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과 가죽의 시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4
구병모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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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3 구병모.

구병모의 소설을 모조리 읽은 시점이 있었는데 올해 나온 소설은 잠시 쉬고 있었다. 그러다가 신간 소식 듣고 밀린 책까지 두 권을 한 번에 샀다. 가장 마지막 읽은 심장에 수 놓은 이야기도 그렇고, 이 책도, 가장 최근 나온 상아의 문으로도 경장편, 중편, 작은 장편(?) 분량이 작가가 이야기 풀어내기에 적당했는지 책 세 권 다 자그맣다.

예전 한 스푼의 시간에서 인간 아닌 AI 주인공이 오히려 사람에 대해 더 파고들도록 했던 것처럼, 이 책에서는 불멸의 존재가 필멸자들, 사라질 것들에 대한 애틋함을 전한다. 빨간구두당과 이후 단편집마다 실리던 전설과 민담을 변주하는 방식을 이 책에서도 또 사용했다. 구두방 부부가 잠든 새 대신 구두를 만들어주던 인간 아닌 존재들이 인간의 외형을 갖추고, 그러나 죽지 않고 아주 오랜 시간 인간 사회에 스며들어 서서히 사라지거나 여태 남아 있는 이야기를 상상해 썼다.

그러고보면 궁금하다. 누가 가죽 외피에 밑창과 굽이 달린 구두라는 형태를 만들어 처음 신기 시작했을까. 아마 처음에는 발굽 없고 발바닥 약한 인간이 이족 보행까지 하느라 갈라지고 굳은 살 박히고 쉬이 다쳐 아픈 발을 보호하려고 대충 질긴 재질로 둘둘 말던게 그나마 살가죽과 비슷한 짐승가죽으로 이어졌겠지. 살가죽 감싸는 또다른 껍질, 보호막인 의복처럼 바늘로 꿰매고 이어 붙이는 게 당시로는 오래 물건을 잇는 최선의 방법이었겠지. 그런 방법은 누군가에게서 다시 누군가에게로 알려지고 이어지고 누군가 조금 더 나은 방식을 더해 더 질기고 편하고 예쁜 신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요즘의 나는 구두를 신지 않아…석유화학 고분자 물질로 틀에 푹 찍어낸 크록스에서 나온 고무신만 몇 년째 막 사모으고 오래 전 산 가죽 구두는 이사 준비하면서 거의 다 버렸다… 썩지 않는 신이 썩는 신을 몰아냈네…

버드 스트라이크 때 문장이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막 화내는 독후감 썼는데, 이번 책은 한참을 고민하고 고심하고 다듬었을까, 갤포스를 요즘도 쭉쭉 짜드시며 쓸까, 이제 이 정도 경지면 어느 정도는 내려놓고 구두를 깁듯 그냥 물흐르듯 써나갈까 궁금했다. 아마도 짧게 쓴 시라도 말을 굴리고 깎고 문지르고 하니까, 이 책도 그랬을 것 같다. 서사는 약하고 (갈등이라야 유진과 안이 각을 세우는 정도? 그나마도 구두를 완성하고 안이 유진의 공연을 보러 가면서 슬그머니 해소된다…) 문장은 날카롭고 섬세하다. 그러고는 왜 사는지 왜 태어나서 죽지 않는지 묻고 또 답한다. 그걸 보면서 참 필멸자로 태어나 다행이다…사랑하는 사람 다 죽고 혼자 남으면, 세상 변하고 이상해지고 하는 꼴 무한히 보려면 얼마나 지겹겠어…싶었다. 반지의 제왕에서 아르웬이 먼 미래의 영원한 외로움을 생각하면서도 사랑하는 아르곤 따라 중간계에 남는 장면도 자꾸 겹쳐 보였다. 그렇지. 잃더라도 한 번도 얻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지.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알고 오래 그리운 게 낫지.

+밑줄 긋기
-“사라질 거니까, 닳아 없어지고 죽어가는 것을 아니까 지금이 아니면 안 돼.”(149)
-꽃받침에 아무리 단단히 매달리더라도 길어야 한두 주의 유예라니, 살아 있는 모든 것이……구체적으로는 살아 있는 것이 뿜어내는 모든 것들의 유효기간이 어쩌면 이리 짧은가. 무대에서 제 눈을 찌르는 시늉을 하는 오이디푸스를 보며 안은 생각한다. 하나의 동작은 한 송이의 꽃과 같아, 개화를 시작하여 이어지는 순간만 살아 있고 동작이 완결되는 순간 소멸한다. 음악은 그것이 연주되는 동안만 살아 있으며 사실상 연주라는 것은 소리가 자신의 죽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행위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차라리 생겨나지 않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미 세상에 태어났다면 되도록 빨리 죽을 일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에는 그런 대사가 나오면서 인간의 운명과 세계의 허무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이 극에는 대사가 없다. 다만 세상에 미처 당도하지 못한 아기의 모카신과, 삶을 얻었기에 만날 수 있었던 작고 가녀린 존재들이 안의 마음속에 양각화를 그린다. (161-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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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13 23:4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 구병모 작가님 치열하게 작품 구상하고 쓰고 버리고 고치신다고,,,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미 세상에 태어났다면 되도록 빨리 죽을 일이다. ....... 아기의 모카신과, 삶을 얻었기에 만날 수 있었던 작고 가녀린 존재 ㅜ.ㅜ

