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1
연상호.최규석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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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뇌는 끝없이 이유를 찾고, 범주화와 분류, 단순화를 좋아한다. 그래서 오래도록 선악의 개념은 납짝해진 채 지금에 이르렀다. 다수의 (명시적 또는 묵시적) 합의의 결과로 옳고 그름을 나누고 처벌을 통해 그름 으로 분류된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 법이 또 오랫동안 해 온 일은 사람이 한 일과 그 결과에 합당하게,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은, 피해와 응보의 균형을 맞추는 형벌을 찾아 합당하게 부과하는 것이었다. 법이 한다고 하지만 결국 사람의 법리와 논증에 따른 결과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접하는 누군가의(대부분은 완전한 타인의) 과오란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의 전체를 오염되고 부정하고 사람 이하의 존재로 보기 쉽게 만든다. 그래서 법의 심판을 불신하고, 조금 더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들은 여론재판이든 신상털이든 사적린치든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을 동원해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법은 사적 처벌을 허용하지 않아 그 일은 또 다른 범죄로 분류되어 또 다른 처벌을 낳고, 사람들은 사법 절차를 비난하고 분개한다.)
연인의 범죄를 돕거나 감춰주고, 수감 후 석방된 가족을 다시 맞이하고, 비난에 맞서 지인의 과오를 감싸는 이들을 사람들 대부분은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한 이와 함께 싸잡아 공격한다.
그런데 내가 만일 법 또는 도덕, 윤리 등등 공동체가 규정한 크고 작은 규범의 위반자가 된다면, 또는 내 혈육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위치에 놓인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크던 작던 죄를 범하면 고통 속에 남은 삶은 포기하거나, 사회적 고립과 매장을 감수하고 죽은 것처럼 지내야 할까. 사지가 찢기고 불타도 그건 그저 그럴 만한 사람이어서 그렇게 된 것 뿐일까.
스토리는 연상호가 썼지만, 몇 년 전 최규석이 비난 받던 어떤 사건을 자꾸만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꼬마비의 만화 살인자ㅇ난감(오타 아님 ㅋㅋㅋ제목이 저럼)도 생각났다. 지옥이 죄와 연결된 건 불교든 기독교든 종교의 영향이 클 텐데, 고통이 늘 죄의 응보는 아님을, 지옥 같은 고통과 불행에 떨어진 사람에게 너의 죄를 토해내라고 요구하는 것도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도 처벌도 사람 바깥의 일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세상에는 정말 나쁜 놈들이 있지만, 최대한 안 그러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나도 그런 나쁜 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과 나쁜 놈들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어서 만화를 보는 내내 판단이 어렵고 조금 힘들었다. 이 권도 보긴 봐야지...결말을 어떻게 맺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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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gene 2021-02-25 19: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규석 작가의 <송곳>은 정말 훌륭한 작품이었어요.우리나라같은 풍토에서 이런 만화가 나오다니..하고 감탄만 했었는데 불미스런 일에 휘말리셨더라고요 ㅠㅠㅠ

반유행열반인 2021-02-25 21:18   좋아요 2 | URL
네 저도 송곳을 정말 좋아해요. 이번 만화 보면 본인 스토리로 이걸 그렸다면 엄청 구설수 휘말리고 힘들었겠다 싶더라구요. 그저 비유일지라도요. 그래서 스토리 작가 따로 둔 게 아닐까 싶은 건 역시나 저의 넘겨짚는 짐작일 뿐 ㅋㅋㅋ

psyche 2021-02-26 0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이버 웹툰 연재할 때 열심히 봤어요. 올해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로 나온다고 해서 기대중입니다. <살인자ㅇ난감> 이라는 만화는 처음 들었는데 당장 찾아봐야겠네요.

반유행열반인 2021-03-13 10:15   좋아요 0 | URL
만화가 영화감독이랑 작업하며 영상화 염두한 연출이더니 드라마 나오는 군요 전 드라마로는 못 볼 거 같아요 만화로도 벅찬 진행 ㅋㅋㅋ살인자ㅇ난감이랑 s라인 같은 작가(꼬마비) 만화인데 전 좋아했어요 극화체 아니고 꼬마그림? 같은데 내용이 섬뜩하면서도 생각 많이 하게 해서 ㅋㅋㅋ아주 오래된 만화에요 ㅋㅋㅋ
 

-20210224- 지아 톨렌티노. 읽는 중.

5장 엑스터시

종교는 인민의 아편, 이 한 마디에 동조하는 삶을 길게 살았다. 기왕이면 진짜 아편이 낫겠다, 싶은 나도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다!!!ㅋㅋㅋ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빠가 원인 모르게 많이 아팠고(뒤늦게야 정신과 질환인 게 밝혀졌다), 그래서 굉장히 힘들어하다가 피아노 선생님께 그런 상황을 털어놓고 울었다. 선생님은 나를 위로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했다. 같은 해 담임 선생님도 비슷한 말로 위로했다. 나는 전혀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집안에서 자란 터라 다소 어리둥절했다. 그러다가 5학년이 되자 피아노 선생님이 교회 성가대 지휘를 맡고 있는데 가서 반주자 활동을 하면 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부모님의 허락을 겨우 얻어 성경책과 찬송가책을 사서 교회에 나갔다. 아이들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하는 노래를 하며 복음서들의 이름을 순서대로 외웠고 나는 그냥 멀뚱하게 앉아 있었다. 당시 학교 합창부 선생님이 가성을 엄청 시켜서 나는 가성 발성 밖에 못하는 상황이었다. 성가대 연습을 시작했는데, 내 가성이 상당히 거슬렸는지 선생님은 그냥 평범하게 다른 애들처럼 부르라고 했지만 나는 그 평범하게 다른 애들처럼 부르는 법을 잊은 상태였다. 결국 너는 노래하지 말고 전에 말한대로 피아노 반주를 하라고 했다. 실력이 엄청 달리는데 예배시간에 찬송가 반주를 하려니 정말 후달렸다. 성가대에는 다른 피아노 학원 원장님 아들도 있었는데, 그 애는 나보다 피아노를 열 배쯤 잘쳤다. 나중에 한예종에 붙고 독일 유학 가서 피아니스트도 되었지… 아마 그애 엄마가 자기 아들 대신 다른 아이가 피아노 반주 하는 걸 못마땅해했을 것도 같다. 그런데도 성가대 지도하는 피아노 선생님 입김인지 나는 그해 성탄절 칸타타 무대의 반주까지 했다. 긴장해서 엉망진창 말아먹었던 것 같은데 오히려 성가대원들이 괜찮다고 잘했다고 위로해주었다.
그때 교회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부모도 안 다니고 완전 새 신자인 나를 원래 있던 애들마냥 대해주고, 애들 사이에 섞여서 밥도 먹고, 성경공부를 빡세게 시키지도 않고 그냥 애들 사이에 앉아 있으면 깍뚜기마냥 가만히 있게 해 주었다. 다른 아이들은 뭔가 외워야 할 걸 틀리면 선생님들이 장난스레 구박하기도 했는데 나는 부진아마냥 그냥 애들과 선생님이 문답하는 걸 구경만 했다. 애들하고 예배 끝나고 단체로 아이엠그라운드 같은 게임하는 게 재미있었다. 피아노 잘 치는 남자애한테도 호감이 생겨서 같은 반 아이에게 교회에 좋아하는 아이가 생겼다고 말했다. (우연인지 지금 남편도 피아노 선생님 아들 출신?이다 ㅋㅋㅋㅋㅋ) 그 같은 반 아이가 하필이면 그 남자애 엄마의 피아노 학원에 다녀서 남자애에게 내 얘기를 한 모양이었다. 남자애가 같이 놀던 어느날 둘이 남겨졌을 때 너 나 좋아하냐? 하고 물었고, 나는 그냥 우정 같은 거야! 하고 얼버무렸다. (사실 빼박 이성애 감정이었어…) 그렇게 좋게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남자애가 갑자기 나를 짓궂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체르니 40번에 3번 치는 주제에, 하고 놀리고, 부활절에 계란 껍질을 내게 막 흩뿌리고, 하여간 온갖 안 하던 치사한 짓을 하며 괴롭혀서 정내미가 딱 떨어져 버렸다. 아무래도 정내미 떼려고 그랬나 보다 ㅋㅋㅋ 마침 집안 사람들이 온갖 우환을 핑계로- 교회가던 날 영하의 날씨에 비가 내려 비탈길에서 미끄러져 얼굴을 크게 다쳤는데, 그것을 불길하게 말하고, 성경책과 찬송가가 분위기가 안 좋다고, 치워야 조상이 안 노할 거 같다는 소리도 듣고 ㅋㅋㅋ 너희 증조할아버지가 절을 지은 분인데 교회는 아닌 거 같다고, 하여간에 완곡한 듯 노골적인 교회 그만 다녀라 소리에 마침 남자애 괴롭힘도 힘들던 차라 6학년 봄 무렵 완전히 교회에서 발길을 끊었다.
교회는 사교의 장이자 음악 교육 장소였지만, 나도 나름 영적인 기분이 충만했던 기억이 한 가지 남아 있다. 남자애가 계란 껍질을 뿌려 기분이 더러워져 있었는데, 세수식을 한다고 했다. 한 남자 집사님이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손을 가만가만 씻어주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고 말해주었는데, 그때의 기분은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후로 나는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할 것을 오래도록 두려워하면서 살았다. 누가 나를 계속 지켜보고 사랑해주고 있다고 믿을 수 있다면 조금 더 행복하고 평안하게 살 수 있겠다 싶은 생각도 문득 들었지만, 나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신을 그런 존재로 여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세상을 이렇게 내버려두는 신이라면 그냥 안 믿고 지옥에 가겠다고 배짱 튀기는 마음도 먹었다.
지아는 어린 시절 오래도록 교회에 다녔지만 결국 그 상업성과 세속성 때문에 교회에서 멀어지고 힙합 음악과 향정신성물질에 빠진다. 종교와 음악과 마약의 유사성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비추어 말하는 게 대담해 보이면서도 아주 새롭지는 않았다. 나라면 아마 거기에 섹스를 추가했을 것이다…무아의 황홀경을 제대로 보여준 건 나한테는 그게 제일 생생하단 말이다. 사실 종교와 음악에서 그만큼의 도취감을 느낀 적이 없고, 그래서 종교인도 음악인도 되지 못한 것 같다. 약에 대한 환상은 어려서 좋아한 음악가들의 약쟁이 경력과, 소설과 영화로 재미나게 본 트레인스포팅 같은 서사들이 궁금증을 부추겼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철컹철컹 안 하고 접할 약물류란 카페인과 알코올과 처방받은 향정신성의약품이라서, 내가 접한 것도 딱 거기까지이다. 불면과 불안에 시달리던 나에게 죽음처럼 깊은 잠과 다음날 아침의 상쾌함에다 오전에 세 권 읽을 만큼의 맑은 정신을 경험하게 해준 졸피뎀, 그래서 연예인들이 졸피뎀을 불법으로 구하는 심정을 왠지 알 것 같다. 나 또한 아주 짧은 투약 후 단기기억상실이라는 부작용(약 먹고 바로 안 자면 자기 전까지 기억이 다 사라졌다 ㅎㄷㄷ)을 의사에게 말했더니 급하게 약을 바꿔버렸다. 그러고나니 다시 수면장애가 생기고 졸피뎀을 줍는 꿈까지 꿨다. 벌써 십 년은 지난 일이지만, 약물의존증이란 참 무섭기도 해서 같이 사는 식구가 그런 의존 습관을 안 뒤에는 내 상태를 많이 살피고 가능하면 약을 쓰지 말자 약속해서 그럭저럭 참고 살고 있다. 그렇지만 지아가 엑스터시나 엘에스디 같은 약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 놓는 걸 보면, 그로 인해 고양된 감정이나 예술적 영감과 자극을 늘어놓는 약쟁이 음악가들의 체험담을 들으면, 흠 나쁜 놈들아 나 그냥 예술 안 하고 평범하게 살래 꼬시지 마라...하는 생각이 들었다.


