보게 되면 블랙홀 나올 때 “흠 난 라블레의 가르강튀아 읽었지”하고 (옆에 누가 있다면) 잘난 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500년은 묵은 이 소설 할아버지 쯤 되는 책은, 르네상스 대표주자로 꼽히는, 그렇지만 에라스무스나 토마스 모어, 세르반테스 등에 비해서는 왠지 청소년들 배울 서양사 교과서에서 언급이 꺼려지는(읽어보면 왜 그러는지 대충...점잖은 교육자 양반들은 외설적이라 청소년에겐 에비 떼끼할), 라블레 아저씨가 썼다. 옛날 사람이라 출생 년도조차 정확하지 않다. 1483년 또는 1493년에 태어난, 나보다 500살 쯤 더 많은 라블레 선생은 수도사 출신이고, 수도원에서 책 막 압수당하고 연구 금지도 당하는 와중에도 그리스어 고전을 열심히 연구했다. 과부와의 사이에서 자식 둘을 낳고, (그런데 워낙 짱짱맨 학자라 나중에 교황이 사생아 취급받던 두 아이 적자로 인정해줌, 출판 까방권도 내려줌), 갑자기 의대에 가더니 미리 의학 공부 많이 해둔 덕에 3달만에 의사되고 의학 강의를 한다. ㅋㅋㅋㅋ 라선생님! 저도 그렇게 (성직자->의사) 전직(교사->이거 말고 아무거나)을 하고 싶습니다!!!!ㅋㅋㅋㅋ
4,50대쯤 팡타그뤼엘과 가르강튀아를 쓰고, 3서, 4서, 유작에다 남들이 위작 첨부한 걸로 의심되는 5서까지 냈다고 한다. 내가 본 책 번역하신 라블레 연구자 유석호 선생님께서 3,4서도 번역해 두신 걸 서점 홈페이지에서 뒤적거리다가 야이 미친놈아 니가 라블레 연구할 거냐 두 편 봤으면 마이 봤다 아이가 고마 해라...하며 나새끼를 한 대 쥐어박고 중고 도서 탐색을 중단하였다. ㅋㅋㅋㅋ

거인족인 그랑구지에의 아들 가르강튀아의 아들이 팡타그뤼엘이다. 그런데 책 자체는 원래 전해 내려오던 가르강튀아 모험기(좀 잡스럽고 후진 책)를 바탕으로 팡타그뤼엘(목타게 만드는 놈) 이야기를 상상해서 먼저 뿅, 쓰고서 나중에 그 아버지 이야기도 내가 다시 써야지, 하고 가르강튀아를 썼다고 한다. 대부분 속편이 못하다고 하는데, 읽어보니 먼저 읽은(나중에 쓴) 가르강튀아 쪽이 더 넉살 좋아지고 개그도 연마되고 그런 느낌이었다. 이쪽 보고 나서 먼저 쓰인 팡타그뤼엘 보면 2프로 부족한 느낌 ㅋㅋㅋ그래서 놀란도 블랙홀 이름 (팡타그뤼엘 아니고 ㅋㅋㅋ) 가르강튀아로 지었을 것이다.

수도원이나 법률학자나 철학자들 비판하고 싸대기치는 대범함도 놀랍고 (심지어 라블레 수도원 사제였음…) 이후 점점 더 종교 탄압 심해져서 막 화형시키고 그랬다니 70세 채우고 늙어 죽은 라블레는 한편으론 위험한 시대 잘 비껴가며 지 꼴리는대로 쓰고 싶은 거 다 쓰고 죽었으니 복받았구나 싶었다. 그보다 300년 가량 뒤에 등장하는 사드 놈은 막 감옥 갇히고 에비지지 퉤퉤 소리를 듣기 때문에 ㅋㅋㅋ 보니까 사드가 애들 잔뜩 모아서 못된 짓하는 수용소 같은 거 만드는 거 보면 가르강튀아에서 장 수도사가 세운 고오급 수도원 패러디해서 완전 반대로 만든 기분이긴 했다…

가르강튀아에서 장 수도사가 침략자들 상대로 무공 사용해서 다 죽여버리는 이야기는 뭔가 마블시리즈나 마동석시리즈, 온갖 히어로물 압도하는 느낌이었다. 사실 그렇게 홀리하진 않고 김성모 만화의 깡패나 귀귀만화 ’뉴바이블‘의 제이(지저스 따라한 걸로 추정)처럼 다 뿌숴뿌숴 뼈와 살을 분리해주마 (실제로 분리함)- 뭐 이런 만화들의 증조 고조 현조 할애비 뻘 되는 표현에 그럭저럭 재미있게 읽었다. 거인왕들 먹성이나 옷 크기 용품 사이즈 과장하는 것보다 무훈 과장하는 게 더 웃긴 건 내 취향일 것 같다…(무협소설 안 본다며…)

해학과 풍자, 개그라는 건 우리 옛날에 배운 국어 시간 탈춤 마당놀이 속 말뚝이가 양반 놀리고 더럽고 추저분하게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똥오줌 방귀 성기 성행위 이런 게 예전에는 필수품 이었던 것 같다. 동서고금 다 그런 거 같아...어린애들 방귀 똥 나오는 그림책 보고 뒤집어지는 거 보면 본능인지…
라블레는 보면 꼭 여혐이라기도 그렇고 그냥 남자고 여자고 다 욕보이고 놀리고 썰고 하는 거 보면 그냥 인간 혐오 같기도 ㅋㅋ그런데 또 신 까고 인간 짱 하는 거 보면 오우 저는 인간 본성을 존중합니다...하는 거였을까… 인본주의는 교황 왕 기사 평민 다 똥 싸고 오줌 싸고 섹스 하고 에베베 얼레리꼴레리-한다고 다 까면서 밑바닥으로 모두 끌어내려 동등한 민낯(민궁둥이?) 드러내는 게 시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거 보면 더 고귀하게, 누구나 존중받으며, 이런 서사를 이어가며, 더럽고 천박한 이야기 적어내리는 사람들을 나가 있어, 천한 것들, 하는 다음 고상한 시대들은 다시 위선투성이에다 오히려 반인간적인 시대가 온걸까, 싶기도 했다. 인간의 동물성과 초인간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 인간이 그렇게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일, 그래도 또 인간이 그 이상 위대한 존재가 되는 경우도 있다는 걸 믿고 나아가는 일, 지금 문학은 지금의 인간을 얼마나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잘 안 봐서… ㅋㅋㅋ

라블레의 후예를 자청하는 소설을 쓰던 밀란 쿤데라 할배는 지옥에서 폐지 수집하는 옥타비아누스랑 농담 따먹고 있을 거 같고, 그나마 계승자 비스무레한 똥똥 오줌 발사! 하는 한국 작가 누가 있나 곰곰 생각해보니, 다음은 너로 결정했다! 왜 하필 자꾸만 팔지도 못하는 전자책으로 사버리고 마는 오한기! 백만볼트! ‘바게트 소년병’ 출격!(그러나 언제 볼 지는 모르겠음 ㅋㅋㅋ)



+밑줄 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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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보다는 웃음에 관하여 쓰는 편이 나은 법이라오.
웃음이 인간의 본성일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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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그대들이여, 즐겨라. 그리고 허리에 좋게 몸을 편안히 하고 즐겁게 남은 부분을 읽도록 하라. 그리고 너희들, 당나귀 좆 같은 놈들아, 다리에 종양이 생겨 절름발이나 되어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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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것들이 내가 환영인사와 선물값을 치르기를 원하는 모양이로군. 그건 당연한 일이지. 그들에게 포도주를 제공해줘야지. 단지 ‘웃음으로’ 말이야.”
주교가 교구에 새로 부임했을 때 주는 환영 선물proficiat.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멋진 바지 앞주머니를 열고 그의 물건을 꺼내서 공중에 쳐들고 신나게 오줌을 싸서 여인네와 아이들을 빼고 26만 4백 18 명을 익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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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느님의 이름으로, 우리 종을 돌려주세요. 자, 종을 돌려주신다면 우리 대학에서 나온 우티노의 설교집을 한 권 드리지요. 젠장, 면죄부도 원하세요? 돈을 내지 않아도 가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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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제게 그것들을 주셔야 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어요. 제논증은 다음과 같습니다.

종탑 안에서 종을 치며 종소리를 낼 수 있는 종은 어느 것이나 종을 침으로써 종을 종답게 치는 사람들에게 종소리에 의하여 종소리를 내게 만듭니다. 파리에는 종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니까 이와 같습니다.

하, 하, 하, 멋지지 않습니까! 이것은 『논리학』 1부 3장인가 어딘가에 있는 겁니다. 명예를 걸고 드리는 말씀인데 제가 기막히게 논증을 잘했던 시절이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몽상만 할 뿐이죠.
(엉터리 논증의 예. 흉내내고 싶다. 저는 잘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잘 생겼기 때문에 잘 생겼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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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델포이의 신전에 남겨진 라케데모니아 사람 킬론의 격언을 실현시키고 확인하게 했던 것이다. 그는 빈궁이 소송의 동반자이고 소송인들은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말한 바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장하던 권리를 얻기 전에 인생의 종말을 맞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성’, ‘소송’에서도 이 비극은 반복된다. 지금 여기 아동학대로 고소당한 선생들도. 거의 500년도 넘게 그러구 있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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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하게도 그에게 정면으로 맞서려는 얼빠진 놈에게는 종격막과 심장 사이로 가슴을 꿰뚫어 그의 근육의 힘을 보여주었다. 다른 놈들은 갈비뼈 사이를 공격해 위가 뒤집혀 즉사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다른 놈들은 무자비하게 배꼽 있는 곳을 가격해 내장이 튀어나오게 했다. 그리고 다른 놈들은 불알 사이로 직장을 꿰뚫어버렸다. 그것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가장 끔찍한 광경이었음을 믿어주기 바란다.

어떤 놈들은 “성녀 바르브여!
어떤 놈들은 “성 조르주여!
어떤 놈들은 “성녀 니투슈여!
어떤 놈들은 퀴노, 로레트, 본 누벨, 라 르누, 리비에르의 성모님!”하고 외쳤다.
어떤 놈들은 성 자크에게 빌었다.
어떤 놈들은 샹베리의 성해포(聖骸布)에 빌었는데, 그것은 석 달 뒤에 불에 타버려 실오라기 하나도 건질 수 없었다.
어떤 놈들은 카두앵 수도원의 성물에 빌었고,
어떤 놈들은 생 장 당젤리 수도원의 성 요한에 빌었고,
어떤 놈들은 생트의 성 외트로프에게, 쉬농의 성 멤므에게, 캉드의 성 마르탱에게, 시네의 성 클루오에게, 자바르제의 성물에, 그리고 다른 수많은 착한 군소 성자들에게 빌었다.
(장 수도사의 활약. 의학 배운 라블레라 손상 부위도 세밀하다...그런데 그게 너무 웃기고… 수도사 하던 인간이라 뭔 힌두교마냥 성인 잔뜩 숭배하는 거 까느라고 세인트 뭐시기님 남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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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고백하건대, 예수 그리스도의 시절에 살았더라면, 저는 유대인들이 그분을 감람나무 동산으로 끌고가는 것을 막았을 겁니다. 착하신 스승을 곤경 속에 남겨둔 채 저녁 식사를 잘 하고 그토록 비겁하게 도망을 쳐버린 사도 나리들의 오금을 제가 끊어버리지 못했다면, 악마가 나를 잡아가도 좋습니다. 저는 칼을 써야할 때 도망치는 사람을 독약보다도 더 싫어하니까요.
(예수님 곁에 장 수도사가 있었더라면, 무력으로 보호받으셨겠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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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들은 사제에 불과하군요. 사제는 수도사의 첫 단계에 지나지 않지요. 성 요한을 두고 말하지만, 나는 완벽한 수도사이니까 너희들을 파리떼처럼 죽여주마.
(이 자식들, 겨우 조직 말단이잖아? 이 구역 짱 먹은 나니까 다 죽여주마, 혹은 이 자식들, 겨우 1학년? 6학년인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ㅋㅋㅋㅋ파리떼처럼 죽여준다는 죽여주는 수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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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걸치고 있는 옷을 걸고 말인데, (수도사가 말했다) 나는 너를 지금 추기경으로 만들어주겠다.(주:추기경의 붉은 예복처럼 머리를 잘라 피로 붉게 만들겠다는 뜻.) 너는 성직자들에게 강제로 돈을 요구하려는가? 지금 내 손으로 붉은 관을 쓰게 될 거야.”
그러자 궁수가 외쳤다.

