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 자본주의에 숨겨진 위험한 역사, 자본세 600년
라즈 파텔 외 지음, 백우진 외 옮김 / 북돋움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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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6 라즈 파텔, 제이슨 무어.

가성비 인생, 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경제학에서 기본으로 다루는 최소 비용, 최대 편익이라는 합리적 선택을 소비의 기준으로 두고 생활을 유지했다. 알뜰하게 산다는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여기서 내가 누리는 혜택이란 어딘가의, 누군가의 손해로 더하기 빼기 빵을 만들고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저렴한 서비스에 만족한다면 누군가는 일한 것에 비해 충분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그렇지만 그런 불안과 죄책감은 심증일 뿐 가시적으로 삶에 드러나지 않았다.
‘까대기’라는 책을 보며 내가 누리는 택배 서비스의 편리함 뒤에 갈려나가는 노동자의 시간과 삶과 자존감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내가 볼 수 있는 아주 적은 부분일 것이다. 책 구경을 하다 보니 배달 노동자, 콜센터 직원, 방과후강사 등등 온갖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에 관한 책들의 목록이 이어졌다.
무엇이 노동을 폄하하고 충분한 대가를 받지 못하게 하는가, 가난은 어떻게 구조화되고 자본은 어떤 계층과 성별과 지역과 자연을 착취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들은 겨우 한 두 권 책을 읽어서는 답을 얻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랗다. 아마 남은 삶 내내 연구해도 해결책은 커녕 제대로 된 원인 파악도 힘들 것 같다. 그래도 이 책 제목을 본 순간 조금이나마 실마리를 잡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참 관심을 갖다가 읽기 시작했다.
서문부터 만만치 않았다. 자꾸 졸려가지고…3월부터 읽기를 시도했지만 겨우 두 달 넘어서야 다 봤다. 1장의 자연과 2장의 돈에 관해서만 잘 넘기면 3장 노동, 4장 돌봄, 5장 식량, 6장 에너지, 7장 생명까지 저렴화된 생태계가 서로 연결되어 술술 넘어간다.(실제로 두 달 동안 2장까지 붙들려 있다가 나머지 절반은 하루 이틀 새로 다 봤다ㅋㅋㅋ) 여기저기서 파편적으로 주워듣던 세계사의 다양한 장면이 등장하는데, 유럽인의 신항로 개척과 식민지 건설, 서양사 시간에 그렇게 강조하던 인클로져 운동이 농업과 민중과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에 미친 영향을 일관되게 이어나가는 부분이 흥미로웠다.
초반에 마데이라의 설탕 산업 사례가 나왔다. 대항해시대 게임할 때 사탕수수 가져다가 설탕도 만들고, 럼주도 만들고 하면서 무역하던 기억에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 그 모든 생산 과정이 섬의 삼림을 황폐화하고 설탕 가격 폭락과 노동자 착취까지 이어지는 장면을 보니 이제 더는 그 게임을 즐길 수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 캐릭터부터 항로 개척과 식민화의 주역이던 유럽 국가 출신으로 설정되고, 커다랗고 빠른 배, 은행에 쌓인 더컷, 도시에 투자하고 명성과 기여도를 남기는 일 자체가 결국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자원과 주민들을 박살낸 결과라는 게 자명해서 그런 자본가 역할을 간접경험하면서 즐거움을 누리는 일 자체가 올바르지 않게 느껴졌다. 예전엔 암것도 몰랐지…그냥 세계여행하고 유적지나 자연 탐색하고 새 항구 도착하는 게 재미있었을 뿐…가만보니 이 게임 만든 놈들도 제국주의 식민지배로 자본 쌓을 궁리하던 일본 출신이구나…끄덕끄덕…안녕 대항해시대, 안녕 레메디오스…(내 캐릭터 이름…)
자본의 노동 착취는 지불되지 않는 노동인 돌봄과 연결되고, 우리나라 산업화 시기에 그랬던 것처럼 저임금 유지를 위해 농축산물 저가 정책을 유지하며 농민을 착취하고, 과학 기술 개발은 자연을 쥐어짜고 기후변화를 급격하게 만들면서 저렴하게 갈아낸 에너지로 저렴한 식량(저렴한 치킨…)을 만들고 마지막에는 보호될 만한 가치 있는 생명과 자연에 속하는 자원 취급되는 사람을 가르는 지경에 이른다. 그런 과정을 국민국가와 기업 등 자본이 정교하게 유지하고 발전시키면서 착취되는 이들의 저항을 분쇄해왔다. 책 내내 저렴화되는 사람들이 수동적으로 당하지만 않고 끝없이 투쟁해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결론 부분에서 저자들이 주장하는 대안? 저렴화에 저항하기 위한 전략을 인식, 보상, 재분배, 재상상, 재창조라는 개념을 포함하여 압축적으로 제시하는데, 그것만으로도 책 한 권은 나오지 싶었다. 그냥 맛보기로 소개하는 수준이라 그게 정말 더 나은 삶에 도움이 될지는 감조차 오지 않았다. 보상 생태(인간이 손상시킨 환경을 복원하기)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뭐라도 할 것인지는 아직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 처음 이런 관점에서 자본의 역사와 생산, 소비, 경제 과정의 부조리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정도?
그리고 나의 노동과 돌봄과 생명의 가치도 저렴화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너무 싼 거 좋아하지 말자, 누굴 죽이거나 죽을 만큼 고생시켜 놓고 내가 편한 건지도 모르니까, 하고 되돌아보는 정도. 어렵지만 포기 안 하고 한 번 읽어보길 잘 했다 싶은 독서였다. 얼마나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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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1-05-16 20: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진지하고 학구적인 리뷰군요! 똘똘이 안경 쓰고 쓰신 것 같은 그런 느낌?? ㅎ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05-16 22:11   좋아요 1 | URL
책이 너무 어려웠어요...자본주의도 역사도 잘 모르는 자의 리뷰 ㅋㅋㅋ

