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조자
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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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솜씨 있는 거 인정, 베트남 전쟁과 결부된 역사의식도 통렬하다. 덕분에 다양한 주변 지식도 많이 얻었다.


하지만 말이다. 작가의 필력이 폭발하는 순간마다 여자는 사물화된다. 이 정도면 상업적 고의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아시아인이 가진 가부장제의 한계일 수도 있겠다만, 그런 변명따위 집어치우라고 악쓰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제3자 일인 양 비극조차도 객관적으로 건조하게 기술하다 말고, 온갖 묘사와 형용구와 비유가 터진 방둑마냥 처음으로 쏟아져 나온 게 오징어 얘기라니. 가슴골에 대한 집착과 끊임없는 플레이보이 잡지 타령도 지긋지긋했다. 무엇보다 고엽제 피해나 양민 학살은 딸랑 몇 줄로 요약하면서 2번의 강간 장면은 꼼꼼히 공들여 쪽수를 할당하는 게 욕지기가 나온다.


실컷 욕하고 난 뒤 그래도 좋았던 장면을 꼽자면...

어머니의 비석 장면은 애틋했다. 그 어머니가 13살 때 프랑스 신부에게 당한 걸 생각하면 더더욱 스산했다. (하지만 끝까지 아동성애변태를 편드는 어머니라니, 말이 되냐고요!!!)

베트남 전쟁에 대한 통렬한 자조. 마찬가지로 "냉전이라는 실험의 피실험자"로 희생당해 분단의 비극을 겪는 한민족으로서 당연히 공감이 간다.

성적 장면이 아닌데도 작가의 필력이 솟구쳤던 두 장면. 소니의 눈알, 만과 네이팜탄 이야기는 소름끼쳐하며 읽었다. 사실 쿠바르크 방첩활동심문서 현실판이 더 압도적이긴 했다만 내 수용치를 넘어서는 수준이라 감히 평할 수가 없고, 이 장면 때문에 퓰리처상을 탔겠구나 싶다.


<뱀꼬리>

1. 뒤마가 무어인 조상을 가졌구나. 베토벤이 흑인 외모의 특징을 가졌구나. 그렇구나. 그런데 그게 흑인운동의 한 축이 되나 의아했다가 여성 역사 발굴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기도 하고. 판단 보류 상태다.

2. 제인 폰다가 끔찍하다는 말을 쉽게 하는 거 보면 확실히 작가는 반여성주의자 같다.

3. 주석을 보다가 쯩 자매 이야기를 좀 찾아 봤는데 쯩 여왕에 대해 처음 알게 되어 감탄했다.

4. CIA가 직접 항공사도 운영했구나. 냉전 시대 미국의 방첩 활동은 확실히 미친 수준이다.

5. 베트남 작가 소설을 번역하면서 번역가는 베트남 음식점 한 번 안 가봤나? 나팔꽃 줄기 볶음이라니! 공심채(모닝글로리) 볶음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베트남 음식 중 하나인데!

6. 서구화가 잘못이라니 문화혁명이 떠오른다. 베트남도 그랬던 걸까? 요건 좀 찾아봐야겠다.

7. 이 책으로 독서모임을 하면서 구성원들은 제마다 남자 작가의 한계를 욕해댔다. 박찬욱 감독은 과연 이 작품의 어디에 꽂힌 것인지 궁금한데, 분명 오징어에 꽂혔을 거라는 이의 말이 기억에 남아 드라마를 보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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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여 오라 - 제9회 제주 4·3평화문학상 수상작
이성아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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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학살의 역사가 범람하는 책이다. 그리고 너무 과학 적대심의 역사까지 흠뻑 끼얹어져 있다. 제주 4.3항쟁 이후 벌어진 같은 민족끼리 벌어진 양민 학살과 세르비아의 보스니아 이슬람계 인종청소인 스레브레니차 학살은 "적대심"과 "학살"이라는 공통 키워드는 있으나 하나로 엮기 어려운 주제였다. 작가는 김영삼 정권 때의 남매 간첩사건과 전두환 정권 때의 구미유학단 간첩사건을 잘 버무려 가상의 간첩 조작사건을 만들어냈고, 이를 통해 2갈래 학살을 꽤나 성공적으로 하나로 엮었다.


