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다나베 세이코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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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5 다나베 세이코.

영화 있는 거 보고 장편인 줄 알았는데 단편이더라. 친구가 말한 소설과 같은 이름의 영화를 예전에 본 줄 알았는데 그 무렵 본 건 ‘메종 드 히미코’였다. 문득 처자식 다 버리고 떠난 게이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워졌다. 히미코도 그렇고, 마츠코도 그랬고, 일본 영화에는 결함 많고 상처 받기 쉽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나말고도 저렇게 완벽하지 않은 존재들이 함께 세상을 이루고 있다는 걸 자꾸 보여주며 위로를 시도하는 건가.
일본 소설은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무라카미 류 소설 좀 찾아본 것 말고는 별로 본 게 없다. 가끔 읽으면 이걸 어떻게 읽어야 하나 늘 낯설다. 그런데 이 소설집 번역자가 무라카미 류 소설 많이 번역했던 양억관 아저씨였다. 오, 일단 심리적 장벽 한 단계 낮아졌음. 소설가 다나베 세이코는 우리 외할머니랑 같은 1928년생 용띠였다.(밀란 쿤데라는 한 살 어린 뱀띠라오…) 우리 외할머니는 아직 잘 계신데 다나베 세이코 할머니는 2019년에 돌아가셨다. 사후에 리커버판으로 다시 나온 모양이다. 책이 처음 나온 해는 내가 날 무렵인 1985년이고, 다나베 세이코가 57살일 때 낸 책인데, 책의 등장인물은 지금 내 나이 또래인 삼십 대 여자가 퍽 많다. 나이 들어 쓴 소설들은 노년에 관한 것일까 싶어 잠시 검색해 보니 에세이집도 여러 개 썼나 보다. 여자는 허벅지- 라는 에세이집에 잠시 관심이 갔는데 별점 한 개랑 안 좋은 평이 잔뜩ㅋㅋㅋ 음담패설 에세이래… 역시 이 할언니… 내공이 느껴진다…

친구는 소설집 안에 슬픈 사랑, 금지된 사랑 이야기가 많다고 했는데 어쩐지 그런 사랑하는 여자들 대부분이 씩씩하고 꿋꿋해 보였다. 그건 어느 정도는 체념의 결과이고, 남들이 뭐라면 어때 아무렴 어때 나는 내 갈 길 간다, 하는 주체성 같기도 했다. 물론 어떤 여자 인물들은 남자에게 의존하고 남자가 그지같이 구는 데도 어쩔 줄 모를 때도 있었지만, 30몇 년 전의 사회상 생각하면, 그 당시 내 나이면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 키우고 전업주부로 가정에 매여 있는 인구 비율이 많았을 텐데 그걸 감안하면 자기 일 열심히 하면서 남자가 떠나도 스스로 자신을 먹여 살리며 알아서 잘 하는 여자들을 일부러 열심히 등장시킨 것 같다. 그건 당연한 거야!라고도 할 수 있지만 사실은 대단한 일이다. 그러니 스스로를 먹여 살리고 그와중에 열심히 사랑도 하는 사람들은 자부심 느껴도 되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먹여 살리지 않더라도, 지금은 나 자신만 사랑하려고 애쓰는 중이더라도 죽지 않고 열심히 살아남기로 한 사람 또한 대단한 일 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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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나오면 어떡해…”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보긴 왜 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을 때. 무서워도 안길 수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호랑이를 보겠다고...만일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평생 진짜 호랑이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중)

-그리고 우네의 상냥함에 마음을 놓고, 아무렇게나 몸을 맡겨오는 어린애 같은 유지의 젊음에, 우네는 영문 모를 슬픔을 느낀다.
어른이란 존재는 그 상냥함 뒤에 언제나 공갈과 위협의 칼날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그런 순진한 신뢰가, 우네의 가슴에 아프게 와닿는다. 순진무구한 소년소녀를 웃음과 과자로 유혹해 잔인하게 죽이는 유럽 사회의 성범죄자들, 그리고 그림 동화에 나오는 범죄자들의 고독한 쾌락을, 우네는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모두 정치한 이중인격자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
(‘사랑의 관’ 중)

-“우리, 산꼭대기 검은 땅에 커다란 구멍을 파서, 남모를 사랑의 관을 묻나니.” …
말로 다할 수 없는 둘만의 사랑이었네
우리 누운 관 위에 풀이 피어나는 날에도
이 사랑 아는 이 없으리
(‘사랑의 관’ 중)

-‘어쩜 이렇게 사람을 안을 수 있을까.’
포옹뿐만 아니라, 입술 위에 따스한 눈처럼 떨어지는 남자의 부드러운 입술도 어딘지 모르게 자신의 입술과 꼭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서 감탄하고 만다. 몸이, 또는 인생의 틀이 잘 들어맞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바의 몸은 딱딱하지만, 이와코에게는 하나도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팔도 혀도 입술도 한없이 부드러웠다. 남자의 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생명의 매끄러움 그 자체라는 느낌이었다. 몸 자체가 만족의 한숨인 것 같았고, 이와코는 그 한숨에 안겨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눈이 내릴 때 까지’ 중)

-리에는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그대로 의자에 앉아 할말을 잊고 말았다. 농담도 할 수 없었다. 기력이라도 넘쳤으면 무슨 말이라도 했을 테지만, 마침 기분이 가라앉아 있어서 자기연민의 눈물만 스멀스멀 구토처럼 치고 올라왔다.
그런 감정이 갑자기 수그러든 것은, 그 순간, 미노루가,
“밥”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리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엉?”
“밥. 빨리 밥 줘. 배고파.”
“지금 내가 밥차릴 때야! 먹고 싶으면 자기 손으로 해 먹어!”
“뭘 먹어? 오늘 저녁은 뭐야?“
벼락이 떨어지고, 창이 빗발처럼 날아 오더라도, 자신의 바람기가 발각이 나더라도, 어쨌든 리에가 밥을 지어주리란 것을, 미노루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빛나는 에고였다. (‘사로잡혀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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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1-01-16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조제가 단편이었구나. 저는 그 영화 혼자 살 때 진짜 많이 틀어놨어요. 거기 나오는 남자애가 밥을 되게 맛있게 먹거든요 ㅋㅋㅋ (이상한데 치인다..) 다시 혼자로 돌아가면 슬프겠지만 그것도 괜찮아, 라는 말에는 열반인님 말씀처럼 체념도 있고 주체성도 있고 그렇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반유행열반인 2021-01-16 11:26   좋아요 1 | URL
저도 처음 듣고 아, 조제가 단편이었구나 생각했어요. 밥 맛있게 먹는 남자애 좋으다ㅎㅎㅎ 다시 혼자로 돌아가도 괜찮아, 하겠지만 호랑이 봐도 안 무서운 같이가 더 괜찮아, 싶네요. (기만자.... ㅋㅋㅋㅋㅋ죄송합니다)

하나 2021-01-16 11:28   좋아요 1 | URL
힝..입니다 ㅋㅋㅋㅋㅋ 니 내 좋지, 금 내랑 호랭이 보러 가자! (금방 배운다...)