2021-05-16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16 2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eBook] 안나 카레니나 2 펭귄클래식 12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윤새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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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5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미선이-Sam
https://m.youtube.com/watch?v=CLXroGPSNds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모두가 헤어짐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게 덕목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회라면. (대부분 옳다 그르다 해야만 한다 여기는 많은 일들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배워서 새겨진 일이므로.) 사랑하던 사람이 떠나고자 뜻을 비추면 서로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고 기뻐하며 보내줘야 한다. 주변 사람들이 좋은 끝맺음을 축하해주고 두 사람은 다시 볼 수 없음을 아쉬워하면서도 새 시작에 설레면서 많은 연결고리와 매듭들을 정리한다. 그게 가능한 세상이라면 수많은 이별 노래나 치정 살인이나 술 먹고 걸려오는 ‘자니’하는 전화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겠지. 
 안나는 브론스키와 만나다가 임신한 아이를 낳다가 산욕열로 죽을 위기를 겪는다. 카레닌은 왠일인지 그런 순간에 그녀를 용서하고 태어난 딸아이를 돌보기까지 한다. 살아남은 안나는 카레닌을 떠나 브론스키와 함께 외국 여행에 나선다. 그 사이 레빈과 키티는 다시 만나 혼인하고 티격태격하면서도 평온한 신혼을 누린다. 두 커플(세 커플?)을 대조하면 안나의 불행이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브론스키는 안나와 함께 하기 위해 전역하고 그런 이후에 뭘하고 살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고 그다지 행복하지도 않았다.(주목 받고 성공하고 많은 사람들과 만나야만 즐거웠던 사람이므로.) 안나는 사랑하는 아들을 만나기 힘들어졌고 카레닌을 미워하면서도 죄책감에 고통스럽고 브론스키의 마음이 변했을까 두려워하고 페테르부르크의 사교계에 다시 얼굴을 내밀자마자 모욕을 당하면서 자신이 처한 위치를 실감한다. 
 읽는 내내 죽음을 바라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등장했다. 안나는 차라리 아이를 낳다가 죽었으면 하고, 브론스키는 카레닌과 안나와 셋이 대면하는 순간에 수치심을 느끼고 집에 돌아가 권총으로 자살 시도를 하다 미수에 그친다. 레빈의 형 니콜라이는 결핵으로 진짜 죽어버리고, 레빈은 형의 죽음을 마주하며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극도의 불안과 방향 상실 속에 사람이란 왜 자꾸 죽어버리고 싶어지는 건지, 그런 맛이 간 개체는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우리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 건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남의 일에 쓸데 없이 관심이 많고, 쉽게 비난하고, 남의 흠과 관습 위반에 매우 민감하게 굴며 흉을 본다. 나는 왜 어떤 일은 옳지 못하고 비난 받아도 싸다고 여겨지게 되었는지 계속 궁금했다. 왜 어떤 선택은 수많은 관계를 어렵게 만들고, 관습대로 살지 않으면 일상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드는 제약과 제도적, 사회적 얽매임이 왜 존재하는 건지, 누가 그런 걸 만든 건지, 그것들이 과연 무엇을 지탱하기 위함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대와 바람을 져버리고 자기들 뜻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제거하고 남은 이들이 얻는 것은 무엇인지 (과연 그러면 더 살만해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지) 마냥 궁금했다. 
 몰매처럼 사방에서 두드려패는 어려움 속에 처음의 빛나는 사랑과 갈망이 유지되기란 어렵다. 안나와 브론스키도 점점 서로에게 질려가고 서로가 하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며 관계도 망가지고 각자도 맛탱이가 가고 있다. 남은 1/3은 파국 뿐인 걸 알아서 읽기도 전에 벌써 슬픈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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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5-15 2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아~꼭 읽어야만 하는 파국입니다!ㅋㅋ 넘 오랜만에 올려주셨어요.🥲

