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12월
평점 :
절판


-20210218 박완서.

클럽하우스라는 앱을 깔았다. 트위터는 백만년 전에 탈퇴, 카톡 삭제한 지도 한참, 페이스북도 방치하다 삭제하는 등 SNS는 거의 다 정리한 마당에 뭔가 새로운 걸 까는 심리는 호기심이었다. 인스타그램은 계정만 파서 앱도 없이 웹페이지로 가끔 들러 몇 안 되는 작가들 소식이나 보는 용도에 게시물은 하나도 없는데, 거기 김금희 작가가 온라인 독서모임을 한다는 소식과, 첫 책모임을 인스타라이브로 하는 동시에 클럽하우스에서도 송출한다는 말에 음? 그게 뭐임? 하고 검색했다. 오디오 채팅방 같은 건데, 누군가 나를 초대해야지만 가입이 되고 아직 안드로이드 어플은 개발이 안 되어 있다고 했다. 일단 깔고 기다리면 지인이 초대해준다는 소리가 있길래 그렇게 했더니 정말, 대학 때 후배가 초대해줘서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서로 연락처가 있는 대학 선후배들 겨우 몇과 팔로우를 하고, 이런저런 방 목록만 구경하다 실수로 눌러 들어가면 사람들이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아...난 팟캐스트조차 안 듣던, 오디오는 커녕 지나친 텍스트형 인간인데 왜 여기에...하다가 김금희가 한다는 책 모임까지 다섯 시간 남은 걸 알고 독서모임의 선정도서인 박완서 작가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펼쳤다. 이번에 리커버판이 나왔는데 난 몇 년 전에 중고로 700원에 사 놨더라...어마어마한 가격임...그래도 집에 이미 있는 게 신나서 열심히 읽었지만 라이브 무렵까지 겨우 절반쯤 봤다 ㅋㅋㅋ
아홉시에 독서모임 딱 들어갔는데… 인스타 라이브에 중점을 둬서 그런지 클럽하우스에서는 작가님 목소리가 잘 안 들렸다. 마침 꼬맹이들 뒤늦은 저녁 먹일 타이밍이라 그냥 끄고 밥먹이러 감 ㅋㅋㅋ 그러고나서 오십 분 쯤 지나 들어가니 이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요-하며 마무리하고 다음 책을 소개하고 있었다. 딱히 책모임 낄 생각은 아닌데도 김금희 작가가 엄청 칭송을 하는 ‘트릭 미러’를 오! 하고 모셔 놓았다. 이날 라이브가 2월 14일이었는데 다음 라이브는 3월14일이라고, 작가님이 스스로를 커플브레이커로 칭하는 우스개 들으며 결국 라이브 본 내용은 하나도 못 듣고 하루를 마무리 했다 ㅋㅋㅋ
아, 다른 매체는 녹화가 되는데 클럽하우스는 대화 내용을 인스턴트로 하고 딱 휘발시키는 형태라 그때 그 방에 있던 사람만 내용을 알 수 있다. 이건 나름의 장점이 될는지 더 확장 못 하고 소멸하는 매체가 될는지...는 아직 클럽하우스에서 입술 한 번 달싹여보지 못한 아웃사이더가 궁금할 지점은 아니고요 ㅋㅋㅋ

그래도 김금희 작가 덕분에 박완서 작가 소설을 처음으로 읽게 되었다. 처음이라니! 몇 년 전에 책 사 모을 때 박완서 작가랑 박경리 작가 책 부지런히 쟁여 놓고 토지 말고는 하나도 안 봤다 ㅋㅋㅋ
이 소설은 한국전쟁 당시 서울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피난가고 인간성 개박살 나고 누구는 죽고 누구는 다치고 하는 장면들을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놔서 재미있게 읽었다. 나 서울대 입학한 여자야, 하면서도 빈집털이해서 연명하고, 숙부에게 의지하고, 피엑스에 취직해서 미군한테 빌붙어 먹고 사는 처지 한탄하는 장면이 이어져 나오는데, 그 비참함을 알 것 같았다. 삶이란 호구란 먹고사니즘이란 무엇인가...그러면서도 화자 자존심 더럽게 세네...분열 오진다 하면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후반부에서 연애담 나오면서 소설 구성이나 표현이 조금 어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앞부분부터 오빠 죽는 부분이나 피엑스 초기까지는 나름 소설답다 객관화 되었다 싶었는데, 지섭과 남편감 사이에서 간보는 장면에서는 너무 내밀한데다 친밀한 사람들 이야기 쓰다보니 온도 조절 안 되네 싶었다 ㅋㅋㅋㅋ(야 임마 니가 박완서 선생님도 까냐...) 화자인 박보다 한 살 어리고 시집 읽고 줄줄 외고 다니고 예쁜 거 모으기 좋아하고 재밌게 노는 데 도가 튼 지섭 보니까 왜 나 저런 사람 알 것 같냐 왜 친숙해ㅋㅋㅋ 지섭과 남편감 인물에 대한 묘사를 보면 그래도 박은 연애 다운 연애도 하고 결혼은 남편감 될 만한 사람을 골라갔구나(뭐 그- 트릴로지 중 삼부작에서 과연 남편이 속 안 썩이고 잘 살았을까 그랬다면 소설가가 됐겠냐 ㅋㅋ싶긴 했지만…아 넘겨짚지 마라 선 넘지 마라 박완서 선생님이시다...) 하면서 또 재미있었다.

글 앞에서 최신상 SNS타령하고 있었는데,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혹은 너무나 오래 전에 스친 사람들하고 한 방에 모인 듯 목소리 나누며 재잘대는 게 가능해진 세상과 전쟁통에 목숨 부지를 걱정하던 소설 속 70년 전을 비교하면 아예 두 세상에 사는 사람들 두 종 자체가 다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그래도 먹고 사는 걱정하고, 가족하고 애착과 애증을 반복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잘났다고 우세 부리는 가진 사람이나 잘 사는 나라 사람, 높은 계급 계층 사람 보며 아니꼬운 동시에 비참함 느끼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시대는 달라도 박완서 작가는 그런 보편적인 감정과 상황을 소설 안에 잘 담아 놓았다. 그래서 지금 읽는 우리도 재미있게 관심을 가지고, 또 공감하면서 읽는 것 같다. 지금 우리가 풀어 놓는 이야기들은 그렇게 남을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순간 번뜩이다 영원히 깜깜하게 잊혀지고 말까. 뭐 깜깜해도 어쩌겠어 지금 번뜩거리고 쓰면서 우리끼리 재밌으면 그걸로 족하다. 미래인들아 우리를 이해하려고 하지 마. 그냥 미개하고 구질구질한 너희와는 다른 미진화 종이란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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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석간신문을 보다 말고,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비틀어 미친 듯이 만개한 벚꽃을 내다보았다. 왜 만개한 꽃만 보면 미쳤단 느낌이 드는지 몰랐다. 밤도 아닌, 낮도 아닌 시간의 벚꽃이 풍기는 밝음은 화사하다기보다는 숨을 틀어막을 듯이 요기로워서 그런지도 몰랐다.(275)

-아무튼 다 왼 시보다 토막난 시가 더 생각나는 건 지섭이가 나를 감질나게 한 유일한 예이기 때문이다. 그는 좋아하는 사람하고 같이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 자기의 존재로 상대방을 완벽하게 채우려는 타입이었다. 딴 생각을 하는 걸 참지 못했고 그럴 새도 주지 않았다. 그가 부산으로 가고 나면 볼일을 보러 갔단 생각보다는 아, 쉬러 갔구나 싶을 정도로 그는 누구를 좋아하는 일에 미련하도록 자신을 혹사했다.(285)

