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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폐한 집 2 ㅣ 비꽃 세계 고전문학 25
찰스 디킨스 지음, 김옥수 옮김 / 비꽃 / 2020년 11월
평점 :
-20241230 찰스 디킨스.
엄마가 좋은 책들, 하면서 거의 백권쯤 되는 청소년 전집 같은 걸 주워왔다. 유명 고전들을 얄팍하게 축약하고 해설 덧붙여 수능 논술 대비 어쩌구 하고 책 잘 모르지만 자식한텐 뭐라도 읽히고 싶은 부모들 속여 파는 기획전집들. 나는 책깨나 읽었다는 양반이 보는 눈도 없이 저런 허접스레기들 들고온 게 성가셔서 엄마가 두고 볼 거야? 묻는다. 엄마는 아니, (큰어린이) 보라고. 아냐, 권해서 읽힐 만큼 좋은 책 아냐, 쟨 이제 원전 볼 땐데 가뜩이나 시간도 없고 책도 안 보는데 (이따위 읽힐 수 없어…) 이거 그냥 다시 갖다 버려.
그렇게 T해 버리고 힘들게 책 들고 들어왔던 엄마는 현타 온 표정으로 분리수거장에 책들을 가져다 버리고 돌아온다. 그렇지만 시집보다 얇은 헤겔, 니체, 부활, 이런 걸 보고 순간 참을 수 없었다...
불효 새끼의 고백을 들은 친구는 말한다. 그 나이 때 어른들은 작은 일로도 스스로 가치 없다고 느낀다고. 지금은 타계하신 자기 어머니가, 책 한 줄 다큐 한 편 평소에도 안 보던 엄마가 인간으로서의 가치 운운할 때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엄마한테 잘해 새꺄, 한 거지 뭐. 그런데도 수긍 안 하고 불효 새끼는 고집을 피운다.
우린 고정관념을 일찌감치 버리자. 인간이 인간으로서 어떤 가치에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은 거짓이다. 잘못이다. 인간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고 존재이다.
친구는 나야 말로 그걸 버리라고, 그러면 지금보다 인생이 3배는 편해질 거라고, 넌 너무 정의롭다고 말한다.
오…가치에 봉사하는 삶을 버리라는 말을 들어버렸다. 내가 그랬던 것인가… 반체제 불순분자인 줄 알았던 나새끼는 공동체와 실정법 이상의 이상을 바라며 반항했던 것인가… 나도 몰루.
디킨스의 황폐한 집과 함께하는 연말 내 독서는 황폐했다. 책 탓은 아닌데, 그냥 11월 만큼은 신나게 안 읽히는게 늘상 12월은 그래왔다. 소설 안에는 법원과 소송에 빌붙어 이렇게 저렇게 먹고 사는 법조인과 관련 업자들이 있고, 거기서 뭔 콩고물이라도 바라고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빚독촉 오지게 하는 악덕 채권자들과, 희망 없는 소송이 로또만큼 대박 이익을 가져다주길 기다리고 재판에 사로잡혀 있다가 현생을 제대로 못 살고 죽은 사람들도 나온다. 잔다이스 소송 피후견인 중 하나였던 리처드 놈도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도 그렇게 재판에 사로잡히고 만다. 혹시나 하는 유산을 기대하며 어영부영 삶을 이어가고, 1권에선 외과의사 할래! 하더니 금세 때려치고 변호사할래! 하고 도제로 갔다가 또 때려치고 결국 군인이 되었다. 빚도 오지게 쌓았다. 소송에 관심 갖고 정신 못 차리는 리처드를 보고 꼬마아줌마 에스더는 정신차리라고 설득도 해보고, 리처드를 사랑하는 다른 피후견인 에이다가 편지 써서 타이르게도 해보고 온갖 수단 다 해봐도 이미 미친놈한텐 소용이 없다.