반유행열반인 2021-05-16 08:35   좋아요 2 | URL
완독한 책이 없어서 쓴 게 없는 나날이에요ㅎㅎ 꾸준히 읽고 열심히 쓰시는 미미님!!!

새파랑 2021-05-16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선이 노래 오랜만에 들으니 반갑네요. 저 음반 분명이 샀었는데 이젠 못찾겠네요 ㅎㅎ 전 ˝브론스키˝가 권총으로 자살 시도하는 장면이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사랑밖에 없었던 ˝안나˝는 생각하면 너무 안타까워요 ㅜㅜ

반유행열반인 2021-05-16 10:27   좋아요 1 | URL
미선이 갑자기 ‘나를 미워하세요’ 하는 거 생각나서 저도 오랜만에 들었어요.ㅎㅎ 저는 안나만 죽는 구나 했는데 죽으려 드는 사람이 생각보다 자주 나오더라구요. 안나에게 사랑 말고도 더 많은 인생의 낙이 있었더라면 ㅎㅎ

Yeagene 2021-05-16 12: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결말이 예상되어 있는 이야기를 읽는 건 쉽지 않겠지만...열반인님 화이팅이에요!우와...안나 카레니나를 다 읽어가시네요!:)

반유행열반인 2021-05-16 12:14   좋아요 2 | URL
톨스토이가 챕터를 잘게 나눠놔서 생각했던 거 보다 읽기 좋더라고요. 인물들에게는 너무 가혹하게 굴지만 ㅋㅋㅋ완독까지 힘써 보겠습니다 ㅎㅎㅎ
 
[eBook] 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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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9 유현준.

딱 일 년 전에 빌렸다가 펼치지도 못하고 반납했다. 신문 기사에서 부동산 정책에 관해 유현준 교수가 인터뷰를 한 걸 보니 딱 마음에 들어서 다시 빌렸다. 이미 인터뷰 보고 책 빌렸다 그저 그랬던 경험 (강준만 덕에) 해 놓고도 또 같은 짓을 반복하는 나란 인간. 그래도 오랜만에 책읽기 시동 걸고 술술 읽혀서 다 읽은 책이다.
건축과 공간에 대해 지식과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도 흥미롭게 읽을 만한 교양서였다. 대신 깊이와 전문성은 떨어지고, 이거 정말 학문적으로 과학적으로 맞는 소리냐 싶게 전에 텔레비전에서, 영화에서 봤어, 하는 사례들이 등장했다. 재미는 있어도 신뢰는 살짝 떨어진달까. 그리고 저자 자신을 칭할 때 필자는- 하는 게 거슬렸다. 그냥 나는, 하면 안 되나. 쓰는 자아에 대해 너무 의식하는 것 같아서 필자는- 하는 말을 보면 왠지 웃기다. 그래서 그럭저럭 쓴 글인데도 그런 주어에서 자꾸 깨네, 했다. 텔레비전을 안 봐서 잘 몰랐는데 저자가 알쓸신잡에도 나온 모양이다. 유시민과 정재승, 하는 챕터에서 전작하고도 빠이빠이 한 선생님 얘기 나오나 하고 긴장했는데 그냥 낚시같은 제목이었다. 나도 봤던 비트코인 토론 장면을 살짝 인용한 거였는데 굳이 이름을 끄집어 낼 필요도 없는 별 내용 없는 부분ㅋㅋ
박원순 서울역 7017이랑 오세훈 한강 르네상스 언급되는 부분은 이제사 읽으니 또 기분이 묘했다. 과거의 사람들은 (저자 포함 나도 포함) 지금이 이럴 줄 몰랐겠지. 둘은 피라미드 만리장성 남기듯 도시에 자신을 새기고 싶었을까. 물 위에든 고가 위에든 뭔가 둥둥 띄우고들 싶었을까.
겨우 인테리어에나 신경 쓸만큼 건축에 무심한 도시인에게 도시 구석구석 다양한 공간을 다르게 볼 눈을 틔워준 점은 고마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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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9 2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10 0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Yeagene 2021-05-10 09: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분 요즘 책 많이 내시는 것 같아요.알쓸신잡 덕분인 것 같은데요ㅎㅎ
열반인님 정리는 좀 되셨어요?조금 여유가 생기셨나봐요:)