반유행열반인 2021-12-14 07:07   좋아요 1 | URL
책 크기도 제목도 시인데 문장들 주욱 이어가는 것도 시 같았어요 ㅎㅎㅎ그런데 압축적이지는 않은 다 나열한 산문시 ㅋㅋㅋ

Yeagene 2021-12-14 10: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구병모 작가 작품은 오-----래전에 위저드 베이커리 꼴랑 한편 본 것 같아요ㅎㅎ그 작품도 이런저런 말이 많던데,전 재밌게 봤네요

반유행열반인 2021-12-14 11:13   좋아요 3 | URL
네 저도 그게 처음 읽은 건데 몇 번 더 보고 어쩌다보니 거의 다 보고 있네요 ㅋㅋㅋ

파이버 2021-12-15 16: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이번책은 그래도 특유의 길고 긴 문장이 괜찮나보네요... 자그만 짧은 책이라니 바쁜 시기가 지나면 찾아보고 싶어집니다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12-16 16:57   좋아요 2 | URL
이전 댓글 단 게 없어졌네요ㅠㅠ 엄청 좋다 정도는 아닌데 잔잔하니 마음 달래고 싶을 때 조용하게 읽기 좋을 책입니다ㅎㅎ

scott 2021-12-16 15: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2021년 서달인 추카 해유 ^ㅅ^

반유행열반인 2021-12-16 16:58   좋아요 2 | URL
scott님 축하드리고 늘 많은 관심과 애정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1-12-16 15: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반유행열반인님! 2021년 서재의 달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12-16 16:58   좋아요 1 | URL
thkang1001님 축하드리고 감사합니다.

쎄인트saint 2021-12-16 15: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021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12-16 16:58   좋아요 2 | URL
쎄인트님, 축하드리고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많이 읽으시고 건강하시길 빕니다.

얄라알라 2021-12-16 17: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제가 일부러 서재 창에 검색해서 찾아오던 뜨거운 서재의 주인이신 열반인님, 요새 제가 많이 못놀러와서 죄송해요^^

축하드립니다! 2022년 더욱 자주 들리겠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12-16 17:52   좋아요 2 | URL
얄님, 아껴주시고 일부러 친히 방문해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서재의 달인 축하드리고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새파랑 2021-12-16 17: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축하드립니다. 내년에는 미적분도 마스터 해주세요~!!

반유행열반인 2021-12-16 17:54   좋아요 3 | URL
새파랑님 축하드리고 축하 감사합니다. 늘 제가 사 놓고 쌓기만 한 책 먼저 읽으시는 거 보면 반가우면서도 초조(?)한데 저는 천천히 읽겠습니다 ㅋㅋㅋ미적분 마스터 함 해보겠습니다.ㅋㅋㅋ

강나루 2021-12-16 18: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반유행열반인님, 2021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반유행열반인 2021-12-16 18:48   좋아요 1 | URL
강나루님, 서재의 달인 축하드리고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1-12-16 20: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반유행열반인님! ‘2021 서재의 달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반유행열반인 2021-12-16 21:0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러블리땡 2021-12-17 00: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반유행열반인님 21년 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

반유행열반인 2021-12-17 07:01   좋아요 1 | URL
러블리땡님, 서재의 달인 축하드리고 찾아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전하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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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3 전하영 김멜라 김지연 김혜진 박서련 서이제 한정현.

2017년 처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은 이후 2016년도 작품집으로도 잠시 거슬러가고 그렇게 6권째 또 읽었다. 올해는 혹평이 많아 구매를 참았더니 연말에 전자도서관에 올라와서 읽어 보았다.
그 4년 가까이 습작을 하다 올해는 단 한 편도 쓰지 못했다. 끼적끼적 조금 하다가 접은 글이 여러 편 되었다. 그냥 읽다가, 독후감 쓰다가, 가을부터는 뭔 바람인가 수학을 푼다. 교과서를 풀다가 이비에스에서 무료로 배포하는 피디에프를 받아서 수능특강을 풀다, 오늘은 한 달 조금 못 되어 수능특강 수학2를 완강하고 이게 뭐라고 신났다. 아직 어려운 문제는 한 번에 풀지를 못하고 선택과목 미적분이 남아 있는데 하여간에 내년에는 기필코 이과생으로 거듭나겠다!!
소설에 인색한 한 달을 보내다 이달에는 어쩌다보니 다시 소설을 읽고 있었다. 이과생 한다더니 사실은 수학이랑 과학이 지겨웠는지…어느새 소설 읽고 있어…
나는 소설을 사랑하는데, 그래서 열심히 소설 쓰는 작가들도 좋은데. 올해 젊은작가상은 그닥 잘쓴 작가도 눈에 띄지 않고 재미도 없고 소재도 정체된 느낌이고 작가 한 명도 건지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더더더더더더 잘 써줬으면 하는 욕심. 바람. 기대와 실망.


전하영-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문학동네』 2020년 가을호
소설보다에서 이 소설 읽고 괜찮다 했는데 지난 주 토요일 새벽같이 건강검진 간 길에 대기하는 틈틈이 두 번째 읽었다. 아, 그때 좋다 했던 거 같긴 했는데 이런 소설이었나? 싶게 새로워서 이렇게 새까맣게 까먹을 거 뭘 그렇게 읽나 싶기도 했다. 하여간에 대상작 답게 그나마 잘썼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상은이 언니가 너무 일찍 철들어서 부른 노래를 젊은 날엔 뜻도 모르고 불렀다. 그런 기분이 자꾸 드는 소설이었다.