반유행열반인 2021-01-16 11:35   좋아요 1 | URL
그래 가자 호래이 보러 ㅎㅎ

syo 2021-01-16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리뷰 써야 하는데 ㅋㅋㅋㅋㅋㅋㅋ 요즘 리뷰가 손에 잘 안 잡히네욬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1-16 20:17   좋아요 0 | URL
언넝 써서 다음 달에는 사만원 받으세요 ㅋㅋㅋㅋ
 
[eBook] 진실의 흑역사 - 인간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
톰 필립스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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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5 톰 필립스.

작년 이맘쯤 독일 철학자가 쓴 책 ‘거짓말 읽는 법’을 읽었다. 그전까지는 막연히 속기 싫고, 속이기도 싫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런데 거짓말이란 생각만큼 발생 과정도 작동 원리도 단순하지 않았다. 책의 내용은 명확히 이해하기 쉽지 않았지만, 읽고 나니 인식과 발화와 진실에 관해 했던 그동안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스스로를 뼈가 다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물고기 같은 사람으로 여겨왔다. 거의 평생을 거짓말을 정말 못하고 시도하더라도 티가 심하게 난다고, 그러니 그저 있는 그대로 알리는 것이 최선의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실행했다. 그러나 결과가 늘 좋지는 않았다. 주변 사람들의 불만 사항을 그대로 전하고 이런 점은 고쳐보자고 말하자 상사가 펑펑 울었다. 말하면 이해해줄 거라 생각한 사람은 시간이 지날 수록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을 불쾌해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을 가지고 이면의 사건, 지난 삶의 궤적 같은 걸 듣고자 하던 사람들조차 결국에는 무거운 짐을 떠맡은 것처럼 캐묻던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그래서 속고 싶은 것에 속는다. 이 책에는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일찍 간파한 사람들이 남을 열심히 속여먹은 사례가 여럿 나온다. 자신의 경제적 이득이나 명성을 위해 결국 남을 해치고 착취한 망나니들은 역사에 악당으로 기록되고 오래도록 비난 받는다. 그러나 때로 거짓말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목적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수단으로 활용되고 그런 일은 크게 욕을 먹지도 않는 것 같다. 수많은 여론전, 아픈 사람을 위로하고 낫게 하는 최면술, 흥밋 거리이자 재미를 주는 픽션들이 그렇다. 이 책 초반부터 마지막까지 거듭 회자되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구라의 향연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그렇게 상습적으로 뻥을 쳐대고도 뭔 위인으로 이백년 넘는 동안 추앙받고 있잖아…

인류 역사가 내내 거짓말로 꽉 차 있었고 모든 거짓말이 유해한 것이 아니라고해도, 그러니까 포기하고 거짓말 잘해서 잘먹고 잘살자 하는 게 저자의 결론은 아니다. 오히려 노력장벽을 허물고 조금이라도 진위 여부를 파악하려는 시도를 하고, 진실을 가려버리는 수많은 정보제한(유료 정보같은 것…)을 풀고, 거짓을 가릴 수 있는 전문가와 언론인이 협력 좀 하자고 말한다. 낙관적이고 희망을 버리지 않는 건 전작 인간의 흑역사나 비슷한 것 같다. 비아냥거리고 시니컬한 블랙 유머를 마구 던지지만, 다 잘되자고 하는 소리 아니겠습니까...하는 것 같은.
별 상관 없는데 왜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하는 이명박 음성 지원되냐...진실, 거짓, 믿어, 못 믿어, 하는 소리 입에 올리는 경우는 대개 의심해 봐야 하는 게 맞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싫어하는 상사 앞에서 싫은 티 안 내고 예의바른 시늉도 할 줄 알고, 갑자기 원격회의 시간 바꾸자는 연락에 육아 때문에 곤란한데요, 하고 거절할 줄도 알고, 굳이 묻지도 않는 말을 일부러 건네지 않고, 혼자만 알고 속에 담아둔 말의 가짓수가 제법 늘어나게 되었다. 결국 행복하려면 어느 정도의 자기 기만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한다. 안 그러면 내내 스스로를 미워하다가 삶이 끝나 버릴 것만 같아서, 그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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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이래 진실과 거짓의 본질을 파헤친 사람들은 모두 한 가지 핵심적인 원리를 거듭 발견했다. 우리가 옳을 수 있는 경우의 수는 극히 제한되어 있지만, 틀릴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무한에 가깝다는 것이다.

-내 거짓말은 크게 세 가지 유형이었다. 내가 해놓은 일에 대한 거짓말, 내가 단시간 안에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거짓말, 그리고 사회생활과 관련한 거짓말이었다.
첫 번째 유형의 거짓말은 주로 출판사와 에이전시 사람들에게 원고가 아주 잘 써지고 있고 벌써 많이 써놨다고 문자와 이메일로 알린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두 번째 유형은 주로 직장 동료들에게 내가 맡은 일을 곧 하겠다, 내일까지는 뭔가 결과가 나온다고 자신 있게 말한 것이었다. (역시 죄송합니다.) 세 번째 유형은 이른바 하얀 거짓말로, 이런 것을 하지 않으면 사회생활이 삐침과 싸움으로 얼룩져 파국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니 어쩔 수 없었다. 이를테면 모임에 참석 못 하는 이유를 꾸며서 말했고, 문자를 이제야 막 확인했다고 누가 봐도 뻔한 거짓말을 했고, 친구가 누구와 싸우고 있을 때 네 말이 백번 옳다, 재수 없는 자식이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다는 식으로 위로해준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세상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대부분 참이라고 전제할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으면 불안과 망상에 휩싸여 횡설수설하며 살게 될 테니까. 그러다 보니 우리는 무언가가 참이 아닐 가능성을 현격히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뉴스에서 뭐라고 하면 그게 아마 사실이겠지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멀쩡하고 믿을 만하게 보이면 사기꾼은 아니겠지 생각한다. 여러 명의 목격자가 뭔가를 보았다고 하면 뭔가가 실제로 있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한 전제들은 하나같이 생각만큼 믿을 만한 게 못 된다.

-멘켄은 이렇게 적었다. “진실의 문제는 대체로 불편한 데다가 따분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인간의 심리는 뭔가 더 재미있고 위안을 주는 것을 추구한다. 욕조의 실제 역사가 어떻게 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것을 파헤치는 일은 끔찍한 작업일 테고, 그렇게 고생해봤자 나오는 건 아마 일련의 평범한 사건들일 것이다.”
“내가 1917년에 지어낸 허구는 최소한 그보다는 나았다.”

-상상의 산맥부터 철저한 허구의 나라와 황당무계한 이국땅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의 구라꾼들은 잘도 구라를 쳤으니, 그 비결은 간단했다. 누가 세상 반대편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한들, 직접 가서 확인해보기는 굉장히 어렵다는 점이었다.

-탐험가들은 지도에 산이 있다고 하니 산이 있다고 상상했고, 지도 제작자들은 탐험가들이 봤다고 하니 지도에 또 반영해 넣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가공의 산맥은 오래도록 건재할 수 있었다.

-진짜 그럴듯한 거짓말은, 그래서 문제다. 한번 세상에 내보내면 소기의 목표를 이루고 나서 조용히 소멸하지 않는다. 거짓말은 좀비와 같다. 절대 죽지 않고, 사람의 뇌를 노린다.

-우리가 만들어낸 괴물들은 과거에 갇혀 있지 않다. 우리와 발맞추어 나란히 걸어왔다.