6장 일곱 가지 사기로 보는 이 세대의 이야기

이 장에 소개된 사례들은 ‘진실의 흑역사’ 최신판에 실릴 법한, 명백한 사기와 사기와 과장 판매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마케팅과 그로 인해 부자가 되고 유명해진 사람들이 담겨 있다.
엉터리 락페스티벌 주최로 끝내주는 휴가를 원했던 사람들에게 난민 체험을 안겨준 매그니시스,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마음대로 팔아 부를 축적한(내가 얼마전 탈퇴한ㅋㅋ) 페이스북, 미국에도 ‘페미코인’이라 할 만한, 페미니즘을 사칭해 자기개발서와 세미나 장사하다 불법 해고 폭로 당하고 사업 접은 여성 CEO들이 있었다는 것, 아마존의 편리함 뒤에 노동자 착취가 있었다는 걸 알고는, 사회성 없고 대면 접촉을 꺼리는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온라인 쇼핑이 지역 상권(서점, 레코드점)의 소멸을 부추기고, 어쩌면 누군가의 몸과 마음을 갈아 마술 같은 배송(어차피 빨리 받은 거만 뿌듯하고 당장 써보지도 못하고 출근해서 결국 저녁에 받은 거나 매한가지일)을 누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고민을 잠시 하게 되었다.

사기라고 하기에는 조금 거리가 멀지만, 왠지 이 장을 읽으며 아주 최신판 흑과거가 떠오르고야 말았다. ㅋㅋㅋ
그날따라 아침에 여유가 있었고, 그날따라 잘 가지도 않던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었다. 아침 일찌감치 도착한 매장 안에 젊은 여성들이 약간의 초조한 분위기를 풍기며 서너 명 정도 먼저 와 있었다. 손에는 옛날 아로나민골드(ㅋㅋㅋㅋ왜 갑자기 추억 소환) 틴케이스 크기랑 거의 비슷한 걸 들고 비닐포장을 벗겨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분주해보였다. 문득 인터넷 뉴스 헤드라인으로 플레이모빌 굿즈를 판다는 걸 얼핏 봤던 기억이 났다. 피규어 한 개에 만이천원이라던가? 평소에는 애들 장난감 잘 안 사주는 짠돌이 주제에 왠지 하나 사다주면 좋아하겠네, 두 개 사? 생각하다가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옆에서 틴케이스를 까는 사람을 흘깃 보다 플레이모빌, 어떻게 사는 건가요, 하고 직원에게 물었다.
몇 개 사시게요?
약간 동문서답 같은 느낌이었지만 왠지 주눅이 들어서 집게 손가락 들어 하나요, 했다. 구매를 하려면 카드에 충전을 해야하고, 개봉하면 교환환불이 안 된다는 안내를 받았다. 뭔가 이상했는데, 그때 얼마를 충전해야 하는지 물었어야 했는데 얼떨결에 네, 해 버렸다.
직원이 비닐포장에 담긴 틴케이스를 내밀었다. 어, 저게 피규어야? 뭔가 거대한데...난 이거 아닌 거 같은데...하면서도 충전하려면 개봉해주세요, 해서 비닐을 뜯고, 카드를 꺼내야 한다고 해서 틴케이스를 열었다. 어... 딱 보기에도 비싸보이는 스타벅스 직원 모양 피규어 두 개랑 딱 보기에도 리미티드 에디션입니다 하는 금색 두툼한 카드형 키링이 두 개 담겨 있었다. 여기서부터 뭔가 잘못되었다는 예감이 들었다.
십만원이십니다. 카드 충전 할게요.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좋은 두툼한 골드카드를 차례로 충전기 위에 얹는다, 삼만원씩 육만원 충전하겠습니다, 하는 말에 움찔하다 체념한다, 육만원 결제하시겠습니다, 하는 말에 체념하고 신용카드를 건넸다… 뭐 커피 육만원어치 금방 먹지…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제 굿즈 계산하시겠습니다. 사만원인데(뭐??) 방금 충전하신 금액으로 결제 가능하십니다. 카드를 다시 기계에 얹었다. 순식간에 충전 금액 중 사만원이 빠져나갔다. 받아든 영수증에는 카드 잔액 이만원… 커피를 두 잔 시켰다...이제 잔액은 만원…
허탈한 마음으로 아로나민골드를 들고 커피를 기다리며 매장에 앉았다. 다리가 풀려서 서 있을 수 없었어...원래 사람들 잔뜩 줄 서 있으면 일부러 멀리 돌아가던 나인데. 왜 오늘 하필 이 시간에 스타벅스에 와서, 원래 먹으려던 커피나 한 잔 사서 나가지 갑자기 장난감을 사겠다는 생각을 하고, 갑자기 받아든 건 딱 보기에도 리미티드 에디션인(나한테는 쓰잘데기도 없고 관심도 없는) 것이냐… 그러다가 갑자기 당*마켓에 올리면 누가 사가지 않을까? 하고 굿즈 가격 4만원에 카드에 1만300원 잔액 남았으니 5만원에 올리면 되겠네, 하며 다시 비닐에 봉한 채 손도 대지 않고 테이블에 올려둔 틴케이스를 사진찍어 당근마켓에 올렸다.
불과 몇 분 만에 누군가 말을 걸어와서 거기는 줄이 길지 않았나요, 하길래 서너명 있던데요? 카드만 파시는 건가요? 하길래 아뇨 케이스랑 인형 다 그대로 손도 안 대고 있어요, 전 필요 없는데 실수로 사버려서요, 택배로 부쳐주시나요? 아뇨, 얼른 치워버리고 싶어서 직거래요, 했더니 몇시몇시쯤에 내 직장 근처로 오겠노라 해서 알았다고 했다. 나는 휴, 다행이다 하고 커피를 마시고 출근해서, 엄마 차를 타고 온 젊은 여성에게 떨어버리듯 틴케이스를 넘기고 오만원이 입금된 걸 확인했고, 구매하신 분은 나에게 정말 감사하다며 큰절을 하고 다시 차를 타고 사라졌다.
나중에 알고보니 한정판 골드카드와 피규어 수요가 많은데 매장마다 소량만 판매해서 새벽부터 줄을 서고 그래도 구하지 못해서 웃돈을 주고도 중고거래를 한다고 했다. 과연 중고 사이트에는 두 배 가격에 내 손을 잠시 스친 장난감들이 올라와 있었다. 나는 그저 내가 원하지도 뭔지도 모르던 물건을 내 수중에서 없애버린 게 마냥 홀가분할 뿐이었다. 멍청이처럼 남들 사는 걸 따라사다 갑자기 큰 돈을(책이 몇 권이냐!!!) 공중분해 시킬 뻔 한 게 너무 창피해서 어디 얘기도 못하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여기 올린다 ㅋㅋㅋ 스타벅스의 마케팅이 내심 괘씸하기도 했다. 그냥 케이스를 받고 십만원 딱 내고 사는 게 아니라, 일단 개봉해서 카드에 충전을 해야만 살 수 있고, 사고나면 낙장불입이고, 그런데 선심쓰듯 방금 충전한 금액으로 결제시켜 줄게, 해서 심리적 손상을 최소화하면서 비싼 지출을 합리화하고 위안 받게 하는 그런 방식의 판매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내가 구식이고 이상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ㅋㅋㅋ 브랜드 효과와 한정판 마케팅과 키덜트의 열망까지 한 방에 압축적으로 활용하는 덫에 걸려드는(?)경험, 이제 아무데나 줄서고 카드 막 내밀고 그러지 말자, 하는 교훈을 아주 비싸지 않은 값에 얻었구나 싶은 파란만장한 하루였다.
...내가 그러고나서 쫄아서 스타벅스를 못 가고 있잖아...ㅋㅋㅋㅋ