슬슬 에스더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다. 그 비밀 관련된 인물들은 죽거나 입을 다물거나 협박과 빚독촉에 곤란해지거나 한다. 오, 이런 와중에 흥미로운 사건이 하나 나온다. 크룩 씨네 세입자 하나, 대서일 하던 양반이 죽었다. 아편 과다복용. 그런데 그 집주인, 소위 뒷골목 대법관, 고물상 주인 크룩 아저씨도 얼마 안 가 죽었다. 뭔 편지 뭉치라는 비밀 서류를 법정 근처 한량들, 거피랑 위블한테 넘겨주기로 약속해놓고 죽어버렸다. 죽음의 방식이 특이하다. 맨날 술 퍼 마셔서 알코올에 쩌들어 살다가 농축농축농축- 자연 발화로 사망… 연말에 술독 빠져 사는 친구들도 저절로 몸이 불탈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이백년 전 디킨스 아조씨가 알려줬어요. 다른 건 몰라도 소주 맥주 하이볼 퍼부은 니 간은 불탈 것이니... 소중한 간을 아껴주셔요. 찡긋
법원 주변의 비밀과 음모와 지난한 소송은 구질구질하고 추악하지만, 에스더나 우드코트 선생 같은 고귀한 인물들도 등장한다. 우드코트 선생은 소송에 사로잡혀 가난하고 고독한 플라이트 할머니를 다정하게 치료해주고, 항해 도중 자신이 탄 배가 난파되자 생존자 구조와 치료에 최선을 다한다. 에스더는 캐디와 피피, 찰리, 죽은 갓난아이와 그 엄마처럼 집안 사정과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을 가여워하고 돌봐준다. 고아 떠돌이 조가 아픈 채 갈 곳 없을 땐 에스더의 하녀인 찰리가 그를 돌봐주다 그만 열병(아마도 천연두)이 옮아 심하게 앓게 된다. 앓는 찰리를 에스더가 또 간호해주고, 에스더마저 감염되어 오래 앓고 그 후유증으로 얼굴이 망가진다. 여기서 배트맨의 투페이스처럼 좌절하고 맛탱이 가서 깽판칠 법도 한데, 에스더는 각오 단단히 하고 거울보고 달라진 자신의 외모에 익숙해지려고 애쓴다. 와… 궁금하긴 하다. 장원영이 천연두로 얼굴이 안 예뻐져도 이렇게 완전 러키비키잖아...할 수 있을지… 하여간에 에스더는 그런 인물이다. 자기 아픈 와중에도 에이다한테 옮길까 봐 절대 근처 못 오게 하고, 얼굴 변한 이후에도 우리 에이다가 많이 놀랄까 봐 이렇게 저렇게 배려하면서 자기 얼굴 공개하고 그랬다. 이런 인물들이 곱게 보이는 거 보면… 이런 인물들 곱게 그려둔 거 보면 찰스 디킨스 아조씨도 나름 휴머니스트일지도… 그거 보고 수긍하는 나놈도 어쩜 말로만 인간은 망했다, 하지 아직 희망을 못 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에 토킹혼 변호사 놈이 데드록 부인 들으라는 듯 내가 들은 얘긴데, 이거 다른 사람 얘긴데, 하면서 그녀의 비밀을 공개적으로 주절주절 읊어서 난 네 비밀을 알아, 그리고 독자들도 혹시나 파악 안 됐으면 알길 바라...이렇게 친절하게 요약+폭로해주고 2권이 마무리 된다. 자신이 낳은 아이가 살아 있는 것도 인지 못하고, 그 아이는 고아처럼 자라고(다행히도 잘 자람), 뒤늦게 그 존재 인지하고 다가와서 아임유어마더, 그런데 오늘 이후로 우리가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 엉엉 하는 장면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사랑의 일이든, 쾌락의 일이든, 의지에 반하는 폭력의 결과든, 사람이 만들어질 때가 있다. 