-금융 거품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몇 장 앞에서 금융 거품 사례를 열거할 때 1637년 ‘튤립 광풍’이 빠진 게 의아했을지도 모른다. 네덜란드에서 튤립 값이 폭등했다가 폭락하는 바람에 수많은 튤립 투기꾼이 망한 그 사건은, 역사를 통틀어 아마 가장 유명한 금융 거품 사례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어리석음을 논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주제가 되었는데, 그렇게 된 것이 1841년에 나온 찰스 맥케이의 고전 『대중의 미망과 광기』에 소개되면서였다. (사실 이 책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도 그 책에서 얻었다.) 안타깝지만, 그 이야기도 완전히 거짓은 아니라 해도 최소한 턱없는 과장인 건 맞는 듯하다. 맥케이는 튤립 광풍에 관한 정보를 금융 투기 반대론자들이 쓴 소책자에서 얻었는데, 실제로는 튤립 가격의 변동으로 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튤립 버블이 뻥이 센 이야기였다니..)

-우리는 항상 개소리 속에서 살 수밖에 없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뿐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가짜 뉴스’ 금지법을 만들려고 하는 각국 정부가 유념해야 할 점이다. 그런 식의 대응은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를 새로 낳을 수 있다.)

-그러니 다음번에 어떤 정보의 출처를 확인할 때는, 이렇게 스스로 물어보자. 이 정보가 내 개인적 편향에 딱 들어맞는 건 아닌지? 나는 이 정보를 최대한 의심하면서 바라보고 있는 게 맞는지? 이런 태도를 사회 전체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자기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는 사람에게 칭찬해주는 아량을 더 키워야 한다.

-‘가짜 뉴스’ 담론의 제일 우려스러운 점은 사람들이 가짜 뉴스를 믿는다는 점이 아니라, 진짜 뉴스도 믿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진실은 획일적이고 협소하다. 항상 끊임없이 존재하며, 별다른 능동적 활력 없이 수동적 성향만 지닌 자도 인지할 수 있는 듯하다. 그러나 오류는 무한히 다양하다. 실재에 대응하지 않으며, 순전히 창안자 머릿속의 창작물일 뿐이다. 그 드넓은 벌판은 영혼을 마음껏 펼치고, 무한한 재능은 물론 아름답고 흥미로운 허언과 낭설을 한껏 펴 보일 장이 된다.”
...아, 그 보고서(바로 위에 멋있는 말로 인용구 딴 글…) 저자가 누구냐고? 진실 탐구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그 실험을 자기 집 뒤뜰에서 주관했던 사람?
그야 물론, 벤저민 프랭클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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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1-01-15 18: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사진 보고 빵터진 1인 ㅎㅎㅎㅎ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01-15 18:36   좋아요 1 | URL
코로나 무서워서 입원하신 그 분...

하나 2021-01-15 20: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개소리 속에서 산다는 말이 맘에 드네요. 이 정보가 내 개인적 편향에 딱 들어맞는 건 아닌지 점검하라는 것도요.

저도 투명하기론 남부럽지 않은 사람인데 요즘은 말을 좀 참게 됩니다. 열반인님과 비슷한 이유로요. 상사를 울리시다니 ㅋㅋㅋㅋㅋ (역시 나랑 비슷한데 늘 더 쎄다...) 저도 예전에 구지도교수님 거의 울릴 뻔한 적 있어서.. ㅋㅋㅋㅋ 진짜와 가짜 한참 나누던 시절이라.. 행복을 위해 사회적으로 원만한 사람이 되겠읍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1-15 20:47   좋아요 2 | URL
같이 원만한 사람이 되어 봅시다 ㅎㅎㅎ개소리라는 말 이 책에 참 많이 나오는데 개가 억울할 것 같긴 해요. 그만큼 진솔한 소리가 없는데 짖고 낑낑대고 다 뜻이 명확 ㅋ

파이버 2021-01-15 2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싫어하는 상사한테 싫은 티 내고 왔는데 쫌 찔리네요ㅎㅎㅎ 둥글게 둥글게 되려면 저는 나이를 좀더 먹어야 할 것 같아요

반유행열반인 2021-01-15 22:18   좋아요 1 | URL
아니에요 잘 하셨어요 앞으로도 가끔가끔 ㅋㅋㅋ

수이 2021-01-15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기기만 힘들다 너무..... 더불어 살아가기도....... ㅠㅠ

반유행열반인 2021-01-16 07:50   좋아요 0 | URL
그냥 자신을 쪼끔만 더 애껴줘요 내 미운털은 가끔 못 본 듯 하구요...ㅠㅠ

syo 2021-01-16 2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작의 글발은 여전하군요. 그 책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분명 재밌고 웃긴데, 왜 나는 꽂아놓고 읽지를 않는 걸까요.... 거짓말처럼....

반유행열반인 2021-01-16 20:18   좋아요 0 | URL
지난 번 책은 너무 뻔한 내용을 그러모은 재주가 가상했고 이번 내용은 잘 모르던 온갖 사기 거짓말 행각 모아 놓아 더 흥미롭게 읽혔어요.
 
[eBook] 사라진 스푼 - 주기율표에 얽힌 광기와 사랑, 그리고 세계사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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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4 샘 킴.

주기율표를 좋아한다. 예전에 읽은 ‘왜 맛있을까’란 책의 저자 찰스 스펜스가 칠리 콩카르네를 좋아하는 건 자기 이름 스펠링과 많이 겹쳐서 라고 하길래 개소리하네, 했었다. 그런데 내 이름 초성과 발음까지 비슷한 주기율표 좋아하는 거 보면 조금 일리가 있나 싶은...과학책 실컷 읽어 놓고 허튼 소리 중…
알라딘에서 주기율표 담요 사면 과학책 두 권 주는 굿즈 이벤트할 때 갖춘 플란넬 담요 아직도 애정한다. 물론 그때 받은 두 권 중 김상욱의 양자공부는 아직도 방치 중...비슷한 이벤트의 주기율표 북램프는 막상 받아보니 실망스러운 모양새였지만 밝기 조정이 되어 수면등으로 잘 쓰고 있다. 두 굿즈 디자인한지 제법 되었는지 마지막 118번 원소가 우누녹튬이란 잠정적 이름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은 오가네손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현재까지 발견된 모든 원소 명칭은 대학화학회 홈페이지에 표준주기율표 보시면 확인 가능합니다.