다만 개인적인 생각은 김영삼 정권 때 벌어진 또 다른 학살사건으로 한 코룰 떴으면 어땠을까 싶다. 나와 다른 생각과 의지를 가진 자들에 대해 공권력이 벌인 과도한 적의가 미친 듯이 대학가를 점령했던 연대 항쟁과 한총련 이적단체 탄압이 그것이다. 하늘에선 헬기가 최루액과 형광액을 살포해대고, 건물의 물과 전기가 끊기고, 모든 식료품과 의약품의 반입이 차단되고, 범민족대회를 하던 2만명의 학생은 연대 안에 갇혀 절규했다. 하지만 공권력은 종북빨갱이 집단이 연대를 불법점령하여 농성을 벌이고 있다며 더욱 꽁꽁 봉쇄를 해댔고, 특공대를 동원한 강제진압 작전 결과 약 2천명의 학생이 연행되었다. 이후 운동권이든 아니든 학생회에 발을 걸친 자는 모두 이적단체 구성원으로 낙인 찍히고, 어느 날 갑자기 집이나 학교로 경찰이 쳐들어와 잡혀가면 한총련 탈퇴각서를 써야 했다. 탈퇴 각서를 쓰길 거부하는 학생 수백 명은 수배자가 되어 사방에 전단서가 붙여졌고 길게는 8년의 시간을 수배자가 되어 살아야 했다. 경찰에 쫒기다 죽은 선배, PTSD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던 후배, 누군가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고, 30-40대에 암에 걸려 죽은 이의 비율이 평균보다 높은 거 같은데 아직도 체계적인 진상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지금은 그저 학생운동이 몰락한 계기라고 서둘러 마무리지어지는 그 시간들은 지금도 깊은 흉터를 많은 이들에게 남기고 있다.


역사적 배경 지식이 없는 사람이 읽기엔 너무 무거운 소설이지만, 우연찮게 이 책을 고른 사람이 있다면 이를 계기로 학살의 기억을 나누어 가졌으면 한다. 마침 다음달은 4.3 제주민중항쟁 추모제가 있기에 핑계김에 찾아가보는 것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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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성서공단이 전부 들어서기 전, 아직은 태반이 사과 과수원이던 시절 내가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대구 능금을 열심히 먹었고, 국민학교 1학년 때 과수원이 거의 다 헐리게 되었을 때, 서울 집에도 대구에서 가져온 나무 한 그루를 심었더랬다. 안타깝게도 '흙과 날씨가 달라' 단 한 해도 열매는 열리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대구 사과는 씨가 말랐고, 성주나 영천 사과가 대구 능금 이름을 달고 팔렸다. 대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청송이나 상주 사과가 유명해졌고, 청송과 안동으로 농활 다니면서 사과와 수박을 실컷 먹었더랬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애를 낳을 무렵 문경 사과축제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동료들이 축제 다녀온 자랑을 늘어놓을 때마다 가보고 싶었지만 갓난쟁이를 데리고 갈 엄두가 안 나고, 매해 이 핑계 저 핑계 미루기만 하다 보니 작은애가 고3이 되었다. 

지금은 충주사과를 가장 즐겨 먹는다. 사과를 제일 좋아하는 손자를 위해 충북에 사는 시부모님이 즐겨 선물주시기도 하지만, 나도 과일가게를 가면 충주사과를 고른다.  

오늘 옆자리 동료가 경남 산지의 사과를 샀는데 싱싱하기만 하고 싱겁다는 얘기를 하길래, 요새 누가 경상도 사과를 먹냐고, 충주 사과가 맛있다고 추천을 하다가 문득 어라? 싶었다.

지도를 열고 사과 산지를 찍다 보니 이것도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지 싶다. 나의 손주는 북한 사과를 먹게 될까 싶어 갑자기 통일을 염원하게 된다면 주책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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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기회 - 이명랑 단편집 반올림 36
이명랑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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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쩌다 보니 좀 진지한 책들을 연달아 읽어댔다. 가볍게 머리 전환을 하고 싶어 소설을 고르는 중이었고, 이것저것 찾아보기도 귀찮아 도서관 서가에 꼭힌 책들을 손가락으로 차례대로 훓어가며 '어느 것을 고를까요 알아맞춰 보세요 척척박사님 딩동댕동' 이 짓거리를 해가며 고르는데, 연신 두꺼운 책들만 잡혔다. 몇 차례의 실패 끝에 이만하면 얄팍한데다 단편소설 모음집이라 골랐지만... 나의 목적은 아낌없이 배반당했고, 더 어지러워진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오랜만에 리뷰를 끄적인다.

<신호>를 읽을 때만 해도 경쟁에 내몰리는 아이들 이야기가 비현실적인 배경에서 다루어지는 것 같아 그럭저럭이었다. 지역간 학력 격차와 왕따 문제를 다룬 <전설> 속 두 아이는 늘 그렇듯 자살로 위장된 타살이었다.