그런데 왠일인지 그 사람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인간은 지나치게 크게 의미 부여를 해 놔가지고 새 생명이 등장해도 이걸 축복하고 보호하기 보다는 불명예니, 수치니, 이러면서 흑과거 치부하고 감추게 되는 이야기가 이백년 전에도 있었는데 오늘날에도 끝없이 존재한다. 내가 봤던 거 중에 제법 슬펐던 실화는 아이 엄마가 아이 낳고 죽었는데, 엄마의 남편되는 사람이 친자확인해보니 유전자 불일치 하는 거 보고 자신의 자녀로 출생신고하는 걸 거부했고, 그래서 아이가 한동안 민법 아래 못 들어오다 어찌저찌 출생신고는 하고 친자 부인 소 제기해서 죽은 엄마 쪽에만 올리고 그런 식으로 매조지되는 사건 기사에서 접한 사연이었다. 호적이나 호주 같은 건 다행히도 사라졌는데, 가족관계 증명서에 아이에 관해 책임질 부모 이름 뚜렷이 적는 건 중요하게 여겨져서, 그런 부모들이 불분명해지거나 부인할 만한 상황이 되었을 때 아이들은 이리저리 떠밀리고 사람들은 그걸 보며 애를 만든 사람들을 욕하기 바쁘지 아이가 법적 주체로 들어오게 돕고 무사히 자라도록 조치 취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연예인의 혼외자 문제에도 왜 남의 집안 일에 관심이 그리 많은지 환승이냐 양다리냐 애는 뭔 죄냐 결혼을 얘랑 해라 쟤랑 해라 훈수도 비난도 지랄도 풍년이다. 소설 보다 뉴스보다 하면, 이백년이고 삼백년이고 더 지나도 이게 달라질까? 인간은 참 편협하고 이미 보편적으로 규정된 삶과 공동체와 관계의 형태 이상은 상상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구나… 뭐 나도 다르겠냐 싶지만 그래도 에스더처럼 꿋꿋이 자라는 캐릭터 보면 인간 다 망한 건 아닐지도 몰라, 싶었다.
+밑줄 긋기
-“너는 나한테 나 자신보다 다정해. 친애하는 에스더, 나는 불행한 개자식이야, 자리도 잡을 수 없는. 하지만 어떻게 자리를 잡겠어? 문제투성이 집안에 산다면 누구도 자리를 잡을 수 없다고. 어떤 일을 시작해도 도중에 중단할 저주를 받았다면 누구도 어떤 일에든 적응할 수 없다고. 그게 바로 나야. 나는 온갖 기회와 변화를 내포한 분쟁 상태에서 태어났고, 이 분쟁은 법률 소송(suit)과 양복 정장(suit)이 다른 걸 깨닫기도 전부터 나를 애매한 성격으로 만들었어. 현재까지도 애매한 상태로 만들고. 그러다 보니 내가 하는 말이라면 무어든 곧이곧대로 믿는 에이다를 더는 사랑할 자격조차 없는 놈이란 생각마저 들어.”
-인생살이가 이렇게 짧다는 건, 모든 기억이 이렇게 좁은 공간에 들어있다는 건 예전에 미처 몰랐습니다.
-정말 아플 때는 어떤 일을 어떤 시기에 겪었는지조차 구분할 수 없어서 극도로 혼란스러웠습니다. 한없이 행복한 꼬마 아줌마 시절과 어린 시절과 소녀 시절이 동시에 몰려들어, 각 단계마다 저를 괴롭힌 걱정과 어려움은 물론, 그걸 순서대로 나열하려는 당혹감에 끝없이 시달렸습니다. 이런 상태를 안 겪은 사람이라면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그것 때문에 얼마나 커다란 불안감에 시달렸는지 모를 것 같습니다.