“수도원장님, 수도원장님, 미래의 신부님, 추기경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분! 아! 아! 아이고! 안 돼요. 수도원장님, 착하신 수도원장 나리, 당신께 항복하겠어요.

─그러면, (수도사가 말했다) 나는 너를 모든 악마들에게 보내주지.” 그러고는 단칼에 머리를 잘랐는데, 그의 일격에 측두부 상부의 두개골이 갈라져 양쪽의 두정골과 시상 봉합부, 그리고 전두골 상당 부분이 떨어져나갔다. 또한 양쪽 뇌막이 절개되어 양쪽 뇌실의 후면부가 깊이 벌어졌다. 그리고 두개골은 어깨 위로 두개골막에 의하여 뒤로 젖혀진 채 겉은 검고 속은 빨간 박사모 모양으로 매달려 있었다. 이렇게 즉사한 그는 땅바닥에 거꾸러졌다.
(나는 이것이 김성모 만화인지 귀귀 만화인지 까면서 보는 해부학 만화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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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관대함의 속성이다. 왜냐하면 시간이 모든 사물을 좀먹고 작아지게 만들지만, 양식을 가진 사람에게 관대하게 베푼 선행은 고결한 생각과 기억으로 계속적으로 커지기 때문이다.
(착한 구절도 좀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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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못을 저지른 자들에게 너무 나약하고 무절제하게 베푸는 관용은 그들에게 모든 것을 용서받았다는 위험한 믿음을 갖게 해서 차후에 더욱 거칠 것 없이 악행을 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착하면서도 엄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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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세상의 교단들에서는 모든 것이 시간표에 따라 정해지고, 제한되고, 규제되므로, 이곳에는 기계식 시계나 해시계를 두지 않고, 기회와 상황에 따라 모든 일이 진행되도록 정해졌다. 왜냐하면 (가르강튀아가 말하기를) 자신이 아는 바로는 진정한 시간의 낭비는 시간을 따지는 것이고, ─그것에서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망상은 양식과 분별력을 따르는 대신 종소리에 맞추어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치만 저 같이 분별력 없는 새끼는 뽀모도로 시계가 없으면 자기 자신을 놀든 공부하든 혹사시키고 마는 걸요…)

-그들이 수치스러운 굴종과 강제에 의하여 억압받고 예속될 때, 그들에게 자유롭게 미덕을 추구하며 예속의 굴레를 떨쳐버리고 거역하게 하던 고상한 성향은 왜곡된다. 우리는 언제나 금지된 일을 시도하고 우리에게 거부된 것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뭔 낙원 같은 고급 노블레스 수도원에 예쁜 애들 잔뜩 모아 놓고 자유 주고 이건 수도원이 아님 ㅋㅋㅋㅋ이런 곳 만든 이유 나름 설명.)
여기까지 가르강튀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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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코가 커졌는데, 알룩달룩하고, 작은 종기로 번쩍거리고, 검붉고, 시뻘겋고, 방울술이 잔뜩 달리고, 유약을 바른듯 번들거리고, 여드름투성이에, 붉은색을 두른 증류기의 나선관 같아 보였다.
(코가 외계인인 소설 썼었는데, 뭔가 거기 나온 코들이랑 많이 닮았음. 주정뱅이의 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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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에서 풀려 나 자 그는 다시는 그곳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항의의 표시로 홧김에 앞서 말한 요람 한가운데를 쳐서 한 주먹에 5십만 조각 이상으로 박살을 내버렸다.
(애기 팡타그뤼엘 사고칠까 봐 아빠가 사슬로 묶어 놨더니 요람 대들보 뿌수고 탈출한 팡타그뤼엘 빡쳐서 요람 오십만 조각 냄...개멋진 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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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라티움의 언어를 수집하고, 개연적인 연인의 자격으로 일체지사를 판정하고 형성하고 잉태하는 여성의 염정(艶情)을 얻으려고 애쓴답니다.석양시 창가(娼家)를 내방하여 베누스Venus의 열락(悅樂)에 도취해서 우리의남성지물(男性之物)을 친애하는 창기들의 심저(深底)로 침투시킵니다. 그러고는 솔방울, 카스텔, 마들렌, 암노새 같은 평판 좋은 주점에 가서 파슬리에 비계를 끼운 멋진양견육(羊肩肉)을 식(食)합니다.

이 말을 듣고 팡타그뤼엘이 말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언어란 말인가? 지랄 같으니, 자네는 어떤 이단에 속하는가 보군.”

“전하, 아닙니다. (학생이 대답했다) 왜냐하면 극히 자발적으로 약간의 미세한 햇살의 편린이 광채를 발할 때부터 저는 그토록 잘 축조된 교회들 중 한 곳으로 행차하여 그곳에서 아름다운 성수를 몸에 살수(撒水)하고, 우리조상들의 미사 기도 한 조각을 중얼거리니까요. 그리고는 성무일도(聖務日禱)를 낭음(朗吟)하며 내 영혼에서 전야(前夜)의 오점을 세척하고 정결케 합니다.

“전하, 아마 이 멋쟁이 친구는 파리 사람들의 말을 흉내내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해서 핀다로스식으로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라틴어의 껍질을 벗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일상적인 언어 용법을 경멸하기 때문에 자신이 프랑스어에 있어서 위대한 웅변가가 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원조 보그체 쓰는 라틴어 이상하게 배운 미친 파리 대학생 ㅋㅋㅋㅋ개웃김)

-(이상한 법정의 말도 안 되는 -궤변도 아니고 그냥 외계어 함- 변론과 판결)
원고측
왜냐하면 재단사들이 훔친 천조각으로 건초를 다발로 묶는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면 당시에 양배춧국 한 단지 분량만큼 늘어났던 대양을 덮을 만한 크기의 부는 화살통을 만들려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궁신 나리들이 매독에게 누에를 따모으지 못하도록 부드러운 어조로 명한 것을 제외하고는, 의사들은 그의 오줌 속에서 능에의 식사로 겨자를 쳐서 양날 도끼를 먹은 명백한 증거를 식별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피고측
왜냐하면 갑옷에서 마늘 냄새가 나면 녹이 곧바로 간을 파먹기 때문이고, 그다음에는 점심 식사 후 낮잠 자는 기색을 눈치 채고 목이 비틀린 자들을 계속 신랄하게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소금 값이 그토록 비싼 이유랍니다.
(…미친 놈들아 무슨 소리야… 한국말인데 왜 한국말 안 같음)

가르강튀아의 판결
그러나 원고가 피고를 신발 수선공, 치즈 먹는 자, 미라에 역청을 바르는 자라고 고발했던 건에 대해서는 피고가 잘 논증했듯이 유동적이어서 진실로 입증되지 않았으므로, 본 법정은 원고에게 이 고장의 관습대로 간을 하고 건조시킨 응고우유 석 잔을 앞서 말한 피고에게 8월 중순 만기로 5월에 지급하도록 선고한다.
호메로스가 쓴 것으로 잘못 알려졌던 <쥐와 개구리 사이의 전쟁을 다룬 익살스러운 서사시Batrachomyomachie>에서는 쥐에게 ‘치즈 먹는 자’라는 별명이 붙어있다.그러나 피고는 덮개가 달리고, 둥글게 체로 친 목구멍의 올가미를 채울 수 있게 건초와 삼 부스러기를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전과 같이 화목하게 지낼 것이며, 소송비용은 지불할 필요가 없다. 이상으로 판결을 마치노라.

이 판결이 내려지자 쌍방 모두가 판결에 만족해하며 헤어졌는데, 이는 거의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뭐 하라는 건지 모르겠는데 만족함 그리고…)
판결에 대한 여론의 평가
“추리에 의한 판결로 아이를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던 솔로몬도 위대한 팡타그뤼엘이 행한 것과 같은 완벽한 지혜의 경지를 결코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가 우리나라에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큰 복이다.”
(솔로몬도 좆밥임! 우리 전하 명판관 공명정대 포청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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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파뉘르주는 두 손을 마주치고 손바닥 사이로 입김을 내불었다. 이렇게 하면서 여전히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고리 모양을 한 왼손 안에 집어넣고 여러 번 넣었다 뺐다 하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러고는 턱을 쳐들고 토마스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몸짓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조차도 그가 이 몸짓으로 말을 하지 않고서도 토마스트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 고 물어본 것이라는 점은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랬더니 토마스트는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고 깊은 명상에 잠겨넋이 빠진 사람과 똑같아 보였다. 그러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는 왼손의 손톱 모두를 오른손의 손톱에 각각 갖다대고는 손가락들을 반원과 같이 벌린 상태로 힘껏 두 손을 쳐드는 시늉을 했다.

이것을 보고 파뉘르주는 갑자기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아래턱 밑으로 가져가고 오른손 새끼손가락은 왼손으로 만든 고리 속에 집어넣고는 이 자세로 윗니와 아랫니를 매우 음악적으로 부딪쳐 소리를 냈다.

토마스트는 매우 힘들게 몸을 일으켰는데, 일어나면서 빵장수처럼 큰 방귀를 뀌었다. 똥이 이어서 나오고 쉰내 나는 오줌을 싸는 바람에 모든 악마들을 모아놓은 것처럼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가 안절부절못하고 똥을 싸댔기 때문에 청중들은 코를 막기 시작했다.
(음성 언어를 사용하지 않은 몸짓 언어로 펼치는 철학 대결 ㅋㅋㅋ아오 진짜 왜 이런 거 읽으면 자꾸 몸짓 흉내내고 싶고 흉내내야지나 무슨 모양인지 이해되고 ㅋㅋㅋ완전 등신 같은데 파뉘르주의 몸짓으로 토마스트 격퇴되고 똥오줌 지림 ㅋㅋㅋㅋㅋ)

-왜냐하면 (긴 바지 앞주머니를 보여주며) 여기 장 죄디 선생이 당신에게 요란스런 춤을 추게 만들어 뼛속까지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이 친구는 여성에게 매우 친절하고 당신에게서 부대사항들과 쥐덫 속에 부풀어오른 귀여운 가래톳을 잘 찾아낼 줄 알기 때문에 그가 지나간 다음에는 먼지를 털기만 하면 된답니다.