김멜라-나뭇잎이 마르고…… 『문학동네』 2020년 겨울호
오…읽은지 좀 되었다고 벌써 기억 안 나…아, 앙헬과 체. 주인공들 지칭이 특이하고 장애 가진 주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이었다. 다양한 인물을 다루는 건 좋은 일이고 용감하고 과감한 일이기도 한데 늘 어렵다. 당사자성, 도구화의 위험, 납짝하고 전형적이기 쉬운 인물 묘사, 읽는 이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읽을 준비가 되었나. 읽고도 말하기 조심스러워지는 소재들.

김지연-사랑하는 일…… 『언니밖에 없네』, 큐큐, 2020
이 소설 덕에 이번 수상집이 기사화 되고 미친놈들이 댓글 테러도 많이 하고 그랬던데 덕분에 읽기 오래도록 미루기도 했는데. 하여간에 더 잘 썼으면 좋겠다. 82년생 김지영 읽었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유쾌하게 쓰려고 애쓴 거 같은데 나는 유쾌하게 못 읽겠더라.

김혜진-목화맨션…… 『에픽』 2020년 10/11/12월호
공간에 관한, 거기에 두고온 잃어버린 마음들과 관계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순미나 만옥 모두 아주 착한 사람들 같다. 이 소설 좋았다.

박서련-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자음과모음』 2020년 가을호
지난 달 읽은 호르몬이 그랬어에 실린 소설보다는 나중에 쓴 거라 훨씬 나아졌고, 엄마를 욕으로 쓰는 무리들에 늘 둘러싸여 쌤 아오가헤 알아요? 박카스 알아요? 이딴 토나오는 성희롱이나 당하고 사는 환경이라 게임에 관한 소설이 더 관심이 가고 잘 읽혔다. 한때 게임 열심히 했지만 롤이나 오버워치나 배틀그라운드처럼 요즘 가장 잘나가는 게임 나온 무렵부터 도태되기 시작해서 이제는 게임을 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려서… 엄마 캐릭터가 희화화 된 건지 연민을 가지고 보라는 건지 나랑은 역할 수행이 영 다른 인물이라 다른 엄마들은 다 저런데 나만 계모 뺨치게 엉망진창 육아인가 싶기도 하고 혼란스러웠다. 그나마 재미있는데 또 엄마 캐릭터나 아들 캐릭터나 너무 전형적이어서 아쉬움도 많았다.

서이제- 0%를 향하여…… 『악스트』 2020년 1/2월호
영화 하다 잘 안 된 사람들 중에 소설쓰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아, 전하영 소설가 검색하다 보니 이 분도 영화제 프로그래머 했던 기사를 찾아내서…봉곤이도 그랬고 상영이도 그랬지. 둘다 소설에서 영화 이야기 많이 나왔지. 이 소설은 아예 통으로 영화 이야기이다. 소설느낌 보다 뭔 씨네 잡지 실을 칼럼 기획 영화 에세이 이런 느낌인데…표제작으로 소설집도 냈던데… 나도 영화 좋아했었는데 올해는 애들 문화체험의 날 옆에서 ‘하늘을 걷는 남자’ 꼽사리로 본 거 외에는 혼자서는 진짜 한 편도 제대로 본 게 없다. 이터널 선샤인 본 게 작년인가…어쩌다 이런 삶이 되었나…

한정현-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 『문학동네』 2020년 봄호(『소녀 연예인 이보나』, 민음사, 2020)
무슨 이야기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너무 미어터지고 매끄럽지 않았다. 수성 같은 인물 특히나 너무 작위적이고. 퀴어에 관한 소설이 이 책에만 최소 셋. 사랑의 지평은 넓고 거기에 관한 이야기가 점점 더 넓어져야 하는 건 맞지만 역시나 좀 더 잘 써 달라고…잘 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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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13 0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2021년 젊작은
영화 시나리오?
웹스토리?
이번엔 이천년대 작가 귀여니 같은 엠젯 세대를 뽑았나봐여 ㅋ^^

반유행열반인 2021-12-13 01:04   좋아요 1 | URL
아마 귀여니 나오던 시절 자란 작가들일텐데 스콧님 말씀 들으면 작가들 다 화낼 걸요 ㅋㅋㅋㅋㅋ귀여니가 어때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cott 2021-12-13 01:06   좋아요 1 | URL
귀여니 현재 문창과 강의 하시는뎅 ㅋ^^

반유행열반인 2021-12-13 07:06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ㅋㅋ새로 알게된 사실이네요. 사실 그 무렵에 하나도 읽은 적은 없구요 ㅋㅋㅋ

새파랑 2021-12-13 08: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내년에 열반인님 수능 치시는건가요? ^^ 젊은 작가상 수상집을 안읽어봤지만 아마 처음이어서 잘 쓰기는 힘들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봅니다. 열반인님 기대가 크셔서 그랬을지도요. 미적분 열반인님을 응원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12-13 09:45   좋아요 2 | URL
상이란 이름 달면 기대가 커지는 법이고 나이가 젊을 뿐 전부 등단작가들 대상으로 주는 상이지 신인상이 아니라 잘 써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잘 쓰는 소설에 대한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제 기준에는 올해는 조금 아쉬운 작품들이었어요. ㅎㅎ

Yeagene 2021-12-13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번 젊작상은 아쉽다는 소리가 많더라고요 ㅎㅎ 저는 박서련 작품 읽으면서 충격 받았어요.여성에 대한 멸칭이 많지만 엄마가 욕으로 쓰인다는 게 좀...;;;;;

2021-12-13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버스의 극장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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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8 필립 로스.