+ +나중에 찾아보니 아로나민 골드 드립은 너무 했나 싶게...ㅋㅋㅋ틴케이스 크기만 빼면 싹 다르다....ㅋㅋㅋㅋ

-피로회복엔 아로나민 골-드
-아휴 ㅈ 같은 굿즈 꼴보기도 싫네....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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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24 22: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이시리즈 중독 되서 첫번째로 추천 눌러요ㅋㅋ 광팬人증 ^0^

반유행열반인 2021-02-25 09:06   좋아요 2 | URL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scott님 ㅋㅋ

Yeagene 2021-02-25 19: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다음번에는 어떤 얘길하실지 흥미진진합니다ㅎㅎ
앞에 이야기 읽고 뭔가 코멘트를 남길려고 했는데 뒤의 스벅이야기가 넘나 강렬했어요 ㅎㅎ그래도 당근마켓에 금방 파셔서 다행이네요:)

반유행열반인 2021-02-25 19:43   좋아요 2 | URL
ㅋㅋㅋ저는 굿즈 문화에 도무지 적응이 안 되네요. 여기에서 노화를 실감해야 할지 자본에 저항하는 거야 엣헴 (하기엔 이미 휘말림 ㅋㅋㅋ) 할지 ㅋㅋㅋ 마지막 남은 뒷부분은 어렵고 힘든 내용이라 이거 수습을 어떻게 하지 시무룩 하고 있네요... ㅋㅋㅋ

psyche 2021-02-26 0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저 스타벅스 굿즈가 4만원이나 했군요! 저는 사진으로 보고 아 귀엽다. 역시 굿즈는 한국이 최고야 했는데 가격이 후덜덜하네요.

반유행열반인 2021-02-26 07:28   좋아요 0 | URL
뒷면에는 십만원 적혀 있고 굿즈만 사만원에 굿즈 사려면 꼭 육만원 카드 충전ㅋㅋ이런
판매 방식이라 진짜 간 떨어졌다 겨우 붙였어요 ㅋㅋㅋ인형보다 골드카드 때문에 사고 싶어히는 분도 많더라고요 ㅋㅋㅋ

라로 2021-02-26 0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보다 더 심하다 스타벅스! 한국은,,, 그런 마케팅이 먹히니까 그렇겠죠?? 도대체 어떤 피큐어였길래??? 한정판,,,이거 사람들 완전 눈멀게 하나보요?ㅎㅎㅎㅎ 암튼,,, 저는 끊엇던 커피 다시 마시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스타벅스는 안 땡기네요. 아무튼 저도 반열님 이 시리즈 완전 팬이에요!!!!! 지아의 책이 끝나더라도 계속~~~ 플리즈!!!

반유행열반인 2021-02-26 08:52   좋아요 0 | URL
ㅎㅎㅎ좋은 책이랑 만나면 또 뭐가 술술 나오겠죠? 틴케이스 안에 플레이모빌 피규어(스벅 매니저?) 둘이랑 금색 두툼한 카드형 키링이 막 검정 골드 비싸 보였어요 ㅋㅋ일일 개수 제한이라 더 애타게 해서 줄 서게 만드는 방법 같아요 ㅎㅎ

하나 2021-02-26 11: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수식 장면 신기해요. 진짜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치와도 아무 상관없는 이유 없는 폭력과 이유 없는 다독거림이 어떻게 그렇게 한꺼번에 오지? ˝이후로 나는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할 것을 오래도록 두려워하면서 살았다.˝ 이 문장이랑 어우러져서 울림이 크네요. (메모장으로!)

열반인님 되게 어른이다. 어?어? 하는 사이에 홀려서 주문하게 만드는 시스템이고, 보통은 이게 좋은 거래. 다들 갖고 싶어한대. 이러면 필요 없어도 끌어안게 되는데 자기 욕망이 뭔지 분명하게 아는 분이셔. ㅋㅋㅋ 이 돈이면 책이 몇 권이야.. 저는 ˝이 돈이면 XX이 몇 개야?˝가 엄청난 욕망의 척도라고 생각해요. ㅋㅋㅋㅋㅋ 저는 떡볶이였다가 치킨이었다가 책이었다가 레고였다가 다시 책이었다가 그랬네요.. ㅋㅋㅋ 이 테스트에 의하면 요즘 열반인님은 책을 좋아한다... 트루 러브...

반유행열반인 2021-02-26 11:55   좋아요 2 | URL
아 진짜 하나님 해몽 너무 좋아서 저는 문득 이 분 평론계로 가시면 책을 아주 잘 팔겠다(그리고 그토록 좋아하던 김영하 김연수 선생님이 선생님 선생님 하고 모시는 삶 살겠다) 하는 생각이 문득 들고야 말았습니다. 저같은 쪼렙 말고 대문호들을 띄우셔야 할 레벨!!! 갑자기 탁 치고 간 생각입니다 ㅎㅎㅎ

하나 2021-02-26 12:02   좋아요 2 | URL
대문호 대머리 같고 어감이 별로예요... 그런 건 좋아하지도 되려고 하지도 말쟈.. 좋아해야 발견할 수 있다! 저는 열반인님한테 꽂혀서 급하게 무슨 재능이든 발명해보려고요 ㅋㅋㅋㅋ 😎 책은 제가 팔게요!