세상을 이루는 물질 거의 모두를 블록 쌓아둔 것 같은 표 하나에 원소의 이름과 양성자수와 원자 질량수까지 모두 모아놨다니, 게다가 세로줄의 주기만 따라가도 대략 비슷한 성질인 걸 파악 가능하다니, 정말 매력터진다. 거기에다 올리버 색스 할아버지가 원자번호로 나이 헤아리는 놀이까지 알려줘서, 나는 올해 알칼리 토류 금속 스트론튬이 되었다! 불꽃 반응은 붉은 색이지- 헤헤 하고 한 살 먹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첨부된 주기율표에서 올해 자신의 원소번호를 찾아봅시다)

무식한 문돌이이지만 가끔 못 알아먹으면서도 과학책을 챙겨본다. 작년 후반부에는 거의 본 게 없길래 마침 서재에 누군가 리뷰 쓰신 걸 보고 이 책에 흥미를 느껴 빌려보았다. 주기율표에 대한 책은 애들 사준 예쁜 플립북 어스본에서 나온 ‘원소와 주기율표’랑, 일본사람이 쓴 ‘주기율표로 세상을 읽다’, ‘만화로 읽는 주기율표’를 보고 몇 달 전 리뷰 당첨금으로 ‘세상을 이루는 모든 원소’라는 백과도감 한 권을 갖춰 놓았다.
여태 본 원소와 주기율표 책 중 ‘사라진 스푼’이 제일 재미있고 유익했다. 원소의 발견과 이름 붙이기 가지고 정치적으로 싸우는 건 어느 책이나 공통으로 나왔던 것 같고… 원소에 대한 연구와 발견이 단순히 화학 연구에 그치지 않고 물리학(양자, 천체 등등 다양한 분야), 생물학 등 다른 과학 분야 발전에 폭넓게 영향을 준 걸 알았다. 각각 원소가 어디서 주로 발견되는지, 어떻게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고 얼마나 금세 사라지는지, 어떤 특징 가지고 우리 생활에 어떻게 쓰이는지 보는 재미도 있었다. 물론 전자를 뺏고 빼앗는 아주 기본적인 성질부터 지샵 지플랫 하고 비유해가며 세슘 원자시계 원리 설명하는 부분, 거품이 과학 연구에 활용되는 부분 등등은 아 뭔말인지 모르겠다...하면서도 이상하게 모르겠는데 재미있게 읽었다.

3년 후에 큰꼬맹이가 중학생이 되면 같이 중고등학교 수학과 과학을 공부하고 싶다. 가르치기 위한 게 아니라 같이 묻고 답하면서 공부하지 않았던 이과 수학이랑 물리까지 공부해보고 싶다. 그럼 왠지 애가 수학 과학 잘 못해도 응 해보니까 어렵네...왜 못하는지 이해가 돼...할 것 같다.ㅋㅋㅋ내가 먹고 사용하고 나와 내 주변을 이룬 물질의 특성과 작용 원리를 알아가는 일은 큰 재미인 것 같다. 물론 아주 자세한 계산이나 원리는 모르겠지만 대략적으로라도 알고 싶다. 그러니까 가끔이라도 과학책을 읽어야겠다. (저기 꽂힌 양자공부책도 언젠가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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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진폐증의 철자수를 딴 이름. 일반 단어 중에 제일 긴 영단어로 알려져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소개한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 단어는 철자수가 무려 1185이다…)은 폐렴과 비슷한 증상을 나타내며, 석면을 흡입하면 걸릴 수 있다. 모래와 유리의 주성분인 이산화규소를 흡입하는 것도 진폐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건축 현장에서 하루 종일 모래 분사기를 사용하는 노동자나 단열재 생산공간에서 유리섬유를 들이마시며 작업하는 노동자 중에서 종종 규소를 기반으로 한 p16에 걸리는 사람이 나온다. 그러나 이산화규소는 지각에서 가장 풍부한 광물이기 때문에 진폐증에 걸리기 쉬운 인구 집단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활화산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다. 활동이 활발한 화산은 수백만 톤의 실리카(이산화규소)를 고운 분말 형태로 공기 중에 뿜어낸다. 이 가루들은 화산 지대에 사는 사람들의 폐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똑똑한 막내아들에게 모든 기대를 건 어머니는 멘델레예프를 말에 태우고 스텝 지대와 눈 덮인 우랄 산맥을 지나 삼천여킬로미터를 여행해 모스크바의 일류 대학을 찾아갔다. 그러나 대학측은 멘델레예프가 현지 주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했다. 어머니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멘델레예프를 말에 태우고 죽은 남편의 동창을 찾아 육백여킬로미터를 더 여행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다. 그리고 멘델레예프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 세상을 떠났다.
(시베리아 출신 주기율표 창시자 멘델레예프 엄마의 멘모삼천킬로미터지교 보면 맹모삼천지교는 살짝 빛이 바랠 수준이다…)

-갈륨은 실온에서는 고체이지만 29.8도에서 녹기 때문에,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면 녹아서 수은처럼 변한다. 갈륨은 액체 상태에서 만져도 뼛속까지 살이 타지 않는 희귀한 금속 물질 중 하나이다. 그래서 갈륨은 화학 전문가들이 사람들에게 장난치고 싶을 때 선호하는 물질이 되었다. 많이 쓰이는 방법 중 하나는 알루미늄처럼 보이고 원하는 모양으로 쉽게 만들 수 있는 갈륨으로 찻숟가락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뜨거운 차와 함께 손님에게 내놓고는, 손님이 찻잔에 담근 찻숟가락이 사라지는 걸 보고 깜짝 놀라는 모습을 즐긴다.
(아마도 이 책의 제목을 따왔을 갈륨의 특성. 하얀 가운 입은 화학자가 차 대접하면서 뒤에서 히히 거리고 있는 거 상상만 해도 웃기다. 나도 하나 가지고 싶어서 인터넷 검색해보니 갈륨숟가락 국내에선 실험용품 전문샵에서 17만원에 팜…포기 ㅋㅋㅋ 갈륨숟가락 만지거나 온수에 담그어 녹는 모습은 인터넷 검색하면 쉽게 움짤이나 영상을 찾을 수 있다.)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은 소속 과학자들이 97번원소와 98번 원소를 발견한 뒤 그 원소에 버클륨과 캘리포늄이란 이름을 붙였다...그렇지만 이 이름을 지은 사람들은 홍보에 대한 생각이 모자란 것처럼 보인다...과학자들은 조만간 새로운 원소를 한두 가지 더 발견할 게 틀림없는데, 대학이...원소들의 이름을 유니버시튬(97번), 오퓸(98번), 캘리포늄(99번), 버클륨(100번)이라고 붙인다면 주기율표에 대학의 이름을 영원히 남길 수 있었을 텐데, 그 기회를 영영 날려버리고 말았다.”
이에 대해 글렌 시보그와 앨버트 기오르소가 이끄는 버클리의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지은 이름이 선제적 예방 조처를 염두에 둔 천재적인 것이라고 응수했다. 즉, “97번과 98번 원소를 ’유니버시튬’과 ‘오퓸’이라고 이름 붙인 뒤에 뉴욕의 어느 과학자가 99번과 100번 원소를 발견하고서 ‘뉴윰’과 ‘요큠’이란 이름을 붙이는 불상사를 예방할 수 있는” 묘안이라는 주장이었다. <뉴요커>의 편집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응수했다. “우리는 이미 우리 회사 실험실에서 ‘뉴윰’과 ‘요큠’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현재까지 우리는 이름만 지었을 뿐이다.”
(이것이 가진 자이자 천재들의 여유와 농담의 세계로군...하긴 이런 저런 원소 잔뜩 발견, 합성한 시보그는 살아 있는 과학자로 유일하게 자기 이름 붙인 시보귬을 누리게 된다. 노년의 검버섯 핀 얼굴의 시보그가 주기율표의 시보귬 가리키는 사진 원소 책 시보귬 페이지마다 나옴 ㅋㅋ근데 관계없지만 시보그 들으면 자꾸 학부 경제학 수업 들었던 *시복 교수님 생각남….ㅋㅋㅋ)