나는 드렌카가 되어 누워있었다. 나를 잊지 못한 이들이 돌아가며 찾아와, 미친놈들처럼 허공에 딸딸이를 쳐대다 무덤 위 흙이 마를 새 없이 축축이 적셔놓고 사라졌다. 그치만 스콧, 배럴, 새버스, 이하 생략, 나는 거기에 없어요. 너희들이 아직도 바라는 내 다리 사이는 이미 썩어 흙이 되고 없다네.

나는 또 니키가 되어 사라져 보았다. 내 연기를 조형할 줄은 알았지만 내 깊은 슬픔에는 단 한 번도 공감하지 못하던 사람. 그 사람을 떠나거나 떠나려고 시도하다 살해당했다. 왜 여기 있는 나를 두고 엉뚱한 데를 찾아다니고 있어?

나는 로즈애나도 되어 보았다. 추잡한 소문에 휘말려 나를 미치게 만드는 남자를 떠나지 못하고,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나를 떠난 엄마와, 내가 떠나왔다고 자살해버린 아빠에게서 찾기도 하고, 삶을 견뎌보겠다고 술에 중독되거나 중독을 벗어나는 일에 중독되는 나는 내가 보기에도 가엾었다.

그리고 캐시 굴스비도, 미셸도, 크리스타도, 헬렌도 되어보았다. 저마다 겪는 방식은 다르고 다양했지만, 결론은 비슷했다. 저기 작달만하고 손 마디마디가 관절염으로 휘어지고 삶을 대하는 태도는 저기 달린 29센티미터 좆만큼도 무겁지 않은 저놈의 왕년의 인형술사한테는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 보지 말자는 말 말고는 남길 게 없구나.

인생에서 스쳐가거나 안타깝게도 더 깊숙이 관여하고 얽히게 된다면 절대 좋지 않을 인물이지만, 700페이지 가까이 쫓아다니며 왜 쟤는 저 모양인가, 하는 물음에 나름의 항변을 들으며 새버스를 따라가는 여정은 그럭저럭 재미있었다. 결국 그의 업보는 삶의 끄트머리에서 행복도 만족도 기대도 없이 죽음 말고는 꿈꿀 수 없는 지경으로 그를 밀어뜨리기 때문에 그나마 봐줄 만했다. (못난 인물의 불행은 왜 독자의 행복…) 사실 모든 관습과 규범에 반대하고 조롱하고 희화화하고 제멋대로 사는 새버스는 나랑 많이 닮은 부분도 있어서 아…여기서 더 엇나가면 저런 망가진 광대가 되겠구나… 착하게 살아야지… 싶다가도 어떻게 살아야 착하게 사는 건지 잘 모르겠다.

새버스 덕에 미국 묘지도 두 군데나 가보고, 장례식장, 뉴욕 지하철과 광장 한복판에도, 유대인들 살던 해안 마을, 정신병원, 중산층 가정 외동딸의 방, 암환자의 병실, 방탕한 선원들이 드나들던 항구, 이차 대전 한가운데, 정신 없이 돌아다녔다. 내가 새버스만큼 나이를 먹으려면 그래도 이십년에서 삼십년 사이만큼 남았는데, 나의 끝을 스스로 끝장내고 싶을 만큼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올지, 그때 새버스보다는 덜 못나게 계획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을지 (나는 생각보다 잘 할 것 같다…준비는 늘 치밀하고 플랜비 씨 디 많으니까…) 잠깐 근심하다 훠이훠이 아직은 그만큼 망가지지 않았다. 소설의 끝은 결코 끝내지 못한 남자의 모습이지만 아쉬울 것 없이 묵직하게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끝났다. 그것이 전부였다. “끝Terminado.”’(284)


+밑줄 긋기
-간절히 원한다고? 이거 왜 이래. 아니다, 새버스는 자신이 하는 말을 하나도 믿지 않았고, 믿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자신이 어쩌다 이런 실패자가 되고 말았는지 묘사하려고 주도면밀하게 노력할수록 진실로부터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진실한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 속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235)