반유행열반인 2021-02-26 12:07   좋아요 3 | URL
평론으로 하나님이 등단을 한다-열반이를 발굴하는 척 밑장 빼기로 판에 올린다- 책 내면 평론 써주고 끼리끼리 잘 해 먹는다- 저의 큰 그림입니다. 그러니 일단 다른 대문호들 띄우는 연습으로 평론 등단을 하십시다...(사악한 계획)

참세상 2021-03-06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긴 글 재밌어서 금새 다 읽게 되네요. 신기방기

반유행열반인 2021-03-06 12:01   좋아요 0 | URL
참세상님 안녕하세요. 부족한 글 재미있게 금세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20210222- 지아 톨렌티노. 읽는 중.

3장 언제나 최적화 중
같은 사무실 동료 K가 말했다.
다이슨 에어랩 너무 사고 싶어요. 그거 보는 순간 00님(나) 생각났어요.
본인의 지름 욕구를 나에게 투사하는 과정이 이상하긴 하지만 이해는 되었다. 나는 부스스한 악성 곱슬머리라서 갓 매직스트레이트를 한 몇 주를 제외하면 늘 잔머리를 여기저기 삐친 채 다닌다. 5년 전 생일날 스스로에게 이만원짜리 새 드라이어를 사주고 아주 뿌듯했던 기억이 나는데, 새로 나왔다는 드라이어?헤어셋팅기구? 가격은 그 25배가 넘는다. 그 정도 지출이라면 나 같은 사람이라도 정돈되고 가지런한 머릿결을 가질 수 있다는 기대를 했나 보다. 그런 도구라면 상대적으로 정상적인 모발 소유자인 K에게도 유용하겠다 싶었겠지. 웃으며 말했다.
필요하면 미용실 가서 드라이 하면 되는데 난 그게 일 년에 한 두 번 될까 말까 해요. K님도 미용실 갈 횟수 따져서 연 50만원 안 넘으면 좀 참고, 매일 셋팅할 거면 질러요.
K는 지금도 아침마다 고데기를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K는 파운데이션이 자꾸 묻어서 초반에는 덴탈마스크만 쓰다 코로나가 심하게 확산된 뒤에야 코 아래 메이크업을 포기하고 KF80 이상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겨울에도 A라인이 넓게 퍼지는 샤스커트를 즐겨입는다. 꾸밈을 위해 들이는 노력과 부지런함이 놀라웠다. K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 동료들은 주기적으로 미용실을 가고 새로 산 화장품으로 화장을 고치고 다양한 미용 시술(네일아트, 속눈썹연장, 피부 관리)에 시간과 비용을 들였다. 진작부터 내 외모에 저런 것들을 해 봤자 품만 들고 소용없다 하며 시도조차 포기한 일들이어서 신기하면서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복직하고 나서는 같이 탈코르셋 하시죠, 마스크 쓰면 어차피 다 가릴 거, 누구 좋으라고 하는지 모를 꾸밈 노동 집어치우고 그 시간에 잠을 더 자 전투력을 기르자, 하는 말을 장난처럼 던졌다. 그 말에 함께 웃던 동료들조차 눈썹을 안 그려서 주변 사람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하고, 남 좋은 게 아니라 자기 만족을 위한 거라고도 말했다. 이전 직장 동료들 중 요가나 헬스를 끊어 놓고도 내내 빼먹는 걸 자책하는 것도 전부 여성들이었다.
우리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누가 이렇게 키웠어.

‘자기 관리’의 전시장이 절정을 이룬 모습을 인스타그램에서 본다. 정확히는 인스타그램의 여성 사진들을 스크랩하는 블로거 페이지를 가끔 구경한다. 유명 연예인은 아니고, 유튜버, 레이싱모델, 잡지모델, 인플루언서 등등 사진 찍히는 일이 많은 여성들 사진이 주로 올라온다. 블로그에 방문하는 건 대부분이 연세 지긋한 남자들 같고, 불행 중(?)다행히도(??) 신체 품평이나 성적인 댓글 대신 감사인사만 줄창 달린다. 사진이 피사체를 잡는 방식과, 그런 사진을 열심히도 모아 올리면서 모델들을 소개하는 포스팅 방식 자체가 남성들이 여성의 신체를 소비하는 형태를 드러낸다. 키가 크고 커다란 가슴, 시술이나 성형으로 변형한 이목구비, 진한 화장, 거기에 덧씌운 포토샵이나 앱 보정, 가슴이 많이 파인 원피스, 비키니, 신체 굴곡이 두드러지는 탱크탑과 레깅스. 인스타그램에 그런 사진을 올리는 것은 대부분 사진 속 본인일 것이다. 사진을 올린 사람들은 인정욕구와 홍보와 유명세를 위해 열심히들 업로드를 하는 것일까. 다른 이유가 있을까. 나도 싸이월드 하던 이십대 초반에는 셀카를 열심히 올렸는데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는 가물가물하다. 주로 안 하던 화장이나 렌즈 착용을 했을 때, 간만에 매직 스트레이트 했을 때 올린 거 보면 예쁘다 소리 듣고 싶어 그랬을 것도 같다. 한참 지나서 보면 좋긴 했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고 라떼 타령할 수 있어서 ㅋㅋㅋㅋ

지아 톨렌티노는 ‘건강’과 ‘체력’을 내세우는 (미국에서 핫하다는) 바 운동과 샐러드 도시락, 그리고 편안함을 추구하는 애슬레저룩 조차, 자본이 더 효율적으로 사람들을 뽑아낼 구실을 한 결과물임을 지적한다. 책을 읽다가 스팽스가 뭐야 하고 찾아보기도 하고(응 보정속옷이래…), 유명인들 입은 레깅스나 탱크탑 같은 허술한 옷들의 가격이 결코 허술하지 않은 것도 지아가 일일이 나열해준 덕에(뭔 쫄졸이가 십만원이야…) 알았다. 단정하게 정돈된 머리 모양과 옷 차림새와 그 옷이 딱 떨어지는 몸매를 갖추기 위해, 잡티와 주름을 가리고 눈코입을 뚜렷하고 예쁘게 만들기 위해 쏟아 붓는 돈과 시간이 거대한 미용 산업과 패션 산업을 지탱한다는 사실과, 또 그 지출을 감당하기 위해 끝없이 일해야 하는 노동자의 삶을 떠올리니 뭔가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원래부터 아름다운 것들은 돈이 드는 일이긴 하다. 그래서 예술작품 속 화려한 치장을 한 말끔한 사람들은 전부 막대한 부를 물려 받거나 민중을 착취한 귀족들이었지. 그런 아름다움을 빼다 놓은 회화나 조각 같은 예술작품을 만들게 시킨 것도, 비싼 악기와 악사를 불러다 좁은 공간에 장중한 음악을 채운 것도, 균형과 조화를 갖춘 거대한 건축물을 세우는 것도 그런 특권 계층들의 부와 거기 동원된 사람들의 피땀눈물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비교적 돈 안 들이고 아름다움을 만드는 문학은 양호한 건가 싶기도 했다. 그치만 정도의 차이일 뿐 대문호들은 자기 배우자나 연인이나 식구들의 등골을 빼 먹으며 집필을 하지…아름다움은 착취의 산물이냐!!!!

적어도, 스스로 아름다워지길 선택하고 더 나은 자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여기는 와중에 그것이 정말 주체적 선택인지, 지나칠 정도로 애쓰면서도 이 정도는 다들 하는 거라고 체념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아침에 화장 안 하면 저녁에 클렌징도 안 해서 겁나 편하거든요. 세수 쓱쓱 하고 세타필 바르고 끝. 머리 세팅 그런 거 포기하면 쉽거든요. 응 나 악성곱슬이라 노답임 매직해도 며칠 못 감 그러니까 이해하세요... 그러다가 백만년만에 조금 꾸미면 관심과 효과를 열 배쯤 거둬들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다구요. 아침마다 풀세팅 갖추시는 동지들 존경합니다. 저에게는 거의 수련의 경지로 느껴지는 노고를 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아름다움을 건네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다.
에어랩 살 돈으로 책 오십 권 살라고요...안녕 다이슨.