-보셔요, 엄마. 두고 보셔요. 엄마가 그렇게 억울해하는 건 당신의 생살을 찢어서 남의 가문에 준다는 생각 때문인데 두고 보셔요. 나는 어떤 가문에도 안 속할 테니. 당신이 나를 찢어 내듯이 그이도 그의 어머니로부터 찢어 낼 거예요. 우린 서로 찢겨져 나온 싱싱한 생살로 접붙을 거예요. 접붙어서, 양쪽 집안의 잘나고 미천한 족속들이 온통 달려들어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도 그들과 닮은 유전자를 발견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돌연변이의 종이 될 테니 두고 보셔요. (303-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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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8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18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나 2021-02-18 23:0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니 박 선생님 저 얘기로 소설을 또 쓰셨구나 ㅋㅋㅋ 그 남자의 집에서도 한 번 하셨었는데 학교 졸업하듯이 둘이 엉엉 울면서 이별하고 딴 사람한테 시집 갔다고.. 그리고 나중에 다른 소설에서는 사랑밖에 난 몰라 타입 사촌동생 보고 저렇게 살았어야 했나... 뭐 그런 소설도 있고. 저도 이상하게 박완서 작가꺼는 몇 편 못봤네요.(그 몇 편이 왜 다 연애얘기야 ㅋㅋㅋ) 아, 덕분에 그 힙하다는 앱 구경하게 됐네요.. 😎

반유행열반인 2021-02-18 23:09   좋아요 5 | URL
ㅋㅋㅋ나 초대장 세 개 더 생겼는데 찐친이 너무 없어서 놀리고 있다는요 ㅋㅋㅋㅋ검색해 보니 그 남자의 집이 트릴로지 삼부작이래요! 싱아-그 산-그 놈 순 ㅋㅋㅋㅋㅋ

하나 2021-02-18 23:11   좋아요 4 | URL
아 그렇게 되는 거군요 삼부작이 싱아랑 그 놈(ㅋㅋㅋㅋㅋ) 읽었으니까 저도 그 산 읽겠습니다!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2-18 23:13   좋아요 4 | URL
저 사 놓은 거 있는데 제건 그 남자네 집이네요? 다른 분도 그 남자의 집 하길래 어 내건 유사품인가 하는 중...

하나 2021-02-18 23:15   좋아요 4 | URL
읽은지 오래 돼서 아마 제가 틀렸을 거예요 ㅋㅋㅋ 그 여자네 집도 있으니까 짝 맞춰서 그 남자네 집이 맞네요(검색함) 어차피 그 놈이 그 놈이죠 모 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2-18 23:21   좋아요 4 | URL
지섭인가요 거기 주인공도? 뭔가 잘생기고 잘 노는 치명적인 남자 느낌이라 그리로 갔으면 인생 꼬였을 거 같고 명작 더 많이 썼을 것도 같다...ㅋㅋㅋㅋㅋㅋㅋ

하나 2021-02-18 23:32   좋아요 4 | URL
그 남자네 집은 현보래요 이름이. 전쟁통에 마당에서 꽃 키우고 같이 있음 되게 행복하고 뭐 그런 묘사가 많았는데 ㅋㅋㅋㅋ 박 선생님 진짜 솔직하다 생각했던 게 안 이루어졌기 때문에 뒤돌아보니 행복했던 거지 모... 이런 냉정한 판단 ㅋㅋㅋㅋ

붕붕툐툐 2021-02-19 08: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말로만 듣던 클럽하우스 회원님이시네여~ 열반님 핵인싸!!👍👍

반유행열반인 2021-02-19 09:00   좋아요 1 | URL
현실 아싸가 암만 방구석에서 핫한 앱 깔면 뭐해요 ㅋㅋㅋ심지어 거기서도 유령회원 ㅋㅋㅋㅋㅋ’트릭미러’읽는 중인데 인터넷의 이런 속성에 관해 (개뿔 아무것도 안 하면서 넷00이즘 하고 올바른 척 핫한 척 힙한 척 하는 거 ㅋㅋㅋ)읽는 중인데 뼈 맞은 듯 그런게 재미나네요 ㅋㅋㅋ아침부터 갑자기 붕붕툐토님에게 책 팔이 시전 중 ㅋㅋㅋㅋㅋㅋㅋ왜 ㅋㅋㅋㅋ

바다그리기 2021-02-19 09: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짝사랑남을 보러 먼 길을 내려가고
감히^^ 박완서 작가님도 까는 열반인님, 그래서 너무 멋집니다!
마흔을 코앞에 둔 나이에 등단 하셔서 문단의 거목이 되신 이력만으로도 존경스러워 무작정 팬이 된지라 많은 작품을 읽었는데 열반인님 글과 하나님과의 대화를 읽다보니 내용들이 가물가물해서 그 책들을 읽은거 맞나 혼란에 빠져버렸네요. (아무래도 머리 속에 지우개가 있는듯.. ㅜㅜ)
트릴로지 3부작도 두분 덕에 처음 알았으니 그 핑계로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클럽하우스는 요즘 하도 말들이 많아서 궁금하긴 했는데, 안드로이드는 아직 안되는군요.
스스로를 사회적 고립 지향자라고 말하고 다니는 저로선 낯선 이들과의 방에서 청취자와 화자 역할 모두 어렵고 불편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몹쓸 호기심으로 기웃거리게는 되네요. 종종 올려주시면 대리 체험 해도 될까요? ㅎㅎ
본문의 독서감상도 늘 재미있고 흥미진진해서 열심히 읽지만, 두분의 핑퐁 댓글을 읽으며 스토커처럼 근황도 짐작하고 새로운 정보도 얻고 혼자서 새 책도
챙기고 있어요. 늘 감사해요~
이사 준비는 잘 하고 계신가요?
이사 소식 올려주셨던 때부터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펼쳐질 열반인님의 하루 하루들이 건강과 행복과 감사로 가득하길 온라인 절친(제 맘대로^^)이 마음 깊이 응원하고 있습니다.
이젠 정말 따뜻하고 포근한 기쁨을 누리는 날들만 가득하시길요.
음력 설도 지났으니 이제 진짜 새해네요.
복 많이 많이 받으세요~

반유행열반인 2021-02-19 11:01   좋아요 1 | URL
오랜만에 정성스러운 긴 댓글 감사드리고 반갑네요!!ㅎㅎ 오래도록 박완서 작가 좋아하시고 열심히 읽으신 바다그리기님 앞에 겨우 한 권 읽은 제가 막 까고 깝쳐대고 실례는 아닌지 걱정입니다 ㅋㅋㅋ
이사는 딱 두 달 쯤 남았네요. 대출도 받으러 가야하고 공사도 섭외하러 다니고 덕분에 바빠서 심심할 틈이 없어요.
늘 응원해주시고 따뜻하고 정다운 말씀 건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바다그리기님도 새해 복 담뿍 받으시고 하루하루 전날보다 조금씩 더 행복하시길 빌어요!!!