─그래도, (그가 말했다) ‘보몽 자작에게’ 를 가지고 동음이의(同音異義)의 표현을 만들어보세요.
─몰라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것은 (그가 말했다) “아름다운 보지에 자지가 올라탄다” 랍니다. 그러니 이것에 관해 당신의 고상한 마음이 갈망하는 바를 하느님께서 내게 베푸시도록 기도하세요. 그리고 호의를 베풀어 이 묵주를 내게 주세요.
(주: 프랑스어로는 앞문장은 “A Beaumont le Vicomte,” 뒷문장은 “A beau con le vitmonte” 이다. 그러니까 m과 c 두 자음의 순서를 바꾸어서 만든 말장난이다.)

그러나 제일 멋진 장면은 행렬을 할 때였다. 그 행렬에서 60만1천14 마리 이상의 개들이 주위에 몰려들어서 그녀에게 수없이 많은 고통을 주었다. 그녀가 지나간 곳마다 새로 온 개들이 뒤를 따르면서 옷자락이 스치고 지나간 길에 오줌을 싸대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 광경에 모두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목덜미에까지 올라타 아름다운 의상을 망쳐놓는 개들의 행동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로서는 자기 집으로 피신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개들은 뒤를 쫓고, 그녀는 몸을 숨기려 하고, 하녀들은 웃어댔다.
(이것은…500년 전 ‘연애의 목적’ 미친 파르뉘주 새끼가 귀부인 꼬시면서 성폭력 하고 앉았음… 여자 꼬시면서 자자, 하자, 보몽 자작에게 줄여봐- 이지랄하고 있음...
그러다 실패하니 앙심품고 발정난 암캐 성기 갈아서 여자 비싼 옷에 바르고 튀어서 동네 수캐들이 와서 오줌싸고 난리남...스토커에 폭력범...웃기만 할 수가 없다...유서깊은 미친놈...황당무계한 듯 핍진함….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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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그가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악마들을 보았으며 루치페르와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었고 지옥과 샹 젤리제Champs Elisee에서 훌륭한 식사를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모두의 앞에서 악마들이 좋은 친구들이라고 단언했다. 지옥에 떨어진 자들에 관해서는 그는 파뉘르주가 자신을 너무 빨리 소생시켜 매우 유감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가 말했다) 그들을 보며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신분은 이상하게 바뀌어 있었습니다. 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낡은 신발을 수선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것을 보았답니다.
크세르크세스는 겨자 사라고 외치고,
로물루스는 소금 장수,
누마는 못 장수,
타르키니우스는 수전노,
피소는 농사꾼,
술라는 뱃사공,
키루스는 소몰이꾼,
테미스토클레스는 유리 장수,
에파미논다스는 거울 장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측량기사,
데모스테네스는 포도밭 일꾼,

아이네이아스는 방앗간 주인,
아킬레우스는 염색업자,
아가멤논은 식충이,
오디세우스는 풀 베는 일꾼,
네스토르는 사금 채취하는 일꾼,
다리우스는 변소 청소부,
안쿠스 마르티우스는 배 밑창 수선공,
카밀루스는 나막신 제조공,
마르켈루스는 잠두 까는 일꾼,
드루수스는 아몬드 껍질 까는 일꾼,
아프리카의 스키피오는 나막신을 신고 포도주 찌꺼기를 팔라고 외치고 다니고,
하스드루발은 가로등 켜는 인부,

모든 원탁의 기사들은 악마 나리들이 물놀이를 하고 싶어할 때 리옹의 뱃사공이나 베네치아의 곤돌라 사공처럼 코키토스, 플레게톤, 스틱스, 아케론, 레테 강417을 건네주기 위해 노를 젓는 불쌍한 날품팔이꾼들이 되어 있더라구요. 그런데 건네줄 때마다 대가라고는 손가락으로 콧등을 한 대 맞는 것뿐이었고 저녁때가 되어도 젖은 빵조각밖에는 받지 못하더군요.

파리스는 누더기를 걸친 거지,
아킬레우스는 건초 다발 묶는 일꾼,
캄비세스는 노새몰이꾼,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항아리 닦는 일꾼,

클레오파트라는 양파 장수,
헬레네는 몸종들의 뚜쟁이,
세미라미스는 거지들의 이(?) 잡이,

이런 식으로 이 세상에서 대귀족이었던 사람들은 저 세상에서 밥벌이를 하며 불쌍하고 초라한 삶을 살아가게 마련이지요. 반대로 철학자들과 이 세상에서 궁핍했던 사람들이 저 너머 세상에서는 자기들 차례를 만나 대귀족이 된답니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왔던 것 같다. 그걸 더 웃기게 만든 듯...그런데 직업에 귀천 있던 세상 고생하며 사는 걸 귀족에 무사였던 놈들 노동자로 만들어 놓고 비하함…)

-
만일 여러분이 내게 “선생, 이런 시시한 이야기와 웃기는 농담거리를 쓰다니 당신은 별로 현명하지는 못한 것 같소”라고 말한다면, 나 역시 그대들도 그것을 즐겨 읽는 것으로 보아 별로 나을 것도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소일거리로 이것을 썼듯이, 여러분도 즐거운 소일거리로 이것을 읽는다면, 그대들과 나, 우리는 수많은 타락한 성직자들, 가짜 신자들, 달팽이들, 위선자들, 독실한 신자인 척하는 자들, 방탕한 자들, 편상화를 신는 자들과 세상 사람들을 속이기 위하여 가면으로 위장한 그런 당파에 속한 자들에 비해서는 용서를 받을 만하다. (라블레가 소일거리로 쓴 것을 내가 소일거리로 읽었다. )
이상 팡타그뤼엘 발췌.

+이미지는 ‘인터스텔라’의 블랙홀 가르강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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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끼 2023-07-30 2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이 작품을 읽으시다니… 리뷰읽기전에 우선 감탄 남기고 갑니다. 왜냐하면 저도 이 책이 추천목록에 있었는데.. 음…. 전직.. 저도 전직하고 싶습니다.. ㅠㅠ

반유행열반인 2023-07-30 22:22   좋아요 1 | URL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갈 수 있는 어디로든 도망쳐 ㅋㅋㅋ 목록에 넣고 오래 묵었습니다. 우끼님도 라블레 병맛 즐기실 수 있길...

Yeagene 2023-07-31 17: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려요 열반인님 ㅎㅎ 읽으면서 여러번 감탄하고 갑니다..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3-07-31 17:15   좋아요 1 | URL
그냥 저같이 시간 남아도는 한량들을 위해 르네상스 한량이 쓴 이말년시리즈였습니다 ㅋㅋㅋㅋㅋㅋ축하 감사합니다. 파티파티 오예

은오 2023-08-02 1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열님도 중도하차를 하기도 하시는군요. 계속 재도전하시는것도 신기하곸ㅋㅋㅋㅋㅋㅋ8년만의 완독 축하드립니다 잘난척 실컷 하세요! ㅋㅋㅋㅋㅋ 아 난 잘난척 할만한 책 언제 읽지.... 한번 덮으면 팔려가거나 책장에서 계속 썩는 내 책들이여..

반유행열반인 2023-08-02 21:13   좋아요 0 | URL
사실 완독 고집이 있는 쪼렙 독서가(저런 고집 부리면 쪼렙이래요...)라 막 몇 개월 쉬었다가도 다시 보고 중도 하차 손에 꼽히는 드문 이슈여요 ㅋㅋ 잘난척 할 만한 책이 따로 있지 않고 남들 에비지지 많이 안 보는 거 아무거나 보고 으쓱 하면 다들 우와아아 뭔지 모르지만 쟨 봤대 하고 박수칠 거에요 ㅋㅋㅋㅋ썩는 책들 끼고 있는 걸로 치면...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책장 늘리느라 이사다닌 처지라 ㅋㅋㅋ
 
여자는 허벅지 다나베 세이코 에세이 선집 1
다나베 세이코 지음, 조찬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20230727 다나베 세이코.

부상과 질환으로 몇 달 운동 부족이다가, 상태가 좀 나아졌다 싶을 즈음 실내자전거 운동을 시작했다. 페달만 뱅뱅 돌리면 심심하니까, 평소에는 잘 안 보는 텔레비전 틀어보니 오, 섹스앤시티 리부트 시리즈가 나와서 신나게 봤다. 더 찾아보니 OTT서비스에 섹스앤더시티 시즌1부터 6까지 전부 실려있었다. 20년 쯤 전에 신나게 봤던 거라, 그래 올해는 수학이고 수능이고 다 망했으니 이거나 보면서 운동하면 한 해 잘 가겠다- 하고서 신나게 시즌2 후반부까지 보고 있었다. 많이씩 보면 금방 닳는다고 한 편 두 편 아껴보던-어느 날,(은 7월 첫날, 기억할 수 밖에 없음…) 헤헤 운동해야지 하고 리모콘을 잡았는데, 없다. 내 드라마 다 어디 감? 리부트 시즌 말고는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내 드라마 어디 갔어!!!! 곁의 사람에게 하소연하니 공지사항에 6월 말일자로 HBO드라마들이랑 일부 컨텐츠 종료 예고가 있었다고 했다… 아아…
나보다도 어리던, 30대 중반의 뉴요커 언니들 연애 망하는 거 보는 재미가 사라져 버렸다. 앤저슽라잌땟- 미인와이일- 하는 캐리의 내레이션이 막 환청처럼 머무는데 그 친근한 소리가 다 사라졌어… 알라딘을 뒤져보니 뭐 3만 얼마면 전시즌 풀패키지 디브이디를 구할 수 있다. 구매를 진지하게 고려하다 집어치웠다. 내가 즐겁게 볼 수 있던 거도 운동하면서 리모컨만 샥 켜면 되니까 그랬지… 사실 20년 전에도 섹스앤시티 전시즌을 시디에 다 구워놨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아기 때 막 시디로 원반던지기 하고 부러뜨려서 반달돌칼 만들고 너무 위험하길래 그렇게 애지중지 모아둔 불법 저장물들을 다 버린지가 2년 밖에 안 됐다. 뭘 사...그냥 책 봐…

뉴요커들이 신나게 섹스칼럼니스트의 성생활 드라마를 보던 1998년 경, 한국에서는 이영애, 손창민 주연의 ‘내가 사는 이유’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나는 중학생이던 이무렵 한 번 보고, 고등학생 때 짝사랑하던 남자애가 이 드라마 죽이지-해가지고 2001년엔가 유선방송에서 여름방학 때 낮에 틀어주는 걸 또 신나게 보았었다. OTT놈들은 내게서 뉴요커 언니들을 앗아가고, 1975년 마포 도화동 가난한 마을 이야기를 디지털로 떠놓고(싱크 좀 안 맞음) 보라고 하네… 그래서 요즘엔 이걸 보며 운동한다.

20대 후반의 이영애는 정말 예쁘다. 전에도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는데, 애숙이(이영애 역)가 진구(손창민)를 혼자 너무 좋아해서 맨날 깡패짓 하고 쳐맞고 다니는 걸 슬퍼하는데, 진구는 동생을 의료사고로 죽인데다 본인을 방화범으로 3년 간 징역 살게 만든 원수인 의사의 딸, 대학생 정희(이민영)를 좋아하고 마음 아파 한다. 가난한 동네 이야기라 희망도 잘 될 가능성도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여기 나오는 남자들은 진짜 답이 없다. 포장마차 대상으로 사채업 하면서 도박에 빠져 돈과 상권을 다 날리고 자신을 좋아하는 술집 여자 명화(강성연)에게 돈을 왕창 뜯어내고도 윽박지르는 광팔이(김호진), 자녀 죽고 받은 보상금을 들고 날랐다 다 탕진하고 몇 년만에 기어들어오면서 어린 애인까지 데리고 온 무책임한 아버지 박성달, 포장마차 하는 부인 돈 뜯어다 도박하고 돈 날리고 도망간 덕배, 애숙을 술집에 팔아먹은 아버지… 여자들은 살겠다고 술집에서 일하고, 애들 데리고 마늘 까서 팔고, 포장마차를 운영하며 힘겹게 사는데, 남자들은 사고치고 싸우고 망하고 그와중에도 여자한테 윽박지르고 돈 뺏어가고 난리다.