4장 순수한 여자 주인공들
지아는 이 장에서 동화부터 청소년소설, 성인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 속 여성상을 분석해 놓았다. 내가 읽은 작품은 극소수라서 솔직히 아주 재미있게 읽지는 못했다. 대부분 영미문학 관련이고 특히나 미국 현대 소설이 비평의 대상이라 더 그런 것 같다. 그래도 문학에서 여성을 다루는 관점에 대해 비판을 제기한 점은 가치 있게 읽혔다. 아마도 이 장을 읽고 (추천사 열심히 쓴)여성 작가들이 뭔가 나아갈 길에 대해 통찰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 자주 인용되는데 오, 읽을 때마다 그럴싸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렇지만 원전을 읽을 엄두는 나지 않고 그냥 인용된 거나 감사히 볼게요.ㅋㅋㅋ
삶의 방향이 결혼으로 귀결되고 그와 함께 자유와 인간성을 상실하는 여성 서사는 고전에도 근대 현대소설에도 많이 등장한다. 어려서 키다리 아저씨 소설과 애니메이션 모두 재미있게 보았는데 후원자와 결혼하는 고아라는 결말이 해피엔딩처럼 그려지는 것도 돌아보면 슬프다. 그 이상의 자아실현과 성공담은 상상할 수 없었던 시대였나 싶고. 며칠 전 읽은 박완서 소설에서도 화자인 박이 결국 남자 둘 사이에서 고민하다 더 나아보이는 남자 골라 결혼하고 일 그만두는 모습에서 그 이상 대안이 없던 시대구나 싶어 아쉬웠다. 그나마 소설가가 되었다는 걸 알면 조금 덜 아쉽지만…. 그러니까 그런 삶의 형태만 줄창 써놨다고 뭐라고 하기는 좀 가혹하고, 지아 역시 그런 글들을 엄마 이야기 듣는다 하고 읽으면 좀 참을만 하다고 했다.
결국 새 시대의 새 여성 이야기가 나와야 하고, 그러려면 남다르게 행복하게 사는, 아니 꼭 행복해야 하냐? 불행하더라도 남다르게 살면서 자유와 나다움을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와야 할 것 같다. 삶을 갈아서 실증하지는 않더라도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솔직히 누가 그런 작업을 잘하고 있는지 한국문학에서는 떠오르지 않는다.(이제 이 책을 본 작가님들이 써 주실 거죠?) 나도 자신이 없어! ㅋㅋㅋㅋ 드럽게 어려운 과제를 던져준 장이었다. 그래서 길게 더 할말이 없다...

오늘 읽은 사분의 일은 전보다 신나게 읽히지 않아서 글도 쓰고 나니 매가리가 없다…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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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1-02-23 00: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거 보다가 렌즈 뺐어요. ㅋㅋㅋ 오늘 동생 졸업사진 찍어주러 잠깐 나갔다 왔거든요. 근데 진짜 요즘 학생들은 인서타 때문인지 꾸미는 게 우리 때랑은 차원이 다름... 막 졸업가운을 예쁜 걸로 따로 빌려오더라고요. (대학원 졸업식도 안 간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어 ㅋㅋㅋㅋ) 번잡한 하루였지만, ˝너의 거짓말˝ 종일 즐겁게 들었어요. 일본 애니 오프닝송 좋아하는 저는 취향 저격당함..

아니 이렇게 좋은 로고송이 있었네? ㅋㅋㅋㅋㅋㅋㅋㅋ 부터
탑밴드 결승까지 갔지만 새 프론트맨 못 만나서 회사 다니고 있는 베이시스트도 생각나고...(시집 가서 잘 사는 제 친구 첫사랑)

그리고 저도 새 시대의 새 여성 이야기 나와야 된다는 거 대공감.
저는 주변에 우울맨만 가득해가지구 40 넘으면 죽는 줄 알았거든요. 이십대 후반부터 끝났다고 사방에서 그랬었고요. (뭐가 끝나냐! ㅋㅋㅋ) 서른 즈음에 진짜 만 45살 미만은 못 듣게 해야 된다.. ㅋㅋㅋㅋㅋ 근데 제가 오늘 제 동생한테 뭐라 그랬냐면 주변에 나 같은 언니 한 명 알았으면 그렇게 겁 안 났을텐데.. 이런 말을 했어요. 그렇다고 꼭 내 삶을 갈아 넣어서 증명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ㅋㅋㅋㅋ 얘들아 남의 말 듣지 마 걔들도 잘 몰라서 아무 말 하는 거야...

반유행열반인 2021-02-23 07:59   좋아요 3 | URL
동생이님의 졸업을 축하합니다 ㅋㅋㅋ대학원 졸업을 다하다니 난 수료인데ㅋㅋㅋ영원한 수료일 듯(내 전공 재미업써!!ㅋㅋㅋ)
같이 사는 사람이 일본음악 죽돌이라 편곡이 그런 스타일로 가더라고요. 탑밴드 열심히 봤었는데 (나만) 아는 사람이겠다 ㅋㅋㅋ
그게 진짜 소비하는 문화 컨텐츠 따라서 락음악- 하면 막 짐모리슨 재니스조플린 지미 헨드릭스 3J이러면서 절명한 아이콘들 많잖아요?(유튜브에서 가끔 나이든 락커들 약에 술에 꼴아서 늙어서 빌빌대는 꼴 보면 일찍 죽은 게 승자야 싶기도 했지만) 국문학도 공부하다 보면 윤동주 이상 등등 연표에 남은 작가들 죄 일찍 죽어서 다들 오해한 거 같아요. 내가 (예술로 뜰라면) 일찍 죽어야 해... ㅋㅋㅋㅋ 뭔가 잘못된 인과의 오류가 아니었을까... 저는 그 이십대 중후반의 우울도 진화의 산물 아닐까 가끔 생각했어요. 우울해? 생식을 해, 그리고 애를 낳아, 그럼 죽지도 못해, 하고 조상들이 유전자에 폭탄 심어 놔서 죽든가 애 때문에 죽지 못해 살든가 하는 게 아닌가 하는...뭔 소린지 아침부터 모르겠다 얘들아 남의 말 듣지 마 나도 잘 몰라서 아무 말 한 거야 2222 ㅋㅋㅋㅋㅋ

은오 2023-08-07 0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기만족이에요 이건 좀 깝깝하네요. 완전탈코 못한 입장에서 저도 당당하진 않지만 자기만족이라느니 눈썹 안그려서 죄송 어우 이런말은 하지맙시다 ㅠ 괴롭다 괴로워!!

반유행열반인 2023-08-07 12:22   좋아요 1 | URL
착한 친구들인데 오래 못 보고 있네요 ㅋㅋㅋ사실 교직이 제일 사회 통념 벗어나기 힘든 곳입니다. 그거 벗어나서 가르치려 하면 이미 문제 교사가 됨... 공교육 자체가 이념 재생산 규칙 규율 관습 전수가 목적이라... 비판적 시민 말로만 그러고 정작 비판적이고 문제제기 많은 애들은 혼냄 ㅋㅋㅋ그런 애들 많으면 사실 학교가 유지가 안 되기도 함요...어휴 학교를 해체하자... (그냥 너나 나가... ㅋㅋㅋㅋ)
 

20210219-0221- 지아 톨렌티노. 읽는 중입니다.

잘 모르는 유명인들이 추천사 잔뜩 붙인 책을 옳다구나 하고 보는 성격은 아니다. 오히려 번역된 외서 앞쪽 두툼한 추천의 말은 건너뛰고 본문부터 본다. 이 책의 광고 페이지에도, 띠지에도, 첫 몇 페이지에도, 뒷표지에도 강화길, 김금희, 김하나, 이길보라, 이다혜, 이슬아, 장혜영, 황선우, 리베카 솔닛 등등 - 책을 낸 여성 작가들의 이름과 추천사가 잔뜩 새겨져 있었다. 그런 걸 안 좋아하던 나도 김금희 작가의 라이브 (끝머리)에서 극찬하는 걸 듣고 책을 샀으니 책 판매에는 유명인의 홍보가 효과 있긴 한가 보다.

작가 지아 톨렌티노는 1988년생의 뉴요커 기자이다. 마닐라에서 대학을 나온 부모를 둔, 그러니까 아마도 필리핀계 미국 이민 2세인 것 같다. 국적과 문화권은 다르지만 비슷한 시대를 지나온 여성의 에세이라 흥미를 느끼며 책을 폈다.
1장부터 인터넷이 확산되던 시기에 보낸 십대 이야기가 등장해서 무척 재미있었다. 인터넷에서 올바름을 담은 글을 끄적이는 것만으로 (행동하지도 않으면서) 뭔가 할 일 다 한 양 구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에 대한 일침은 얼마 전 친구와 나눈 이야기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더 공감이 되었다. 2장은 자신이 십대 후반에 리얼리티 쇼에 출연했던 경험을 비하인드 스토리로 풀어놓는데, 충분히 예측 가능한 내용이기도 하고 텔레비전에 큰 관심이 없어서 1장보다는 재미없었지만 그럭저럭 읽을 만했다.