바다그리기 2021-02-19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달이면 참 좋은 계절에 이사 하시겠네요.
모든 일들이 물 흐르듯 순조롭게 잘 진행돼서 편안하게 이사 하실 수 있기를 바랄께요.
복 많이가 아니라 ‘담뿍‘ 받으라고 해주시는 인사, 예쁘고 정감 넘치는 표현이라 너무 좋네요. 감사합니다~
매번 댓글 달진 않아도 올려주시는 책과 커피와 일상에 대한 글들 읽으며 위로와 격려 받고 힐링하고 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것도 감사드려요~

Yeagene 2021-02-19 1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완서 선생님은 오래전 싱아와 호미란 작품만 읽어보았는데 싱아가 트릴로지의 첫번째였군요.열반인님 덕분에 처음 알았네요.이왕 삼부작의 첫번째를 읽었으니 나머지도 읽어봐야겠어요 ㅎㅎ
위의 핑퐁댓글 저도 참 즐겁게 읽었어요..이사가 아직 두달정도 남았군요.열반인님 잘 준비하실꺼라 믿슙니다!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02-19 17:40   좋아요 0 | URL
저도 싱아 가지고 있는데 그 남자네 집 보고서 봐야겠네요 ㅎㅎㅎ예진님도 즐거운 독서되시길 빕니다 ㅎㅎㅎ 늘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생에 할 일들 창비시선 390
안주철 지음 / 창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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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7 안주철.

오늘 밖은 영하 십 도라는데, 체감 기온은 십팔 도라는데, 직장 대가리는 뭐에 꽂혔는지 커다란 창고 같은 곳에 직원들 사십명 남짓을 몰아 넣고 아주 훌륭한 강의하신다는 강사를 모시고 집합 교육을 시켰다. 거리두기 한답시고 그 넓은 공간에 1미터 간격으로 접이식 의자를 펼쳐 두고 거기 앉아서 히터 몇 개로는 택도 없는 밖이나 다름 없는 안에서 덜덜 떨면서 두 시간을 앉아 있었다. 정작 대가리는 자기는 들은 교육이라고, 중간에 몇 분 잘들 듣고 있나 감시하러 와서 휘휘 돌아보고는 자기 집무실로 금세 가버렸다. 체감 기온 십팔...도.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도 옆 동료 말대로 욕구 위계(매슬로우ㅋㅋㅋ)에서 밀려버리면 무용하다. 나는 롱패딩의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주머니에 손을 찔렀다 뺐다 해도 소용이 없어서, 강의 자료 나눠준 묶음에 품 안에 숨겨온 시집을 겹쳐 두 시간 동안 읽었다. 몸이 추우니 마음이라도 곁불을 쬐야했단 말이다. 이렇게 휘떡휘떡 시를 읽는 건 아닌 일인데 얼어뒤지지 않으려면 이렇게라도 해야했다. 춥다 못해 머리가 아파오고 결국 저녁까지 머리가 아파서 타이레놀 한 알을 좀 전에 먹고 남은 시집을 다 읽었다.

-거지는 모닥불 앞에서 한장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서 그의 몸은 다 녹아내려 질척거리고
모닥불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살점부터 깨진 유리처럼 얼어붙기 시작했다.
(‘깨진 유리’ 중)

나라는 거지에게 오늘의 모닥불이 되어준 안주철 시인의 첫 시집에는 살점, 혀, 이웃, 마을, 개, 피, 이런 게 많이 나왔다. 그래서 좋았다. 친구가 시인님과 친하다고, 원주 가서 시인님 사는 컨테이너 박스 가서 밤새 술마시고 고양이랑 놀다 자고 온 걸 자랑하길래 한참 전에 시집을 사 놓고는 이제야 읽었다. 시집 읽기 전에 미리 검색해 읽었던 시들 보면, 참, 좋은 남편은 아니다 시인이란...글쓰는 남자란 좋은 애인도 배우자도 되기 어렵겠다...싶었지만 뭐 그러고 싶어 그러겠니 그러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은 어쩌겠어, 글쓰는 여자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네, 하고 생각했다.

+밑줄 긋기
-1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기다리며
아이에게 책을 읽어준다.
회사를 그만둘 때마다 나는 집에서
한없이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준다.

말을 한발자국씩 배우기 시작한 아이에게
나는 책을 읽어준다. 그러나 아이에게
아이가 진심으로 기다리는 것이
엄마라는 사실을 끝내 말해주지 않는다.

백수가 될 때마다 나는
아내의 등골을 매일 한숟갈씩 떠먹으며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아이가 책을 읽어주는 나를 좋아하게 만든다.

2
꿈을 하나 지운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쉽게 지워지는 꿈이 신기해서
아내의 꿈도 슬쩍 하나 지운다. 아내의 꿈도
잘 지워진다. 아내는 자잘한 꿈이 많아
손이 많이 간다.

꿈을 지울 때마다 내 몸에 구멍이 하나씩
늘어난다. 구멍을 세는 것이 재미있어서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면서 꿈을 지운다.

꿈이 지워질 때마다 내 몸에 구멍이 뚫린다.
아내의 몸에도 구멍이 숭숭 뚫린다. 구멍에서
피가 배어나온다.
혈관이 들어 있는 꿈을 지우고 말았다.

투명한 몸을 한방울씩 적시며 피가 흘러내린다.
(‘꿈을 지우다’ 전문. 잘 지워지는 꿈이라니 눈물 또르르…1)

-설교는 한시간이어도 일분이어도 길다.
거짓말을 수집하는 이유는 따로 없다. 좀더 시적으로
대답해야 한다면 많은 거짓말이 무늬를 이룰 것이다.
사랑한다, 오해였다, 머뭇거렸다, 너무 늦었다.
해석을 사랑하는 거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해석을 사랑함’ 중. 하...강의 억지로 들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와닿아버린ㅋㅋㅋㅋ길다…)

-아내가 운다.
나는 아내보다 더 처량해져서 우는 아내를 본다.
다음 생엔 돈 많이 벌어올게.
아내가 빠르게 눈물을 닦는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음 생에는 집을 한채 살 수 있을 거야.
아내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다음 생에는 힘이 부칠 때
아프리카에 들러 모래를 한줌 만져보자.
아내는 피식 웃는다.
이번 생에 니가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재빨리 아이가 되어 말한다. 배고파.
아내는 밥을 차리고
아이는 내가 되어 대신 반찬 투정을 한다.
순간 나는 아내가 되어
아이를 혼내려 하는데 변신이 잘 안된다.
아이가 벌써 아내가 되어 나를 혼낸다.
억울할 건 하나도 없다.
조금 늦었을 뿐이다.

그래도 나는 아내에게 말한다.
다음 생엔 이번 생을 까맣게 잊게 해줄게.
아내는 눈물을 문지를 손등같이 웃으며 말한다.
오늘 급식은 여기까지
(‘다음 생애 할 일들’전문. 덜덜 떨고 나서 또 덜덜 떨면서 급식 먹었지...ㅋㅋㅋㅋ 다음 생엔 이번 생을 까맣게 잊게 해줄게. 눈물 또르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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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1-02-17 21:4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순간 나는 아내가 되어 아이를 혼내려 하는데 변신이 잘 안된다. ㅋㅋㅋ 이렇게 심드렁한 변신 실패라니.. 아이가 벌써 아내가 되어 나를 혼낸다,는 도경완네 딸 생각나네여 ㅋㅋ 오늘 진짜 엄청 무척 되게 춥던데 대가리 혼나야겠네... 😡(체감온도 영하) 십팔...도에 춥게 무슨 교육을 한다고. 날 풀리면 할 것이지.. 두통은 좀 차도가 있으신가요? 실내에 있어도 으슬으슬 춥던데 따듯하게 무장하시고 일찍 주무셔여! 🤒

반유행열반인 2021-02-17 21:57   좋아요 4 | URL
안 그래도 변신 나와서 변신 연구 전문가 하나님 생각났어요 ㅋㅋ실패는 안 쳐주나...저 복직 후 일 년 내내 대가리 욕하고 이젠 좀 적응되서 덜 할 때겠지...했는데 여전한 새해네요ㅋㅋㅋ 얼른 탈00(직장 이름)하고 싶다...가 요즘 제가 만든 유행어..어머 저 분 드디어 탈00성공! 경축! 진심 부러움!!! 이러고 ㅋㅋㅋ
약간 예방(?)개념으루다가 조금 조금 아픈 걸 약 미리 먹었더니 양호한 저녁입니다. 하나님도 따뜻한 밤 되시길!!!