-일부 러시아인 사이에는 자신들이 사는 땅에 대한 창조 신화가 전해 내려온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태초에 신이 모든 광물을 팔에 안고서 땅 위를 걸어다니면서 골고루 뿌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일이 계획대로 잘 풀렸다. 탄탈은 여기에, 우라늄은 저기에...하는 식으로 뿌려나갔다. 그런데 시베리아에 도착하자 손가락이 얼어붙어서 모든 광물을 그만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동상에 걸린 손으로 그것을 집어 올릴 수도 없어 신은 내키지 않았지만 광물들을 그곳에 남겨두고 왔다고 한다. 러시아인은 자국 영토에 광물 자원이 풍부한 이유는 이 때문이라고 자랑스레 이야기한다. (그치만 러시아는 별로 쓸모도 없는 루테늄이나 발견했다고 곧바로 디스 들어감 ㅋㅋ)

-스탈린은 과학자를 체포하고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는 것에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많은 과학자를 시베리아의 노릴스크 외곽에 위치한 악명 높은 수용소로 보냈다. 그곳은 겨울이면 온도가 영하 60도까지 내려가는 날도 흔했다. 노릴스크는 니켈 광산으로 유명했지만, 디젤유 증기에서 나는 황 냄새가 늘 진동했고, 이곳에서 과학자들은 비소, 납, 카드뮴을 비롯해 유독한 금속을 추출하느라 노예처럼 일했다. 오염 물질이 하늘을 시커멓게 물들였는데, 추출하는 중금속의 종류에 따라 분홍색 또는 파란색 눈이 내렸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금속을 다 추출할 때에는 검은색 눈이 내렸다.(검은색 눈은 지금도 가끔 내린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오싹한 것은 유독한 니켈 제련소에서 50킬로미터 이내에는 지금까지 나무가 단 한 그루도 자란 적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러시아인의 으스스한 유머 감각에 어울리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노릴스크의 부랑자들은 잔돈을 구걸하는 대신에 빗물이 고인 컵을 모은다고 한다. 물이 증발하고 나면 컵에 남은 금속 부스러기를 팔아 돈을 챙기려고 그런다는 것이다. 어쨌든 거의 한 세대에 이르도록 소련 과학은 산업을 위해 니켈과 그 밖의 금속을 추출하느라 낭비되었다...스탈린은 자비롭게 말했다. “[물리학자는] 손대지 말고 그냥 놔두어라. 나중에 언제든지 총살할 수 있으니까.”
(진짜 스탈린은...할많하않...백기행 나오는 소설에서도, 밀란쿤데라 소설에서도 그랬지만, 공산국가는 과학과 예술의 무덤이었다. 문돌이가 진짜 미안해…)

-플료로프의 사례는 러시아에서 과학적 통찰력이 부족했던 이유를 또 한 가지 상기시키는데, 그것은 바로 과학에서는 금기나 다름없는 아첨 문화 탓이다. 멘델레예프가 살던 시대인 1878년에 한 러시아 지질학자는 62번 원소인 사마륨을 포함한 광물 이름을 상사인 사마르스키 대령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그렇게 해서 그냥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그 관리의 이름이 주기율표에 남게 되었는데, 그것은 원소 이름 가운데 가장 자격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어쩐지 이름부터 후지고 기분 나쁜 사마륨 ㅋㅋㅋ쓰잘데기 없나 했더니 전기 기타 픽업에 코발트랑 혼합해서 영구 자석으로 쓴다고 한다...너도 쓸모가 있구나..)

-오늘날 대체 에너지에 관심을 가진 물리학자들은 거품으로 초전도체 모형을 만든다. 병리학자들은 에이즈를 ‘거품’바이러스라고 말하는데, 감염된 세포가 팽창하다가 폭발하는 방식 때문이다. 곤충학자들은 거품 방울을 잠수정처럼 사용해 물속에서 숨을 쉬는 곤충을 알고 있고, 조류학자들은 공작 깃털의 속에 있는 거품 방울들에 빛이 산란하면서 깃털에서 금속성 광채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발견은 2008년에 식품과학 분야에서 일어났다. 애팔래치아 주립대학 학생들이 다이어트 콜라에 멘토스 캔디를 집어넣으면 콜라가 왜 폭발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낸 것이다. 입자가 거친 멘토스 캔디의 표면을 콜라에 녹아 있는 작은 거품 방울들을 붙잡는 그물과 같은 작용을 하는데, 이 거품 방울들이 합쳐져 점점 커진다. 그러다가 아주 커진 거품 방울 몇 개가 폭발하면서 콜라가 팡!!!
(마지막 멘토스는 농담으로 덧붙인 거 같지만 ㅋㅋ여러분 멘토스 먹을 때 콜라 마시면 뒤지는 수가 있으니 단 건 따로 먹읍시다.)

-(옮긴이의 말에서 대한화학회에서 주기율표의 명칭을 바꾼걸 울분에 차서 적어 놓았다. 나도 굉장히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원소기호 Na, K하면 직관적으로 나트륨, 칼륨하는데 뭔 소듐 포타슘이야 이거 예전엔 독일 유학 화학자들 판이다가 판이 미국 유학파로 바뀌었구만...아이오딘, 타이타늄, 망가니즈 글자수 늘어난 거 봐 에라이...하는 의심 밖에 안들었다. 이걸 역자가 막 제대로 영어도 아니야! 타이테이니엄, 맹거니즈, 아이어다인! 하고 표까지 제시하며 뼈때림 ㅋㅋ)
...모두 독일식 또는 프랑스식 이름을 영어식으로 바꾼 것이다. 그런데 영어식으로 바꾸려면 발음이라도 좀 정확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그런데 이름을 이렇게 막 바꾸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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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1-01-14 1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 저도 주기율표 좋아할래영! 스트론튬 맘에 들어요🔥 올리버 색스 할아버지 책상에 주기율표 원소 조각 있던 거 생각나서 또 부러워지네요. 3년 뒤 문송 탈출 응원합니당! 점심 맛있게 드세요~ ^^

반유행열반인 2021-01-14 12:50   좋아요 1 | URL
맞아요 비스무트 83세 축하기념 ㅋㅋㅋ80살 82살 축하한다고 수은이랑 납 뿌려줬으면 조금 소름 돋았을 듯 ㅋㅋㅋ하나님도 점심 맛있게 드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psyche 2021-01-14 15: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부터 찍어놓기만 했는데 반유행열반인 님 리뷰 읽으니 빨리 읽고 싶어지네요. 원소 이름에 대한 옮긴이의 말이 공감가요. 예전에는 화학계를 독일 유학파가 잡고 있다가 지금은 미국 유학파가 잡고 있나봐요. 원소 이름뿐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한글표기법에 대해 제대로 된 기준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싶더라고요.
그리고 저 담요 무척 탐나요. 언제 다시 굿즈로 안 나오려나...

반유행열반인 2021-01-14 15:46   좋아요 0 | URL
색 배치도 안 촌스럽게 해가지고 우리집에서 애기들이랑 서로 덮는다고 난리에요 ㅋㅋㅋ옆에 주기율표 하나 가져다 놓고 이 책 읽으면 좋더라구요. 저는 널리 쓰여 익숙하고 짧은 이름 좋은 것 같은데 나트륨 정말 소듐이 되어야했니 하고 아쉬운 마음 ㅋㅋ

syo 2021-01-15 0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멘모삼천킬로미터지교 이런 거 볼 때마다 정말 반님의 센스에 감동하고 맙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1-15 09:31   좋아요 0 | URL
멘델레예프 저렇게 엄마가 죽어가면서 가르쳐놔서 위대한 업적은 세웠는데 인성은 영 또라이 같더라고요 ㅋㅋㅋ
 
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20210113 백수린.