책의 사분의 일 남짓 보았는데, 문득 이번에는 다 읽고 리뷰 쓰는 대신 읽는 중간중간 각 장의 제목을 주제 삼아 내 이야기를 글로 써 보아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략 100페이지 읽을 때마다 글 하나씩. 끝까지 할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을 때 시작.ㅋㅋ

1장 인터넷 속의 ‘나’
인터넷보다는 피씨통신이 먼저 유행했다. 한 살 위 사촌오빠집에서 컴퓨터로 채팅하는 걸 구경하는데 그렇게 재미있어 보이더라. 오빠가 잠시 놀러나간 사이 몰래 남의 컴퓨터를 켜고 접속을 시도했지만 atdt? 이렇게 명령어와 번호 넣는 것도 몰랐고 아이디랑 비번을 넣어야 하는데 그것도 모르니 당연히 실패했다ㅋㅋ 우리집은 부자가 아니여서 그때까지 컴퓨터도 없었고 다달이 통신요금을 내줄 리도 없었다.
그렇게 사촌을 부러워만 하다가 드디어 중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이 중고 586피씨를 사줬다. (물론 사 주고 일주일 만에 아빠가 술먹고 모니터 집어 던져서 뿌서진 건 안 비밀...몇 주 후에 더 작은 크기의 새 모니터를 사줄 때까지 슬픔에 젖어있었다…) 중고인데도 TV카드가 달려 있어서 유선 케이블 꽂으면 텔레비전이 나왔고! 36.6k모뎀도 내장되어 있었다. (이미 56k모뎀이 대세였지만...그거라도 어디야…)
친구 집에 갔다가 어느 회사에서 제공한 프로그램 시디 뒷면에 자신들의 회사망을 통해 한 달 간 인터넷 접속을 무료로 해준다는 아이디를 발견했다. 친구에게 아이디를 공유해달라고 해서 생애 첫 인터넷 접속에 성공했다. 중3이었고, 세기말과 밀레니엄 타령하던 1999년이었다. 당시 좋아했던 패닉의 웹페이지에서 사진을 잔뜩 다운받고,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네띠앙 이라는 사이트에 접속해 첫 이메일을 만들고, 인터넷 채팅도 처음 해 보았다. 해외 야후 사이트에서 접한 첫 포르노 사진의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하여간에 인터넷은 참 많은 처음을 안겨줬다.
인터넷에 푹 빠진 나는 부모님 허락을 겨우 받아 adsl설치기사를 불렀는데 컴퓨터와 모뎀 사양을 보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돌아가서 크게 실망했다. 그런데도 인터넷 전용선을 깐 친구에게 56k모뎀을 물려받아 끈질기게 전화선으로 인터넷과 피씨통신에 접속했다. 덕분에 전화요금 폭탄으로 부모님께 뒤지게 욕을 먹었다…

고교 3년 내내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에듀넷을 통해 무료 피씨통신과 인터넷을 동시에 이용했다.(그러니까, 사용 요금은 따로 없고 전화요금만 나오는 서비스) 그곳에서 온갖 락음악, 소설, 영화에 관한 정보를 또래 청소년들과 공유했고, 향후 이십 년은 우려 먹을 문화 취향과 가치관을 형성했다. 또래 청소년들과 첫 번째와 두 번째 연애도 거기서 시작하고 끝냈다. ㅋㅋㅋㅋ고1, 고2때였는데 일찍부터 까져가지고 ㅋㅋㅋ학교에서는 모범생이면서 방과후에는 독서실간다고 뻥치고 연애하러 다님...ㅋㅋ 이십 년이 다 되었는데도 그때 알게 된 친구들 중에 아직도 (아예 또는 거의 만난 적도 없으면서) 온라인이나 모바일 상에서 드문드문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시대의 인연이란 참 신기하지. 학교에서 학업 성적은 월등했지만 교우관계는 거의 부적응에 가까웠던 나에게 사회성을 발휘할 기회 대부분은 넷상에서 주어졌다.

고3부터 대학 초년까지는 프리챌 커뮤니티와 엠에센 메신저가 반 아이들이나 과 사람들과의 소통 창구였다. 그러다가 못생긴 아바타 팔아먹던 프리챌이 망하고, 싸이월드가 도토리 장사로 흥하기 시작해서 대학 내내의 일상은 싸이월드에 농축 압축하다시피 담겼다. 싸이월드는 일기도 공유 수준을 바꾸면서 쓸 수 있어서 즐겨 썼고, 오에카키로 그림도 그릴 수 있었고, 노래방 기능으로 녹음해서 (도토리만 낸다면) 내 미니홈피에 브금으로 깔 수도 있었다. 도토리 아이템만 셀프로 못 만들지 온갖 미숙한 창작물로 게시물을 도배할 수 있는 기능들이 있었다. 사진첩에는 내가 찍은 사진은 물론 친구들이 찍은 사진을 스크랩해다 꿍쳐 둘 수 있었다.(그땐 싸이가 망할 줄 몰랐지…) 생년과 실명만 알면 스쳐지난 사람들 염탐 다닐 수 있고 친구들 일촌을 파도타기 하면서 친구의 친구를 구경다닐 수도 있고 ㅋㅋㅋ 스토커 기질 있는 이들에게는 최상의 놀이터였다.
다만 너무나 많은 일상이 공유되다 보니 부작용도 있었다. 아주 친하지는 않지만 싸이월드에서 말 트고 지낸 지인이 갑자기 자살해서 아직 비공개 되지 못한 채 사진첩에 남은 그녀의 예쁜 사진과 우울한 일기, 지인들의 추모글을 보며 너무 오래 우울했다. 연예인의 스토커였던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이 남긴 글을 우연히 보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했는데, 나중에 그 사람이 자기 노모를 죽인 뉴스를 보고 섬찟하기도 했다. 눈치 없는 애들이 사귀다 깨진 친구 커플 사진을 오래 전에 자기 홈피에 스크랩해 놓고도 지우지 않아서, 나중에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한 그 사진 속 커플이 참 곤란하겠구나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니까 흑과거의 블랙홀 같은 공간…
싸이월드가 네이트로 넘어가면서 네이트 메신저가 엠에센 메신저를 밀어내고 한동안 득세했는데, 그래서 한동안 친구들과 네이트온으로 수다를 많이 떨었는데, 싸이월드가 개편한답시고 망해버리면서 메신저도 함께 스러져버렸다.

그 사이 매체들은 나름의 특성을 가지고 쭉쭉 세분화 되어서, 블로그가 등장하고, 마이크로 블로그(마이스페이스? 네이버에도 또 뭐시기)가 잠시 나타났다 다 망하고, 트위터가 스마트폰 보급과 함께 혼자 살아 남아서 유명인들의 촌철에 잠시 열광하고 나도 말할 수 있어! 착각하다가 자기들만의 판이네 나머지는 아무도 안 보는 리트윗이나 하다 끝나네 싶어 집어치우고, 오로지 친구공개로만 페이스북을 조금 하다가 아이고 의미 없다, 다들 인스타로 가는 구나, 하고 얼마 전에 계정을 청산해 버렸다.