막시무스 2021-02-17 22:3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늘 같은날 좋은 시로 견디기에도 좀 너무한 집합교육이었네요!ㅠ.ㅠ 어른들 모아 놓구선 뭔 갑질인지. 열반님의 보스께서 요즘 존재감을 못느끼시나 보네요! 암튼 고생많으셨던 하루셨네요! 잠은 편하게 주무시길 기원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2-18 06:42   좋아요 0 | URL
막시무스님 표현이 너무 적확하네요 ㅋㅋ존재감 어필을 위한 갑질 때문에 몇 명을 춥게 하시는 건지 ㅋㅋㅋ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잤습니다. 막시무스님 좋은 하루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붕붕툐툐 2021-02-17 22: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헐!! 넘넘 고생하셨어요~~ 따시게 푸욱 주무시면 낼 거뜬히 일어나실 거예요!!🙆

반유행열반인 2021-02-18 06:43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약빨인지 고단했는지 잘 자고 잘 일어났어요 ㅎㅎㅎ

라로 2021-02-18 02: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기 오니까 그 집단 교육 뭐 이런 거 안 들어도 되서 좋습니다요. 에헴. 암튼 고생하셨어요. 저는 추운 거 절대 못참는데 어떻게 그렇게 추운데 시를!! 시를!! 읽으셨어요?? 저 시는 꿈을 지우다 그거랑, 아이가 아내가 되어 혼낸다 그 부분 좋아요. 아이라도 혼내주니까. 😅 저런 남편이랑 사는 분들은 살신성인?? 하긴 저같은 여자랑 사는 남자도 살신성인 같긴 해요. 🤣🤣🤣

반유행열반인 2021-02-18 06:45   좋아요 1 | URL
한동안 줌으로 잘 하더니 방역 어쩔 건지 간 크게 저런 걸 여러 개 잡아놔서 오늘도 같은 데서 떨 것 같아요 ㅠㅠ 추운 데서 불쌍한(?)시 읽으니 의외로 운치있더라구요. 추운 데서 강제로 강의 듣는 거보다는 저거라도 내 선택이다 할 수 있어서 ㅋㅋㅋ덜 불행했어요. 저같은 여자랑 사는 남자도 살신성인 같긴 해요.22222 ㅎㅎㅎ

Yeagene 2021-02-18 11: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영하 십팔도에서 두 시간을...;;;;
진짜 고생하셨네요.전 추울땐 머릿속에 암것도 안들어오던데 시를 읽으시다니 열반인님 대단하신데요..ㅎㅎㅎ 시인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은 가끔 들더라구요..:)

반유행열반인 2021-02-18 12:30   좋아요 3 | URL
오늘은 소설을 읽으며 즐거운(?)시간을 보냈습니다. 어제보다 실내온도도 1도 높아지고 ㅋㅋㅋ
 
[eBook]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최순우의 한국미 산책, 개정판
최순우 지음 / 학고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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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6 최순우.

수능과 대입 전형이 모두 끝나고, 합격자 발표에 기뻐하고, 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난 이맘쯤이었다. 막 스무살이 된, 고딩도 대딩도 아닌 공백기의 나새끼는 잠시 여행 다녀오겠다고, 아빠는 술 좀 그만 먹으라고 짧은 손편지를 남기고 첫 가출을 했다.
목적지는 영주 부석사. 국사책과 비문학 영역 지문(아마도 최순우의 글)에서만 접하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을 꼭 직접 보고 싶었다. 다른 목적도 있었는데, 거의 이년을 짝사랑하던 락동호회의 동갑내기 남자애 하나가 영주 바로 옆 봉화군에 살고 있었다. 사는 곳도 멀고 그간 락동호회 정기공연 때 단 한 번 본 게 다인 그 아이에게 난 푹 빠져 있었고, 나의 구애와 그 아이의 거절과 눈물바람을 이미 여러번 반복한 뒤였다. 그래도 수능 끝나면 놀러오라던 그 아이와의 약속을 지킨답시고 칙칙폭폭 느려터진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봉화에 갔다. 저녁 늦게 도착해서 그 애 엄마가 차려주시는 밥을 먹고, 여전히 내게 아무 것도 열지 않는 아이 앞에서 눈물로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아이와 함께 영주로 건너가 부석사를 둘러보았다. 무량수전도 보고, 선돌도 보고, 옆에 공사중인 탑도 돌아보고, 안양문을 지나도 극락은 없고, 부석사 앞 된장찌개 파는 집은 맛도 없고 바가지 씌우고, 우리는 시내로 와서 피씨방에 갔다 노래방에 갔다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나는 홀로 숙소를 잡아 잠을 자고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그만큼 멀리 가본 건 처음이었고 짝사랑은 내내 짝사랑이라 슬펐지만, 그래도 부석사는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절이었다. 그래서 그로부터 일년 후 쯤 남자친구가 생기고 나서 다시 부석사에 놀러갔다. ㅋㅋㅋㅋ겨우 두번 갔는데 멀리 보이는 소백산줄기랑 뒤곁 단청 그림 같은 게 어른거린다. 영주는 시내에 김밥천국이 제일 맛있습니다...왜 그 동네는 밥이 맛이 없는 걸까…그래도 다시 가고 싶다 부석사...

네이버블로그에 책 열심히 읽는 이웃분이 이 책 좋다고 추천하셔서, 제목도 마침 내가 좋아하는 사찰 가람이 붙었으니 읽고 싶어져서 빌렸다. 앞의 제법 긴 글은 잘쓰기도 했고 익숙하기도 했다. 우리 문화재를 이렇게 세련되게 물고 빨면 수차례 개정교육과정 거치면서 국어 교과서 저자들이랑 수능 출제위원들이 눈독을 안 들였을리가 없다.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2020년 수능에 딱 백자 달항아리가 지문으로 실렸다. ㅋㅋㅋ
저자는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고, 다양한 미술품과 문화유적에 조예가 깊고 우리가 가진 아름다움을 충분히 표현할 만한 아름다운 문재까지 갖춘 사람이었다. 처음에 저자 연보 보는데 딱 돌아가신 날이 내가 태어난 그 해 그 날이라 오, 난 이 책을 읽을 운명이었어!하고 괜히 좋아했다. 옛 사람이라 예쁜 그릇이나 그림에 잘 생긴 며느리 같은 비유 붙이는 건 조금 낡은 느낌이긴 하지만, 그림과 건축물과 공예품을 묘사하는 글솜씨가 대체로 좋았다. 음 멋을 아는 사람이군, 싶은 글이 잔뜩이었다. 글과 함께 책에 실린 사진들을 보니 어디가 예쁘고 멋지고 근사한지 조금 더 와닿는 느낌이었다. 외가가 광주 분원 백자 빗던 도요지 근처였어서 도자기 사진과 글을 보고 조금 반갑긴 했는데, 뒷부분에 청자-분청사기-백자를 잔뜩 나열한 건 읽기에 조금 지루했다.
사는 동안 생각보다 많은 구석구석의 박물관 다니고 유물이랑 미술품도 많이 봤구나 싶었다. 책 보면서 어 저거 나 실물 봤는데 헤헤 하고 기억나는 게 많아서 좋았다. 책을 봤으니 박물관에 다시 가면 더 반갑게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코로나야 언제 나들이 시켜줄 거니.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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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1-02-16 23: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스무살 때는 더 박력 넘치셨네... 좋아하는 사람 보러 영주를 가버려 ㅋㅋㅋ 부석사에서 친구들이랑 하루 자고 온 적 있는데 새벽에 엄청 멋있더라고요. 그때 넘 더워서 다신 여름에 여행 가지 말아야지... 밑에 지방은 더더욱 가지 말아야지... 다짐했는데 그래도 덕분에 무량수전도 보고 그랬네요 ㅋㅋㅋ 그 동네 밥은 맛이 없는 건 킹정... 그래도 다시 가고 싶다 부석사...22