-똑같은 이유로 제가 혼란에 휩싸인 시기를 – 기나긴 밤 같지만 그 사이에 낮도 많고 밤도 많을 게 분명한 시기를 – 거대한 계단을 열심히 오르는데, 꼭대기까지 가려고 몸부림치는데, 예전에 정원에서 본 벌레가 바닥을 기어가다 방해물과 맞닥뜨리자 방향을 틀어서 다시 기어가던 것처럼 방향을 틀어서 다시 힘겹게 올라가던 시기를 말하는 게 두렵습니다. 침대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느낄 때도 있지만, 대체로 막연하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찰리와 얘기하고, 찰리의 손길을 느끼고, 찰리가 곁에 있다는 걸 충분히 깨달을 때도 있지만, “아, 끝없는 계단이 또 나오는구나, 찰리……또 나오고 또 나오고……하늘 끝까지 이어지는 것 같아!”라고 투덜대면서 다시 힘겹게 오를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요, 그래요, 그래! 아가씨는 내가 살짝 산만한 걸 보고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살짝 산만한 게 저엉말 이상하거든, 안 그런가요? 저엉말 혼란스럽기도 하고. 머리 쪽이. 내가 보기에도 그래요. 하지만 아가씨, 대법정에서 수많은 세월을 보내는 동안 내 눈으로 똑똑히 본 게 있다오. 책상에 있는 재판장 지팡이와 봉인.”
그게 무슨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시는데요? 제가 가만히 물었어요.
“빨아들이는 거.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거라오, 아가씨. 사람들한테서 평화를 빨아내고. 이성을 빨아내고. 선량한 표정을 빨아내고. 좋은 성격을 빨아내고. 심지어 밤에 깊이 잠자는 시간조차 빨아낸다오. 차갑게 반짝이는 악마들!”
-“아가씨, 용감한 주치의는 작위를 받아야 마땅해요. 분명히 작위를 받을 거예요. 아가씨 생각도 그렇죠?”
자격만 본다면, 그렇다. 가능성을 본다면, 아니다.
“왜요, 피츠 잔다이스?”
할머니가 매섭게 반발했어요. 저는 평화 시기에 봉사한 사람은,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한 봉사라도, 대단히 많은 돈을 국가에 헌납할 때 말고는 영국에서 작위를 내리는 전통이 없다고 대답했어요.
“맙소사, 어떻게 그런 말을? 학문, 지혜, 탁월한 인류애, 각 분야를 발전시켜서 영국을 위대하게 만든 모든 사람이 작위를 받는다는 건 아가씨도 알잖아요! 주변을 둘러보고 생각해보세요, 아가씨. 이 땅에서 작위를 훌륭하게 여기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바로 그거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내가 보기에, 아가씨 머리가 약간 산만하다는 뜻이에요!”
안타깝게도 플라이트 할머니가 자기주장을 확신하다 못해, 순간적으로 화까지 냈어요.
-펜을 먼저 받은 신랑이 십자가를 삐뚤삐뚤 그려서 서명했어요. 신부도 자기 차례에 똑같이 서명했어요. 신부는 제가 지난번에 왔을 때부터 알던 사이로, 마을에서 제일 예쁠 뿐 아니라 학교 성적도 탁월했기에 저는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어요. 그러자 신부가 옆으로 다가와서 맑은 눈에 진정한 사랑과 존경이 어린 눈물을 머금은 채, “신랑은 착하고 좋은 사람이에요, 아가씨. 하지만 아직 글씨를 못 쓰는데 – 저한테 배울 건데 – 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신랑을 창피하게 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조그맣게 속삭였어요. 노동하는 사내 딸도 이렇게 고상한 영혼을 지녔는데, 제가 두려울 게 뭐겠어요!
-수많은 일이 하나로 엮여서 저를 행복하게 한다는 사실을, 부모의 죄악이 자식에게 내려온다는 속담은 제가 아침에 겪은 공포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똑똑히 깨달은 거예요. 저 역시 여왕과 마찬가지로 순수하게 태어났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제가 태어났다는 이유로 받을 벌은 없으며, 여왕 역시 그런 이유로 받을 상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