내가 태어나지도 않은 1970년대 드라마를 보면서, 참 망할 놈의 세상이었군… 여자 팔자 남자 팔자 사내는 어쩌고 운운(주로 진구 엄마 역의 고두심이나 마담 역의 윤여정이 많이 하는) 당시 성역할에 대한 통념을 계속 반복하고 한탄하는 걸 보다가… 나란 새끼는 세상의 균형을 중시하다보니 이제 여성주의 책 하나 읽었다고 또 개 빻은 책을 어디서 골라다 읽고 있었다. 이 드라마 배경 무렵의 1970년대에 일본 잡지에 연재되던 음담패설 에세이를 모은 책이었다.

‘조제, 호랑이, 물고기들’ 영화는 안 봤는데 소설집은 어쩌다 읽고 그 무렵 다나베 세이코의 에세이를 두 권이나 갖춰놨다. 사자마자 펼쳤다가 아...왜 샀지...하고 덮고 몇 년이 지났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아무 책이나 마구 읽고 인생을 탕진하는 문란한 여름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그 사이 항마력이 생겼는지 욕하면서도 저 시절은 한 일 불문 빻았구나...하면서 읽었다.

다나베 세이코는 소설은 나름 감수성 울리는 문장으로 잔잔하게 써 놨던 것 같은데(기억 잘 안 남), 에세이는 뭔가 새초롬하고 점잔 빼면서도 할 말 다한다는 느낌이었다. 뉴욕의 섹스칼럼니스트 캐리가 90년대 후반에 등장했다면 일본 오사카엔 70년대에 진작에 그런 작가가 있었다… 뭐 요즘 유튜버들이나 온라인 매체에 비하면 그때의 노골적인 표현이래 봤자 댈 것도 아니지만… 피씨주의란 게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절에 비하면 경직되고 함부로 농담 던지는 일도 삼가야 하는 시대가 왔다. 라블레를 함께 읽고 있는데, 밀란 쿤데라와 함께 나도 라블레의 후예인 것 같긴한데… 다나베 세이코도 옛날 사람에 옛날 감수성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쪽에 가깝긴 한데… 이제는 이런 책 못 써요… 못 내요… 욕 먹을 걸… 나는 말장난과 농담과 (아이 이름에도 한자 해-해학, 웃음, 조화 등등-를 넣었지…) 패드립과 섹드립을 현란하게 구사하는 젊은이였지만, 그래서 이십대 어린이가 중년 아저씨 급의 희롱을 구사하여 주변을 당황하며 웃게 만드는 게 특기였지만(원조 미러링), 이제는 진짜 중년 아저씨가 되고 말았다… 40대의 세이코는 이런 글을 써서 나한테 까지 닿는 책을 남겼지만, 중년 문턱 밟은 이 시대의 나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아서 어떻게 하면 빻지 않고도 웃길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그건 너무 어렵다…(야 그냥 웃길 생각을 하지 마…) 인간 웃음 지분의 많은 부분은 말장난과 샤덴 프로이데와 혐오와 괴롭힘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거기서 더러운 것들을 걷어내고 곱게 써 내면 시가 되었겠지… 별 수 없다. 곱고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하고 착하게 살아야겠다. (퍽이나)

+밑줄 긋기
-엄마는 수화기 너머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 무슨 품위 없는 짓이니. 이렇게 천박한 글 네가 쓴 거 맞아? 섹스가 어떻고, 변태가 어떻고? 다 큰 여자가 변태라니, 이걸 어쩌면 좋니. 세상 사람들 이거 읽고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 다 비웃을 거다. 이제 집 밖에 어떻게 다니라는 거야. 창피, 창피, 이런 창피가 없다. 조상님 볼 낯도 제자들 볼 낯도 없어.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본다 한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90, 야한 에세이 연재한다고 엄마한테 욕 먹는 전화 받는 가엾은 세이코… 나이 40 넘어서도 저러면 옛날 사람들은 부모가 죽어야지나 아이 취급에서 자유로워졌는가...지금도 뭐 다를 건 없을지도...다들 엄마 아빠 앞에서만 얼음)

-중년이란 무엇인가. 가모카 아저씨와 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음, 한마디로 말해서 ‘출구 없음’ 이 아닐까요?“
일, 가정, 성생활, 취미, 돈벌이, 아이, 건강, 술. 이 모든 것의 앞날이 불 보듯 뻔하다는 것. 통로라는 통로는 모두 막히고 사방팔방 어디를 봐도 막힐 대로 다 막힌 상태. 장폐색에 걸리지 않는다면 다행인 정도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이상 좋아질 것 같지가 않아요. 내 전성 시대도 지금 정점을 찍은 게 아닌가 생각하면, 이제는 더 나갈 출구도 없고 뭘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닌 것 같습니다.“
(192, 와 이거 왜...그런데 이런 소리 젊은 시인도 했거든요. ‘우리라고 부를 이 없음/우주선 없음/ 다른 세계 없음/ 희망의 내용 없음 -육호수, ’희망의 내용 없음‘ 중)

-나는 ‘옛날 러일전쟁 때…...’라며 말문을 트는 노인이 가장 못마땅하다. (240, 우리 세대는 금칙어 뭐 있을까… 옛날 IMF때, 옛날 한일월드컵 때, 옛날 코로나19 때 등등…...)

-“인생은 길고 예술은 짧다는 것을 이제 슬슬 깨달아야 합니다. 범인의 몸으로 뭐하러 그렇게 종이 쓰레기를 만드십니까. 갱년기도 다가오는데 적당히 일도 줄이시고 쉬엄쉬엄하세요.” (270, 이 책의 팔할 정도는 오세이상(다나베 세이코의 애칭)의 말친구겸 술친구라는 가모카 아저씨의 활약이다. 그런데 도깨비 같이 무섭게 생긴 40대남이라는 이 사람이야 말로 구시대의 썩은 유물, 핵폐기물급으로 개빻았다. 열심히 글쓰고 있는 오세이네 집에 와서 한다는 소리가 저따위임… 웃기고 실없고 야한 농담 따먹기나 하는 저런 아저씨랑 왜 놈… 문득 궁금하기도 하다. 맨날 집에 찾아와 술 마시고 야한 말 주고 받고 무슨 사이냐 둘이… 왠지 온갖 빻은 아저씨의 집합의식 같은 캐릭터를 가상으로 만들어서 상상 속 친구처럼 등장시켰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다 읽고 나서 역자 후기를 보니 반전은...가모카 아저씨가 남편...동료 작가 죽은 후 장례식에서 만난 그의 남편과 동료 아이들 키우며 오래도록 살았다고 한다. 끝까지 시치미 떼는 솜씨 참 ㅋㅋㅋ)

-작년에 있었던 포르노 비판 때도 그러더니, 이번에는 성적 퇴폐와 방종을 유감이라고 했다. 혼전관계, 동거, 난교, 프리섹스, 스와핑, 동성애, 변태성욕 등을 용인하지 않겠다고 말했으며, 청소년에게는 순결을 권장하고 있다(청소년에게 권장할 정도면 당연히 중년에게도 권장해야 되는 것 아닌가. 순결하지 않기로 따지면 중년들이 훨씬 심하다).
하지만 성의 해방과 인간의 자유, 특히 여성의 자유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자가 홀로 자립해 살아가고자 한다면, 성의 자유는 제 손에 꽉 쥐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살기가 만만치 않다.
그랬을 때, 어디까지가 방종이고 어디까지가 착실한 삶인지 법률과 도덕 따위로 판단할 수 있다고 보는가?
(277, 1976년 경의 글이고, 뭔가 탈탈 까고 있는 대상은 공산당, 그 보수성 ㅋㅋㅋ 나는 공산당에 의지하거나 친근감을 가지는데, 니들이 이럴 때 짜게 식어-하는 글 ㅋㅋㅋ맥락이 왠지 모르게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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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7-28 15: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ㅋㅋㅋㅋㅋ 20대 유열님도 궁금하고 지금의 유열님도 궁금하다.... 유열님의 빻음과 올바름을 왕래하는 균형적인 독서일기 재밌습니다. ㅋㅋㅋ 앤드류 포터 소설 아까 땡투했어요! 😍

반유행열반인 2023-07-28 15:28   좋아요 1 | URL
으아니 ㅋㅋㅋ은오님 각잡고 땡투 누르고 주문하고 소설!소설을 읽자! 하는 경건함이 여기까지 전해 옵니다...
저의 이십대는 아마도 은오님보다도 훨 덜 지혜롭고 남과 무던히 지내지 못하고 그런데 또 웃기는데 강박적이고 훨씬 꼰대스럽게 깝치는 찌그래기 아니었나 싶습니다(이십대 때 직장에선 넌 오십대 같애!소리 들음ㅋㅋ)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별로 달라진 건 없네요 부끄러움 ㅋㅋㅋ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격려의 피드백 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7-28 15:29   좋아요 1 | URL
그리고 은오님이 청혼남발자라는 소문을 익히 들어왔는데 나한테는 한 번도 안 그런 걸 보니 생각보다 제정신 박힌 사람이구나 ㅋㅋㅋ남발은 아니고 확고한 취향에 기반한 신중한 처사구나 (좋은 일이야 자신을 지키는 선긋기) 싶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은오 2023-07-28 20:41   좋아요 1 | URL
아니 유열님 귀신인가?! 각 좀 잡았습니다 ㅋㅋㅋㅋㅋ 유열님 리뷰 찾고 땡투버튼 찾느라 좀 헤맸어요!! 😢
미쳐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결혼신청한 분들과 유열님이 결이 좀 다르긴 해요. ㅋㅋㅋㅋ 근데 유열님은 비교적 최근에 저랑 인연을 맺은 분이라 아직 안심하시기엔 이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단 지금은 제가 매번 유열님의 표현력과 재치에 감탄하는 열혈독자1이라는 사실만 밝혀두고 갑니다.
 
노란 책 - 자크 티보라는 이름의 친구 북스토리 아트코믹스 시리즈 8
타카노 후미코 지음, 정은서 옮김 / 북스토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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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5 타카노 후미코.