반유행열반인 2021-02-17 06:50   좋아요 2 | URL
저는 두 번 다 이맘쯤의
추운 계절에 갔어요. 그덕에 하늘은 겁나 맑던데 넘나 추웠다ㅋㅋㅋ여름의 부석사를 보셨군요! 이젠 여름이고 겨울이고 상관 없으니 여행 좀 보내죠 코로롱아... ㅋㅋㅋ

2021-02-17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17 0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Yeagene 2021-02-17 03: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글 읽으니 저도 부석사 한번 가보고 싶네요..아마 부석사는 어렸을 때 가봤을런지도...;;;근데 그닥 기억에는 없어요.ㅎㅎ 좋아하는 아이를 보기 위해 가출까지 감행하시다니...전 저 때 그런 것도 안하고 뭐하고 살았는지 몰겠어요 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02-17 06:54   좋아요 3 | URL
이 나이에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ㅋㅋㅋ코로롱 좀 잠잠할 때 가족 몰래 휘리릭 다녀오세요 ㅋㅋㅋ 부석사 멋있고 조용할 때 가면 좋아요. 화엄사랑 통도사도 멋있고. 예진님이 다녀오시면 또 멋진 스케치로 변모할 풍경들이 떠올라요 ㅎㅎㅎ

페넬로페 2021-02-17 19: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마 반열님보다 더 전) 겨울에 봉정사를 거쳐 부석사를 다녀왔어요.
조그마한 절이 운치가 있어 좋았어요.
부석사에서 대학때 친구를 우연히 만났어요.
그때 잠깐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는데 지금 밥이라도 먹고 헤어질걸하고 후회가 돼요.
그 뒤로 한번도 본적이 없고 연락도 안했거든요^^

반유행열반인 2021-02-17 19:57   좋아요 2 | URL
봉정사는 못 가봤는데 거기도 수능 국사 단골이었던 듯요ㅋㅋㅋ부석사에서 우연한 만남도 정말 신기하네요. 인연이란 늘 모를 일...

공쟝쟝 2021-02-18 1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야.... 스무살... 사랑의 열병... 모야모야 사랑둥이☺️

반유행열반인 2021-02-18 14:12   좋아요 0 | URL
여전합니다 😚
 
[eBook] 안녕, 드뷔시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1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정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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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5 나카야마 시치리.

이 소설을 읽다가 주인공 하루카와 잠시 경쟁 구도를 이룬 피아노 연주자가 등장하는데, 그 이름이 미스즈, 뜻은 아름다운 방울이었다. 어려서 내가 살던 도시의 피아노 대회가 열리면 늘 대상을 휩쓸던 아이와 이름이 같아서 재미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나간 피아노 시 대회에서 연주를 마친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무대를 내려왔다. 너무 긴장했고, 몇 달 간 치열했던 연습도, 성심성의껏 레슨해 준 선생님의 노고도 순식간에 무의미한 일이 되어 버린 것 같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다 망했어. 나는 역시 재능이 없어. 시상 발표 때 대상-금상-은상-동상-장려상이 거꾸로 불렸는데 4위인 동상에 내 이름이 들리자 어리둥절했다. 상품은 멜로디혼이었다ㅋㅋㅋ. 대상은 같은 반이지만 다른 학원을 다니던 아름다운 방울이가 탔다. 이후 5, 6학년 때도 계속 시 대회에 나갔지만 다음엔 장려, 그 다음엔 아무 상도 타지 못했고 방울이는 매 대회마다 대상을 휩쓸었다. 마지막 대회 이후 피아노 선생님이 결혼하면서 학원을 닫고 지방으로 이사가게 되어서 나도 피아노를 그만두게 되었다. 선생님은 혹시 학원을 옮길 생각이면 어디어디 학원으로 가라고, 거기 선생님이 이 도시에서 제일 잘 가르친다고 했고- 그 학원은 방울이가 다니던 곳이었다.
한 2년 쯤 놀다보니 다시 피아노가 배우고 싶어서 중학생인 나는 선생님이 소개한 그 학원에 갔다. 조금 늦게 받은 제자라 그런지, 지인 소개라 그런지, 이 동네에서 공부 제일 잘 하는 애라는 소문을 미리 들어서 그런지 새 선생님은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그런데 그 학원에 다니면서 나는 선생님이 가르친 아이들이 시 대회에서 상을 휩쓰는 비결을 알게 되었다.
학원에는 칸칸 마다 피아노가 한 대 있었는데 입구 쪽에 터돋은 곳에 계단 한 두 칸 올라가면 문이 있고 그 안에 피아노가 있는 넓은 방이 외따로 놓여 있어 조금 특이했다. 내 동생과 같은 반인 첫째 남자아이와 그 아이 여동생 둘 까지 그 학원을 다니는 삼남매가 있었는데, 모두 제법 피아노를 잘 쳐서 상도 곧잘 탔다. 남매 중 둘째인 여자아이가 어느 날인지 연습을 안 해 온 모양이었다. 레슨 중인 방안에서 갑자기 비명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렸다. 학원 아이들은 다들 갑자기 어두워진 얼굴로 못듣는 척, 모르는 척 했다. 방울이도 그랬다. 그날은 아주 애를 잡는지 자 같은 걸로 때리는 소리, 울음소리, 피아노소리가 섞여 난리도 아니었다. 나는 나중에라도 내가 저 꼴을 겪는 게 아닌가 겁이 났는데, 애초에 선생님은 내가 피아노를 취미로 배울 뿐이라고 생각해서인지 그리 엄하게 다루지 않았다. 선생님은 연주 한 부분 한 부분 꼼꼼하게 잘 보시는 분이긴 했지만 실력 향상의 비결은 매서운 지적과 매가 병행된 결과였다. 나는 그렇게해서까지 잘치고 싶지는 않았고...고등학교 들어가면서 학원을 그만두었다.
그 학원에 다니는 동안 방울이랑 친해져서 걔네 집 놀러가서 그 동안 방울이가 대상 탈 때마다 받은 전리품-바이올린은 줄이 끊어졌고, 팬플루트를 시범삼아 불어줬고, 플루트였나 크로마 하프였나는 배우는 중인데 어렵다고 했고, 오르간은 쓰잘데 없어서 팔았다고ㅋㅋㅋ- 구경도 했고, 같이 문방구에서 와플 파이도 사 먹었다. 친하지 않을 때는 피아노를 나보다 잘 치는 것이 샘도 나고 애가 피아노만 잘 치지 너무 쌀쌀 맞고 콧대 높다 생각했는데 친해지고 나니 말도 잘하고 재미있었다. 그애 집에 있는 팝송책을 마음에 들어하자 문방구 가서 악보를 복사하는 것도 허락해 주었다. 아름다운 방울이는 나중에 피아노를 그만두었다가 결국 다시 피아노로 돌아간 것 같은데 지금은 뭐하고 지내는지 잘 모르겠다 .
뭐 그래서 나는 피아노를 얼마나 치냐... 하면 체르니 40번 치다 관뒀고 슈베르트 좀 치다 말았습죠...지금은 하나도 못 침 ㅋㅋㅋㅋ그래서 소설 읽는 동안 피아노에 관한 부분이 나와도 음 잘 모르겠다 하고 봄 ㅋㅋㅋ