반유행열반인 2021-05-10 11:01   좋아요 3 | URL
네 저는 티비 나온 줄도 모르다가 옆 사람한테 이야기하니 더 잘 알더라구요 ㅎㅎㅎ옷장은 열어볼 엄두를 못 내고 보이는 곳만 치우고 다시 책을 폈어요 ㅎㅎ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진님!

syo 2021-05-10 15: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필자는‘ 진짜 별로예요. 🤦 그거 너무 권위적으로 보이고 후지다- 라는 인식이 좀 유행해서 자동으로 사장되면 좋겠다 싶어요.

반유행열반인 2021-05-10 16:06   좋아요 2 | URL
제가 이 책의 필자는-이 별로라고 싶었던 게 어쩌면 전에 syo님이 그거 별로야-해서 맞아맞아 하고 설득되어 그런가 싶기도 해요 ㅎㅎㅎ

하나 2021-05-11 19:29   좋아요 2 | URL
예전에는 어떻게 저렇게 기계처럼 신간을 쓸까 싶은 분들 있었는데, 걍 논문쓰듯 써서 그런 거 같아요

반유행열반인 2021-05-11 19:30   좋아요 1 | URL
저는 논문쓰듯 소설을 써내는 기계가 되고 싶네요 ㅋㅋ논문도 안 써 본 놈 올림 ㅋㅋ

하나 2021-05-11 19:32   좋아요 2 | URL
저도 안 쉬운데 성격상 비교적 쉬운놈들이 있는 거 같다는 느낌적 느낌(소설은 안됨ㅋㅋ)
 

사월의 독서는 정말 부진해서 만화책 넣고도 네다섯 권만 완독했다. 4월15일에 살던 집을 나왔고, 4월24일에 새집으로 이사했다.
인테리어는 직영공사로, 인테리어 업체 없이 알아서 필요한 공정마다 섭외하고 일정짜고 재료도 사고 감독하는 식으로 했다. (요즘엔 이런 걸 반셀프 인테리어라고 한다더라…) 직장 나가면서 아침 저녁으로 한 번 씩 드나들어 확인했는데 다행히도 크게 구멍나거나 일정 밀리지 않고 아흐레 만에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집공사를 마쳤다.
(인테리어 사이트가 아니니 집 사진은 간략히 투척 ㅋㅋ)

엄마는 백삼십 들고 가출했던 십오년 전에 비하면 (빚은 졌어도 천 배 가까운 곳에 살게 되었으니) 출세했네, 했다. 정말 그런가, 그렇네. 사고 싶은 책 잔뜩 사고 읽지도 않은 채로 쟁여둘 공간을 가졌으니. 붙박이장롱 하나 맞춘 거 빼면 가구도 가전도 그대로 가져와서 예전 집과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7평 남짓 커진 공간은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고 낙낙해진 느낌이다. 3층에서 15층으로 승천? 남서향에서 정남향으로 승진? 한 것도 역시나 출세다. 창밖으로 옹벽과 메타세콰이어가 보이다가 이제는 앞동 피뢰침이랑 비행기 지나가는 걸 보면 어리둥절하다.

