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우리 회사엔 제작팀이 따로 있었다.
구조조정으로 제작을 모두 외주처리하고 있는 지금, 각종 방송장비는 임자없이 떠돌다가,
하나 둘씩 내 자리로 옮겨졌다.
내가 뭘 알아서가 아니라 외주관리하는 게 내 몫이라는 이유만으로.
막상 장비를 끼고 살다보니 갑자기 쓸 일이 있으면 나보고 어떻게든 해보란다.
오늘도 마찬가지.
한겨레신문사에서 베타테이프를 비디오테이프로 복사해달라고 부탁이 들어왔다.
나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연구소장은 고객관리 차원에서 Yes!!를 외쳤고,
한겨레의 한 여직원이 생글거리며 도너츠 큰 상자를 사들고 왔다.
아침을 거른 직원들이 순식간에 도너츠를 동내고,
난 별수없이 6미리 작업을 중단하고 베타와 vhs 2대랑 모니터를 새로 셋팅했다.
그런데 왠걸? 화면이 안 뜬다.
셋팅을 바꿔도? 화면이 안 뜬다.
라인이 불량인가? 라인을 바꿔도? 화면이 안 뜬다.
혹시 테이프가 불량인가? 테이프를 꺼내보니... 허걱... 디지베타였다.
순간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이미 도너츠 1상자는 사라지고 없는데... 이제와서 장비가 없으니 해줄 수 없다고 말해야 하나?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디지베타인지 베타인지도 확인 안 했냐고 바가지를 긁었으나,
자긴 외근 나왔으니 나보고 어떻게든 수습해보라며 전화를 끊는다.
이번엔 머리 위로 김이 모락 모락...
우여곡절 끝에 다른 회사 장비를 잠깐 사용할 수 있었고, 무사히 비디오 테이프를 넘길 순 있었다.
그러나 내가 먹은 건 도너츠 1개뿐인데, 딴 회사 사람들에게 밥을 사내야 한다. 우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