제목부터 드뷔시가 등장해서 음악 소설이구나, 지난 번에 읽어보니 시치리 아저씨는 추리물 작가던데 어떤 이야기를 풀어나갈까 궁금했다. 다행히 소설의 메인 테마 격인 드뷔시의 ‘달빛’은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감상 시험 때문에 지겹게 들어서 아는 곡이었다. 그때 시디 하나에 구워 반복해서 들은 노래들이 아직도 귓속에 남아 있다. 주입식 공교육이 장점도 있군요…
사고로 할아버지와 사촌을 잃고 본인은 심한 화상으로 몸이 망가지고도 삶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피아노 연주에 매진하는 하루카와 그녀를 가르치며 재활을 돕는 미사키가 주 인물이다. 보면 볼수록 미사키는 심각한 사기 캐릭터(이자 훈남)였다. 이후로도 미사키가 활약하는 음악 추리물 시리즈가 나온 모양인데 별로 궁금하진 않다ㅋㅋㅋ. 하루카가 사람들의 뒤틀린 시선과 신체적 어려움이라는 겹겹의 고통을 딛고 피아노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뻔함과 감동을 오락가락 하다가, 진짜 범인은 또 누구냐 하고 이놈저놈 다 의심해보다가, 마지막 얼마 안 남은 분량 동안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려고 하나, 하는 순간 터지는 반전에서 약간의 희열을 느꼈다. ㅋㅋㅋㅋ 너무 문학상 신인상 노리는 소설이라 처음에는 별로인 느낌도 있었지만 끝까지 읽고 나니 이 정도로 재주 부렸으면 상줬어야 겠네, 그런데 다른 경쟁작도 시치리가 쓴 개구리 살인마 소설이었다고 하니 님이 짱 먹으세요...ㅋㅋㅋㅋ
지난 소설 작가 형사 부스지마 읽을 때는 대사만 잘쓴다고 뭐라했는데, 이 소설 보니 같은 작가 소설이 맞냐 싶게 지문에도 힘을 빡 줬다. 식상함과 참신함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소설로 피아노 연주를 과연 어떻게 표현했을까 궁금했는데, 십여페이지 가까이 미사키의 협연 풀어 놓은 건 조금 지루했지만 뒤에 하루카의 콩쿨 장면은 최선을 다하셨구나 싶었다. 피아노는 잘 모르고 딱히 재미는 없지만 나름대로 리듬과 강약과 감정과 느낌을 글로 담으려고 애쓴 건 신기하기도 했다. 그치만 그닥 연주를 글로 읽는 효용은 모르겠음 ㅋㅋㅋ
읽다 말고 소설에 등장한 피아노곡을 유튜브로 찾아 들으니 좋았다. 소설에 등장하는 곡들의 링크를 정리해 놓았다.

Seong-Jin Cho – Polonaise in A flat major Op. 53 
https://youtu.be/d3IKMiv8AHw

Seong-Jin Cho – Etude in C major Op. 10 No. 1 
https://youtu.be/9E82wwNc7r8

부르크뮐러 2번 - 아라베스크 Burgmüller - Arabesque
https://youtu.be/PAuj1-DncI0

베레초프스키 |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4번 마제파(Mazeppa)
https://youtu.be/a-iaC044s_8

Seong-Jin Cho plays Chopin Etude op.10 no.2 in A minor
https://youtu.be/ayX919A1b1o

Dmitry Shishkin – F. Chopin ˝Etude in C sharp minor, Op. 10 No. 4˝ (Chopin and his Europe) (encore)
https://youtu.be/ZZ1KQAlj7LM

Dmitry Shishkin plays Liszt ˝La Campanella˝
https://youtu.be/kkq_3CrvFUM

조성진 Seong-Jin Cho] Debussy Claire de lune 드뷔시 달빛
https://youtu.be/97_VJve7UVc

Stanislav Bunin: Debussy - Arabesque No. 1 in E major
https://youtu.be/GStfo_f4L0g

+밑줄 긋기
-이야기와 음악에는 힘이 있다.
이는 재앙을 막는 초능력이 아닐뿐더러 죽은 자를 되살리는 마력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가능성을 믿게 하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는 힘이다.

-한데 말이다, 이 할아비 생각으로는 갖고 싶고 되고 싶다는 소망이나 희망은 과일 같은 거란다. 젊어서 먹으면 자양도 되고 미용에도 좋지. 그렇지만 과일이라는 게 때가 지나면 상하고 썩는 법이거든. 썩은 과일은 독소를 지녔지. 당연히 그걸 계속 먹는 사람은 배 속부터 좀먹히는 거다. 그리고 현실과 싸우는 힘을 잃어 간단다. 게다가 말이다, 아무리 맛있어도 배가 부른데도 계속 먹으면 배탈이 나게 되어 있어. 사람은 누구나 과일을 먹어도 되는 한도가 미리 정해져 있는데 그걸 분수라고 한다. 분수를 모르는 자의 말로는 대체로 자멸이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간신히 삼킨 말이 두 가지 있었다.
주위 기대를 배신하는 게 그렇게 죄스러운 일일까.
본인의 의사를 무시하면서까지 가능성을 끌어올리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일까.

-세상은 오래 전부터 비열하고 저열하며 뻔뻔스러웠던 것이다.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이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밑바닥에서 올려다본 세상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알고 보면 그 모습이야말로 진짜였던 것이다.

-세상은 악의로 가득 차 있다. 공격에 노출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하지만 자신이 비난하는 쪽에 있을 때는 전혀 알지 못한다. 아니,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잔학함을 정의감으로 둔갑시켜 자기 내면에 있는 악의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을 올바른 인간이라고 믿는 것, 자신과 입장이 다른 사람을 악으로 단정하는 것이야말로 악의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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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2-15 23: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링크 추가 센스 돋네요! 이 책 쇼팽,베토벤에 라흐마니노프도 있어서 궁금했는데 잘 읽었습니당ㅋ저두 꼭 볼래요!
오래 치셨네용 콩쿠르 나간거 부럽고요.^^저는 100에서 30인지 넘어가구 초반까지만 배웠어요.하..

반유행열반인 2021-02-16 07:14   좋아요 2 | URL
저도 지금 실력은 백에서 삼십 사이인 거 같아요 ㅋㅋㅋ쇼팽 베토벤 라흐마니노프 시리즈는 읽게 되시면 리뷰 남겨주세요 ㅋㅋ저는 그만 읽으려구요... ㅋㅋㅋㅋ

붕붕툐툐 2021-02-15 23: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셋 중에 두개만 좋으면?ㅎㅎㅎ
링크 진짜 짱짱!