월요일 저녁, 직장이 아주 먼 옆 사람이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다. 손에는 케익 상자를 들었다. 기념할 일이 겹치는 날이긴 했는데 생각지 못한 케익에 모두들 즐겁게 촛불을 끄고 나누어 먹었다.
초콜릿이 겉면에 반들반들하게 코팅된 자허토르테. 11년 전 겨울 아직 이십 대일 때 옆사람이 인스부르크의 학회에 참석하게 되어 처음 유럽에 갔었다. 빈에 갔을 때 처음 만든 사람 이름을 딴 케익이라고 가이드북에 소개된 자허토르테를 먹었다. 살구쨈이 발린 초코케익이었는데 지금은 그 맛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께 함께 나눠먹은 케익은, 음, 몽쉘이 참 잘 만든 과자야, 하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맛있는데 그냥 몽쉘 맛이었다ㅋㅋㅋ쨈을 생략하고 초코만 발라놔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마 쨈을 넣었으면 빅파이 맛있지, 했겠지만…
남은 케익 조금 이따가 커피랑 먹어야겠다.

백수린 소설을 좋아한다. ‘여름의 빌라’는 작년에 읽은 소설집 중 손꼽힐 만큼이었고(그런데 연말 목록에 손 안 꼽음…왜...ㅋㅋㅋ),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읽을 때는 짧은 소설 장인이라고 칭찬했다.
그런데 빵과 단과자를 좋아하고, 소설이랑 책도 좋아하지만 이 모든 걸 버무려 쓴 백수린의 첫 산문집은 이상하게도 와 닿지 않았다. 아마도 어느 잡지에 연재한 글을 엮은 것 같은데, 정해진 분량 안에 딱 적당한 이야기 분량과 밀도 있게 예쁜 문장과 온기 같은 걸 각 맞춰 놓긴 했다. 그렇지만 책으로 묶어 놓으니 뭐랄까, 동네마다 있는 파리바게뜨에 늘 있는, 봉지에 담긴 달달하고 부드러운 치즈케이크(라고 이름 붙은 카스테라에 가까운, 납작하고 세로로 길고 모서리가 둥글고 폭신한 그 빵) 여러 개 퍼먹는 느낌이었다. 양산형 빵, 분명 거기 가야 먹을 수 있는 달달하고 위로가 되는 맛이지만, 내가 이걸 먹자고 굳이 여기에...싶은 글의 연속. 차라리 초반의 소설집 ‘참담한 빛’이나 찾아 볼 걸, 읽는 내내 시간이 아까웠다.

소설가가 쓴 산문집에는 유독 인색하고 실망도 많이 한다. 그만큼 소설을 많이 좋아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아주 짧은 글 하나하나가 완성도 있고 따뜻한데다 빛나는 문장도 많다. 다만 내가 삭이기에는 너무 짧고 가볍다 싶었다. 글에 담긴 마음까지 가벼운 건 아닌데, 풀어쓴 게 읽는 일조차 힘들 만큼 삶에 지친 사람 배려해서 일부러 짤막하게 토막내고 압축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내 취향이 아니었다. 막상 이렇게 투덜대 놓고 밑줄 친 글 다시 훑어보니 생각보다 너무 많아서 또 깜짝 놀랐잖아ㅋㅋㅋㅋ표리부동한 나새끼야...

+밑줄 긋기
-행복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상을 괄호 안에 넣어두는 휴가가 삶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것처럼, 인간에게는 때로 진실을 괄호 안에 넣어두는 거짓말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부드러운 모래가 나른한 꿈처럼 펼쳐지고, 뜨거운 태양 아래 올리브가 익는 곳에서의 휴가를 닮은, 미혹으로 가득 찼지만 아름다운 거짓말이. 하지만 여름의 끝을 알리는 폭우마저 그치고 나면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트렁크를 창고 깊숙이 넣어두어야만 한다. 틀림없이 쓸쓸하고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한 일이지만, 계절은 바뀌고, 괄호 안에 넣어두었던 것들과 대면해야 하는 시간은 우리를 어김없이 찾아오니까.

-그런데 이제는 오히려 너무나 명료한 것들이 더 두려울 때가 있다. 이를테면 칼로 벤 자국처럼 선명한 말이나 확신에 찬 주장 같은 것들.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음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이상한 신념들.

-괜찮아, 나에게는 소설이 있어.
소설이 삶을 닮은 것이라면, 한길로 꼿꼿이 가지 못하고 휘청휘청 비틀댄다 해도 뭐 어떤가. 내가 걷는 모든 걸음걸음이 결국엔 소설 쓰기의 일부가 될 텐데. 길 잃고 접어든 더러운 골목에서 맞닥뜨리는, 누군가 허물처럼 벗어놓고 간 쓰레기들과 죽은 쥐마저도 내 빵에 필요한 이스트나 밀가루가 될 텐데. 그러므로 그림자처럼,
한낮의 시간에는 더욱 짙어지는 익숙한 열등감과 수치심이 찾아오면, 이제 나는 그것들을 양지바른 곳에 펼쳐놓고 마르길 기다리며 찬찬히 들여다본다. 오븐의 열기는 하오의 볕처럼 공평하니까 어쩌면 내가 소설을 쓰는 사람인 한, 나에게도 언젠가는 따뜻한 식빵 한 덩이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믿어보면서.

-소설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르겠고, 나는 매번 백지 앞에서 초심자처럼 두렵고 막막하지만, 한 가지 그래도 지난 시간 동안 바뀐 것이 있다면, 소설을 쓰는 재능에 대한 회의나 의구심이 불쑥불쑥 찾아올 때마다 그것들을 곱게 접어 서랍 한구석에 넣어둘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내 소설이 지닌 효용이나 가치에 대해 묻는 일도 관두기로 했다. 좋은 소설을 나는 어쩌면 끝끝내 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어지러움만 남기고 입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지독한 달콤함처럼, 어떤 아름다움은 고통만을 남기는데도 어째서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걸까.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비밀스러운 영역이 예술의 영역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내가 마음을 뺏긴 이유는 이 책의 저자가 인생이 매끄러운 서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저자가 연구를 위해 조사 대상자의 사연을 듣던 도중, 갑자기 죽어버린 늙은 개에 오래도록 마음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좋아졌다. 그러니까 서사가 중단되고 찢겨나가는 그 순간에 주목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음 날 나는 데이트를 마친 후 헤어지던 집 앞 골목에서 간밤에 구운 초코칩 머핀이 담긴 쇼핑백을 건넸다. “집에 가서 열어봐.” 그리고 심야 버스 안에서 쇼핑백을 열어본 후 놀라서 전화를 걸어왔던 나의 어린 연인. “정말 네가 만든 거야? 네가 만들었어?”라고 연거푸 묻더니, “지금 내가 너희 집 앞으로 돌아갈 테니까 잠깐이라도 다시 나오면 안 돼?” 하던 그의 한껏 들떠 있던 목소리.
그 후로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와 연애를 했고, 긴 시간 동안 집 앞 골목에서 헤어질 때마다, 혹시라도 그가 돌아가는 길에 사고를 당해 내 인생에서 사라져버리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두려워지곤 했다.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열정이나 도취를 쉽게 떠올리지만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청춘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한 게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본다. 넘치는 건 젊음뿐, 상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릴 여유는 조금도 갖지 못해 서로를 오독하는 시기를 지나야 우리는 사랑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해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고도. 공고한 ‘나’의 성을 허물고 타인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 마침내 사랑은 그 눈부신 폐허에서 시작할 테니까.