우연히 알게된 타카노 후미코 만화를 벌써 네 개나 봤다. 럭키 아가씨의 새로운 일, 빨래가 마르지 않아도 괜찮아, 막대가 하나, 노란 책. 볼 때 마다 그림도 스토리도 그냥 그런데… 독특함은 있는데 난 잘 못 따라 가겠다...하면서도 왜 계속 보고 있어… 이젠 그만 봐도 되겠다 싶은데 번역된 만화는 거의 다 본 것 같다 ㅋㅋㅋ이 작가가 낸 책은 37년 간 일곱 권 쯤 된다고 한다. 반 넘게 봤음 이제 됐다… 놓아주자…

책 이름과 같은 표제작 노란 책-자크 티보라는 이름의 친구, 에는 책에 푹 빠진 미치코라는 사람이 나온다. 부모도 동생들도 다정한 집인데, 미치코는 스웨터도 짜고 부모 심부름도 하고 그렇게 자라서 학교를 졸업하면 메리야스 공장에 취업할 예정이다. 티보 가의 사람들을 읽으며 자크와 이야기를 나누고 혁명, 인터내셔널리즘, 그렇게 일상에서 벗어나 이런 저런 상상을 한다. 코델리아, 하고 연극에 몰입한 나머지 배 위에 누워 죽은 척 하며 둥둥 떠내려가는 빨간 머리 앤이 생각났다.
그렇게 책에 푹 빠져 읽어 본지가 언제일까...이 달은 이 책까지 22권을 읽었다. 미쳤네… 최고 기록이다… 그런데 그냥 즐거워서 라기보다는 강박처럼 붙들고 있다. 닥치는 대로 분야 안 가리고 그냥 읽어 치우고 독후감 휘리릭 뚝딱 써 내고… 이거 아니면 딱히 할 일도 없어서요… 9월까지 항응고제를 먹는다. 하루에 한 번이나 두 번 실내자전거를 타고 다리 근육을 키운다. 책을 읽거나 인터넷을 돌아다닌다. 목적도 의무도 없이 둥둥 떠다니는 날들, 좋은 날들일지도 모르겠는데 미치코처럼 책에 반해 푹 빠져 지내진 않는다. 뭐 그렇다고…
(민음사판 티보가의 사람들은 절판이고 팔고 있는 건...동서문화사판...에비 지지 으으...)

나머지 만화들은 잘 모르겠다. 1990년대에 그려지고 발표된 만화들을 2002년에 묶어낸 책인데, 여자들은 순종적이고, 음식을 만들거나 아이를 돌보거나 남의 부탁을 거절 못하고, 뜬금 없는 놈이랑 결혼하고, 뜬금 없는 놈이랑 잠시 스치고 다시 안 만나게 되었는데 인연을 놓쳤다, 이러고…

만화책인데 이번엔 한 장면도 못 건졌나, 다시 돌아보니까 이 부분 좋았다. 책 다 읽고 서서히 등장인물들과 이별하는 장면,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인데 아빠가 그렇게 좋으면 다섯 권 다 사서 간직하라고 말해주는 부분. 나는 내가 가지고 싶으면 그냥 어떻게든 내 스스로 가졌는데, 누가 저렇게 말해줬으면 아이, 됐어요,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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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gene 2023-07-26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22권 대단하시네요 ㅎㅎ 여러가지로 부럽습니다요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3-07-26 14:00   좋아요 1 | URL
오늘도 근무하시느라 애쓰시는 예진님!! 더운 날 건강 조심하시구 얼른 퇴근 시간 다가오길 기원합니다. 구름이 넘모 귀여워요. 성견되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
 
모든 여성은 같은 투쟁을 하지 않는다 - ‘모두’의 페미니즘에서 누락된 목소리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미키 켄들 지음, 이민경 옮김 / 서해문집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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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4 미키 켄들.


제목이 멋있어서 직장에서 책 사준다 할 때 갖춰 놨었다. 그냥 여성주의 책이겠지, 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저자가 어떤 이야기 하는 줄을 몰랐는데, 원제는 후드 페미니즘, 흑인, 저소득층이 몰려 사는 지역, 음식이나 교육이나 사회 계층 사다리 올라가기 같은 기회가 제한된 곳, 주류에 속하지 못해 발언이 제한되는 사람들, 소외되고 목소리 지워지는 사람들에 대해 또다시 이야기 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존중받을 자격이라는 말이 많이 나왔다. 그대로 검색해보기도 하고, deserved, 이렇게 영어로도 쳐 봤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내 나름대로 이해해보려고 생각하다가 여러 사건들과 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방식을 돌아보았다.
비극적인 범죄나, 부조리한 시스템에 치여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온라인 상에서 접한다. 아직도 희생의 과정에 놓여 있고, 갈려나가고 있지만 어찌어찌 생명줄은 붙들고 있는,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혹은 버티지 못하고 여러 방식으로 사회에서, 구조에서 소리소문 없이 이탈한 사람들은 잘 다뤄지지도 않는다. 죽음이라는 극단에 직면해야지 그제서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애도한다. 그런데, 죽은 이들은 효심이 깊고, 가족이나 자기가 책임진 사람들을 잘 챙기고, 늘 성실하고, 웃으며 친절하게 남을 대하고, 남을 위로할 줄 알고, 등등 온갖 미덕을 갖춘 이들이었음을 유족과 주변인들과 미디어가 열심히 알린다. 정말 그런 좋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그런 좋은 말을 덧붙일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의 죽음은 덜 슬픈 일인 것일까. 덜 아까운 죽음일까. 아니면 적당히 나쁘지 않을 정도의 평범한 삶을 살던 사람이라면 죽은 뒤에는 그렇게 더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고 숭고하고 아쉬운 죽음으로 그려지는 것일까. 극과 극의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은 많지 않고 대부분은 적당히 착한 면과 나쁜 면이 섞여 있고 그 면을 마주하는 사람들이 달라 사람의 선하고 악함은 상대적인 것이라 여기는 나에게는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지만 해결될 수는 없는 궁금함이었다.

위대한 업적을 가진 이들을 안타까워하고 추모하는 행위는 그와 함께 하던 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의 잘못까지 없던 일로 부정하고, 그의 잘못을 고발하고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을 세상에 밝힌 사람의 피해까지 그저 호소, 주장으로 모는 인간들은 잘못되었다. 반대의 경우도 보았다. 관심을 가지던 퀴어 활동가가 사망했는데, 그의 죽음과 함께 그가 저질렀던 성폭력, 연인간 폭력 등의 폭로가 이어졌고, 피해자들은 그의 추모 자체가 2차 가해라고 해서 모든 추모행사가 취소된 걸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피해자들의 회복을 빌고 행복을 기원하지만, 복잡한 마음도 들었다. 모든 죽음이 같은 무게는 아니라는 것. 추모와 애도를 금지당하는 죽음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착하게 살아야지, 하는 소리를 한다. 죽고 나서 조롱 받고 잘 죽었다, 소리 듣기를 싫어한다. 죽고나면 자신은 듣지 못할 말들인데도. 내가 죽으면, 저 하고 싶은데로 사는 팥쥐 엄마에다가 이기적이고 할 말 못할 말 안 가리고 다하고, 악성독후가미스트였고, 투철한 직업 정신도 갖추지 못해서 맨날 도망갈 구석만 찾다가 결국 실패한 인간이었습니다… 하고 조문객 없는 텅빈 빈소에 누워 있다가 태워질까. 아니면 그래도 용인할 만큼의 나쁨이라서 그는 좋은 00였습니다...하고 옅은 화장 발라주듯 컨실러는 칠해주려나… 아직 안 죽어서 알 수가 없네. 죽어서도 알 수는 없겠네. 이러나 저러나 죽은 뒤의 내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인종 문제와 성 평등 문제가 얽히면,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도, 범죄피해나 경찰의 과잉진압 등 억울한 사망 사건도 아주 많이 연루되어 있긴 하지만, 내가 고민한 것 이상으로 복잡한 측면이 많았다. 여성주의에 관한 많은 담론과 저술과 주도적인 운동이 시작된 것이 백인여성 중산층 계층에서 였고, 우리가 읽을 걸 많이 남겨준 것도 대부분 그 사람들이고, 그들이 제도, 인식 측면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전 읽은 책들의 퀴어 문제에서도 그랬고, 인종, 장애, 빈곤, 저임금 비정규 노동계층 등 다양한 교차적인 문제가 엮이기 시작하면 누군가의 권리 운동이 제대로 대변되지 못한 소외된 사람들을 더욱 소외시키는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었다. 이 책은 후드 페미니즘이라는 원제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지역 출신이자 흑인, 여성, 제도권 교육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겪어온 부조리들을 날을 세우고 비판하고 있었다. 번역자는 이런 부분 중 어떤 주장들(트럼프를 백인여성들의 지지로 당선된 것처럼 오도하는 등)은 많이 부당해 보였다고 했다. 우리는 흑인도, 백인도 아니지만, 어떤 목소리에 더 이입하게 되는지에 따라 옹호하는 입장이 달라지는 것도 신기하다. 어떤 책을 더 읽고 어떤 주장들을 더 접하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 공명할 만한 사회계층적 상황, 성적 지향, 비혼/혼인자 여부, 출산/비출산 여부, 소속 직업, 사는 동네, 장애나 질병 여부, 성폭력 피해 경험 여부 등등...다 쓸 수도 없네. 제목 그대로 모든 여성은 같은 투쟁을 하지 않는다. 가부장제나, 성차별적 제도와 인습과 가족 관계, 그런 공통된 투쟁의 대상은 있을텐데 거기에 인종, 장애, 이민자, 성매매, 교육, 빈곤 문제 등등...을 넣어야 한다, 그런 주장에는 그게 왜 우리 문제죠? 하는 벽에 부딪힌다.

특정 성별로 구성원이 쏠려 있는 커뮤니티에 가끔 간다. 그냥 뭔 생각들 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나 궁금해서 주로 남초커뮤니티에 구경간다. 거기서는 시사 이슈나 뉴스, 유머 컨텐츠, 게임, 스포츠 소식 같은 것을 볼 수 있지만, 자신들과 다른 이들에 대한 혐오 게시물도 아주 많이 볼 수 있다. 여성 혐오나 퀴어 혐오는 말해 뭐해...정도로 일상적이고... 인어공주 배역을 자기들 보기에 예쁘지 않은 흑인 배우가 맡았을 때는 온갖 욕설을 쏟아내며 흑어공주 어쩌구 난리도 아니었다. 동시에 흑인들이 아시안 차별하고 싫다고 하는 컨텐츠들은 어디서 또 잘들 퍼와가지고 지들 차별 당하기 싫다면서 지들도 차별해, 이러고 욕을 하고. 심각한 범죄가 발생하면 중국인이냐, 조선족이냐, 중국인에 대한 민족주의적 혐오는 진짜 어마어마했다. 히틀러 지지하고 유대인 멸시하다 못해 학살하던 평범한 독일사람들 모습이 아마도 저랬겠다...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온라인 상에서 벌어지는 타자에 대한 혐오 표출은 볼 때마다 섬뜩하다. 대상은 얼마든지 넓어질 수 있어서 맘충, 잼민이, 어떤 때는 교사, 어떤 때는 학생(급식충), 또 어떤 때는 학부모...돌고 돈다. 어지럽고 슬프다… 뱅뱅 돌다보면 나는 어느 자리에든 앉을 수 있고 어느 자리에 앉든 손가락질 받을 수 있지...