반유행열반인 2021-02-16 07:14   좋아요 1 | URL
이제부터 피아노를 좋아하시면 즐기실 수 있겠습니다! ㅋㅋㅋ

하나 2021-02-16 00: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댁에 피아노 있다는 얘기 들은 거 같은데 열반인님도 피아노 오래치셨구나. 저도 오래 쳤고 방울이 같은 친구 옆에서 열심히 사네 쟤는.. 했던 사람 ㅋㅋㅋㅋ “이 정도로 재주 부렸으면 상줘야겠네” 그런 말 들으려면 미스터리 스릴러 반전 빵빵 때려넣어야 되나요? 🤣 링크까지 정성 가득 리뷰 🎶 요즘 알라딘 클래식 마을 🎵

반유행열반인 2021-02-16 07:17   좋아요 2 | URL
맞아요 아빠가 저 피아노 그만두고 나서 고등학생 때 디지털 피아노 사줌 ㅋㅋㅋ두 집 갈라설 때 제 침대 책상 기타 고등학교 졸업할 때 상패(금 붙어 있었음...)까지 다 가져가면서 희한하게 피아노는 두고 갔어요. 다 때려넣은 정성은 인정이고 취향은 탈 거 같은 소설 ㅋㅋㅋ소재 조합이 특이해서 그렇지 반전 스릴러는 약해서 원조 추리물 보던 사람은 부족하다고 욕하지 않을까요 ...

psyche 2021-02-16 06: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셋 중 두 개를 좋아합니다. ㅎㅎ 한번 읽어볼래요. 링크까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2-16 07:19   좋아요 1 | URL
엇 어떤 두 개를 좋아하시는지 갑자기 짐작이 안 가고 있어요 ㅋㅋㅋ링크 피아노곡들은 멋있길래 나아아중에 북플 꾹 누르고 들으려고 모았어요 ㅋㅋ피씨에서 html로 동영상들도 직접 잘 붙여넣으시던데 그 재주는 없어서 아쉽네요 ㅠㅠ

psyche 2021-02-16 07:45   좋아요 1 | URL
피아노와 추리 좋아하고 반전은 딱히 좋아하지 않아요 ㅎㅎ 다음에 책 읽을때 열반님 링크 따라 들으면 좋을 거 같아요.

Yeagene 2021-02-16 1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런 피아노 연주를 글로 쓴 노력이 대단한대요 ㅎㅎ 열반인님 덕분에 음악감상했네요..역시 조성진!:)

반유행열반인 2021-02-16 13:28   좋아요 0 | URL
그쵸 글로 쓰는 장인들 ㅋㅋㅋ조성진 저는 잘 몰랐는데 이번에 들으니 좋네요 ㅋㅋㅋ

공쟝쟝 2021-02-16 1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성진 ㅠㅠㅠ 핡 ㅠㅠㅠ (모닝콜 조성진 쇼팽인 사람이 웁니다) 그래도 제 인생의 드비쉬는 릴리슈슈 쿠노의 드비쉬 ㅋㅋㅋ (하지만 전 클래식은 아무리 들어도 모루겠어요)

공쟝쟝 2021-02-16 1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론 : 읽지도 않는 클래식 입문 책만 세권 집에 있음

반유행열반인 2021-02-16 20:56   좋아요 0 | URL
저보다는 훨씬 잘 아시는 거 같은데요 ㅋㅋㅋ조성진 이름만 들어보고 이번에 첨 찾아듣는 일인 ㅋㅋㅋㅋㅋㅋ
 
주거해부도감 - 집짓기의 철학을 담고 생각의 각도를 바꾸어주는 따뜻한 건축책 해부도감 시리즈
마스다 스스무 지음, 김준균 옮김 / 더숲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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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2 마스다 스스무.

할아버지는 노가다 십장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중동 어딘가에 계셨고, 편지로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 엄마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첫 아이고 어른 말씀 따르는 일 외에는 다른 선택을 하지 못했다. 내가 조금 자랐을 때에도 할아버지는 수단, 이란, 이런 사막 나라의 건설 현장에 가 있었다. 건축을 배운 건 아니고 그냥 여기저기 집 짓고 건물 짓는 곳 일하러 다니면서 설계도 보는 법 익히고 눈대중으로 맞추고 좋은 기억력으로 외워서 뚝딱뚝딱 하게 되었다고 했다. 증조할아버지는 대목수였다. 오래 전에 큰 절을 짓고 돈도 많이 벌었는데 노름으로 다 날려서 할아버지가 아버지는 죽어야 돼, 하고 술주정을 해서 증조할아버지가 엉엉 울었다고 한다. 손재주 좋은 조상의 영향인지 아빠는 귀금속 세공일을 했고 삼촌들도 뭘 만들거나 고치는 일을 잘했다. 사촌들도 그림 그리고 만드는 걸 좋아해서 미술 쪽 전공을 한 아이들이 (나 빼고 ㅋㅋㅋ) 많았다.
할머니댁(할아버지가 같이 사는데도 우리는 늘 할먼네-하고 불렀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삼촌들이 지었다고 했다. 명절 전날쯤 그 집에서 자고 다음날 차례를 지냈다. 머물 때마다 그곳은 편안한 공간이 아니었다.
일단 진입로부터 길이 없는 곳, 도랑과 남의 밭을 지나 외따로 떨어진 산밑의 맹지에 집이 있었다. 삼촌들은 차를 집 앞 논 건너편 저 먼 마을회관 앞이나 남의 집 담벼락 옆에 대고 논두렁길을 질러 할머니댁에 왔다. 차가 없는 우리 가족은 버스정류장에서 삼십여분 쯤 시골길을 걸어 들어갔다. 저녁길을 밟을 때면 길 옆 도랑이며 논물에서 개구리들이 와글와글 우는 소리가 났다.
아래로 도랑이 흐르는 편편한 시멘트 판 같은 너른 공간이 담벼락 밖에 있었다. 담 안은 마당이라 하기엔 좁은 마당, 실내 출입문 마주보고 왼편으로 돌면 나무 쌓는 공간이랑 우물가, 우물 앞 별채 방 하나와 창고들, 그리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작은 계단을 밟으면 뒷산의 나무가 바람에 떨리는 소리와 모양이 으스스했고, 창고 위편 옥상의 장독대를 지나 우물 방 옥상으로 건너가면 집 옆 개울물과 남의 밤나무밭과 할아버지네 논밭으로 가는 산길이 멀리 보였다. 그나마 실외 공간은 볕이 들고 트인 맛이 있어서 거부감 없이 먼저 떠오른다.
다시 대문 앞 미닫이 유리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실내에 마루라 부르던 거실이 있었다. 원래 거실 위편으로 골방 같은 작은 방이 있었(고 그 작은 방에는 빨간 이불을 뒤집어쓴 다섯째 삼촌이 음침하게 누워있었)는데 어느 해 홍수 피해로 침수가 된 후 새로 공사를 하면서 방을 다 없애고 거실을 넓게 만들었다. 거실 오른편에는 장가 못 간 막내 삼촌이 쓰는 작은 방, 거실 왼편은 위쪽은 부엌으로 가는 문, 출입문 쪽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쓰는 방으로 가는 문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한 때는 우물 건너편 방에 처박혀 살았는데, 어느때부터 다시 안방을 차지했다. 이 집 구조 중 제일 이상한 게, 화장실은 안방 안에 출입문이 있었다. 또 그 화장실은 우물가로 나가는 허술한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시아버지 앞을 지나 화장실에 가는 게 싫었던 며느리들은 부엌에서 우물 가로 난 문을 나가서 집을 한 바퀴 빙 돌아 대문 앞을 지나 그 오른쪽 구석에, 농기구와 공구들이 쌓인 창고 사이로 아주 오래전 만들어 놓고 없애지 않은 푸세식 화장실을 사용하고는 우물가로 되돌아와 손을 씻었다.
그러니까 그 집은 오직 할아버지 중심의 아주 좆같은 구조였던 거지.
명절마다 할아버지와 큰아빠, 아빠, 작은아빠, 삼촌들이 싸우거나 할아버지에게 맞아서 울었다. 엄마와 작은엄마가 싸우고 엄마가 갑자기 마을 밖으로 나가버렸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맞은 상처를 감추며 끙끙 앓았다. 갈랍 부치고 만두 빚고 식혜 만들던 엄마들은 부엌 바닥이나 거실 바닥에 눕고 삼촌들은 작은 방에서 늦도록 고스톱 치고 티비 보다 아무 데나 눕고 아이들은 거실 바닥에 누운 엄마들 사이나 할머니 할아버지 방의 여기저기 틈새에 누워 얇고 배기는 요떼기 위에 지나치게 높은 베개를 베고 불편한 잠을 잤다. 아빠나 삼촌이 자기 본가에 들르면 떠오르는 기억은, 아주 추운 날 형제 한 명이 잘못하면 여섯 형제 모두 발가벗겨진 채 담벼락 아래 쫓겨나 울던 일이었다.
으악. 노가다 십장이 집이라고 좆같은 걸 지어놓고 자식과 부인을 학대하고 그 자식들은 또 자기 부인과 자식을 학대하고 아주 좆같은 걸 대물림했다.