보관 이사를 해서 지난 주에 입주하는데, 몇 년 전 이사 잘해주신 업체를 다시 섭외했는데 문제는 나온 날과 들어온 날 책 담당자(나름 이사업계의 일꾼분들 분업이 철저하다)가 바뀌었다. 훨씬 할아버지로. 옆에 주방 담당자 분이 ‘책이 하도 많아서 공부 좀 하셔야겠소’ 농치길래 무슨 소린가 했는데 아무래도 책 정리를 처음 해 보신 분 같았다…
책짐 나르는 분들의 얼굴은 뭐랄까 농사 안 짓는 사람이 거름 지게 지는 듯한 고단하고 지긋지긋한 표정을 보는 듯했다.
다른 짐은 별것 없어 금세 정리가 되었는데 책은 자꾸 책이 먼저 오고 책장들이 순차로 늦게 올라와서 정리가 늦었다.
책 포장한 분이 분명 테이프로 책장 위치와 좌우상하 다 표시해 두셨는데, (나도 빤히 보이는데) 오늘의 대타 책담당님은 한참 멀거니 어쩔 줄 모르시다가 자꾸 엉뚱한데 책을 마구 꽂으셨다. 어차피 정리 다시 해야지, 하고 포기하고 적당히 꽂아주세요 했는데… 이사 마치고 나니 책짐의 상황이 처참했다. 다 꽂지 못한 책을 이방저방 책탑으로 쌓아두고 가셨는데 ㅋㅋㅋ책장은 왜 다 듬성듬성 비어있어…진짜 개빡쳤다.

이사가 끝나도 끝난 게 아니라 또 일주일 내내 물건 자리 잡고, 치우고, 버리고, 아직 옷 정리는 손도 못댔고 주말 되자마자 책부터 제자리 잡기 했다. 직접 나르며 온 집안 책들을 다 뒤집어 엎고 보니… 이사해주신 분들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빌어먹을 똥같은 폐지들, 왜 끝이 없어, 다 버려버릴까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일요일 오후에야 책은 겨우 자리를 잡았는데 워낙 많이 버리고 자리 모자랄까 봐 걱정된다고 일부는 막 이중삼중 꽂아 처박아버렸더니 책장에 휑덩그러니 자리가 많이 남아 아싸 이제 새 책 사도 둘 곳 생겼다…하는 말종이여…

거실 한 벽은 당연히 책

철학책들은 제일 구석에 따로 처박음

들어오는 입구는 꼬마책

안방 책상 위에도 책

그 옆에도 책

화장대 옆은 장식장 같은데 책장 아닐텐데 하여간에 책

방2도 만화책 이중으로 꽂은 책장. 이 책장만 내가 정리 안 했는데 진짜 각잡은 거 봐…

만화책장 옆에도 기역자로 책장

방과 방 사이에도 책장

방3에는 딸래미책 (이 방 발코니에도 책장 세 개나 되지만 오래된 잡동사니 책 다 처박아놔서 지저분해서 사진 안 찍음…ㅋㅋㅋ)

주방에도 당연히 책장

식탁 뒤에도 책장

엄마가 이사오시면 엄마방과 거실에 책장 두 개 더 늘 예정…

이제 그만 쌓고 좀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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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1-05-09 2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신림동 열반 투어 해본 입장에서 엄청난 출세 다시 한 번 축하드리고여!! ㅋㅋㅋㅋ 조만간 또 놀러가께여!!

반유행열반인 2021-05-09 21:27   좋아요 1 | URL
꼭 놀러오세여 ㅋㅋㅋ신림동 투어 즐거웠는데 ㅋㅋㅋ어디갔다 이제 왔담 ㅋㅋㅋ

하나 2021-05-09 21:30   좋아요 1 | URL
진짜로~ 일찍 퇴근하는 날 알려주면 바로 가께열 ㅋㅋㅋ 이제 약간 급한 불 꺼서 사회성 있는 자아 꺼낼 수 있어서 왔어열 ㅋㅋㅋㅋㅋ 보고 싶었지만 내 동생이 내 방문 앞에 금줄 친댔다.... ㅋㅋㅋㅋㅋㅋㅋ 지만 예술하나? <<<<

반유행열반인 2021-05-09 21:32   좋아요 1 | URL
아 뭔가 쑥과 마늘만 먹고 제대로 매운 거 만들었을 거 같은 기대감 ㅋㅋ저는 책도 쥐콩 만큼 읽고 아무 것도 안 썼대여!!! 하나님께 막 이름!!! 열반이 안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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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트 키즈 - 패티 스미스와 로버트 메이플소프 젊은 날의 자화상
패티 스미스 지음, 박소울 옮김 / 아트북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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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8 패티 스미스.