-다다르기를, 정박하기를 기다리며 부유하는 사람. 그것은 틀림없이 쓸쓸한 일이지만 머물기보다는 도착하길 기다리는 우리의 고독은 부드럽다. 드러난 피부를 감싸는 봄날의 대기만큼. 달콤하고. 밤공기를 타고 날아오는 꽃향기만큼.

-“목을 조를까봐서요.” 나는 이 소설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소녀의 이야기를 다 들은 이후, 아버지가 들려준 대답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한단다.” 그리고 그 대답을 들은 ‘나’는 그제야 불면을 극복하고 다시 일상을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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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1-01-13 11: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잘 읽어놓고 뭔가 헛헛할 때가 있죠. 아마도 쓴 사람의 마음이 머물러 있는 자리를 내가 지나와서거나 비슷하거나 그래서가 아닐까 생각해봤어요. 여름의 빌라 궁금해요!

반유행열반인 2021-01-13 11:39   좋아요 4 | URL
뭔가 좋은 문장 작정하고 그러모아 글 한편한편에 다 때려넣고 꼭 마지막에 몇 줄로 꾹 눌러서 번쩍뻔쩍 칠해놔서 아이씨 왜 이렇게 교훈적이야...그런데 밑줄 치고...교훈 싫어함 ㅋㅋㅋ작위적 따뜻함도 싫어함ㅋㅋㅋ오랜만에 까까까리뷰 쓰네요...백수린 좋대면서 모질다 나...여름의 빌라 좋았어요. 전작들 읽고 읽으니 점점 나아져서 포텐 팡 터지는 느낌 들었어요. 백수린 딱 한 권 읽으라면 그거요ㅋㅋㅋ

hnine 2021-01-13 12: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백수린 소설 좋아하면서 산문집 읽기는 미뤄두고 있는 심리가 바로 이런건가봐요.
자허 토르테가 사람 이름에서 붙여진 이름이었군요.

반유행열반인 2021-01-13 12:13   좋아요 2 | URL
저처럼 한 번에 우루루 읽지 않고 다른 책 읽으며 한 편씩 쉬엄쉬엄 읽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어요. 하긴 초코케익 한 통 다 퍼먹는 게 미련한 일이지...한 조각씩 한 입씩 먹어야지...제가 잘못했네요 ㅋㅋㅋㅋ

2021-01-13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13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Yeagene 2021-01-13 23: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간의 궤적>,작년에 올해의 단편소설로 뽑을만큼 무척 좋아서 <참담한 빛>을 읽어봤는데 전 기대가 커서인지 그저 그랬어요^^;;
<여름의 빌라>나<오늘밤은 사라지지 말아요>중에 하나 읽어볼까 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1-13 23:51   좋아요 2 | URL
네 저는 참담한 빛 다음의 폴링인폴을 제일 처음 읽고 말씀하신 뒤에 두 개를 읽어서 그런가 둘다 좋았어요. 누군가 점점 나은 글 쓰는 거 보는 일 흐뭇해요. (반대로 좋아하던 작가가 후져지면 마냥 슬픔...ㅋㅋㅋ)

syo 2021-01-15 01: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뭔가 구성이 정형적이어서, 짜 놓은 틀에 내용이랑 먹을 거리만 바꿔넣는다는 느낌이 있죠? 한 꼭지만 읽으면 와 좋아 이렇게 되는데 한 권을 다 읽으면 그 틀이 더 크게 느껴지면서 어쩐지 멀어지긴 하더라구요 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01-15 09:30   좋아요 2 | URL
소설 잘 쓰는 사람이랑 에세이 잘 쓰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에세이스트 중에 소설가 되고 싶은 사람은 많이 봤는데 된 사람도 못 꼽겠고 ㅋㅋ

붕붕툐툐 2021-01-17 0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백수린 작가 좋아하는데, 제가 읽은 건 다 초기작이군요!!(좋아하는 거 맞겠죠?ㅋ) 소개해 주신 소설집 읽어봐야겠어요!!

반유행열반인 2021-01-17 09:22   좋아요 1 | URL
네 처음부터 좋아하셨으면 요즘 책들 보시면 뿌듯하실 거에요 이렇게 컸군 하고요 ㅋㅋㅋ
 
나의 사랑, 매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8
김금희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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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1 김금희.

식탁에 둘러 앉아 있는데 내가 앉은 의자가 삐그덕거렸다. 내가 조립한 이케아제 의자였다. 남편이 그 의자 조립할 때 썼던 육각렌치를 짐정리하다 보았다고 했고 나는 웃었다.
그거 전동드라이버로 했어.
어째서 조립하는 모습은 보지도 못했는데 그 조그만 렌치를 썼을 거라고 상상했을까 싶어 웃겼다.
전동드라이버 사길 잘 했어. 그런데 그냥 전동드릴 살 걸 그랬어. 벽 막 뚫고 앙카도 탁 박아 넣을 수 있는 걸로.
내가 덧붙인 말에 큰아이가 앙카가 뭐야, 했고 부모는 앵커, 닻, 이라고 동시에 말했다.
그 순간 닻이라는 말을 내가 좋아한다는 걸 느꼈다. 나를 붙잡고 흔들리지 않게 해 줄 무언가를 누군가를 오래도록 원했다. 이제 크고 무겁고 아름다운 닻을 갖게 되었으니, 만족할 만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여겨왔다. 오늘은 눈보라를 헤치고 구청에 혼인신고를 하러 다녀온 지 딱 십 년이 되는 날이고, 작은아이가 태어난지 딱 천 일이 되는 날이다. 내 삶의 닻이란 그렇게 오래된 다정한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저녁 식탁 앞에 앉은 기분이다.
그렇지만 이 배는 얼마나 허약하고 잔물결에도 심하게 흔들리는지. 닻이 여러 개라면 폭풍우에도 좀 더 굳건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무게를 감당하는 일만도 버거워서 가라앉고 싶은 충동을 종종 느꼈다. 너는 왜 바다로 나아가지 않고 자꾸만 방파제나 항구 같은 것이 되려고 하느냐. 한강가의 움직이지 않는 유람선 레스토랑이나 박물관에 전시된 고선박이 되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물 속에 오래 가라앉힌 쇳덩이는 녹이 슨다고 스스로를 달래면서 가끔 물밖으로 끌어 올리고 멀리 나아간다. 그리고 다시 돌아간다. 영원히 머물 곳은 없다. 봄에 이사를 한다. 주기적으로 직장이 달라진다. 아이들은 자라나고 떠나간다. 어느 기간이나마 고정하고 안전하게 돕는 것들에 고마워하며, 같이 있는 동안은 나도 꼭 붙잡으려 애쓰는 일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직장에서 코로나19 때문에 쓰지 못한 회식비 등을 책 사는 예산으로 돌려줘서 책처돌이는 신이 났다. 한 해 동안 꽤 많은 책을 내 돈 안 내고 갖췄다.(그리고 그런 책은 읽는 일이 미뤄지기 쉽지…) 우록리 할머니들 구술생애사 모음 ‘할매의 탄생’, 드라마 나오기도 전에 고르고 여전히 안 본 ‘보건교사 안은영’, 다윈 새 번역본 ‘종의 기원’,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현미경으로 본 커다란 세상 ‘미생물’(높은 책값에 비해 책 만듦새는 기대에 못 미쳤다...정작 보라고 내밀자 큰아이는 징그러워! 하고 외면해서 슬픔…)
그리고 남은 잔액 털어서 김금희 소설 ‘나의 사랑, 매기’를 골랐다. 한 권이지만 분량은 중편 쯤 되려나. 쌀종이에 꽃과 잎과 커다란 알뿌리가 달린 이름 모를 식물을 그린 표지, 세로폭이 길고 작아 손에 쥐는 책느낌이 좋아서 직장에서 책을 나눠주는 날 동료들에게 예쁘죠, 하고 자랑했다. (다윈 두 권 왔을 때도 표지 질감 신기하다고 여기저기 만져봐요, 해서 이미 책변태로 소문 났을 것 같긴 하다…)