돌아보면 지아가 그랬듯이 어릴 때의 나 또한 스스로에 대한 표현욕구와 남과 연결되고 싶은 갈망에서 인터넷 매체들을 붙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경험이 적었고, 글이나 말이 정돈되지 않았고, 사람들과 원만하게 소통하는 법도 잘 몰랐다. (지금도 잘 몰라…) 인터넷은 실제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완하는 도구인 동시에, 거리와 시간을 초월해 나랑 비슷한 취향과 생각을 가지고, 또 나만큼 외롭고 비슷비슷한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그래서 애정을 갈구하는 아이들을 만나는 포털처럼 활용되었다. 지금은 곁에 착 붙어서 내 몸의 점 하나하나를 신기해하며 세고 있는 꼬맹이(방금까지 그러고 있었다)를 비롯해 같이 할 시간이 많은 사람들이 생겨 외로울 새가 많지는 않지만, 그들과 모든 이야기를 나누고 모든 애호를 공유할 수는 없으니까, 아직도 가끔가끔 인터넷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니나 보다.
책을 읽게 되면서 책이야말로 덜 외로울 수 있는 훌륭한 매체이고, 내가 하는 질문과 비슷한 질문들, 거기에다 내가 아직 묻지 않은 질문에 대한 답을 더 잘 알려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전보다는 인터넷에 집착하고 방황하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다(다행이지). 마냥 새롭고 열린 가능성으로 바라보던 인터넷에 대한 기대도 많이 줄었다. 결국 오프라인이나 온라인이나 같은 사람들이고, 거기에서 현실보다 더 낫게 굴면 그건 위선이고, 현실보다 더 나쁘게 굴면 그게 그들의 본모습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결국 새롭게 열린 그 세상도 진짜 새로운 건 아니고, 완벽한 답이 될 수도, 제대로 된 위안이 되지도 못할 것이라는 실망이 몰려왔다.
그래도 인터넷에는 새로움에 대한 작은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어서, 새 책을 만나고 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하는 건 여전히 좋다. 흐르는 물살에 빠르게 쓸려가거나 흐름을 타지 못해 허우적대지 않고, 가볍게 흔들리는 물풀 정도로 적당히 적당히 하는 게 좋은 것 같다. 와, 이렇게 말하고 보니 진짜 라떼에 투샷 추가한 진한 늙은이의 냄새가 나한테서 나잖아….ㅋㅋㅋㅋㅋㅋ 부인할 수가 없다...이제 새 매체는 젊은이들의 몫으로...나는 북플이랑 블로그나 할란다...ㅋㅋㅋㅋ


2장 리얼리티 쇼와 나
한 때 리얼리티 쇼가 텔레비전 채널 안에 넘쳐났다. 주제도 장르도 다양했는데, 기억에 남는 건 일반인 남녀 짝 지어주는 프로그램이나 성형수술 시켜주는 프로그램 정도?
연예인 아닌 일반인이 나와서 연기 아닌 어수룩하고 날 것의 모습을 보여주는 걸 다들 신선해했던 것 같다. 그러나 워낙 예능 프로그램 안 좋아하고 텔레비전 쇼의 모든 것은 연출되고 편집된 장면이라 생각했던 나는 ‘리얼리티’ 라는 이름이 주는 기만이 싫어서 더 안 좋아하고 안 봤다. 지금은 저런 용어조차 잘 사용하지 않는 게, 긴 시간이 흐르면서 모두들 리얼리티 쇼에는 ‘리얼리티’가 없다는 걸 간파했고, 그런 프로그램 속 출연자도 결국 순수한 의미의 일반인이 아니라 유명해지고 관심 받고 싶은 사람이거나 연예인 지망생이거나 유명세를 바탕으로 돈이든 뭐든 얻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퍼져나간 탓 같다. 그러니까 다들 짜고치는 걸 이미 다 알고, 그러면서도 그 재미에 보거나 또 식상해지거나 한 거지. 그렇게 유행은 흘러간다. 요즘은 그 절충형인지, 일반인과 방송인 사이 어중간한 영역의 사람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 인기인 것 같다. 웹툰 작가나, 신인 가수나, 모바일 매체에서 먼저 유명해진 사람들. 너무 매끈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방송을 아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연출 맥락에서 어긋나는 독특함. 멋있는 척 예쁜 척 하지 않고 지저분하고 맹한 매력 같은 거….(그런데 왜 자꾸 기안84만 생각나냐….ㅋㅋㅋ티비를 안 봐서 아는 게 없음) 아 참 나는 텔레비전에 대해 예능이나 쇼에 대해 일도 모르면서 이런 걸 주절주절 잘도 쓰고 있다.

그런 나도 십여 년 전 그런 쇼에 가담(?)해보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다! 언니가 흑역사 썰 푼다!ㅋㅋㅋㅋ
지금은 종영되었지만 몇 년 간 인기를 끌던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에 도전했었다. 이미 직장에 다닐 때니까 나이도 꽤 먹은(?) 이십대 중반이었다. 그 무렵 뭐에 꽂혔는지 이런저런 오디션에 도전했었다. 메일함을 뒤져보니 와라편의점 주제가 부르는 오디션에도 음원 메일 보냈었네...노래도 개못하는 주제에 부끄럽다. ㅋㅋㅋㅋ
엠넷 사이트 가입해서 온라인 오디션 페이지에 노래하는 음원인가 영상을 올렸다. 1차 심사에 통과했다는 연락이 왔다. ㅋㅋㅋ 현장에서 실시한다는 2차 심사 안내에 따라 토요일 퇴근하면서 (그땐 주5일이 아니었네…) 장충동 체육관에 갔다. 지하철 역에서부터 체육관 주변까지 젊은이들이 바글바글했다. 체육관 안에도 사람이 가득차 있었다. 구석에서 발성연습으로 목을 풀고 화려한 복장으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지나 한참을 헤맸다. 그러는 동안 깨달았다. 나는 이 사람들을 뚫고 선발되지 못할 것이다 ㅋㅋㅋㅋ설령 운이 좋아 카메라 앞에 서더라도 그 순간들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그냥 밖으로 나와서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참 난 자기 객관화가 잘 되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참 다행이었지.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의 유명한 사람들을 보며 생각한다. 많은 사랑을 받는 일은 동시에 많은 미움을 받는 일도 따라온다고. 사람들은 이유 없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만큼 이유 없이 남을 쉽게 미워하기도 한다. 유명해진다는 건 그만큼 세상에 내가 노출되는 일이고, 그 노출되는 방식은 나의 선택과 상관 없이 누군가의 목적과 의도에 따라 짜여진 틀이나 필터를 거쳐 왜곡될 수도 있다. 일단 세상에 드러나면 그렇게 알려진 모습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돌리기란 너무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노력해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러니까 왠만하면 꼭꼭 숨자. 머리카락도 안 보이게. 조그만 구석에서 가끔 혼잣말 같은 재잘이나 끄적이자. 누군가 나를 알아주는 기쁨도 크지만 내가 나를 아는 기쁨을 더 크게 알고 작은 그룹 안에 적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에 만족하는 삶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려면 내가 나를 스스로 사랑하는 방법을 더 많이 깨우쳐야 한다. 조금씩 배우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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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1-02-21 14: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아 아쉽다. 열반인님 티비에서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근데 왠지 열반인님 기타치고 노래하시는 걸 머지 않아 보게 될 거 같아요. 브레네 브라운이 자기 주변의 소우주에만 머물고 싶은 욕망을 버리랬어요... 특히 열반인님은 소우주에 머물 분이 아니야. ㅋㅋㅋ

감상평 : 1. 트릭 미러 궁금했는데 나도 봐야지. 2. 매번 느끼지만 어떻게 기억이 저렇게 디테일한 것까지 남아있지? (저는 거의 기억상실 수준...) 3. 이포스팅은 거의 기억 소환술이다! (창피하고 난리남) ㅋㅋㅋㅋ 생각해보면 고등학생 때 윈엠프로 라디오 방송도 하고 그랬는데 어떻게 유튜브 거지의 길을 가지 않았을까 신기하긴 하네요. 우리 학교 애들이 다 들어서 걔네들 우타다 히카루 듣고 컸다 (내 취향 강요ㅋㅋㅋㅋㅋ) 나중에 노래방에서 일본 노래 부르는 거 보고 내 죄가 많다고 생각했고요... (근데 열반인님이나 나나 공부는 언제 했나 싶다.... 그 와중에 잘 큰 편 ㅋ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2-21 19:02   좋아요 4 | URL
아마 볼 수 있는 모습은 기껏 해야 코인노래방 마이크 붙든 정도 아닐까요 ㅋㅋㅋ악기도 음악도 영 소질이 없고 늘지 않아서...아, 그래도 리코더는 아직 잘 불어요!
이제야 겨우 소우주의 평안 안에 덜 불행하려는 저한테 첨 듣는 브브님께서는 왜 그러신대요...날 내버려 두오 브브님아... ㅋㅋㅋ
트릭미러 같이 봐요ㅋㅋ다는 아니어도 재밌고 뼈 뚜들기는 내용이 많네요. 몇 년 전까지도 내 기억력 저주야 했는데 이젠 가물가물해서 아마 쓰긴 하지만 다 지어낸 망상에 뻥일 수도? 있겠다 싶게 자신은 없어요(다만 디테일로 그럴싸 하게 느껴지게 꾸밀 뿐 ㅋㅋ못된 기술만 익힘...) 하나님의 기억을 소환해내다니 ㅋㅋ나도 에듀넷 친구들이 윈앰프로 틀어주는 거 들으면서 주디앤마리를 노래방에서 부르게 됐는데 ㅋㅋㅋ하나님 비슷한 친구들이 한몫했군요! 멘트도 했어요? 유튜버 앞으로도 안 해요? 전적이 있으니 할람 하겠네ㅋㅋㅋ 그 와중에 진짜 공부는 언제 했대니 .... 22ㅋㅋㅋ