-“오, 미키 멋졌어. 재미있었어-그 모든 새끼 고양이와 카부즐이. 사는 거 같았어. 그 전체를 부정당한다면 큰 손실일 거야. 당신이 나한테 그걸 줬어. 당신이 나한테 두 배의 삶을 줬어. 나는 하나로만은 견디지 못했을 거야.”
“너하고 네 두 배의 삶이 자랑스러워.”
“딱 하나 내가 아쉬운 건,” 그녀는 다시 울고 있었다. 그와 함께 울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그것에 익숙해졌다-우리는 넓게 퍼진 채로 살 수 있고 우리는 눈물과 함께 살수 있다. 밤이면 밤마다 우리는 그 모든 것과 함께 살 수 있다. 그것이 멈추지 않는 한). “너무 많은 밤을 함께 잘 수 없었다는 거야. 당신하고 섞여서. 섞여서 맞아?”
“뭐 어때.”
“오늘밤 당신이 밤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내일 밤에 여기 올게.”
“내 말은 저 위 ‘작은 동굴’에서. 나는 더 많은 남자하고 박고 싶지가 않아, 암이 없다 해도. 내가 살아 있다 해도 그러고 싶지 않아.”
“너는 살아 있어. 지금 여기. 오늘밤. 너는 살아 있어.”
“그러고 싶지 않아. 내가 늘 박는 걸 좋아했던 건 당신이야. 하지만 많은 사람들하고 하고 다닌 걸 후회하지는 않아. 그렇게 안 했다면 큰 손해였을 거야. 몇 명은 뭐 낭비된 시간이었어. 당신도 틀림없이 그런 게 있을 거야. 안 그랬어? 당신이 즐겁지 않은 여자하고?”
“그랬지.”
“그래, 상대에게 관심이 있건 없건 그저 박고만 싶어하는 남자들 경험이 있어. 그게 늘 나한테는 더 힘들었어. 나는 내 심장을 줘, 나 자신을 줘, 씹을 할 때는.”
“정말로 그러지.”
그러다가, 약간 횡설수설한 뒤, 그녀는 잠이 들었고 그는 집으로 갔고-“이제 갈게” 두 시간이 되지 않아 그녀는 혈전이 생겨서 죽었다.
그러니까 그게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어쨌거나 영어로는, 나는 내 심장을 줘, 나 자신을 줘, 씹을 할 때는. 그것을 넘어서기는 어렵다.
당신하고 섞이는 것, 드렌카, 지금 당신하고 섞이는 것. (688)

-하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씨발 죽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떠날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 가버릴 수 있겠는가? 그가 증오하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는데. (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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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08 21: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ㅎ
열반인님 새버스
순한 맛 (๑•̀∀•́ฅ ✧

저도 요즘 로스옹 책 다시 읽고 있는데
로스옹은 이렇게 소설로 써대면서 스스로 정신적으로 치료 받았던 것 같습니다
문제 많은거 은폐하고
숨기고 탐닉하지 않고
글로 남겨버린!

마지막 인용구 밑줄 쫘악 ~~~

반유행열반인 2021-12-08 21:43   좋아요 2 | URL
여기 나오는 스콧은 키가 커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12-08 21:44   좋아요 2 | URL
너무 스포일러 같은데도 맨 마지막이 좋더라구요. 와 거장의 끝맺음은 별거 아닌 거 같은데도 묵직. 웅장. 숙연. ㅋㅋㅋㅋㅋ

2021-12-08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08 2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1-12-08 21:48   좋아요 2 | URL
인정 합니다
이런 상황을
이런 문장으로 쓴 로스옹!
거장!
이번에 열린에서 폴오스터 자전적인 작품 4321 구백 페이지 넘는거 현재 번역중이라는뎅
거의 유대계 미국 이민사 찬향질로 도배를 ㅋㅋㅋ 했더군요 ^^

반유행열반인 2021-12-08 21:54   좋아요 2 | URL
저 집에 폴오스터 많은데 놀랍게도(?) 한 권도 안 읽었어요 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1-12-08 22: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제 이 책 읽어도 되겠군요 ^^ 리뷰는 실눈뜨고 읽었습니다~!!
매운맛에 별 다섯이라니 😆

scott 2021-12-08 22:37   좋아요 2 | URL
열반인님 리뷰는 순한 맛동산 ^^

반유행열반인 2021-12-08 22:57   좋아요 2 | URL
본의 아니게 아껴보게 해드려 송구합니다 새파랑님 ㅎㅎ 작정하고 막장인 작품에 별이 후한 편입니다.
제 리뷰에 열심히 물타서(?) 덜 맵게 서재 관리자한테 짤리지 말라고 애쓰는 스콧님 감사드립니다 ㅋㅋㅋ솔직히 쫄려요…

scott 2021-12-08 22:59   좋아요 2 | URL
열반이님
우리
서재방에서
눈치 밥
(ノ≧ڡ≦)💕

반유행열반인 2021-12-08 23:01   좋아요 2 | URL
서재관리자한테 아주 오래 전에 경고 메일도 여러번 받고 맨날 나만 적립금도 안 주고 그래서요…쫓아내지만 말아다오….눈치밥…

새파랑 2021-12-08 23:11   좋아요 2 | URL
사실 저는 이책 당장 읽을 생각은 없었는데 매운맛에 너무 끌리네요 ㅎㅎ
역시 열반인님은 카산드라의 포스가 느껴집니다 ~!!

Yeagene 2021-12-09 13: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뭔가 내용이 어두운 느낌인데요...정말 매운맛인가 봅니다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12-09 17:45   좋아요 0 | URL
어두우면서도 완전 청승 떨지 않고 형식도 다양하게 실험적으로 왔다갔다 하는게 저의 취향에는 제법 맞았습니다 ㅎㅎㅎㅎ
 
카산드라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1
크리스타 볼프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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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7 크리스타 볼프.