다시 책으로 돌아오면...100여쪽 쯤 되는 부분까지는 무리 없이 잘 읽혔다. 그런데 그 다음 가부장제 다루는 파트 부터 아니 문장이 왜 이래...번역기 돌렸냐...이 부분 읽기 싫었냐… 딱히 어려운 부분도 아닌데 말이 매끄럽지 않았다. 그래서 읽다보니 개빡쳤다. 아 몇 번 더 윤문을 좀 하라고… 한 가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다른 세계의 글을 만나려면 번역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이런저런 사상서들 읽는 사람들은 특히나 어려운 독서에 난감해 한다. 철학이라는 게 워낙 어렵기도 하고 논리적 글쓰기 따라가는 게 두뇌가 후달리는 활동도 맞지만… 이 책은 저자가 경험한 것, 주장한 바가 거의 다 이고 뭐 엄청 난해한 사상적 받침 이런 걸 가져온 책도 아닌데, 읽기에 이렇게 어색해서 아, 별 어려울 말도 아닌데 다시 돌아가 읽고 (그게 처음부터 그런 것도 아니고 책 중간부터 이러면 점점 대충 했네...할 수 밖에...) 그러면 진짜 나는 징검다리를 탓할 수 밖에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다시 옮겨질 일이 드물 독점 번역서들은 진짜 역자들이 책임감 가지고 잘 옮겨 줬으면 좋겠다. 과도한 남성성, 유해한 남성성, 반복되어 제시되는데(검색해도 잘 안 나옴) 이게 사례나 개념 설명이나 원문 병기도 없이 붕 뜬 채로 나오는데 그걸 꼭 설명해줘야 아니! 이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개념이 지시하는 바가 뭔지 저자든 역자든 좀 멍청한 독자한테(멍청하니까 읽지 쓰지 않고) 친절했으면 싶었다. 같은 번역자가 옮긴 만화책 볼 때는 텍스트가 그리 많지 않아서 심각하지 않았는데, 좀 밀도 있는 텍스트 번역본은 앞으로는 믿고 거를 것이다. 번역이 게이트키핑이 되 버린다는 거 너무 슬픔...나의 독서 기회, 알 기회 앗아감… 그치만 참고 참으며 저자의 뜻을 암호 해석하기에는 진짜 견딜 수 없는 문장이라는 것이 있다… 그게 복수형이고 너무 심하면 전 못 읽겠습니다… 그래도 펼친 책이라고 최대한 읽어보겠다고, 그지 같은 문장들을 최대한 무시하며 전달하려는 뜻만이라도 알아들어보려고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밑줄 그은 거 아니고 보다보다 빡쳐서 아 이건 좀 심한 거 아니우 이래서 책 팔리겠어...번역 뿐 아니라 편집인들은 교정도 편집도 안 보냐 오타(곤론장(158),으료(319)가 뭐야…트랜스젠더들은~겪는다(309)...어려움 두 번 겪게 문장 중복...하아...)랑 비문 안 고치냐...개짜증난 순간들.(일일이 다 옮기지도 못함. 아 난 이러면 번역가 혐오냐 ㅋㅋㅋㅋ최대한 국경 건너 오는 말과 뜻들 섬세하게 전달하려고 불면의 밤 보내는 선생님들은 존경합니다...야 이새끼야 이건 존중받을 자격이냐 ㅋㅋㅋㅋ혼란하다 혼란해...혼란한 독서였다)

-중산층이 아닌 소녀들이 화려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진열대에 놓인 예쁜 물건들을 찾고, 심지어 ‘적절한’ 것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행동을 한다면, 그들은 그들 자신이 여전히 길 찾는 법을 익히고 있는 시스템의 잘못된 끝에 다다르게 된다. (119-120, 아니 쉼표 앞까진 그렇다, 하겠는데 뒤에 문장 진짜 뭐라는 거야 ㅋㅋㅋ앞뒤 맥락 짤라내고 뭐라 하는게 아니라 앞뒤 다 봐도 저건 그냥 문장이 안 맞지 않나...이 챕터의 말들은 내내 저런 식이다. 지시어 남발에 문장 좀 끊거나 부연할 거를 그냥 영어 문장 질질질 뭔 영어독해 시간에 어순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사람 헷갈리고 환장하게 하는 번역투들...)

-궁극적으로 주변화된 공동체 내부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한 가지 장기적이고도 근본적인 변화가 있다. 바로 가부장제 서사에 도전하는 대신 이를 반복하고자 하는 구조의 수가 감소하는 것이다. (124, 부사어 붙이려면 그게 뭘 수식하는지는 좀 명확히 해주고 ㅋㅋㅋ반복하고자 하는 구조의 수가 감소한다니…어쩌다 이런 문장을 만들어 내셨습니까...)

-오늘날 존중받을 자격의 정치는 한걸음 더 나아가, 흑인들이 자신이 가치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자력 구제라는 심상을 만들어내 요구했다. (134, 비문은 끝도 없다. 주어 서술어 연결을 어찌할지 도무지 모를 문장이 많다.)

머리 모양과 피부색, 외모에 관한 부분은 흑인에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라서 조금 공감이 되었다. 나는 정말 심한 악성 곱슬 머리여서 어릴 때는 남자아이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았고, 그나마 착한 이들에게는 동정의 대상이 되었으며, 미용실에 가서 커트 문의를 하면 늘 길게 기르고 매직스트레이트를 해서 머리 무게로 펴진 상태를 유지하는 것 밖에는 솔루션을 얻지 못했다. 그렇게 머리카락에 대해서는 체념 하고 가끔 사회 생활 지장 안 가게 매직 스트레이트를 하고 (그러면 동료들이든 학생들이든 우와 여신 되셨네요 하고 찬사… 긴 시간과 비싼 비용을 들여야만 관심 받고 사람 취급 받는 처지… 그래서 일부러 자주 미용실 안 가고 연례행사 이벤트 마냥 가는 쪽으로 ㅋㅋㅋ그 편이 평판이 후하다...) 살았다. 서른 살에는 처음 탈색과 염색을 해 보았고, 마흔 살에는 처음 숏컷을 해 보았다. 같이 사는 사람은 그렇게나 싫은지 왜, 마음에 안 들어? 하니까 대꾸조차 안 한다. 응답 거부...ㅋㅋㅋ 그런데 나는 와 진짜 곱슬이라고 커트 어렵다더니 세상 깔끔하고 편안하고 가벼운데 엉킨 양털 뭉치 같은 걸 억지로 달고 다녔구나...싶다. 내가 커트 할 때도 black curly hair short cut 이렇게 검색해가지고 이미지 저장해서 미용사님 보여주니까 대충 알겠다는 듯 끄덕끄덕 하셨는데 ㅋㅋㅋ 엄청 바글바글해질 줄 알았던 머리는 잘라내니 오히려 덜 바글바글하고 나는 뭔가 오랜 세월을 속은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

음식에 대한 관점은 조금 슬프긴 했다. 당일 배송, 새벽 배송, 신속 택배 배송으로 집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가고도 굶어죽을 걱정 안 하면서 살던 나여서 식품 사막, 이라는, 집 주변에서 저장 가공식품 외에는 신선식품 구하기 어려운 동네에 관해서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다. 신선한 음식을 구하더라도 그걸 보관할 냉장시설과 조리도구를 갖추는 것도 큰 비용이고, 오염된 물보다는 탄산음료가 최선의 선택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집 주변에 대형 마트가 있어도 거기서 괜찮은 식재료를 살만큼의 소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고통이라는 것… 건강한 식단이나 음식 이미지들을 ‘흡사 요정들이 먹는 빵처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닿을 수 없는(170)’것이라고 표현할 정도의 삶이란...그런데도 생존을 위해 살이 찌건 당뇨가 오건 일단 먹을 수 있는 걸 적당히 먹고 버텨야 하는 삶… 이건 굳이 다른 나라 빈곤층까지 안 가더라도 주위의 안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 같다. 그러니 왜 그런 걸 먹니… 라면이랑 삼각김밥이 뭐니… 건강하게 챙겨먹어야지… 하는 것도 지가 챙겨줄 거 아니면 입다물어야지...에휴…

-“왜 그들은 네가 하는 걸 못 했어?”라는 질문이 아니라, “왜 우리는 다른 모든 이들에게 같은 지지와 접근을 허락하지 않아?”라는 질문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페미니즘이 싸워야 하는 전장이다. (341, 거의 막장 쯤 와서야 짜증 안 내고 오롯이 진지 빨고 밑줄...ㅋㅋㅋㅋ)

책 후반부의 주거 위기, 임신 중절과 임신 출산 중 사망(이걸 왜 모성 사망이란 불명료한 표현을 쓰는지 잘 모르겠음), 소수자의 양육에 대한 글들은 출산과 육아를 선택한 입장에서는 읽어 볼 만 했고, 학교 교육에 대한 입장은 요즘 일어난 사건과 한국 교육 상황과 비교할 때 완전 반대되는 주장을 하고-저 편하자고 반항아들 경찰 손에 넘겨 감옥 보낸다고 페미니스트 백인 여교사들을 엄청 까고 있어서 아야...했지만 뭐 인종과 계층과 평등 앨라이 등등 다양한 담론 연결하는 관점은 내내 생각할 만한 거리를 주었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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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 밀란 쿤데라 전집 15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20230723 밀란 쿤데라.


3년 전 소설 강좌 첫 시간, 자기 소개 하는 자리에서 선생님은 수강생들에게 좋아하는 작가를 물어 보았다. 나는 김금희, 그리고 밀란 쿤데라요, 했고, 선생님은 극과 극의 작가를 좋아하시네요, 했다. 그 말이 조금 갸우뚱 했다. 김금희 소설집들 초판 표지 그림이나 제목이 다 말랑 달달한 느낌으로다가 책 집어들 때 착각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긴 하다. 막상 읽고 나면 이게 뭐여, 내가 뭘 먹은 거여, 달콤상큼한 것 기대한 사람들에게 인생의 진한, 떫은 맛, 약간 씁쓰레한 맛, 거기에 조금 긴가민가한 단맛을 쳐주지 김금희는. 나한테는 블랙유머로 읽히는 부분도 많고. 그러면 밀란 쿤데라랑 꼭 극점이라 하기도 그렇다. 그런 걸 알면서도 이번에 나온 산문집 ‘식물적 낙관’은 차마 사지도 못하고 있다. 식물이나, 낙관이나, 나한테 다 아득한 낱말들이다. 제목에 속지 말자! 해놓고선 또다른 기대를 못하는 건, 몇 년 전 인스타그램에서 가끔 훔쳐봤던 김금희의 식집사 노릇과 뭔가 평온해 보이는 일상이 다 일 것 같아서? 소설가는 좋은 문장은 소설에 써 먹으려고 짜게 다 아껴두고 산문집에는 찌끄래기만 쓴다는, 기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선입관 때문에? ㅋㅋㅋ
왜 밀란 쿤데라 이야기 하려다가 김금희가 길어짐… 하여간에 전작 했고 커튼만 남겨놨어요, 했더니 선생님은 계속 남겨두세요 ㅎㅎ 했다.

엄마는 십 몇 년 전 사이버대학 문창과에 들어가서 수업 중 강독으로 커튼을 먼저 보셨다. 펼쳐보니 밑줄이 한 가득…(책 한 권 다 밑줄임…) 나는 밑줄 그은 책 안 좋아하는데 이젠 너그러운 마음으로 신경 안 쓰고 읽기로 한다. 나는 십삼 년이나 늦었네요 어머니. 그래도 미뤄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 나는 ‘안나 카레니나’, ‘성’, ‘마담 보바리’,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정도는 읽고 왔습죠! 쿤데라의 산문집 ‘소설의 기술’, ‘배신당한 유언들’, ‘만남’도 읽을 땐 뭔말이여...하는 게 많았지만 ’커튼‘에서 이전 산문집과 비슷한 작품 인용이나 서술도 (기억 안 나지만 하여간에 읽어본 기분이야! 하면 그런 거지) 많아서 좋았다.