사진은 하나도 모르는데,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사진 전시회 소식을 듣고는 강한 흥미를 느꼈다. 자기 삶을 갈아 반짝이 가루랑 섞어 예쁜 뭔가를 만들고 싶어 했던 사람이라면, 그걸 보여주고 싶어했다면, 암암 가야지. 두 남자가 왕관을 쓰고 포옹한 채 춤추는 듯 꿈꾸는 듯한 모습을 검색으로 보고 나니 그 실물 사진을 꼭 보고 싶어졌다. 이제 시작되는 봄날이었고 햇살도 좋고 맑은 날이었다.(벌써 너무 오래 전이 되어 버렸다.) 조퇴하고 도심으로 나가 사진전을 보는 일은 뭔가 꿈 같은 일이지만 이루는 게 어렵지는 않은 꿈이었다. 대부분의 사진은 흑백이었고, 지팡이에 달린 해골장식과 메이플소프의 얼굴이 닮아 보였다. 고통과 추함이 아름다움과 닿는 지점을 여러 사진을 통해 느끼는 일은 묘했다. 마른 몸의 누드 사진 속 주인공은 패티 스미스라고 했다. 사진을 찍은 작가와 음악가의 숨은 이야기가 더 궁금해서 책을 검색하다가 패티 스미스가 써낸 회고록을 발견하고 냅다 사서 읽었다.
책을 읽다가 패티 스미스의 노래 몇 곡을 찾아 들었는데, 으응, 내 취향은 아니었다. 굳이 그 시절 노래를 들으라면 너무너무 잘 부르는 재니스 조플린이 있잖아. 이 책에도 패티가 재니스 조플린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패티는 짐모리슨 공연도 가고, 앤디 워홀도 보고, 지미 헨드릭스도 만나고, 벨벳 언더그라운드 공연도 보고, 하여간에 내가 고딩 때 좋아하는 남자애들이 좋아한다고 멋도 모르고 트로트 듣듯 따라 듣던 노래를 만든 수많은 이들을 직접 만난 이야기를 잔뜩 풀어 놓았다.
로버트와 패티가 젊은 시절 창작과 예술을 향한 열정을 불태우며 함께 지낸 날들을 지켜보는 것은 재미있었다. 죽은 친구에 대해 그리워하고 로버트의 부탁대로 쓰게 된 이야기니 미화된 부분 많긴 하겠지만, (사실 많은 예술가 연인이 그렇듯 로버트도 가끔은 좋고 대부분은 개새끼가 아니었을지) 그래도 덤덤하게 좋았던 일 위주로 적을 수 있는 건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라서 가능했을 것 같다.
패티가 로버트의 동성애 또는 양성애 성향을 알고 많이 충격 받는 장면에서 나는 그리 놀랄 일인가 싶었다. 워낙 자존감이 낮다보니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랑의 경계가 너무 커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어느날 내 사랑이 나 사실 남자도 좋아해, 해도 아 그러냐, 할 것 같은 기분. 그렇지만 질투는 느끼겠지. 상상해보니 남자가 내 남자 빼앗아가면 빡칠 것 같긴 하다. 그렇지만 패티와 로버트는 연인이 아니게 된 이후 다른 연인과 잘 지내면서도 계속 친밀했고 로버트의 생애 말까지 교류하며 지낸다.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삶의 어느 순간에 있다는 건 상당히 부러운 일이었다.
타버린 검은색처럼 강렬한 사진들을 남기고 활활 불타 사라진 로버트를 보면 예술 같은 거 아름다움 같은 거 너무 캐고 다니지 말고 그냥 평범하고 조용하게 살까, 사랑이나 실컷하다 늙어 죽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밑줄 긋기
-우린 서로 배고프지 않은 척하며 이야기에 집중했다. 내가 보석 상자를 여는 부분에서 로버트는 항상 울부짖듯 말했다. “패티, 안 돼……”
우린 서로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언제나 나는 착한 애인 척하는 못된 애였고, 로버트는 못된 척하는 착한 애였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웃곤 했다. 우리는 커가며 착한 애였다 못된 애였다를 계속 반복했고 결국 내면의 양면성을 인정하게 될 때까지 그 일은 계속됐다. 우린 둘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내면세계를 지녔던 것이다. (21)