몇 년 전 다음 웹툰에서 이하진 작가가 연재하는 카산드라를 재미있게 봤었다. 연재가 중단되어 잊고 있었는데 작가가 플랫폼 연재 대신 블로그에 최근까지도 연재를 이어가다 현재는 중단된 걸 방금 검색으로 알았다!! 아직도 완결이 안 되다니… 트로이 전쟁을 카산드라와 그 주변인물을 중심으로 재해석한 게 흥미로웠는데… 작가가 상황이 나아져서 오래 끌어온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단행본 출간도 되면 좋겠다.
여름에 문학동네 세계문학 MBTI라는 걸 재미삼아 해 봤는데 크리스타 볼프의 ‘카산드라’라는 소설을 소개 받았다. 궁금해서 갖춰두었는데 얇은 책인데도 읽기가 만만치 않아 오래 읽었다.
전쟁이 끝나고 포로로 잡혀와 죽음을 눈앞에 둔 카산드라가 뒤죽박죽 회상하는 형식이라 시간 순서대로 되어 있지 않고, 그리스 신화나 일리아드의 인물들이 잔뜩 등장하는데 전부 읽은지 오래라 이름만 봐서는 제대로 그려지는 인물이 없었다. 아킬레우스는 엄청 짐승 같은 놈으로 나온다. 그렇지, 전쟁 설화는 언제나 영웅의 공적과 승리와 안타까운 죽음만 이어지지만, 여성의 입장에 서자면 그것은 죽음, 강간, 전리품으로 이 남자에서 저 남자로 넘겨지는 굴욕, 전쟁 상황에 대해 의견이라도 제시하려고 하면 버들고리 관짝 같은 데 가둬두고 죽지 않게 연명하되 입은 열지 못하게 하는 게 진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어두운 이야기들은 감춰지고 말하여지지 않는다. 한국전쟁에서 유공자들과 민족상잔의 비극은 자주 말하여진다. 그 전쟁을 직접 겪은 할머니는 일가족이 뒷산 방공호에 피했다가 거기에 폭탄이 떨어져 다들 숯처럼 까맣게 타 죽은 이야기, 미군에게 강간 당해 미쳐버리거나 외모만 봐도 가해자를 떠올리게 하는 아이를 유기하는 이야기, 군인들이 소를 가져다 잡아먹는 이야기, 너무 어린 중공군들과 마주친 이야기를 한다. 그런 이야기는 가려진다. 특히나 아군이 저지른 양민 학살이나 성범죄 같은 전쟁 범죄는 다들 쉬쉬한다.
책 자체는 재미없고 읽기 어려웠지만 전쟁으로 고통 받는 여성의 삶은 생생해서, 끝없이 저항하고 발버둥치고 할말하거나 발작하다 가두어지고 혼나고 반쯤 미쳤다 다시 회복하고 원치 않는 남자들을 받아들이는 카산드라를 보면서 많이 슬펐다. 고대 전쟁이란 걸 이야기로, 말로 치장해봤자 하나도 멋지지 않아. 머리를 베고 활을 쏘고 상대를 잔혹하게 죽이고 땅을 차지한게 뭔 자랑이고 영광인가. 그냥 야만의 역사이다. 전쟁이 시민의 나라를 만들었다는 게 역설적이다. 그 시민에는 당연히 전쟁하는 남자들만 들어가지만.


+밑줄 긋기
-나는 내가 아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우리가, 미리네와 아이네이아스와 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공포를 느낀 적이 있음에도, 그것이 그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 아이네이아스에게 그 말을 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위로할 줄 모르는 것에 위로를 느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는 반지를, 뱀 반지를 주고 싶어했다. 나는 눈짓으로 거절했다. 아이네이아스는 절벽에서 바다를 향해 반지를 던졌다. 반지가 햇빛에 반짝이며 그린 포물선이 불로 지진 듯 내 가슴에 새겨졌다. 아무도 우리 사이에 있던 그런 중요한 일을 알지 못하리라. 서기들의 단단한, 트로이의 불로 구운 점토판은 궁정의 수입과 지출, 곡식과 항아리, 무기와 포로의 기록을 전할 것이다. 그러나 고통, 행복과 사랑을 표현하는 기호는 없다. 그것이 아주 큰 불행인 듯 느껴진다.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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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07 23:0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멋지쉼^ㅎ^

반유행열반인 2021-12-07 23:04   좋아요 5 | URL
못난인데 멋지다고 해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12-07 23:06   좋아요 5 | URL
그리고 스트라빈스키도 써 주세요 ㅋㅋ진짜 저때문에 준비하시다 접은 거면 죄송해서 ㅋㅋㅋ나 불새도 들어봤다구!!!!

미미 2021-12-07 23: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여성 입장에서 보면 전쟁서사에서 빈공간이 의아할수밖에 없는듯 해요. 그마저도 저는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 실제로는 지금도 분쟁국가에서 여성들은 갖은 고초를 겪는데 뉴스에서도 그런건 거의 다뤄지지 않더라구요.

반유행열반인 2021-12-07 23:14   좋아요 4 | URL
전쟁은 그냥 악인 거 같아요…남자들은 싸우다가 죽고 망가지고 여자들은 사냥 당하고 소모당하고… 인류가 진보했다면서 아직도 남의 목 자르고 총 쏘고 폭탄으로 온 마을 부셔가며 문제 해결하는 거 보면 우리는 그냥 못된 짐승…

새파랑 2021-12-07 23: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과 카산드라 싱크로율 100퍼센트인거 같아요 ^^ 지적욕구가 강한건 정확한것 같아요~!!