하나 2021-02-21 19:13   좋아요 3 | URL
트릭미러 같이 봐요 좋아요! 😎 멘트 당연히 했죠 ㅋㅋㅋㅋ 카페도 만들어서 매니저도 있었고 사연소개도 했는 걸요... 백명씩 듣고 막 그랬어여... 판 벌리면 제대로 벌리는 편... 암튼 나는 일회성이든 뭐든 열반인님과 무엇을 할 것이다 ㅋㅋㅋㅋㅋㅋ 제가 찜한 거 잊지 말아여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2-21 19:18   좋아요 1 | URL
아 이 적극성 믿음직스러우면서도 겁이 나는 이 적극성 ㅋㅋㅋ 안 그래도 클하로 목소리나 먼저 들으면 좀 심리적 거리감 좁힐까 했는데 가족이 주중 이틀이나 휴가를 써서 오디오로는 당분간은 영접 못할 거 같습니다 ㅋㅋ실물로 만나요 ㅋㅋㅋㅋㅋ

막시무스 2021-02-21 16: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추천에 잘 낚이는 편인데, 김금희 작가님 추천이라서 반드시 낚일라고 하고 있는데, 열반님까지 가세하시니 월급날만 기다릴수 밖에요!ㅎ 트릭미러2같은 후기 잘 봤어요! 즐건 휴일되세요!ㅎ

반유행열반인 2021-02-21 19:03   좋아요 2 | URL
이번 추천은 낚여도 괜찮을 만한 거 같아요 ㅋㅋㅋ읽으시고 트릭미러 3같은 후기 남겨주세요!! 남은 주말도 푹 쉬시길 빕니다. ㅎㅎ

파이버 2021-02-21 1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싸이월드 망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1인… 추억은 망각의 그늘로 사라지게 놓아두는게 좋더라구요ㅎㅎㅎ 이번 포스팅 읽으면서 추억여행한 기분이에요 열반인님 입담이면 언젠가 진짜로 티비에서 뵐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드네요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02-21 20:50   좋아요 1 | URL
망해서 다행인데 아직 망령처럼 들어가지는 그곳 자료들 제대로 지워지지도 않더라구요 ㅎㅎㅎ잊혀질 권리를 달라! 라떼가 라떼 해버렸쥬? ㅎㅎㅎ민폐를 막기 위해 영상 매체 진출은 최대한으로 자제하려고 합니다. 텍스트로 이러고 만날 때 까지가 아름다운 거죠 ㅎㅎ

Yeagene 2021-02-22 1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열반인님 음악을 꽤 잘하시는구나...그때 그냥 한번 오디션 보지 그러셨어요.모든 건 해봐야 결과를 알게되는 경우가 많던데 ㅎㅎ
열반인님 오디션스타 됐을지도 모르는뎅ㅎㅎㅎ근데 내가 왜 이렇게 아쉽죠...^^;;;

반유행열반인 2021-02-22 12:14   좋아요 2 | URL
ㅋㅋㅋ저는 저를 잘 알아요...노래는 한 때 좋아한 거고 이제 나이 먹고 나니 소리 안 나는 활동을 더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나중에 음원도 발매해서 (그리고 망해서) 저의부족함은 충분히 알았어요. 궁금하시면 멜론 바이브 등등 음원 사이트에서 모짜렐라슈나이저 검색하시면 아...아쉬울 일이 아니었구나 접길 잘했어 하실 겁니다 ㅋㅋㅋ

라로 2021-02-22 2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름돋는 반열님 기억력!!! 공부를 월등히 잘 하실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저는 기억력이 개만큼도 없어서 북플의 지난 오늘을 읽으며 혼자 쇼하는데!!! 반열님 넘 멋지심!! 원래 좋아했지만, 갑자기 제 눈에서 하트 레이져 나옵니다요~~~!!😍

반유행열반인 2021-02-23 00:03   좋아요 1 | URL
기억력 보다 재구성력(aka조작능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점점 듭니다...그래도 라로님 눈에서 나오는 하트는 따뜻하니 좋네요 ㅎㅎㅎㅎ원더우먼 레이저도 있었나요? ㅎㅎㅎㅎ

scott 2021-02-22 2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못하시는게 없으쉼 피아노 콩쿨 퀴즈 기타 노래까지 ㅋㅋ 엠넷에서 찜 할정도면 엄청난 가창력이거임 ^ㅎ^

반유행열반인 2021-02-23 00:02   좋아요 1 | URL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한데 제대로 하는 건 하나도 없대요 ㅋㅋㅋ1차 통과한 사람이 체육관 하나 채우고 넘쳤으니 너무나 낮은 관문이 아니었을까요 ㅋㅋㅋㅋㅋ
 
대다크 2
하야시다 큐 지음, 서현아 옮김 / 시공사(만화) / 2021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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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헤도로는 넷플릭스에서 애니메이션 방영 중이라는데 나는 넷플을 안 해서 못 봄ㅋㅋㅋ 작가의 새 연재 만화 대다크도 기대하며 보고 있는데 전작에 비하면 약하다... 우주에서 우중충한 친구들이랑 뼈 모으는 중... 초반이라 이권까지는 인물과 세계 소개로 대충 별일 없이(?)넘어감....
하긴 이십 대에 시작한 작품이랑 사십 대 다 되어서 시작한 작품은 에너지부터 다를 것도 같다...그래도 무사히 끝까지 잘 마치면 좋겠다. 설마 이 작품 끝나면 작가 환갑인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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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1-02-20 1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넷플릭스에 마마마 올라왔다는 소리 들었는데 도로헤도로도 올라왔구나 *_* 한 작품에 20년씩이구나 하야시다 큐는.. ㅋㅋㅋㅋ 잘 시작해야겠네.. 그래도 무사히 끝까지 잘 마치면 좋겠다. 22

반유행열반인 2021-02-20 21:38   좋아요 1 | URL
무사한 끝이란 게 뭘까 싶지만 그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지 싶어요. 뭐 까짓것 (작가든 작중 인물이든) 죽으면 끝. 땡. 하면 쉬운데 미련은 많아가지고 ㅎㅎㅎ(이쯤에서 기를 쓰고 햇볕 가리는 태주를 떠올리면 된다 ㅋㅋㅋ)

하나 2021-02-20 21:43   좋아요 1 | URL
근데 열반인님 태주 이미지 약간 이쒀... (클럽 하우스에서 봄) 😈

반유행열반인 2021-02-20 21:58   좋아요 1 | URL
눈이 그 사분의 일이죠 ㅋㅋㅋ옥빈아 언니가 미안... 태주도 미안 ㅋㅋㅋ둘다 이름 글자 하나씩만 같은데 언니가 잘못해써... ㅋㅋㅋㅋㅋㅋ

하나 2021-02-20 22:01   좋아요 1 | URL
아 몰라 ㅋㅋㅋㅋ 내 맘이야 ㅋㅋㅋ 내 눈엔 열반인님이 태주고 옥빈이다! 근데 매니아 1번은 요즘 어디 갔대여?? 나 어제 잠깐 아프고 왔는데 댓글 없어서 서운했자너...(오늘은 완전 멀쩡 걱정 노노)

반유행열반인 2021-02-20 22:12   좋아요 1 | URL
아프지 마 하나님ㅋㅋㅋ하나님은 현상현 시켜드릴게요 상처나도 순식간에 아뭄 ㅋㅋㅋ(대신 해 보면 뒤짐 ㅋㅋㅋ) 담주 시험이라 열공하고 있겠죠?

하나 2021-02-20 22:15   좋아요 1 | URL
아 그럼 상비군이 셤 끝날 때까지 매니아 2번은 안 아프게 건강관리 잘해야게따 ㅋㅋㅋㅋ 굴국밥이랑 굴전이랑 밥 많이 먹었더니 금방 안 아프네.... 청춘인가 🙄 진짜 현상현인가 🙄 (회사 안 가니까 약간 아프다 마는 것 같다 ㅋㅋㅋㅋ) 대신 해보면 뒤짐.. ㅋㅋㅋㅋㅋ 😎

반유행열반인 2021-02-20 22:21   좋아요 1 | URL
뒤지지 말고 담에 해 쨍할 때 놀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