커튼의 글들은 읽기 좋게 짤뚝짤뚝 잘 잘라 놨고, 할 말도 명료하고, 인용한 작품들도 읽었으면 읽은대로, 안 읽었으면 안 읽은대로, 아아, 이 말 할라고 갖다 붙였군요 끄덕끄덕 하게 써 놓았다. 한편으론 아...할배...이렇게나 더 읽어야 합니까… 할배 때문에 갖추기만 하고 안 읽은 책도 많습니다만…. 그렇게나 칭송하시면 더 미루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정리하는 할배 소설 강의 참고 문헌, 내가 (언젠가는) 볼 책-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라블레)-할배 산문집 마다 마르고 닳도록 인용되고 칭송하는 책이라 거의 십 년 전에 전자책 갖춰두고는 꾸역꾸역 매번 시도하다 멈춤 ㅋㅋㅋ 이젠 주석 다 제끼고 휙휙 읽어 볼랍니다.

’트리스트럼 섄디‘(스턴, 내가 가진 건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이야기)-이 책 전자책 왜 갖췄지...했는데 커튼 보니까 아 할배짓이었네… 온라인 서점을 둘러싼 소설을 쓴 적 있는데, 거기 남주인공 닉네임이 토비였다. ㅋㅋㅋㅋ 읽지도 않은 책 속 토비 삼촌에서 이름만 빌려옴… 뭐 그랬다고… 3년 만에 내 소설 꺼내 보니 꿀잼이었다… (자아도취) 이 책 두께가 미쳤던데 그래도 꾸역꾸역 읽어봐야지… 일단 칠조어론 먼저 마치고...ㅋㅋㅋ

‘망가진 세계’(말라파르테)-이건 커튼에는 안 나오지만 다른 산문집에서 보고 갖춰둠… 같은 저자의 소설 아닌 ‘쿠데타의 기술’ 이거도 챙겨뒀는데 읽고 싶음… 뭔가 부제만 보면 군주론 느낌인데…

‘감정 교육’(플로베르)-보바리 부인 잘 읽었는데 플로베르의 다른 책 읽을 생각을 안 하다니...이거 심지어 전자책이랑 종이책 다 있음… 이 책에서 꽤 많이 인용되어서 미룰 수 없겠다…

‘위험한 관계’(드 라클로)-코 앞에 꽂혀 있는데, 애들 영화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이랑 어른 영화 ’스캔들‘은 다 봐 놓고 원작 소설은 왜 아직도…

‘소송’(카프카)-배신당한 유언들 보면서 브로트 이새끼...하면서 사 놓고는 안 읽고 너무 오래 지났다. ’성‘은 먼저 봤는데 이거 미완작이더라… ’소송‘은 결말이 있지 않을까… 관료제 관련해서 이런저런 작품 언급하는 거 보고 되게 할말 많았다. 친구 하나가 공무원 느지막히 임용되어서 딴에는 십 년 넘게 관료제 몸 담은 놈인 내가 걱정반 짠함반 이런저런 오지랖도 떨고, 야, 네가 직접 겪으면 또 카프카 싸다구 치는 뭐 끝내주는 게 나오지 않겠냐? 그러면서 토닥토닥했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정작 반 년 쯤 나랏밥 먹고는 에퉤퉤 이게 사람 사는 거냐, 하고 미련 없이 빛의 속도로 관둬 버렸다. 내게 그 사건은 굉장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일단 발 들였으면 정년까지 노예 아닌가...했는데 아 저렇게 쉽게 관둘 수 있는 거였군. 내 인생관이나 직업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그래서 뭐 카프카 재림은 개뿔이고 공무원 도망친다는 놈들이 겨우 생각해낸 것은 수능 봐서 대학 다시 가기 ㅋㅋㅋㅋ 제도 문제 삼으면서 제도권 교육 체제 따라 현대판 과거 시험 준비하기냐 바보들아...그나마도 나는 혈전과 함께 중도이탈(?)포기(?) 뭐 그런 중...친구야 힘내렴...카프카가 못 될 바엔 의치한약수 가야지???ㅋㅋㅋ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프루스트)-이웃님의 영업으로 교보문고에서 올재클래식 단돈 2만9천원에 전집을 갖추고는 여태 1권 마들렌 가루 섞인 차 마시는 부분 쫌 지나서 까지 읽고 몇 년 째 멈춰 있다...박상륭 전집 다 보고, 잃시찾 전권 다 보고, 그때 혈전 다 녹으면 마 수학해라, 하는 친구의 간언도 있었기에...아 그럴까? ㅋㅋㅋ 그럼 오십 다 되서 수능 보는 거냐...

‘몽유병자들’(브로흐)-엄마는 이 책도 수업 들으면서 강독으로 다 읽은 모양인데 뭔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했고...그래서 가장 나중에 읽을 생각이다…

‘율리시스’(조이스)-아 이게 가장 나중이 될 수도...


여기까지는 갖춰져 있으니 집에 있는 거나 먼저 읽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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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책은 위에 있는 책들 다섯 권 이상 읽은 후 구매할 것!!!!!

’업둥이 톰 존스 이야기‘(필딩)-이 책에도 자주 나오고, 테레자가 토마스 만을 비롯해 필딩까지 읽었다, 하는데 나는 토마스 만은 아직 모르겠고 이거는 할배가 읽어보래잖아… 테레자도 읽었대잖아...

‘특성 없는 남자’(무질)-이 책도 많이 인용됨, 근데 너무 두꺼운데? 마침 올해 새 번역판이 나왔나 보다….

‘페르디두르케’, ‘포르노그라피아’(곰브로비치)-쿤데라 친구가 야 타임오버, 꺼져, 한 책이니 젊은이인 제가 대신 읽어보겠습니다…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디드로)-쿤데라가 희곡으로 각색한 건 봤는데, 자꾸 언급하니 원작도 읽어야 되나 싶습니다...



+밑줄 긋기(결국엔 나도 책 한 권을 베끼다시피 했구만…)
-내가 말했다. “페르디두르케를 읽었어야지! 아니면 포르노그라피아를 읽든가!”
그러자 그 친구가 우울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친구여, 내 앞에 펼쳐진 인생은 짧아요. 내가 당신 작가를 위해 소비한 시간의 분량이 바닥나 버렸어요.” (135-136)

-내가 보기에 참 똑똑하고 정중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과 있을 때면 나는 불편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나쁘게 보이지 않고, 시니컬하게 비춰지지 않으며, 그냥 아주 가볍게 던진 말 한마디로 그들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서 내가 하는 말을 일일이 다 신경 써 가려야 하니까. 그런 사람들은 희극을 참아 내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근엄한 척하는 태도가 그들에게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을 아니까.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것이, 그들을 미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들을 멀리 피하게 된다. 나는 요릭 목사처럼 끝나고 싶지 않으니까. (148-149)

-고통스러운 경험들 끝에 크레온은, 국가를 책임지는 자들은 사사로운 감정을 억제할 의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를 너무나도 확신한 탓에, 그는 그에 맞서 사회의 의무만큼이나 개인의 정당한 의무를 옹호하는 안티고네와 목숨을 건 싸움을 시작한다. 그가 완강하게 밀고 나감으로써 그녀는 죽고, 그 죄책감에 짓눌린 그는 ’두 번 다시 내일을 맞이하지 않기를‘ 바란다. ’안티고네‘는 비극에 대한 훌륭한 고찰을 할 수 있도록 헤겔에게 영감을 주었다. 두 주인공은 서로 대립한다. 각각은 부분적이고 상대적이지만 그 자체로만 보면 전적으로 옳은 진리에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 각각은 진리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지만, 진리의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상대편을 완전히 파괴해야만 한다. 이처럼 두 주인공 모두 정의로우면서 동시에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헤겔은 말한다. 죄를 짓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비극적 인물들의 영예가 된다라고. 죄책감을 양심 깊이 느낌으로써 미래의 화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인간의 크나큰 싸움을 선악의 다툼으로 보는 고지식한 해석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 이 싸움을 비극의 조명 아래서 이해하는 것, 이것은 정신이 이룬 엄청난 성과였다. 이 성과로 인해 인간이 따르는 진리의 숙명적 상대성이 드러났다. 그리고 적을 정당하게 평가할 필요를 고통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153-154)

-사회 현상의 실존적 영향력은 그것이 팽창할 때가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미약한 상태인 초창기에 가장 날카롭게 인지될 수 있다. 니체는, 16세기에 교회의 타락이 가장 덜한 곳은 독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곳에서 종교 개혁이 일어났음을 지적한다. 오직 “타락의 초기에만 타락을 참을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카프카 시대의 관료주의는 오늘날과 비교할 때 순진한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카프카는 관료주의의 끔찍함을 간파했고 그 후로 관료주의는 일상적이 되어 이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168)

-그렇다고 해서 그(’감정교육‘의 세네칼)가 옷을 바꿔 입는데 익숙한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는 정당하지 않다. 혁명가이든 반혁명가이든 그는 언제나 같은 사람이니까.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플로베르의 대단한 발견인데) 정치적 태도의 근거가 되는 것은 사상(너무나 연약하고 어렴풋한 그것!)이 아니라 덜 이성적이고 더 견고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173)

-플로베르에게서 어리석음은 그와 다르다. 그것은 예외도, 우연도, 결점도 아니다. 말하자면 교육으로 고칠 수 있는, 지성의 어떤 분자가 부족해서 생기는 양적인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고칠 수 없다. 천재나 바보나 모든 사람의 생각 속 어디에나 존재하는 ’인간 본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인 것이다. (175)

-그(슈티프터의 ’늦여름‘ 속 노귀족 라자흐)가 관료주의와 결별한 것은 정치적, 철학적 신념의 결과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관리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의 결과다. 관리란 무엇인가? 라자흐는 하인리히에게 그것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아는 한, 관료주의에 대한 최초의 (게다가 훌륭한) ‘현상학적’ 기술이다.
행정이 확대, 확장됨에 따라 점점 많은 관리들이 고용되어야 했고 그들 중에는 필연적으로 고약한, 혹은 아주 고약한 사람들이 있었다. 따라서 관리들의 고르지 않은 역량 때문에 필요한 작업들이 번형되거나 축소되지 않고 잘 수행되도록 하는 시스템 개발이 시급했다. “리자흐가 계속했다. ‘내 생각을 분명히 하자면,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교체하는 부품 교환이 있을지라도 제대로 작동하는 이상적인 시계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네. 그런 시계는 물론 상상할 수도 없지. 하지만 행정은 정확히 이런 형태 아래서만 존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겪은 변화에 비추어 사라져 버리거나 해야 하지.” 따라서 관리는 자기가 담당하는 문제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는 옆 사무실에서 어떤 일이 진행되는지도 모르는 채, 심지어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다양한 작업들을 열성적으로 수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라자흐는 관료주의를 비난하지 않는다. 단지 있는 그대로, 그가 왜 그 일에 인생을 바칠 수 없었는지를 설명할 뿐이다. 그가 관리가 될 수 없었던 것은 자기의 지평선 너머에 있는 목표에 복종하고 그것을 위해 일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상황 그 자체에 대한 존중‘이 너무 커서 협상을 할 때면 상급자들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 그 자체가 요구하는 것‘을 지키곤 했던 것이다.
라자하는 실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목적을 이해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되는 삶을 갈망한다. 이름과 직업과 아이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만 만나는 삶. 아침, 정오, 태양, 비, 폭풍우, 밤과 같이 시간이 늘 감지되며 그 구체적인 모습 속에 향유되는 삶.
그와 관료주의의 결별은 인간과 현대 세계와의 기념할 만한 결별 중 하나다. 비더마이어 풍의 이 낯설고 기이한 소설 속의 목가적 분위기에 적합한, 평화롭고도 근본적인 결별이다.