명절이면 그런 기억들이 가끔 떠오른다. 이제 다시는 거기 안 가도 되고 엄마가 거기에서 수십명 밥 해 먹이겠다고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그렇게 밥 해 먹이고 집에 돌아와서 아빠한테 술주정 당하지 않아도 되서 지금은 행복한 명절이다. 남편은 홀로 어머니 뵈러(이미 그 집 식구가 5명이라 혼자만 슬쩍) 가고, 새해 아침 나랑 꼬맹이들은 시리얼 우유 말아먹고 스팸에 밥 비벼먹고 크로아상 구워 복분자무화과잼 찍어먹고 저녁에 엄마가 잠시 와서 같이 사골떡국 끓여 먹었다. 해피 뉴이얼스 데이.

이사를 준비하면서, 어차피 공동주택에서 다시 공동주택으로 가는 거라 평면 배치나 구조 같은 건 이미 다 정해진 것이지만 그래도 집에 대해 궁금함이 생겼다. 이 집에 올 때도 빚은 가능한한 다 끌어모아 겨우 구한 터라 도배랑 장판이랑 썩어가는 화장실과 주방만 홈쇼핑에 무이자12개월 긁어서 최소한의 비용으로 수리를 하고 왔었다. 요즘엔 그걸 (인테리어 업자 끼지 않고 자기가 하나하나 항목별로 알아보고 집 고치는 걸) 셀프 인테리어라고 부른다더라. 아마 새로 가는 집도 그 셀.인.이라는 걸 할 것 같다. 평당 100만원? 그 정도가 가장 저렴한 편이라는 인테리어를 그렇게 알아서 하나하나 하면 거의 절반 가까운 금액으로 끝낼 수 있다. 조명 가게에 엘이디조명 교체와 낡은 콘센트, 스위치 교체를 알아보니 거의 200만원을 부르는데, 인터넷에다 재료를 싹 주문하고 설치기사님을 연결해주는 앱을 이용하면 80-90만원이면 뒤집어쓰는 식이다.

이 책은 인테리어에 대한 책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집을 짓거나 남의 집을 짓거나 집을 설계하는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알려주는 기본 지침 같은 것이다. 제목에 도감이 붙은 것처럼 저자가 어려운 건축용어 거의 안 쓰고 직관적이고 이해가 쉬운 귀여운 그림으로 챡챡, 다 설명해준다. 정말 신기했다. 우리가 집 그림 그릴 때 경사 진 지붕으로 그리고 창문 그리는 집이 그런 모양으로 생긴게 다 이유가 있었다. 지나가다 본 건물 외벽에 왠 파이프 같은게 길다랗게 세로로 주렁주렁 달려 있어 아이참 저건 왜 저렇게 못나게 달아놨담 싶지만 비가 많이 오는 우리나라 기후에선 역시나 다 부분마다 존재 이유가 있다. 창 모양도 주방의 구조도 문이 열리는 방향도 그러니까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런 이유를 아니까 재미가 있었다. 사는 공간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달까. 뭐 그러나 저러나 이미 만들어진 집에 들어가는 입장에서는 영향을 끼칠 여지가 많이 없지만 ㅋㅋㅋ

내가 집을 지어본 건 예전에 취업 준비하던 해에 김성모 만화책 보다 지치면 심즈4를 신나게 할 때였다. 방 배치부터 외벽 마감, 벽지 마감, 바닥재 깔기, 지붕 얹기까지 온통 귀찮은 것 투성이였다. 그래서 그냥 멋대가리 없이 체육관처럼 넓다란 네모 대충 만들고 그 안에 또 대충 네모난 방 만들곤 했는데.
어려서 할아버지 집에서 느낀 불편함과 음울한 집안 분위기 생각하면 화장실을 어디에 놓는지, 몇 개 놓는지 조차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다. 그 집에 가지 않은지 15년쯤 흘렀다. 할머니를 때려 돌아가시게 한 할아버지는 아직 거기 살고 있다. 엄마를 때려 결국 혼자 남은 아빠가 가끔 할아버지를 챙기러 드나든다는 소문을 듣는다. 아빠와 살던 집은 서비스 면적을 많이 받아 넓직한 새 집이었지만 아빠가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가 공부하는 내 방을 그대로 뚫고 들어왔고 컴퓨터를 놓은 방은 유리문 미닫이로 되어 있어 바깥에서 감시가 가능한 형태였다. (그래서 나중에 문 위에 벽지를 붙이긴 했지만…) 나는 그 집에서 행복하지 않았다. 집의 구조도 중요하지만, 구조가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지만, 관계야 말로 같이 사는 사이에서 계속 같이 살기 위해 제대로 풀어내야 할 일이다. 당연한 소리나 하고 있네. 나는 같이 사는 사람들에게 불편한 존재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할아버지나 아빠 같은 사람이 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잠시라도 내가 불편한 존재가 된다면 곁의 사람들이 피할 수 있는 공간들이 충분하면 좋겠어. 역시 내가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게 우선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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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2 23: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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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2 23: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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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2-13 01: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가족 모두가 행복한 집을 응원합니다. 새로운 집에서 더 많이 서로 사랑하고 행복해지시길요. 근데 셀프 인테리어 너무 힘들지 않나요? 아 그걸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무한한 존경의 눈길을 보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2-13 07:30   좋아요 2 | URL
응원의 말씀 감사합니다. 이사가기 전부터(?) 열심히 사랑하고 행복하게 살겠습니다ㅎㅎㅎ직접 철거하고 필름이며 목공이며 타일 바르고 뚝딱뚝딱 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게 셀인 인 줄 알았고 그거야 말로 대단하다 싶더라구요. 이 업체 저 업체 알아봐서 일정 맞추는 건 직장 다니며 하기 번거롭긴 해도 그에 비하면 일도 아니지 싶어요 ㅎㅎ

Yeagene 2021-02-14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은 더 나은 사람이 되실 거에요..열반인님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져라!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02-14 15:55   좋아요 1 | URL
더 나은 사람 될 수 있도록 내내 정진하겠습니다 ㅎㅎ감사합니다 예진님!!! 남은 휴일도 편안히 보내시길!!!!!

2021-02-16 19: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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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6 20: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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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6 20: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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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6 20: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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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0 21: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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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0 21: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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