반유행열반인 2021-12-08 06:55   좋아요 2 | URL
말 안 듣는 건 닮았는데 백퍼센트는 아닌 거 같아요 ㅋㅋ 트로이는 망하거나 말거나 난 내 살 길 찾을 거야...하고 다른 지중해섬으로 튀었을 듯요 ㅋㅋㅋㅋㅋ

Yeagene 2021-12-08 11: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제가 전쟁이야기를 잘 못 봐요...ㅠㅠㅠ 발췌하신 부분만으로도 꽤 인상적인 책이네요

반유행열반인 2021-12-08 11:47   좋아요 2 | URL
저 부분이 마음에 남고 압축적인데 다른 장면들은 정신이 없어요 ㅋㅋ챕터도 안 나누고 끝까지 주욱 시간 순서 오락가락 하면서 달리는… 주마등 느낌…
 
[eBook] 골목의 약탈자들 - 당신의 돈을 노리는
장나래.김완 지음 / 스마트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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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3 장나래, 김완.

부모님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스물네살까지 금은방을 하셨다. 민트색 페인트로 벽을 칠하고, 간판을 달고, 좁지만 환한 조명을 갖춘 매장 벽에는 온갖 시계가 걸려 있었고, 진열장 안에는 금붙이와 보석과 손목시계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렇게나 많은 화려한 장신구들과 온갖 다양한 멜로디로 울려대는 알람시계가 신기해 한참을 살펴보고 만져보았다. 부모님은 그것들이 전부 우리 것이 아니라 빚이라고 했다. 가게를 열고 얼마 되지 않아 아빠는 거의 패닉상태가 되어 밤마다 엄마에게 가게를 그만 닫자, 닫자 했고, 세무조사를 걱정했고, 물건을 싸게 팔면 너무 싸게 팔았다고 닥달했다. 그렇게 가게를 연지 일년 남짓 되었을 때 조현병이 발병한 아빠는 엄마의 목을 조르다가 병원으로 실려가 오래도록 입원했다.
엄마 혼자 그런 물건들을 지키며 가게를 계속 꾸리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칼을 든 강도가 들어오는 건 아닐까 늘 불안에 떨었다. 실제로 부도난 수표로 물건을 구입하고 현금 거스름돈을 받아 사라지는 사기꾼, 반지계를 조직해 놓고 자기만 계를 타 먹고 도주하는 계주, 진열장 아래 숨어 급하게 점심을 먹는 사이 조용히 들어와 귀걸이 진열대를 통째로 들고 사라진 도둑, 여러 외국인이 들어와 이 물건 저 물건 꺼내달라고 요구하며 혼을 빼놓고는 슬쩍 물건을 빼돌려 달아나기도 하고, 물건을 꺼내느라 잠금 장치를 풀어둔 진열대 쪽으로 손을 넣고 물건을 집어가는 사람, 이 세상은 온통 도둑, 사기꾼, 강도만 있는 것인가 싶게 돈에 눈이 멀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온갖 사람들이 가게를 거쳐갔다. 나는 엄마 곁에서 온통 곤두선 신경으로 손님이 물건을 몰래 집어가지 않는지 살피며 관찰력을, 혹시나 강도나 도둑이 나타나면 재빨리 비상벨을 누르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며 순발력을 길렀다. 그리고 누구도 온전히 믿지 않는 삶의 태도를. 그건 내게 득인지 실인지 잘 모르겠다.
가게를 열고 삼 년 후 쯤 외환위기가 닥쳤다. 사람들은 모자란 달러를 마련하자고 금붙이를 내놓는 현대판 국채 보상운동을 했다. 당연히 새로 귀금속을 사는 사람은 없었고 가게는 한동안 텅 비었다. 금모으기 운동본부보다 약간 더 금값을 챙겨주고 매입하자 일부 금을 팔러 오는 손님이 있어서 겨우 연명했다. 그리고 금이 다 수출되고 나니 이후 금값이 치솟아 또 금붙이를 구매하는 손님이 줄었다. 귀금속의 순도보다 합금이어도 세련된 디자인을 뽐내는 브랜드 쥬얼리 가게들이 주위에 들어서자 옛날식 금은방은 인기를 잃어갔다. 결혼예물도 종로의 귀금속거리나 해외 브랜드 쥬얼리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가게는 도로 확장 예정지 위에 세워진 가건물을 임대해 운영했고, 도로 공사가 시작되면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폐업해야 하는 걸 알면서 시작한 장사였다. 건물주들은 토지 수용으로 넉넉한 보상이 예상되어 있었지만 막상 공사 일정이 다가오자 생계가 막막해진 상인들은 시청 앞에서 시위도 하고 국회의원이니 시의원이니 만나서 호소하면서 대책을 요구했지만 결국 이럴 걸 알고 들어왔으니 누구도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고 했다.
엄마와 집을 나오고 이혼 소송을 하면서 가게가 폐업되는 과정은 지켜보지 못했다. 술에 절어 살고 집나간 우리를 찾아다니며 거의 제 정신이 아니던 아빠가 제대로 물건값을 챙기며 정리를 했을지 알 수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다. 사람들은 친절한 엄마를 좋아했고 물건을 사지 않아도 커피를 얻어 먹으러 오거나 잡담하러 오는 사람-주로 아빠의 지인과 친구들-이 많았다. 아빠는 손님과 자주 싸우고 욕심을 내 비싼 값을 불러 손님을 놓치거나 막상 팔고 나서는 너무 싸게 팔았다고 누구에겐지 모를 화를 낼 때가 많았다. 가게를 자주 비우고 옆 양복점에서 포커를 치거나 친구들을 만나러 가서 술에 떡이 된 채 들어와 보안장치를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해 자꾸 쎄콤 아저씨들이 출동할 만큼 가게 셔터를 닫는 일도 제대로 못했다. 그러면서 진열장 앞에서 책 읽는 엄마가 보기 싫다고, 책 보지 말고 너도 텔레비전이나 보라고 화를 냈다. 텔레비전에 자기가 싫어하는 정치인이 나왔다고 욕을 하거나 귀금속 다루는 망치로 브라운관을 깨어 박살내기도 했다. 그러고 집에 돌아오면 밤늦도록 엄마에게 술주정을 하고, 그릇이나 장롱 같은 집안 살림을 깨부수고 현관문을 깨뜨리기도 했다.
장사를 안 했더라도 아빠는 그런 사람이었겠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생계를 이어가던 동안 나와 동생은 어려서 부터 집에 둘이만 있었고, 화려한 가게는 겉보기만 빛이 날 뿐 불안과 근심의 장소였고, 아빠에게 학대 당해가며 적성에 맞지도 않는 장사를 하던 엄마에게는 죽지 못해 사는 지옥이었다. 그래서 자영업에 대한 환상도 꿈도 가져본 적이 없다. 판매업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본 경험도 없다.
그래도 왠지 제목이 끌리고, 자영업 시작하면서 호구가 되지 않는 법이라니, 아는 게 낫잖아? 하면서 이 책을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다. 한겨레 기자들이 기획 탐사 보도한 것을 책으로 엮은 것이었다. 사장님이 되는 꿈, 나만의 카페, 음식점, 독서실, 요가센터, 네일샵, 나와 가족을 먹여 살리고 부를 가져다줄 장소를 기대하며 가게를 연 사람들이 절망과 빚만 남은 채 소위 창업 컨설팅업체라는 작자들에게 수수료와 근거 없는 과도한 권리금만 쪽쪽 빨리고 망하는 내용들이 너무도 많이 나와서 읽는 내내 마음이 안 좋았다. 뭘 믿고, 하는 마음이 여러번 들었지만 남을 믿는 마음은 착한 건데 그걸 이용하는 나쁜 놈들 때문에 사업에 실패한 뒤 자책만 남는 사람들의 사연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혹시라도 자영업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돈 잘 벌고 성공하는 법에 대한 책도 중요하지만, 이 책처럼 허튼 사람들에게 돈 뜯기지 않는 법, 사업 시작과 점포 임대 및 프렌차이즈 개업 같은 다양한 계약에 앞서 신중하게 충분히 정보 수집하는 것에 관한 책을 꼭 읽어 보았으면 좋겠다. 주식 같은 투자도 마찬가지인데, 남에게 일하게 하는 간접투자도 그렇게나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데 스스로 사업을 운영하고 경영하고 수익까지 내야 당장 살 수 있는 상황에서는 정말 많은 준비를 하고 조심해서 개업을 해야 되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이렇게나 많은 불공정 거래와 거의 범죄에 가까운 수법들이 판을 치는데도 제대로 개정, 제정되지 않은 법과 제도의 허점도 보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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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2-03 21:3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그림만 봐도 억소리나네요 ㅜㅜ 먹고살기 힘든 시대인거 같아요. 그냥 월급 받는게 젤 맘 편한듯 합니다 ~
열반인님 많이 힘들게 어린시절을 보내신거 같아 맘이 아프네요 ㅜㅜ