매기와 재훈은 이십 대에 잠시 사귄 연인이었고, 삼십 대에 다시 만나 또 잠시 사랑한다. 배우인 매기는 제주도에 아이와 남편이 있고 서울에 촬영차 올라올 때마다 마포구에 사는 출판사 직원인 재훈을 만난다. 처음 헤어질 때에도 매기는 재훈에게 이런저런 말로 상처를 주었는데, 다시 만나는 동안에도 재훈은 매기가 정한 룰과 제약 때문에 열받으면서도 매기를 그리워하고 계속 만나고 싶어한다. 나는 이 책을 늦게 보았다. 읽는 내내 역시 김금희 너무 좋아, 잘 써, 이런 이야기를 이만큼 쓰는 구나 싶은 동시에 콩콩 찧기는 마늘이 되는 기분이었다. 살살 좀 빻으면 안 될까… 왜 이렇게 디테일이 살아있나요 금희 언니...


+밑줄 긋기
-매기 어록. 책 속 인물이니 매력적이지 진짜 이런 사람과 사랑한다면 수명이 많이 줄어들겠구나...싶었다.
“잘 지내, 미래는 현재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단지 긴 현재일 뿐이야”(21-22)
나는 그것을 열어보는 일을 최대한 미루고 있다가 노란 고무줄에 손가락을 넣어 풀었는데, 거기에는 아주 간단하게 “나는 인간이니까 당연히 섹스를 하며 살아야 해”라고 쓰여 있었다.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29)

-매기를 사랑하고 나서 줄곧 나를 붙잡았던 의문은 왜 내가 이런 관계를 선택했는가, 였다. 그런데 적어도 9호선에 몸을 구겨 넣고 만원의 상태를 견디며 바닥과, 그 바닥의 깊음과, 그래서 겪는 불편과 고통과 힘듦과 귀찮음 모두의 원인인 한강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매기와 나의 관계에서 선택이란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빗물이 손바닥을 적시듯 매기가 내 인생으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는.(60)

-6월의 햇살은 봄의 뒷자락이 남아서인지 목덜미에 눌어붙는 것처럼 은근했다. 햇살은 강했지만 여름과는 달랐다. 그것은 따뜻함과 따가움 사이에 놓인 것 같았다.(71)

-그래, 당신은 고양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나, 죽었다고 생각하나.
상관없어요.(97)

-작은 창으로, 겨울을 견디고 있는 숲의 나무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 움츠리고 기꺼이 피폐해진 나무들, 봄이 채 오기 전까지는 어느 것이 성공적으로 살아냈는지 그러지 못했는지 알 수는 없는 것들. 나는 우리가 자꾸 어긋나고 상대를 향한 모멸의 흔적을 남기게 된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고 매기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냥 그것은 시작과 동시에 숙명처럼 가져갈 수 밖에 없었던 슬픔이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덜 사랑하거나 더 사랑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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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1-01-11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독후감이 점점 아름다워져요. 이게 다 카페 때문인가... 닻에 대한 열망 파트는 나중에 어디론가 꼭 옮깁시다! 이승우가 글 이렇게 쓴대여.. 수첩에 단상 모아서 소설에 고대로 옮겨버린다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표지가 고와요. 마치 빗물처럼 툭툭 떨어져 내린 시작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처럼, 어긋나버린 슬픔도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게 좋네요. 쪼금 살아보니까 내 의지보다는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작은 자녀분 천일 축하드려염 🎉)

반유행열반인 2021-01-11 10:40   좋아요 1 | URL
요즘 댓글이 점점 아름다워지는 것도 카페 때문인가요... ㅋㅋㅋ 독후감에 다 써 먹어버리면 점점 더 소설 못 쓸 거 같아서 원래 독후감은 무미건조똥구멍 같이 썼었는데 요즘은 공력 허비(?)를 여기에 하고 있네요...재활용 나도 할 수 있으까...리바이벌은 잘 못 하는 구만 ㅋㅋㅋ
다른 분 리뷰 보니 표지 흉악하다는 평도 있었나 보더라구요 ㅋㅋㅋ 그냥 받아들이면 맴이 편해지죠. 오래 그걸 못했는데 조금씩 연습중입니다... 꼬맹이 나도 축하해 ㅋㅋㅋ하고 말하고 박수쳐주니 뭔지 모르면서 덩달아 박수치네요 ㅋㅋㅋ

하나 2021-01-11 10:48   좋아요 1 | URL
꼬맹이분도 열반인님도 귀엽네여 ㅋㅋㅋ 표지 흉악하다니.. 10년 전에 이상한 폰트 유행할 때 책을 못 보셨나 ㅋㅋ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바다도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닐 것이다, 라고 쓴 거 보고 ㅋㅋㅋㅋㅋ 그냥 졸라 받아들이는 거구나 생각한 적 있어요. 바다도 받아들이는데 지금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1-11 10:51   좋아요 1 | URL
귀욥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한편으로는 실물 보고 실망하실 날이 많이 걱정이 됩니다...
헤밍웨이 하니까 헤밍웨이도 봐야 할 거 같네요 보다 만 에덴의 정원? 인가 하는 안 유명한 소설이랑 노인과 바다는 애기 때 보고는 또 애기들 보는 판형 하나 사놨는데 하나님 책 잘 판다... 바다 걔는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걸 거 같은데?! 인간이고 물고기고 다 쓸어버려야징 케케 하고 ㅋㅋㅋ못된 심성을 투사하는 나란 새끼..같은 마음이 포세이돈을 만들어냈겠구나 싶어요.

하나 2021-01-11 11:05   좋아요 1 | URL
저는 귀여움 필터 장착한지 오래구요 ㅋㅋㅋㅋ 어쩌면 바다 새끼는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걸 거야, 하고 바다를 원망이라도 할 때가 건강한 걸지도 모르겠어요. 노인과 바다 저도 어릴 때 애기들 책으로 보고 다 커서 봤는데 되게 슬프더라고요 ㅋㅋㅋ 체념하고 받아들이고 그러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이러면서 낚시줄 드리우고.. 헤밍웨이 많이 아팠던 거 같애...

공쟝쟝 2021-01-11 1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닻.

반유행열반인 2021-01-11 20:14   좋아요 1 | URL
닻닻!!

2021-01-24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4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