<너의 B>를 보고 나니 안 그래도 꼴보기 싫던 샤넬 샹스 광고가 더욱 싫어졌다. 샤넬 최초로 10대 모델을 썼던 것으로 유명세를 탔던 이 제품의 가격은 35ml짜리조차 10만원이 넘는 가격이고, 4가지 종류를 대표하는 4명의 모델에서 아시아인은 배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뷰를 보면 사회초년생도 아니고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에게도 권장되는 향수란다. 부모들의 또 다른 등골 브레이커인 것이다.

<준비물>도 우울하긴 마찬가지다. 학원의 이름은 '호프'라지만 그 어디에서도 희망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게 한 편, 한 편,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다 못해 마지막 편을 읽을  때는 덩달아 침몰하는 기분이었다. <이제 막 내 옆으로 온 아이에게>는 세월호 이야기였고, 하필 지금은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대통령이 거부하냐 마냐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참이다. 

세상엔 어두운 소식이 가득하고, 미래의 희망이라는 아이들을 다룬 청소년 소설도 회색빛이다. 교복 속에 갇힌 암담함을 어찌나 잘 살렸는지 이제 막 힘겨운 학창시절을 통과한 어린 작가라 생각했는데, 나랑 1살 차이. 그녀 역시 나처럼 학부모의 삶을 살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어머니같은 측은지심과 기성세대로서의 부끄러움이 면면히 스며들어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청소년 소설이라는 딱지 떼고 부모들이 먼저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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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4-01-15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네요. 청소년 소설은 사실 부모가 먼저 읽거나, 혹은 같이 읽고 대화하면 좋겠죠.
저도 조금 더 부지런했던 시절에는 큰 아이와 함께 청소년 소설을 읽고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어느새 그런 것들 다 잊고 살고 있네요.

더 늦기 전에 아이들과 책 읽고 대화 나누는 시간을 다시 살려봐야겠어요.
조선인님 글 덕분에 잊고 있던 걸 깨우쳤네요. 고맙습니다!
 
슬픔의 방문
장일호 지음 / 낮은산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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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어쩌면 생존자의 기록이지만, 구구절절하지 않고, 담백하다. 실제 만난 그녀는 시종일관 큰 웃음을 터뜨릴 기회를 놓치지 않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만 난 그녀를 존경하기로 했다. 그녀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툭툭 자신을 드러낼 때마다 난 크게 심호흡을 했고, 존경의 마음을 담아 주홍색을 붙였다. 


앞으로 내가 배우고 생각해야 할 지점에는 하늘색을 붙였다. '빈부 격차는 어떻게 미래 세대를 파괴하는가' '우리나라에도 제로 아워 노동자가 생길 것인가 또는 플랫폼 노동자들은 이미 제로 아워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존엄한 죽음, 좋은 죽음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내가 언제쯤 답을 찾을 수 있을지 하늘 끝 만큼이나 막연하다.


그나마 내가 찾은 당장의 실천 과제에는 초록색을 붙였다. 내가 하는 모임의 회지에 가족구성원 3법에 대해 투고를 준비하게 되었고, 아무 생각 없이 없애버렸던 카드로 등록되어 있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기부도 소액이나마 되살렸다. 알라딘 장바구니에 담아둔 <가난 사파리>와 <마이 시크릿 닥터>도 얼른 구매해 읽어야 한다.


그녀가 내게 준 3가지 질문과 4가지 과제는 나를 좀 더 용감한 사람이 되게 해 줄 지도 모른다. 난 그녀가 열어둔 방문 앞에서 열심히 서성이며, 내가 꾸역꾸역 정리해 꽁꽁 닫아둔 방문을 언젠가 열어보는 날이 있을까 고심해 본다. '방문'이 door가 아니라 visit이라는 것을 샤이니 종현에 대한 글을 읽을 때에서야 깨달았지만, 난 원래 중의적으로 지은 책 제목이라고 멋대로 믿고 있다. 다만 아직은 문고리 잡는 것도 버거워 <슬픔의 방문>으로 담해북스에서 책모임을 한 다음날은 하루종일 걸어야만 했다. 언젠가 방문을 열어보는 날이 온다면 페퍼민트 레몬차를 마시고자 한다. '슬픔이 쓸모있는 다정한 미래를 함께 발명하고 싶어요'라고 다정히 서명해 준 뒤 그녀가 내 책에 붙여준 티백의 향이 오래 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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