-로버트의 기도는 그저 꿈이었다. 우리 둘 다 로버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긴 했지만 그는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고, 스스로 영혼을 팔고 싶어했다. 나는 숨겨진 채로 소중히 간직되길 바랐지만.
나중에 그가 말했다. 교회가 그를 신에게로 이끌었고, LSD가 그를 우주로 이끌었다고. 예술은 그를 악의 세계로 이끌었고, 섹스는 그가 계속 악마와 함께 지내도록 만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87)

-“아무도 우리처럼 될 순 없어, 패티.” 그가 다시 이 말을 했다. 로버트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시공간이 멈춘 듯 이 세상에 둘만 있는 것 같았다. (139)

-어린 시절 가게 쇼윈도를 지나치며 어머니에게 왜 저 유리창을 그냥 발로 차 깨부수면 안 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어머니는 사회적으로 용인된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하고 그런 규칙을 지켜야만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그 순간 나는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모든 것이 정해져 있어, 일정한 규칙대로 살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나는 내 안에 존재하는 파괴적 충동을 억제했고, 그런 에너지를 창조적인 예술 행위로 바꾸려 애썼다. 하지만 여전히 정해진 규칙에 대한 반항심은 내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로버트에게 어린 시절 쇼윈도를 깨부수고 싶었던 경험을 얘기했더니 나를 놀리며 말했다.
“패티! 나쁜 아이였구나.”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진 않았다.
반대로 샘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반응은 달랐다. 그에겐 어린 시절 그 자그마한 발로 쇼윈도를 후려 차는 장면을 상상하는 게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 그런 충동을 느낀다고 말했더니 그가 말했다. “차버려, 패티 리, 내가 보석으로 풀어줄게.” 샘과 함께 있으면 온전한 나로 있을 수 있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내 안에 숨어 있는 나 자신의 면면을 속속들이 이해해주었다. (231)

-로버트는 자기 정체성을 곧잘 악마라고 규정짓곤 했는데, 어느 정도는 농담 삼아 한 말이고 어느 정도는 남들보다 특별해 보이려고 그랬다. 나는 가만히 앉아 그가 가죽 코드피스를 차는 걸 바라보곤 했다. 그는 분명 사탄보다는 자유분방함과 카타르시스를 사랑하는 디오니소스에 가까웠다.
“특별해 보이려고 악마 흉내를 낼 필요는 없어. 그러지 않아도 넌 특별해. 예술가는 자기만의 개성이 있는 거야.”
로버트는 다가와 나를 안았다. 코드피스에 눌렸다. “로버트, 찔리거든? 못됐어.”
“말했잖아, 나 못됐다고.”그가 윙크하며 말했다. (248-249)

.. 사진은 내가 찍은 거 아니고 다른 관람객이 찍은 거 퍼 온 거...전시회 가서 한 장도 안 찍고 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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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gene 2021-04-19 19: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메이플소프란 영화를 볼까말까 했거든요..열반인님 글 읽으니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지금 찾아보니 청불이네요ㅎㅎ 은근 기대중 >_<

반유행열반인 2021-04-19 18:53   좋아요 1 | URL
영화도 있었군요 ㅋㅋㅋ작가 생애나 성적 지향 취향 보면 청불일 것 같긴 하네요 ㅋㅋㅋ

han22598 2021-04-29 2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사진 많이 봤던 것 같아요. 작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는데, 반님 덕분에 알게 되네요 ^^ 그런데, 저분들은 왜 왕관을 썼을까요? 서로가 서로의 빛나는 면류관? 머..이런 의도일까요? (개무식자의 해석 ㅎ)

반유행열반인 2021-04-30 11:06   좋아요 1 | URL
저는 이번에 처음 보았는데 느낌 있더라구요. (한 편으론 저들 모두 늙을 수 있었을까 괜한 걱정) 자기 둘만의 왕국에선 퀸앤킹 하고 행복한 거 아닐지, 아님 오늘 너랑 있으니 태어난 날 우리 둘다 생일 이런 건지 사진 찍은 이가 일찍 돌아가셔서 물을 수도 없네요 ㅎㅎㅎ해석은 남은 우리 몫이지요 개무식이라니요 ㅋㅋㅋ고견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