반유행열반인 2021-12-03 21:40   좋아요 6 | URL
월급 따박따박 나오면 감사한 일인데 또 (저란) 사람이란 게 만족을 모르고 만날 불평이라 반성하네요 ㅋㅋㅋ
어려서부터 인생 공부 열심히 했지 싶어 이제는 인생 공부 그만하고 (창업은 참고 노동력이나 팔아라 노역자여…) 수학 과학 공부나 하려고 합니다 ㅋㅋㅋ

오거서 2021-12-03 21:4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진솔한 경험에서 쓰여진 리뷰라서 숙연해지고요, 반유행열반인님의 바람을 담은 메시지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야 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12-03 21:46   좋아요 5 | URL
숙연할 정도는 아닌 옛날이야기인데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거서님! 이런 심층 취재해서 문제점 널리 알려주는 기자님들 덕분에 조금씩 퍼지는 것 같아 다행인데 아직 먼 길 같네요 ㅠㅠ

scott 2021-12-03 21: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지난 시절 눈물 납니다 ㅠ.ㅠ 서민들은 이런 악랄한 법망을 벗어난 먹이 사슬 ㅠ.ㅠ

반유행열반인 2021-12-03 21:56   좋아요 5 | URL
자영업이 예나지금이나 힘든 일 같은데 거기에 더해서 뭔 컨설팅이니 브랜드 프랜차이즈니 하면서 사람들 희망고문하다 말려 죽이는 꼴 보니 화가 나는 책이었어요. 그래도 꼭 필요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제 카페나 무인독서실이나 음식점이나 방문/배달 같은 거 할 때마다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자꾸 생각날 거 같아요. 저분들 다 엄청 고생하네 하고요…

Yeagene 2021-12-03 22: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열반인님 ㅠㅠㅠ
힘든 세월 잘 이겨내셨어요 ㅠㅠ
이 책은 저도 들어본 적이 있는 얘기들을 하는 듯하네요.언젠가 저도 창업하게 되면 꼭 읽어봐야겠어요.

반유행열반인 2021-12-04 07:30   좋아요 2 | URL
언젠가 창업하시게 되면 꼭 읽으시고 부자되셔요 예진님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