베버가 관료제 현상에 대해 사회학적, 역사적, 정치적으로 분석했다면 슈티프터는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관료화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과연 인간에게 엄밀히 말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으로 인해 인간 존재는 어떻게 변화되는가?
’늦여름 이후 60여 년이 지나서, 또 다른 중부 유럽인인 카프카가 ‘성’을 쓴다. 슈티프터에게 성과 마을이라는 세상은, 늙은 리자흐가 그 엄청난 관리 일을 피해서 이웃과 동물, 나무, ‘그 자체인 것’과 더불어 살기 위해 도피했던 오아시스를 의미했다. 슈티프터(그리고 그의 제자들)의 다른 많은 산문의 배경이 되기도 한 이 세상은 중부 유럽에서 목가적이고 이상적인 삶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슈티프터의 독자인 카프카가 평화로운 마을과 성의 세계에 사무실과 관리들의 군대와 서류 사태를 침입시킨다. 잔인하게도 그는 관료화의 전적인 승리라는 정반대의 의미를 성과 마을에 부여함으로써 반관료적 목가의 신성한 상징을 침범한다. (182-185)

-시간의 개념.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대립할 때는 동등한 시간 두 개가 대립한다. 덧없는 인생의 제한된 시간 두 개.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사람 대 사람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과 맞닥뜨린다. 젊음도, 노화도, 피곤도, 죽음도 모르는 존재. 인간의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 인간과 행정은 서로 다른 시간을 산다. … 소송은 길고 인생은 짧다. 이 이야기는 카프카의 ‘소송’에 나오는 상인 블로크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소송은 아무런 판결 없이 5년 반 동안 질질 끌려다닌다. 그사이에 그는 사업을 포기해야 했다. “소송을 위해서 뭔가 하려면 다른 것은 전혀 신경쓸 수 없기” 때문이다. 측량기사 K를 짓누르는 것은 잔인성이 아니라 성의 비인간적 시간이다. 인간은 면담을 요청하고 성은 그것을 뒤로 미룬다. 소송은 길어지고 삶은 끝이 난다.

이 싸움의 끝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승리? 가끔은 그렇다. 그런데 승리란 무엇인가? 막스 브로트에 따르면 카프카는 ‘성’의 마지막을 이렇게 그렸다고 한다. 그 모든 소동 후에 K는 지쳐서 죽는다. 임종의 침상에 누워 있을 때 (브로트를 인용하자면) “비록 마을의 시민권은 없지만, 몇몇 세부 사항을 존중해 거기서 살고 일하는 것은 허락한다는 결정이 성에서 내려온다.”
(188-190)

-얼마 후 나는 시오랑이 서른여덟 살 되던 1949년에 쓴 글을 읽었다. “나는 나의 과거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다른 사람의 삶을 떠올리는 것 같다. 나는 이 다른 사람을 모른다. ‘나 자신’의 전 존재는 옛날 그 다른 사람에게서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다른 곳에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렇게 고백한다. “그 당시 내 모든 망상을 다시 생각할 때면 모르는 사람의 강벽관념을 연구하는 것만 같은데 그 모르는 사람이 나였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경악한다.”
이 글에서 흥미로운 것은 현재의 ‘나’와 예전의 ‘나’사이에 아무런 연관성도 찾지 못하고 정체성의 수수께끼 앞에서 경악하는 그 사람의 놀람이다. 이 놀람은 진실한 것일까? 물론 그렇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놀람을 일상적인 모습으로 경험한다. 당신은 그 철학(종교, 예술, 정치) 사조를 어떻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혹은 (더 진부하게) 그토록 별 볼일 없는 여자(그토록 멍청한 남자)와 어떻게 사랑에 빠질 수 있었는가? 대개 사람들의 젊음은 재빨리 지나가고 젊은 날의 방황은 흔적도 없이 증발하지만, 시오랑의 젊음은 화석이 되었다.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연인과 파시즘에 대해서 똑같이 관대한 미소로 비웃을 수 없으니까.

젊은 시절에 대한 시오랑의 격노는 분명한 무언가를 보여준다. 즉 출생에서 죽음 사이를 잇는 선 위에 관측소를 세운다면 각각의 관측소에서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멈춰 있는 사람의 태도도 변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람의 나이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정말이지 이것은 분명하다. 아,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나 처음에는 오직 이데올로기적인 거짓 증거들만 눈에 보인다. 실존적 증거들은 명백한 것일수록 덜 드러나 보인다. 삶의 나이는 커튼 뒤에 숨어 있다. (192-194)

-이(서정시)와 반대로 소설은 망각에 직면하여 별 힘을 못 쓰는 견고하지 못한 빈약한 성이다. 만일 내가 스무 쪽을 읽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면 사백 쪽 분량의 소설을 읽으려면 스무 시간이 걸릴 것이니, 그럼 보자, 일주일이 걸리는 셈이다. 일주일 내내 소설책만 읽을 정도로 한가한 사람은 거의 없다. (나?ㅋㅋㅋ) 그러니 책을 읽는 중 며칠은 책을 펴 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날이 있게 마련 인데, 바로 그 공백의 시간에 망각이 곧장 껴들어 와 작업을 개시한다. 그렇다고 망각이 꼭 독서를 하지 않는 공백의 시간에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망각은 잠시도 쉬지 않고 책을 읽는 와중에도 끼어든다. 책장을 넘기면서도 나는 방금 읽은 부분을 그새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다음에 나올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이전 이야기의 일종의 개요만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고, 세밀한 묘사, 자잘한 관찰, 경탄해 마지않는 형식들은 이미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다. 수년이 지난 어느 날 한 친구에게 이 소설에 대해서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독서로 얻은 몇몇 기억의 파편들로 각자 아주 다른 책 두 권을 만들어 버리고 만 우리 자신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205, “어차피 우리 나이쯤 되면, 처음부터 읽어도 앞의 내용 따위 기억나지 않는다고!” -고슬링, ‘익명의 독서중독자들2’)

-나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내 작은 나라는 독립의 마지막 흔적마저도 제거되어 거대한 낯선 세계에 영원히 먹혀 버린 그런 나라였다. 나는 내 나라가 멸망해 가는 초기의 모습을 목격했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그 당시에 대한 내 평가는 틀렸다. 하지만 내가 저지른 오류에도 불구하고(아니, 오히려 그 오류 덕분에) 아주 큰 경험이 내 존재론적 기억 안에 아로새겨졌다. 그때부터 나는 그 어떠한 프랑스인도, 그 어떠한 미국인도 알 수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한 사람이 조국의 멸망을 겪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213)

-체코어는 자국어인 양 사용되는 독일어 옆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 체코인은 모두 2개 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기에 태어나느냐 아니면 태어나지 않느냐, 존재하느냐 아니면 존재하지 않느냐라는 선택을 할 수 있었던 독특한 상황이었다. (214, 이전부터 궁금했던 것, 카프카도 릴케도 체코 출신이라는데, 왜 독일어 문학일까? 그 질문을 어느 정도 해소해줬다. 쫓겨난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체코어일까, 프랑스어일까, 그것도 궁금했는데, 이방인으로서 프랑스어문학 일부를 담당하고 계셨다는 걸 나중에 알았죠…정작 체코 사람들은 되게 나중에 쿤데라 작품들을 체코어로 읽었다고...)

-이 소설(푸엔테스의 ’우리의 땅‘)을 말하다 보니, 카지미에시 브란디스의 ’제3의 앙리‘에 나오는 정말 웃긴 구절이 생각난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한 폴란드 망명자가 자기 나라의 문학사를 가르친다. 아무도 폴란드 문학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는 장난삼아 세상에 나온 적 없는 작가들과 작품들로 구성된 가상의 문학사를 만들어 낸다. 대학 학기가 끝나 갈 무렵에 그는 이 상상의 역사와 실제 역사를 구분하는 본질적 기준이 전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는 이상하게도 실망하게 된다. 그는 일어날 수 없었을 만한 사건은 아무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친 장난은 폴란드 문학의 의미와 정수를 충실하게 반영했다. (225-226)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기적의 유효 기간은 짧다. 비상했다가 어느 순간에는 추락하는 것이다. 나는 서글픈 마음에 사로잡혀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예술이 절대로 말해진 적 없는 것을 찾기를 그만 두고 다시 유순해지는 날이 오겠지. 그날이 오면 예술은 반복을 아름답게 만들고 개인이 기쁜 마음으로 순순히 획일적인 존재가 되도록 돕기를 요구하는 집단의 삶에 봉사할 테지.
왜냐하면 예술의 역사는 덧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의 지저귐은 영원하다.
(232, 비관주의냐 디스토피아냐… 18년 전의 예언은 어느 정도 유효했고... 그런데 덧없는 게 영원하면 무엇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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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07-23 1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이번 권에서 저 장면 그리고 사자가 가짜뉴스 관련 외치는게 젤 재밌었어요

반유행열반인 2023-07-23 18:48   좋아요 0 | URL
그쵸 ㅎㅎㅎ 익독중은 뉴스 볼 시간도 드라마 볼 시간도 없지요 ㅎㅎ저는 신곡 안 좋아하면서도 신곡 나오는 부분이 하이라이트 ㅋㅋ

새파랑 2023-07-24 0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개해주신 책들은 다 좋다는거죠? ㅋ 저중에 읽은건 별로 없네요 ㅡㅡ

반유행열반인 2023-07-24 07:55   좋아요 2 | URL
다 좋다는 건 아니죠 제가 한 권도 안 봤으니까 모르죠 ㅋㅋㅋ 밀란쿤데라가 소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자주 언급한 책들입니다. 다들 이 정도는 봤지?? 하고 ㅋㅋㅋ골드문트 이웃님께서는 한 권 빼고 이 책들 다 보셨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은오 2023-07-24 2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그럼 이제 쿤데라 저작 다 읽으신거네요?! 저는 농담, 참존가, 소설의기술 이렇게만 읽었어요. 참존가는 최근에 읽었고 농담도 소설이니 줄거리는 대충 기억 나는데 소설의 기술은 하나도 기억 안나네..... 유열님 최애는 참존가인가요? 다음으로 좋았던 저작들도 궁금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7-24 23:14   좋아요 1 | URL
소설은 여러 번 본게 참존가(근데 유수님이 이렇게 부르면 박사개구리 생각난대서 겁나 웃음ㅋㅋ자세한 사항은 이미지검색-참존 개구리), 불멸, 무의미의 축제, 농담, 이별의 왈츠 정도네요... 미학적으로든 소설 완성도든 참존가가 거의 절정이구요, 거기선 여성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도 제법 높아지고 그나마 덜 빻게 그린 거구요, 이전 소설들 보면 그 소설의 씨앗이나 영감이나 뭐 그런게 언뜻 보이기도 하지만 좀 웃겨보겠다고 사람 빙구 만드는 거도 끝도 없고 거기 여성 캐릭터도 예외없고(우린 그걸 여성혐오야 하겠지만 쿤데라는 아냐 난 인간혐오야!!! 할 거 같고 ㅋㅋㅋ) 뭐 그렇습니다 ㅋㅋㅋ찐팬 아니면 시대착오적인 이걸 왜 읽나 싶은 소설 많아서 그거 거르기도 쉽진 않으니 감안하시고 한 번씩 보셔도 좋고 아니면 일년에 한 번 씩 참존가 읽어주는 의식(?저는 그짓 많이 함 ㅋㅋ근래 들어 안 봤네 좀씩 보다 말구) 하면서 열 번 쯤 읽어주는 게 정신건강에 나을 듯 싶습미다. 소설 창작 관심 있으시면 커튼도 좋구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